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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은 뒷전, 정쟁에 갇힌 국정감사
[경제일보] 국정감사가 반환점을 향해 가고 있지만 국회 곳곳에서 들리는 것은 정책을 둘러싼 토론보다 여야의 거친 공방이다. 지난 15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공공기관장 인사자료 제출 문제로 여야가 충돌하면서 감사가 여러 차례 중단됐다. 같은 날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대법관 재제청 문제 등을 둘러싸고 고성과 막말이 오갔다. 국정감사가 국민에게 보여줘야 할 장면인지 되묻게 한다. 국정감사는 헌법 제61조에 근거한 국회의 권한이다. 행정부와 공공기관의 정책 집행을 살피고 예산 낭비와 제도적 문제를 밝혀내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정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정책을 추궁하고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는 일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올해 국감에서도 정치적 공방이 감사의 실질적인 진행을 가로막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에서 불거진 공공기관장 인사자료 제출 논란은 그 자체로 검증할 가치가 있는 사안이다. 기관장의 전문성과 직무 수행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요구는 국회의 정당한 감시 활동에 속한다.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와 자료 제출 범위에 관한 법적 기준도 존중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쟁점을 합리적인 절차로 조정하지 못해 본질의가 지연됐다는 점이다. 자료 제출의 필요성과 범위를 명확히 판단하고 감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 역시 국회의 책임이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관 재제청 논란도 사법부의 독립과 국회의 감시권이 맞닿은 중요한 사안이다. 여야가 치열하게 논쟁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고성과 막말이 앞서면 정작 확인해야 할 법적 쟁점과 제도 개선 과제는 흐려진다. 국정감사에서 충돌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모두 정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정부의 부당한 행위를 밝혀내기 위한 강한 추궁은 필요하다. 문제는 논쟁의 목적이 사실 확인과 정책 개선인지, 상대 진영에 정치적 타격을 주는 데 있는지다. 여당은 정부의 잘못을 무조건 방어해서는 안 된다.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것과 정책 실패를 감싸는 것은 다르다. 야당 역시 의혹 제기만으로 견제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비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정책을 문제 삼았다면 실행 가능한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이 국정감사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세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정부의 정책이 당초 목표를 달성했는지, 잘못된 행정으로 누가 피해를 봤으며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다. 이번 국감에서도 금융권 해킹과 고객정보 보호, 국립대병원 인력난 등 국민 생활과 직접 연결되는 현안이 다뤄졌다. 이러한 문제는 국회가 감사 이후까지 추적해야 할 과제다. 금융기관의 정보보호 체계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의료인력 부족으로 발생한 진료 공백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구체적인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 국정감사의 가치는 의원이 얼마나 날카롭게 질문했느냐보다 그 질문이 어떤 변화를 이끌었느냐에서 드러난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국회의 책임은 무겁다. 한국 경제는 저출생과 고령화, 생산성 둔화라는 구조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기술 경쟁은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재촉하고 있다. 국회가 관련 법률과 제도 개선을 장기간 미룬다면 기업과 국민의 정책 예측 가능성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정치권의 정쟁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기업 투자에는 경기와 금리, 글로벌 수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그러나 국회가 해결해야 할 제도적 불확실성을 방치하는 것은 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더하는 일이다.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다면 그 갈등을 정책의 우열을 가리는 생산적인 경쟁으로 바꿔야 한다. 서로 다른 해법을 놓고 논쟁하되 효과와 비용을 비교하고, 국민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의회정치의 역할이다. 국정감사의 운영 방식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상임위원회별로 핵심 감사 과제와 정책 성과 지표를 명확히 정하고, 정부가 제출한 자료와 답변을 체계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자료 제출을 둘러싼 분쟁은 법률과 절차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하고, 필요한 경우 비공개 열람 등 합리적인 대안도 활용할 수 있다. 감사 이후의 사후 관리도 강화해야 한다.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지적 사항이 정부의 시정 조치로 이어졌는지, 예산과 제도가 실제로 개선됐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국정감사 결과보고와 시정요구 처리 절차가 형식적인 문서 제출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의 감시권은 강해야 한다. 동시에 그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도 절제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정부의 자료 제출 거부와 부실 답변에는 엄정하게 대응하되, 국회의원 역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처럼 단정하거나 감사 시간을 정치적 공방에 소모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치의 본질을 바름에 두었다. 오늘의 국회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상대를 이기는 것만으로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다. 국민의 삶을 개선할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여야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감사에서 최소한의 공통 목표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국정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기간 국회가 보여줘야 할 것은 더 자극적인 폭로나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고 국민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성과다. 정쟁에서 이기는 국회보다 국정의 잘못을 고치는 국회가 필요하다. 국정감사의 성적표는 여야의 승패가 아니라 국민에게 남긴 변화로 평가받아야 한다.
