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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예금까지 옮긴다…美은행 5000억달러 흔들 '에이전트 뱅크런' 경계
[경제일보] 인공지능(AI)이 고객을 대신해 금융상품을 비교하고 더 높은 수익을 주는 곳으로 자금 이동까지 지원하는 시대가 다가오면서 은행의 전통적인 예금 사업 모델이 시험대에 올랐다. 고객이 낮은 금리에도 돈을 그대로 두는 ‘예금 관성’이 AI 에이전트에 의해 약해질 경우 은행들은 고객을 붙잡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지급해야 하고, 이는 조달비용 상승과 순이자마진 축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자율적으로 복수의 업무를 수행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가 금융시장에 확산하면 미국 은행권이 그동안 누려온 저원가 핵심예금의 경제적 가치 약 5000억달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상장 은행 전체 시가총액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다만 5000억달러는 AI로 인해 은행에서 당장 빠져나가는 현금도, 실제 발생이 확정된 손실액도 아니다. AI가 예금자의 금리 민감도를 높여 저원가 예금이 고금리 예금이나 머니마켓펀드(MMF) 등으로 이동하면 은행은 예금금리를 높여야 한다. 그 결과 조달비용이 증가하고 미래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저원가 예금이 제공해온 경제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의미다. ◆AI가 깨우는 ‘잠자는 예금’…은행 조달구조 바뀌나 은행의 저원가 조달 기반 가운데 하나는 고객이 낮은 금리에도 예금을 장기간 유지하는 데서 형성돼 왔다. 수시입출금식 예금이나 무이자성 예금이 많이 쌓일수록 은행은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 대출과 채권 등 수익자산에 운용할 수 있다. AI가 바꿀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기존에는 고객이 여러 은행의 금리와 상품 조건을 직접 찾아 비교하고 계좌까지 옮겨야 했다. 금리 차이가 크지 않으면 번거로움 때문에 기존 계좌에 돈을 그대로 두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AI 에이전트가 이용자의 동의와 권한 범위 안에서 금융상품을 상시 비교하고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자금 이동까지 지원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금리가 조금이라도 높은 상품을 찾는 비용과 계좌 이동에 필요한 시간이 크게 낮아진다. 고객에게는 유리하지만 은행에는 부담이다. 고객 자금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높은 예금금리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저원가 예금 감소→예금금리 상승→조달비용 증가→순이자마진(NIM) 축소→미래 이익 감소→기업가치 하락이라는 경로가 형성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시장 일각에서는 ‘에이전틱 뱅크런(agentic bank run)’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전통적인 뱅크런이 금융회사에 대한 불안으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출하는 현상이라면, 에이전틱 뱅크런은 AI가 금리와 조건을 계속 비교해 자금을 더 유리한 곳으로 이동시키면서 은행의 예금 경쟁을 급격하게 높이는 상황에 가깝다. ◆美 3대 은행 무이자예금 1.6조달러…3%면 비용 470억달러 미국 대형은행이 보유한 저원가 예금 규모를 보면 AI가 가져올 변화의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다. FT에 따르면 JP모건체이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가 보유한 무이자 예금은 약 1조6000억달러에 달한다. 세 은행 전체 부채의 약 16% 수준이다. FT는 이들 예금에 평균 연 3%의 금리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했다. 이 경우 추가로 부담해야 할 이자비용은 연간 약 470억달러로 계산된다. 현재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조달하는 자금에 금리를 붙여야 한다는 의미다. 은행 입장에서 예금금리 1~2%포인트 변화가 수십억달러의 비용 차이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다. AI가 금융상품 비교와 계좌 이동의 장벽을 낮추면 금리 차이가 몇십bp(1bp=0.01%포인트)에 불과하더라도 자금 이동이 지금보다 민감해질 가능성이 있다. 은행들은 예금금리를 높이거나 수수료를 낮추고 부가서비스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고객을 붙잡아야 할 수 있다. ◆5000억달러는 저원가 예금의 ‘경제적 가치’ FT가 제시한 5000억달러도 이 같은 저원가 조달 효과를 계량화한 것이다. 계산에는 은행 인수합병(M&A) 과정에서 활용되는 ‘핵심예금 무형자산(CDI·Core Deposit Intangible)’ 개념이 사용됐다. CDI는 은행이 안정적인 핵심예금을 통해 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것보다 얼마나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 것이다. 낮은 금리의 예금이 많이 유지될수록 은행 입장에서는 조달 경쟁력이 높아진다. 금융자문회사 Mercer Capital에 따르면 올해 미국 은행 M&A에서 평가된 CDI는 핵심예금의 평균 2%대 중반 수준이었다. 최근 거래에서는 대체로 핵심예금의 2~3% 범위에서 평가됐다. FT는 이런 비율을 미국 은행권의 핵심예금에 적용해 저원가 조달이 제공하는 경제적 가치를 약 5000억달러로 추산했다. 