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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장 없이 시작한 송무 로펌…바른 28년, 이제 동인과 합병
[경제일보] 1998년 3월 서울 서초동. 판사 출신 강훈·홍지욱·김재호 변호사가 바른법률사무소의 문을 열었다. 당시 형사·민사 사건 수임에는 이른바 ‘사무장’이나 브로커가 개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세 사람은 사건을 소개해주는 브로커를 쓰지 않고 변호사가 직접 의뢰인을 만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바른’이라는 이름에도 그런 생각을 담았다.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으로 법원과 변호사 업계에 대한 불신이 커지던 시기였다. 평판사 출신들이 만든 작은 사무실은 전관의 이름을 앞세우기보다 직접 사건을 맡아 승부하겠다고 나섰다. 검사와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낸 김찬진 변호사도 초기부터 힘을 보탰다. 28년이 지난 지금 바른에는 외국변호사를 포함해 300명 안팎의 변호사가 일한다. 2025년 매출은 1076억원으로 2023년 처음 1000억원을 넘어선 뒤 3년 연속 1000억원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같은 해 YK가 1694억원, 지평이 1327억원을 기록하면서 중대형 로펌 사이의 외형 경쟁에서는 다시 뒤를 쫓는 처지가 됐다. 바른은 결국 다시 큰 선택을 했다. 지난 9월 14일 법무법인 동인과 합병 추진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합병이 성사되면 지난해 기준 합산 매출 1877억원, 변호사 553명 규모로 커진다. 평판사들이 만든 송무 사무실에서 출발한 바른이 28년 만에 국내 로펌 사상 최대 규모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 법조비리 뒤 문 연 평판사들의 사무실 바른이 문을 열던 1990년대 말 법률시장은 지금과 달랐다. 개인 변호사 사무실의 비중이 컸고 법원이나 검찰을 갓 나온 전관들이 사건을 소개받아 처리하는 방식도 널리 퍼져 있었다. 브로커와 사무장을 통한 사건 수임이 법조비리로 번지면서 변호사 업계 전체가 비판을 받던 때였다. 강훈·홍지욱·김재호 변호사는 모두 법원에서 10년 안팎 근무한 평판사 출신이었다. 고위 법관 출신도 아니었고 대형 기업자문 조직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잡은 시장은 송무였다. 법정에서 재판을 해본 경험을 토대로 민·형사 사건을 직접 맡았다. 사무장이 사건을 가져오면 변호사가 이름을 빌려주는 관행도 피했다. 파트너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한 뒤 저연차 변호사에게 전부 넘기는 방식도 지양했다. ‘변호사가 직접 의뢰인을 만나고 직접 책임진다’는 방식은 신생 사무실이 고객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송무 중심의 출발은 이후 바른의 성격을 오랫동안 규정했다. 기업과 금융회사에 계약을 자문하는 대신 이미 벌어진 분쟁을 법정에서 해결하는 사건이 먼저 쌓였다. 지금도 바른을 설명할 때 송무와 기업형사가 먼저 거론되는 배경이다. ◆ 대법관·고법부장들이 신생 로펌으로 설립 이듬해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9년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난 조중한 변호사가 2대 대표로 합류했다. 같은 해 정귀호 전 대법관도 바른으로 왔다. 2000년에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박인호 변호사가 가세했다. 평판사 세 명이 시작한 사무실에 고위 법관 출신들이 들어오면서 송무 인력의 폭이 넓어졌다. 이후 검사장급 인사와 고법부장, 법원장 출신 변호사들도 잇달아 합류했다. 명로승 전 법무부 차관과 정동기·문성우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 정인진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동건 전 서울고법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성과도 따라왔다. 한국가스공사 통영기지 탱크공사 관련 5500억원대 가처분 사건과 두산중공업 희망퇴직자들의 600억원대 퇴직금 소송 등을 맡았다. 동서식품의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 사건에서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받아냈다. 2010년에는 대법원 수임 사건 수가 국내 로펌 가운데 가장 많다는 보도도 나왔다. 바른 홈페이지 연혁에도 이 기록이 남아 있다. 송무에서 확보한 사건과 인력이 바른을 100명대 로펌으로 끌어올렸다. ◆ 송무만으로는 종합로펌이 될 수 없었다 바른이 계속 법정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기업 고객을 상대하다 보면 소송이 터지기 전 계약과 금융, 공정거래 문제부터 자문해달라는 요구가 따라왔다. 송무에서 기업을 만났지만 기업의 일은 법정 밖에서 더 많이 벌어졌다. 2005년 바른은 김·신·유에서 기업자문을 이끌던 박기태 변호사와 자문팀을 영입했다. 같은 해 법인 이름도 지금의 ‘법무법인 바른’으로 바꿨다. 김장리와의 합병을 추진했고 2007년에는 세종과의 합병도 검토했지만 두 건 모두 성사되지는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는 조세와 부동산금융, 공정거래를 잇달아 보강했다. 2015년 조현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영입했고 이듬해 법무법인 양헌에서 부동산금융팀을 받아들였다. 2017년에는 법무법인 KCL의 공정거래팀이 합류했다. 바른의 확장은 다른 대형 로펌과 달리 한 번의 대형 합병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송무라는 기존 기반을 두고 필요한 자문팀을 하나씩 붙였다. 법원과 검찰 출신 인력 중심의 조직에 세무와 금융, 공정거래 전문가가 들어오면서 업무 범위도 넓어졌다. ◆ 론스타에서 통상임금까지 법정에서 이름 알려 기업형사 사건에서도 바른의 송무 경험이 이어졌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매각 과정에서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을 대리해 1심부터 대법원까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신한은행이 45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고발한 신상훈 전 사장 사건에서도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이끌어냈다. 노동과 공정거래 사건에서도 굵직한 판결이 나왔다. 2014년 쌍용자동차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2016년 액화천연가스 저장탱크 건설공사 입찰담합 사건에서는 SK건설을 대리해 과징금 불복 소송에서 승소했다. 최근 매출을 끌어올린 사건에도 송무가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퀄컴 사이의 1조원대 과징금 분쟁에서 공정위를 대리했고 HD현대중공업의 6300억원대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근로자 측을 대리했다. 2023년 바른의 매출이 처음 1000억원을 넘어서는 데 이런 대형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설립 당시의 주력이었던 송무가 20년 넘게 바른의 매출과 브랜드를 떠받쳐온 것이다. 다만 대형 로펌 시장이 기업자문과 M&A, 금융, 국제중재 중심으로 커지면서 송무에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어려워졌다. ◆ 남들이 덜 보던 상속·도산도 파고들었다 바른은 대형 로펌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하던 분야에도 사람을 붙였다. 대표적인 분야가 상속과 자산승계다. 2013년 상속신탁연구회를 만들었고 2022년에는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자산관리 업무를 전담하는 EP센터를 출범시켰다. 기업 오너와 고액 자산가의 상속은 유언장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세금과 기업 지분, 경영권, 신탁, 가족 간 분쟁이 한꺼번에 얽힌다. 바른은 조세와 가사, 기업법무 변호사를 묶어 이 시장을 따로 키웠다. 도산에서도 새로운 사건을 맡았다. 2018년 레이크힐스순천 회생에서 서울회생법원의 첫 ‘한국형 프리패키지 제도’ 적용을 이끌고 이후 골프존으로의 매각까지 관여했다. 회생 절차와 인수·합병을 한 조직에서 이어간 사건이었다. 최근에는 국제중재와 지식재산권도 확대하고 있다. 기업의 해외 진출과 기술 분쟁이 늘면서 외국변호사를 영입하고 특허 분야 협업도 강화하고 있다. AI와 디지털자산, 재생에너지 같은 신산업 규제 분야에도 별도 인력을 붙이고 있다. ◆ 1000억원 넘었지만 경쟁자는 더 빨리 컸다 바른은 2023년 매출 1058억원을 기록하며 처음 1000억원을 넘어섰다. 2024년 1064억원, 2025년 1076억원으로 3년 연속 10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적어도 외형에서는 중대형 로펌의 문턱을 넘었다. 문제는 경쟁사들이 더 빨리 컸다는 데 있다. 2025년 YK는 1694억원, 지평은 1327억원을 기록했다. 대륙아주도 1027억원으로 바른을 바짝 따라붙었다. 1000억원대 로펌 사이에서도 변호사 영입과 합병 경쟁이 시작됐다. 기업 고객 평가에서도 아직 상위권과 거리가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평가에서 바른은 종합·전문성·서비스 모두 9위를 기록했다. 송무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쌓았지만 기업 고객을 상대로 한 종합 서비스에서는 빅6와 차이가 남아 있다. 2025년 이동훈 대표 체제가 출범한 뒤 바른은 기업자문과 국제중재, 지식재산권을 다음 성장 분야로 잡았다. 같은 해 기업전략연구소도 세웠다. 법률문제가 생긴 뒤 대응하는 송무에서 기업의 사업과 규제를 미리 들여다보는 쪽으로 업무를 넓히려는 움직임이다. ◆ 28년 만에 다시 꺼낸 합병 카드 바른은 지난 9월 14일 법무법인 동인과 합병 추진 MOU를 체결했다. 양측은 합병추진위원회를 만들고 12개월 안에 본계약을 체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통합 법인의 가칭은 ‘바른동인’이다. 아직 합병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두 로펌의 2025년 매출을 합하면 1877억원이다. 외국변호사를 포함한 변호사는 바른 303명, 동인 250명으로 모두 553명이다. 계획대로 합병이 끝나면 매출 기준 국내 7위권으로 올라설 수 있는 규모다. 바른과 동인은 모두 송무와 형사 분야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로펌이다. 양측은 여기에 기업과 금융, 공정거래 등 자문 역량을 합치겠다는 구상이다. 2005년 김장리, 2007년 세종과의 합병을 추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바른이 약 20년 만에 다시 대형 합병 카드를 꺼냈다. 합병의 규모가 큰 만큼 풀어야 할 일도 많다. 500명이 넘는 변호사의 보수와 사건 배분, 고객 충돌, 파트너 지분과 경영구조를 하나로 맞춰야 한다. 송무 중심 조직 두 곳이 단순히 사람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자문까지 함께 키울 수 있는지가 합병 이후의 문제다. ◆ ‘바르게 하자’에서 500명 로펌으로 바른의 출발에는 거창한 기업법무 전략이 없었다.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뒤 법원을 나온 젊은 판사들이 사무장과 브로커 없이 사건을 맡아보겠다고 만든 사무실이었다. 그 조직에 대법관과 고법부장, 검사장 출신들이 들어오면서 송무가 커졌고 뒤이어 조세와 금융, 공정거래, 기업자문을 붙였다. 2011년에는 주요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자체 사옥인 바른빌딩도 마련했다. 2023년에는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다. 변호사 6명 규모로 출발했던 조직은 이제 300명 안팎의 변호사가 일하는 중대형 로펌이 됐다. 그동안 바른은 송무의 힘으로 몸집을 키웠다. 그러나 지금 법률시장에서 더 큰 로펌이 되려면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분쟁까지 함께 가져가야 한다. 바른이 동인과 합병을 추진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1998년에는 사무장 없이 사건을 맡는 일이 도전이었다. 2026년에는 500명이 넘는 변호사를 한 조직으로 묶는 일이 새로운 도전이 됐다. 바른의 다음 10년은 이번 합병이 실제로 어떤 조직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2026-09-28 09: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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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에서 400명으로…지평, 공익·해외개척으로 키운 26년
[경제일보] 2000년 4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강금실 변호사와 법무법인 세종을 나온 젊은 변호사들이 새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출발 인원은 한국 변호사 10여 명이었다. 이미 김앤장과 광장, 태평양, 세종 등이 기업법무 시장에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새 로펌은 처음부터 조금 다른 말을 꺼냈다. 일을 잘하는 로펌과 함께 민주적이고 윤리적이며 공익적인 조직을 만들겠다고 했다. 설립과 동시에 공익위원회를 만들고 공익활동 규정과 윤리헌장도 마련했다. 법무법인 지평의 출발이었다. 26년이 지난 지금 지평에는 변호사와 외국변호사, 각 분야 전문가 등 400명가량이 일한다. 2025년 국내 법무법인 매출은 1327억원으로 전년보다 10.03% 늘었고 특허법인과 해외사무소를 합친 매출은 1500억원을 넘어섰다. 2000년대 초 신생 로펌이던 지평은 이제 대형 로펌 바로 아래에서 경쟁하는 중견 대형로펌으로 올라섰다. 지평이 걸어온 길에는 다른 대형 로펌과 다른 선택이 여러 번 있었다. 초창기에는 벤처와 M&A를 파고들었고 해외에서는 뉴욕이나 런던보다 베트남과 중국, 캄보디아 같은 신흥시장으로 먼저 향했다. 규모가 필요할 때는 합병도 했지만 공익활동과 구성원 중심의 운영방식은 그대로 가져갔다. ◆ 강금실과 젊은 변호사들이 만든 새 로펌 창립을 주도한 사람은 양영태·김상준·임성택 변호사 등이었다. 양영태 변호사는 1995년 세종에 입사해 금융과 증권, 보험, M&A와 각종 송무를 담당하다 2000년 지평 설립에 참여했다. 임성택 변호사 등도 당시 기존 대형 로펌에서 일하던 젊은 법률가였다. 강금실 변호사가 대표로 합류하면서 신생 로펌의 이름도 빠르게 알려졌다. 당시 지평이 노린 시장 가운데 하나는 벤처기업이었다. 인터넷과 정보기술 기업이 빠르게 생겨나던 시기였지만 이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로펌은 많지 않았다. 지평은 출범 당시부터 벤처기업의 투자와 기업공개, 인수·합병 등을 주요 업무로 내걸었다. 당시 언론에는 ‘벤처전문 로펌’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작은 조직이 이름을 알리는 데는 사건이 필요했다. 2005년 지평은 당시 국내 M&A 시장의 대형 거래였던 하이트맥주의 진로 인수에 참여했다. 거래 규모는 3조4000억원에 달했다. 설립 5년 만에 대기업 M&A 시장에서 이름을 올렸다. 송무에서도 실적을 쌓았다. 설립 당시 10명 남짓했던 한국 변호사는 2004년 35명, 2006년 43명으로 늘었다. 기업자문과 송무를 함께 키우면서 신생 로펌에서 종합로펌으로 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 뉴욕 대신 베트남으로 갔다 지평의 성장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외시장이다. 국내 대형 로펌들이 미국과 영국의 유수 로펌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힘을 쏟을 때 지평은 한국 기업이 실제 투자를 늘리던 아시아 신흥시장으로 변호사를 보냈다. 양영태 변호사는 2006년 말부터 베트남에 장기 체류하며 현지 법인 설립을 준비했다. 2007년 호찌민과 중국 상하이에 사무소를 열었고 2009년에는 하노이와 캄보디아 프놈펜, 라오스 비엔티안으로 거점을 넓혔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미얀마 양곤에도 차례로 진출했다. 한국 기업들이 생산시설과 판매망을 찾아 동남아시아로 움직이던 시기였다. 국내 본사에서 현지 로펌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에 직접 사무소를 두고 한국 기업을 따라간 것이 지평의 선택이었다. 해외 사무소에는 현지 법률가들도 함께 배치했다. 2024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무소를 열었다. 배터리와 자동차 등 한국 기업의 중동부유럽 투자가 늘어난 데 따른 결정이었다. 헝가리까지 더하면서 해외 네트워크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확장됐다. 현재 지평은 8개국에 9개 해외 거점을 두고 있다. 국내 대형 로펌 가운데 해외 사무소 숫자가 많은 곳으로 꼽힌다. 김앤장이나 빅5보다 변호사 숫자는 적지만 신흥시장 현지 네트워크에서는 일찍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었다. ◆ 2008년 지성과 합병해 단숨에 100명 넘어 자체 성장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2008년 지평은 법무법인 지성과 합병을 결정했다. 그해 5월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합병을 발표했고 9월 법무법인 지평지성이 출범했다. 합병 당시 두 로펌을 합친 변호사는 125명이었다. 한국 변호사 104명과 외국 변호사 21명이 한 조직에 들어오면서 당시 국내 7위 규모로 올라섰다. 출범 8년 만에 변호사 100명대의 대형로펌이 됐다. 업무도 보강됐다. 지평이 M&A와 기업소송, 해외업무에 강점이 있었다면 지성은 M&A와 노동, 금융자문 분야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합병 뒤 금융 전문인력도 늘었고 대형 M&A와 공기업 민영화처럼 여러 분야가 얽힌 업무를 함께 맡을 여건이 만들어졌다. 통합 법인은 한동안 ‘지평지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14년 다시 법무법인 지평으로 사명을 바꿨다. 