2026-10-16 09: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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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워야 한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성장률 반등을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3.3%, 내년을 2.9%로 전망했다. 정부도 내년 국세수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와 세수가 동시에 개선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국가재정의 앞날을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7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증가한다. 역대 최대 규모다. 반면 정부는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올해 51.6%에서 내년 48.3%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GDP 대비 3.9%에서 0.1%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재정건전성 지표가 개선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내년 국세수입이 정부 예상대로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거나 대외 여건이 악화하면 세수 전망부터 달라질 수 있다. 경기 호황에 기대어 개선되는 재정과 제도적으로 건전성을 확보한 재정은 구분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생산성 둔화는 잠재성장률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높아졌다고 장기 성장능력까지 회복됐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연금과 의료·돌봄 등 고령화 관련 지출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가채무의 부담도 단순히 채무 총액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경제 규모에 비해 얼마나 빠르게 증가하는지, 세수로 이자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한지, 국채 만기가 돌아왔을 때 어떤 금리로 차환해야 하는지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 과거 낮은 금리로 발행한 국채를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하면 이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국채가 당장 높은 금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만기 구조와 시장금리, 경제성장률에 따라 부담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재정에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견딜 여력이 있느냐다. 정치권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재정 확대를 요구한다.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재정을 활용해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경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필요한 역할이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지출도 무조건 낭비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경기 대응을 명분으로 시작한 사업이 효과 검증 없이 유지되거나, 선거를 앞두고 재원 마련 방안이 불분명한 공약이 경쟁적으로 쏟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재정지출의 필요성과 효과, 지속 가능성을 따지는 절차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밀려서는 안 된다. 국가재정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금은 국민이 부담하고 국채는 미래의 재정 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지출하는 돈이 생산성을 높이고 미래의 세수 기반을 넓힌다면 다음 세대에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 반대로 효과가 불분명한 지출을 빚으로 충당한다면 미래세대의 선택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따라서 국가채무를 무조건 줄이는 것만이 책임 있는 재정은 아니다. 빚을 내더라도 무엇에 쓰는지, 그 지출이 어떤 경제적·사회적 편익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재정준칙의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채무와 재정적자에 중장기 관리 기준을 두되 경기침체와 재난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외를 허용한다면 적용 조건과 기간, 정상적인 재정 운용으로 복귀할 계획까지 분명히 해야 한다. 재정준칙은 정부가 필요한 돈을 쓰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는 장치가 아니다. 평상시에 재정 여력을 확보해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약속이다. 지출 구조조정도 숫자를 맞추는 작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성과가 낮은 보조금과 중복 사업, 정책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관행적으로 유지되는 예산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반면 취약계층의 생계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까지 일률적으로 삭감해서는 안 된다. 지출의 성격과 효과를 구분하는 것이 재정개혁의 출발점이다. 절감한 재원은 미래 성장 기반을 넓히는 데 우선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바이오, 로봇, 우주항공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연구개발과 인재양성, 전력망과 산업 인프라에 장기간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연구와 공공 기반시설에 정부가 역할을 집중하고 사업화와 시장 경쟁은 기업의 창의성과 자본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미래산업 지원에도 성과 검증은 예외일 수 없다. 첨단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든 사업에 예산을 배정할 이유는 없다. 지원의 필요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중복 여부를 따져야 한다.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과 미래산업에 투자하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재정개혁을 추진하기 좋은 시기다. 정부 전망대로 세수가 크게 늘고 재정수지가 개선된다면 그 성과의 일부를 중장기 재정위험을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경기가 나쁠 때는 지출을 줄이기 어렵고, 경기가 좋을 때는 지출을 늘리자는 요구가 커진다. 이런 정치적 유혹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정건전성은 경기의 부침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도 달라져야 한다. 국민에게 무엇을 더 지원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만큼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기존의 어떤 사업을 정비할 것인지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여야가 재정준칙과 중장기 지출 개혁을 놓고 책임 있게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재정은 오늘의 경제를 지탱하면서 내일의 성장 기반도 마련해야 한다.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관자>에는 “양입이출(量入而出)”,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지출한다는 뜻의 말이 전해진다. 국가재정을 가계부처럼 단순하게 운영할 수는 없지만, 재원의 한계를 고려하고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경제는 지금 반도체 호황이라는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특정 산업의 호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우고, 성장의 과실을 미래 경쟁력과 재정 여력으로 연결해야 한다. 정치가 재정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다만 그 성과를 다음 선거의 득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경제적 기반으로 평가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재정의 책임은 돈을 얼마나 썼느냐가 아니라 그 지출이 무엇을 남겼느냐에서 드러난다.
