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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의 완수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는 시대의 단상
대한민국 경제사의 한 페이지가 매듭지어졌다. 삼성가(家)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산에 부과된 상속세 12조원을 5년에 걸쳐 완납했다는 소식이다. 12조원. 이는 우리 국가 전체 상속세연간 세수보다도 월등히 많은 그야말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납세액이다. 여기에 1조원 규모의 의료 지원과 2만 3천여 점에 달하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까지 더해졌다. 재계와 언론은 이를 두고'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번 삼성의 상속세 완납 소식을 접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마땅히 환영하고 박수칠 일임에는 분명하다. 막대한 자금이 국가재정으로 유입되어 복지와 의료 인프라의 마중물이 될 것이고 기증된 문화재는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법에 정해진 세금을 내는 당연한 행위'가 왜 이토록 특별한 귀감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 특별해 보이는 시대, 우리는 그동안 재벌가의 변칙과 편법에 너무 익숙해져 있 었던 것은 아닌가."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에서 재벌의 상속은 늘 논란의 중심이었다. 공익법인을 통한 편법 승여,일감 몰아주기, 복잡한 지배구조를 이용한 세금 회피 등 '세금 없는 대물림'은 재계의 고질적인 악습이었다. 상속세 납부 고지서를 받아 들면 어떻게든 이를 줄여보려 법의 허점을 찾는 것이 마치 경영 능력의 일부인 양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법과 원칙에 따라 12조원이라는 거액을 묵묵히 분납해온 삼성의 행보가 역설적으로 '신선한 충격'이자 '찬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삼성이 보여준 이번 모습은 단순히 '돈을 냈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유족들이 상속세 신고 당시"세금 납부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밝힌 점은 우리 사회의 상식적인 기본 원칙을 재확인한 선언이었다. 12조원이라는 금액은 삼성 일가에게도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식 담보대출을 받고 개인 자산을 매각하며 납부 기일을 지킨 것은 기업가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준 대목이다. 이는 과거의 구태의연한 방식과 결별하고 '국민 기업'으로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특히 의료 지원과 문화재 기증은 상속세 납부라는 법적 의무를 사회적 기여라는 차원으로 승화 시켰다. 7000억원을 출연해 중앙감염병병원을 건립하고 소아암·희귀질환 환아들에게 3000억원을 기탁한 것은 국가가 미처 다 살피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기업이 보완하는 훌륭한 사례다. 또한 '이건희 컬렉션'의 환원은 문화유산의 사적 소유를 공적 향유로 전환한 일대 사건이다. 이는 창업주 이병철 회장부터 이어져 온 '사업보국(事業報國)'과 '문화보존'의 철학이 이재용 회장 세대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삼성이 잘했다는 칭찬 너머의 과제다. 이번 사례가 삼성이라는 특정 기업의 일회성 미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다른 기업인들에게도 '상속세 납부는 피할 수 없는 비용이 아니라 기업 성장의 결실을 국가와 나누는 정당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어야 한다. 탈세와 편법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성실 납세를 명예로 여기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당연한 일을 하고도 찬사를 받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 기업인들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제 우리 경제는 규모 면에서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에 걸맞은 기업가 정신과 시민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할 때다. 삼성의 이번 행위가 기업 상속 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른 대기업들과 자산가들도 이번 사례를 본보기 삼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당당하게 책임을 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대신 어떻게 하면 투명한 승계 과정을 통해 기업을 지속 가능하게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경영의 도(道)'다. 결론적으로 삼성가의 상속세 완납은 우리 사회에 '기본과 상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당연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투명하고 공정한 원칙에 목말라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번 일이 일시적인 화젯거리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기업 문화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앞으로 기업인들은 "당당하게 벌고 정직하게내라. 그것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삼성 일가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래에 '당연한 납세'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 상식적인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해 본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 선진국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일상이 되는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2026-05-03 16:26:11
