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7건
-
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워야 한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성장률 반등을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3.3%, 내년을 2.9%로 전망했다. 정부도 내년 국세수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와 세수가 동시에 개선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국가재정의 앞날을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7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증가한다. 역대 최대 규모다. 반면 정부는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올해 51.6%에서 내년 48.3%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GDP 대비 3.9%에서 0.1%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재정건전성 지표가 개선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내년 국세수입이 정부 예상대로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거나 대외 여건이 악화하면 세수 전망부터 달라질 수 있다. 경기 호황에 기대어 개선되는 재정과 제도적으로 건전성을 확보한 재정은 구분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생산성 둔화는 잠재성장률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높아졌다고 장기 성장능력까지 회복됐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연금과 의료·돌봄 등 고령화 관련 지출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가채무의 부담도 단순히 채무 총액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경제 규모에 비해 얼마나 빠르게 증가하는지, 세수로 이자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한지, 국채 만기가 돌아왔을 때 어떤 금리로 차환해야 하는지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 과거 낮은 금리로 발행한 국채를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하면 이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국채가 당장 높은 금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만기 구조와 시장금리, 경제성장률에 따라 부담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재정에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견딜 여력이 있느냐다. 정치권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재정 확대를 요구한다.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재정을 활용해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경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필요한 역할이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지출도 무조건 낭비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경기 대응을 명분으로 시작한 사업이 효과 검증 없이 유지되거나, 선거를 앞두고 재원 마련 방안이 불분명한 공약이 경쟁적으로 쏟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재정지출의 필요성과 효과, 지속 가능성을 따지는 절차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밀려서는 안 된다. 국가재정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금은 국민이 부담하고 국채는 미래의 재정 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지출하는 돈이 생산성을 높이고 미래의 세수 기반을 넓힌다면 다음 세대에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 반대로 효과가 불분명한 지출을 빚으로 충당한다면 미래세대의 선택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따라서 국가채무를 무조건 줄이는 것만이 책임 있는 재정은 아니다. 빚을 내더라도 무엇에 쓰는지, 그 지출이 어떤 경제적·사회적 편익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재정준칙의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채무와 재정적자에 중장기 관리 기준을 두되 경기침체와 재난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외를 허용한다면 적용 조건과 기간, 정상적인 재정 운용으로 복귀할 계획까지 분명히 해야 한다. 재정준칙은 정부가 필요한 돈을 쓰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는 장치가 아니다. 평상시에 재정 여력을 확보해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약속이다. 지출 구조조정도 숫자를 맞추는 작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성과가 낮은 보조금과 중복 사업, 정책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관행적으로 유지되는 예산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반면 취약계층의 생계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까지 일률적으로 삭감해서는 안 된다. 지출의 성격과 효과를 구분하는 것이 재정개혁의 출발점이다. 절감한 재원은 미래 성장 기반을 넓히는 데 우선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바이오, 로봇, 우주항공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연구개발과 인재양성, 전력망과 산업 인프라에 장기간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연구와 공공 기반시설에 정부가 역할을 집중하고 사업화와 시장 경쟁은 기업의 창의성과 자본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미래산업 지원에도 성과 검증은 예외일 수 없다. 첨단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든 사업에 예산을 배정할 이유는 없다. 지원의 필요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중복 여부를 따져야 한다.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과 미래산업에 투자하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재정개혁을 추진하기 좋은 시기다. 정부 전망대로 세수가 크게 늘고 재정수지가 개선된다면 그 성과의 일부를 중장기 재정위험을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경기가 나쁠 때는 지출을 줄이기 어렵고, 경기가 좋을 때는 지출을 늘리자는 요구가 커진다. 이런 정치적 유혹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정건전성은 경기의 부침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도 달라져야 한다. 국민에게 무엇을 더 지원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만큼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기존의 어떤 사업을 정비할 것인지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여야가 재정준칙과 중장기 지출 개혁을 놓고 책임 있게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재정은 오늘의 경제를 지탱하면서 내일의 성장 기반도 마련해야 한다.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관자>에는 “양입이출(量入而出)”,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지출한다는 뜻의 말이 전해진다. 국가재정을 가계부처럼 단순하게 운영할 수는 없지만, 재원의 한계를 고려하고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경제는 지금 반도체 호황이라는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특정 산업의 호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우고, 성장의 과실을 미래 경쟁력과 재정 여력으로 연결해야 한다. 정치가 재정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다만 그 성과를 다음 선거의 득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경제적 기반으로 평가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재정의 책임은 돈을 얼마나 썼느냐가 아니라 그 지출이 무엇을 남겼느냐에서 드러난다.
