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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명 위한 특수분유부터 셀렉스까지…매일유업이 57년간 찾은 '영양의 빈칸'
[경제일보] 매일유업은 지난 57년간 소비자에게 부족한 영양을 찾아 새로운 시장으로 연결해왔다. 1969년 우유가 부족하던 시기 낙농사업으로 출발해 1974년 영유아용 조제분유 생산에 나섰고 이후에는 일반 분유를 먹기 어려운 환아를 위한 특수분유까지 개발하며 영양 수요를 세분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유아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소비자에게는 '락토프리 우유'를 내놓고 중장년층의 단백질 섭취 수요에는 '셀렉스'를 선보였으며 우유 대신 식물성 음료를 찾는 소비자를 겨냥해 두유와 오트음료로 제품군을 넓혀왔다. 질환·연령·소화 능력·식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미충족 수요를 찾아 영양 설계와 유가공 기술로 제품화해온 것이다. 우유와 분유에서 시작한 기술이 50여년 뒤 중장년·고령자·환자의 영양관리까지 이어진 배경도 여기에 있다. '낙농보국'에서 시작한 57년…우유·분유로 식품사업 기반 구축 출발점은 우유였다. 매일유업의 전신 한국낙농가공은 1969년 2월 '낙농보국'을 창업정신으로 출범했다. 같은 해 5월 정부와 김복용 창업주가 각각 절반씩 출자해 자본금 3억원으로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 우유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유를 공급할 낙농 기반 확보가 먼저였다. 매일유업은 1972년 미국산 처녀우 850마리와 호주산 임신우 850마리를 들여왔고 이듬해에는 국내 최초로 젖소를 비행기로 수송하며 원유 공급 기반을 넓혔다. 이렇게 확보한 낙농 기반을 바탕으로 1973년 호남공장을 준공해 테트라팩 우유 생산에 들어갔으며 1974년에는 중부공장을 가동해 조제분유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생산 기반을 갖춘 뒤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 1981년 매일분유를 중동에 수출하며 국내에서 축적한 유가공 역량을 해외시장으로 연결했다. 우유와 분유에서 쌓은 식품 제조·유통 역량은 냉장주스, 발효유, 컵커피와 같은 인접 식품군으로 이어졌다. 1992년 국내 최초 냉장주스 '썬업'을 출시한 데 이어 컵커피·발효유·두유까지 제품군을 넓히며 소비자의 다양한 식음 수요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유업이 반복해온 방식은 단순히 제품 종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양과 식생활에서 아직 충족되지 않은 수요를 찾아 새로운 제품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2017년에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회사 구조를 재편했다. 기존 매일유업은 그룹의 지주회사인 매일홀딩스로 바뀌고 우유와 분유 등 유가공 사업은 새로 출범한 매일유업이 맡는 방식으로 분리됐다. 회사의 법인 구조는 달라졌지만 생산시설과 브랜드, 유가공 사업의 역사는 1969년 창립 때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350명 위한 특수분유부터 락토프리까지…작은 영양 수요도 제품으로 매일유업의 사업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매출 규모가 큰 우유나 커피보다 1999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자용 특수분유에서 찾을 수 있다.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자는 특정 아미노산 등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거나 생성되지 않아 모유와 일반 분유는 물론 고기와 쌀밥 같은 일상적인 식품도 자유롭게 섭취하기 어렵다. 매일유업은 이런 환아가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문제가 되는 아미노산은 제거하고 비타민과 미네랄 등 필수 영양성분은 보충한 특수 유아식을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이렇게 시작한 특수분유 생산은 올해로 27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8종 12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특수분유는 효율성이 높은 사업과는 거리가 있다. 2024년 기준 국내 선천성 대사이상 환자는 약 350명 수준에 불과한 데다 일반 제품과 성분이 섞이지 않도록 생산 때마다 일반 분유 공정을 멈추고 설비를 별도로 세척한 뒤 소량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일유업은 20년 넘게 특수분유 생산을 이어오고 있다. 수익성보다 반드시 필요한 수요에 대응하는 이 같은 방식은 매일유업이 강조해온 ‘한 명의 아이도 건강한 삶에서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을 실제 제품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특정 소비자가 기존 제품을 섭취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품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출시한 '소화가 잘되는 우유'다.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하기 어려운 소비자를 위해 미세한 필터로 유당을 제거하는 UF(Ultra Filtration) 공법을 적용했다. 출시 당시 국내에서는 락토프리라는 개념이 생소했지만 유당 소화에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 수요가 확인되면서 시장도 빠르게 성장했다. 닐슨 집계 기준 국내 락토프리 우유 시장은 2019년 300억원대에서 2023년 약 870억원으로 두 배 이상 확대됐고 '소화가 잘되는 우유'는 같은 시기 시장점유율 44%로 1위를 기록했다. 2024년에는 출시 19년 만에 누적 판매량 8억개를 넘어서는 등 우유 섭취에 불편을 느끼던 소비자를 새로운 유제품 수요층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2008년 선보인 상하목장은 소비자 선택 기준이 가격에서 원료와 생산 방식, 품질까지 넓어지는 흐름을 겨냥했다. 일반 백색우유와 가격 경쟁을 벌이기보다 유기농 원유와 생산 과정에 가치를 두는 소비자층을 공략하면서 차별화된 시장을 구축했다. 락토프리 우유가 소화 여부에 따른 수요를 겨냥했다면 상하목장은 원료와 생산 방식에 대한 선호를 제품에 반영해 동일한 우유 시장 안에서도 소비 기준을 한층 세분화한 사례다. 분유 기술을 중장년·환자까지…셀렉스·메디웰로 '평생 영양' 공략 인구구조 변화는 매일유업이 공략해야 할 영양 수요의 방향도 바꿨다. 영유아 인구 감소로 우유와 분유 시장의 성장 여력이 줄어드는 사이 고령화와 건강관리 수요는 커졌고 매일유업은 이에 맞춰 분유에서 축적한 영양 설계 역량을 중장년층으로 확장했다. 2018년 선보인 성인영양식 브랜드 '셀렉스'가 대표적이다. 같은 해 식품업계 최초로 근감소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매일사코페니아연구소를 설립해 중장년층의 근육과 단백질 섭취를 연구했다. 이후 △분말형 단백질 △RTD 음료 △프로틴바 △건강기능식품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고 셀렉스 누적 매출은 지난해 5월 5000억원을 넘어섰다. 분유가 성장기 영유아에게 필요한 영양을 설계한 제품이었다면 셀렉스는 연령이 높아지면서 부족해지기 쉬운 단백질과 영양 관리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생애주기별 영양 설계는 고령자와 환자로도 이어져 매일유업은 전문 균형영양식 '메디웰'을 통해 건강 상태에 따라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는 시장까지 공략하고 있다. 올해는 이 사업을 한 단계 더 세분화하며 한림대학교의료원, 푸드테크 기업 슈팹과 환자·고령자 맞춤형 영양식 개발을 위한 협력을 시작했다. 의료기관의 임상 역량과 식품 기술을 결합해 건강 상태에 따라 필요한 영양을 설계하는 것이 목표다. 아이의 연령과 상태에 맞춰 분유를 설계했던 방식이 중장년, 고령자, 환자의 상태별 영양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새로운 영양 수요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는 기존 유가공 기술도 활용되고 있다. 매일유업은 지난 7월 국산 우유를 UF 공법으로 3배 농축한 단백질 RTD 음료 '퓨어틴'을 출시했다. 330㎖ 한 팩에 단백질 23g을 담으면서 유당은 제거했다. 2005년 락토프리 우유에 활용했던 여과 기술을 최근 커지는 단백질 음료 시장에 적용한 것이다. 영양의 빈칸은 식습관에서도 나타났다. 건강과 환경, 소화 문제 등을 이유로 우유 대신 식물성 음료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매일유업도 콩, 아몬드, 귀리를 기반으로 한 제품군을 구축했다. 기존 매일두유에 아몬드브리즈를 더한 데 이어 2021년 귀리를 활용한 '어메이징오트'를 선보였다. 유제품을 주력으로 해온 매일유업이 우유를 마시지 않는 소비자까지 겨냥해 제품군을 확대한 것이다. 올해 8월에는 상하목장 브랜드의 첫 두유 제품인 '콩물두유' 3종도 출시했다. 국산 서리태를 활용한 제품으로 기존 유기농 유제품 중심이던 상하목장 브랜드를 식물성 음료까지 확장했다. 올해 하반기에도 매일유업이 식물성 음료를 주요 성장 품목으로 꼽고 있다는 점에서 일회성 신제품보다 사업 포트폴리오 확대에 가깝다. 이 흐름을 놓고 보면 매일유업의 고객은 점차 연령과 원료의 경계를 넘어섰다. 매일유업은 영유아용 분유부터 유당불내증 소비자를 위한 락토프리 우유, 중장년층 대상 단백질 제품, 환자·고령자용 균형영양식, 식물성 음료까지 고객별 생애주기와 식습관에 따라 제품군을 세분화하고 있다. 