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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기다리는 시간도 규제다
[경제일보] 정부가 규제와 인허가에 발이 묶인 7조9000억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앞당기기로 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전기차 생산라인 전환을 비롯해 청정수소, 이차전지, 첨단센서 등 현장에서 대기 중인 투자 프로젝트의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이 골자다.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따로 발주하던 전기·통신공사의 통합발주도 허용하기로 했다. 방향은 옳다. 정부가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산업정책은 이미 투자할 의사가 있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일이다. 이번 대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현대차 울산공장이다. 현대차는 약 4조원을 들여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을 자율주행 전기차 중심 공장으로 재건축할 계획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사업계획 심의와 환경·교통·재해 영향평가, 건축·안전 관련 인허가 등을 거치면 행정절차에 3년 이상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와 울산시는 전담 프로젝트매니저(PM)를 두고 각종 영향평가와 인허가를 동시에 진행해 이를 1년 이내로 줄이겠다고 했다. 여기서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필요한 심사를 생략하지 않고도 1년 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과 안전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장을 빨리 짓겠다고 환경영향평가를 없애거나 산업안전 기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 주민의 재산권과 생활환경도 보호해야 한다. 이번 대책 역시 관련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고 사전 컨설팅을 통해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없애야 할 것은 안전장치가 아니라 행정의 군더더기다. 부처와 기관마다 비슷한 자료를 요구하고 앞 단계의 절차가 끝나야 다음 심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다면 이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다. 행정기관끼리 협의할 일을 기업이 서류를 들고 돌아다니며 해결하도록 하는 것도 정상적인 행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규제의 비용은 행정수수료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업에는 시간이 곧 비용이다. 특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바이오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산업에서는 그렇다. 경쟁국 기업이 공장을 짓고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동안 국내 기업이 인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1~2년의 차이가 시장점유율을 바꿀 수 있다.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경쟁력의 문제가 된다. 세계 각국이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은 반도체와 AI, 배터리 등 전략산업을 자국에 끌어들이기 위해 보조금과 세제지원, 산업 인프라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한국은 애국심 때문에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인건비와 세금, 인재, 시장 접근성, 규제 그리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따져 투자처를 정한다. 한국이 경쟁해야 할 것도 결국 이런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규제개혁의 성적표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역대 정부는 출범할 때마다 규제혁신을 내걸었다. 폐지하거나 개선한 규제의 숫자를 성과로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에는 규제 몇 건을 없앴느냐보다 투자 결정에서 공장 가동까지 몇 달이 걸리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규제개혁의 성적표를 ‘폐지 건수’보다 ‘줄어든 투자 대기시간’으로 매겨보자는 것이다. 오래된 규제를 정기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장치도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환경, 공정한 시장질서를 지키는 규제는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 반면 기술과 산업구조가 바뀌었는데 과거의 이해관계나 행정편의 때문에 남아 있는 규제라면 존치 이유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기업에 규제 철폐의 필요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부도 그 규제를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첨단산업의 기반시설은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기업이 지을 수 있지만 송전망과 용수망까지 기업 혼자 해결하기는 어렵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없다면 들어설 수 없다. 산업용지와 전력·용수·통신망, 연구개발 기반과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곳에서 더 커져야 한다. 노동시장도 달라진 산업환경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제조업과 연구개발, 정보기술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 모두 다른 만큼 노사 합의를 전제로 업종과 업무 특성에 맞는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히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생산성과 직무의 가치를 보다 잘 반영하는 임금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다만 노동 유연화가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오래가기 어렵다. 