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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브랜드의 등용문……무신사의 20년 플랫폼 혁명
[경제일보] 국내 패션 시장에는 무신사 이전과 이후가 있다. 해외 브랜드를 소비하던 시장에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키우는 시장으로 온라인 쇼핑몰에서 패션 플랫폼으로 산업의 중심축을 바꿔놓은 기업이 바로 무신사다. 2001년 스니커즈 커뮤니티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에서 출발한 작은 온라인 공간은 이제 수천 개 브랜드가 모이고 신생 브랜드가 성장하며 소비자가 패션을 발견하는 국내 최대 패션 생태계로 성장했다. 무신사의 20여년을 관통하는 DNA는 '플랫폼 확장'이다. 커뮤니티를 쇼핑으로 연결했고 쇼핑을 브랜드 육성으로 확장했다. 다시 자체 브랜드(PB)와 오프라인, 뷰티, 글로벌 시장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며 단순히 옷을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라 브랜드가 성장하는 무대를 만드는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기업도, 특정 브랜드 하나에 의존하는 유통기업도 아닌 수많은 브랜드가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 무신사 성장의 핵심 엔진이었다. 커뮤니티가 만든 플랫폼의 출발점 무신사의 시작은 쇼핑몰이 아니었다. 2001년 조만호 창업자가 개설한 온라인 커뮤니티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은 국내외 운동화와 스트리트 패션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 패션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던 만큼 회원들은 신제품 사진과 스타일링, 구매 후기 등을 직접 올리며 커뮤니티를 키워갔다. 상품보다 콘텐츠가 먼저였다는 점도 무신사의 차별점이다. 회원들은 특정 브랜드를 구매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패션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했고 자연스럽게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소비로 이어졌다.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소비자 집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이후 무신사스토어의 경쟁력이 됐다. 2009년 본격적인 온라인 커머스를 시작한 무신사는 단순히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브랜드의 철학과 스타일을 소개하는 매거진 콘텐츠를 제작하고 화보와 스타일링, 인터뷰를 함께 제공하면서 소비자가 브랜드를 이해한 뒤 구매하도록 만들었다. 상품 상세페이지 중심이던 기존 온라인 쇼핑몰과 달리 콘텐츠를 통해 브랜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브랜드 역시 광고보다 콘텐츠를 통해 소비자와 접점을 만들 수 있었고 무신사는 입점 브랜드와 소비자가 함께 성장하는 플랫폼 구조를 구축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도 이 과정에서 마련됐다. 자본력이 부족한 신생 브랜드들은 무신사의 콘텐츠와 마케팅, 프로모션을 활용해 소비자에게 이름을 알렸고 무신사는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할수록 플랫폼 경쟁력이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입점 넘어 육성으로…무신사의 성장 공식 무신사는 단순히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플랫폼에 머물지 않았다. 인지도가 낮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굴해 기획전과 화보, 스타일 콘텐츠, 라이브커머스, 오프라인 팝업 등을 지원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혔다. 브랜드는 무신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판매를 늘렸고, 무신사는 새로운 브랜드가 성장할수록 플랫폼 경쟁력이 함께 커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국내 패션 시장은 오랫동안 대기업 브랜드와 해외 명품 중심으로 형성됐다. 독창적인 디자인을 앞세운 디자이너 브랜드는 제품력은 갖췄지만 자본과 마케팅, 유통망이 부족해 소비자와 만날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무신사는 이 틈새를 공략했다. 신생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 소비자에게는 기존 브랜드와 차별화된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플랫폼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 같은 전략은 무신사를 단순한 온라인 쇼핑몰이 아닌 '브랜드 인큐베이터'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실제로 마르디 메크르디와 마뗑킴, 디스이즈네버댓, 커버낫 등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무신사를 주요 성장 무대로 삼으며 인지도를 키웠다. 이들 브랜드의 성장은 곧 무신사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플랫폼 안에서 성공 사례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브랜드가 입점하고 소비자는 새로운 브랜드를 찾기 위해 무신사를 방문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무신사는 특정 브랜드를 소유하지 않아도 브랜드가 성장할수록 함께 성장하는 사업 모델을 구축할 수 있었다. 패션 콘텐츠도 플랫폼 경쟁력을 키우는 핵심 요소였다. 온라인 매거진과 스냅, 스타일링 콘텐츠, 상품 리뷰는 소비자들이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패션 문화를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브랜드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콘텐츠가 다시 구매로 이어지는 구조를 형성하면서 무신사는 쇼핑몰과 패션 미디어의 경계를 허물었다. 플랫폼을 넘어 브랜드로…무신사 스탠다드의 탄생 무신사의 두 번째 변곡점은 자체 브랜드(PB) 사업이었다. 