뉴트리션 영업익 338%·수출 26% 증가…백색우유·해외 수익성은 과제 이러한 전략은 올해 실적으로도 나타났다. 매일유업의 2026년 상반기 연결 매출은 949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392억원으로 54.3% 늘었다. 2분기만 보면 매출 4800억원, 영업이익 204억원으로 각각 4.8%, 64.4% 증가했다. 특히 조제분유와 성인영양식 등이 포함된 뉴트리션 사업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올해 상반기 뉴트리션 매출은 1204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3.2%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1.6%에서 12.7%로 높아졌다. 수익성 개선 폭은 더 컸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8억원으로 338.3% 늘었고 2분기만 보면 매출 632억원으로 16.4% 증가한 가운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2억원에서 27억원으로 확대됐다. 같은 기간 유가공 부문 매출 증가율이 1%대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뉴트리션 사업이 매일유업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유 사업에는 최근 출생아 반등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출생아 수는 14만5804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4% 늘었다. 지난 6월 출생아 수도 2만3111명으로 15.6% 증가해 24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증가세를 이어갔다. 매일유업도 출생아 증가에 따른 조제분유 판매 호조를 상반기 실적 개선 요인으로 꼽았다. 뉴트리션 사업의 성장세에 맞춰 조직 구조도 재정비했다. 매일유업은 2021년 헬스앤뉴트리션 사업을 분리해 설립한 100% 자회사 매일헬스뉴트리션을 올해 5월 다시 흡수합병했다. 이를 통해 뉴트리션 사업의 글로벌 성장전략을 본사 차원에서 추진하는 동시에 온·오프라인 영업과 상품개발, 마케팅 역량을 한데 묶어 경영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별도 법인에서 키워온 셀렉스 사업을 본체로 편입해 기존 유가공·영양 연구 역량과 판매조직 간 시너지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축적한 영양 제품 경쟁력은 해외시장에서도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매일유업의 수출액은 53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6.4% 늘어 같은 기간 2.5% 증가에 그친 내수 매출보다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수출 증가에 힘입어 전체 매출에서 해외가 차지하는 비중도 4.6%에서 5.6%로 높아지면서 해외사업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해외 소비자와의 접점도 넓히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매일두유와 셀렉스 등 8개 제품을 미국 올리브영 패서디나점과 온라인몰에 입점시키며 현지 판매 채널을 확대했다. 저당·고단백 두유와 콜라겐 제품 등을 앞세워 국내에서 세분화해온 식물성·건강관리 수요를 미국의 'K-웰니스' 소비로 연결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특수분유 역시 해외시장으로 공급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매일유업은 중국 알리바바그룹의 헬스케어 계열사 알리건강을 통해 선천성 대사질환자용 특수분유를 현지에 공급해왔으며 이를 통해 국내 수백명의 환자를 위해 유지해온 제품을 해외 희귀질환 환자까지 연결하고 있다. 이처럼 제품별 해외 판매 접점은 넓어지고 있지만 이를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수익성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올해 상반기 수출이 빠르게 증가했음에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6%에 그쳤고 지난해 해외 종속기업인 북경매일유업유한공사와 매일호주유한회사는 각각 7억원과 65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해외 판매 규모를 확대하는 것과 현지 사업 기반을 안정적인 이익으로 연결하는 것은 별개의 과제인 만큼 향후 해외사업의 이익 창출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뉴트리션과 식물성 음료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매일유업의 출발점이자 핵심 사업인 백색우유의 부담은 여전히 크다. 회사는 올해 상반기 원유 공급과잉으로 백색우유 부문에서 손실이 발생한 데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포장재와 수입 원부자재 가격 상승까지 겹치며 원가 부담이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올해 상반기 말 매일유업의 원유 매입가격은 ℓ당 1359.97원으로 지난해 말 1357.71원, 2024년 말 1343.9원보다 높아졌다. 백색우유 소비가 구조적으로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원유 매입 부담은 쉽게 낮추기 어려워 수익성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매일유업은 하반기 백색우유의 손익 구조를 개선하는 한편 조제분유와 셀렉스 등 뉴트리션, 식물성 음료의 국내외 판매를 확대해 사업 포트폴리오 전반의 수익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매일유업이 이제 증명해야 할 것은 '영양의 빈칸'을 발견하는 감각보다 그 빈칸을 충분한 규모의 시장으로 키워내는 힘이다. 국내 유업시장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뉴트리션과 식물성 음료의 외형과 수익성을 함께 높이고 해외에서도 국내에서 검증한 제품 경쟁력을 안착시켜야 한다. 지난 57년간 세분화된 소비자 수요를 제품으로 구현해온 역량이 향후 시장 확대와 수익성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매일유업의 다음 성장 곡선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매일유업 관계자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본질적인 영양 수요를 발굴해 보다 건강한 식음료로 제품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50년 이상 축적한 영양 설계 기술과 지속적인 연구개발(R&D), 소비자 건강 증진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해온 진정성이 고객 신뢰와 브랜드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프리미엄 유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식물성 음료와 성인·장노년층 영양식 등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할 것"이라며 "중국에서 조제분유와 식물성 음료, 셀렉스 등을 판매하고 미국에서도 소비자 접점을 넓히는 등 수출 활로를 확보해 해외시장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2026-08-31 17: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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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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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크림서 배터리까지…'79년 전환 DNA' LG화학, 3대 엔진 가동
[경제일보] LG화학의 출발점은 거대한 석유화학 공장이 아니었다. 1947년 부산에서 만든 화장품 ‘럭키크림’이었다. 잘 팔리던 크림의 뚜껑이 쉽게 깨지자 창업주 구인회는 플라스틱에서 해법을 찾았다. 고객의 불편을 새로운 소재와 기술로 해결하려던 시도가 오늘날 LG화학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됐다. 락희화학공업사는 이후 플라스틱 빗과 비눗갑을 생산하며 소재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생활용품을 팔던 회사가 제품을 구성하는 원료와 소재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이후 79년 동안 되풀이됐다. 생활화학에서 플라스틱과 석유화학으로, 다시 전지와 정보전자소재·첨단소재·바이오로 주력 사업을 끊임없이 옮겼다. 석유화학 키우고, 배터리 준비한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성장의 중심은 석유화학으로 이동했다. PVC와 ABS 등 합성수지 사업을 확대했고 여수 석유화학 단지를 중심으로 생산체계를 구축했다. 2000년대에는 LG대산유화와 LG석유화학을 잇달아 합병하며 석유화학의 수직계열화도 강화했다. 하지만 석유화학이 성장하는 동안 이미 다음 먹거리도 준비하고 있었다. LG화학은 1995년 2차전지 연구를 시작해 1997년 리튬이온전지 시제품을 만들었고, 1999년 국내 최초로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외환위기로 상당수 기업이 투자를 접던 시기에도 연구를 이어간 결과였다. 