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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소요'라 부른 국회,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순 없다
[경제일보] 46년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대한민국은 아직도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 누가 최종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처럼 미완의 질문도 남아 있다. 그렇다고 1980년 5월의 역사가 다시 백지가 된 것은 아니다. 법원의 판결이 있었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이어졌으며, 계엄군의 발포와 시민 희생에 관한 숱한 기록이 축적됐다. 역사는 완결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 있는 무주공산도 아니다. 지난 13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재조명’ 공개포럼이 논란을 일으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시민단체 새역사국민운동과 공동 주최한 이 행사에서 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대표는 1980년 5월 광주를 ‘소요 사태’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 의원은 5·18이 특정 진영의 소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며 이른바 ‘성역화’ 문제를 제기했다. 국민의힘 원내지도부는 행사 전 취소를 권고했고, 논의 내용은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의원 제명을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현장에서는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까지 출동했다. 정치권의 반응을 걷어내고 본질부터 볼 필요가 있다. 5·18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기존 조사에 오류가 있다면 밝혀야 하고,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기존의 역사 서술도 수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도 질문할 수 없는 성역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의원이 제기한 문제의식 가운데 이 대목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성역을 허물겠다는 것과 사실의 토대를 허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학술적 재검토에는 조건이 있다. 기존의 결론을 뒤집으려면 기존보다 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료를 내놓거나 기존 사료의 해석이 왜 틀렸는지를 논증해야 한다. 그것이 연구다. 국가와 사법부가 수십 년에 걸쳐 확인해 온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둔 채 사건의 명칭만 바꾼다고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소요’라는 표현은 가볍지 않다. 단어에는 시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때와 ‘소요’라고 부를 때 독자가 받아들이는 역사적 주체와 책임은 달라진다. 전자는 국가권력과 시민 저항의 관계를 보게 하고, 후자는 먼저 사회질서의 혼란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특정 단어의 사용만으로 곧바로 불법이라고 규정해서도 안 된다. 정치적·학술적 표현의 법적 허용 범위는 구체적인 발언과 맥락을 놓고 판단해야 한다. 다만 법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타당한 말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국가가 함부로 입을 막지 못하도록 만든 권리이지, 말한 사람이 사실 검증과 사회적 비판에서 면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 토론회가 열린 곳은 국회다. 국회는 개인 방송의 스튜디오가 아니다. 국민의 대표가 입법권을 행사하는 헌정기관이다. 국회의원이 행사를 공동주최하고 국회 공간을 제공하면 그 주장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공적 권위가 실린다. 논쟁적인 역사 문제를 국회 안으로 가져오겠다면 그만큼 더 치밀한 근거와 반론의 기회를 준비했어야 한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사전에 토론회 취소를 권고했다는 사실 역시 가볍게 볼 대목은 아니다. 당 지도부 스스로 파장을 우려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행사가 열렸고 예상했던 논란이 현실이 됐다.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설명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정당이라면 5·18에 관한 역사적 인식 역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반대편의 물리력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행사 도중 항의와 몸싸움이 벌어졌고 경찰이 출동했다. 5·18 희생자와 유족에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을 접한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잘못된 주장에 대한 답은 상대의 마이크를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 왜곡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물리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판결문을 펼치고, 당시 군 기록을 꺼내고, 피해자의 증언과 국가 조사보고서를 제시하면 된다. 주장에 오류가 있다면 하나씩 입증하면 된다. 오히려 폭력으로 행사를 중단시키려 하면 논쟁의 초점은 역사적 사실에서 ‘표현을 탄압했느냐’는 문제로 옮겨간다. 왜곡된 주장을 반박하려다 그 주장에 피해자의 지위를 선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까다로움이 있다. 듣기 싫은 말을 견뎌야 한다. 동시에 그 말이 틀렸다면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실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사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유를 짓밟아서도 안 된다. ‘한서(漢書)’에는 하간헌왕 유덕의 학문 자세를 두고 실사구시(實事求是), 곧 사실에 근거해 옳음을 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오늘날 흔히 쓰는 이 네 글자의 무게는 역사 논쟁에서 더욱 크다. 5·18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면 ‘새롭게’보다 먼저 ‘사실에 근거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반대로 그 해석을 잘못됐다고 비판하려면 ‘불쾌하다’보다 먼저 ‘어떤 사실이 틀렸는가’를 보여줘야 한다. 역사를 둘러싼 싸움의 최종 심판자는 목소리의 크기도, 의석수도 아니다. 남아 있는 기록과 검증 가능한 사실이다. 정치권이 5·18을 진영의 무기로 이용하는 태도 역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보수정당이 5·18을 인정하는 것이 보수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도 아니고, 진보정당이 5·18을 계승한다고 해서 그 역사를 독점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5·18은 어느 정당의 사유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어떤 시행착오와 희생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공동의 역사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해야 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계속 파헤쳐야 한다. 기존 연구의 오류도 얼마든지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의문이 일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이미 확인된 역사 전체를 다시 안개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학문의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이유로 추가 연구 자체를 금기시하는 것도 건강한 역사 인식이 아니다. 역사는 성역이 돼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무한정 다시 쓸 수 있는 정치적 백지도 아니다. 따라서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그래서 한쪽만의 문제로 정리하기 어렵다. ‘학술 토론’의 이름 아래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요구되는 엄격함이 부족했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그 주장에 맞선다는 이유로 물리력을 행사했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의 방식이 아니다. 국회라면 양쪽 모두에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해야 한다. 말할 자유는 최대한 넓게 보장하되 그 말에는 근거를 요구하고, 잘못된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박하되 상대의 발언권까지 빼앗지는 않는 것. 그것이 자유민주주의가 권위주의와 다른 지점이다. 5·18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름 속에는 국가권력의 책임과 희생자의 명예,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지나온 길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면 답은 단순하다. 역사를 다시 연구할 자유는 있다. 다만 새로운 증거 없이 역사를 과거의 언어로 되돌릴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사실 앞에서 책임을 지는 자유다.