노동절 첫 공휴일,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일터의 현실이다
[경제일보] 5월 1일이 붉은색 공휴일로 달력에 새겨졌다. 노동의 가치를 국가가 공인하고 휴식권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는 그럴듯하다. 정치권과 노동계는 환호작약하며 역사적 성과라 자축하기 바쁘다. 하지만 달력의 색깔이 붉게 물들었다고 현장의 팍팍한 삶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 더 쉬는 권리보다 절박한 것은 매일 출근해야 하는 일터의 척박한 생존 조건이다. 축포를 쏘아 올리고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우리 노동시장이 앓고 있는 구조적 중병이 너무나도 깊다. 당장 눈앞에 거대한 장벽처럼 버티고 있는 것은 끔찍한 노동시장 이중구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사이의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노동절 공휴일 지정은 철저히 1차 노동시장의 성곽 안에 머무는 기득권에게만 달콤한 혜택이다. 2차 노동시장에 갇힌 하청 노동자나 영세 사업장 근로자에게 오늘 하루는 그저 뼈저린 상대적 박탈감을 재확인하는 시간일 뿐이다. 쉬는 권리마저 소속과 고용 형태에 따라 철저히 계급화된 현실을 방치한 채 노동 존중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기만이다. 전통적인 근로기준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새로운 노동 계층의 소외는 더욱 심각하다. 거리를 질주하는 배달 플랫폼 노동자나 불안정한 계약에 묶인 프리랜서들에게 법정 공휴일은 딴 세상 이야기다. 이들은 쉴 권리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노동의 형태는 빛의 속도로 변하는데 제도는 수십 년 전의 낡은 틀에 갇혀 혁신의 발목을 잡고 약자의 희생을 강요한다. 청년 세대의 무력감은 이 위선적인 노동 구조를 가장 뼈아프게 찌른다. 번듯한 양질의 일자리 진입 장벽은 기득권의 철통같은 방어에 막혀 끝없이 높아졌다. 아예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청년에게 노동절 휴일 확대는 그들만의 배부른 잔치일 뿐이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휴일 확대 같은 사치스러운 논쟁보다 당장 내일 아침 출근할 직장이 절실한 세대다. 노동의 권리란 현재 일하는 자들의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자 하는 미래 세대의 출발선부터 공정하게 닦아주는 과업이어야 한다. 현장 밑바닥을 지탱하는 중소기업과 영세 소상공인들의 비명도 외면할 수 없다. 정책 입안자들은 선심 쓰듯 휴일을 늘리지만 그로 인한 경제적 청구서는 고스란히 힘없는 경제 약자들에게 날아든다. 당장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해 기계를 세워야 하고 턱없이 치솟는 휴일 근로 수당에 짓눌려 폐업을 고민하는 것이 밑바닥 실물 경제의 진짜 모습이다.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논할 수는 없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해야 노동의 권리도 비로소 굳건해진다. 무엇보다 참담한 것은 아침 출근길이 저녁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지 못하는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안전망이다. 매년 노동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참혹한 산업재해 사망 소식은 이 나라 노동 인권의 얄팍한 밑천을 여실히 폭로한다. 위험하고 더러운 업무를 하청에 떠넘기고 노동자의 목숨값을 하찮은 비용으로 치부하는 악습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공휴일 지정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경직된 호봉제에 갇힌 낡은 임금 체계 역시 시급히 뜯어고쳐야 할 적폐다. 일한 만큼 성과를 낸 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연차만 쌓이면 월급이 올라가는 구조는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신규 채용을 억제하는 주범이다. 직무의 가치와 개인의 성과에 맞게 보상하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구조조정 없이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주고 공정성을 회복하는 생존의 문제다. 이제 정치권과 정부는 허울뿐인 선언적 치적에서 깨어나야 한다. 휴일 하루 늘어난 것을 노동 개혁의 완성인 양 포장하는 얄팍한 정치 공학부터 쓰레기통에 버려야 마땅하다. 진정한 노동 개혁의 성과는 붉은색 달력이 아니라 노동 시장의 낡고 썩은 구조를 허무는 용기 있는 결단에서 나온다. 정치는 표 계산을 멈추고 노사 양측은 움켜쥔 기득권을 내려놓고 뼈를 깎는 타협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노동절 첫 공휴일 지정은 끝이 아니라 처절한 반성의 출발점이다. 일하는 모든 이가 생명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퇴근하고 땀 흘려 기여한 만큼 공정하고 투명하게 보상받는 일터를 만드는 것. 기득권의 철밥통을 깨고 청년들에게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 노동절의 진짜 의미는 달력의 휴일을 세는 것이 아니라 이 당연하고 묵직한 상식을 대한민국 현장의 현실로 만들어내는 데 있다.
2026-05-01 17: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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