이후 2009년에는 GM의 양산형 전기차 볼트에 배터리를 단독 공급하며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입지를 넓혔다. 배터리가 독자적인 대형 사업으로 성장하자 회사는 다시 구조를 바꿨다. 2020년 전지사업을 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출범시켰다. 완제품 배터리는 떨어져 나갔지만 LG화학은 양극재 등 핵심 소재를 남겼다. 2024년에는 GM과 2035년까지 50만톤 이상의 양극재를 공급하는 24조7000억원 규모 장기계약을 체결했다. 배터리를 직접 만드는 회사에서 배터리 성능을 좌우하는 소재를 공급하는 회사로 역할을 다시 바꾼 셈이다. 바이오도 새로운 축으로 편입했다. LG생명과학을 합병한 데 이어 2023년 미국 항암제 기업 AVEO를 인수하며 글로벌 항암 신약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석유화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성장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축적한 기술과 자본을 새로운 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환의 DNA’가 이끈 컨버팅 LG화학은 올해 이 같은 사업 방식을 ‘기술이 강한 컨버팅(Converting) 회사’라는 비전으로 구체화했다. 다만 회사가 말하는 컨버팅은 단순히 업종을 바꾸거나 기존 사업을 신사업으로 대체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LG화학 관계자는 “고객과 시장, 기술이 변화하는 영역에서 회사가 보유한 모든 기술과 역량을 결집해 사업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는 활동”이라며 “단순한 소재 공급자를 넘어 고객의 제품 성능과 제조 공정까지 함께 설계하는 ‘통합 솔루션 기업’으로 진화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어 “오랜 시간 축적한 원천 기술과 공정 노하우, 제품 기획·설계 단계부터 고객과 함께 맞춤형 기술과 공정 솔루션을 제안하는 역량이 경쟁력”이라며 “축적된 기술을 새로운 산업과 시장으로 빠르게 연결하는 기반이 된다”고 덧붙였다. 과거 럭키크림의 깨지는 뚜껑을 플라스틱으로 해결했던 방식과 맞닿아 있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단순히 공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한 뒤 그 기술을 새로운 시장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LG화학이 79년 동안 반복해 온 사업 방식에 ‘컨버팅’이라는 이름을 붙인 셈이다. LG화학 역시 공식적으로 컨버팅을 단순 사업 전환이 아닌 고객의 제품 성능과 제조 공정까지 함께 설계하는 전략으로 설명하고 있다. 석화의 LG에서 반도체·로봇·항암으로 다음 전환의 목적지도 구체화됐다. LG화학은 2035년까지 연구개발(R&D)에 15조원을 투입하고 이 가운데 70%를 반도체·인프라, 모빌리티·로봇, 항암 신약 등 3대 핵심 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전통 화학사업 의존도를 낮추면서 기술 장벽과 성장성이 높은 사업으로 자원을 옮기겠다는 구상이다. 반도체·인프라에서는 AI 반도체 성장에 맞춰 첨단 패키징 소재를 집중 육성한다. 패키징용 접착제와 저유전·열관리 소재, 유리기판 등이 대상이다. 기존 PID·DAF·CCL 등 전자소재 경쟁력을 토대로 2030년 관련 사업을 매출 2조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목표다. 모빌리티는 전기차에서 로봇으로 영역을 넓힌다. 로봇 구조 소재와 정밀 구동·접합 소재를 개발하고 고객사와 공동개발을 통해 진입장벽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항암 신약에서는 글로벌 임상과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동시에 기술이전과 인수합병(M&A)을 활용해 파이프라인의 사업화를 앞당긴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다음 사업을 키우는 동시에 회사를 성장시킨 석유화학의 체질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증설과 수요 부진이 겹치면서 장기간 공급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와 업계는 국내 NCC 생산능력을 연간 270만~370만톤, 전체의 최대 25%가량 줄이는 사업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LG화학도 지난해 12월 정부에 석유화학 사업재편안을 제출했지만 세부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LG화학은 국내 최대 에틸렌·프로필렌 생산업체인 만큼 석유화학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있다. 결국 범용제품의 규모 경쟁보다 자동차·전자·반도체 등 고객 산업과 밀착된 고부가 제품으로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느냐가 향후 경쟁력을 가를 가능성이 크다. LG화학은 한 가지 사업을 79년간 지켜온 회사라기보다 기술을 들고 성장하는 산업으로 계속 이동해 온 회사에 가깝다. 화장품에서 출발한 플라스틱 기술은 석유화학으로 이어졌고, 화학과 소재 기술은 배터리와 전자소재로 뻗었다. 이제 그 끝은 AI 반도체와 로봇, 항암 신약을 향하고 있다. 과거의 성공이 다음 전환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발 석유화학 공급과잉과 전기차 시장 변화 속에서 기존 사업을 재편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업의 수익성을 증명해야 한다. LG화학이 말하는 ‘컨버팅’의 진짜 시험대도 여기다. 79년간 회사를 키운 전환의 DNA가 또 한 번 LG화학의 주력 사업을 바꿀 수 있을지가 승부처다. [아주경제 2026년 08월 20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8-20 09: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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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케미칼, 첨단소재가 끌었다…2분기 영업익 1101억원
[경제일보] 롯데케미칼이 첨단소재와 정밀화학의 수익성 개선에 힘입어 2분기 연속 흑자를 이어갔다. 다만 회사의 주력인 기초화학 부문 영업이익은 23억원에 그쳐 본업의 업황 회복이 본격화됐다고 보기는 이르다. 대산·여수 사업재편을 통한 범용 석유화학 축소와 고부가 소재 확대가 하반기 실적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7일 롯데케미칼은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5조6864억원, 영업이익 1101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은 전분기보다 13.9%, 전년 동기보다 35.5% 늘었다. 영업이익은 1분기 735억원보다 366억원 증가했고, 지난해 2분기 2449억원의 영업손실에서는 흑자로 돌아섰다. 당기순이익은 1944억원으로 집계됐다. 실적 개선을 이끈 것은 첨단소재다. 첨단소재 부문은 매출 1조1551억원, 영업이익 1325억원을 기록했다. 주요 제품의 스프레드 확대와 환율 효과가 겹치면서 영업이익률은 11.5%까지 높아졌다. 롯데정밀화학도 국제가격 상승과 판매량 증가로 매출 5863억원, 영업이익 619억원을 냈다. 반면 기초화학은 매출 3조9403억원, 영업이익 23억원에 그쳤다. 1분기 영업이익 455억원에서 크게 줄었다. 정기보수와 원료 가격 변동에 따른 부정적 래깅 효과가 수익성을 끌어내렸다. 회사도 3분기 글로벌 수요 회복 지연과 원료 가격 변동성 확대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매출 1942억원, 영업손실 169억원으로 적자를 이어갔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구조조정 배경에는 중국발 공급과잉과 장기간 이어진 수요 부진이 있다. 정부는 업계 전체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능력을 연간 최대 370만톤, 전체의 약 25%까지 줄이는 방향으로 재편을 추진해 왔다. 로이터도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증설이 수요 증가 속도를 앞지르면서 국내 석유화학사의 구조재편을 압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롯데케미칼은 범용 석유화학 비중을 줄이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6월 대산공장 분할을 마쳤고 오는 9월 HD현대케미칼과 통합법인 출범을 추진한다. 정부가 승인한 대산 재편안에는 연산 110만톤 규모 롯데케미칼 대산 NCC를 3년간 가동 중단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여수에서는 여천NCC·한화솔루션·DL케미칼과 설비와 사업을 통합하는 재편안이 지난달 정부 승인을 받았다. 재무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2분기 말 차입금은 10조2654억원으로 전분기보다 1572억원 늘었고 순차입금비율도 43.9%로 0.2%포인트 상승했다. 흑자 기조를 이어가는 것과 별개로 사업재편 효과를 실제 현금흐름과 재무구조 개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제다.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산업을 둘러싼 대내외 경영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사업재편을 통해 경쟁력 강화, 고부가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 미래 성장사업 육성, 재무구조 개선을 차질 없이 추진 중”이며 “앞으로도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해 기업가치를 높여 나갈 것”이라고 했다.