두 조직을 합쳐 몸집은 키웠지만 브랜드는 창립 때 사용했던 ‘지평’으로 돌아왔다. ◆ 돈 버는 일과 공익을 따로 놓지 않았다 지평을 다른 로펌과 구별해온 또 다른 축은 공익활동이다. 설립 당시부터 공익위원회를 운영했고 변호사의 공익활동을 조직 차원에서 관리했다. 로펌이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사회공헌 조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창립 때부터 회사 운영의 한 부분으로 넣었다. 2014년에는 공익법단체 사단법인 두루를 설립했다. 로펌 변호사들이 본업을 하면서 시간을 내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공익사건을 전업으로 맡는 변호사 조직을 따로 만든 것이다. 두루는 장애와 아동·청소년, 사회적 경제, 국제인권 등에서 소송과 입법 활동을 해왔다. 2015년에는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공익활동보고서를 냈고 2018년에는 사회책임보고서를 발간했다. 기업 고객에게 요구되는 환경과 인권, 지배구조 문제를 로펌 자신의 운영에도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공익은 훗날 새로운 법률시장과도 연결됐다. 기업들이 인권과 환경, 공급망 관리 문제를 경영 리스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지평이 오래 다뤄온 인권과 사회적 가치 문제가 기업자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공익에서 ESG 사업으로 지평은 2019년 인권경영팀을 만들었다. 이듬해 환경팀과 컴플라이언스팀 등을 합쳐 ESG센터를 출범시켰다. 변호사뿐 아니라 인권과 환경, 지속가능경영을 다루는 컨설턴트와 전문위원을 함께 배치했다. ESG는 환경(Environmental)·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영문 첫 글자를 딴 말이다. 기업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만 보지 않고 환경과 노동·인권, 지배구조까지 함께 평가하는 경영 기준이다. 지평은 기업의 인권·환경 실사와 공급망 관리, 지속가능경영 전략, 해외 규제 대응까지 업무를 넓혔다. 이 과정에는 지평이 창립 때부터 강조해온 공익활동 경험이 활용됐다. 장애인이나 아동의 권리를 다루던 공익 업무와 기업 인권실사는 성격이 다르지만 인권을 법률 문제로 다뤄온 경험은 기업 자문에도 이어졌다. 공익활동과 기업자문 사이에 새로운 시장이 생긴 것이다. 지평은 ESG센터를 법률자문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비변호사 컨설턴트를 영입해 기업의 정책 수립과 평가, 실사까지 맡도록 했다. 최근 대형 로펌들이 변호사 외 전문가를 늘리는 흐름을 지평은 ESG 분야에서 일찍 시험했다. ◆ 퀄컴 10년 소송으로 공정거래 이름 알려 지평의 성장에는 장기 소송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미국 반도체기업 퀄컴과 공정거래위원회의 1조원대 과징금 소송이다. 공정위가 2009년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등을 문제 삼아 과징금을 부과하자 퀄컴은 행정소송을 냈다. 지평은 공정위를 대리해 10년 넘게 소송을 수행했고 최종적으로 공정위 측 승소를 이끌었다. 현재 공동집행대표인 김지홍 변호사도 이 사건을 맡았다. 공정거래는 이후 지평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의 2026년 평가에서도 김지홍 대표는 국내 공정거래 분야 주요 변호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평 전체로는 기업·M&A와 송무, 노동, 금융 등 14개 업무 분야가 평가 대상에 포함됐다. 최근에는 플랫폼 기업 사건도 맡았다. 2025년 카카오모빌리티의 택시 배차 알고리즘 사건과 네이버쇼핑 검색 알고리즘 사건 등에서 성과를 냈다. 공정거래 규제 대상이 제조업과 재벌에서 플랫폼과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면서 사건의 내용도 달라졌다. ◆ 부동산·리츠까지 사람을 붙였다 지평은 전문분야를 키울 때 팀 단위 영입도 활용했다. 2020년에는 부동산 거래와 리츠 업무에 강했던 법무법인 넥서스의 전문 변호사 12명을 영입했다. 기존 건설·부동산 송무에 거래와 금융 업무를 붙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성과는 몇 년 뒤 나타났다. 지평은 2025년 리츠와 실물 부동산 거래에서 상반기 법률자문 1위를 기록했고 연간 리그테이블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 건설·부동산 분쟁과 프로젝트금융, 리츠를 하나의 부문으로 묶는 작업도 진행했다. 2026년에는 정원 변호사를 건설·부동산 부문대표로 선임했다. 건설과 리츠, 부동산금융, 정비사업, 도심복합개발을 함께 총괄하도록 조직을 바꿨다. 한 사건을 자문과 송무로 나누기보다 산업 단위로 묶겠다는 최근 지평의 경영 방향이 반영됐다. M&A에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지평의 기업·M&A 분야를 국내 Band 3로 평가했다. 국영기업과 사모펀드, 국내외 기업을 대상으로 인수와 합작투자, 해외투자, 구조조정 등을 맡고 있다. ◆ 창업세대 뒤를 공채세대가 이어받았다 2025년 지평 경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김지홍·이행규 변호사가 공동집행대표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창업자가 아니라 지평이 공개채용한 초기 세대다. 김지홍 대표는 공정거래를 중심으로 경력을 쌓았고 이행규 대표는 기업공개와 자본시장 업무를 맡아왔다. 2000년 로펌을 세운 창업세대에서 조직 안에서 성장한 변호사들에게 경영이 넘어갔다. 주요 집행위원에도 2000년대 초 입사한 변호사들이 배치됐다. 대표를 정하는 과정도 창립 당시 운영방식과 연결돼 있다. 파트너들의 의견을 모으고 후보자에 대한 질의와 간담회를 거쳐 집행부를 구성했다. 특정 창업자가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보다 파트너들의 합의를 중시했다. 새 경영진은 법률 문제를 분야별로 잘라 처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겠다는 방향을 내놨다. 회계와 기술, 정책, 글로벌 규제 등을 법률자문과 함께 제공하는 ‘Legal & Beyond’를 내걸고 비변호사 전문가와 전문센터를 늘리고 있다. ◆ 매출 1500억원…위에는 아직 큰 벽 숫자만 놓고 보면 지평이 갈 길은 길다. 2025년 국내 법무법인 매출은 1327억원이다. 특허법인과 해외사무소를 합쳐야 1500억원을 넘는다. 같은 해 김앤장의 추정 매출은 1조6000억원 수준이고 태평양과 세종, 광장, 율촌은 모두 4000억원을 넘었다. 화우도 2812억원을 기록했다. 1694억원을 올린 YK에도 매출에서는 뒤져 있다. 지평이 목표로 내건 상위권 진입까지는 상당한 차이가 남아 있다. 고객 평가도 비슷하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지평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에서 각각 7위를 기록했다. 해외 거점과 공익활동처럼 지평이 먼저 만들어온 영역이 곧바로 기업 고객의 종합평가 순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견 로펌 경쟁도 거세지고 있다. YK가 빠르게 몸집을 키웠고 바른과 동인도 합병을 논의하고 있다. 대륙아주와 린도 합병 절차에 들어가면서 지평이 자리한 1000억원대 시장에서도 규모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 ◆ 26년 동안 버리지 않은 것 2000년 지평은 변호사 10여 명으로 출발했다. 당시 내건 것은 대형 로펌이라는 목표보다 전문성과 윤리성, 공익성, 민주적 운영이었다. 기업법무 시장에서는 벤처와 M&A를 파고들었고 해외에서는 베트남과 중국 등 한국 기업이 향하는 신흥시장으로 먼저 나갔다. 필요할 때는 지성과 합쳐 변호사 100명대 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공정거래와 노동, 부동산·리츠를 키웠고 공익활동에서 쌓은 경험을 ESG와 인권경영이라는 기업자문으로 연결했다. 2025년에는 창업세대 대신 공개채용으로 들어온 변호사들이 경영을 넘겨받았다. 지평은 매출로는 아직 빅6와 거리가 있다. 변호사 숫자도 수백 명 차이가 난다. 대신 26년 동안 조직을 키우면서 창립 당시 내세운 공익과 구성원 중심의 운영방식을 접지는 않았다. 큰 로펌이 된 뒤 원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원칙을 정한 뒤 몸집을 키웠다. 지평의 26년은 그 순서로 이어져 왔다.
2026-09-22 08: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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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다시 3위…세종이 판을 뒤집은 방법
[경제일보] 2025년 국내 대형 로펌의 순위가 바뀌었다. 법무법인 세종은 국세청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 매출 4363억원을 기록하며 광장과 율촌을 앞섰다. 2007년 광장에 자리를 내준 뒤 19년 만에 매출 3위로 돌아왔다. 2021년 말 455명이던 변호사는 2025년 말 603명으로 늘었다. 순위 하나가 바뀐 것보다 그 과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세종은 대형 로펌 경쟁에서 성장 속도가 더딘 곳으로 꼽혔다. 2007년 광장에 밀렸고 2013년에는 율촌에도 뒤졌다. 최근 5년 사이 세종은 조세와 정보통신기술(TMT), 송무와 형사, 공정거래 등 필요한 분야의 사람을 공격적으로 끌어들이며 다시 선두권으로 올라왔다. 1983년 문을 연 세종은 올해로 43년째다. 처음부터 모든 분야를 갖춘 종합로펌은 아니었다. 출발점에는 증권과 금융이 있었고 성장 과정에는 몇 차례 합병이 있었다. 최근의 세종은 여기에 인재 영입이라는 승부수를 더했다. ◆ ‘증권법 1호 박사’가 만든 로펌 세종의 출발에는 신영무 변호사가 있다. 신 변호사는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법복을 벗었다. 미국 예일대 로스쿨에서 증권법을 공부했고 미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 연수와 뉴욕 로펌 근무를 거쳤다. 국내에서 증권법을 전공한 법률가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1980년 귀국한 신 변호사는 남산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1983년 사무실을 광화문 교보빌딩으로 옮기면서 세종합동법률사무소가 출범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김두식 변호사의 성을 더해 영문 이름도 지금의 ‘SHIN & KIM’으로 정착했다. 창업 초기부터 금융과 증권을 주력 분야로 잡았다. 자본시장 개방이 시작되면서 세종은 외국인전용수익증권과 코리아펀드 설립을 자문했다. 삼성전자 해외 전환사채(CB), 삼미종합특수강 해외 신주인수권부사채(BW), 삼성물산 해외 주식예탁증서(DR), 포스코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에도 관여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자본시장으로 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세종은 그 길목에서 금융과 증권을 다룬 경험을 쌓았다. ◆ 창업자 혼자 가져가는 로펌을 만들지 않았다 신영무 변호사가 신경 쓴 것은 사건만이 아니었다. 로펌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운영할지도 중요하게 봤다. 당시 국내 법률사무소 상당수는 창업자의 영향력이 강했고 젊은 변호사가 일정 기간 일한 뒤 독립하는 일도 흔했다. 신 변호사는 미국 로펌에서 경험한 파트너십을 세종에 도입했다. 연공과 성과를 배당에 함께 반영하고 지분을 가진 파트너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 운영 방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세종은 지분 파트너들의 직접 투표로 경영위원을 선출하고 현재 오종한 경영대표를 비롯한 5명의 경영위원이 주요 경영 판단에 참여한다. 한 명의 창업자나 대표에게 경영권을 집중시키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신 변호사는 2013년 세종에서 물러났다. 창업자가 조직을 떠난 뒤에도 로펌 이름과 경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개인의 이름으로 시작한 법률사무소를 구성원들이 이어가는 조직으로 바꾸려 했던 초기 선택이 세대교체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 외환위기가 증권·금융 로펌을 바꿨다 1997년 외환위기는 세종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법률시장의 일도 달라졌다. 새로운 투자와 증권 발행보다 부도와 회생, 워크아웃, 채권 회수가 급해졌다. 세종은 대농과 한일합섬, 쌍방울그룹, 미도파, 국제상사, 삼성자동차, 기아자동차, 진로 등 당시 도산 절차를 밟은 기업들의 사건에 관여했다. 대우그룹 워크아웃과 하이닉스·SK글로벌 구조조정에도 참여했다. 금융과 증권을 다루던 변호사들이 부실기업의 채권관계와 구조조정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세종의 기업법무 영역도 M&A와 도산, 기업분쟁으로 넓어졌다. 외환위기가 금융·증권 중심의 로펌을 종합 기업법무 쪽으로 밀어낸 셈이다. 기업의 자금조달 문제와 구조조정, 소송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문만 잘해서는 기업 고객의 문제를 끝까지 맡기 어려웠다. 세종은 2000년대 초 송무를 크게 보강하는 선택을 했다. ◆ 국내 첫 로펌 간 합병…송무를 붙였다 2001년 1월 세종은 열린합동법률사무소와 합쳤다. 열린합동에는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지낸 황상현 당시 부장판사와 이건웅 부장판사 등 법원 출신 변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금융과 기업자문에 강했던 세종에 송무 경험이 많은 변호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국내 법무법인 사이에서 이뤄진 첫 합병으로 알려져 있다. 합병 뒤 세종은 김앤장에 이어 국내 2위권 종합로펌으로 몸집을 키웠다. 제조물 책임 소송 등 대형 송무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2010년에는 세종 출신 변호사들이 설립했던 에버그린을 다시 합쳐 국내외 변호사와 회계사 등 전문인력을 280여명으로 늘렸다. 금융·증권이라는 기존 기반에 송무와 기업분쟁을 붙이는 작업이 계속됐다. 광장도 2001년 한미와 합병하며 기업자문과 송무를 결합했다. 세종은 합병 이후에도 금융·증권을 중심축으로 두고 송무와 기업분쟁을 계속 보강했다. 지금의 세종에는 창립기의 금융·증권과 2000년대 이후 강화한 송무가 함께 남아 있다. 다만 몸집을 키운다고 순위가 계속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 2위권에서 밀려난 뒤 길었던 정체 2000년대 초 세종은 김앤장 다음을 다투는 로펌이었다. 이후 경쟁사들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2007년 광장이 세종을 앞섰고 2013년에는 율촌에도 추월당했다. 기업법무 시장이 M&A와 공정거래, 조세, 노동, 지식재산권, 국제중재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전문인력 확보 경쟁도 거세졌다. 세종은 오랫동안 상위권을 지켰지만 순위에서는 4~5위권에 머물렀다. 금융과 증권이라는 전통적인 강점만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격차를 다시 벌리기 어려웠다. 변화가 빨라진 것은 2021년 오종한 대표변호사가 경영을 맡으면서부터다. 오 대표는 1989년 세종에 입사해 기업분쟁과 M&A를 맡아온 내부 출신 변호사다. 취임 이후 세종은 부족한 분야를 외부 인재 영입으로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2020년 말 434명이던 세종의 변호사는 2025년 말 603명으로 늘었다. 5년 동안 169명이 증가했고 같은 기간 매출은 93% 늘었다. 대형 로펌 가운데서도 빠른 외형 확장이었다. ◆ 사람을 데려와 팀째 키웠다 세종의 최근 성장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영입 방식이다. 유명한 전관 한두 명을 데려오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세와 TMT, 공정거래, 송무·형사처럼 경쟁력이 부족했던 분야에 필요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붙였다. 조세에서는 2022년 백제흠 변호사를 영입한 뒤 인력을 확대했고 송무에는 법원 출신 변호사들을 보강했다. 방송·통신과 개인정보 분야에도 정부와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이 들어왔다. 결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는 영풍·MBK 연합을 대리했고 한미약품과 콜마그룹의 경영권 분쟁에도 참여했다. 아시아나항공과 HDC현대산업개발 사이의 2500억원대 계약금 소송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을 대리해 대법원까지 승소했다. 송무와 기업분쟁에서 존재감이 커졌다. M&A에서도 대형 거래가 늘었다. 알리익스프레스와 신세계그룹의 온라인 플랫폼 합작법인 설립과 아워홈 경영권 지분 매각, 교보생명의 SBI저축은행 인수 등에 참여했다. 2026년 상반기에는 부동산·SOC 법률자문에서도 거래금액과 건수 기준 선두에 올랐다. 외부에서 데려온 인력이 기존 금융·기업자문 조직과 맞물리면서 업무 폭도 넓어졌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의 2026년 평가에서는 금융과 자본시장, 공정거래, 기업자문·M&A, 국제중재, 송무, 노동, 부동산, 조세, TMT 등 11개 분야가 최고등급인 Band 1을 받았다. 김앤장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초기 금융·증권 중심의 로펌에서 여러 분야를 함께 가져가는 조직으로 업무 구성이 달라졌다. ◆ 19년 만의 3위…격차는 39억원 인재 영입은 숫자로도 나타났다. 세종은 2025년 매출 4363억원으로 전년보다 18% 성장했다. 태평양은 4402억원, 광장은 4309억원을 기록했다. 2위 태평양과 세종의 차이는 39억원, 세종과 광장의 차이는 54억원에 불과했다. 세종에는 19년 만의 3위 복귀지만 안심할 만한 격차는 아니다. 한두 건의 대형 M&A나 송무 수임만으로 순서가 바뀔 수 있다. 공격적인 인재 영입으로 몸집을 키운 만큼 새로 들어온 변호사들과 기존 조직을 얼마나 잘 묶느냐도 중요해졌다. 