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 부결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심의위원들에게 부결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다. 2011년 문화재청 고위 공무원의 권유로 지정 신청이 이뤄졌다는 증도가자는 6년 뒤 보물 지정이 부결됐다. 이후 감사원 조사에서 핵심 심의자료의 누락과 왜곡 문제가 드러났지만 국가유산청은 통계청의 분석 방법을 문제 삼으며 기존 판단을 사실상 유지하고 있다.
22일 국회와 국가유산청 등에 따르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23일 국가유산청 등을 대상으로 종합국정감사를 실시한다. 앞서 지난 8일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은 2017년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근거로 당시 심의 간사의 부결 종용 의혹을 제기했다. 국가유산을 찾아 보존해야 할 기관의 태도로 적절하냐는 질의에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잘못된 것 같다"는 취지로 답했다.
◆국가 권유로 신청했는데 6년 뒤 부결…처음부터 불거진 심의 공정성 논란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 신청은 2011년 10월 이뤄졌다.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에 따르면 당시 엄승용 문화재청 정책국장이 같은 달 3일경 직접 찾아와 조속한 문화재 지정 신청을 권유했다. 김 회장 측은 사흘 뒤인 10월 6일 금속활자 101점의 보물 지정을 신청했다.
김 회장은 엄 국장이 두세 차례 방문해 지정을 권유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 지정 업무를 총괄하던 고위 공무원이 먼저 신청을 권유했지만 문화재청은 약 6년간 결론을 미루다가 결국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는 것이다.
증도가자는 고려시대 불교서적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다. 실제 이 책을 찍은 활자로 확인되면 제작 시기는 1239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현존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인 1377년 '직지심체요절'보다 최소 138년 앞선 시기의 금속활자 실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은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에서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 서체와 주조 방식, 조판 실험 등을 근거로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출처와 소장 경위가 불분명하고 관련 유물과의 비교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부결 사유에 포함됐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청이 구성한 지정조사단은 분석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문화재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결 결정을 내린 과정에 담당 공무원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 심의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은 2017년 부결 이전부터 있었다. 박문열 당시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장은 2013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소장자가 고미술상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장사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게 아무리 좋다 해도 (문화재 지정으로) 값이 뛰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말했다.
김 회장 측은 소장자의 직업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발언이라며 반발했다. 2014년 4월 30일에는 박 전 위원장을 지정 심의에서 배제해 달라는 기피 신청서까지 제출했다. 그럼에도 박 전 위원장은 2017년 증도가자 보물 지정 심의에 참여했다.
박 전 위원장을 둘러싼 의혹은 당시 청와대 인사와의 관계로도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던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과 박 전 위원장 사이에 유착설까지 제기된 것이다.
김 회장은 당시 청와대 핵심 인사와의 관계가 증도가자 보물 지정 심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두 사람의 관계와 외부 개입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의자료 핵심 수치 누락…'사료됨'이 '확인됨'으로 바뀐 경위도 의혹
2017년 부결 당시 문화재위원회 간사는 황권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이었다. 황 과장은 지정조사 결과를 위원회에 보고하는 업무에 관여했으며, 심의가 끝난 지 불과 한 시간가량 지난 오후 4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 설명회에서도 직접 부결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두 쪽 분량의 보도자료와 100여 장의 발표자료를 준비했다.
남권희 교수는 방대한 발표자료가 심의 직후 공개된 점을 들어 부결 결론을 사전에 정해놓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 회장 측도 당시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 부결 처리일이 실제 심의·발표일보다 하루 늦은 4월 14일로 기재됐다며 행정 처리 경위를 문제 삼고 있다.
부결 판단의 근거가 된 조사자료에서는 더욱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김 회장 측의 감사 제보를 검토한 감사원은 2025년 9월 관련 사안을 국가유산청에 이첩했다. 국가유산청은 올해 1월 자체감사를 벌여 2017년 심의자료의 작성과 보고 과정 등을 살폈다.