2026-10-08 11:54:40
-
3.5% 성장에 가려진 숙제, '반도체 다음'을 준비할 때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좋은 숫자를 받아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전망보다 1.5%포인트 높였다. 수년간 1~2%대 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경제로서는 반가운 변화다. 오늘 아침 나온 수출 성적표는 더 화려하다. 9월 수출은 1209억4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월 1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월 누적 수출도 8145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웃돌았다. 무역수지는 498억5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처음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2.8% 늘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수출 물량과 가격이 함께 뛰면서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좋은 성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커지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주문이 이어지고 설비투자가 늘어난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 반도체 호황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다음이다. 예정처가 내다본 내년 성장률은 2.7%다. 올해보다 0.8%포인트 낮다. 2026~2030년 연평균 성장률 역시 2.7%로 전망했다. 올해 잠재성장률은 2.2%, 앞으로 5년 평균은 2.3% 수준이다. 내년 2.7% 성장을 경기침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정처는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도 회복할 것으로 봤다. 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을 웃돈다. 올해의 높은 성장세가 내년에는 다소 정상화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3.5%와 2.7% 사이에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올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9월만 놓고 보면 전체 수출 1209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가 603억 달러다. 거의 절반이다. 특정 월의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우리 수출의 평상시 구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전체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좌우하는 현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예정처도 반도체 쏠림을 별도의 위험 요인으로 짚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국민소득이 다른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가계소득으로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혜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수출에도 자영업자나 일부 중소기업이 경기 회복을 선뜻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자동화 수준이 높다. 과거 제조업 호황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대규모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속도와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속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더 근본적인 숫자는 잠재성장률이다. 한 해 성장률은 경기와 수출 여건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물가 불안을 키우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에 가깝다. 예정처가 내다본 향후 5년 평균은 2.3%다. AI 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자본과 생산성의 기여는 커지지만 인구 감소 탓에 노동의 성장 기여는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저출생·고령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아니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저절로 없애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반도체의 힘과 한계를 함께 경험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수출과 설비투자, 세수가 한꺼번에 좋아졌다. 사이클이 돌아서면 세 지표가 동시에 흔들렸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것은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다. 그렇다고 나라 경제 전체를 한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오래 맡겨둘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은 AI 투자 붐과도 맞물려 있다. 예정처는 미국 장기금리 상승에 따른 AI 투자 둔화 가능성과 미국의 관세정책, 중국과의 경쟁 심화를 향후 성장경로의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지금의 호황을 흔들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도체 호황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가 벌어준 시간과 돈을 다음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불황보다 호황기에 하기 쉽다. 경기가 꺾이면 기업은 투자 여력을 잃고 정부의 세수도 줄어든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 수출과 기업이익, 세수가 함께 좋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손대기 어려웠던 숙제를 풀 기회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부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까지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력망과 용수, 연구개발,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인프라의 영역이다. 동시에 산업정책의 시선을 그 너머로 넓혀야 한다. AI 서비스와 바이오, 로봇, 방산, 에너지, 콘텐츠 등에서 반도체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과 직업교육을 산업 수요에 맞게 바꾸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반도체에서 생긴 자본과 기술, 인재가 다른 산업으로 흘러갈 통로가 넓어져야 반도체 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의 호황으로 이어진다. <관자(管子)>에는 “일년지계 막여수곡, 십년지계 막여수목, 종신지계 막여수인(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면 곡식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을 내다보면 사람을 키우라는 뜻이다. 경제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더 짓는 일은 몇 년 뒤 수출을 늘릴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대학과 노동시장을 바꾸며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10년 뒤 나라의 성장률을 바꾼다. 9월 수출 1209억 달러와 반도체 603억 달러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다. 기록은 기록대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 숫자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까지 해결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올해 3.5%와 내년 2.7% 사이에서 읽어야 할 것도 성장률의 단순한 오르내림이 아니다. 반도체가 밀어준 성장의 힘을 다른 산업과 가계, 다음 세대의 성장으로 얼마나 옮겨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 사이클도 다시 돈다. 좋은 시절에 할 일은 축배를 오래 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겨울을 견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벌어준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다음 호황에도 또 반도체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번 호황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26-10-01 13:47:00
-
세금이 넘칠 때가 재정의 진짜 시험대다
[경제일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기업의 장부를 넘어 나라 곳간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예상한 내년 국세수입은 584조4000억원. 올해 본예산보다 크게 늘어난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동시에 증가하는 배경에는 AI 반도체 호황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최근 10년의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떼어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숫자가 워낙 크다 보니 먼저 하나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162조3000억원 전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직접 낸 세금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추세선을 웃도는 전체 내국세 증가분을 계산한 금액이고, 반도체 호황은 그 세수 급증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반도체가 번 세금’이라는 표현이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호황기에 갑자기 늘어난 세수는 누구의 돈인가. 지금 살아 있는 국민이 당장 써도 되는 돈인가. 아니면 경기가 꺾인 뒤를 위해 남겨둬야 할 돈인가. 더 멀리 보면 아직 세금을 낼 나이조차 되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도 일정한 몫이 있는 돈인가.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답변에서 짚은 것도 같은 문제다. 그는 대외 불확실성과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시에 국가채무와 의무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재정 여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과 미래세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는다. 경기가 무너질 때 재정은 과감하게 써야 한다. 민간이 움츠러들고 기업이 투자를 미룰 때 정부까지 지갑을 닫으면 불황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난 호황기에는 일부를 남겨야 한다. 불황에 쓸 수 있는 정부가 되려면 호황기에 다 쓰지 않는 정부여야 한다. 이것이 재정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대응기금이라는 발상 자체는 평가할 대목이 있다. 정부는 162조3000억원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분야에 쓰고, 12조5000억원으로 신규 국채 발행을 줄일 계획이다. 가장 큰 몫인 104조4000억원은 당장 쓰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적립한다. 전체 기금의 64%가량이다. 세수가 더 들어왔다고 한 해에 모두 지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더구나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AI 붐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고 투자 사이클이 꺾이면 기업이익과 법인세는 빠르게 줄어든다. 세수는 내려가는데 한 번 시작한 복지와 보조금, 기관과 사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일시적인 돈으로 영구적인 지출을 만드는 일이다. 올해만 들어오는 10조원을 근거로 매년 10조원이 필요한 사업을 시작하면 호황이 끝나는 순간 그 차이는 빚이 된다. 세금을 올리거나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결국 국채가 빈자리를 메운다. 때문에 미래대응기금의 성패도 ‘얼마를 담았느냐’보다 어떤 돈을 어디까지 쓸 수 있게 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45조4000억원의 사업지출 가운데 AI와 전략기술, 인재 양성처럼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오늘의 반도체 호황에서 나온 세금으로 다음 산업을 만드는 것은 세대 간 이전이라기보다 세대 간 투자에 가깝다. 