외형 확대 다음 단계의 문제다. 고객 평가에서는 가능성과 한계가 함께 나타난다. 2025년 한국경제·한국사내변호사회 조사에서 세종은 종합평가와 전문성에서 각각 3위, 서비스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M&A·IPO와 금융 일반, 경영자문에서는 2위였고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 조세·관세에서는 3위였다. 1위 김앤장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김앤장의 2025년 추정 매출은 약 1조6000억원이다. 세종을 포함한 2위권 로펌들이 4000억원대에서 치열하게 순위를 다투는 것과는 시장 규모가 다르다. 세종의 경쟁 상대는 당장 김앤장보다 태평양과 광장, 율촌 쪽에 더 가깝다. ◆ 변호사만 늘리는 경쟁은 끝나고 있다 세종도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문제를 풀어야 한다. 오종한 대표는 최근 로펌이 변호사만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회계사와 세무사, 변리사, 컨설턴트 등이 함께 일하는 조직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세종은 방산·국방과 통상 분야에 비변호사 전문가를 늘리고 AI·디지털 경쟁법팀과 통상산업정책센터도 새로 만들었다. AI도 업무 안으로 들어왔다. 세종은 글로벌 법률 AI 서비스 ‘하비’ 사용 계정을 기존 30개에서 100개로 확대하기로 했다. 계약서 검토에 주로 사용하던 AI를 소장과 준비서면 등 송무 업무로 넓히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변호사를 더 뽑는 방식에서 업무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쟁이 옮겨가고 있다. 600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같은 고객을 놓고 경쟁하지 않고 서로 사건을 연결하는 일도 중요하다. 영입한 스타 변호사의 개인 실적이 조직 전체의 실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매출 4000억원대에서 5000억원대로 넘어가려면 인력의 숫자뿐 아니라 협업과 생산성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 오 대표는 2026년 목표로 5000억원을 언급하면서 외형보다 조직의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법률 수요 상당 부분이 현지 로펌으로 흘러가는 한계도 직접 거론했다. 국내에서 몸집을 키우는 것과 해외에서 한국 기업의 사건을 가져오는 것은 또 다른 경쟁이다. ◆ 밀린 순위를 사람으로 되찾았다 세종의 43년에는 앞선 대형 로펌과 다른 굴곡이 있다. 신영무 변호사는 증권법을 들고 로펌을 만들었고 자본시장이 열리자 금융과 증권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기업 구조조정과 도산으로 업무를 넓혔고 송무가 부족해지자 2001년 열린합동과 합쳤다. 그 뒤 경쟁사들이 더 빨리 성장하면서 세종은 2위권에서 밀려났다. 2021년부터는 방향을 바꿨다. 부족한 분야를 하나씩 오래 키우는 대신 필요한 전문가를 외부에서 데려와 기존 조직과 묶었다. 조세와 TMT, 기업송무, 형사, 공정거래에서 사람이 늘자 사건도 따라왔다. 2025년 세종은 19년 만에 다시 3위에 올라섰다. 창업기의 무기는 증권법이었고 최근의 무기는 사람이다. 한 번 밀린 순위를 되찾는 데 19년이 걸렸다. 세종이 다시 치고 올라온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부족한 곳에 사람을 넣었고 그 사람들이 가져온 사건을 조직의 일로 만들었다. 43년 전 금융과 증권에서 시작한 로펌은 이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다시 순위를 올리고 있다.
2026-09-14 0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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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대신 내부 확장…태평양이 종합로펌이 된 방법
[경제일보] 1980년 12월 서울 서소문.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김인섭 변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건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해외 로스쿨이나 외국 로펌 경력은 없었다. 김 변호사가 내세운 목표는 한국 법률시장에서 출발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로펌을 만드는 것이었다. 6년 뒤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배명인 변호사와 이정훈 변호사 등이 합류하면서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가 출범했다. 영문명 ‘BKL(Bae, Kim & Lee)’은 배명인·김인섭·이정훈 세 창업자의 성에서 따왔다. 1987년 법무법인으로 전환했고 1995년 지금의 법무법인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46년이 흐른 현재 태평양은 김앤장에 이어 국내 매출 2위 로펌이다. 2025년 법무법인 매출은 4402억원, 특허법인과 해외법인을 합친 매출은 4702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전년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약 25% 늘었다. 국내 변호사는 지난 6월 기준 628명으로 김앤장 다음으로 많다. 김앤장이 국제금융과 외국 기업 자문에서 출발했고 광장이 서로 다른 두 로펌의 합병으로 기업자문과 송무를 결합했다면 태평양의 길은 달랐다. 국내 송무에서 시작해 기업자문과 M&A를 붙이고 국제중재와 공정거래, 조세, 노동, 기업형사로 영역을 넓혔다. 외부 로펌과의 대형 합병 없이 필요한 분야를 조직 안에서 키워온 것이 태평양 성장사의 한 축이다. ◆ 법정에서 시작한 ‘한국형 로펌’ 창업자 김인섭 변호사는 1963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냈다. 1980년 법원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할 때 김 변호사가 구상한 조직은 몇 명의 변호사가 사무실을 함께 쓰는 합동사무소와는 달랐다. 당시 한국 법률시장은 개인 변호사의 송무가 중심이었다.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기업법무 시장도 열리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대형 종합로펌은 막 걸음을 떼던 시기였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법관 경험을 토대로 송무를 맡으면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법률서비스를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로펌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6년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 출범은 개인사무소에서 조직형 로펌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배명인·김인섭·이정훈을 비롯해 이재식·황의인 변호사 등이 초기 조직을 만들었고 이후 기업법무를 담당할 변호사들이 잇달아 합류했다. 송무에서 시작한 조직에 기업자문과 금융, 지식재산권 분야가 하나씩 붙었다. 태평양이 당시 내세운 말은 ‘한국적인 국제로펌’이었다. 외국 로펌의 운영방식을 그대로 옮겨오는 대신 국내 법률시장과 법조 실무에 뿌리를 두고 국제 업무까지 처리하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김인섭 변호사는 훗날 이를 ‘한국적 국제로펌’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 외환위기, 송무 로펌이 기업 안으로 들어갔다 태평양의 업무가 크게 넓어진 시기는 1990년대 후반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 매각과 구조조정, 워크아웃이 한꺼번에 진행됐다. 기업의 생존 문제가 법률 문제로 이어지면서 송무뿐 아니라 금융과 M&A, 기업회생을 함께 다룰 변호사들이 필요해졌다. 태평양은 기아자동차 파산 처리와 대우그룹 계열사의 워크아웃 등에 참여했다. 법원에서 분쟁을 처리하던 변호사들이 기업의 재무상태와 채권관계, 구조조정 과정까지 들여다보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회생과 M&A 업무 경험도 쌓였다. 1998년에는 서소문을 떠나 강남 테헤란로로 본사를 옮겼다.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모이는 곳으로 로펌의 중심도 이동했다. 태평양이 송무를 중심으로 성장한 법률사무소에서 기업의 거래와 경영 문제까지 다루는 종합로펌으로 몸집을 키우던 때였다. 외환위기는 태평양에 새로운 숙제도 안겼다. 국내 기업을 둘러싼 분쟁의 상대가 외국 기업과 해외 자본으로 넓어지면서 국내 법원만 알아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늘었다. 태평양은 다음 승부처로 국제분쟁을 택했다. ◆ 2002년 국제중재팀 만들고 해외로 태평양은 2002년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국제중재팀을 만들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해외 투자와 수출이 늘면서 계약 분쟁을 해외 중재기관에서 해결하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었다. 국제중재가 지금처럼 대형 로펌의 주요 업무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 2009년에는 현대 측을 대리해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IPIC)에 넘어갔던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를 통해 되찾는 사건에 참여했다. 국제중재팀을 만든 지 7년 만이었다. 기업 간 국제분쟁을 넘어 국가를 상대로 한 투자분쟁으로 업무 범위도 넓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이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2012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약 6조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태평양은 정부 측 대리를 맡았다. 13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은 2025년 원 판정이 취소되면서 한국 정부가 배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결과로 끝났다. 해외 거점도 늘렸다. 2004년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에 사무소를 열었고 이후 상하이와 홍콩, 하노이, 호찌민, 두바이, 싱가포르 등으로 진출했다. 국내 기업이 해외로 이동하는 곳을 따라 법률서비스의 범위도 넓혔다. ◆ 기업의 싸움이 바뀌자 ‘경영권 분쟁’을 따로 떼냈다 기업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단순한 계약 위반이나 손해배상 소송을 넘어 기업 지배권을 두고 주주와 경영진, 국내 기업과 해외 펀드가 맞붙는 사건이 늘었다. 태평양이 일찍부터 공을 들인 분야 가운데 하나가 경영권 분쟁이다. 2000년대 초 SK그룹과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분쟁에서 태평양은 SK 측을 대리했다. 소버린이 최태원 회장을 이사회에서 밀어내기 위해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고 법원에 소집 허가까지 신청하자 태평양은 SK 측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법원이 소버린의 신청을 기각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SK 측에 유리하게 끝났다. 태평양은 2012년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별도의 경영권 분쟁팀을 만들었다. M&A 변호사와 송무 변호사를 한 조직에 모아 주주총회와 이사회, 가처분, 공개매수 등 경영권 싸움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도 참여하며 이 분야를 주요 업무로 이어가고 있다. 경영권 분쟁은 태평양의 출발점이었던 송무와 이후 키운 기업자문이 만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회사법과 자본시장법을 알아야 하고 주주총회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도 대응해야 한다. 태평양이 오랫동안 두 분야를 함께 키운 효과가 드러나는 시장이다. ◆ 로펌도 회사처럼 운영했다 업무 분야만 넓힌 것은 아니었다. 조직 운영에서도 몇 차례 변화를 먼저 시도했다. 2007년에는 국내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법무법인(유한)으로 조직을 바꿨다. 법무법인(유한)은 구성원 변호사의 책임을 일정 범위로 제한하고 규모가 커진 로펌을 조직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든 형태다. 변호사 개인의 사무실을 크게 만든 수준에서 벗어나 수백 명의 전문가가 일하는 조직에 맞는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려는 선택이었다. 공익활동도 조직 안에 넣었다. 2001년 공익활동위원회를 만들었고 2009년에는 공익법률지원 활동을 전담하는 재단법인 동천을 설립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태평양이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 프로보노 조직을 만든 뒤 별도 공익재단까지 설립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2020년에는 22년간 머물던 강남을 떠나 종로 센트로폴리스로 본사를 옮겼다. 당시 약 650명의 전문가를 포함해 1300여 명이 여러 건물에 나뉘어 근무하던 조직을 한 건물에 모았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와 금융기관, 법원 등과의 접근성을 고려한 이전이었다. ◆ 송무와 자문을 함께 키운 46년 태평양의 현재 업무를 보면 처음부터 키워온 송무와 이후 확대한 기업자문이 함께 남아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태평양의 기업·M&A와 송무, 조세, 공정거래 등을 국내 주요 분야로 평가하고 있다. 기업·M&A에는 200명이 넘는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다. 최근 대형 사건도 한 분야에 몰리지 않는다. 론스타 ISDS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아일리아 특허 분쟁,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한전KPS 중대재해 사건 등을 맡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형사재판에도 김앤장과 함께 참여해 대법원 무죄 확정까지 변론했다. 실적도 회복됐다. 태평양의 2025년 법무법인 매출은 4402억원으로 2024년 3918억원보다 12.4% 늘었다. 김앤장을 제외한 법무법인 가운데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며 6년 만에 2위로 올라섰고 올해 상반기 성장률도 약 25%로 주요 대형 로펌 가운데 가장 높았다. 현재 업무집행대표는 이준기 변호사가 맡고 있다. 1996년 태평양에 입사한 이 대표는 M&A와 해외투자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고 삼성·한화 빅딜과 금호타이어 인수 등 대형 거래를 자문했다. 외부에서 경영자를 데려오기보다 조직 안에서 성장한 변호사가 경영을 맡고 있다는 것도 태평양의 세대교체를 보여준다. ◆ 2위 탈환했지만 격차는 사라졌다 매출 2위 복귀만으로 앞으로의 경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2025년 태평양 매출은 4402억원이었지만 세종은 4363억원, 광장은 4309억원이었다. 2위부터 4위까지 불과 93억원 안에 들어와 있다. 한두 건의 대형 사건이나 인재 이동으로 순서가 달라질 수 있는 격차다. 기업 고객의 평가에서도 태평양이 모든 분야를 앞서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태평양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 평가에서 각각 4위를 기록했다.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 조세·관세, 금융 등 주요 분야에서도 4위권이었다. 세종은 최근 공격적인 인재 영입을 바탕으로 매출을 빠르게 늘렸고 광장과 율촌 역시 M&A와 송무, 규제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대형 로펌 사이의 변호사 이동도 잦아졌다. 태평양이 2025년 되찾은 2위 자리를 지키려면 과거에 쌓은 송무 경쟁력과 최근 확대하는 기업자문을 동시에 끌고 가야 한다. 태평양도 사람을 늘리고 있다. 지난 6월 국내 변호사는 628명으로 1년 전보다 41명 증가해 주요 대형 로펌 가운데 증가 폭이 가장 컸다. AI와 디지털금융, 공급망, 통상, 중대재해 등 새로운 규제 분야에도 별도 조직을 두고 있다. ◆ 국내 법정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넜다 태평양의 출발점에는 국제금융 계약서도, 두 대형 로펌의 합병도 없었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가 1980년 서소문에 연 작은 법률사무소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송무를 했다. 기업이 커지자 기업자문과 금융, M&A를 붙였고 외환위기가 터지자 구조조정 업무를 키웠다. 국내 기업의 분쟁이 해외로 넘어가자 국제중재팀을 만들었고 기업 경영권을 둘러싼 싸움이 늘자 경영권 분쟁팀을 따로 꾸렸다. 그 과정에서 다른 대형 로펌을 합병하거나 조직을 나눠 새 로펌을 만드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필요한 분야를 내부에서 만들고 사람을 영입해 조직 안에 쌓았다. 1980년 김인섭 변호사가 말했던 ‘한국적인 국제로펌’도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태평양으로 이어졌다. 법정에서 출발한 로펌은 이제 국제중재와 M&A, 공정거래, 조세, 기업형사를 함께 다룬다. 태평양이 46년 동안 넓혀온 영역이다.