기업의 인력 운용에 선택지를 넓혀준다면 실직과 전직 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할 고용안전망과 재교육 체계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유연성과 보호를 서로 반대편에 세워놓고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는 개혁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세제에서는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전략기술과 연구개발에 대한 세액공제는 기업의 장기 투자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지원 규모 못지않게 제도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도 중요하다.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이라면 몇 년 뒤 투자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어떤 기업과 기술이 성공할지를 대신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장과 기업가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운동장을 만들고 민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기반시설과 기초 연구개발을 책임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보다 ‘기업이 뛰기 좋은 정부’가 필요한 이유다. 규제완화의 목적도 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업 투자가 늘고 생산성이 높아져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업이 거둔 성과가 임금과 가계소득, 소비로 이어질 때 규제개혁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기업 활력과 민생은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규제개혁에도 적용할 만한 원칙이다. 힘 있는 대기업이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예외를 만들어주는 것이 규제개혁이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같은 기준 아래 필요한 행정서비스를 예측 가능한 시간 안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7조9000억원 투자지원 대책은 그런 의미에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 현장의 애로를 찾아 규제와 행정절차를 손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이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여러 행정절차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면 다른 공장에서는 왜 안 되는가. 반도체 팹에서 불필요한 공정 지연을 줄일 수 있다면 다른 첨단산업에도 비슷한 규제가 남아 있지는 않은가. 기업이 정부에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행정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규제는 필요한 곳에서는 단단해야 하고 필요 없는 곳에서는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 안전과 환경, 시장의 공정성을 지키는 기준은 낮춰서는 안 된다. 대신 투자와 혁신을 가로막으면서도 정책 목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절차는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남겨둘 필요가 없다. 기업에 투자하라고 주문하기 전에 기업이 투자하기 어렵게 만든 정부 자신의 절차부터 살펴야 한다. 한국 경제에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거창한 성장 구호가 아니다. 투자할 기업이 제때 공장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며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규제개혁의 성패는 없앤 규제의 숫자가 아니라 앞당겨진 투자와 높아진 생산성, 새로 생긴 일자리로 평가받아야 한다. 7조9000억원의 현장대기 투자를 움직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행정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의 속도를 정부의 절차가 늦추는 일부터 없애야 한다.
2026-10-02 11: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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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빅테크의 한국행, 공짜 투자는 없다
[경제일보] 미국 빅테크의 투자를 한국으로 끌어오겠다는 정부의 구상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 등을 만난다. 삼성전자, SK, 현대자동차그룹 등 국내 기업 총수들도 함께한다. 청와대는 단순한 양해각서를 넘어 전략적 제휴, 장기계약, 실질적인 투자 성과를 이끌어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출국을 앞두고 이번 방문은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늘리는 자리가 아니라 미국 기업이 한국 투자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자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브로드컴과 오픈AI, 앤트로픽, 엔비디아 등을 상대로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미국 빅테크에 돈을 들고 찾아가는 외교에서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외교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의미다. 방향은 옳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 기반, 빠른 통신망, 높은 교육 수준을 갖고 있다.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도 반도체와 기계·장비 수출에 힘입어 전 분기 대비 0.6% 성장했다. 건설투자가 부진한 가운데 수출이 경제를 떠받쳤다는 것은 한국 산업의 힘과 약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반도체는 강하지만, 국내 투자와 내수의 온기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와 연구소, 클라우드 거점을 유치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투자는 애국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엔비디아와 오픈AI가 한국을 좋아해서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정상과 기업인이 악수했다고 공장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기업은 전력 가격과 공급 안정성, 인허가 속도, 세금, 인재, 시장 접근성, 데이터 규제를 계산한다. 