반면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려운 경상적 복지와 반복성 지원사업을 초과세수에 기대어 늘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반도체 가격은 내려가도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출은 내려가지 않는다. 반도체 사이클은 꺾여도 정부 사업에는 사이클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104조4000억원의 여유자금이 중요하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이 돈은 향후 세수 결손이나 예상하지 못한 재정 수요가 발생할 때 재정을 보강하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방향은 합리적이지만 정부는 일정한 범위에서 추가경정예산을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계획 변경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들고 있다. 신속성은 커지지만, 100조원이 넘는 자금에 행정부의 재량이 커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쌓아두는 것만으로 미래세대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꺼낼 수 있는지, 무엇에 쓸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세수 결손이 어느 정도일 때 사용할 것인지, 경기침체의 기준은 무엇인지,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업까지 허용할 것인지 법과 제도로 선을 그어야 한다. 특히 기금의 여유자금이 그때그때 정부가 원하는 사업을 담는 별도 예산처럼 운용돼서는 안 된다. 노르웨이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에서 들어오는 정부 순수입을 정부연기금 글로벌(GPFG)에 넣고 해외에 투자한다. 재정에는 기금의 원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대신 장기적으로 예상 실질수익률에 해당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활용한다. 현재 그 기준은 약 3%다. 핵심은 석유로 갑자기 부자가 된 한 세대가 자원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금융자산으로 바꿔 후대와 나누겠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의 반도체 세수와 노르웨이의 석유 수입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석유는 땅에서 한 번 꺼내 쓰면 사라지는 국민 자산이고,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세금은 혁신과 생산 활동에서 생긴다. 정부가 기업이 낸 세금을 영구적으로 묶어둘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배울 원칙은 있다. 일시적으로 크게 들어온 돈을 평상시의 소득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 노르웨이는 석유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한국 재정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기’ 왕제편에는 ‘국무구년지축왈부족(國無九年之蓄曰不足)’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에 아홉 해를 버틸 비축이 없으면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어 3년을 농사지으면 1년치 식량을 남기고, 9년이면 3년치를 비축해야 한다고 했다. 풍년에 남겨 흉년을 견딘다는 오래된 국가운영의 원칙이다. 2500년 전 곡식창고가 오늘의 재정기금으로 바뀌었을 뿐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2027년 예산안은 총지출이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늘어난다. 동시에 정부는 미래대응기금과 국채 발행 축소를 통해 내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적극적인 지출과 재정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경기순환으로 생긴 초과세수와 경제의 기초체력에서 생긴 구조적 세수를 구분해야 한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상시 지출의 재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초과세수의 사용 순서를 정해야 한다. 미래 성장투자, 재정안정 적립, 국가채무 축소 사이의 기준을 사전에 만들어 정권과 경기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기금에서 돈을 꺼내는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불황이나 세수 급감 때는 과감하게 쓰되 단순히 예산을 더 쓰기 위한 우회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호황을 내일의 고정비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이 잘 벌어 세금이 많이 들어온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 돈으로 AI와 첨단산업을 키우고 청년에게 기회를 만들며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 살림은 기업의 분기 실적과 달라야 한다. 기업은 좋은 해에 성과급을 더 줄 수 있다. 국가는 좋은 해의 세수를 보고 수십 년 동안 지급해야 할 약속을 쉽게 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은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늘어난 돈을 모두 현재의 소비에 써버리면 다음 세대는 호황의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그때 만들어진 지출 의무만 넘겨받을 수 있다. 반도체가 벌어준 추가 세수는 현 정부의 돈도, 현 세대만의 돈도 아니다. 호황을 만든 기업과 노동자의 성과에서 나왔지만 국가의 세금이 된 순간 현재와 미래의 국민 모두를 위해 써야 할 자원이 된다. 재정이 돈이 들어올 때보다 그 돈이 사라진 뒤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 그때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새로 만든 지출의 청구서가 아니라, 다음 위기를 견딜 재정 여력과 다음 산업을 만들어낼 자산이다. 돈이 많이 들어왔을 때 많이 쓰는 정부보다, 돈이 사라질 때를 준비하는 정부가 더 유능하다. 162조3000억원 미래대응기금의 진짜 이름값도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2026-09-14 13:00:00
-
-
민심은 뒷전, 당권만 좇는 여의도의 씁쓸한 자화상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선장과 항해사는 서로 조타기를 잘못 잡았다며 멱살잡이만 하고 있다. 갑판 아래에서는 승객들이 물이 차오르는 공포에 떨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모습이 꼭 그렇다. 6·3 지방선거가 끝난 지 2주가 지났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선거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거의 교훈을 되새기기는커녕 선거 결과를 둘러싼 책임 공방과 당권 투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여의도는 민심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권력을 계산하는 공간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예외가 아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자 지도부를 향한 사퇴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진정 묻고 있는 것은 누가 대표직을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다. 왜 국민이 등을 돌렸는가, 왜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안타깝게도 정치권은 그 질문을 외면한 채 차기 권력의 향배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부실 관리 사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였다. 선거 관리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났고 국민의 신뢰는 상처를 입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폐업을 고민하고 청년들은 취업난에 신음하며 노년층은 생활비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민생 대책이 아니라 계파 갈등과 권력 재편 이야기뿐이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인지, 정치인 자신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자가 바르면 백성도 자연히 바르게 따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는 바름보다 유불리를 먼저 따지고 있다. 국민의 고통보다 당내 권력 지형에 더 관심을 보이고, 국가의 미래보다 다음 전당대회와 공천을 더 걱정하는 모습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성인은 자기 자신을 뒤로하고 백성을 앞세운다"고 했다. 또한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이 살아남는다"고 가르쳤다. 지도자는 권력을 움켜쥐려 할수록 결국 그 권력에 갇히게 되고, 백성의 목소리를 낮은 자세로 듣는 자만이 오래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권은 어떠한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대신 상대 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 더 익숙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양당 모두 선거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이를 내부 권력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선거 책임론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순간, 정치의 품격은 무너진다. 국민의 채찍질은 쇄신을 위한 것이지 계파 싸움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책임 정치다. 권한을 가졌다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는 책임지는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모두가 남의 탓을 한다. 정부는 야당을 탓하고 야당은 정부를 탓한다. 당 지도부는 전임 지도부를 탓하고 계파는 상대 계파를 탓한다.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서로를 향한 비난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경 잠언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도자가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몰락은 시작된다는 경고다.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의 경고를 무시한 정권과 정당 가운데 오래 살아남은 사례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저성장과 고물가, 인구 감소와 청년 실업, 인공지능(AI) 시대의 산업 재편, 국제 질서의 불확실성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권력 다툼에만 몰두한다면 국가는 방향을 잃고 국민은 희망을 잃게 된다. 정당은 권력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적 기관이다. 대표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당권은 국민을 위한 봉사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수단이 목적이 되고 봉사가 권력욕으로 변질되면 정치는 본래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배가 침몰할 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잘못을 따지는 싸움이 아니다. 승객을 구하기 위한 협력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에도 필요한 것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다. 국민은 더 이상 변명하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국민은 책임지는 지도자, 듣는 지도자, 행동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여야는 이제 당권이라는 독배를 내려놓아야 한다. 선거 결과에 담긴 국민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민생이라는 본분으로 돌아와야 한다. 쇄신 없는 권력투쟁의 끝은 공멸이다. 반대로 책임 정치와 협치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위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정치는 권력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다. 그 가장 단순한 진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 정치가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할 상식이다.