2026-09-11 09: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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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한미·송무 광장, 합병으로 만든 종합로펌
[경제일보] 2001년 6월 7일 서울 신라호텔. 기업자문과 금융에 강했던 법무법인 한미와 송무로 이름을 알린 법무법인 광장이 합병을 선언했다. 새 로펌의 이름을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국문 이름은 옛 광장의 ‘법무법인 광장’을 쓰고 영문 이름은 한미가 사용하던 ‘Lee & Ko’를 남겼다. 당시 한미와 광장을 합친 국내외 변호사는 120명을 넘어섰다. 김앤장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규모의 대형 로펌이 등장했다. 기업자문과 금융은 한미가 쌓아온 경험을 가져왔고 송무에는 옛 광장의 강점이 더해졌다. 서로 부족했던 분야를 한 조직 안에 넣으면서 지금의 종합로펌 광장이 출발했다. 광장의 역사를 따라가려면 2001년보다 24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업자문과 송무가 처음부터 한 조직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시장에서 성장한 두 로펌이 자신에게 없던 역량을 상대에게서 찾으면서 2001년 합병으로 이어졌다. ◆ 판사 그만두고 기업들이 있는 도심으로 1977년 이태희 변호사가 서울 중구 소공동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지금 광장의 출발점이다. 이 변호사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 판사를 지냈다.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판사직을 그만두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의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국내로 돌아온 이 변호사는 법원 주변이 아니라 기업들이 몰려 있던 서울 도심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 변호사의 업무는 개인 송사와 재판이 중심이었지만 이 변호사는 기업의 계약과 투자, 해외 거래를 자문하는 서구식 로펌을 염두에 뒀다. 한진그룹과 한국전력, 포항제철, 한국은행, 외환은행 등이 초기 고객으로 이름을 올렸다.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과 국내 기업의 해외 거래도 맡았다. 1981년 고광하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한미합동법률사무소로 확대됐다. 이태희의 ‘Lee’와 고광하의 ‘Ko’를 따 영문 이름을 ‘Lee & Ko’로 정했다. 1985년에는 법무법인 한미로 조직을 바꿨다. 훗날 고 변호사가 독립한 뒤에도 Lee & Ko라는 이름은 남았다. ◆ 기업자문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송무 한미는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일찍부터 송무를 보강했다. 부장판사를 지낸 유경희 변호사가 합류해 송무를 맡았고 기업자문과 금융, 송무, 지식재산권, 보험 등으로 업무를 나눴다. 1990년대에는 변호사가 사건을 받아 혼자 처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업무 분야별 전문팀도 두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이 커지면서 로펌에 들어오는 일도 달라졌다. 외국인 투자와 해외 증권 발행, 금융거래, M&A가 늘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 구조조정 업무가 쏟아졌다. 한미가 강점을 보이던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에는 좋은 시장이었다. 그러나 고객의 분쟁까지 계속 맡으려면 송무 역량을 더 키워야 했다. 기업에 계약과 거래를 자문하다 분쟁이 생기면 대형 송무를 다른 로펌에 맡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자문에서 고객을 확보해도 법정 분쟁까지 이어서 맡는 데 한계가 있었다. 종합로펌으로 커지려면 기업자문과 금융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미가 찾던 것은 강한 송무였다. 그 무렵 옛 광장에는 정반대의 고민이 있었다. ◆ 자문 85% 한미, 송무 70% 광장 옛 광장은 박우동 전 대법관과 권광중 전 사법연수원장 등 법원 출신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송무에서 이름을 쌓았다. 재판 경험과 법원 인력에서는 강했지만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단기간에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기업법무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상황에서 송무만으로 성장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2001년 당시 한미의 업무 가운데 자문 비중은 약 85%였다. 반면 광장은 송무 비중이 약 70%였다. 한미에는 대형 송무가 필요했고 광장에는 기업자문과 국제거래 경험이 필요했다. 두 로펌의 강점과 약점이 정확히 반대쪽에 놓여 있었다. 그해 초 양측 대표들의 만남에서 합병 이야기가 나왔다.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해외 대형 로펌과 경쟁하려면 자문과 송무를 모두 갖춘 규모도 필요했다. 필요한 분야를 처음부터 키우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이미 경험을 축적한 조직과 합치는 길을 택했다. 논의가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두 로펌은 합병을 결정했다. 한미는 광장의 송무를 얻었고 광장은 한미의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얻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출범한 통합 광장은 서로 부족했던 부분을 합쳐 만든 로펌이었다. ◆ 합치는 것보다 어려웠던 한 조직 만들기 합병은 변호사 숫자와 고객 명단을 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건을 가져온 변호사가 계속 사건을 쥐는 대신 업무 성격에 따라 전문부서가 맡도록 했다. 한미와 광장 출신 변호사 사이의 보수와 사건 배분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출신 로펌에 따라 이해가 갈리지 않도록 공통의 기준을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로펌 합병은 일반 기업의 합병과도 차이가 있다. 공장이나 설비보다 사람이 자산인 조직이다. 이름난 변호사가 빠져나가면 사건과 고객도 함께 이동할 수 있다. 합병 뒤 인사와 보수, 사건 배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통합의 성패가 갈린다. 광장은 1999년 한미에서 도입했던 운영위원회 제도를 통합 법인의 경영체제로 이어갔다. 설립자나 대표변호사 한 사람에게 인사와 사건 배분이 몰리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기업자문 중심의 한미와 송무 중심의 광장이 갖고 있던 조직문화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맞춰갔다. 2001년 합병은 부족한 업무 분야를 보완했지만 두 조직을 실제로 하나로 만드는 일은 그 뒤에 시작됐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합병 자체보다 합병 이후의 조직 통합이 더 긴 시간을 차지했다. ◆ 창업자가 지분을 후배에게 넘겼다 세대교체에서도 광장만의 선택이 있었다. 이태희 변호사를 비롯한 1세대 변호사들은 퇴임하면서 로펌 지분을 남겨두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2009년 물러나면서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설립자가 지분과 경영권을 계속 쥐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은 후배 변호사들의 경영 참여로 이어졌다. 어쏘시에이트로 입사한 변호사가 파트너를 거쳐 경영대표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현재 경영을 총괄하는 김상곤 대표변호사 역시 광장에서 경력을 쌓아온 내부 인사다. 개인 사무소에서 출발한 조직이 세대를 거치면서 구성원 중심의 로펌으로 바뀌었다. 2001년 합병이 2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세대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합병계약은 한 번으로 끝났지만 한미와 광장 출신이 따로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창업자의 지분 정리와 운영위원회 중심 경영은 통합을 굳히는 장치가 됐다. 결국 광장은 업무만 합친 것이 아니었다. 기업자문과 송무를 합친 뒤 사람과 지분, 경영방식까지 하나의 조직 안에 다시 배치했다. ◆ M&A와 송무, 지금도 광장의 두 축 합병 당시 두 로펌이 들고 온 강점은 지금도 광장의 주요 업무로 남아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광장의 기업·M&A와 금융, 자본시장, 공정거래 분야 등을 국내 상위권으로 평가했다. 기업·M&A와 공정거래는 국내 ‘Band 1’에 올랐다. 송무 분야에도 약 15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직 대법관과 법관 출신 인력도 다수 포함돼 있다. 최근 실적에서도 M&A의 비중은 크다. 광장은 2025년 SK스페셜티 매각과 아워홈 인수, SK그룹 리밸런싱 거래 등에 참여했다. 프랑스 에어리퀴드의 4조6000억원 규모 DIG에어가스 인수도 자문했다. 2025년 광장의 M&A 분야 매출은 전년보다 30% 이상 늘었다. 2026년 상반기 블룸버그 집계에서도 광장은 국내 M&A 법률자문에서 47건, 42억1600만달러를 기록했다. 거래금액과 건수 모두 김앤장에 이어 2위였다. 1970년대 한미가 시작한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광장의 주요 수익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무와 형사 분야에서도 인력을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법원장과 형사재판장, 영장전담판사 출신 변호사를 잇달아 영입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 사건 1심에서도 변호인단으로 참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옛 광장이 들고 온 송무 역시 통합 법인의 한 축을 맡고 있다. ◆ 익숙했던 2위 자리에도 경쟁 붙었다 광장의 앞길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25년 매출은 4309억원으로 전년 4111억원보다 4.82% 늘었다. 외형은 커졌지만 경쟁 로펌의 성장 속도가 더 빨랐다. 태평양이 4402억원, 세종이 4363억원을 기록하면서 광장은 두 로펌에 뒤졌다. 오랫동안 김앤장 다음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광장에도 새로운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매출 규모뿐 아니라 M&A와 금융, 송무 등 주력 분야에서 대형 로펌 간 인재 영입 경쟁도 거세지고 있다. 기업 고객이 로펌을 고르는 기준도 전문성과 서비스, 비용까지 세분화되고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광장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 평가에서 각각 5위를 기록했다. M&A·IPO는 4위,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도 5위였다. 오랜 업력과 규모만으로 경쟁 로펌을 앞서기 어려워진 시장이다. 반면 2026년 상반기 M&A 실적은 다시 2위로 올라섰다. 공정거래와 자본시장, 국제통상에서도 국제 평가기관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에서 이어진 기업자문과 옛 광장의 송무를 지금의 시장에 맞게 얼마나 다시 키우느냐가 광장이 풀어야 할 문제다. ◆ 부족한 곳을 합쳐 만든 광장 광장에는 지금도 두 로펌의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광장’이고 해외에서는 ‘Lee & Ko’다. 하나는 송무로 성장한 로펌에서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1977년 기업자문으로 출발한 한미에서 이어졌다. 2001년 합병 때 어느 한쪽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이름만 나눠 가진 것도 아니다. 한미는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가져왔고 광장은 송무 경험을 보탰다. 합병 뒤에는 사건 배분과 보수 체계를 맞췄고 창업자들이 물러나면서 지분과 경영권도 후배들에게 넘겼다. 광장은 처음부터 모든 분야를 잘했던 로펌이 아니었다. 기업자문에 강했던 조직은 송무가 부족했고 송무에 강했던 조직은 기업자문이 부족했다. 두 로펌은 상대의 강점을 자기 조직 안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택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시작한 합병은 25년이 지나 광장의 기업자문과 송무라는 두 축으로 남았다. 부족한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대신 이미 잘하는 조직과 합쳤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커진 출발점이었다.