2026-08-07 18: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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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중동 재긴장에 나프타 긴급 점검…"8월 물량은 확보"
[경제일보] 정부가 중동 정세의 긴장이 다시 높아지자 국내 나프타와 석유화학제품 수급 상황을 긴급 점검했다. 석유화학 업계가 8월까지 필요한 나프타를 전년 수준 이상으로 확보해 당장 생산 차질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호르무즈해협과 홍해가 동시에 흔들리는 만큼 9월 이후 도입 물량과 실제 운송 일정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28일 산업통상부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국화학산업협회와 석유화학 업계가 참석한 가운데 ‘나프타 및 석유화학제품 수급상황 긴급 점검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산업부는 현재 업계의 나프타 확보량과 석유화학제품 재고가 안정적인 수준이라며 단기 수급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이번 발표는 ‘8월까지 전년 수준 이상’이라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 절대 확보량과 국내 도착을 마친 물량, 9월 이후 계약 규모는 공개하지 않았다. 계약상 물량을 잡아두는 것과 선박이 제때 국내 항만에 도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동의 해상운송 불안은 다시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의 통제권을 거듭 주장하며 일부 선박의 통항을 막았고, 예멘 후티 반군은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와 홍해 수출항 얀부를 잇는 원유 수송시설을 공격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이란 공습을 일시 중단하고 협상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항로 위험은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석유화학 기초 원료다. 이를 분해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을 만들고, 다시 자동차 부품과 전자제품, 포장재, 의약·의료용품 등에 쓰이는 합성수지로 가공한다. 산업부에 따르면 국내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하며, 수입 물량 중 중동산 비중은 77%에 달한다. 특히 호르무즈해협뿐 아니라 홍해 항로까지 동시에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사우디 원유를 실은 선박들이 바브엘만데브해협을 피해 항로를 되돌렸고, 아프리카를 우회하면 아시아 도착까지 한 달가량 더 걸릴 수 있다고 전했다. 나프타 운반선도 같은 해상 길목과 보험·용선 시장의 영향을 받는 만큼 도착 지연과 운임 상승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석유화학 업계에는 원료 부족과 비용 상승이 함께 부담이다.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제품 가격에 원가 상승분을 온전히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프타 가격과 선박 운임이 오르면 수익성은 다시 악화할 수 있다. 확보 물량만큼이나 도입 가격과 도착 시점,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률을 함께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산업부는 업계와 실시간 소통체계를 구축해 중동 정세와 국내외 수급 상황을 살피고, 기존 수급 안정 조치를 유지하면서 9월 이후 물량을 추가 확보하기로 했다. 당장의 재고가 안정적이더라도 해상운송 차질이 장기화하면 9월 이후 수급과 비용은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정부 점검의 초점도 계약 물량에서 실제 도착 물량과 운송 기간, 필수품 공급망까지 넓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양기욱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중동 정세의 불안이 장기화될 가능성에 대비해나프타 수급 영향으로 인한 의료·보건 등 국민 생활 필수품의 생산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와 업계가 긴밀히 소통하며 나프타 수급 상황을 면밀히살펴줄 것을 당부드린다”며 “정부도 나프타 수급 안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2026-07-28 15: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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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만 뜨거운 한국경제, 수출 신기록에 취할 때 아니다
[경제일보] 한국 수출이 다시 기록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7월 1일~20일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3% 늘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은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메모리 수요 증가에 힘입어 180.6% 급증했다. 중국 수출은 94.1%, 미국 수출도 39.6% 증가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로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같은 기간 자동차 수출은 10.6% 감소했다. 전체 수출의 화려한 숫자 뒤에 반도체 편중과 업종별 양극화가 동시에 드러난 것이다. 수출 호조가 곧바로 경제 전반의 회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는 23일 발표될 2분기 국내총생산(GDP)을 앞두고 로이터가 경제전문가 24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경제는 2분기 전 분기보다 0.4% 성장했을 것으로 전망됐다. 1분기 성장률 1.8%에서 크게 낮아진 수치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과 투자가 경제를 끌었지만 소비와 내수는 여전히 부진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0.4%는 아직 전망치다. 7월 1일~20일 수출 역시 월 전체 실적이 아닌 잠정치다. 그러나 두 지표가 동시에 보여주는 방향은 분명하다. 반도체 공장과 수출항은 뜨거운데 골목상권과 자영업자의 매출, 청년의 취업시장, 가계의 소비심리는 그만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액은 빠르게 늘지만 국민의 살림살이가 비례해 좋아지지 않는 ‘K자형 회복’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위험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호황은 분명 한국경제의 소중한 기회다. 세계적인 AI 투자 경쟁 속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수출 증가와 기업 실적 개선은 세수 회복과 설비투자 확대에도 도움이 된다. 정부와 기업은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도체가 잘된다는 사실과 경제 전체가 건강하다는 판단은 구분해야 한다. 반도체는 경기 변동이 크고 글로벌 수요와 공급, 미국과 중국의 산업정책, 기술 변화에 민감한 업종이다. 지금은 AI용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공급 확대나 투자 조정이 시작되면 업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꺾일 수 있다. 한국경제가 반도체 한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할수록 업황 반전의 충격도 경제 전체로 커지게 된다. 자동차 수출이 감소했다는 점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철강과 석유화학, 기계, 배터리 등 다른 주력 산업도 관세와 중국의 추격, 공급과잉, 고유가라는 복합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분이 다른 업종의 부진을 가린다고 해서 산업 경쟁력의 약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 수출 실적이 좋을 때 구조적 취약성을 점검하고 다음 성장동력을 준비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반도체 수출 실적을 홍보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수출 호황의 온기가 기업 투자와 고용, 임금과 소비로 퍼지도록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국내 설비투자와 협력업체 발주, 양질의 일자리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수출 증가가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우선 반도체 기업들이 국내에 연구개발과 첨단 생산시설을 지속적으로 확충할 수 있도록 전력과 용수, 산업용지와 인재 공급 문제를 풀어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발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송전망과 용수시설, 교통망을 제때 구축해 실제 투자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가 공동으로 기술과 인력을 키우는 생태계도 강화해야 한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분의 사용처도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일회성 현금 지원이나 단기적인 소비 부양에 투입하면 잠시 경기지표를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경제의 체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재정은 청년 고용과 직업훈련, 중소기업의 자동화·디지털 전환, 연구개발, 산업 전환 과정에서 밀려나는 노동자의 재교육에 우선 투입해야 한다. 