따라서 5000억달러를 ‘AI가 은행에서 빼내는 돈’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AI 확산으로 은행들이 시장금리에 가까운 수준까지 예금금리를 높여야 할 경우 저원가 핵심예금이 제공해온 조달비용 우위가 약해지고 미래 수익과 기업가치가 그만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보면 그동안 은행에 귀속됐던 저원가 예금의 경제적 가치 일부가 더 높은 예금금리와 낮은 수수료 형태로 고객에게 이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AI 뱅크런’ 현실화까진 신뢰·규제 장벽 AI가 당장 대규모 예금 이동을 촉발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금융거래는 일반 온라인 쇼핑과 달리 본인 인증과 고객 동의, 거래 한도, 금융사별 내부통제와 소비자보호 규제를 거친다. AI가 임의로 고객의 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고객이 자신의 금융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어디까지 AI에 넘길지도 변수다. AI가 잘못된 판단으로 자금을 옮기거나 부적절한 상품을 선택했을 경우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도 해결해야 한다. 개인정보와 계좌정보 보호, 금융사기 방지, AI의 투자 판단에 대한 설명 책임도 풀어야 할 과제다. 따라서 AI가 예금 경쟁을 강화할 가능성은 있지만 금융불안에 따른 전통적인 뱅크런과 같은 현상이 단기간에 현실화될 것으로 보는 것은 과도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은행도 AI 활용…비용 절감으로 맞대응 은행이 AI 확산의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은행들은 이미 AI를 고객 상담과 신용평가, 자금세탁방지, 이상거래 탐지, 내부 업무 자동화 등에 활용하고 있다. 대출심사를 정교하게 하고 인적 오류를 줄이면 상당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은행이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면 높아진 예금 조달비용을 일부 상쇄할 여지도 생긴다. 고객별 신용위험을 세분화해 대출금리를 정교하게 설정하거나, 반복 업무와 사후관리 비용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AI는 한쪽에서는 은행의 저원가 예금 기반을 흔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비용구조를 낮춰주는 양면적인 기술인 셈이다. 당장 시장이 더 민감하게 보는 변수 역시 AI만은 아니다. 미국 금리와 경기 방향, 대출 부실 가능성, 기업의 신용위험 등이 여전히 은행 실적과 주가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AI는 기존 위험요인을 대신하기보다 은행의 예금 경쟁 구조를 중장기적으로 바꿀 새로운 변수에 가깝다. ◆한국 은행도 예외 아니다…‘저원가성 예금 경쟁’ 달라질 수도 이 같은 변화는 미국 은행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국내 은행 역시 요구불예금과 저축예금 등 저원가성 예금 규모가 순이자마진과 수익성을 좌우하는 주요 요인이다. 은행들은 저원가성 예금을 확대하기 위해 급여이체와 카드, 각종 생활금융 서비스를 묶어 고객을 주거래은행에 붙잡아 왔다. 하지만 AI가 은행별 예금금리와 수수료, 우대조건을 실시간으로 비교하고 자금 이동까지 지원하는 단계로 발전하면 기존의 ‘주거래은행’ 개념도 달라질 수 있다. 고객이 한 은행에 자금을 장기간 묶어두기보다 AI가 가장 유리한 조건에 따라 여러 금융회사로 자금을 나눠 이동시키는 환경에서는 은행도 브랜드나 고객 충성도만으로 저원가성 예금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AI가 ‘잠자는 예금’을 깨우기 시작하면 은행이 오랫동안 누려온 저비용 자금 조달의 이점 일부가 예금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며 “AI 시대 은행의 경쟁은 대출을 얼마나 많이 늘리느냐뿐 아니라 예금을 어떤 가격과 서비스로 확보하느냐에서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26-10-13 08: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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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경쟁보다 신뢰의 틀부터 세워라
[경제일보] 여당과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 20일 만나 디지털자산기본법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 방안을 논의한다. 정부도 ‘2026년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올해 하반기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지연돼 온 입법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내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법 제정의 목표가 시장 선점이나 발행 사업자 확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스테이블코인 제도의 출발점은 혁신 경쟁이 아니라 신뢰의 제도화여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원화나 달러 같은 법정화폐에 가치를 연동한 디지털자산이다. 