핵심은 금속활자를 실제 책의 글자 자리에 배열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조판 실험이었다. 당시 조사자료에는 활자본과 이를 본떠 목판에 다시 새긴 책 사이에 크기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속명의록'은 0.3~0.5㎝, '석보상절'은 0.8㎝의 차이가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에 보고되는 과정에서 속명의록은 크기 차이가 없다는 취지로 설명됐고 석보상절의 0.8㎝ 수치도 빠졌다. 문화재위원회는 활자를 책의 글자 자리에 배열했을 때 약 0.45㎝가 부족하다는 점을 주요 부결 근거로 삼았다.
당시 측정자료에 있던 0.8㎝의 차이는 보고 과정에서 빠졌지만, 그보다 작은 0.45㎝의 부족분은 보물 지정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된 셈이다. 국가유산청이 올해 국가유산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도 당시 발표자료의 치수 차이 등에 관한 왜곡 설명과 추가 조사자료의 검토 시간 부족 문제가 감사원 지적사항으로 기재돼 있다.
조사자료의 표현이 바뀐 정황도 문제로 제기됐다. 김 회장 측에 따르면 주조 관련 원 조사자료에는 상하를 분할한 목형으로는 주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후 문화재청의 대외 자료에서는 '확인됨'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사료됨'은 조사자의 판단을 나타내지만 '확인됨'은 사실관계가 확정됐다는 의미를 담는다. 김 회장 측은 전문가의 추정이 확정적인 조사 결과로 바뀐 경위와 이 표현이 실제 심의위원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를 문제 삼고 있다.
보물 지정 신청 대상도 아닌 유물의 제출을 요구한 점도 논란이 됐다. 문화재청은 증도가자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청동 수반과 초두의 비교조사를 요구했지만, 두 유물이 실제로 함께 출토됐다는 근거는 물론 소유자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이들 유물과 비교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물 지정 부결 사유에 포함했다.
감사원 조사자료에는 신청인 소유로 확인되지 않은 유물의 제출을 요구한 것이 과도하며 관련 법령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담겼다. 2017년 부결 결과를 신청인에게 공식 통보하기까지 약 6년이 걸린 행정 처리 역시 규정 위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감사원 지적에도 기존 판단 유지…당시 심의 관계자들 다시 관여 논란
감사원은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의 분석을 토대로 조판 실험 결과도 다시 검토했다. 통계청 분석에서는 홈형 활자 15자를 배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존 심의에서 조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근거와 다른 결과였다.
그런데 국가유산청은 외부 용역을 통해 통계청의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놨다. 신청된 활자가 증도가 인쇄에 사용된 전체 활자를 대표하는 표본이라고 보기 어렵고, 자료의 분포 특성도 통계청이 적용한 검정 방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통계분석의 적정성과 별개로 당시 심의자료에서 중요한 수치가 빠지고 원래의 표현이 달라진 경위는 여전히 남아 있다.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공식 자료에도 핵심 수치 누락과 발표자료의 왜곡 설명 문제가 감사원 지적사항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8월 13일 국가유산위원회 동산문화유산분과는 감사원 지적에 따라 상정된 증도가자 보물 지정 관련 자체감사 후속 조치 검토 안건을 부결했다. 안건에는 통계청의 조판 가능성 분석을 지정 심사에 반영할지, 청동 수반과 초두를 추가로 확보해 비교조사할지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반면 같은 회의에서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증도가자 계열 금속활자 일괄공모 계획은 보고 안건으로 접수됐다. 과거 심의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후속 검토는 부결된 가운데 조사 대상을 전국으로 넓히는 새로운 계획이 제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심의 관계자들의 재참여 문제도 불거졌다. 2017년 증도가자 심사에 관여했던 정제규 전문위원은 현재도 국가유산위원회 동산문화유산분과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 회장에 따르면 정 전문위원은 올해 감사원 지적과 관련해 열린 국가유산청 회의에도 두 차례 참석했다.