2026-06-18 17:43:02
-
당권이라는 신기루, 민생이라는 대지
선거는 끝났지만 국민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정치권은 또다시 당권 경쟁과 책임 공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승자는 겸허하지 않고 패자는 성찰하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사퇴를 요구하고, 공천을 탓하고, 계파 갈등을 부추기는 모습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보낸 메시지를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민생은 뒷전이고 권력만 앞세우는 정치의 민낯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수십 년간 정치를 지켜본 경험으로 보더라도 선거 직후 이처럼 민심을 왜곡하고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국민은 고물가와 경기 침체, 일자리 부족과 주거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정치권은 국민이 맡긴 권한을 민생이 아닌 당내 권력투쟁에 허비하고 있다. 민심은 생존을 말하는데 정치권은 자리만 말하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 제66장에서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스로를 낮추고 민심 속으로 들어가는 정치만이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권은 민심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당권이라는 성벽 안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고 있다. 국민이 요구한 것은 권력 재편이 아니라 민생 회복인데, 정치인들은 그 준엄한 명령을 자신들의 유불리에 맞게 왜곡하고 있다. 유교 경전인 《서경》에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말이 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오직 국민의 삶을 지키는 데 있다. 이것이 정치의 기본이며 원칙이고 상식이다. 선거 역시 국민이 정치인에게 임시로 권한을 맡기며 평가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거가 끝난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승패를 떠나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야의 시선은 당 대표 선거와 계파 이해관계, 다음 총선 전략에만 머물러 있다. 국민의 고통보다 권력의 향배에 더 관심이 많은 정치가 과연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당은 선거 결과를 야당의 발목 잡기나 내부 공천 문제로 돌리고 있고, 야당은 지도부 책임론과 계파 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모두가 남 탓만 할 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책임의 정치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정치는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상대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성찰해야 한다. 여당은 국정을 책임지는 자세로 협치를 제안해야 하고, 야당 역시 무조건적인 반대를 넘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쟁이 아니라 협력이 국민이 원하는 정치다. 정치권이 외면하는 사이 민생의 현실은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미래를 포기하고, 소상공인들은 늘어난 부채와 소비 침체 속에서 폐업을 고민한다. 직장인들은 치솟는 물가와 금리 부담에 허덕이고, 서민들은 주거비와 교육비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국민이 체감하는 위기는 이미 삶의 현장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정치가 바라봐야 할 곳은 국회의 당 대표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민생의 최전선이다. 당권은 결국 한때의 권력이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도 승자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민생은 국가를 지탱하는 토대이며 국민의 삶 자체다. 토대가 무너지면 권력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민심을 외면한 권력이 오래가지 못했음을 수없이 증명해 왔다. 국민은 침묵하는 듯 보여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냉정한 심판자가 된다. 이제 정치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당권 경쟁이라는 신기루를 좇는 대신 민생이라는 대지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물가 안정과 일자리 창출, 청년과 서민의 삶을 살리는 정책을 놓고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국민은 누가 당권을 차지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누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드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치의 기본은 국민이고, 원칙은 책임이며, 상식은 협력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잊는 순간 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이번 선거가 정치권에 남긴 가장 큰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눈을 들어 당권이라는 신기루가 아니라 민생이라는 대지를 바라보라. 그것이 국민이 내린 명령이며, 대한민국 정치가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를 또다시 외면한다면 다음 심판은 지금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준엄할 것임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한다.
2026-06-12 10:15:53
-
-
서울 전셋값 작년의 6배 뛰었다…집값 상승세도 확대
[경제일보] 서울 아파트값 상승세가 중하위권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강남권까지 다시 오름폭을 키우는 모습이다. 매매가격 상승세가 서울 전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전세시장은 더 빠른 속도로 달아오르고 있다. 실수요자들이 매매보다 전세를 선택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전셋값이 시장을 주도하는 양상이다. 6일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6월 첫째 주(6월1일 기준)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와 같은 0.25% 상승률을 기록했다. 상승폭은 유지됐지만 상승 지역은 더욱 넓어졌다. 상승률 상위권에는 동대문구(0.37%)와 성동구(0.35%), 강북구(0.35%)가 이름을 올렸다. 성북구(0.34%), 중구(0.31%), 강서구(0.31%), 영등포구(0.31%)도 0.3%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특히 동대문구는 답십리동과 휘경동 중소형 아파트를 중심으로 거래가 이어지며 상승폭이 전주보다 확대됐다. 강남권도 오름세를 이어갔다. 강남구와 서초구는 각각 0.21% 상승했고 송파구는 0.28% 올랐다. 강동구 역시 0.19%를 기록하며 전주보다 상승폭이 커졌다. 