2026-09-0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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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은행 자문에서 국내 최대 로펌까지…김앤장 53년
[경제일보] 김앤장은 법정이 아니라 기업의 계약서에서 출발했다. 1973년 김영무·장수길 변호사가 문을 연 김·장 법률사무소의 초기 고객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이었다. 국내 은행과 기업이 해외에서 자금을 빌릴 때 계약서를 검토하고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를 자문했다. 변호사의 주된 무대가 법정이던 시절, 김앤장은 기업의 거래 현장으로 먼저 들어갔다. 53년이 지난 지금 김앤장은 국내 최대 로펌이다. 변호사만 1400명이 넘고 변호사를 포함한 법률전문가는 2000명을 웃돈다. 2025년 매출은 업계에서 1조6000억~1조7000억원 수준으로 추산한다. 2위권 대형 로펌과도 상당한 격차를 두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김앤장보다 먼저 기업법무 시장에 자리 잡은 법률사무소도 있었다. 김앤장이 선두로 치고 올라온 과정에는 한국 기업이 다음에 필요로 할 법률서비스를 먼저 준비하는 방식이 있었다. ◆ 판·검사 대신 기업법무 택한 김영무 창업자 김영무 변호사의 이력부터 당시 법조계의 통상적인 경로와 달랐다. 1964년 제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았다. 서울대 사법대학원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비교법을 공부했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J.D.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는 미국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은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며 빠르게 성장했다. 차관을 들여오고 외국 회사와 합작법인을 세우면서 계약도 복잡해졌다. 국내법뿐 아니라 외국법과 국제거래에 익숙한 변호사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김영무 변호사는 이 시장을 파고들었다. 법정에서 이미 벌어진 분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기업이 거래를 하기 전 계약을 짜고 위험을 줄이는 업무에 무게를 뒀다. 지금은 흔한 기업법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장수길 변호사의 합류는 김앤장의 빈 곳을 채웠다. 장 변호사는 고등고시를 거쳐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원 판사를 지냈다. 김영무 변호사가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맡았다면 장 변호사는 송무와 중재, 지식재산권을 담당했다. 김앤장이라는 이름은 두 사람의 성에서 따왔다. ◆ 기업이 해외로 나가자 로펌도 따라갔다 김앤장의 성장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궤를 같이했다. 1970~1980년대 해외 차관과 외국인 투자가 늘면서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가 커졌다. 기업들이 합작회사를 만들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김앤장이 일찍 쌓은 국제거래 경험을 찾는 기업도 늘었다. 1976년 합류한 정계성 변호사는 금융 분야를 맡았다. 공기업과 기업의 해외 차입, 국제자본시장 업무를 담당했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 기업의 외자유치와 금융거래를 자문했다. 1980년 입사한 정경택 변호사는 외국인 투자와 M&A, 공정거래 분야를 키웠다. 1983년 GM과 대우자동차의 합작투자, 1991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쌍용정유 지분 인수, 1997년 미국 P&G의 쌍용제지 인수 등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굵직한 거래에 참여했다. 기업의 거래 방식이 바뀔 때마다 김앤장의 조직도 달라졌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자 금융 전문가가 늘었고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이 많아지자 외국인투자 분야를 키웠다. M&A가 활발해지자 기업거래 변호사를 늘렸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화되자 경쟁법 전문가를 붙였다. 김앤장이 몸집을 키운 과정은 변호사를 무작정 늘린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시장이 먼저 움직였고 그 시장에 맞춰 사람을 채웠다. ◆ 유명 변호사 한 명보다 팀으로 승부 김앤장의 또 다른 특징은 사건을 맡는 방식이다. 대형 사건을 이름난 변호사 한 명에게 맡기기보다 사건 성격에 따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한 팀으로 묶는다. M&A 사건이라면 기업법무 변호사뿐 아니라 공정거래와 금융, 조세, 노무 전문가가 함께 들어간다. 규제가 걸린 산업에서는 해당 부처나 감독기관을 경험한 전문가도 참여한다. 현재 김앤장 공정거래 분야에는 국내외 변호사와 경제학자, 산업 전문가, 전직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 등 150명 넘는 전문인력이 참여하고 있다. 자본시장 분야에도 80명 이상의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기업 입장에서 대형 로펌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천억원, 수조원이 오가는 거래나 회사의 존립이 걸린 사건에서는 법률 하나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정거래와 세금, 노동, 인허가 문제가 동시에 터진다. 김앤장은 이를 한 조직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만들어왔다. 젊은 변호사를 키우는 방식에도 일찍부터 해외 경험을 넣었다. 파트너와 후배 변호사가 함께 사건을 맡게 하고 해외 로펌 연수도 활용했다. 정계성 대표도 1982~1983년 미국 뉴욕 셔먼앤드스털링에서 실무를 익혔다. 사건을 맡아 경험을 쌓고 해외에서 새로운 거래 방식을 익힌 변호사들이 돌아와 다시 큰 사건을 맡았다. 이 과정이 수십 년 반복되면서 분야별 전문인력이 쌓였다. ◆ 외환위기, 김앤장이 한 단계 커진 시기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의 지형을 뒤흔들었다. 기업들이 자산을 팔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외자유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해외 자본과 국내 기업 사이에서 거래 조건을 만들고 정부 규제를 검토할 법률전문가의 역할도 커졌다. 김앤장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를 다뤄왔다. 국내 기업들이 급하게 해외 자본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이미 관련 업무를 해본 변호사들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M&A 시장이 커지면서 김앤장의 업무도 금융과 외국인투자에서 M&A, 공정거래, 조세, 구조조정으로 빠르게 넓어졌다. 김앤장 연혁에는 이 무렵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변호사 수가 100명을 넘어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형 거래를 맡으면서 경험이 쌓였고 그 경험을 보고 또 다른 기업이 찾아왔다. 새로운 사건이 들어오면 다시 전문인력을 늘렸다. 김앤장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선두로 올라선 배경이다. ◆ 계약서에서 시작해 기업 형사사건까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김앤장이 맡는 사건의 규모는 달라졌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과정에서는 14개국 경쟁당국의 기업결합 심사가 필요했다. 김앤장은 4년여에 걸친 기업결합 심사와 항공 관련 인허가 자문에 참여했다.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와 삼성바이오로직스 인적분할, 한앤컴퍼니의 SK스페셜티 인수 등 조 단위 거래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6년 상반기 국내 M&A 법률자문 시장에서는 자문금액 26조3406억원, 68건으로 1위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 시장점유율은 33.27%였다.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송무와 기업형사 분야에서도 대형 사건을 맡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형사재판에 참여해 1·2·3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SK실트론 사건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 처분을 취소하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승소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글과 메타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과징금 취소소송에서는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를 검토하던 법률사무소의 업무는 이제 M&A와 공정거래, 국제중재, 개인정보, 기업형사로 넓어졌다. 기업이 겪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로펌이 다루는 영역도 함께 넓어진 것이다. ◆ 커진 영향력, 커진 감시 국내 최대 로펌이라는 자리는 사건만 많이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나 기업인이 정부 조사와 형사사건에 직면하면 김앤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 법원과 검찰, 정부 부처와 규제기관 출신 전문가도 적지 않다. 김앤장의 사건 대응력이 높아지는 만큼 전관과 이해충돌을 둘러싼 논란도 따라붙는다. 2025년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의 외부인 접촉 보고 가운데 김앤장 관련 보고는 로펌 중 가장 많은 363건이었다. 접촉 보고는 사건 관계인과의 만남 자체를 기록하는 제도여서 이 숫자가 곧 부적절한 접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규제기관 출신 인력을 대거 보유한 로펌이 해당 기관의 규제를 받는 기업을 대리하는 문제는 늘 감시 대상이 된다. 김앤장이 커질수록 사건 수임 못지않게 이해충돌 관리와 전관 논란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중요해졌다. 고객 평가 역시 전문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김앤장은 종합평가와 전문성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서비스 평가는 3위였고 소송비용의 합리성은 6위였다. 복잡한 사건에 여러 분야의 전문인력을 투입하는 방식은 강점이지만 비용이 높다는 평가도 피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규모가 항상 고객 만족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 시장이 열리기 전에 사람을 준비했다 김앤장의 53년을 보면 몇 번의 중요한 갈림길이 있었다. 기업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할 때 국제금융을 키웠고 외국 자본이 국내로 들어올 때 외국인투자 업무를 늘렸다. 기업 인수·합병이 본격화되기 전에 M&A 전문가를 확보했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해지자 경쟁법 인력을 늘렸다. 지금은 AI와 데이터, 공급망, 경제안보, 글로벌 통상, 기업지배구조가 기업법무의 새로운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앤장도 이 분야에 전문조직과 인력을 늘리고 있다. 김앤장이 53년 동안 한 선택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복잡하지 않다. 기업이 법률 문제에 부딪힌 뒤 변호사를 찾았다면 김앤장은 그보다 먼저 그 문제를 다룰 사람을 준비했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에서 시작한 김앤장이 국내 최대 로펌으로 성장한 데에는 그 시간차가 있었다.
2026-09-08 0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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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821조 풀고 한은은 금리 올린다…한국경제 어디로 가나
[경제일보] 내년 나라살림 규모가 821조원에 이른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7년도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청년, 국방·미래산업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한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세수가 크게 늘면서 정부는 미래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보고 있다. 같은 시기 한국은행은 반대 방향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기준금리를 2.75%에서 3.00%로 올렸다. 수출 호조와 내수 회복으로 성장세가 예상보다 강한 데다 물가가 상당 기간 목표 수준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 등 금융안정 위험에도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금리 인상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물론 금리 결정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독립적 권한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미리 제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발언은 중앙은행 독립성 측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 한국경제가 확장재정과 긴축통화를 동시에 요구받는 복잡한 상황에 놓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정부는 821조원의 재정을 풀어 경기를 떠받치고 미래산업에 투자한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려 소비와 대출, 투자 등 총수요와 신용 팽창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쪽에서는 액셀을 밟고 다른 쪽에서는 브레이크를 밟는 모양새다. 하지만 재정 확대와 금리 인상이 항상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어디에 돈을 쓰느냐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인프라, 전력망, 연구개발, 인재 양성처럼 경제의 공급능력을 높이는 분야에 투자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지출은 단기적으로 수요를 늘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산성과 공급능력을 높여 물가 압력을 완화하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대로 현금성 지원과 소비 진작, 효과가 불분명한 지역 사업처럼 즉각적인 수요를 키우는 지출이 대규모로 늘어난다면 한국은행의 긴축 효과와 충돌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으로 수요를 끌어올리고 중앙은행은 금리로 이를 억제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결국 821조원이라는 총액보다 구성표를 봐야 한다. 정부는 이번 예산을 ‘생산적 재정’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미래투자와 소비성 지출을 명확히 구분해 보여줘야 한다. AI와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두 생산적 투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 지원이 민간투자를 끌어냈는지, 기술 경쟁력을 높였는지,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들었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더구나 지금 물가 상황도 편하지 않다. 8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보다 3.1% 올랐다. 휴대전화 요금의 기저효과라는 일회성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식료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도 3.4% 상승했다. 국제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렵다. 세계 금리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장기 국채금리가 함께 상승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재정 상황, 국채 공급 확대, 에너지 가격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만 저금리 환경으로 쉽게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까지 빠르게 팽창하면 통화정책의 부담이 커질 위험이 있다. 정부 지출 확대가 총수요와 물가를 추가로 자극한다면 한국은행이 높은 금리를 더 오래 유지하거나 추가 인상을 검토해야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 비용은 가계와 기업이 먼저 체감한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이자가 높아지고 자영업자의 금융비용도 늘어난다. 기업은 설비투자를 할 때 더 높은 자금조달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해 경기와 투자를 살리려는데 높은 금리가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누르는 역설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지난 6월 말 가계신용이 2019조8000억원에 달한 한국에서는 금리 상승이 가계의 이자 부담과 소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 재정이 만들어내는 경기 부양 효과의 상당 부분이 가계의 이자 부담 증가로 상쇄되는 상황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정책 효과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정부와 한국은행이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통화정책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보고 움직이고, 재정은 성장잠재력과 사회적 필요까지 고려한다. 역할이 다르다. 문제는 서로의 정책 효과를 무력화할 정도로 강도가 엇갈릴 때다.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재정 확대를 선택한다면 공급능력을 늘리는 투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 AI·반도체·전력망·국방기술·연구개발처럼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분야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다. 대신 단순 소비성 지출과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지원사업은 줄이는 편이 맞다. 기존 사업 구조조정도 함께 가야 한다. 총지출이 12.8% 늘어난 상황에서 정부가 정말 불요불급한 사업을 얼마나 덜어냈는지 국민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새 사업은 늘리고 기존 사업은 그대로 남겨둔다면 ‘생산적 재정’은 결국 확장재정을 포장하는 이름으로 끝날 수 있다. 한국은행 역시 금리 인상의 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해야 한다. 7월과 8월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올린 만큼 물가와 가계대출, 부동산시장뿐 아니라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도 함께 살펴볼 시점이다. 또 하나 짚을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다. 정부는 재정과 산업정책을 책임지고, 금리는 한국은행이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통령이 금리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할수록 시장은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받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금리 결정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안 재정정책이 불필요하게 물가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821조원 예산과 3% 기준금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이런 정책 조합이 필요할 수도 있다. 관건은 821조원이 어디로 가느냐다. 생산성을 높이고 민간투자를 끌어내는 지출이라면 높은 금리의 부담을 이겨내며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면 소비와 단기 부양에 재정이 집중되면 금리 인상 압력을 키우고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을 높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경제정책은 액셀과 브레이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둘을 함께 써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운전자가 어디로 가려는지 분명히 알고 두 장치를 정교하게 조절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경제가 확인해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821조원을 쓰면서 물가는 잡고 성장잠재력은 높이며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까지 관리할 수 있느냐다. 확장재정과 긴축통화의 동시 운용이 성공하려면 돈의 규모보다 쓰임새, 금리의 수준보다 정책 간 조율이 먼저다.
