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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은 뛰는데 왜 서민 경기는 뛰지 않는가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성적표만 놓고 보면 요즘처럼 반가운 때도 드물다. 수출이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수출 증가를 이끌면서 대외 경쟁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월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수출도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7월 수출 역시 988억9000만 달러로 역대 2위였으며 반도체 수출은 410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가 힘차게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장과 골목의 표정은 그만큼 밝지 않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줄었다고 말한다. 가계는 월급보다 빠르게 오르는 생활비에 지갑을 닫고 있다. 수출은 역대급인데 왜 국민이 느끼는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가. 문제는 거시경제 지표와 실물경제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반도체의 선전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AI 산업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우리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6월 반도체 수출은 448억2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4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1924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제 전체를 반도체 하나의 성적표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고도의 자동화와 자본집약적 생산구조를 갖고 있어 수출 증가가 고용과 내수 확대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도체 수출이 늘었다고 동네 식당 매출이 함께 증가하는 것도, 대기업의 수출 호황이 청년 일자리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성장의 미스매치’다. 수출이 늘고 기업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한 호재다. 문제는 성장의 과실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다. 대기업과 첨단산업에 집중된 성과가 중견·중소기업과 서비스업, 자영업자, 근로자에게 충분히 확산되지 않는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풍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수출 호황을 내수 회복으로 연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첨단산업의 성과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중소·중견기업으로 확산되도록 공급망을 강화하고,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 해외시장 진출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에게도 단기 일자리 숫자보다 AI·반도체·바이오·로봇·에너지 등 미래 산업과 연결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내수와 서비스업을 살리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자영업자에 대한 일회성 지원을 넘어 임대료와 금융비용 등 고정비 부담을 낮추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의 구조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관광·문화·의료·콘텐츠·돌봄 등 고용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여 소비 여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숫자에 취해서는 안 된다. 수출이 잘된다고 경제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체감경기가 어렵다고 수출 호조의 가치를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두 현실을 함께 보는 것이 경제를 제대로 보는 상식이다. 수출은 우리 경제의 엔진이고 내수는 그 엔진이 움직이는 도로다. 엔진만 아무리 좋아도 도로가 무너지면 자동차는 제대로 달릴 수 없다. 진짜 경제 회복은 수출 통계표에서 끝나지 않는다. 청년이 첫 직장을 얻고, 직장인이 월급의 실질가치를 체감하며, 자영업자가 저녁 장사를 걱정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이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성장의 의미가 완성된다. 경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반도체 수출의 기록을 축하하되 그 기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수출의 온기가 산업 전반으로, 기업에서 가계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수출은 잘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경제정책이 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경제지표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성장만이 아니다. 성장의 과실이 더 넓고 깊게 국민에게 돌아가는 성장, 그것이야말로 진짜 경제성장이다.