2026-10-08 11: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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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성장에 가려진 숙제, '반도체 다음'을 준비할 때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좋은 숫자를 받아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전망보다 1.5%포인트 높였다. 수년간 1~2%대 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경제로서는 반가운 변화다. 오늘 아침 나온 수출 성적표는 더 화려하다. 9월 수출은 1209억4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월 1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월 누적 수출도 8145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웃돌았다. 무역수지는 498억5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처음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2.8% 늘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수출 물량과 가격이 함께 뛰면서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좋은 성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커지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주문이 이어지고 설비투자가 늘어난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 반도체 호황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다음이다. 예정처가 내다본 내년 성장률은 2.7%다. 올해보다 0.8%포인트 낮다. 2026~2030년 연평균 성장률 역시 2.7%로 전망했다. 올해 잠재성장률은 2.2%, 앞으로 5년 평균은 2.3% 수준이다. 내년 2.7% 성장을 경기침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정처는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도 회복할 것으로 봤다. 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을 웃돈다. 올해의 높은 성장세가 내년에는 다소 정상화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3.5%와 2.7% 사이에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올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9월만 놓고 보면 전체 수출 1209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가 603억 달러다. 거의 절반이다. 특정 월의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우리 수출의 평상시 구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전체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좌우하는 현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예정처도 반도체 쏠림을 별도의 위험 요인으로 짚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국민소득이 다른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가계소득으로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혜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수출에도 자영업자나 일부 중소기업이 경기 회복을 선뜻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자동화 수준이 높다. 과거 제조업 호황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대규모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속도와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속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더 근본적인 숫자는 잠재성장률이다. 한 해 성장률은 경기와 수출 여건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물가 불안을 키우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에 가깝다. 예정처가 내다본 향후 5년 평균은 2.3%다. AI 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자본과 생산성의 기여는 커지지만 인구 감소 탓에 노동의 성장 기여는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저출생·고령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아니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저절로 없애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반도체의 힘과 한계를 함께 경험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수출과 설비투자, 세수가 한꺼번에 좋아졌다. 사이클이 돌아서면 세 지표가 동시에 흔들렸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것은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다. 그렇다고 나라 경제 전체를 한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오래 맡겨둘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은 AI 투자 붐과도 맞물려 있다. 예정처는 미국 장기금리 상승에 따른 AI 투자 둔화 가능성과 미국의 관세정책, 중국과의 경쟁 심화를 향후 성장경로의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지금의 호황을 흔들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도체 호황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가 벌어준 시간과 돈을 다음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불황보다 호황기에 하기 쉽다. 