2026-09-0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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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재정, 많이 쓰는 것보다 무엇을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 편성을 앞두고 ‘생산적 재정’으로의 전환을 주문했다. 이 대통령은 25일 국무회의에서 “지금은 눈앞의 재정 수치 관리에 매몰되는 우를 범할 때가 아니다”라며 늘어난 재정 여력을 미래에 더 큰 성과를 만드는 분야에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불요불급한 예산은 과감하게 조정해 재정을 건실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가 재정을 단순한 지출 수단이 아닌 성장 기반을 만드는 투자 수단으로 보겠다는 방향에는 공감할 부분이 있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저출생 대응, 지역균형발전, 국방, 인재 육성처럼 장기간 투자가 필요한 분야는 민간에만 맡겨서는 속도를 내기 어렵다. 정부가 마중물을 놓고 민간투자를 끌어내야 할 영역도 분명히 있다. 특히 산업 대전환기에는 적절한 재정투자가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다. AI 인프라와 연구개발, 전력망, 인재 양성 같은 분야는 투자 시기를 놓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지역 소멸과 저출생 역시 대응을 미룰수록 나중에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 다만 ‘생산적 재정’이라는 이름만으로 지출 확대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투입한 재정이 얼마나 큰 생산성과 민간투자, 일자리로 돌아오느냐다. 1조원을 투입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린 사업과 같은 돈을 쓰고도 효과를 검증하지 못한 사업을 같은 선상에서 볼 수는 없다. 재정 확대가 한번 시작되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도 경계할 대목이다. 새로운 사업은 조직과 이해관계를 만들고 지원을 받기 시작한 계층과 지역은 사업 축소에 반발한다. 그래서 재정 확대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재정 구조조정이다. 이 대통령이 불요불급한 예산을 과감하게 조정하라고 주문한 것도 이런 현실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예산안에서 무엇을 줄이느냐다. 오래됐지만 효과가 떨어지는 보조금, 중복된 연구개발 사업, 성과가 불분명한 지역 사업, 일회성 현금지원부터 손보는 것이 순리다. 정부가 신규 사업만 늘리고 기존 사업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생산적 재정’은 결국 지출 총액을 키우는 명분에 그칠 수 있다. 새로운 투자에 얼마를 넣을지 제시하는 동시에 기존 지출에서 무엇을 얼마나 덜어냈는지도 함께 공개할 필요가 있다. 성과평가 체계도 달라져야 한다. 예산 집행률보다 그 돈이 생산성과 성장률, 일자리, 민간투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져야 한다. AI나 첨단산업 지원이라면 민간투자 유발 효과와 기술 경쟁력, 사업화 성과가 기준이 될 수 있다. 지역 사업이라면 인구 유입과 고용, 기업 투자로 이어졌는지를 보는 것이 관건이다. 성과가 없는 사업을 정리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정부 사업은 한번 시작하면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예산을 계속 투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른바 좀비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미래 산업에 투입해도 재정의 생산성은 높아지기 어렵다. 저출생 대책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출생률 반등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그렇다면 기존 정책을 그대로 늘리기보다 주거·일자리·돌봄·교육비 가운데 실제 출산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를 가려 자원을 집중하는 편이 낫다. 지역균형발전 예산 역시 지역별 나눠주기로 흐르면 곤란하다. 모든 지역에 비슷한 사업을 배분하는 방식으로는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 산업 기반과 대학, 교통, 인재 여건을 따져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과감하게 집중하고 성과가 낮은 사업은 정리하는 것이 관건이다. 균형발전의 목표는 지역마다 같은 돈을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지역 스스로 성장할 기반을 만드는 데 있다. 국방 예산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첨단전쟁에 대응하려면 국방비 확대는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병력과 조직을 그대로 둔 채 장비와 예산만 늘리는 방식은 생산적 재정과 거리가 멀다. AI·드론·무인체계·정찰위성 등 미래전력에 우선순위를 두고 낡은 전력과 중복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정 확대를 주장할수록 국가채무에 대한 원칙도 분명해야 한다. 대통령이 말한 대로 단기적인 재정수치에만 매몰돼 미래투자를 포기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국가채무 증가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재정 부담은 결국 미래 세대와 연결된다. 지금의 지출이 미래 성장률을 높여 세수 증가로 돌아온다면 빚을 내서라도 투자할 이유가 있다. 반대로 미래 수익을 만들지 못하는 지출을 국채로 충당한다면 다음 세대는 원금과 이자를 함께 떠안는다. 이런 이유에서 재정준칙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기 침체나 대규모 재난, 미래 전략산업 투자처럼 재정 확대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정한 유연성을 허용하고 평상시에는 국가채무와 재정적자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예외를 인정할 때도 이유와 기간, 정상화 계획을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순리다. 재정준칙은 정부의 손발을 묶는 장치로만 볼 일이 아니다. 평소 원칙을 지켜 신뢰를 쌓아야 위기 때 더 과감한 재정정책을 펼칠 여지도 생긴다. 재정의 신뢰와 정책의 유연성을 함께 확보하는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정부가 추진하는 미래대응기금과의 관계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세수를 미래 산업과 청년에 투자하는 구상은 장기투자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일반회계와 기금, 정책금융이 중복되면 전체 재정 규모와 정책 효과를 국민이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사업을 예산으로 하고 어떤 사업을 기금으로 할지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관건이다. 생산적 재정의 성패는 결국 선택과 집중에 달려 있다. 모든 정책의 예산을 늘리는 식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래 성장에 꼭 필요한 분야에는 과감하게 투자하되 효과가 낮은 곳에서는 과감하게 거둬들이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사업을 줄이지 못한 채 미래투자만 더하면 재정은 계속 팽창한다. 반대로 국가채무 숫자를 지키는 데만 집중해 필요한 투자를 미루면 성장잠재력이 떨어진다. 이 두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재정정책의 실력이다. 국회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가 구조조정한 사업을 지역구 이해관계 때문에 다시 살리고 새로운 지출을 얹으면서 재정건전성만 정부 탓으로 돌려서는 곤란하다. 국회 역시 증액 경쟁에서 벗어나 감액과 사업 통폐합에 책임 있게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확장재정은 결국 결과로 평가받는다. AI 경쟁력이 높아졌는지, 청년에게 더 좋은 일자리가 생겼는지, 지역에 기업과 사람이 모였는지, 저출생의 구조적 원인이 완화됐는지가 성적표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내놓을 때는 총지출 규모와 함께 이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지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1만원을 내일의 10만원, 100만원으로 키우겠다’는 생산적 재정의 취지를 현실로 만들려면 투자 성과를 측정하고 실패한 사업을 정리하는 시스템이 먼저 작동해야 한다. 좋은 사업을 새로 만드는 능력만큼 오래된 사업을 끝낼 수 있는 결단도 중요하다. 재정은 필요한 곳에는 과감해야 하고 효과 없는 곳에는 냉정해야 한다. 지금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긴축도, 무조건적인 확장도 아니다. 미래 성장에 필요한 투자를 놓치지 않으면서 국가채무의 지속 가능성까지 지켜내는 정교한 운용이다. 내년도 예산안은 정부가 말하는 생산적 재정이 구호인지 새로운 재정운용 원칙인지 판가름하는 첫 시험대다. 신규 투자 규모만큼 기존 지출을 얼마나 덜어냈는지, 투자의 성과를 어떤 기준으로 검증할지, 늘어난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할지를 함께 보여줘야 한다. 미래에 투자한다는 명분은 충분하다. 이제 정부가 증명해야 할 것은 그 돈이 정말 미래를 바꾸는가 하는 점이다.
2026-08-26 09: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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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2차 제재 압박, 한국 기업이 또 희생양 돼선 안 된다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란과 거래하는 국가와 기업을 겨냥한 2차 제재 가능성을 다시 꺼내 들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4일 이란과 거래를 계속하는 해외 기업과 금융기관이 미국 중심의 금융시스템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날 이란의 석유·해운·항공·금·가상자산·기술 분야와 관련된 개인·기업·선박 60곳을 새로 제재했지만, 당장 가장 강력한 2차 제재까지 전면 시행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앞으로다. 미국이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까지 본격적으로 제재하기 시작하면 그 파장은 중동에 그치지 않는다. 달러 결제망과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접근을 무기로 삼는 2차 제재는 사실상 전 세계 기업에 “이란과 미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으로 작용한다. 한국 기업도 예외일 수 없다. 한미동맹은 우리 외교·안보의 핵심축이다. 북한 핵 문제와 첨단기술, 공급망,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 체제에도 책임 있게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동맹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기업이 예상하지 못한 손실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재의 목적과 동맹국 기업 보호는 별개의 문제다. 미국의 대이란 압박은 이미 국제 에너지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교역 상대에 대한 제재를 경고한 뒤 국제유가는 크게 출렁였다. 지난 21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94달러를 넘어섰고, 이란산 원유 공급 차질과 호르무즈해협 불안이 계속되면서 시장의 변동성도 커졌다. 한국처럼 원유 대부분을 수입하는 국가는 제재 자체보다 그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이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유가가 오르면 정유와 석유화학뿐 아니라 항공·해운·물류·제조업 전반의 비용이 올라간다. 전기·가스요금과 소비자물가에도 시차를 두고 영향을 준다. 대이란 제재가 강화될수록 한국경제가 감당해야 할 간접 비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해운업도 위험하다. 이란은 최근 호르무즈해협 통항 문제를 둘러싸고 외국 선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24일에는 통항 규칙 위반을 이유로 45척의 선박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면서 벌금과 억류, 화물 압류 가능성을 경고했다. 명단에는 한국 해운사와 관련된 선박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2차 제재와 이란의 맞대응이 동시에 강화되면 기업은 양쪽 위험을 모두 떠안는다. 미국 제재를 피하기 위해 이란과 거래를 끊더라도 이미 체결한 계약과 운송 일정에서 손실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기존 계약을 이행하다 미국 금융·결제망에서 제재를 받는다면 피해는 훨씬 커진다. 정부가 지금부터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첫째, 미국과의 사전 협상을 통해 한국 기업에 필요한 예외와 유예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과거 대이란 제재에서도 미국은 동맹국이나 특정 거래에 한시적 예외를 인정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이미 체결된 계약이나 인도적 물품, 국제 에너지시장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거래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유예기간을 확보해야 한다. 기업에게 어느 날 갑자기 거래를 끊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계약 정리와 결제 회수, 화물 운송을 마칠 시간을 줘야 한다. 정부가 미국과 협상해야 할 핵심도 바로 이런 현실적인 피해 방지 장치다. 둘째, 기업에 명확한 제재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2차 제재의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어떤 거래가 제재 대상인지, 어느 시점부터 적용되는지, 이란과 직접 거래하지 않고 제3국을 통해 거래하는 경우 어디까지 문제가 되는지 기업이 정확히 알기 어렵다. 특히 중소기업은 미국 제재 규정을 자체적으로 분석하기 어렵다. 정부와 금융당국, 무역기관이 공동으로 기업별 노출도를 점검하고 제재 대상 거래와 허용 거래를 신속하게 안내해야 한다. 제재를 몰라서 위반하는 기업이 나오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셋째, 금융권의 과도한 위축도 피해야 할 상황이다. 제재가 시작되면 금융기관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제 제재 대상이 아닌 거래까지 결제를 거부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른바 ‘과잉 준수’다. 기업 입장에서는 합법적인 거래임에도 돈을 받지 못하거나 송금이 막힐 수 있다. 정부는 미국과 협의해 제재 대상과 예외 거래를 명확히 하고 국내 은행에도 일관된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기업이 제재보다 금융기관의 지나친 위험 회피 때문에 먼저 피해를 보는 일은 방지하는 게 정부의 책무다. 넷째, 에너지와 물류 공급망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장기화하면 유가와 해상운임 상승은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 미국의 봉쇄와 제재 강화로 이란산 원유 수출이 크게 감소했고 중국 정유사들도 대체 물량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역시 원유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전략비축유 운용 계획을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호르무즈해협 통항이 불안해지는 상황에 대비해 대체 운송 경로와 선박 보험, 해운기업 지원책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미 간 협상의 원칙이 중요하다. 미국은 자국의 안보와 외교 목표를 위해 제재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도 자국 기업과 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지킬 책임이 있다. 동맹국의 정책에 협력하는 것과 우리의 경제적 손실을 아무 조건 없이 감수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미국 역시 동맹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전가해서는 안 된다.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동맹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동맹국 기업에 충분한 설명과 준비기간 없이 제재를 확대하면 미국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만 떨어질 수 있다. 더구나 이번 제재에서 미국이 이란산 원유 거래에 큰 역할을 하는 중국의 주요 금융기관에는 아직 가장 강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과의 충돌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도 미국에 분명히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 제재가 필요하다면 기준은 일관돼야 한다. 경제 규모나 협상력에 따라 어떤 국가는 유예하고 동맹국 기업에는 더 엄격한 부담을 지우는 방식이라면 공정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정부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이 구체적인 제재안을 발표한 뒤에야 대책회의를 여는 사후 대응이다. 제재 대상과 시점이 확정되기 전에 산업별 노출도를 파악하고 미국 재무부와 협의해야 한다. 에너지·해운·금융·건설·수출기업의 기존 계약을 전수 점검하고 피해 가능성을 미리 계산해야 한다. 기업에도 대비가 필요하다. 제재 위험이 높은 거래는 계약 단계부터 미국 제재 발동 시 책임과 손실을 어떻게 나눌지 명확히 해야 한다. 결제통화와 거래은행, 선박과 보험사까지 제재 위험을 사전에 점검하는 시스템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격화될수록 한국에는 외교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다. 안보동맹을 지키면서 에너지 가격을 안정시키고, 미국의 제재를 준수하면서 한국 기업의 피해도 줄여야 한다. 어느 한쪽만 강조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대외경제 환경이 불안할수록 외교의 실력은 선언이 아니라 손실을 얼마나 줄였는지에서 드러난다. 미국의 2차 제재가 현실화한다면 한국도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 기업이 예측할 수 없는 피해를 떠안게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미국의 최종 결정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예외와 유예, 결제 안전망과 에너지 공급망 대책을 지금부터 협상해야 한다. 동맹은 국익을 포기하는 관계가 아니다. 공동의 안보 목표를 지키면서 서로의 정당한 경제적 이해를 조정하는 관계다. 대이란 제재에서도 그 원칙은 달라질 수 없다. 제재에는 협력하되 한국 기업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선제적 외교전이 지금 필요하다.