한국이 경쟁국보다 더 나은 수익과 더 적은 불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면 빅테크의 돈은 미국이나 일본, 싱가포르, 중동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내줘야 할까. 먼저 내줄 것은 속도다. 공장을 짓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하기까지 몇 년씩 허가를 기다려야 하는 나라에 초대형 투자가 들어오기 어렵다. 환경과 안전 기준을 낮추라는 뜻이 아니다.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돌며 같은 서류를 반복해서 내는 행정,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규제, 허가 일정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걷어내야 한다. 빅테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엄격한 규제보다 예측할 수 없는 규제다. 두 번째로 내줄 것은 전력과 기반시설이다. AI 데이터센터는 반도체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막대한 전기와 냉각용수, 통신망, 변전소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외치면서도 송전망 건설과 전력 공급 결정을 미룬다면 투자 유치 구호는 공허해진다. 전력을 기업에 싸게 퍼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업이 부담할 비용과 정부가 구축할 기반시설,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전력조달 방식, 지역사회에 돌아갈 이익을 사전에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세 번째는 시장이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에 데이터센터와 연구개발 거점을 두면 정부와 공공기관, 금융·의료·제조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공공부문의 AI 도입을 국내 기업 보호라는 명분 아래 무조건 막아도 안 되고, 반대로 해외 플랫폼에 통째로 넘겨서도 안 된다.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이 공동으로 제품을 만들고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개방형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 세제 혜택도 필요하다. 경쟁국들이 법인세 감면과 부지, 전력, 정책금융을 한 묶음으로 제공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시장원리를 외치며 빈손으로 기다릴 수는 없다. 다만 보조금은 투자 발표가 아니라 투자 이행에 지급해야 한다. 공장 착공과 고용, 국내 조달, 공동 연구개발 등 약속이 실제 집행되는 단계마다 혜택을 나누는 방식이 옳다. 일자리도 기술도 남기지 않는 서버 건물 하나를 유치하기 위해 세금과 전력을 무제한 제공하는 것은 투자 유치가 아니라 임대업에 가깝다. 내주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하다. 첫째는 데이터 주권이다. 의료와 금융, 공공행정, 산업기술 데이터가 해외 기업의 폐쇄된 플랫폼 안에 갇히면 한국은 AI를 사용하는 나라는 될 수 있어도 AI를 통제하는 나라는 되기 어렵다. 민감정보의 저장 위치와 처리 방식, 제3국 이전, 정부의 감독권은 협상 가능한 부수 조건이 아니다. 둘째는 규제 면책특권이다. 빅테크의 투자가 크다고 해서 개인정보 보호나 공정경쟁, 저작권, 소비자 보호 기준까지 면제해서는 안 된다. 국내 기업에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면서 해외 기업에는 투자 유치를 이유로 예외를 준다면 시장은 기울어진다. 규제는 단순해야 하지만 공평해야 한다. 셋째는 국내 산업의 성장 기회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 시장과 전력, 데이터를 이용하면서 국내 클라우드·소프트웨어·AI 스타트업을 하청업체로만 남겨서는 안 된다. 투자 협약에는 국내 기업의 공급망 참여, 대학·연구기관과의 공동 연구, 국내 인재 채용과 교육, 한국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 지원이 포함돼야 한다. 한국이 제공한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부가가치가 모두 본사로 빠져나가는 구조라면 투자액이 아무리 커도 국익은 작다. 노자는 ‘도덕경’ 36장에서 “장차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固與之)”고 했다. 투자를 얻으려면 한국도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많이 주느냐 적게 주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주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다. 한국이 줘야 할 것은 신속한 행정과 안정적인 전력, 예측 가능한 세제, 매력적인 시장이다. 내줘서는 안 될 것은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과 공정한 경쟁질서, 국내 산업이 성장할 몫이다. 전자는 투자의 기반이고, 후자는 국가의 주권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빅테크 투자 유치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 기업의 건물과 서버를 대신 지어주는 사업으로 전락한다. 정부는 이번 정상외교의 성과를 투자금액 한 줄로 발표해서는 안 된다. 어느 지역에 무엇을 짓는지, 전력과 물은 누가 얼마를 부담하는지, 국내 기업은 어떤 공급망에 참여하는지, 몇 명을 고용하고 어떤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지까지 공개해야 한다. 투자 유치의 성적표는 협약서에 적힌 달러가 아니라 한국에 남은 기술과 일자리, 세수와 수출로 작성돼야 한다. 미국 빅테크의 한국 투자는 구걸할 대상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다.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맞추는 거래다. 한국은 반도체와 제조업, 시장과 인재라는 귀한 카드를 갖고 있다. 그 카드를 헐값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들어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빅테크를 불러오는 데 공짜 점심은 없다. 그렇다고 식당과 주방까지 넘길 필요도 없다. 문은 열되 집문서는 지키는 협상, 그것이 AI 정상외교가 갖춰야 할 국익의 원칙이다.
