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5건
-
-
-
경제라인 갈아치우면 정책도 달라지나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계해 온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이 물러났다. 김 실장은 지난달 31일 사의를 밝혔고 이재명 대통령은 1일 사표를 수리했다. 이 정부 초대 정책실장으로 부동산과 산업정책, 대미 관세협상 등을 조율해 온 핵심 참모가 출범 1년3개월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앞서 이 대통령은 재정경제부와 국토교통부 등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폭 개각도 단행했다.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4~28일 전국 유권자 25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38.9%로 나타났다. 취임 후 처음 30%대로 내려왔고 7주 연속 하락했다. 조사기관은 집값과 전월세 불안 등을 지지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정권이 국정 동력을 잃을 때 인적 쇄신은 오래된 처방이다. 장관과 참모를 바꾸면 국민에게 변화의 신호를 줄 수 있고 조직에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정책 실패에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을 바꾸면 정책도 달라지느냐다. 김 정책실장 개인의 공과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최근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부동산과 세제, 금융, 재정 같은 핵심 정책은 정책실장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실과 관계부처, 여당, 관료조직이 함께 논의하고 대통령의 최종 판단을 거쳐 실행된다. 결과가 좋을 때는 ‘정부의 성과’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장관이나 참모 한두 명의 책임으로 정리한다면 같은 오류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집값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목표 자체에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급과 금융, 세제 정책이 시장에 어떤 신호를 줬는지다. 대출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실수요 지원을 확대하고, 공급을 강조하면서도 재건축·재개발이나 토지 활용 문제를 놓고 정책 메시지가 엇갈리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진다. 정책을 만든 사람을 바꾸기 전에 이런 엇박자가 왜 생겼는지부터 찾아야 한다. 세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시장이 움직일 때마다 세율과 공제, 대출규제를 꺼내 들면 국민은 정책의 원칙보다 다음 규제가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정책이 시장의 기대를 안정시키는 대신 정부 발표 때마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드는 구조라면 담당 장관 교체만으로 신뢰가 회복되기 어렵다. 재정정책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생산적 재정을 내세우며 AI와 미래산업, 청년과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필요한 방향이다. 그러나 지출 확대와 국가채무 관리, 기존 사업 구조조정의 원칙이 동시에 제시되지 않으면 결국 돈을 더 쓰겠다는 메시지만 시장에 남을 수 있다. 산업정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와 AI부터 SMR·양자·우주·바이오까지 정부가 미래산업을 선정하고 금융과 세제, 연구개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전략산업 육성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산업의 승자를 모두 골라주려 하면 민간의 판단과 경쟁이 약해질 수 있다. 어느 선까지 정부가 개입하고 어디서부터 시장에 맡길 것인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정책 하나하나보다 정책을 만드는 방식에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실로 정책 결정이 집중되기 쉽다. 장관은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지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전달되는 순간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렵다. 청와대가 방향을 정하면 부처는 세부안을 만드는 집행기관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책실장과 장관을 아무리 유능한 인물로 바꿔도 한계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올라가는 조직에서는 정책 실패가 반복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이 정책은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빠르게 실행하는 참모만큼 그 정책의 위험을 냉정하게 경고하는 참모도 필요하다. 장관 역시 대통령실의 지시를 받아 적는 자리가 돼선 곤란하다. 경제부처 장관이라면 시장과 기업, 가계의 현실을 근거로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국토부 장관은 집값이 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면 그 원인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수정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한번 발표한 정책을 고치는 것을 실패나 후퇴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정책을 오래 끌고 가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거나 부작용이 확인됐다면 빨리 수정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 있는 정부다. 다만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정책을 뒤집는 것도 답은 아니다. 수정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부동산이라면 집값과 거래량, 입주 물량, 가계대출과 전월세 가격 등 사전에 정한 지표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재정사업이라면 투자 대비 생산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일자리 창출 같은 성과를 측정하면 된다.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유지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수정하겠다는 기준을 공개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정부의 체면보다 정책 효과를 앞세우는 구조다. 여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집권당이 정부 정책을 무조건 방어하면 민심의 경고가 대통령실에 전달될 통로가 사라진다. 여당은 야당보다 먼저 정부 정책의 허점을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이번 인사가 책임 회피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 정책실장이 스스로 사의를 밝혔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만큼 새로운 경제라인이 정책을 다시 정비할 기회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장관과 참모들이 기존 정책을 원점에서 점검한다면 인적 쇄신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얼굴만 바꾸고 정책 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개각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지율 38.9%라는 숫자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 차례 여론조사를 국정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7주 연속 하락이라는 흐름은 정부가 국민이 느끼는 불안을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 신호에 대한 답이 사람 몇 명을 바꾸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정권의 실패는 흔히 사람과 정책,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만든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눈에 잘 보인다. 정책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렵고,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같은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 이번 개각과 정책실장 교체가 진정한 쇄신이 되려면 새 경제팀에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주고 대통령실도 다른 목소리를 듣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수정하고, 효과가 없는 사업은 접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누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뉴스만이 아니다. 집값과 생활비 부담이 줄고 일자리가 늘고 기업이 투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인사의 성패도 결국 그 결과에서 판가름 난다.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국정 쇄신은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또 다른 인사만 기다리게 된다. 이번 개각이 남겨야 할 진짜 변화는 새 얼굴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을 스스로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부 시스템이다.