다양한 브랜드를 판매하던 플랫폼이 직접 브랜드를 만드는 회사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2017년 선보인 무신사 스탠다드는 화려한 디자인보다 기본에 충실한 베이직 의류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당시 SPA 시장은 유니클로와 SPA 브랜드들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무신사는 플랫폼에서 축적한 소비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플랫폼을 운영하며 소비자들이 어떤 색상과 디자인, 가격대를 선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점이 경쟁력이 됐다. 유행을 빠르게 따라가기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기본 상품을 중심으로 제품군을 구성했고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에 안착했다. 무신사 스탠다드는 온라인 성공에 머물지 않았다. 성수동과 홍대, 강남을 비롯해 전국 주요 상권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며 소비자 접점을 확대했다. 온라인에서 상품을 확인한 뒤 오프라인에서 직접 착용하고 구매하는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무신사 스탠다드는 플랫폼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특히 오프라인 매장은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브랜드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온라인 리뷰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소재와 착용감, 핏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면서 소비자의 구매 경험을 확장했다. 플랫폼 기업이 자체 브랜드를 운영하면 입점 브랜드와 경쟁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무신사는 PB를 하나의 브랜드로 육성하는 동시에 다양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입점·육성하며 플랫폼 생태계를 확대하는 전략을 유지했다. 플랫폼과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하는 이중 구조는 다른 패션 플랫폼과 차별화되는 무신사만의 경쟁력이 됐다. 패션 넘어 일상으로……29CM·뷰티·오프라인 무신사는 패션이라는 울타리에 머물지 않았다. 옷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출발해 라이프스타일과 리셀, 뷰티, 오프라인 공간까지 소비자의 일상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며 사업 영토를 넓혀갔다. 무신사의 확장은 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2021년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를 품으며 패션을 넘어 홈·리빙 등 라이프스타일 영역까지 고객 접점을 넓혔다. 이어 한정판 거래 플랫폼 솔드아웃으로 리셀 시장에 진출했고 무신사 뷰티를 통해 화장품 시장까지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서로 다른 플랫폼을 단순히 보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패션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과 뷰티, 리셀을 연결하는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29CM는 취향 기반 큐레이션과 여성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을 앞세워 무신사의 또 다른 성장축으로 자리 잡았다. 2025년 연간 거래액은 1조3000억원을 돌파해 무신사가 인수한 2021년보다 약 4배로 늘었다. 2026년 상반기에는 입점 3년 이내 여성 디자이너 브랜드의 합산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2.6배 증가하는 등 플랫폼 성장과 신진 브랜드 육성이 동시에 성과를 내고 있다. 오프라인 전략도 한층 고도화됐다. 무신사는 성수와 홍대를 중심으로 메가스토어와 스토어, 무신사 킥스(KICKS), 무신사 런(RUN) 등 카테고리 특화 매장을 잇달아 선보이며 브랜드 경험을 강화했다. 최근에는 롯데백화점 잠실점과 영등포 타임스퀘어, AK플라자 수원점 등 백화점과 복합쇼핑몰까지 입점을 확대하며 온라인 플랫폼을 오프라인으로 확장하고 있다. 무신사의 오프라인 매장은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은 브랜드를 직접 체험하고 팝업과 한정 상품, 시즌 행사를 경험하는 플랫폼의 연장선이다. 실제로 2026년 '무진장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성수·홍대 핵심 매장에는 일주일 만에 31만명 이상이 방문했고 거래액도 큰 폭으로 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집객 거점 역할을 입증했다. 소비자는 오프라인에서 브랜드를 경험한 뒤 다시 온라인에서 구매하고 브랜드는 오프라인 노출을 통해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브랜드 키우던 무신사, 세계를 연결하다 무신사의 다음 확장 무대는 해외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키우는 역할에서 나아가 해외 소비자와 K패션을 연결하는 가교로 진화를 시작했다. 과거 해외 사업이 일부 브랜드를 수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현지 서비스를 확대하며 K패션 플랫폼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스토어를 통해 해외 소비자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현지 마케팅과 물류 경쟁력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무신사가 글로벌 전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시장이다. 일본에서 K패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무신사는 글로벌 스토어를 기반으로 현지 서비스를 강화하는 한편 도쿄를 중심으로 팝업스토어와 브랜드 쇼케이스를 잇달아 열며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서 검증된 브랜드를 일본 소비자에게 소개하고 현지 시장에 안착시키는 플랫폼 역할까지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뷰티 사업도 플랫폼 확장의 연장선에 있다. 패션에서 확보한 2030 고객 기반을 바탕으로 인디 뷰티 브랜드를 발굴·육성하고 무신사 뷰티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우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계한 '무신사 뷰티 페스타'와 팝업스토어를 통해 브랜드 경험을 확대하는 한편 글로벌 스토어에서는 K패션과 K뷰티를 함께 제안하며 플랫폼 안에서 소비자의 구매 영역과 체류시간을 동시에 넓히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확장의 다음 과제…수익성과 균형 무신사의 다음 과제는 더 넓히는 것이 아니라 넓어진 사업을 제대로 수익화하는 일이다. 