경기가 꺾이면 기업은 투자 여력을 잃고 정부의 세수도 줄어든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 수출과 기업이익, 세수가 함께 좋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손대기 어려웠던 숙제를 풀 기회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부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까지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력망과 용수, 연구개발,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인프라의 영역이다. 동시에 산업정책의 시선을 그 너머로 넓혀야 한다. AI 서비스와 바이오, 로봇, 방산, 에너지, 콘텐츠 등에서 반도체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과 직업교육을 산업 수요에 맞게 바꾸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반도체에서 생긴 자본과 기술, 인재가 다른 산업으로 흘러갈 통로가 넓어져야 반도체 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의 호황으로 이어진다. <관자(管子)>에는 “일년지계 막여수곡, 십년지계 막여수목, 종신지계 막여수인(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면 곡식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을 내다보면 사람을 키우라는 뜻이다. 경제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더 짓는 일은 몇 년 뒤 수출을 늘릴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대학과 노동시장을 바꾸며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10년 뒤 나라의 성장률을 바꾼다. 9월 수출 1209억 달러와 반도체 603억 달러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다. 기록은 기록대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 숫자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까지 해결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올해 3.5%와 내년 2.7% 사이에서 읽어야 할 것도 성장률의 단순한 오르내림이 아니다. 반도체가 밀어준 성장의 힘을 다른 산업과 가계, 다음 세대의 성장으로 얼마나 옮겨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 사이클도 다시 돈다. 좋은 시절에 할 일은 축배를 오래 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겨울을 견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벌어준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다음 호황에도 또 반도체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번 호황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26-10-01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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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비사업 4곳 심의 통과…노후주거지에 4400가구 공급
[경제일보] 서울 광진·강남·용산·강서의 노후 주거지 4곳이 총 4400여가구 규모로 재편된다. 광진구 중곡1동 A구역은 2200가구 재개발로, 강남 일원동 한솔아파트와 용산 이촌동 반도아파트, 강서 염창우성1·2차·삼천리아파트는 각각 재건축을 통해 주택 공급을 늘린다. 마포 합정지구에서는 용적률과 비주거 의무비율을 조정해 민간 개발 여건을 넓혔다. 서울시는 제11차 도시계획위원회 신속통합기획 정비사업 등 수권분과위원회에서 중곡1동 A구역 재개발과 한솔아파트·반도아파트·염창우성1·2차·삼천리아파트 재건축 정비계획이 각각 수정 또는 조건부 가결됐다고 29일 밝혔다. 같은 날 재정비분과위원회에서는 합정지구 지구단위계획 변경안도 수정가결됐다. 이 가운데 공급 규모가 가장 큰 곳은 광진구 중곡1동 A구역이다. 중랑천과 용마산·아차산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토지구획정리사업 이후 노후 저층주택이 밀집해 재개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에 지난해 2월 신속통합기획 후보지로 선정된 뒤 올해 3월 계획안을 확정했다. 서울시는 기존 제2종 일반주거지역을 제3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상향하고 사업성 보정계수 1.53 등을 통해 정비계획 용적률을 299.54%로 적용했다. 재개발 이후 최고 35층, 2200가구가 들어서며 이 가운데 임대주택은 424가구다. 주거환경 개선과 함께 공원과 도로 등 기반시설도 확충한다. 단지 동측에는 6724㎡ 규모 어린이공원을 조성하고 중랑천에서 단지 내부를 거쳐 용마산·아차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녹지축을 만든다. 중랑천 방향으로 폭 20m 통경축도 확보해 수변 조망을 열어둘 계획이다. 동 주민센터와 데이케어센터, 공영주차장을 함께 넣은 1600㎡ 규모 공공복합청사도 들어선다. 공원 하부에는 89면 규모 공영주차장을 마련하며 동일로와 긴고랑로, 면목로 등 주변 도로도 확폭한다. 단지 내부에는 중마초로 이어지는 남북 방향 통학로와 동서 방향 보행로가 조성될 예정이다. 강남구 일원동 한솔아파트는 기존 570가구에서 최고 25층, 960가구로 재건축된다. 1994년 준공된 단지로 이번 심의를 통해 제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을 상향하고 법적상한용적률 249.99%를 적용받게 됐다. 전체 공급 물량 가운데 공공임대는 79가구다. 대모산 자락에 위치한 점을 고려해 자연경관을 가리지 않는 배치도 적용한다. 주요 조망점에서 폭 20m 이상의 통경구간을 확보하고 건축물 높이는 70m 이하로 계획했다. 광평로변에는 폭 5m 전면공지를 활용한 가로숲길을 만들고 광평로10길은 폭 12m로 넓혀 보행로와 차도를 분리한다. 공공기여시설로는 단지 북서측 1000㎡ 부지에 연면적 2000㎡ 규모 데이케어센터를 신설한다. 