2026-09-01 12:30:00
-
대출은 막고 집값은 못 잡았다…서울은 '현금 부자 시장'이 됐다
[경제일보] 주택담보대출 문턱은 거듭 높아졌는데 서울 아파트값은 75주째 올랐다. 7월 둘째 주 상승률만 0.30%다. 전셋값도 한 주 동안 0.28% 뛰었다. 대출을 막으면 매수세가 꺾이고 집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정부의 계산은 시장에서 빗나갔다. 사라진 것은 주택을 사려는 수요가 아니라 대출이 필요한 매수자였다. 정부는 주택가격에 따라 담보대출 한도를 나눴다. 15억원 이하 주택은 최대 6억원, 15억원 초과 25억원 이하는 4억원, 25억원을 넘으면 2억원까지만 빌릴 수 있다. 20억원짜리 집을 사려면 최소 16억원, 30억원짜리 집을 사려면 28억원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취득세와 중개보수까지 감안하면 필요한 돈은 더 늘어난다. 대출 한도는 원리금을 갚을 능력보다 지금 보유한 자산의 규모를 앞세운다.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는 맞벌이 부부라도 쌓아둔 돈이 부족하면 서울의 선호 주택을 살 수 없다. 반면 소득이 많지 않아도 현금 20억원을 보유한 사람은 매수할 수 있다. 대출규제가 강화될수록 소득보다 보유자산이 주택 구입을 좌우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원리금을 갚을 사람은 밀려나고 기존 부동산과 금융자산, 부모 돈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근로소득으로 주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는 약해지고 상속과 증여, 자산 매각이 서울 주택시장의 입장권이 되고 있다. 한국은행도 같은 현상을 확인했다. 올해 1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강남 3구와 용산 등 서울 핵심지에서는 현금 등 순수 자기자금으로 거래한 비중이 높아졌고 주택담보인정비율은 낮아졌다. 서울 외곽과 경기지역에서는 금융기관 대출 의존도와 주택담보인정비율이 오히려 올라갔다. 현금을 가진 사람은 핵심지에 남았고 대출이 필요한 사람은 서울 외곽과 경기지역으로 밀려났다. 대출규제가 모든 매수자에게 같은 강도로 작용한 것이 아니다. 자산가에게는 불편에 그쳤지만 무주택 실수요자에게는 시장 진입을 막는 벽이 됐다. 은행 대출이 막히자 주식과 채권을 판 돈이 서울 주택시장으로 들어왔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주식과 채권 매각대금 가운데 주택 구입에 사용된 돈은 3조7254억원에 달했다. 약 66%인 2조4000억원이 서울로 향했다. 강남구에 3700억원, 송파구에 3500억원, 서초구에 2900억원이 들어갔다. 강남 3구에만 1조원이 넘는 돈이 몰렸다. 지난해 서울 주택 매입에 투입된 증여·상속 자금도 4조4407억원에 달했다. 전년 2조2823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대출이 줄어든 자리를 금융자산과 부모 자산이 메웠다. 정부가 은행 문을 좁힐수록 주식과 부동산을 가진 집안의 자녀가 유리해졌다. 같은 소득을 받는 두 사람이 있어도 부모에게 수억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서울 아파트를 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외곽으로 밀려난다. 대출규제는 가계의 부채를 줄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부모의 재산에 따라 자녀 세대의 주거지가 갈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15억원이라는 대출 기준선은 가격 움직임까지 바꿨다. 올해 2월부터 5월 중순까지 서울 아파트 거래의 81.6%가 15억원 이하 주택에 몰렸다. 15억원 이하에서는 6억원을 빌릴 수 있지만 가격이 15억원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대출 한도가 4억원으로 줄어든다. 