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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성장에 가려진 숙제, '반도체 다음'을 준비할 때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좋은 숫자를 받아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전망보다 1.5%포인트 높였다. 수년간 1~2%대 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경제로서는 반가운 변화다. 오늘 아침 나온 수출 성적표는 더 화려하다. 9월 수출은 1209억4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월 1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월 누적 수출도 8145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웃돌았다. 무역수지는 498억5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처음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2.8% 늘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수출 물량과 가격이 함께 뛰면서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좋은 성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커지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주문이 이어지고 설비투자가 늘어난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 반도체 호황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다음이다. 예정처가 내다본 내년 성장률은 2.7%다. 올해보다 0.8%포인트 낮다. 2026~2030년 연평균 성장률 역시 2.7%로 전망했다. 올해 잠재성장률은 2.2%, 앞으로 5년 평균은 2.3% 수준이다. 내년 2.7% 성장을 경기침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정처는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도 회복할 것으로 봤다. 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을 웃돈다. 올해의 높은 성장세가 내년에는 다소 정상화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3.5%와 2.7% 사이에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올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9월만 놓고 보면 전체 수출 1209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가 603억 달러다. 거의 절반이다. 특정 월의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우리 수출의 평상시 구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전체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좌우하는 현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예정처도 반도체 쏠림을 별도의 위험 요인으로 짚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국민소득이 다른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가계소득으로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혜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수출에도 자영업자나 일부 중소기업이 경기 회복을 선뜻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자동화 수준이 높다. 과거 제조업 호황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대규모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속도와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속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더 근본적인 숫자는 잠재성장률이다. 한 해 성장률은 경기와 수출 여건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물가 불안을 키우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에 가깝다. 예정처가 내다본 향후 5년 평균은 2.3%다. AI 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자본과 생산성의 기여는 커지지만 인구 감소 탓에 노동의 성장 기여는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저출생·고령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아니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저절로 없애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반도체의 힘과 한계를 함께 경험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수출과 설비투자, 세수가 한꺼번에 좋아졌다. 사이클이 돌아서면 세 지표가 동시에 흔들렸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것은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다. 그렇다고 나라 경제 전체를 한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오래 맡겨둘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은 AI 투자 붐과도 맞물려 있다. 예정처는 미국 장기금리 상승에 따른 AI 투자 둔화 가능성과 미국의 관세정책, 중국과의 경쟁 심화를 향후 성장경로의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지금의 호황을 흔들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도체 호황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가 벌어준 시간과 돈을 다음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불황보다 호황기에 하기 쉽다. 경기가 꺾이면 기업은 투자 여력을 잃고 정부의 세수도 줄어든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 수출과 기업이익, 세수가 함께 좋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손대기 어려웠던 숙제를 풀 기회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부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까지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력망과 용수, 연구개발,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인프라의 영역이다. 동시에 산업정책의 시선을 그 너머로 넓혀야 한다. AI 서비스와 바이오, 로봇, 방산, 에너지, 콘텐츠 등에서 반도체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과 직업교육을 산업 수요에 맞게 바꾸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반도체에서 생긴 자본과 기술, 인재가 다른 산업으로 흘러갈 통로가 넓어져야 반도체 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의 호황으로 이어진다. <관자(管子)>에는 “일년지계 막여수곡, 십년지계 막여수목, 종신지계 막여수인(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면 곡식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을 내다보면 사람을 키우라는 뜻이다. 경제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더 짓는 일은 몇 년 뒤 수출을 늘릴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대학과 노동시장을 바꾸며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10년 뒤 나라의 성장률을 바꾼다. 9월 수출 1209억 달러와 반도체 603억 달러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다. 기록은 기록대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 숫자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까지 해결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올해 3.5%와 내년 2.7% 사이에서 읽어야 할 것도 성장률의 단순한 오르내림이 아니다. 반도체가 밀어준 성장의 힘을 다른 산업과 가계, 다음 세대의 성장으로 얼마나 옮겨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 사이클도 다시 돈다. 좋은 시절에 할 일은 축배를 오래 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겨울을 견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벌어준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다음 호황에도 또 반도체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번 호황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26-10-01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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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순 수출 82.6% 급증…반도체 270% 뛰며 '역대 최대'
[경제일보] 9월 초순 수출이 반도체를 중심으로 큰 폭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반도체 수출액이 1년 전보다 270% 이상 늘면서 전체 수출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고, 중국과 미국, 대만 등 주요 시장에서도 수출액이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다. 11일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10일 수출액은 349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82.6% 늘었다. 해당 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조업일수는 지난해와 같은 8.5일로 집계돼 일평균 수출액도 41억1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누적 수출액은 9월 10일까지 7285억600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미 지난 5일에는 누적 수출액이 7094억달러에 도달하면서 지난해 연간 수출액인 7093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번 수출 증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품목은 반도체다. 반도체 수출은 164억80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0.1% 증가했다. 1~10일 기준 역대 최대 수출액이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도 47.1%로 높아졌다. 1년 전과 비교하면 23.9%포인트 상승했다. 반도체 외 주요 품목도 대부분 증가했다. 석유제품 수출은 57.0% 늘었고 선박은 66.8%, 승용차는 10.0%, 철강제품은 10.3% 각각 증가했다. 정밀기기는 4.8% 감소했다. 수출 시장에서도 증가세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중국 수출은 103.0% 증가했으며 미국은 137.5%, 대만은 176.0% 늘었다. 베트남과 EU 수출도 각각 42.2%, 38.9% 증가했다. 중국·미국·대만 등 상위 3개 수출국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1.9%였다. 수입도 증가했지만 수출 증가 폭에는 미치지 못했다. 1~10일 수입액은 246억1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0.7% 늘었다. 반도체 수입이 91.5% 증가했고 반도체 제조장비는 44.8%, 승용차는 70.9%, 원유는 3.5% 각각 늘었다. 반면 기계류는 2.7%, 가스는 9.7%, 석유제품은 38.4% 감소했다. 원유·가스·석탄을 합친 에너지 수입액은 1.5%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중국 수입이 50.0% 늘었고 미국 17.3%, EU 6.5%, 일본 39.8% 증가했다. 호주 수입은 0.7% 줄었다. 수출과 수입의 증가 폭 차이로 무역수지는 103억7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1~10일 기준 역대 최대 흑자 규모다.