2026-08-25 10: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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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조 미래대응기금, 미래투자 명분이 '정부 쌈짓돈' 돼선 안 된다
[경제일보] 정부가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미래 산업과 청년 등에 장기 투자하는 '미래대응기금'을 추진한다. 기획예산처가 지난 21일 밝힌 구상에 따르면 내국세가 최근 10년 안팎의 평균 증가율을 웃돌 경우 초과분을 기금에 적립한다. 세수가 부진할 때는 기금을 재정 안전판으로 활용해 변동성을 완화한다는 구상이다. 초과세수와 세계잉여금, 여유자금 운용수익 등도 재원으로 활용한다. 구체적인 규모는 다음 달 예산안과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확정되지만 첫해부터 100조원을 넘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의 문제의식에는 일리가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크게 늘었을 때 이를 단기 소비성 지출에 모두 써버리기보다 인공지능(AI), 첨단산업, 청년, 지방, 인재 등 미래 성장에 투자하자는 방향은 평가할 만하다. 경기 호황기에 세입이 늘었다고 지출을 급격히 확대했다가 불황기에 세수가 줄면서 다시 긴축에 나서는 재정 운용의 반복도 줄어들 수 있다.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을 일종의 '재정 저수지'로 설명하는 이유다. 문제는 규모가 커질수록 통제장치도 강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100조원 안팎의 자금을 정부가 장기간 운용한다면 사실상 또 하나의 거대한 재정계정이 생기는 셈이다. 미래투자라는 명분만 앞세우고 사용처와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면 정부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쌈짓돈'이나 '슈퍼 예비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정부 설명대로 연간 기금운용계획 자체는 국회의 심사를 받는다. 다만 국가재정법 제70조는 일정 요건 아래 기금운용계획의 주요항목 지출금액을 국회에 변경안을 제출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금융성 기금은 주요항목 지출금액의 20%, 금융성 기금은 30% 범위다. 미래대응기금처럼 대규모 기금이 신설될 경우 이 운용상 재량이 국회의 사전 통제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래대응기금에는 일반 기금보다 강화된 재정통제 장치를 두는 편이 맞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 변경이나 신규 사업 편성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고 국회 심의 없이 조정할 수 있는 범위도 일반 기금보다 엄격하게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분야별 투자 한도와 사용 목적도 법률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미래라는 이름만 붙이면 무엇이든 투자할 수 있는 구조가 돼서는 안 된다. 사업 평가도 엄격해야 한다. 정부는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에 집중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분야다. 그러나 범위가 넓을수록 각 부처가 기존 사업을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기금에 얹을 가능성도 커진다. 기존 예산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업이나 단순 현금성 지원까지 미래대응기금으로 돌린다면 기금 신설의 의미가 없다. 특히 AI와 첨단산업 투자는 성과를 냉정하게 측정하는 일이 관건이다. 투입된 정부 재원이 얼마나 많은 민간투자를 끌어냈는지, 기술 수준과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일자리와 수출에 어떤 효과를 냈는지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성과가 없는 사업은 과감하게 지원을 끊는 일몰제도 함께 검토할 만하다. 청년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 주거와 교육, 자산형성은 장기적으로 필요한 정책이지만 일회성 세수 호황을 영구적인 복지 지출의 재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번 시작한 지원은 중단하기 어렵다. 반도체 경기가 꺾여 기금 적립이 줄었을 때도 계속 지급해야 하는 사업이라면 결국 일반재정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재원의 지속 가능성은 미래대응기금의 가장 큰 숙제다. 정부 구상은 최근 10년 안팎의 내국세 증가 추세보다 세수가 더 늘었을 때 초과분을 적립하는 방식이다. 현재처럼 반도체 기업의 실적이 좋고 법인세가 크게 늘어날 때는 기금이 빠르게 쌓일 수 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3~5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될 수 있고, 세계 경기나 기술 경쟁에 따라 세수 전망이 급변할 수도 있다. 정부는 호황 때 적립하고 불황 때 꺼내 쓰는 구조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때문에 어느 수준까지 적립하고 어느 상황에서 얼마를 사용할 것인지 명확한 규칙이 필요하다. 세입이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기금을 일반회계 적자 보전에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미래투자기금이라는 성격도 흐려질 수 있다. 국가채무와의 관계도 따져볼 대목이다. 세수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왔을 때 그 돈을 모두 투자에 돌리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국가채무가 빠르게 늘어난 상황이라면 일부는 빚을 갚아 미래의 이자 부담을 줄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미래투자와 재정건전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기금에 들어오는 추가세수 가운데 일정 비율을 국가채무 상환에 우선 배분하거나, 국가채무비율과 재정수지에 따라 적립과 상환 비율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준칙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그때그때 판단하는 방식보다 사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재정 신뢰를 높인다. 기금 운용의 투명성도 중요하다. 투자 대상과 수익률, 손실, 사업별 집행 내역을 정기적으로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순리다.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평가기구를 두고 국회와 감사원이 상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수십조원의 돈이 움직이는데 의사결정 과정이 정부 내부에만 머문다면 정치적 사업이나 지역 나눠주기 예산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원칙이 유지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미래대응기금은 본질적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재정장치다. 특정 정부의 국정과제나 공약사업을 지원하는 계정이 돼서는 곤란하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기술과 시장성, 국가 경쟁력이라는 동일한 기준이 흔들리지 않아야 기금이 신뢰를 유지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벌어들인 세수를 미래에 재투자한다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저출생과 생산성 하락, 잠재성장률 둔화에 직면한 한국경제에는 이런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 재정도 단기 경기 대응을 넘어 성장의 토대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다만 좋은 목적이 좋은 제도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100조원 규모의 기금을 만들면서 통제장치가 약하다면 미래투자보다 재정 낭비의 통로가 될 위험이 더 크다. 반대로 국회 통제와 성과 평가, 재정준칙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설계하면 정부가 강조하는 신속한 미래투자의 장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통제의 균형이다. 정부가 신속하게 미래 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되 큰 돈이 움직일 때는 국회의 감시와 국민의 검증을 반드시 거치도록 해야 한다. 미래대응기금은 이름 그대로 미래를 위한 돈이어야 한다. 정부가 쓰기 편한 돈이 돼선 안 된다. 반도체 호황이 가져온 세수를 청년과 AI, 지역과 인재에 투자하겠다면 그만큼 더 엄격한 회계와 평가, 국회 통제를 받아야 한다. 미래를 위한 100조원이 정부의 쌈짓돈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기금 조성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2026-08-24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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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2000조, 금리 올리면서 빚 늘리는 정책 끝내야
[경제일보] 가계부채가 결국 200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이 지난 19일 발표한 ‘2026년 2분기 가계신용’에 따르면 6월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조8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25조9000억원 늘었다. 증가 폭은 2021년 3분기 이후 가장 컸다. 가계대출은 1891조3000억원으로 24조9000억원 증가했고, 판매신용도 128조5000억원으로 9000억원 늘었다. 2000조원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증가 속도다. 가계부채가 줄기는커녕 다시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은 금리와 부동산, 금융정책 사이에 엇박자가 생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물가를 잡겠다며 기준금리를 올리고 다른 쪽에서는 주택시장과 실수요자를 지원한다며 금융을 풀 경우 정책 효과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인상했다.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물가 상승 압력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해서다. 여기에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을 둘러싼 금융안정 위험도 여전히 크다고 봤다. 그러나 금리가 올라가는데도 가계대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면 통화정책만으로 부채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계부채의 위험은 단순히 금융기관의 건전성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출이 늘면 금리 상승의 충격도 커진다. 특히 변동금리 대출을 많이 가진 가계와 소득이 불안정한 자영업자, 다중채무자에게 기준금리 인상은 곧바로 이자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한국은행도 최근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취약차주 비중 상승과 일부 취약계층의 채무상환능력 저하를 위험요인으로 지적했다. 가계가 벌어들인 소득 가운데 상당 부분을 원리금 상환에 쓰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소비 감소는 자영업자 매출 감소로 이어지고 다시 내수 부진을 키운다. 가계부채는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 성장과 소비, 자영업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적 문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최근 주택·금융지원 정책은 더욱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와 함께 청년·신혼부부 등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 지원을 강화하고, 주택 공급 촉진을 위한 금융지원도 확대하고 있다. 공급 프로젝트에 필요한 금융지원을 기존 26조3000억원에서 47조8000억원 이상으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3일 내놓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금융 종합대책에서 주택공급 금융지원 확대와 함께 올해 가계부채 총량 증가율 관리 목표를 당초 1.5%에서 3% 수준으로 높였다. 확대된 대출 여력을 주택공급과 청년·실수요자 지원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 대출 수요를 억제하는 시점에 가계부채 총량 증가 허용폭을 두 배로 넓힌 것은 시장에 엇갈린 신호를 줄 소지가 있다. 정책 목적이 다르더라도 통화·금융정책의 방향이 충돌하지 않도록 세밀한 조율이 필요하다.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향은 맞다. 서울과 수도권의 공급 부족이 장기간 이어지면 집값 불안과 대출 증가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정상적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이 일시적인 자금경색 때문에 멈추지 않도록 금융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공급 금융과 주택 구입 금융은 구분해야 한다. 실제 주택 공급을 늘리는 PF와 건설자금은 필요한 곳에 투입하되, 가계의 주택 매수 여력을 무차별적으로 키우는 지원은 신중해야 한다. 저금리·고한도 대출이 실수요자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확대되면 공급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매수 수요부터 자극할 수 있다. 실수요자 보호라는 명분도 정교하게 적용해야 한다. 생애 최초 구입자나 신혼부부, 청년의 주거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소득과 상환능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대출 한도를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결국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집을 살 기회를 주는 것과 빚을 낼 기회를 늘리는 것은 같은 정책이 아니다. 가계부채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의 방향을 맞추는 일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리며 수요를 억제하는데 정부가 재정과 금융으로 주택 수요를 크게 늘린다면 한쪽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쪽은 가속페달을 밟는 셈이다. 결국 더 높은 금리와 더 많은 부채라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집값 안정이라는 목표 아래 공급 확대, 대출 규제, 세제 정책이 같은 방향을 가야 한다. 공급은 장기적으로 충분히 늘리되 단기적인 투기 수요와 과도한 레버리지는 누르는 것이 먼저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주택가격 상승을 전제로 과도하게 빚을 내는 구조는 줄여 나가야 한다. 취약차주 지원도 전면적인 채무 탕감이나 이자 보전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상환 의지가 있고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는 차주에게는 만기 조정과 장기·고정금리 전환, 재기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반면 상환능력을 넘어선 신규 대출까지 정책적으로 늘려주는 것은 문제를 미래로 미루는 데 불과하다. 가계부채 문제의 근본에는 부동산에 지나치게 집중된 한국 가계의 자산구조도 있다.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강할수록 가계는 미래 소득을 앞당겨 대출을 받고 주택을 산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 다시 대출이 늘고 그 유동성이 집값을 밀어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주택 공급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융자산을 통한 장기적인 자산 형성 기회를 넓히고, 전월세 시장을 안정시키며, 주거 이동이 자산투자와 동일시되는 구조도 함께 손봐야 한다. 가계부채 2000조원 돌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다. 저금리와 부동산 상승 기대, 대출 확대와 정책의 반복적인 완화·규제가 오랜 기간 쌓인 결과다. 어느 한 정부나 한국은행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선택은 다를 수 있다. 통화정책과 금융정책, 주택정책이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구조부터 끝내야 한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린다면 정부도 불필요한 수요 자극부터 걷어내야 한다. 주택 공급 금융은 확대하되 가계부채를 다시 끌어올릴 정책대출은 선별해야 한다. 가계부채는 한번 커지면 금리를 내릴 때도, 올릴 때도 경제정책의 발목을 잡는다. 금리를 올리면 이자 부담이 커지고 금리를 낮추면 다시 부동산과 대출을 자극할 수 있다. 2000조원의 부채는 한국경제가 움직일 수 있는 정책 공간을 그만큼 좁히고 있다는 의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출을 조이느냐 푸느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공급에 필요한 돈은 풀되 투기와 과도한 레버리지는 막아야 한다. 취약차주는 정밀하게 가려 보호하는 금융정책이 요구된다. 가계부채 2000조원은 숫자가 아니라 경고다. 금리는 올리면서 빚은 더 늘어나는 정책 조합이 계속된다면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이 떠안는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정책 방향부터 맞춰야 한다. 가계부채를 관리하면서 주택 공급과 실수요자를 보호하는 정교한 균형이 지금 한국경제에 가장 필요한 과제다.