대모산입구 사거리 인근 저층부에는 국공립 어린이집과 다함께돌봄센터를 넣어 입주민뿐 아니라 인근 주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용산구 이촌동 반도아파트는 한강변 입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재건축 계획이 마련됐다.준공 후 약 49년이 지난 기존 192가구를 최고 58층, 276가구로 바꾸며 공공주택 55가구가 포함된다. 단지는 이촌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자리하고 남측으로 한강과 한우리공원을 끼고 있다. 정비계획에는 한우리공원과 연계한 작은도서관과 주민카페, 라운지 등 개방형 커뮤니티시설을 담았다. 한강변과 동작대로변에는 폭 10m 보행공간을 확보하고, 그늘쉼터와 차양막·가로수를 늘려 폭염에도 이동할 수 있는 보행환경을 조성한다. 강서구 염창우성1·2차와 삼천리아파트도 이번 심의를 통과해 재건축에 속도를 내게 됐다. 준공 후 약 34년이 지난 기존 602가구를 최고 39층, 986가구 규모로 다시 짓는 사업으로 공공임대주택 224가구가 포함된다. 서울시는 2024년 9월 개정된 ‘2030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준공업지역 용적률을 기존 250%에서 400%까지 완화하고 사업성 보정계수를 반영했다. 주택 유형에서는 고령화에 대응한 설계가 포함됐다. 전용 85㎡ 초과 주택 일부를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거주하면서도 독립된 생활이 가능한 ‘3대 거주형 시니어주택’으로 계획했다. 한강으로 이어지는 생활가로에는 그늘쉼터와 저층부 아케이드, 가로수를 배치해 보행환경도 정비한다. 주거 정비와 별도로 합정지구에서는 민간 개발 규제가 완화된다. 서울시는 구역별로 달랐던 용적률 체계를 통합하고 상업지역에 별도로 적용하던 비주거 의무비율을 폐지하기로 했다. 허용용적률은 스마트도시·탄소중립·디자인혁신 등 공공성 항목을 반영하면 조례용적률의 최대 110%까지 적용할 수 있다. 관광숙박시설에는 더 큰 인센티브를 준다. 일정 요건을 갖춘 3성급 이상 호텔 등은 조례용적률의 최대 1.3배까지 적용할 수 있다. 일반상업지역을 기준으로 기존 800%에서 최대 1040%까지 높일 수 있으며 이 같은 완화는 2029년 1월4일까지 건축허가를 신청한 경우 적용된다.
2026-09-29 11: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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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헌도 '본업 특화' 시대…유통업계, ESG에 인프라·전문성 더한다
[경제일보] 유통업계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단순 기부를 넘어 본업 인프라와 사업 역량을 사회적 과제 해결에 직접 연결하는 '운영형'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BBQ는 본사 공급망과 전국 가맹점 조리 역량을 지역사회 나눔에 활용하고 쿠팡은 직매입·물류망을 인구감소지역 농가의 판로로 연결하고 있다. 신세계면세점도 여행과 맞닿은 업종 특성을 살려 관광약자의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등 기업이 보유한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사회공헌에 접목하며 일회성 지원보다 지속 가능한 ESG 체계를 구축하는 모습이다. 21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BBQ는 전국 가맹점 및 본사의 식품 공급망, 치킨대학의 조리 인프라를 지역사회 나눔에 활용하고 있다. 제너시스BBQ그룹은 추석을 앞둔 이달 '찾아가는 치킨릴레이', '치킨대학 착한기부', '패밀리와 함께하는 치킨릴레이' 등을 통해 전국 아동·청소년과 어르신에게 치킨 1000마리를 전달했다. '찾아가는 치킨릴레이'는 BBQ가 직접 현장을 찾아 갓 조리한 치킨을 전달하는 사회공헌 활동이다. 나눔을 꾸준히 이어오면서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지역사회에 기부한 치킨은 약 1만8000마리에 달한다. 추석을 앞두고는 원주시청소년쉼터와 이천시청소년쉼터, 용인청소년쉼터 등 9곳을 찾아 현장에서 조리한 치킨을 전달했다. BBQ는 가맹점 교육 시설인 치킨대학도 사회공헌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착한기부'를 통해 치킨대학에서 교육받는 패밀리와 구성원이 직접 조리한 치킨을 지역사회에 전달하고 대한적십자사와 연계해 그룹홈, 청소년복지센터, 노인복지센터 등으로 지원 대상을 넓히고 있다. 전국 가맹점주가 참여하는 '패밀리와 함께하는 치킨릴레이'도 운영하고 있다. 본사가 신선육을 지원하면 각 지역 패밀리가 이를 직접 조리해 지역아동센터와 종합복지관, 아동보육원, 요양원 등에 전달하는 구조다. 이를 통해 본사의 식자재 공급 역량과 가맹점의 조리·지역 네트워크를 결합해 전국 단위 나눔 체계를 이어가고 있다. BBQ 관계자는 "명절을 앞두고 치킨 한 끼가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작은 즐거움이 되고 함께 나누는 정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활동을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가까이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했다. 쿠팡은 전국 단위 직매입과 물류망을 활용해 인구감소지역 농가의 판로를 넓히고 있다. 이 같은 유통망 확대에 힘입어 올해 1~8월 해당 지역 8곳에서 매입한 과일은 7000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로 지난해 연간 매입량인 약 7600톤에도 근접한 수준이다. 매입 지역은 전남 영암·함평과 경북 성주·의성·영천·고령, 대구 군위 등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진행 중인 지역이 대부분이다. 쿠팡은 이들 지역에서 사과·참외·자두·수박·딸기·무화과 등 30여종을 직매입해 전국 소비자에게 새벽배송한다. 지역 농산물 매입 규모는 해마다 확대되는 추세다. 인구감소지역 등의 과일 매입량은 2022년 3400톤에서 2023년 5600톤, 2024년 6000톤, 지난해 7600여톤으로 꾸준히 늘었다. 올해도 증가세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연말까지 매입량이 8400톤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같은 매입 확대에는 전국으로 넓어진 새벽배송망이 큰 역할을 했다. 쿠팡이 호남·경상·강원 등으로 배송 지역을 확대하면서 과일 구매 수요가 늘었고 이에 맞춰 인구감소지역을 중심으로 산지 매입도 함께 늘렸다. 