2026-07-24 07: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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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정상외교의 빛과 그림자…국내 산업 뿌리 남겨야
[경제일보] 대통령이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의 중심으로 간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를 차례로 만날 예정이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SK그룹 최태원 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 등 국내 기업인들도 합류한다. 정부가 주최하는 AI 서밋에서는 양국 기업 간 협약이 체결되고, 글로벌 AI 협력 방향을 담은 선언도 발표될 예정이다. 참석자의 면면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반도체를 공급하는 엔비디아와 브로드컴, AI 모델을 만드는 오픈AI와 앤트로픽, 메모리와 제조 역량을 가진 삼성전자와 SK, 피지컬 AI의 거대한 실험장이 될 현대차가 한자리에 모인다. 한국이 세계 AI 생태계의 변방이 아니라 핵심 공급망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상외교가 기업 간 장벽을 낮추고 투자와 기술협력의 문을 여는 일은 마땅히 환영할 일이다. AI 산업은 한 나라가 모든 기술을 독자적으로 갖추기 어려운 거대한 결합체다. 그래픽처리장치와 메모리, 파운드리,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거대언어모델, 전력과 냉각 설비가 맞물려야 한다. 한국이 미국 빅테크와 손잡지 않고 AI 경쟁의 속도를 따라잡겠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기술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동맹은 악수로 완성되지 않는다. 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가져오는지, 그 결과가 어느 나라의 공장과 연구소, 일자리와 세수로 남는지를 따져야 한다. 정상외교의 성과를 협약 건수나 투자 금액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해외에서 박수를 받은 양해각서가 국내 산업의 뿌리를 약하게 만든다면 외교적 성과는 산업적 비용으로 돌아온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방문을 앞두고 산업통상부 장관도 워싱턴으로 향했다. 김정관 장관은 미국 상무·에너지 당국과 한국 기업의 대미 전략투자, 에너지·자원 협력 등을 논의한다. 정부는 한미전략투자특별법에 따라 대미 투자사업을 구체화하고 있고, 현재 논의되는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은 3500억달러 규모다. 같은 시기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AI 기술협력을 넓히고, 워싱턴에서는 한국 자본의 미국 투자를 협의하는 셈이다. 미국에 투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대 시장에 공장을 짓고 현지 고객과 가까워지는 것은 기업의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관세와 보조금, 조달 규정이 기업의 입지를 좌우하는 시대에는 현지 생산도 경쟁력의 일부다. 미국 시장을 지키기 위한 투자를 애국심만으로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문제는 균형이다. 해외 공장을 하나 세울 때 국내 공장 하나가 사라지고, 해외 연구소를 키울 때 국내 인재 채용이 줄어드는 구조가 고착돼서는 안 된다. 대기업이 생산시설을 옮기면 협력업체와 장비업체, 물류와 지역 상권도 함께 움직인다. 산업 공동화는 어느 날 공장 문에 붙은 폐업 공고로 시작되지 않는다. 국내 증설이 미뤄지고, 신규 채용이 줄고, 핵심 연구조직이 해외로 이동하는 작은 변화가 쌓여 어느 순간 산업 생태계 전체의 빈자리로 나타난다. 특히 AI는 과거 제조업보다 기술 종속의 위험이 크다. 한국 기업이 반도체와 데이터, 전력, 자본을 제공하더라도 핵심 모델과 플랫폼,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해외 기업이 독점한다면 한국은 고부가가치 사슬의 중심이 아니라 값비싼 기반시설을 제공하는 하청기지에 머물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잘 만드는 것과 AI 시대의 주도권을 갖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는 AI 정상외교의 성과를 국내에 남기기 위한 원칙을 먼저 세워야 한다. 