소비 부진에 대한 접근도 달라져야 한다. 가계가 지갑을 닫는 것은 단순히 소비할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높은 주거비와 교육비, 금리 부담, 불안한 고용과 노후 걱정이 소비를 제약하고 있다. 상품권이나 소비쿠폰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내수가 지속적으로 회복되기 어렵다. 주거·돌봄·교육비 부담을 낮추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리는 구조적 대책이 필요하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도체 대기업의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내수 서비스업과 영세 사업장의 경쟁력이 개선되지 않으면 경제의 양극화는 심해진다. 디지털 전환 지원과 공동 물류, 경영 컨설팅, 사업 전환을 돕되 경쟁력을 잃은 기업까지 무조건 연명시키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정부 지원은 생존 자체보다 생산성 향상과 구조 전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반도체 수출 호황을 다른 산업으로 확산하는 전략도 서둘러야 한다. AI 반도체가 데이터센터와 로봇, 자율주행차, 조선, 바이오, 방위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수요 산업과 연계해야 한다. 반도체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를 넘어 반도체를 활용해 전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나라가 돼야 한다. <서경>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잘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가 나온다. 수출 실적이 좋을 때야말로 호황 뒤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에 취해 내수 부진과 산업 편중을 외면한다면 지금의 호황은 다음 불황에 대한 대비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수출액이 늘었다고 국민의 살림까지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호황이 기업의 장부에만 머물지 않고 투자와 고용, 임금과 소비로 이어져야 비로소 경제 전체의 회복이라 부를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반도체의 열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기가 골목상권과 일자리, 다른 산업으로 번지도록 길을 놓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지금 반도체라는 강력한 엔진을 달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제대로 달리려면 다른 바퀴와 차체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반도체만 뜨겁고 내수와 고용이 차갑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수출 신기록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 숫자에 취할 때는 아니다.
2026-07-22 11: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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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한화·DL, 여수 석화 통합 승인…에틸렌 140만t 감축
[경제일보] 롯데케미칼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이 참여하는 전남 여수 석유화학산업단지 사업재편 계획이 정부 승인을 받았다. 지난 2월 충남 대산산단에 이어 국내 석유화학산업에서 두 번째로 승인된 사업재편 사례다. 22일 산업통상부와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정부는 여천NCC와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 4개사가 제출한 여수산단 석유화학 사업재편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전국 기준으로는 석유화학 사업재편 2호 프로젝트이며, 여수산단에서는 첫 승인 사례다. 이번 사업재편은 여천NCC 1~3공장 가운데 이미 가동이 중단된 3공장에 이어 2공장을 추가로 폐쇄하고, 남은 1공장과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을 통합해 신설법인을 설립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천NCC 2·3공장의 연간 에틸렌 생산능력은 각각 92만t과 47만t이다. 두 공장의 가동이 중단되면 여천NCC 생산능력은 기존 연간 228만t에서 약 90만t으로 줄어든다. 롯데케미칼과 한화솔루션, DL케미칼은 통합법인 지분을 각각 3분의 1씩 보유한다. 이번 재편으로 감축되는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간 약 140만t이다.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증설로 공급과잉이 장기화한 상황에서 중복 설비를 줄이고 생산체계를 효율화하기 위한 조치다. 범용 제품 생산능력을 감축하는 동시에 각사의 경쟁력 있는 사업을 통합해 수익성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다운스트림 부문에서는 DL케미칼의 폴리에틸렌(PE), 한화솔루션의 PE·석유수지, 롯데케미칼의 기초소재 사업 일부가 통합법인에 편입된다. 통합법인은 의료용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과 자동차·전선용 폴리올레핀엘라스토머(POE) 등 고부가 제품 비중을 확대할 계획이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여천NCC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각각 2725억원씩 총 545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한다. 인프라 구축과 고부가 제품 전환에도 2532억원을 투자하는 등 참여 기업의 자구노력 규모는 총 8000억원 수준이다. 이번 감축이 완료되면 대산과 여수에서 업계가 자율적으로 결정한 에틸렌 감산 규모는 총 250만t에 달한다. 앞서 대산산단에서는 롯데케미칼이 연산 110만t 규모의 NCC 설비 가동을 중단하고 HD현대케미칼과 통합법인을 설립하는 사업재편 계획을 승인받았다. 정부는 여수 사업재편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융·세제·인허가·연구개발(R&D) 등을 포함한 7000억원 이상의 지원 패키지를 마련했다. 채권금융기관은 설비통합과 고부가 전환에 필요한 신규 자금 4500억원을 공급한다. 사업재편 기간인 2029년 말까지 협약 채무의 상환을 유예하고 기존 금융 조건도 유지한다. 무역보험공사는 보험료 할인과 보증 한도 우대 등을 통해 2000억원 규모의 수입보험을 지원한다. 기업 분할과 합병 과정에서 발생하는 취득세와 등록면허세는 75~100% 감면한다. 기업결합 심사 기간은 기존 120일에서 90일로 단축하고, 사업재편 이전에 취득한 인허가도 통합법인이 승계할 수 있도록 했다. 올해까지 수입 나프타와 나프타 제조용 원유에 무관세를 적용해 약 156억원의 원가 절감을 지원한다. 고용유지지원금 요건 완화와 직무 전환 훈련비 지원, 지역투자촉진보조금 한도 상향 등 고용 안정 대책도 추진한다. 정부는 고부가·친환경 분야 전환을 위해 중장기 유망 R&D 3개 과제에 올해부터 248억원을 지원하고 관련 기술의 신성장·원천기술 지정도 추진할 방침이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대산에 이어 여수산단의 사업재편까지 승인되면서 국내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며 “기업의 자구 노력과 함께 정부의 실효성 있는 정책 지원이 지속돼야 한다”고 했다. 다만 국내 3대 석유화학산단 가운데 울산산단은 아직 구체적인 사업재편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부 기업의 실적 개선으로 감축 유인이 약해진 데다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 가동이 맞물리면서 기업 간 이해관계가 복잡한 상황이다. 약 9조원이 투입된 샤힌 프로젝트는 연간 180만t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올해 말까지 시운전을 마치고 내년 본격 가동할 예정이어서 기존 NCC 감축과 신규 생산능력 확대가 동시에 진행될 전망이다. 문신학 산업부 차관은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이 성공하려면 무임승차 없이 모든 산단이 참여해야 한다”며 “대산과 여수에 이어 울산 지역 사업재편 논의도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했다.