2026-08-23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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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성장'을 말할 때다
[경제일보]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 중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3일 귀국했다. 집권 1년은 성과를 자축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데 머물 시점이 아니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힐 때다. 지금 정부가 제시해야 할 가장 절박한 국가 의제는 성장이다. 분배와 복지, 공정과 통합도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 없이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 관계를 복원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유럽과 신흥국으로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점은 평가할 만하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소비 회복도 경제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 버팀목이 됐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0%로 전망하면서 반도체 경기와 수출 증가를 긍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최근에는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해졌다는 판단 아래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올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지표만으로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건설투자의 회복은 더디다. 미국의 관세정책과 국제 금융시장 불안, 중국의 산업 추격도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지방경제와 청년 고용으로 온기가 충분히 퍼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남아 있다. 성장률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지속 가능성과 확산성이다. 이번 순방은 이런 한계를 돌파할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글로벌 인공지능 기업과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인공지능(AI) 협력과 투자 확대를 논의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핵심광물과 에너지, 식량, 방산 등 경제안보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특히 한국과 브라질은 남미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와의 무역협정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실무그룹 구성과 핵심광물 협력 확대에 뜻을 모았다. 중남미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먼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리튬과 구리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의 주요 공급처이자 방산·조선·원전·바이오·식품 산업의 잠재시장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공급망의 블록화를 재촉하는 상황에서 자원과 시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이 특정 국가와 특정 시장에 편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면 중남미와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하지만 정상외교에서 체결한 양해각서와 공동성명은 출발점일 뿐이다. 외교적 약속이 기업의 수주와 투자,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순방은 사진과 구호만 남긴다. 정부는 국가별 후속 사업을 정리한 경제외교 이행표를 만들어 국민과 기업에 공개해야 한다. 핵심광물 확보 물량과 장기 구매계약, 현지 광산 공동개발, 방산 수출 금융, 바이오 인허가 협력, 메르코수르 무역협정 협상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금융기관이 따로 움직이는 낡은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미래산업을 선택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AI·반도체·조선·방산·바이오는 한국이 이미 일정한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췄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다. 이들 산업을 단순히 개별 기업의 사업으로 보지 말고 인재와 전력, 용수, 데이터, 금융, 세제, 통상외교가 결합된 국가 프로젝트로 다뤄야 한다. AI 경쟁력은 선언이나 연구개발 예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망과 첨단 그래픽처리장치 확보, 산업 데이터 활용, 전문인력 양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 산업도 공장 건설 지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반도체, 첨단 패키징까지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조선과 방산은 수출금융과 유지·보수 체계를 강화하고, 바이오는 임상과 인허가에 걸리는 시간을 경쟁국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규제혁신도 더 이상 부처별로 몇 건의 규제를 없앴다는 실적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의 존재만이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같은 사안을 놓고 부처마다 해석이 다르고 정권이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기준이 흔들린다면 기업은 공장을 짓거나 신사업에 뛰어들기 어렵다. 신산업 규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처리시한제를 도입하고, 정부가 기한 내 답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제도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정부 지원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세제와 금융, 인프라를 제공한다면 기업은 국내 투자와 고용, 협력업체와의 성과 공유로 응답해야 한다. 해외 투자 확대가 불가피하더라도 연구개발과 핵심 제조기반, 양질의 일자리는 국내에 남기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기술 축적과 청년의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성장정책을 소수 기업을 위한 특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책임도 무겁다. 여야가 모든 경제정책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 동안 세계 각국은 AI와 반도체, 에너지와 방산을 놓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성장전략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회는 첨단산업 전력망과 인재 양성, 기업 투자와 규제혁신에 필요한 법안을 정파적 이해에서 떼어내 처리해야 한다. 정부 역시 야당과 기업, 노동계의 의견을 듣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주역>에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나온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 더 나아가기 어려운 변곡점에 서 있다. 수출 대기업과 수도권, 추격형 제조업에 기댄 성장 모델을 혁신기업과 지역,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선도형 성장 모델로 바꾸지 못하면 저성장은 일상이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1년이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 기반을 세운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남미 순방에서 확보한 외교적 공간을 공급망과 시장, 투자와 일자리로 바꾸는 일이 그 첫 시험대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시간을 끝내고 경제가 국민의 삶을 일으키는 시간을 열어야 한다. 성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지 않다. 정부는 이제 성장의 필요성을 주저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다만 그 성장은 소수의 숫자를 키우는 성장이 아니라 기업의 혁신과 노동의 정당한 보상, 지역의 기회와 국민통합을 함께 이끄는 성장이어야 한다. 취임 1년 이후의 국정은 바로 그 목표에 집중돼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대전환의 골든타임은 이미 시작됐다.