다만 최근 서울 시장은 강남 재건축 단지 중심 상승 국면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가격 부담이 낮은 지역까지 수요가 확산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기도에서는 반도체 산업 수혜 지역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화성시 동탄구는 전주 0.49%에서 이번 주 0.60%로 상승폭이 확대되며 수도권 최고 수준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광명시(0.43%)와 성남시 수정구(0.42%)도 오름세를 보였다. 용인시 기흥구(0.21%)와 수원시 영통구(0.26%) 역시 상승 흐름을 유지했다. 반면 지난해부터 미분양 증가와 지역 경기 침체 여파로 약세를 보여온 평택시는 이번 주 보합으로 전환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산업벨트를 중심으로 한 주거 수요가 경기 남부권 집값을 견인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도권 강세는 인천에서도 이어졌다. 인천 아파트값은 이번 주 0.02% 상승했고 수도권 전체 상승률은 0.14%를 기록했다. 반면 지방 시장은 여전히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비수도권은 보합을 기록했으며 5대 광역시와 세종시는 각각 0.02% 하락했다.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은 0.07%였다. 전세시장은 매매시장보다 더 뜨거운 분위기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이번 주 0.29% 오르며 전주보다 상승폭이 확대됐다. 올해 누적 상승률은 3.77%로 지난해 동기인 0.65%와 비교하면 약 6배 수준이다. 송파구가 0.50%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고 성동구(0.48%), 도봉구(0.47%), 성북구(0.43%), 노원구(0.41%), 광진구(0.39%)가 뒤를 이었다. 특히 도봉구와 노원구, 마포구(0.30%)는 지난 2015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전세가격 상승률을 기록했다. 서울 외곽과 중저가 주거지에서도 전세 수요가 강하게 유입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경기도에서는 화성시 동탄구(0.37%), 광명시(0.34%), 하남시(0.32%)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인천도 0.07% 오르며 강세 흐름을 이어갔다. 수도권 전체 전세가격은 0.18% 상승했다. 올해 수도권 전세 누적 상승률은 2.96%로 지난해 같은 기간 0.30%의 10배에 가까운 수준까지 확대됐다. 비수도권 전세가격은 0.03% 상승했다. 5대 광역시는 0.04%, 세종시는 0.10%, 8개 도는 0.02% 각각 올랐다. 업계에서는 하반기 시장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전세시장을 꼽고 있다. 서울 전세가격 상승률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흐름이 이어지는 데다 수도권 전역으로 상승세가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의 경우 매매시장보다 전세시장이 먼저 시장 불안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2026-06-06 06:00:00
-
-
보수 텃밭의 균열인가, 막판 결집인가
[경제일보] 6·3 지방선거 막판 판세의 관심은 영남으로도 향하고 있다. 대구·경북은 보수 정당의 핵심 기반으로 꼽혀 왔고, 부산·울산·경남도 대체로 보수 우위 지역으로 분류돼 왔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는 부산·울산·경남에 더해 대구까지 접전지로 거론되며 보수 강세 지역의 표심 변화가 주목받고 있다. 경북은 여야 모두 국민의힘 우세 지역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 여야 모두 영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구와 부산·울산·경남에서 변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대구·경북을 지키고 부산·울산·경남에서 보수층 결집을 끌어올리는 데 당력을 집중하고 있다. 수도권 선거가 정권 평가와 생활 의제의 정면 대결이라면 영남 선거는 보수 정치의 기반이 어디까지 유지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가깝다. 보수 강세 지역의 표심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긴 현상이 아니다. 산업 기반 변화, 청년층 이탈, 지역 경기 침체, 도심 재개발 지연, 일자리 문제, 정당 충성도 약화가 동시에 쌓여 왔다. 정당 간판만으로 선거를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 늘었다. 특히 부산과 경남은 조선·해운·자동차·기계 산업의 부침을 겪어 왔고, 대구는 청년 유출과 산업 전환 문제를 오랫동안 안고 있다. 지역민들이 묻는 것은 이제 이념만이 아니다. 누가 지역을 먹여 살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선거판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보수 기반 흔드는 민생 피로감 대구·경북은 여전히 보수 정당의 핵심 기반으로 꼽힌다. 그러나 대구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말하는 목소리는 커졌다. 대구는 보수 정치의 상징성이 강한 도시다. 그만큼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역이고,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균열만 확인해도 정치적 의미가 큰 지역이다. 선거 결과와 별개로 대구에서 야당 후보가 어느 정도 득표력을 보이느냐는 향후 영남 정치 지형을 읽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대구 표심의 밑바닥에는 경제 문제가 깔려 있다. 청년 일자리, 첨단산업 유치, 도심 활력 회복, 교통망 확충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유권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더디다. 지역민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산업 전환의 성과와 생활 여건의 개선이다. 보수 정당 지지 기반이 견고하더라도 민생 피로감이 누적되면 표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실제 대구·경북에서는 청년 인구 감소가 지역 정치의 배경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경북연구원 이슈리포트를 인용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경북 청년인구는 2016년 68만여명에서 2025년 50만여명으로 줄었고, 올해 4월 말 기준 48만7000여명으로 50만명 선이 무너졌다. 지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구 청년인구도 2017년 68만8191명에서 올해 4월 55만5304명으로 감소했다. 청년층이 줄어드는 지역에서 일자리와 주거, 산업 전환은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구호가 아니라 생존 문제에 가깝다. 부산은 대구와 다른 결을 갖고 있다. 부산은 보수 우위 지역으로 분류되지만 선거 때마다 변동성이 있었다. 항만과 해양산업, 가덕도신공항, 북항 재개발, 글로벌허브도시 구상, 청년 유출, 원도심 쇠퇴가 선거 쟁점으로 겹쳐 있다. 부산 유권자는 지역 개발 공약의 속도와 실적을 본다. 정당 지지만으로는 부족하고, 누가 중앙정부와 협의해 예산과 사업을 끌어올 수 있는지도 따진다. 부산·울산·경남은 여야가 자체 판세 분석에서 경합 또는 접전 지역으로 분류하며 공을 들이는 권역이다. 민주당은 이 지역을 보수 일변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략 거점으로 보고 있다. 국민의힘은 부울경에서 흔들릴 경우 영남권 주도권 논쟁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고 본다. 