자체 브랜드와 29CM, 오프라인, 뷰티, 글로벌 사업을 동시에 키우면서 각 사업의 투자 부담을 낮추고 플랫폼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해야 한다. 무신사는 이미 외형 확대를 넘어 수익성 개선 국면에 들어섰다. 2025년 연결 기준 매출은 1조4679억원, 영업이익은 1405억원으로 각각 전년보다 18.1%, 36.7% 증가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다만 오프라인 점포 확대와 일본·중국 등 글로벌 시장 공략이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늘어난 투자를 지속적인 이익으로 연결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신규 매장과 해외 사업은 초기 투자와 운영비 부담이 큰 만큼 외형 성장뿐 아니라 플랫폼 전체의 수익성을 높이는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플랫폼과 자체 브랜드의 균형도 중요한 과제다. 2025년 무신사의 매출 구조에서 수수료 매출은 38.7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무신사 스탠다드 등을 포함한 제품 매출도 30.78%에 달했다. 플랫폼과 브랜드 사업이 모두 핵심 성장축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다만 무신사 스탠다드의 외형이 커질수록 입점 브랜드와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자체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성장 기반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브랜드를 키우는 플랫폼'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신사의 다음 성장 과제가 될 전망이다. 경쟁 환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에이블리와 지그재그가 여성 패션 플랫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고 중국계 플랫폼 쉬인(SHEIN)과 테무(TEMU), 알리익스프레스는 초저가 전략으로 국내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브랜드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차별화를 유지하기 어려운 만큼 무신사는 콘텐츠와 커뮤니티,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을 기반으로 '브랜드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플랫폼'이라는 경쟁력을 계속 입증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넘어야 할 산은 남아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K패션 수요가 늘고 있지만 국내에서처럼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키워낸 사례를 해외에서도 만들어내야 한다. 현지 소비자 취향과 유통 환경에 맞는 브랜드 발굴, 마케팅과 물류 경쟁력 확보는 물론 무신사 플랫폼 자체에 대한 신뢰를 쌓는 것이 장기적인 성장의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국내에서 브랜드를 키우는 플랫폼이었다면 앞으로는 K패션 생태계를 해외에 안착시키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무신사가 만들어온 것은 온라인 쇼핑몰이 아니라 브랜드가 성장하는 시장이었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등용문이 된 플랫폼은 이제 오프라인과 글로벌 시장까지 무대를 넓히고 있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외형 확대가 아니라 성공 사례에 있다. 국내에서 축적한 브랜드 육성 역량을 일본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서도 재현하며 K패션 브랜드의 글로벌 성공 사례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느냐가 무신사의 다음 20년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무신사 관계자는 "무신사의 가장 큰 경쟁력은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굴해 소비자와 연결하고, 브랜드가 고객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 온 데 있다"며 "콘텐츠와 커뮤니티, 오프라인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브랜드가 성장하고 고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는 온라인에서 축적한 브랜드 육성과 고객 데이터를 바탕으로 오프라인과 글로벌 시장까지 경쟁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며 "국내 브랜드의 발굴부터 성장, 해외 진출까지 함께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K패션의 글로벌 시장 확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2026-08-05 17: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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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간판에서 도시의 얼굴로…롯데백화점 성장의 서사