가격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 등과 달리 지급·결제와 송금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거래 시간을 줄이고 국경 간 송금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원화 기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이름에 붙은 ‘스테이블’, 즉 안정성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발행자가 받은 돈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이용자가 원할 때 원화로 돌려받을 수 있는지, 발행사가 파산하더라도 준비자산이 보호되는지에 따라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도는 달라진다. 준비자산이 부실하거나 상환 요구가 한꺼번에 몰리면 디지털 금융상품도 전통적인 은행의 뱅크런과 같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현재 논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은행 중심 컨소시엄에 우선 허용할 것인지, 기술기업과 가상자산사업자 등 비은행에도 문호를 열 것인지에 집중돼 있다. 은행권은 금융안정과 자금세탁 방지 경험을 내세우고, 비은행권은 은행 중심 구조가 혁신과 경쟁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측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지만 발행 주체를 둘러싼 지분율 논쟁이 입법의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누가 발행하느냐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은 무엇을 지켜야 하느냐다. 발행자는 이용자가 맡긴 돈에 상응하는 준비자산을 충분히 보유해야 한다. 준비자산은 현금과 단기 국채 등 안전성과 유동성이 높은 자산으로 제한하고 발행회사의 고유재산과 분리해 보관해야 한다. 이용자가 요구하면 액면가로 신속하게 상환하도록 의무화하고, 준비자산의 규모와 구성은 정기적으로 외부 검증을 받아 공개해야 한다. 발행사가 부실해질 경우 이용자의 상환청구권을 다른 채권보다 우선 보호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사업 철수와 파산에 대비한 정리계획을 사전에 제출하게 하고 금융당국에는 검사와 시정명령, 발행 중단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해킹과 전산 장애, 자금세탁, 해외 이전에 대한 규율도 전통 금융회사에 준하는 수준으로 마련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이 지급·결제 수단으로 확산될수록 사고의 충격은 가상자산 시장에 머물지 않고 금융회사와 실물경제로 번질 수 있어서다. 해외 주요국도 산업 육성과 규제를 대립 관계로만 보지 않는다.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율은 준비자산의 완전한 뒷받침과 정기적 공시,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유럽연합은 가상자산시장법을 통해 발행자 인가와 준비자산, 상환권을 규율하고 있다. 영국도 파운드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 구성과 발행 한도를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다듬고 있다. 규칙이 분명해야 기업도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투자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곧바로 ‘디지털 화폐 주권’이나 ‘원화 국제화’와 동일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화폐의 국제적 위상은 토큰 하나를 발행한다고 높아지지 않는다. 경제의 규모와 건전성, 금융시장의 개방성과 유동성, 법치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해외에서 원화 자산을 보유하고 결제하려는 수요가 없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국내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결제 수단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성급한 발행 경쟁이 사고로 이어지면 원화의 디지털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 산업 육성을 이유로 규제를 뒤로 미루고 문제가 생긴 뒤 수습하는 방식은 금융 분야에서 특히 위험하다. 민간기업은 수익을 얻지만 대규모 환매 사태나 금융시장 불안의 비용은 결국 국민과 국가가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논어> 안연편에는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고 했다. 화폐는 신뢰의 가장 압축된 형태다. 디지털 공간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그 원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뢰 없는 화폐는 빠르게 유통될수록 위험도 더 빠르게 퍼뜨린다. 국회와 정부는 은행과 비은행 가운데 어느 쪽에 유리한 제도를 만들 것인지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발행자 자격과 준비자산, 상환 의무, 이용자 재산 분리, 외부 검증, 감독과 퇴출 절차부터 빈틈없이 정해야 한다. 그 원칙을 충족하는 사업자에게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은 가상자산 업계의 새로운 사업권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 화폐의 신뢰를 어떤 방식으로 지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혁신은 서두를 수 있지만 신뢰는 단번에 만들 수 없다. 발행 경쟁의 출발 총성을 울리기 전에 실패해도 이용자의 돈과 금융시장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방파제부터 세워야 한다.
2026-07-20 09: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