부산과 경남이 실제 개표 결과에서도 접전 양상을 보일 경우 선거 전체의 상징성은 수도권 못지않게 커질 수 있다. 막판 보수 결집의 힘도 남아 있다 그러나 보수 강세 지역의 표심 변화만으로 판세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영남 선거에서는 선거 막판 보수층 결집이 주요 변수로 작용해 왔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보수층은 정권 견제, 지역 대표성, 보수 정체성을 명분으로 다시 뭉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국민의힘이 막판 유세에서 강조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보수 기반 지역을 내주면 지방 권력뿐 아니라 향후 총선과 대선 구도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결집을 자극한다. 대구·경북에서는 보수층 결집이 여전히 주요 변수로 꼽힌다. 민주당이 대구의 변화 가능성을 말하더라도 실제 투표장에서는 보수층의 조직력과 투표율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령층 투표율이 높고 정당 지지 성향이 비교적 강한 지역일수록 막판 결집 효과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젊은 층과 무당층이 얼마나 투표장으로 나오는지는 균열의 폭을 결정할 변수다. 부산·울산·경남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은 산업과 노동, 도시 개발 의제가 강하게 작동하지만 보수 정당의 조직 기반도 두텁다. 국민의힘 후보들이 현역 단체장의 성과와 안정론을 앞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당이 변화론을 밀어붙일수록 국민의힘은 지역 정체성과 보수 결집을 강조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부울경 승부는 변화 요구와 안정 요구가 어느 쪽으로 더 강하게 표출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층 결집을 가르는 또 하나의 변수는 투표율이다. 보수 강세 지역에서 투표율이 낮아지면 기존 조직표의 비중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무당층과 청년층이 적극적으로 투표장에 나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선거 막판 여야가 사전투표와 본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접전지일수록 한쪽의 결집만으로는 부족하고, 상대 진영의 이탈 여부까지 결과에 영향을 준다. 균열의 본질은 지역경제와 세대 변화 보수 텃밭의 균열이라는 말은 정치 구호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지역경제의 변화와 세대 교체가 들어 있다. 대구·경북과 부울경은 오랫동안 제조업과 수출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산업 전환 속도가 늦어지고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지역민의 불만도 커졌다. 수도권 집중은 더 심해졌고, 지역 대학과 지역 기업의 연결도 약해졌다. 청년층의 정당 선택도 과거보다 유동적이라는 분석이 많다. 일자리, 주거, 교통, 문화, 교육 환경을 보고 지역 정치인을 평가하는 경향이 커졌다는 점에서 여야 모두 청년층 표심을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청년층이 실제 투표장에 얼마나 나오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변화 요구가 투표율로 이어지지 않으면 균열은 표면적 현상에 그칠 수 있다. 중장년층도 달라지고 있다. 지역경제 침체가 길어지면서 정당 충성도보다 생활 성과를 묻는 유권자가 늘었다. 공장과 일자리, 병원과 교통, 도심 재생과 주거 환경은 이념보다 직접적이다. 지역민이 바라는 것은 중앙 정치의 구호가 아니라 지역 살림의 회복이다. 이 지점에서 보수 정당도 더 이상 과거의 지지만 기대할 수 없고, 민주당도 단순한 변화론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산의 변화 가능성은 특히 이 지점에서 나온다. 부산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 원도심 쇠퇴, 산업 재편 압박을 동시에 겪고 있다. 가덕도신공항과 북항 재개발, 글로벌허브도시 구상은 모두 지역의 미래와 연결된다. 그러나 대형 개발 사업이 생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다. 부산 유권자는 이제 발표보다 실행을 본다. 대구 역시 마찬가지다. 대구가 보수 정치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상징성만으로 지역의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첨단산업 유치와 청년 일자리, 도심 공간 재편, 광역교통망 확충이 실제 성과를 내야 한다. 보수 강세 지역의 표심 변화는 정당 지지의 약화라기보다 지역민이 성과를 묻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여야 모두 안심할 수 없는 선거 민주당 입장에서는 영남의 표심 변화가 기회다. 대구와 부산·울산·경남에서 의미 있는 득표를 올리거나 일부 지역에서 승리하면 지방선거의 정치적 해석은 달라진다. 수도권과 충청권 승부에 더해 영남에서 변화 가능성을 확인할 경우 선거 해석의 폭은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민주당은 영남을 단순한 열세 지역으로 두지 않고 전략 지역으로 다루고 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영남 방어가 선거 전체의 핵심 과제다. 대구·경북은 보수 정당의 심장부이고, 부울경은 전국 선거의 균형을 맞추는 축이다. 이 지역에서 흔들리면 단순히 광역단체장 몇 곳을 잃는 문제가 아니다. 보수 정당의 지역 기반과 차기 정치 구상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국민의힘이 막판에 보수 결집과 투표율을 강조하는 배경이다. 다만 민주당도 안심할 수 없다. 보수 강세 지역의 표심 변화가 곧 승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선거 막판에는 위기감이 결집을 부르고, 결집은 투표율로 나타난다. 특히 영남권에서는 선거 직전 보수층의 방어 심리가 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민주당이 변화론을 과하게 앞세울 경우 보수층을 자극해 역결집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막판 결집만 기대하기에는 지역민의 요구가 달라졌다. 보수 정당 후보라는 사실만으로 안정적 우위를 장담하기 어려운 지역도 늘고 있다. 유권자는 일자리와 산업, 교통과 주거, 도심 회복에 대한 구체적 답을 요구한다. 보수층이 결집하더라도 중도층과 무당층이 등을 돌리면 접전 지역에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결국 영남 표심은 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변화 요구다. 오래된 지역 정치와 더딘 경제 회복에 대한 피로감이 표심 변화를 만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방어 심리다. 보수 기반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감이 막판 결집을 만들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의 영남 판세는 이 두 힘이 어디에서 만나고 어느 쪽이 더 강하게 투표장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 보수 텃밭의 균열인가, 막판 결집인가. 답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부산·울산·경남과 대구 일부 선거는 과거처럼 일방적 구도로만 보기 어려워졌다. 대구와 부산·울산·경남에서 어떤 표심이 확인되느냐에 따라 6·3 지방선거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유권자는 정당의 이름만 보지 않는다. 지역을 살릴 능력과 책임을 묻고 있다. 이번 선거가 보수 우위 구도의 재확인으로 남을지, 영남 표심 변화의 신호로 기록될지는 결국 투표장에서 가려진다.