2026-07-22 09: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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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화학 줄이고 재활용 소재 키운다…석화 3사 생존전략
[경제일보] 국내 주요 화학사들이 범용 석유화학 의존도를 낮추고 재활용·바이오 기반 고부가 소재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과 중동발 공급과잉, 글로벌 수요 둔화, 탄소 규제 강화가 겹치면서 기존 대량생산 중심의 성장 공식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LG화학, 롯데케미칼, SK케미칼이 최근 발간한 ‘202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3사의 공통 키워드는 ‘저탄소’와 ‘순환소재’다. 범용 제품 중심의 포트폴리오에서 벗어나 재활용 원료, 바이오 원료, 고기능 소재, 제품별 탄소 데이터 대응 역량을 키우겠다는 방향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공급과잉 여파로 실적 압박을 받았고,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증설을 주요 부담 요인으로 지목했다. 정부도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을 통해 국내 석유화학 산업을 고부가·친환경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LG화학, 고부가 소재와 탄소 데이터 대응에 방점 LG화학은 고부가 소재와 고객 대응 역량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술 장벽이 높고 고객 밀착형인 고부가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AI·반도체, 모빌리티 소재 등 첨단 산업용 소재와 고부가 제품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실제 LG화학은 이미 반도체와 모빌리티 소재 분야에서 매출을 내고 있다. LG화학 관계자는 “반도체·모빌리티 등 소재 매출을 현재 1조원에서 2조원으로 늘리겠다는 내용은 현재 매출이 있는 분야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탄소 데이터 대응도 핵심 과제다. LG화학은 현재 국내 사업장을 중심으로 산정하는 Scope 3 배출량을 향후 해외 법인을 포함한 글로벌 사업장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LG화학 관계자는 “내년까지 해외 사업장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며 “일부 선진국과 고부가 소재 관련 고객사들의 데이터 제출 요구가 증가하고 있어 중요성이 계속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LCA는 제품의 원료 조달부터 생산, 사용, 폐기까지 전 과정의 환경 영향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PCF는 이 가운데 온실가스 배출량만 따로 계산한 제품 탄소발자국이다. 화학사가 제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탄소 성적표까지 함께 제공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롯데케미칼, 리사이클·바이오 소재 수익성 강조 롯데케미칼은 리사이클·바이오 제품의 사업화 실적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롯데케미칼의 2025년 리사이클·바이오 제품 판매량은 10만1680t, 매출액은 3553억원이다. 2024년보다는 줄었지만 2023년 판매량 9만1000t, 매출액 3126억원과 비교하면 중기적으로는 확대된 수준이다. 2025년 재생원료 사용량은 2만3480t이다. 롯데케미칼은 친환경 소재를 단순한 환경 대응 제품이 아니라 스페셜티 영역으로 보고 있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판매량 변동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며 “리사이클·바이오 소재는 스페셜티 소재 영역이기 때문에 범용 대비 수익성이 높은 것은 맞다”고 덧붙였다. 에코시드(ECOSEED)는 롯데케미칼의 리사이클·바이오 소재 통합 브랜드다. 물리적·화학적 리사이클 소재와 바이오 플라스틱 소재를 아우른다. 롯데케미칼은 ABS, PC, PP 등 44개 제품에 대해 ISCC PLUS 인증을 취득했고, UL ECV 인증도 확보했다. 친환경 소재 시장은 단일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재활용 소재를 많이 요구하는지, 소재 채택의 주요 기준이 무엇인지는 고객별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적용처에 따라 가격, 물성, 인증, 재생원료 함량, 탄소 데이터 요구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SK케미칼, 자동차·식음료로 적용처 확대 SK케미칼은 코폴리에스터, 화학적 재활용 소재, 바이오 기반 소재를 중심으로 특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SK케미칼은 코폴리에스터 제품군, CR-PET, 바이오매스 기반 제품 판매량 중 재활용 원료 포함 제품과 바이오소재 비율을 2040년까지 90%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25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기준 그린 소재 판매 비중은 28%다. SK케미칼 관계자는 “화학적 재활용 소재는 화장품 패키징을 넘어 다양한 산업 분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 스카이펫씨알(SKYPET CR)은 식품·음료용 패키징 분야를 비롯해 자동차 분야에서도 적용 사례를 늘리고 있다. 자동차 분야 확대도 주목된다. SK케미칼은 최근 오스트리아 자동차 카펫 제조사 듀몬트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SKYPET CR을 적용한 자동차 카펫 및 매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SK케미칼 관계자는 “해당 제품은 자동차 품질 기준 검증을 완료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유럽 주요 완성차 브랜드 적용도 논의되고 있다”고 했다. 에코트리아씨알(ECOTRIA CR)은 현재 화장품과 프리미엄 패키징 시장을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다. 스카이펫씨알이 식음료·자동차 쪽으로 확장성을 보여준다면, 에코트리아씨알은 고급 패키징 시장에서 차별화되는 구조다. 원료 확보도 경쟁력 변수로 떠올랐다. 화학적 재활용 산업에서는 안정적인 폐플라스틱 원료 확보가 사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로 꼽힌다. 다만 이를 곧바로 사업 확대의 병목으로 보기는 어렵다. SK케미칼은 원료 기반 강화를 위해 에프아이씨(FIC)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FIC는 폐플라스틱을 수거·선별·전처리해 화학적 재활용 공정에 적합한 원료로 가공하는 시설이다. 폐이불과 PET 분쇄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분까지 원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있다. 재생원료 규제, 친환경 소재 시장 키운다 제도 환경도 화학사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환경부는 2026년 1월부터 무색 페트병에 재생원료 사용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2026년 의무사용률은 10%이며, 2030년까지 의무 대상과 의무율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공시 규제도 변수다. 금융위원회는 2028년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기업부터 지속가능성 공시를 단계적으로 시작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후 관련 위험과 기회, 온실가스 배출량, 지표와 목표 등이 핵심 공시 항목으로 꼽힌다. 결국 3사의 방향은 한 곳으로 모인다. 석유화학 제품을 많이 만드는 것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LG화학은 첨단 산업용 소재와 탄소 데이터 대응에, 롯데케미칼은 리사이클·바이오 소재의 수익성에, SK케미칼은 화학적 재활용 소재의 적용처 확대에 각각 방점을 찍고 있다. 다만 친환경 소재가 곧바로 실적 개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재생원료 확보, 인증 비용, 고객사별 요구 조건, 기존 범용 제품 대비 가격 경쟁력 등이 모두 변수다. 석유화학 불황이 길어질수록 친환경 소재는 선택지가 아니라 구조조정 이후 살아남을 사업의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26-07-14 13: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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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기 뚫을 포트폴리오 재배치 사활…시험대 오른 '롯데 DNA'