올해 경북 고령의 매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60%, 전남 함평은 138%, 대구 군위는 73% 증가했다. 확대된 판로는 농가 매출 증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군위 지역 자두 농가 130여곳이 참여하는 '군위농협자두공선출하회'의 쿠팡 매출은 올해 현재까지 1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배 늘었다. 대형 유통사 직매입이 기존 공판장 거래의 가격 변동과 판로 불확실성을 일부 보완하면서 농가의 안정적인 판매 기반을 넓히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쿠팡 관계자는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는 인구감소 지역 농가들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역 농가 매입과 상생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세계면세점은 여행 산업과 맞닿은 업종 특성을 관광약자 지원과 연결했다. 신세계면세점을 운영하는 신세계디에프는 지난 17일 초록우산에 장애아동의 해외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배리어프리 글로벌 문화체험' 기부금 1600만원을 전달했다. 이번 사업은 교통·숙박·관광시설 접근성 등의 제약으로 해외여행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장애아동에게 보호자와 함께하는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장애아동 3가정이 참여하며 아동과 보호자가 1대1로 동행한다. 장애 특성을 고려한 이동과 숙박 환경을 지원하고 여행지도 휠체어 이동과 현지 접근성을 반영해 선정할 예정이다. 신세계디에프가 관광약자를 지원 대상으로 정한 배경에는 면세점이 여행 과정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기존 아동·청소년 사회공헌에서 범위를 넓혀 자사 사업 영역과 연관된 '여행 접근성'을 사회적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신세계디에프 관계자는 "여행의 출발점에 있는 기업으로서 여행 접근성은 우리 업과 가장 가까운 사회적 과제"라며 "장애아동과 가족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함께 추억을 쌓는 데 이번 지원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6-09-21 17: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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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이 넘칠 때가 재정의 진짜 시험대다
[경제일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기업의 장부를 넘어 나라 곳간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예상한 내년 국세수입은 584조4000억원. 올해 본예산보다 크게 늘어난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동시에 증가하는 배경에는 AI 반도체 호황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최근 10년의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떼어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숫자가 워낙 크다 보니 먼저 하나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162조3000억원 전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직접 낸 세금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추세선을 웃도는 전체 내국세 증가분을 계산한 금액이고, 반도체 호황은 그 세수 급증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반도체가 번 세금’이라는 표현이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호황기에 갑자기 늘어난 세수는 누구의 돈인가. 지금 살아 있는 국민이 당장 써도 되는 돈인가. 아니면 경기가 꺾인 뒤를 위해 남겨둬야 할 돈인가. 더 멀리 보면 아직 세금을 낼 나이조차 되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도 일정한 몫이 있는 돈인가.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답변에서 짚은 것도 같은 문제다. 그는 대외 불확실성과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시에 국가채무와 의무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재정 여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과 미래세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는다. 경기가 무너질 때 재정은 과감하게 써야 한다. 민간이 움츠러들고 기업이 투자를 미룰 때 정부까지 지갑을 닫으면 불황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난 호황기에는 일부를 남겨야 한다. 불황에 쓸 수 있는 정부가 되려면 호황기에 다 쓰지 않는 정부여야 한다. 이것이 재정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대응기금이라는 발상 자체는 평가할 대목이 있다. 정부는 162조3000억원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분야에 쓰고, 12조5000억원으로 신규 국채 발행을 줄일 계획이다. 가장 큰 몫인 104조4000억원은 당장 쓰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적립한다. 전체 기금의 64%가량이다. 세수가 더 들어왔다고 한 해에 모두 지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더구나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AI 붐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고 투자 사이클이 꺾이면 기업이익과 법인세는 빠르게 줄어든다. 세수는 내려가는데 한 번 시작한 복지와 보조금, 기관과 사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일시적인 돈으로 영구적인 지출을 만드는 일이다. 