[경제일보] 서울 명동 한복판을 걷다 보면 한 시대의 소비 풍경이 겹쳐 보인다. 해외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와 쇼핑백을 든 사람들, 계절마다 바뀌는 쇼윈도와 불이 꺼지지 않는 식품관까지. 그 중심에는 오랫동안 롯데백화점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첫 정장을 산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가족 외식의 기억이 남은 공간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번화함을 상징하는 장소다. 롯데백화점은 단순한 유통 점포가 아니라 한국 소비문화의 시간을 담아온 이름이다. 그 출발점에는 창업주 신격호가 있다. 그는 전후 혼란기 속에서 일본에서 사업 기반을 일군 뒤 한국에 돌아와 식품과 관광, 유통 산업에 잇따라 뛰어들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생산 중심 사회에서 소비 중심 사회로 천천히 옮겨가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생활 수준이 달라지면 상품을 파는 방식도 바뀔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신격호는 백화점을 단순히 물건을 진열하는 건물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무대로 바라봤다. 이런 구상은 도심 핵심 입지 전략으로 이어졌다. 유동 인구가 많고 상징성이 큰 장소에 점포를 세워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 주변 상권까지 함께 키우는 방식이었다. 롯데백화점 본점이 자리 잡은 명동은 그 전략이 가장 잘 드러난 공간이다. 패션과 식품, 화장품과 리빙, 문화와 외식이 한 건물 안에서 돌아가는 경험은 당시 소비자에게 신선한 변화였다.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경하고 머물고 즐기는 소비가 시작됐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곧 브랜드의 무대가 됐다. 국내 기업에는 가장 효과적인 전시장이었고 해외 브랜드에는 한국 시장 진출의 관문이었다. 쇼윈도 하나와 매장 배치 하나가 곧 유행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백화점이 도시의 문화 흐름을 이끄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롯데백화점은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보폭을 넓혔다. 부산과 대구, 대전과 광주 등 주요 도시 핵심 상권에 점포를 열며 전국 유통망을 구축했다. 대형 백화점의 등장은 지역 소비의 중심축을 바꾸는 사건에 가까웠다. 주변 상권이 커지고 교통이 정비됐으며 주거 선호도까지 달라졌다. 백화점 하나가 도시의 지도를 바꾸던 시절이었다. 롯데백화점이 경쟁력을 유지한 배경에는 상품 기획력과 운영 노하우가 있다. 해외 명품과 국내 대표 브랜드를 함께 키우고 식품관과 문화센터, 고객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엮어 체류 시간을 늘렸다. 계절별 기획전과 팝업 행사, 우수 고객 관리 프로그램은 오랜 기간 업계의 기준으로 통했다. 소비자는 필요한 물건만 사러 오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유행과 정보를 얻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다. 잠실은 롯데백화점 진화의 또 다른 상징이다. 백화점과 호텔, 면세점, 엔터테인먼트 시설, 초고층 랜드마크가 결합한 잠실 일대는 전통적 의미의 점포를 넘어선 공간이 됐다. 쇼핑과 관광, 식음과 여가가 한곳에서 이뤄지는 복합 소비지로 성장했다. 과거 백화점이 상품을 파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유통업의 환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마다 소비 심리는 먼저 얼어붙었고 온라인 쇼핑의 급성장은 오프라인 유통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했다. 가격 비교는 몇 초면 끝나고 배송은 하루 안에 이뤄진다. 넓은 매장과 좋은 입지만으로는 고객을 붙잡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롯데백화점도 변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매장 면적을 넓히는 방식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체험, 공간 효율과 데이터 활용으로 전략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고객이 오래 머물고 다시 찾는 공간, 온라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간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대표 사례가 프리미엄 아울렛과 복합몰 확대다. 교외형 소비가 늘고 가족 단위 체류형 쇼핑이 자리 잡으면서 아울렛은 새 성장 동력이 됐다. 합리적 가격과 넓은 공간, 외식과 문화 시설을 함께 갖춘 모델은 기존 백화점과 다른 고객층을 끌어들였다. 유통 기업이 한 가지 형식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 변화에 대응한 결과다. 디지털 전환도 핵심 과제다. 멤버십 데이터 분석과 개인 맞춤형 마케팅, 모바일 앱 연계 서비스, 온라인몰 강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고객은 앱으로 상품을 살펴보고 매장에서 직접 확인한 뒤 다시 온라인으로 구매한다.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흐려진 시장에서 고객 경험 전체를 설계하는 능력이 경쟁력이 되고 있다. 관광 수요 회복 역시 롯데백화점에는 중요한 변수다. 명동 본점과 잠실점 등 핵심 점포는 외국인 방문객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K뷰티와 패션, 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백화점은 단순 판매 공간을 넘어 한국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창구가 된다. 호텔과 면세점, 관광 인프라와의 연계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롯데백화점의 강점은 오랜 브랜드 신뢰도와 핵심 입지, 전국 점포망, 협력사 네트워크, 축적된 고객 데이터에 있다. 소비 회복 국면이 오면 이런 자산은 빠르게 실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시간의 자산이다. 과제도 적지 않다. 젊은 소비층은 가격과 속도, 차별화된 콘텐츠에 민감하다. 충성 고객만으로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점포별 수익성 격차와 높은 고정비 부담, 온라인 플랫폼과의 경쟁도 계속된다. 소비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프리미엄 수요와 실속 소비를 함께 잡아야 하는 숙제도 커진다. 롯데백화점이 향하는 곳은 뚜렷하다. 백화점이라는 업태를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도시의 소비와 여가를 설계하는 생활 플랫폼 기업으로 넓어지는 길이다. 상품 판매를 넘어 경험을 제공하고 점포 운영을 넘어 상권을 키우며 오프라인 공간을 넘어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강화하는 방향이다. 신격호 창업주의 시대가 근대적 소비 시장의 문을 연 시기였다면 지금 롯데백화점의 과제는 새로운 시대의 소비 가치를 다시 쓰는 일이다. 명동의 간판으로 출발한 이 기업이 앞으로도 한국 유통 산업의 중심에서 같은 무게감을 이어갈지 시장은 다음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2026-04-21 09:5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