2026-08-20 10: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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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미래산업, 또 하나의 백화점식 정책 돼선 안 된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청와대에서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이은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 방안을 직접 주재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날 '미래성장동력 7대 SEED 보고회'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R), 핵융합, 차세대 재생에너지,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 첨단 공급망을 10~20년 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전략 분야로 제시했다. 목표도 야심차다. 정부는 경수형 SMR을 2035년 상용화하고, 2029년까지 오류정정이 가능한 100큐비트 양자프로세서(QPU)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2030년 민간 주도 달 착륙선을 발사하고, 첨단바이오에서는 AI 바이오 인프라 구축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상용화를 추진한다. 미래 기술에 국가가 선제적으로 투자하는 방향은 옳다. 반도체 하나에 국가 수출과 성장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해지고 에너지와 핵심광물, 바이오와 우주까지 경제안보 영역으로 편입되는 상황에서 제2, 제3의 성장동력을 준비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무엇을 선정했느냐보다 어떻게 키울 것이냐다. 우리 정부의 미래산업 정책은 정권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혁신성장, 한국판 뉴딜, 국가전략기술 등 간판은 달랐지만 비슷한 분야가 반복해서 포함됐다. 정부가 여러 산업을 동시에 전략 분야로 지정하고 예산을 나눠주다가 정권이 바뀌면 사업 이름과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번 7대 SEED가 과거 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첫 번째 원칙은 선택과 집중이다. SMR과 핵융합, 재생에너지, 양자, 우주항공, 바이오, 첨단 공급망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것과 한국이 모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국가 재정과 인재, 연구개발 역량은 한정돼 있다. 양자와 우주, 핵융합처럼 막대한 장기투자가 필요한 분야까지 모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다면 결국 각 부처와 연구기관에 예산을 나눠주는 백화점식 지원으로 흐를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이 이미 기술과 산업 생태계를 가진 분야와 장기적인 원천기술 확보가 필요한 분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SMR처럼 원전 산업과 제조 공급망이라는 기존 강점이 있는 분야는 상용화 전략을 공격적으로 짤 수 있다. 반면 핵융합이나 심우주 탐사처럼 장기간의 기초연구가 필요한 분야는 당장의 매출과 수출 실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술 수준과 시장성, 민간기업의 투자 의지, 공급망 파급효과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나눠주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정부와 민간의 역할도 분명해야 한다. 정부가 미래 산업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시장의 승자를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 특정 기술과 기업을 '국가대표'로 정해 지원을 집중하면 민간의 경쟁과 혁신이 오히려 약해질 수도 있다. 정부는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연구와 대규모 실증 인프라, 규제개혁과 초기 시장 형성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술개발과 사업화, 해외시장 진출은 기업의 경쟁과 선택에 맡겨야 한다. 정부 지원 1원이 민간투자 몇 원을 끌어냈는지, 지원이 끝난 뒤에도 기업이 투자를 이어가는지를 성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미래기술은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다. 10년 뒤 시장을 지금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개 분야 가운데 일부는 시장이 예상보다 늦게 열리거나 다른 기술에 밀릴 수 있다. 따라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만큼 중단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원칙을 미리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 기간마다 세계 기술 수준과 민간투자, 시장 규모를 평가하고 경쟁력을 잃은 사업은 과감하게 축소해야 한다. 반대로 한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앞서가는 분야에는 자원을 더 집중해야 한다. 정부 사업이 한번 시작되면 예산과 조직, 지역 이해관계 때문에 없애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성과가 부족해도 지원이 이어지는 이른바 '좀비 프로젝트'가 생겨서는 안 된다. 미래산업 정책의 목표는 실패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빨리 찾아내 자원을 다시 배치하는 데 있다. 인재 전략도 함께 가야 한다. SMR과 핵융합,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는 모두 세계적으로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한 분야다. 정부가 연구개발비를 늘려도 이를 수행할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없다면 목표는 계획표에 머문다. 대학 정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해외 우수 연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국내 연구자가 장기간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실패한 연구에도 재도전할 기회를 주고 박사급 연구자가 산업계와 연구소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이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7대 SEED는 대부분 2030년대 이후를 바라보는 사업이다. 한 정부 임기 안에 끝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여야와 산업계, 과학계가 최소한의 장기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미래산업 전략은 대통령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가의 프로젝트가 돼야 한다. 첨단 공급망 전략도 단순한 국산화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든 소재와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반드시 국내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하는 품목과 우방국과 공급망을 나눌 품목을 구분해야 한다. 경제안보도 결국 비용과 효율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반도체가 오늘의 한국경제를 만들었다면 10년, 20년 뒤에는 새로운 산업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도체도 정부가 어느 날 '국가대표 산업'으로 지정했다고 세계 1위가 된 것은 아니다. 수십 년간 기업의 투자와 연구개발, 인재 축적,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쌓인 결과다. 정부가 씨앗을 뿌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씨앗이 큰 나무로 자랄지는 시장과 기술의 경쟁이 결정한다. 국가의 역할은 모든 씨앗에 같은 양의 물을 주는 데 있지 않다.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는 자원을 집중하고, 성장이 멈춘 사업에는 지원을 과감히 줄이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손자병법 허실편에는 모든 곳을 지키려 하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있다. 국가 산업전략도 다르지 않다. 한정된 자원을 모든 분야에 흩뿌리면 세계 최고가 필요한 첨단기술 경쟁에서 어느 하나도 앞서기 어렵다. 7대 SEED는 출발점일 뿐이다. 정부가 평가받을 것은 7개의 화려한 청사진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실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으로 키웠는지다. '제2의 반도체'는 예산을 많이 배정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술 수준과 시장성, 민간 역량을 냉정하게 따지고 가능성 있는 분야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실패한 사업을 중단할 용기까지 갖출 때 비로소 미래성장동력 전략은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래산업 육성에서 가장 필요한 것도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2026-08-13 17: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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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금리 인상, 물가 잡다 내수를 더 얼려선 안 된다
[경제일보] 한국은행이 추가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는 11일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기준금리를 2.75%로 올린 데 이어 국내 수요 회복에 따른 물가 압력을 경계하고 있다. 물가 안정이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는 점에서 필요한 대응이다. 그러나 금리를 올리는 데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의 대출금리가 상승하고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높아진다. 특히 대출 의존도가 높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취약차주에게 금리 인상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금 한국경제는 금리를 올리기에도, 그대로 두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반도체 수출과 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성장률 전망은 개선되고 있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내수경기는 여전히 차갑다. 소비 회복은 더디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어려움도 계속되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건설업의 부실 우려도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만 바라보고 금리를 빠르게 올리면 거시경제 지표는 안정될지 몰라도 내수와 취약 부문의 부담은 그만큼 무거워진다. 반대로 가계와 기업 부담만 걱정해 물가 상승 압력을 방치하면 실질소득이 줄고 서민경제가 더 큰 피해를 입는다. 한국은행이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 이유다. 최근의 물가 흐름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국제유가와 환율 같은 외부 요인뿐 아니라 내수 회복과 임금, 서비스 가격 등 국내 요인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다면 통화당국으로서는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물가 상승세가 굳어지면 나중에는 더 큰 폭의 금리 인상이 필요해진다. 그렇다고 기준금리를 물가만 잡는 단일 처방전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통화정책은 경제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는 순간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자영업자 대출과 기업 대출에 동시에 충격이 전달된다. 통화정책의 효과가 강력한 만큼 부작용도 폭넓게 살펴야 한다. 가장 우려되는 곳은 가계부채다. 한국의 가계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부채를 안고 있다.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높은 차주에게 추가 금리 인상은 월 원리금 부담 증가로 바로 이어진다. 주거비와 생활물가 부담까지 커진 상황에서 이자 비용이 다시 늘어나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소비 감소는 자영업자의 매출 감소로 연결되고 다시 내수 침체를 키우는 악순환으로 번진다. 취약차주에 대한 정교한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금리 인상 자체를 막기보다 그 과정에서 충격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원리금을 상환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금리 부담을 겪는 차주에 대해서는 채무조정과 장기·고정금리 전환 등 현실적인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자영업자 대책도 단순한 만기 연장에 그쳐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이후 누적된 부채에 경기 부진과 고금리가 겹치면서 경쟁력이 있는 사업자와 사실상 상환 능력을 잃은 사업자를 구분할 필요성이 커졌다. 정상 사업자에게는 금융 지원을 제공하되 회생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는 폐업과 재취업, 채무조정을 연결하는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부동산 PF도 경계해야 한다. 금리가 높아질수록 사업성이 낮은 개발사업의 금융비용은 커지고 부실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부실을 무조건 금융권이 떠안게 하는 것도, 정부가 세금으로 막아주는 것도 답이 아니다. 사업성이 없는 사업장은 신속하게 정리하고 정상 사업장은 자금이 막혀 쓰러지지 않도록 선별 지원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은행과 정부 정책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올리는데 정부가 재정지출 확대와 각종 지원책으로 수요를 크게 자극한다면 정책 효과는 상쇄된다. 한쪽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쪽은 가속페달을 밟는 식이어서는 경제의 불확실성만 커진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집값 불안을 막겠다며 대출을 규제하면서 동시에 특정 계층에 과도한 금융 지원을 제공하면 시장에는 엇갈린 신호가 간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투기성 레버리지를 억제한다는 명확한 원칙 아래 금융·세제·공급 정책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역할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금리 결정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기준으로 중앙은행이 독립적으로 해야 한다. 정부가 경기나 정치적 이유로 금리 결정에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책 효과와 위험 요인에 대한 정보 공유와 거시정책 조율은 훨씬 정교하게 이뤄져야 한다. 금리 결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다. 추가 인상이 필요하더라도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야 한다. 물가 기대가 급격하게 높아지지 않는다면 한 차례 금리를 올린 뒤 소비와 고용, 부동산과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금리는 한번 올린 뒤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다는 이유만으로 긴축 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호황과 자영업자·중소기업이 느끼는 경기는 크게 다르다. 평균적인 성장률만 보고 금리를 결정하면 경제 내부의 양극화를 놓친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이른바 '성장의 역설'이다. 수출과 반도체 투자로 성장률이 높아지면 수요와 물가가 상승해 금리를 올려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그 금리 인상의 비용은 반도체 대기업보다 대출이 많은 가계와 자영업자에게 더 크게 돌아간다. 성장의 과실과 긴축의 비용이 서로 다른 곳에 집중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통화정책으로 경제 전체의 물가를 관리하되 재정과 금융정책은 취약계층에 정밀하게 집중해야 한다. 모든 국민의 이자를 대신 내주는 식의 보편적 지원은 물가를 다시 자극한다. 상환 능력과 소득, 부채 수준에 따라 지원 대상을 정교하게 선별해야 한다. 물가 안정과 내수 회복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가가 불안하면 실질소득이 줄고 소비도 위축된다. 반대로 내수가 무너지면 성장과 고용이 흔들린다. 두 목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경제정책의 실력이다. 한국은행 역시 시장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추가 금리 인상의 조건이 무엇인지, 어떤 물가와 금융 지표를 중점적으로 보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시장이 금리 경로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가계와 기업도 대출과 투자를 계획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는 금리 수준 자체보다 더 큰 불안을 부른다. <논어>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있다. 통화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물가를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물가를 잡겠다는 이유로 경제의 약한 고리까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이라는 원칙을 지키되 금리 인상이 가계와 자영업자, 부동산 PF와 내수에 미칠 충격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도 중앙은행의 긴축 효과를 상쇄하는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면 국민에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취약 부문의 충격을 줄일 안전장치를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물가를 잡는 것도 결국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다. 물가는 안정됐지만 가계와 자영업자가 먼저 무너지는 정책이라면 성공한 통화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2026-08-12 10: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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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주체를 다시 짜라 ③정부편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정부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정부 역할이 산업 지원과 규제 정비에 집중됐다면, AI 시대에는 데이터, 전력망, 인재, 안전망, 소비자 보호, 공공서비스, 국가 안보까지 포괄하는 종합 설계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AI가 기업의 생산 방식과 소비자의 생활 방식을 동시에 바꾸면서 정부도 단순한 규제자나 투자자를 넘어 국가 운영체제의 설계자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 진흥, 규제 설계, 인프라 구축, 인재 양성, 소비자 보호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11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AI는 이미 산업정책의 핵심 축으로 올라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달 16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AI 데이터센터(AIDC), 피지컬 AI, K-반도체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제시하고, 해외 투자 유치를 포함해 총 550조원 규모의 민간투자로 기가와트급 초거대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예약과 결제 등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로 서비스를 고도화해 ‘1인 1 AI 에이전트’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도 내놨다. AI 제도 정비도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은 올해 1월 22일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AI 연구개발과 학습용 데이터 구축, AI 활용 확산, 창업 지원, 인재 양성, 데이터센터 구축 지원 등의 근거를 담고 있다. 동시에 고영향 AI에 대한 투명성, 안전성, 인간 감독 등 신뢰 확보 장치도 포함했다. 한 AI업계 관계자는 “AI 산업은 속도가 생명인 만큼 과도한 규제는 부담이 될 수 있다”면서도 “설명 책임과 안전장치가 없으면 소비자와 시장의 신뢰를 잃을 수 있어 산업 진흥과 신뢰 구축을 동시에 설계하는 정부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AI 산업정책, 지원금 경쟁으로 끝나선 안 돼 정부의 AI 산업정책은 대규모 투자 계획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반도체는 AI 서버와 데이터센터의 핵심 인프라이고, 피지컬 AI는 로봇과 자율주행, 제조 자동화와 연결된다. AI 데이터센터는 모든 AI 서비스의 기반이 되는 컴퓨팅 인프라다. 정부가 이 세 분야를 묶어 국가 프로젝트로 제시한 것은 AI를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제조업, 에너지, 지역경제, 안보가 결합된 복합 산업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다만 대형 프로젝트가 성과로 이어지려면 재정 투입과 세제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데이터센터 입지, 전력망 확충, 용수 확보, 지역 주민 수용성, 전문 인력 공급이 함께 해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21일 정부가 수도권 밖 호남에 조성하려는 반도체 산업단지를 두고 대규모 전력·용수 수요와 지역 주민 반발이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산업단지 조성에는 800조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되며, 계획대로면 4개 반도체 공장의 전력 수요만으로도 광주·전북·전남 지역의 현재 연간 전력 소비량의 70∼80%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업 투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전력망, 용수, 도로, 대학 인력, 지역 민원 조정까지 정부가 함께 풀어야 실제 착공과 운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데이터·전력·인재가 새 국가 인프라로 부상 AI 시대의 국가 인프라는 도로와 항만, 공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데이터, 클라우드, GPU, 전력망, 고급 인재가 새로운 국가 인프라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다. AI 모델을 개발하고 운영하려면 대규모 학습 데이터와 안정적인 컴퓨팅 자원,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AI 정책은 과학기술 정책인 동시에 에너지 정책, 교육 정책, 지역균형 정책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전력 수요와 직결된다. AI 연산은 기존 인터넷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 정부가 권역별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더라도 전력망 보강과 재생에너지, 원전, 송전선로 문제를 동시에 조정하지 못하면 투자 계획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재 문제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AI 전문인력은 글로벌 빅테크와 국내 대기업, 스타트업이 동시에 확보 경쟁을 벌이는 분야다. 대학 교육만으로는 산업 현장의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과기정통부는 올해 12개 부처와 함께 514만명을 대상으로 AI 교육을 실시하고, AI디지털배움터를 전국 69개 거점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한 서울 소재 대학 교수는 “AI 인재 정책은 박사급 연구자 양성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중소기업 직원, 공무원, 교사, 금융·제조 현장 인력까지 AI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재교육 체계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와 신뢰 구축 병행 요구 AI 기본법 시행으로 한국은 AI 산업 진흥과 신뢰 기반 조성을 함께 추진할 법적 틀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법은 고영향 AI에 대해 투명성과 안전성 확보를 요구하고, 생성형 AI 결과물에 대한 표시 의무 등도 규정하고 있다. 의료, 금융, 교통, 채용, 교육처럼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 재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에서는 AI 활용에 더 높은 수준의 설명 책임과 인간의 감독이 요구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AI 기본법과 시행령이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인증, 문서화, 영향평가 부담이 과도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소비자와 시민사회에서는 AI가 신용평가, 채용, 보험, 의료 판단에 활용될 경우 설명 가능성과 이의제기 절차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한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AI 기본법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초기 기업에 대기업 수준의 문서화와 검증 부담이 부과되면 서비스 출시 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며 “위험도가 낮은 서비스와 고영향 AI를 구분해 규제를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AI가 금융 심사나 채용, 보험료 산정에 쓰일 경우 소비자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기 어렵다”며 “기술 발전을 이유로 설명 책임과 이의제기 절차가 약화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과제는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에 있다. AI 산업을 키우기 위해 규제를 무조건 늦추면 신뢰가 약해질 수 있고, 신뢰 확보를 이유로 규제를 과도하게 설계하면 혁신 속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된다. 분야별 위험 수준에 따라 규제를 달리 적용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공부문 AI, 행정 혁신의 시험대 정부 자체도 AI 전환의 대상이다. 행정 민원, 복지 심사, 세금 신고, 재난 대응, 교통 관리, 보건의료, 교육 행정 등 공공서비스 전반에서 AI 활용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를 활용하면 반복 민원을 줄이고 행정 처리 속도를 높이며,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다만 공공부문 AI에는 민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정부의 AI 판단은 국민의 권리와 직접 연결될 수 있어서다. 복지 수급 대상 선정, 세무 조사, 채용·평가, 치안·감시 분야에서 AI가 활용될 경우 오류나 편향이 발생하면 피해가 클 수 있다. 공공 AI는 효율성뿐 아니라 투명성, 책임성, 감사 가능성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처별 정책 넘어 국가 조정 능력이 관건 AI 시대 정부의 역할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산업을 키우면서도 소비자를 보호해야 하고, 투자를 촉진하면서도 전력과 지역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기업의 혁신을 막지 않으면서도 고영향 AI의 위험을 관리해야 하고, 청년에게는 새 일자리를 만들고 기존 노동자에게는 전환 교육과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전환의 성패가 개별 부처의 정책 경쟁이 아니라 정부 전체의 조정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과학기술, 산업, 금융, 교육, 노동, 복지, 에너지 정책이 따로 움직이면 AI 전환이 성장보다 갈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대로 인프라, 인재, 규제, 안전망, 신뢰 체계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을 경우 AI가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AI 시대 정부는 돈을 나눠주는 투자자나 기업을 단속하는 규제자에 머물 수 없다”며 “국가 데이터 인프라와 전력망, 인재 양성, 소비자 보호, 일자리 전환을 함께 설계하는 운영체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6-08-11 11: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