2026-08-03 0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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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프레임을 넘어…변화하는 베트남 여성들의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여성은 종종 ‘결혼이주여성’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만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베트남 사회와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베트남은 전쟁과 재건,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치며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활발한 사회 구조를 형성해 왔다. 현재 베트남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며, 자영업과 서비스업,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스타트업과 콘텐츠 산업, 국제 비즈니스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유지하면서도 개인의 성장과 경력 개발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습 역시 점차 확대되는 분위기다. 베트남 여성 특유의 관계 중심 문화도 자주 언급된다. 가족과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감정 표현에는 비교적 솔직한 편이라는 평가가 있다. 다만 이 역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특징이라기보다 문화적 경향성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 확대 과정에서 긍정적인 측면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과 오해, 국제결혼과 정착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 역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일부 사례가 과장되거나 특정 집단 전체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베트남 여성을 단순히 ‘적응해야 하는 대상’ 혹은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두기보다, 변화하는 베트남 사회의 흐름 속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베트남 출신 여성들은 노동 현장과 지역사회, 교육과 서비스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웃이자 구성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이미 경제와 문화, 인적 교류 측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가 됐다. 특히 인구 구조 변화와 노동력 부족 문제가 심화되는 가운데 양국 간 인적 교류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베트남 여성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특정 국가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 소비를 넘어, 빠르게 변화하는 아시아 사회와 다문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미화나 편견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일 것이다.
2026-05-19 15: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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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가 만든 성장, 나라 경제의 착시가 되어선 안 된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의미 있는 성장 지표를 받아 들었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1.7%, 전년 동기 대비 3.6% 성장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수출 증가와 설비투자 확대가 성장을 이끌었다. 장기간 이어진 경기 둔화 속에서 반가운 소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는 숫자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장률은 높아졌지만 시장의 체감 온도는 여전히 낮다. 대기업 실적은 개선됐지만 중소 제조업 현장은 여전히 어렵다. 수출은 늘었지만 청년 취업난은 계속되고 지방 산업단지는 일감 부족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간극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번 성장률은 경제 회복이 아니라 ‘통계의 위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성장의 핵심 동력은 단연 반도체다. 글로벌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함께 메모리 및 첨단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고 한국 기업들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올해 1분기 성장률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반도체의 호조가 곧 한국 제조업 전체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조업 생산은 증가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상당수 업종은 사실상 정체 상태에 가깝다. 거대한 엔진 하나가 경제 전체를 끌어올린 셈이다. 엔진이 강한 것은 다행이지만 차체 곳곳이 흔들리는데 속도계 숫자만 보고 안심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제조업 생태계의 힘으로 성장해 왔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기계, 전자, 소재·부품 산업이 서로 맞물려 국가 경쟁력을 만들어냈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중소기업과 협력업체, 지역 산업단지, 숙련 기술자들이 존재했다. 대기업 혼자 만든 성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첨단 반도체와 AI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전통 제조업과 중소기업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지만 협력업체들은 원가 상승과 인건비, 고금리 부담에 시달린다. 수도권 첨단 클러스터에는 자금과 인재가 몰리지만 지방 산업단지는 노후 설비와 인력 유출로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경제 회복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도체는 분명 한국의 핵심 전략산업이다. 