[경제일보] 롯데는 한국 재계에서 가장 독특한 출발점을 가진 그룹이다. 창업자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8년 일본 도쿄에서 껌 사업으로 롯데를 시작했다. 이후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우며 국내 사업을 본격화했다. 롯데의 첫 DNA는 소비자의 입맛과 생활 반경을 파고드는 데 있었다. 껌과 과자, 음료, 햄과 우유, 패스트푸드, 백화점과 호텔, 놀이공원까지 롯데는 제조업의 공장보다 소비자의 일상에 가까운 곳에서 몸집을 키웠다. 롯데식 성장은 ‘생활의 점유율’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삼성과 현대차가 반도체와 자동차, 중후장대 제조업을 앞세웠다면 롯데는 먹고, 마시고, 사고, 쉬고, 노는 공간을 장악했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 롯데리아, 롯데백화점, 롯데호텔, 롯데월드가 쌓아 올린 것은 단순한 계열사 목록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소비 동선 속에 롯데라는 이름을 심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 이후 롯데는 식품을 넘어 유통과 관광, 석유화학으로 사업을 넓혔다. 롯데 공식 연혁에 따르면 롯데는 1976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했고, 1979년 롯데쇼핑을 세웠다. 식품과 유통에서 번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호텔, 백화점, 마트, 화학, 건설까지 넓히는 방식이었다. 롯데 DNA의 핵심은 ‘크게 한 번 베팅하는 승부수’보다 ‘될 만한 영역을 넓게 깔고, 오래 버티며, 전국망으로 키우는 확장력’이었다. 확장의 DNA, 소비 동선을 장악하다 롯데의 확장 방식은 시대와 잘 맞았다. 한국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 소비자는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샀다. 도심에는 백화점이 들어섰고, 외곽에는 마트가 생겼다. 해외여행과 관광 수요가 커지면서 호텔과 면세점도 성장했다. 롯데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식품에서 시작해 유통과 관광으로, 다시 석유화학과 건설로 이어지는 확장은 내수 성장기의 성공 공식이었다. 롯데의 강점은 안정성이었다. 백화점과 마트, 편의점, 호텔, 식품은 경기 변동을 타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수요를 품고 있다. 롯데는 이와 같은 안정성을 바탕으로 재계 상위권에 올라섰다. 신 명예회장 시대의 롯데는 과감한 기술 승부보다 치밀한 입지, 브랜드, 유통망, 현금흐름으로 성장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성장의 기반이던 내수 확장 공식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쿠팡과 네이버, 전문몰과 해외 직구가 소비 동선을 바꿨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은 여전히 강하지만, 성장률은 과거 같지 않다. 롯데온은 그룹의 유통 자산을 온라인으로 묶겠다는 시도였지만, 시장의 판을 뒤집을 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석유화학도 더 이상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아니다. 중국과 중동의 증설, 글로벌 수요 둔화, 범용 제품 공급과잉이 겹치면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구조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롯데케미칼은 한때 롯데의 제조업 확장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그룹 체질 전환의 가장 무거운 숙제가 됐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롯데 DNA는 변화하고 있다. 과거 롯데는 좋은 입지에 점포를 깔고, 좋은 시장에 설비를 늘리며 성장했다. 지금은 반대로 줄이고, 합치고, 멈추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성장기의 롯데가 ‘확장형 그룹’이었다면, 저성장기의 롯데는 ‘정리형 그룹’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시대, ‘많이 깔던 롯데’의 반전 과제 신동빈 회장 체제의 과제는 분명하다. 매출 규모보다 수익성, 점포 수보다 효율, 계열사 수보다 포트폴리오 질을 따져야 한다. 올해 초 롯데그룹의 경영 회의에서 신 회장이 수익성 중심 경영과 고강도 구조조정을 주문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롯데는 더 이상 많이 벌려놓는 방식만으로 버티기 어렵다. 투자자와 시장은 “얼마나 크냐”보다 “얼마나 남기느냐”를 묻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올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에서도 변화는 드러났다. 공정위는 올해 자산총액 5조원 이상 102개 기업집단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이 과정에서 한화가 처음으로 재계 5위권에 진입했고, 롯데는 포스코와 함께 순위가 밀린 것으로 보도됐다. 순위 자체가 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성은 작지 않다. 한화가 방산·조선·우주로 체급을 키우는 동안 롯데는 화학 부진과 유통 전환의 숙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 롯데의 강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식품과 음료, 백화점, 호텔, 면세, 관광, 물류, 화학을 모두 가진 그룹은 드물다. 소비자의 하루를 따라가면 롯데가 여러 번 등장한다. 커피와 과자, 편의점, 마트, 백화점, 호텔, 놀이공원, 면세점, 택배, 카드와 멤버십이 하나의 생활권 안에 있다. 이 자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흩어진 자산을 하나의 경쟁력으로 묶는 능력이다. 롯데는 오프라인 유통의 강자였지만, 온라인에서는 쿠팡과 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마트와 슈퍼, 백화점과 이커머스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신선식품과 프리미엄 식품, 지역 맞춤형 점포, 오프라인 픽업과 반품, 멤버십 데이터 활용은 롯데가 다시 강점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계열사별 이해관계를 넘어 고객 경험을 중심으로 조직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화학 부문에서는 범용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고부가·스페셜티 소재로 이동해야 한다. 롯데케미칼은 올해를 미래 성장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밝히며, 사업구조 전환과 재무 건전성 강화, 경쟁력이 낮거나 차별화가 어려운 사업의 합리화를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생존 조건에 가깝다. 석유화학은 더 이상 설비를 많이 가진 기업이 이기는 산업이 아니다.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기며, 어디에 다시 투자할지를 정하는 산업이 됐다. 롯데 DNA의 본질은 ‘생활산업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DNA는 ‘선택과 집중’이다. 신격호 시대의 롯데가 소비자의 생활 반경을 넓게 장악한 그룹이었다면, 신동빈 시대의 롯데는 그 넓은 반경을 다시 효율적으로 재배치해야 하는 그룹이다. 과거에는 점포와 설비를 늘리는 것이 성장의 언어였다. 지금은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줄이는 것도 성장의 언어가 됐다. 롯데의 시험대는 그래서 냉정하다. 유통에서는 온라인 전환의 속도를 높여야 하고, 화학에서는 구조조정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호텔과 관광은 회복 국면을 살려야 하며, 식품은 글로벌 K푸드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성장 축을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롯데의 과제는 복잡하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롯데에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장이 아니라 더 정교한 재편”이라며 “롯데 DNA의 다음 장은 ‘확장’이 아니라 ‘정리’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아주경제 2026년 07월 14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7-14 10: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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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실적' vs SK하닉 '실탄'…AI 메모리 패권경쟁 2라운드