2026-05-30 14:00:00
-
-
-
민주당 수도권 방어선 굳히기냐 국민의힘 산업벨트 탈환이냐
[경제일보] 6·3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경기 안산갑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수도권 재보선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우세 지역이라는 기존 정치 지형 위에 현역 의원의 의원직 상실이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이번 선거는 단순한 지역 보선을 넘어 수도권 산업도시 민심의 흐름을 가늠할 상징전으로 번지는 분위기다. 안산갑 보선은 양문석 전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확정받으면서 치러지게 됐다. 민주당에는 수도권 핵심 거점을 지켜야 하는 방어전이고, 국민의힘에는 서남부 산업벨트에서 교두보를 확보할 기회라는 평가가 나온다. 안산갑은 전통 제조업과 외국인 노동자 밀집 지역 그리고 신도시형 젊은 인구가 혼재한 지역이다. 반월·시화산단 노동자층과 사동·해양동 신흥 주거지역 표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전국 정치 흐름보다 생활경제와 산업 체감 경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징이 있다. 이번 선거 구도 역시 단순하지 않다. 민주당에서는 김남국 전 의원과 전해철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맞붙으며 친명계와 친문계의 상징 대결 양상까지 겹쳤고, 국민의힘은 김석훈 전 안산상록갑 당협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 정비에 나섰다. 결국 안산갑 선거는 △민주당 수도권 방어선 유지냐 △국민의힘 산업벨트 공략 성공이냐 △친명 결집이냐 △생활형 보수 회복이냐의 충돌로 압축되는 분위기다. 여론 흐름 민주당 우세…김남국·전해철 접전 속 국민의힘 추격 현재 공개된 여론조사 흐름은 민주당 우세 속 국민의힘의 제한적 추격으로 요약된다. 중부일보가 데일리리서치에 의뢰해 2026년 4월 14일부터 15일까지 안산갑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민주당 후보 적합도는 전해철 전 장관 29.8%, 김남국 전 의원 20.2%로 집계됐다. 국민의힘 후보 적합도는 장성민 전 의원 15.7%, 김석훈 전 위원장 15.5%였다. 조사는 무선 ARS 방식으로 진행됐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같은 조사에서 전체 후보 지지도는 전해철 전 장관 23.8%, 김남국 전 의원 21.4%, 장성민 전 의원 10.8%, 김석훈 전 위원장 8.8% 순으로 나타났다. 눈에 띄는 부분은 민주당 계열 후보 지지율 총합이 국민의힘 후보군을 크게 앞선다는 점이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내부 경쟁 후유증이 변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친문·친명 경쟁 과정에서 생긴 긴장감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을 경우 막판 결집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서는 김남국 전 의원 우세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꽃이 2026년 5월 4일부터 5일까지 안산갑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상 양자대결 조사에서는 김남국 전 의원 47.1%, 김석훈 전 위원장 23.1%로 집계됐다. 격차는 24.0%포인트였다. 같은 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 53.7%, 국민의힘 22.5%였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안산갑이 여전히 민주당 강세 지역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다만 동시에 “양문석 리스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남국, 친명 결집·젊은층 인지도 강점…가상자산 논란은 부담 김남국 전 의원의 가장 큰 강점은 친명 핵심 지지층 결집력이다. 김 전 의원은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여전히 높은 온라인 파급력과 대중 인지도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최근 민주당 내부에서는 “검찰 정치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일부 강성 지지층을 중심으로 다시 형성되며 결집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젊은층 인지도 역시 강점이다. 안산갑은 20~40대 비중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고, 사동·해양동 신흥 주거지역과 청년층 유입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영향력이 큰 김 전 의원에게 유리한 환경이라는 분석도 정치권에서 나온다. 민주당 조직력 역시 강력한 무기다. 안산갑은 노동자 밀집 지역과 수도권 진보 성향이 결합된 대표적 민주당 우세 지역으로 꼽힌다. 반월·시화산단 노동자층과 공공부문 종사자 비중이 높고, 지방의회와 지역 정치 네트워크 역시 민주당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부담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약점은 가상자산 논란이다. 김 전 의원 개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중도층과 고령층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민주당이 도덕성과 개혁 이미지를 강조할 경우 김 전 의원 개인 논란이 다시 부각될 가능성도 있다. 양문석 전 의원의 의원직 상실 역시 민주당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국민의힘은 이번 선거를 “민주당 귀책 보선”으로 규정하며 정치적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전해철 전 장관 역시 민주당 내부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조직 기반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행정 경험과 안정감은 강점이지만 세대 확장성과 대중 파급력에서는 김남국 전 의원보다 약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의 기회요인으로 △친명 결집 △수도권 조직력 △산단 노동자층 △청년층 지지 가능성을 꼽는다. 반면 위협요인으로는 △양문석 리스크 △가상자산 논란 △친문·친명 갈등 후유증 △생활경제 체감 부진 등을 거론한다. 김석훈, 생활밀착 조직력 승부수…국민의힘 약세는 한계 국민의힘 김석훈 전 위원장의 가장 큰 강점은 생활밀착형 조직력이다. 김 전 위원장은 오랜 지역 활동을 기반으로 현장 조직 관리와 생활형 민원 대응 능력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역 정치권에서는 “조용하지만 현장 접촉면이 넓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반월동과 본오동 등 전통 생활권에서는 조직 기반이 생각보다 탄탄하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산업단지 경기 침체와 외국인 노동 정책 문제를 집중 공략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실제 안산갑 민심은 최근 들어 이념보다 생활 체감 문제에 더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교통망 확충과 주거 비용 문제, 산업단지 활력 회복 여부가 중요한 표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민의힘 전체 지지율 자체가 안산갑에서는 약세라는 점은 분명한 부담이다. 최근 조사에서도 국민의힘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장성민 전 의원과 김석훈 전 위원장은 각각 15.7%, 15.5%를 기록했지만, ‘적합 인물 없음’과 ‘잘 모름’ 응답이 46.4%에 달했다. 이는 국민의힘이 아직 본선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후보만 정리되면 부동층 일부를 흡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의 기회요인으로 △민주당 귀책 보선 프레임 △산단 경기 침체 △생활경제 불만 △중도층 피로감을 꼽는다. 반면 위협요인으로는 △민주당 강세 지역 특성 △조직 열세 △낮은 정당 지지율 △젊은층 민주당 선호 흐름 등을 거론한다. 반월·시화 산단 민심 어디로…막판 변수는 청년층 투표율 정치권에서는 이번 안산갑 보선 최대 변수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반월·시화산단 민심이다. 산업단지 경기 부진과 중소기업 어려움, 청년 일자리 문제가 누적되면서 “누가 실제 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가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둘째는 양문석 리스크의 잔존 여부다. 민주당 귀책 사유로 치러지는 보선이라는 점이 막판 표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가 변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셋째는 청년층 투표율이다. 안산갑은 20~40대 비중이 높은 지역인 만큼 젊은층 투표 참여율에 따라 실제 득표율 격차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안산갑은 겉으로 보면 민주당 우세 지역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로 들어가면 산업단지 노동자층과 신도시 젊은층, 전통 생활권 표심이 각각 다르게 움직인다”며 “민주당이 친명 결집으로 수도권 방어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지, 국민의힘이 산업벨트 민심을 파고들며 균열을 만들지가 핵심 변수”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안산갑 보선은 수도권 산업도시 민심의 방향을 읽을 수 있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며 “민주당에는 수도권 방어선 유지 여부가 걸린 상징전이고, 국민의힘에는 수도권 재확장 가능성을 시험하는 승부처”라고 했다.