2026-08-14 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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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선 정치, 길 잃은 경제...상식과 원칙의 복원이 시급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함선이 짙은 안개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거센 파도가 배를 때리고 있지만, 조타실의 키는 고장 났고 엔진은 가열된 채 비명만 지른다. 작금의 현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정치는 죽었고, 경제는 멍들었다'는 탄식일 것이다. 경제는 불확실성이라는 늪에 빠져 방향을 잃었으며, 정치는 정쟁이라는 족쇄에 묶여 기능을 상실했다. 더 비극적인 사실은 이 두 축이 서로를 구원하기는커녕 서로의 발목을 잡아채며 동반 침몰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부침 속에서도 지금처럼 '기본'과 '상식'이 무너진 적은 드물었다. 인류의 오랜 지혜를 담은 경전들은 공통으로 '화합'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가르친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식량을 충분히 하고, 군대를 튼튼히 하며,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足食, 足兵, 民信)'을 꼽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 중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있는가. 우선, 경제의 맥박이 희미해지고 있다. 내수 침체의 골은 깊어지는데 대외 환경은 흡사 전장(戰場)을 방불케 한다. 글로벌 공급망의 급격한 재편, 격화되는 미·중 패권 경쟁, 그리고 고금리의 장기화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는 명확한 나침반을 제시해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과 적기(適期) 대응은 시장의 신뢰를 먹고 산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 정책은 시장에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규제 혁파를 외치면서도 정작 기업의 손발을 묶는 입법은 쏟아지고,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포퓰리즘의 유혹에 흔들린다. 구조개혁이라는 과제는 구호로만 존재할 뿐, 실행의 용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장이 정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의심하고 회피하는 현상은 국가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신호탄이다. 노동 문제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노동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신성한 가치이자 경제 발전의 핵심 동력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의 '유연성'과 '안전망'이라는 두 가치를 놓고 극단적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경영계는 생존을 위해 유연화를 외치고, 노동계는 생존권을 위해 보호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택일(擇一)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쌓아온 보편적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생산성이 담보되지 않는 임금 인상은 기업의 파멸을 부르고, 안전망 없는 유연화는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균형의 예술'이다. 그러나 작금의 논의는 해법을 찾는 치열한 고민 대신 진영 논리라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상대방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합리적인 대안은 설 자리를 잃는다. 원칙과 상식에 기반한 사회적 대타협은 실종되었고, 그 빈자리를 자극적인 선동과 혐오가 채우고 있다. 정치가 경제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비전을 설정하는 고도의 지적 행위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갈등을 먹고 자라는 기생(寄生) 정치가 되어버렸다. 민생은 뒷전이고 정파적 이익을 위한 입법 전쟁에만 몰두한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던 과거의 일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참담할 따름이다. 이제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 경전의 가르침대로 순리를 따르고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경제 정책은 정치가 아닌 '숫자'와 '현장'의 목소리에 기반해야 하며, 노동 개혁은 진영이 아닌 '상생'의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한다. 정치권은 서로를 향한 삿대질을 멈추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협치(協治)를 보여줘야 한다. 국민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정치가 경제를 가로막고, 경제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 기회는 준비된 자, 즉 원칙과 상식을 지키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법이다. 지금 당장 정치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경제는 다시금 성장의 엔진을 가동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준엄한 책무다.
2026-05-06 16:5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