정부가 전력과 용수, 세제, 연구개발(R&D),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기업만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대만, 유럽 모두 국가 차원의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지원이 산업정책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고부가가치 산업이지만 고용 창출 효과는 제한적이다. 자동화 수준이 높고 생산 효율 중심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출액은 커도 그 효과가 모든 지역과 가계로 곧장 확산되지는 않는다. 반도체 호황만으로 민생 회복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 위험한 것은 착시다. 성장률이 좋다는 이유로 경제 전반이 안정됐다고 판단하는 순간 정책은 느슨해질 수 있다. 반도체가 버텨주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산업의 침체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수출 지표 개선에 가려 내수 부진과 자영업 위기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위기는 눈에 보이지만 착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경제 변동성도 커진다. AI 투자 확대가 이어지면 성장세는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수요 둔화나 공급 과잉, 미·중 기술 갈등 심화, 대만해협과 중동 정세 불안 같은 변수들이 현실화되면 충격은 곧바로 한국 경제로 전이된다. 특정 산업 하나가 경제 전체의 방파제이자 동시에 급소가 되는 구조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지금 한국 경제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반도체의 성공을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AI 시대의 수혜가 메모리 반도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데이터센터, 전력기기, 냉각장비, 로봇, 제조 자동화, 통신장비, 보안, 소프트웨어, 소재·부품 산업까지 연결돼야 한다. 반도체가 앞에서 끌고 다른 산업이 뒤따라야 진짜 산업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중소·중견 제조업의 생산성 강화도 시급하다. 한국 산업의 가장 약한 고리는 대기업이 아니라 산업의 ‘허리’다. 스마트공장과 공정 자동화, 에너지 효율 개선, 기술 인력 재교육, 수출 판로 확대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해야 한다. 단순한 보조금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융과 기술, 인력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지역 산업 생태계도 살펴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하나가 전국 산업의 미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조선과 자동차 부품, 철강, 화학, 기계, 뿌리산업 등 지역마다 필요한 전략은 다르다. 지방 산업단지가 쇠퇴하는데 수도권 첨단산업만 성장한다면 국가 경제의 균형은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인력 문제 역시 심각하다. 반도체 인력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용접공과 정밀가공 기술자, 배터리 공정 엔지니어, AI 기반 제조 소프트웨어 인력까지 산업 전반에서 숙련 인력이 부족하다. 대학 정원 확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마이스터고와 전문대, 지역대학, 기업 훈련체계가 산업 현장과 직접 연결돼야 한다. 내수 회복도 중요하다. 수출이 경제의 엔진이라면 내수는 국민 생활의 체감 온도다. 성장률이 높아도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 국민은 경기 회복을 실감하지 못한다. 물가와 금리, 주거비, 가계부채, 자영업 침체가 여전히 소비를 짓누르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좋아도 동네 상권이 무너지면 경제 회복은 공허한 말이 된다. 정부의 메시지도 정직해야 한다. 좋은 지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되 한계 역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반도체는 강하지만 제조업 전반은 아직 불안하다. 수출은 회복되고 있지만 내수는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다. 대기업은 선전하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여전히 어렵다. 이 현실을 숨기지 않는 것이 정책 신뢰의 출발점이다. 정치권 역시 경제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여당은 성장률만 내세워 자화자찬하고 야당은 체감 경기만 부각해 경제 전체를 부정한다면 둘 다 무책임하다. 산업 현장은 정치 구호보다 전기료와 금리, 인력난, 해외 주문 상황을 더 절박하게 체감하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중요한 기회를 맞고 있다. 반도체 호황은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다. 단기적인 성과 홍보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산업 구조를 재정비하고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데 활용할 것인가. 한 산업의 호황을 국가 경제 전체의 건강으로 착각하면 다음 위기는 더 깊어진다. 반대로 지금 제조업의 허리를 보강하고 산업 생태계를 넓히며 내수와 고용의 약한 고리를 보완한다면 반도체 호황은 진짜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경제의 기본 원리는 단순하다. 한 산업만 강한 경제보다 여러 산업이 함께 버티는 경제가 더 강하다. 대기업 몇 곳만 좋은 경제보다 중소기업과 지역 산업이 함께 살아나는 경제가 오래간다. 성장률 숫자보다 국민이 일자리와 소득으로 체감하는 경제가 진짜 건강한 경제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하나의 산업에 국가 경제의 미래를 모두 걸 수는 없다. 산업의 뿌리가 깊고 생태계가 넓어야 경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도체 호황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적 격차와 취약성을 함께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이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은 분명 의미 있는 성적표다. 그러나 한 과목 점수가 높다고 학생 전체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도체가 만든 성장의 빛이 강할수록 그 그늘 또한 더 냉정하게 봐야 한다. 지금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호황 속에서 다음 위기의 씨앗을 키우게 될 것이다.
2026-05-06 0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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