[경제일보] AI 반도체 전쟁의 열기가 다시 한국 증시를 흔드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왔고,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대규모 투자 재원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쪽은 실적으로, 다른 한쪽은 자금조달로 AI 메모리 패권전 2라운드의 문을 열었다. 역대급 실적으로 돌아온 삼성의 '반격'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약 171조원, 영업이익 약 89조4000억원의 잠정 실적을 발표했다. 전년 동기 영업이익 4조6800억원과 비교하면 약 19배 수준이다. 이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D램과 낸드 가격이 뛰고, 고부가 메모리 수요가 폭발한 결과다. 몇 년 전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전자가 다시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중심으로 돌아왔다는 신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삼성전자가 실적을 발표한 지난 7일 코스피는 4.9% 급락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6.9%, 6.1% 하락했다. 강한 이익이 이미 주가에 반영됐고, AI 메모리 호황이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커진 영향이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과열됐는지, 빅테크의 설비투자가 계속 늘어날지,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새로운 질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단순한 HBM 점유율 싸움을 넘어섰다. 이제 승부처는 '누가 더 빨리 고성능 메모리 생산능력을 늘리느냐', '누가 엔비디아와 빅테크 고객의 장기계약을 더 단단히 묶느냐'. '메모리 사이클이 꺾일 때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로 옮겨갔다. 삼성전자의 무기는 종합 반도체 체력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파운드리, 시스템LSI, 패키징을 모두 가진 세계에서 드문 기업이다. AI 반도체가 복잡해질수록 칩 하나의 성능보다 메모리, 로직, 패키징을 함께 묶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삼성전자는 HBM에서 SK하이닉스에 먼저 밀렸지만, 메모리 전반의 가격 상승과 낸드 회복, 범용 D램 수요 반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초반 주도권을 놓쳤다.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 공급망의 신뢰를 먼저 얻은 쪽은 SK하이닉스였다. 삼성전자의 2분기 호실적에도 시장에서 '삼성이 AI 메모리의 가장 중요한 고객에게 가장 중요한 제품을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HBM 선점한 SK, 자본시장서 실탄 확보 SK하이닉스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주식 매각을 시작했고 280억7000만 달러(한화 약 43조원)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자금은 국내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과 첨단 장비 확보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AI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는 시점에 글로벌 투자자 자금을 끌어와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하겠다는 전략이다. HBM 선점으로 얻은 시장 신뢰를 자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승부수다. SK하이닉스의 강점은 집중력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파운드리, 모바일과 가전까지 거대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기업이라면, SK하이닉스는 메모리 한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HBM에서는 엔비디아 공급망을 선점하며 'AI 시대 메모리 강자' 이미지를 굳혔다. HBM은 단순히 많이 만드는 제품이 아니다. 고객의 AI 가속기 설계 일정에 맞춰 성능, 발열, 전력 효율, 패키징을 함께 맞춰야 한다. SK하이닉스는 이 고객 맞춤형 대응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자금 조달은 기회이자 동시에 부담이다. AI 메모리 호황이 길게 이어지면 선제 투자는 격차 확대의 무기가 되지만, 반대로 빅테크의 AI 투자가 둔화하거나 메모리 공급이 한꺼번에 늘어나면 대규모 설비투자는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호황 이후 겨누는 장기전 두 기업 모두 사이클 방어가 숙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기업들은 다운사이클 위험을 줄이기 위해 장기계약과 '테이크 오어 페이(Take or Pay)' 방식의 계약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계약이 전체 매출을 모두 방어하는 것은 아닌 만큼 공급과잉이 현실화될 경우 충격을 완전히 막기는 어렵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쟁은 '누가 더 많이 버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실적으로 자신이 여전히 '메모리 강자'임을 증명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HBM 선점이 일시적 우위가 아니라 장기 경쟁력임을 입증해야 한다. 투자 포인트도 다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전체 체력과 포트폴리오 회복력이 강점이다. 메모리 가격 상승이 D램과 낸드 전반으로 번지면 삼성의 이익 레버리지는 더 커진다.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부진이 부담이지만, 반대로 이 부문이 회복하면 실적 개선의 추가 여지도 생긴다. SK하이닉스는 HBM과 고성능 D램에 더 집중된 기업이다. AI 서버 수요가 계속 강하면 이 집중력이 더 큰 프리미엄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시장이 더 이상 '좋은 숫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2분기 잠정 실적은 압도적이지만, 주가는 흔들렸다. 이는 투자자들이 이미 AI 호황을 주가에 상당 부분 반영했고, 이제는 다음 국면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2027년 이후에도 지속될지, 가격 상승이 얼마나 이어질지, 고객의 장기계약이 실제 방어막이 될지가 중요해졌다.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로 보면 두 기업의 경쟁은 축복이자 부담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면 국내 장비·소재·부품 생태계는 커진다. 용인, 평택, 청주 등 반도체 거점의 산업적 무게도 커진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너무 많은 투자가 몰리면 사이클 하강기에 충격도 커진다. 반도체 산업은 국가 전략산업이지만, 동시에 가장 냉정한 사이클 산업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지금은 강하지만, 진짜 승부는 가격이 오를 때가 아니라 가격이 흔들릴 때 드러난다"며 "AI 메모리 2라운드는 생산능력, 고객계약, 자금조달, 사이클 방어력까지 모두 겨루는 장기전"이라고 했다. 이어 "AI는 더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고, 시장은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익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승패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주경제 2026년 07월 09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7-09 0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