문제는 과거 부결 심사에 참여했던 인사가 당시 판단의 적정성을 다시 살피는 논의에도 관여했다는 점이다. 현행 '국가유산위원회 규정' 제11조는 해당 안건에 직접 관여한 위원이나 전문위원을 조사·심의·의결에서 제척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 회장은 정 전문위원이 올해 회의에서 맡은 역할과 향후 재검증 참여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8일 국감에서 임오경 의원 역시 과거 심의 관계자들의 새로운 검증 참여 문제를 지적했다. 허민 청장은 전문위원에게 최종 결정권은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해당 전문위원의 제척 필요성을 인정하는 취지로 답했다.
김 회장은 황권순 국장과 박문열 전 위원장, 정제규 전문위원 등을 지목하며 이른바 '문화계 카르텔' 의혹을 제기했다. 황 국장은 2017년 심의 간사로 조사자료 보고에 관여했으며, 올해 1월 무형유산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6개월여 만인 8월 7일 자연유산국장으로 전보됐다. 감사 후속 조치 안건을 다룬 국가유산위원회 회의를 불과 엿새 앞둔 시점이었다.
박 전 위원장은 기피 신청에도 보물 지정 심의에 참여했고, 정 전문위원은 과거 부결 심사에 이어 최근 감사 관련 논의에도 관여했다. 김 회장은 이들의 역할과 인적 관계가 증도가자 지정 심사와 후속 검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이들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증도가자를 역사에서 지우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 지적에 맞서 기존 판단을 유지하는 국가유산청 공무원들과 전문위원들을 향해서도 어느 나라 공무원인지 의심스럽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찬경 양심선언에 60억원 회유 의혹…형사책임 검토까지
김 회장은 증도가자의 진위를 둘러싼 과거 논란에도 외부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개입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중국 단둥에서 가짜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주장이 확산된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사동 고미술상 정찬경은 증도가자를 중국에서 만든 가짜 활자로 몰아가는 데 자신이 관여했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정씨는 다른 고미술상 등의 회유를 받아 중국 단둥에서 모조 금속활자와 공장을 섭외하고, 방송 취재진을 현장으로 안내해 김종춘 회장의 증도가자가 중국산 가짜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이 과정에서 채무 10억원의 변제와 사업자금 50억원 등 총 60억원을 제공받기로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이러한 양심선언을 근거로 증도가자 진위 논란의 배후에 금전적 이해관계에 따른 조직적인 음해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법적 대응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 조사자료의 '주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사료됨'이 대외 자료에서 '확인됨'으로 바뀐 경위와 심의 간사의 부당한 개입 의혹이 핵심이다. 허위공문서작성죄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성립 여부가 법률적 쟁점으로 거론된다.
김 회장 측은 당시 회의록과 조사보고서 등을 근거로 형사 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감에서는 국가유산청의 일괄공모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임오경 의원은 이미 2017년 조사자료와 감사원 조사 결과가 있는데도 기존 신청 활자 101점부터 다시 검증하지 않고 새로운 공모를 추진하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임 의원이 일괄공모를 '꼼수'라고 지적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과거 부결의 근거가 잘못됐다는 감사원 지적부터 검토하지 않은 채 조사 대상을 전국으로 넓히면 기존 신청 유물에 대한 판단이 다시 늦어질 수 있다는 취지다.
같은 당 조계원 의원도 기존 활자 101점의 과학적 재검증을 먼저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허 청장은 출토 경위가 불분명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활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어 폭넓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내에서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사이 중국 일부 학계에서는 이미 해당 금속활자를 송·원대 유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가 증도가자의 역사적 가치를 가리는 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중국 학계가 자국 유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증도가자가 처음 공개된 지 16년이 흘렀지만 2017년 부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된 자료가 왜 다르게 보고됐는지, 과거 심의 관계자들이 새로운 검증에 어디까지 관여하는지에 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23일 종합국정감사에서는 기존 금속활자 101점의 검증 일정과 감사원 지적 이후 국가유산청의 후속 조치, 당시 심의 관계자들의 역할 등이 다시 쟁점이 될 전망이다.
[아주경제 2026년 10월 22일자 14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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