올해만 들어오는 10조원을 근거로 매년 10조원이 필요한 사업을 시작하면 호황이 끝나는 순간 그 차이는 빚이 된다. 세금을 올리거나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결국 국채가 빈자리를 메운다. 때문에 미래대응기금의 성패도 ‘얼마를 담았느냐’보다 어떤 돈을 어디까지 쓸 수 있게 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45조4000억원의 사업지출 가운데 AI와 전략기술, 인재 양성처럼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오늘의 반도체 호황에서 나온 세금으로 다음 산업을 만드는 것은 세대 간 이전이라기보다 세대 간 투자에 가깝다. 반면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려운 경상적 복지와 반복성 지원사업을 초과세수에 기대어 늘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반도체 가격은 내려가도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출은 내려가지 않는다. 반도체 사이클은 꺾여도 정부 사업에는 사이클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104조4000억원의 여유자금이 중요하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이 돈은 향후 세수 결손이나 예상하지 못한 재정 수요가 발생할 때 재정을 보강하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방향은 합리적이지만 정부는 일정한 범위에서 추가경정예산을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계획 변경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들고 있다. 신속성은 커지지만, 100조원이 넘는 자금에 행정부의 재량이 커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쌓아두는 것만으로 미래세대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꺼낼 수 있는지, 무엇에 쓸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세수 결손이 어느 정도일 때 사용할 것인지, 경기침체의 기준은 무엇인지,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업까지 허용할 것인지 법과 제도로 선을 그어야 한다. 특히 기금의 여유자금이 그때그때 정부가 원하는 사업을 담는 별도 예산처럼 운용돼서는 안 된다. 노르웨이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에서 들어오는 정부 순수입을 정부연기금 글로벌(GPFG)에 넣고 해외에 투자한다. 재정에는 기금의 원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대신 장기적으로 예상 실질수익률에 해당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활용한다. 현재 그 기준은 약 3%다. 핵심은 석유로 갑자기 부자가 된 한 세대가 자원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금융자산으로 바꿔 후대와 나누겠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의 반도체 세수와 노르웨이의 석유 수입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석유는 땅에서 한 번 꺼내 쓰면 사라지는 국민 자산이고,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세금은 혁신과 생산 활동에서 생긴다. 정부가 기업이 낸 세금을 영구적으로 묶어둘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배울 원칙은 있다. 일시적으로 크게 들어온 돈을 평상시의 소득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 노르웨이는 석유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한국 재정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기’ 왕제편에는 ‘국무구년지축왈부족(國無九年之蓄曰不足)’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에 아홉 해를 버틸 비축이 없으면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어 3년을 농사지으면 1년치 식량을 남기고, 9년이면 3년치를 비축해야 한다고 했다. 풍년에 남겨 흉년을 견딘다는 오래된 국가운영의 원칙이다. 2500년 전 곡식창고가 오늘의 재정기금으로 바뀌었을 뿐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2027년 예산안은 총지출이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늘어난다. 동시에 정부는 미래대응기금과 국채 발행 축소를 통해 내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적극적인 지출과 재정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경기순환으로 생긴 초과세수와 경제의 기초체력에서 생긴 구조적 세수를 구분해야 한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상시 지출의 재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초과세수의 사용 순서를 정해야 한다. 미래 성장투자, 재정안정 적립, 국가채무 축소 사이의 기준을 사전에 만들어 정권과 경기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기금에서 돈을 꺼내는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불황이나 세수 급감 때는 과감하게 쓰되 단순히 예산을 더 쓰기 위한 우회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호황을 내일의 고정비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이 잘 벌어 세금이 많이 들어온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 돈으로 AI와 첨단산업을 키우고 청년에게 기회를 만들며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 살림은 기업의 분기 실적과 달라야 한다. 기업은 좋은 해에 성과급을 더 줄 수 있다. 