우선 정책금융과 공적 보증이 투입되는 해외 투자에는 국내 투자 연계 조건을 붙여야 한다. 국내 연구개발센터 유지, 핵심 공정 투자, 협력업체 발주, 인재 양성 계획을 함께 따져야 한다. 해외 투자의 수익성뿐 아니라 국내 산업에 남기는 파급효과도 국익 심사의 기준이 돼야 한다. 또한 글로벌 빅테크와 체결하는 기술협약에는 한국 기업의 역할과 지식재산권의 귀속을 명확히 해야 한다. 데이터는 한국이 제공하고, 설비투자는 한국 기업이 부담하면서 핵심 기술과 수익은 해외 플랫폼에 집중되는 계약이라면 기술동맹이라 부르기 어렵다. 공동 연구의 성과가 국내 연구자와 스타트업, 대학으로 확산될 수 있는 통로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해외 벤처자본과의 협력에는 상호성이 필요하다. 이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쿼이아캐피털과 앤드리슨호로위츠 등 글로벌 벤처투자회사 관계자들을 만나고, 국민연금과 이들 투자회사 간 장기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 행사에도 참석한다. 한국 자본이 실리콘밸리의 혁신기업에 투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리콘밸리의 자본과 네트워크도 한국의 AI 스타트업과 연구 생태계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정상외교의 성과를 협약 건수가 아니라 국내 잔존 가치로 평가해야할 필요도 있다. 협약 이후 국내 투자액이 얼마나 늘었는지, 몇 명을 새로 고용했는지, 국내 중소기업이 공급망에 얼마나 진입했는지, 공동 연구에서 한국이 확보한 특허와 기술이 무엇인지 공개해야 한다. 양해각서는 출발선일 뿐이다. 이행되지 않는 협약은 외교행사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에는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는 구절이 나온다. AI 정상외교에서 글로벌 협약과 해외 투자는 뻗어 나가는 가지다. 국내 공장과 연구소, 인재와 협력업체는 뿌리다. 가지가 세계로 뻗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가지를 키우겠다고 뿌리의 물과 양분을 모두 빼내면 나무는 오래 서 있지 못한다. 한국 기업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국내에만 머물라는 요구는 개방경제의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해외 진출을 세계화라는 말로 무조건 미화해서도 안 된다. 기업의 해외 투자는 기업의 판단이지만, 세제와 금융, 외교적 지원이 더해지는 순간부터는 국가 경제에 어떤 이익을 남기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대미 투자사업을 상업적 합리성과 국익을 기준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원칙은 옳다. 이제 ‘국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한다. 해외에서 거둔 수익만 국익이 아니다. 국내 생산능력과 연구인력, 기술자립도, 협력업체의 생존, 청년들이 일할 양질의 일자리도 국익이다. AI 정상외교는 한국에 큰 기회다. 엔비디아와 오픈AI를 만나고 세계의 자본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다만 진정한 성과는 회담장의 사진이 아니라 몇 년 뒤 국내 산업 현장에서 확인될 것이다. 한국에 연구소가 늘고, 공장이 증설되고, 스타트업이 성장하며, 청년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때 기술동맹은 비로소 국익이 된다. 빅테크와 손을 잡되 산업의 뿌리는 한국에 남겨야 한다. 해외 시장을 넓히되 국내 생산 기반을 비워서는 안 된다. 세계 AI 질서에 깊숙이 들어가되 기술과 플랫폼의 종속국이 돼서도 안 된다. AI 정상외교의 성패를 가를 기준은 단순하다. 협력의 열매가 국내 산업과 국민에게 돌아오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기술동맹은 동맹이 아니라 공동화의 통로가 될 수 있다.
2026-07-23 10: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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