집값이 몇천만원 오르는 순간 매수자가 추가로 준비해야 할 돈은 2억원 이상 늘어난다. 대출을 이용해야 하는 매수자는 15억원 이하 매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서울 외곽의 중저가 아파트가 15억원을 향해 오르는 이유다. 정부가 만든 기준선이 집값을 누르기보다 그 아래 가격대의 수요를 끌어모으고 있다. 15억원을 넘어선 주택은 현금 동원력이 있는 사람들의 거래 영역으로 넘어간다. 고가 주택시장도 오래 얼어붙지 않았다. 규제 직후에는 거래가 급감했지만 수개월 뒤 다시 살아났다. 현금 매수자는 대출금리와 한도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핵심지 매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산가가 신고가에 주택을 사면 그 거래가 같은 단지와 인근 지역의 시세가 된다. 거래량이 줄었다고 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대출을 쓰는 수백 명이 시장에서 이탈해도 현금 거래 몇 건이 최고가를 새로 쓸 수 있다. 매수자의 수는 줄었지만 남은 매수자의 자금력은 더 강해졌다. 서울 핵심지에서는 거래 감소와 가격 상승이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 살 수 있는 서울 아파트는 100채 가운데 8채도 되지 않는다. 올해 1분기 중위소득 가구가 구입할 수 있는 서울 아파트는 전체의 7.8%에 그쳤다. 해당 지표는 자기자금 30%와 주택담보인정비율 70%를 전제로 산출됐다. 서울에 실제 적용되는 대출규제는 더 강하다. 무주택 중산층이 체감하는 장벽은 통계보다 높다. 정부는 집값을 낮추겠다며 무주택자의 구매력부터 낮췄다. 공급은 부족하고 선호지역의 매물은 한정돼 있는데 돈줄만 조이면 집값보다 매수자의 얼굴이 먼저 바뀐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던 사람은 빠지고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이 남는다. 금융규제로 아파트를 지을 수는 없다. 직장과 교통, 교육 여건이 갖춰진 지역에 새 주택을 충분히 공급하지 않은 채 대출만 막으면 희소한 주택은 돈 많은 사람의 몫이 된다. 서울 집값을 떠받치는 공급 부족과 선호지역 쏠림을 그대로 둔 채 금융권만 압박한 대가가 지금의 현금 부자 시장이다. 상환 능력을 따지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과 주택가격만 보고 대출액을 자르는 절대 한도도 같은 잣대로 운용해서는 안 된다. 고소득 무주택자가 실거주 목적으로 처음 집을 사는 경우와 다주택자가 추가 주택을 매수하는 경우를 똑같이 막으면 자산을 이미 가진 사람만 유리해진다. 대출이 막힌 수요는 서울 외곽과 수도권의 대출 가능 주택으로 이동했다. 해당 지역의 집값이 오르자 정부는 다시 규제지역을 확대했다. 수요는 인접 지역으로 옮겨갔고 규제는 뒤를 쫓았다. 정부가 지역을 옮겨 다니며 대출을 조이는 동안 서울 핵심지는 현금 자산가의 시장으로 남았다. 집값을 잡겠다며 대출을 막았지만 집값은 남고 무주택자만 밀려났다. 대출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서울 주택시장의 문이 닫혔고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의 구매력은 그대로다. 주식과 채권을 팔 수 있는 사람, 부모에게 수억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기존 주택을 처분해 거액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만 핵심지 거래에 참여한다. 서울 주택시장에서 소득이 차지하던 자리를 현금과 증여가 대신하고 있다. 대출규제가 이 흐름을 계속 강화한다면 ‘현금 부자 시장’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에 머물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으로 굳혀 놓은 시장이 된다.