2026-05-12 17:35:16
-
-
트럼프의 "승리 후 협상"과 호르무즈의 침묵
[경제일보] 중동의 사막은 늘 뜨거웠지만, 그 뜨거움이 언제나 전쟁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 사막은 문명의 길이었고, 때로는 세계 경제의 동맥이었다. 오늘날 세계가 다시 이란과 호르무즈 해협을 주목하는 이유도 단순히 미사일과 핵시설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석유의 길이고, 달러의 길이며, 현대 산업문명의 숨길이기 때문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 포기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일주일 정도면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외교적 발언 같지만, 국제정치의 문법으로 보면 이는 상당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물밑에서 상당한 수준의 조율이 이뤄지고 있으며, 미국과 이란 모두 전면전보다는 관리 가능한 타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신호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번 충돌을 “소규모 충돌(skirmish)”이라고 표현했다. 단어 하나에도 의도가 있다. 그는 이란과의 군사 충돌을 “새로운 중동전쟁”으로 보이게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강하게 때렸고, 상대를 굴복시켰으며, 결국 협상으로 정리했다”는 서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것은 군사 전략이면서 동시에 미국 국내정치 전략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정치 스타일은 언제나 “힘을 통한 거래”였다. 상대를 극단까지 몰아붙인 뒤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중국과의 관세전쟁도 그랬고, 북한과의 정상회담도 그랬다. 이번 이란 문제 역시 같은 패턴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다르다. 이란은 단순한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다. 5천 년 문명의 기억을 가진 페르시아의 후예이며, 세계 에너지 길목을 움켜쥔 지정학 국가다. 미국이 세계 최강 군사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가는 길목이다. 한국, 일본, 중국의 에너지 생명선이기도 하다. 하루 평균 수천 척의 유조선이 이 좁은 바다를 통과한다. 만약 이곳이 봉쇄되면 국제유가는 단기간에 배럴당 15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 경제는 즉시 충격에 빠진다. 인플레이션은 재폭발하고, 금리는 다시 오르며, AI 산업을 포함한 첨단산업의 전력 비용도 급등한다. 결국 호르무즈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현대 문명의 목줄이다. 미국과 이란이 이번 협상에서 논의하는 핵심 역시 바로 이것이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양측은 △이란 핵농축 중단 △고농축 우라늄 반출 △지하 핵시설 가동 중단 △제재 완화 △호르무즈 해협 봉쇄 해제 등을 포함한 양해각서(MOU)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사실상 “핵과 석유의 교환”이다. 미국은 핵위협 제거를 원하고, 이란은 경제 제재 해제를 원한다. 서로 필요한 것을 맞바꾸는 셈이다. 여기서 세계 금융시장은 이미 전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시장은 언제나 총성보다 먼저 기대와 공포를 가격에 반영한다. 최근 국제유가가 다소 안정되고 미국 증시와 아시아 증시가 반등한 것도 “호르무즈 봉쇄 가능성이 일단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뉴욕 금융가는 이미 두 개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계산하고 있다. 하나는 ‘휴전과 타협의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지지부진한 장기 대치 시나리오’다. 만약 미국과 이란의 협상이 일정 수준에서 타결되고 사실상의 휴전 국면으로 들어간다면 세계 금융시장은 상당 기간 안도 랠리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70~80달러 선에서 안정될 수 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동안 중동 리스크 때문에 움츠렸던 글로벌 투자 자금은 다시 미국 기술주와 아시아 반도체 시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한국 경제에는 중요한 숨통이 열린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유가 안정 자체가 곧 물가 안정으로 연결된다. 반도체·배터리·AI 데이터센터 산업 역시 전력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 원·달러 환율도 안정되면서 외국인 자금 유입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경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공급망 붕괴, 고금리, 에너지 충격이 연쇄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시장은 “최소한 더 큰 악재만은 피하고 싶다”는 심리가 강하다. 따라서 중동 긴장 완화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세계 위험자산 시장 전체에 긍정적 신호가 된다. 반대로 협상이 지지부진해지고, 미국과 이란이 ‘불안한 휴전’ 상태에서 군사적 긴장만 반복할 경우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시장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이다. 전면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이다. 이 경우 국제유가는 다시 급등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서면 세계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하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된다. 물가가 다시 오르면 금리는 내려가지 못하고, 소비와 투자도 위축된다. 특히 유럽은 이미 에너지 비용 부담에 시달리고 있어 경기 침체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다. 중국 역시 제조업과 수출 회복에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금융시장에서는 달러 강세와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금값은 상승하고, 미국 국채로 자금이 몰리며, 신흥국 통화는 약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원화 약세와 외국인 자금 이탈 가능성이 커질 수 있으며, 수입 물가 상승으로 서민 경제 부담도 커진다. 무엇보다 AI 시대의 세계 경제는 과거보다 에너지에 훨씬 민감하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결국 유가와 전력 비용은 곧 AI 산업 경쟁력 문제로 이어진다. 중동의 지정학 리스크가 단순한 국제 뉴스가 아니라 AI 패권 경쟁의 변수로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번 협상은 총성과 미사일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심장 박동수를 조절하는 문제에 가깝다. 월가와 런던 금융가, 도쿄와 서울의 딜링룸은 지금 호르무즈 해협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주시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미 페르시아만의 파도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가 “우리가 이겼다”고 강조하는 부분이다. 미국 보수층은 대체로 “강한 미국”을 원한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미국 사회 내부에는 “미국이 약해졌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트럼프는 이를 뒤집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이란을 압박한 뒤 협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과정을 “미국의 승리”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는 언제나 승자만 있는 게임이 아니다. 이란 역시 내부적으로는 “굴복이 아닌 생존”이라는 논리를 만들고 있다. 혁명수비대(IRGC)와 강경 종교 세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란 정권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이 체제 붕괴처럼 보이면 안 된다. 따라서 이란은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평화적 핵 이용을 유지한 채 긴장을 조절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결국 양측 모두 자국민을 향해 “우리가 이겼다”고 말해야 하는 기묘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세계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중국이다.중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 중 하나이며, 이란산 원유의 중요한 구매자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과 중동 질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 중국 역시 일정 부분 그 혜택을 받는다. 반대로 중동이 불안정해지면 중국 경제 역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최근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중동 문제가 핵심 의제로 거론된다. 겉으로는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지만, 에너지 공급망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서로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없다. 한국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국가이지만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한다. 특히 반도체와 AI 산업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AI 고속도로” 전략 역시 안정적 에너지 공급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동발 에너지 충격은 단순한 유가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전략 전체의 문제다.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왕의 길(Royal Road)”을 건설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호르무즈 해협은 현대판 왕의 길이다. 석유와 LNG, 달러와 원자재, AI 산업의 전력과 반도체 공급망까지 모두 이 길과 연결돼 있다. 세계는 다시 페르시아를 지나고 있다.
2026-05-07 09:5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