국가는 좋은 해의 세수를 보고 수십 년 동안 지급해야 할 약속을 쉽게 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은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늘어난 돈을 모두 현재의 소비에 써버리면 다음 세대는 호황의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그때 만들어진 지출 의무만 넘겨받을 수 있다. 반도체가 벌어준 추가 세수는 현 정부의 돈도, 현 세대만의 돈도 아니다. 호황을 만든 기업과 노동자의 성과에서 나왔지만 국가의 세금이 된 순간 현재와 미래의 국민 모두를 위해 써야 할 자원이 된다. 재정이 돈이 들어올 때보다 그 돈이 사라진 뒤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 그때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새로 만든 지출의 청구서가 아니라, 다음 위기를 견딜 재정 여력과 다음 산업을 만들어낼 자산이다. 돈이 많이 들어왔을 때 많이 쓰는 정부보다, 돈이 사라질 때를 준비하는 정부가 더 유능하다. 162조3000억원 미래대응기금의 진짜 이름값도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2026-09-14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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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점 먼 농촌 어르신 찾아간다…SKT, 경남 4개 군서 보이스피싱 예방
[경제일보] SK텔레콤이 대리점 접근이 어려운 농촌 지역을 직접 찾아가 고령층의 보이스피싱 예방교육과 스마트폰 점검을 지원한다. 지난해 유심 정보 유출 사고 당시 긴급 대응책으로 시작한 방문 서비스를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운영하는 상시 디지털 지원사업으로 확대하는 모습이다. SKT는 지난 11일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과 ‘찾아가는 서비스’ 운영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13일 밝혔다. 산청군청에서 열린 협약식에는 신성범 국회의원과 유명현 산청군수, 진병영 함양군수, 이홍기 거창군수, 김윤철 합천군수, 이혜연 SKT 고객가치혁신실장, 김우람 대외지원실장 등이 참석했다. SKT는 4개 군에서 지역별로 두 차례씩 총 8차례 서비스를 운영한다. 보이스피싱 수법을 강의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심 전화와 문자에 대응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실습형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휴대전화 활용 교육과 요금·서비스 상담, 기기 점검도 한자리에서 진행한다. 통신사와 관계없이 스마트폰 살균·세척과 보호필름 교체, 단말 상태 점검 등을 받을 수 있다. 고령층이 서비스를 한 번 듣고 끝내지 않도록 현장에서 궁금한 내용을 반복해 묻고 직접 조작해 보는 방식으로 교육을 구성할 계획이다. 이번 협약 지역은 전국에서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된 곳이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 지난 7월 말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산청군 46.3%, 함양군 42.2%, 거창군 34.7%, 합천군 48.9%다. 전국 평균 21.7%보다 1.6∼2.3배 높다. 디지털 기기 보급이 확대됐지만 사용 능력의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2025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서도 고령층은 장애인·저소득층·농어민을 포함한 주요 정보취약계층 가운데 디지털정보화 수준이 가장 낮게 나타났다. 금융범죄의 표적이 될 위험도 크다. 경찰청은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 조직이 상대적으로 보유 자산이 많은 60대 이상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한 바 있다. 피해 예방교육과 함께 의심 문자를 식별하고 신고하는 실습이 필요한 이유다. 신성범 의원은 “고령자가 많은 지역일수록 금융범죄와 디지털 정보격차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전문가가 주민을 직접 찾아가는 교육을 위해 민관 협력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4개 군은 읍·면별 주민 수요를 반영해 행사 장소와 운영 방식, 참여 규모를 정하고 주민 모집을 지원한다. 유명현 산청군수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와 통신 환경을 세심하게 살피고 필요한 교육을 제공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지역 특성에 맞춘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SKT의 찾아가는 서비스는 2025년 유심 정보 유출 사고 이후 매장 방문이 어려운 도서·산간 주민의 유심 교체와 재설정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됐다. 이후 금융범죄 예방과 스마트폰 활용교육, 단말 관리로 범위를 넓혔다. SKT는 올해 전국 74개 시·군에서 145차례 서비스를 운영해 약 1만3000명을 만났다고 설명했다. 해당 실적은 회사 집계로 외부 기관의 별도 검증을 거친 수치는 아니다. 이혜연 SKT 고객가치혁신실장은 “고객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목소리를 듣는 것은 신뢰 강화의 출발점”이라며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지자체와 함께 현장 중심의 활동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지자체 협력은 통신사가 정한 지역을 일방적으로 순회하는 방식보다 실제 도움이 필요한 주민을 찾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앞으로는 행사 횟수보다 교육을 받은 주민이 금융사기 대응법을 제대로 익혔는지, 읍·면 단위에서 서비스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가 사업의 성과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26-09-13 13: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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