2026-07-22 08:00:25
-
한국 주택정책의 딜레마: 공급 확대의 역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늘 공급 확대를 말한다. 집값을 잡으려면 결국 더 지어야 한다는 말도 되풀이한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주택정책은 출발점에서부터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다. 집을 짓겠다고 하면서, 집을 짓기 위한 첫 관문인 이주 단계의 자금줄부터 죄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2026년 1월 27일 공개한 조사에 따르면, 올해 이주를 앞둔 서울 정비사업 43곳 가운데 39곳, 곧 91%가 대출규제로 이주비 조달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숫자가 이미 현실을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단순한 ‘대출 금지’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전역이 투기과열지구로 묶인 상황에서 정비사업 이주비에도 1주택자 LTV 40%, 다주택자 LTV 0%, 대출 한도 6억 원이라는 잣대가 작동하고 있다. 1주택자는 부족하고, 다주택자는 막히고, 사업지는 멈춘다. 정책은 서류상으로만 일관되고, 현장에서는 병목으로 나타난다. 공급을 늘리겠다는 언어와 공급의 마지막 문턱을 잠가 버린 금융 현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정비사업에서 이주비는 부수적 비용이 아니다. 철거와 착공으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 사업비다. 주민이 빠져나가지 못하면 철거도 없고, 철거가 없으면 착공도 없으며, 착공이 없으면 입주도 없다. 그런데도 정책은 이 돈을 일반 가계대출의 틀 안에 넣어 다룬다. 논어의 “명불정즉언불순(名不正則言不順)”이라는 말이 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주비를 가계대출이라 부르는 순간, 정책의 이름표부터 잘못 붙는다. 이름이 잘못되니 처방도 어긋난다. 서울시가 아예 “이주비는 가계대출 아닌 필수 사업비용”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별도 기준 적용을 건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행정의 움직임이다. 서울시는 2월 26일 이미 주택진흥기금 500억 원을 편성해 이주비 융자지원을 하겠다고 밝혔고, 4월 13일에는 SH가 참여하는 공공재개발 구역에 대해 이주비 대출이 막힌 세대에 최대 3억 원까지 융자하는 공공참여 방안도 내놨다. 이어 4월 16일에는 서울시가 조합의 초기 자금난(설계비·운영비)을 막고자 별도의 저리 융자(180억 원) 공고까지 내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현재 금융 규제의 역설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주비만이 아니다. 정부는 부동산 PF의 허약한 체질을 손보겠다며 시행사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고 있다. 2024년에는 자기자본비율을 20~4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을 제시했고, 2025년 말에는 PF대출 시 ‘사업비 대비 자기자본비율 20%’를 기준으로 금융회사의 위험가중치와 충당금, 대출 취급 여부를 차등화하는 방안을 내놨다. 취지는 옳다. 자기 돈은 적게 넣고 남의 돈으로만 밀어붙이는 무책임한 개발은 줄여야 한다. PF 부실의 대가를 국민경제가 되풀이해 치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책은 늘 연결로 평가받아야 한다. 자기자본 규제를 강화하면서 이주비까지 가계대출처럼 묶어 버리면, 현장에서는 ‘건전성 강화’가 아니라 ‘착공 전 질식’으로 체감된다. 자본 여력이 큰 사업장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중소규모 사업장, 사업성이 약한 지역, 주민 갈등이 큰 구역은 먼저 주저앉는다. 결과적으로 살아남는 곳만 더 빨라지고, 필요한 곳일수록 더 늦어진다. 시장 원리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공급의 양극화를 키우는 셈이다. 최근 강화된 안전·품질 규제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조달청은 2025년 9월 건설안전 평가를 가점제에서 배점제로 바꾸고, 중대재해 업체에 대한 감점을 신설했으며, 정기안전점검 대상을 콘크리트 강도와 철근배근까지 확대했다. 레미콘 품질시험 횟수도 늘리고, 층별 콘크리트 강도를 직접 확인하는 방식으로 품질 점검을 강화했다. 국토교통부도 2026년 2월 건축자재 품질인정제도를 손질해 화재 안전을 더 강화했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필요하다. 안전과 품질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문명국가라면 결코 후퇴할 수 없는 기준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정교해야 한다. 안전과 품질 기준을 높이면 공사기간과 비용도 함께 움직인다. 실제로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2026년 건설경기가 본격 회복되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로 안전·품질 관련 규제 강화와 공사비 상승을 함께 짚었다. 다시 말해 안전 규제를 강화할수록, 그만큼 자금과 일정 관리의 정합성도 함께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안전은 더 엄격하게, 금융은 더 정밀하게 가야지, 안전은 조이고 돈줄도 함께 막아 놓고 공급을 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본말전도다. 가계부채 관리는 중요하다. PF의 방만함을 바로잡는 일도 중요하다. 안전과 품질을 강화하는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성격의 문제를 같은 칼로 자르면 정책은 편해 보여도 현실은 망가진다. 실수요자의 생계대출과 투기성 차입, 정비사업의 이주비와 PF의 자기자본은 성격이 모두 다르다. 다르면 다르게 다뤄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고, 그것이 기본이다. 공급을 원한다면 이주비부터 일반 가계대출과 분리해 보아야 한다. 위험을 줄이려면 시행사의 자본 규율은 강화하되, 착공 직전 필수비용은 공급정책의 관점에서 따로 설계해야 한다. 공급은 발표문에서 늘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움직이고, 현장이 움직이고, 자금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 비로소 늘어난다. 정말 공급을 원한다면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 얼마나 많이 짓겠다는 말보다 먼저, 왜 아직 첫걸음조차 못 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책이 시장을 이기려면 구호보다 순서가 맞아야 한다. 지금 한국 주택정책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구호가 아니라, 더 정확한 분류와 더 정직한 연결이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2026-04-20 07: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