2026-09-11 10: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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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68.7% 증가, 숫자가 너무 좋아서 더 걱정되는 이유
[경제일보]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는 눈부시다. 8월 수출이 982억5000만달러다. 1년 전보다 68.7% 늘었다. 역대 월간 수출 3위다. 6월과 7월에 이어 석 달 연속 900억달러를 넘겼다. 무역수지는 347억5000만달러 흑자다. 더 놀라운 것은 반도체다. 466억5000만달러를 팔았다. 1년 전보다 209% 늘었다. 역대 최대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거대한 수출 기계로 만들고 있다. 컴퓨터 수출도 419.5% 뛰었다. 정부가 경기를 낙관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제조업의 생산과 설비투자는 살아 있고 수출은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숫자가 국민의 장바구니에도 반영되고 있는지 잘 봐야한다. 최근 발표된 7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답은 간단하지 않다. 소매판매는 전월보다 2.4% 줄었다. 전년 같은 달과 비교해도 0.8% 감소했다. 서비스업 생산은 전월보다 1.3% 감소했다. 설비투자만 7.5% 늘었다. 기업이 생산시설에는 돈을 쓰는데 소비자는 지갑을 닫는 모습이다. 더 불편한 숫자도 있다. 6월 말 가계신용은 2019조8000억원이다. 사상 처음 2000조원을 넘어섰다. 한 분기 만에 25조9000억원이 늘었다. 집을 사기 위한 돈도, 생활과 투자를 위한 대출도 함께 증가했다. 수출이 잘되는데 소비는 왜 힘든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병이다. 수출과 내수가 서로 다른 경제처럼 움직인다. 반도체와 대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번 돈으로 성장하지만, 그 돈이 국내 서비스업과 자영업, 가계소득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연결고리는 약하다. 특히 이번 수출 증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반도체가 전체 증가분을 압도한다. 자동차는 29.8% 감소했고 선박도 45.9% 줄었다. 20대 주력 품목 가운데 14개가 증가했지만 모든 산업이 같은 속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순간 위험해진다. 지금의 수출을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힘은 AI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계속되고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한국의 수출은 더 늘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AI 투자 사이클이 꺾이거나 공급망이 재편되면 한국 경제 전체가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수출 기록을 축하하는 것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돈이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의 매출을 늘리고, 얼마나 많은 가계의 소득으로 돌아가는지를 따져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성장률’보다 ‘성장의 전달 과정’을 봐야 한다. 수출기업이 돈을 벌었다고 국민의 삶이 자동으로 좋아지는 시대는 지났다. 대기업의 투자와 중소기업의 매출, 임금과 소비, 지역 상권이 연결되지 않으면 수출 1000억달러 시대도 일부 산업의 기록에 그칠 수 있다. 정부 역시 “수출이 좋다”는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비가 왜 다시 꺾였는지, 가계가 왜 빚을 늘리고 있는지, 건설과 자영업의 체감경기는 왜 회복이 더딘지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8월 소비자심리지수도 104.5로 전월보다 2.3포인트 떨어졌다. 경제 전체에 온기가 퍼지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출 기록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호황을 어떻게 내수의 회복으로 연결할 것인지 답을 찾는 일이다. 반도체가 벌어온 달러가 기업의 곳간에만 머물지 않고 투자와 임금, 협력업체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동네 식당의 매출과 자영업자의 소득, 청년의 일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982억달러의 수출은 분명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경제에서 더 중요한 숫자는 따로 있다. 그 기록이 국민의 삶을 얼마나 바꿨느냐는 숫자다. 수출이 이렇게 좋은데도 국민이 경기를 좋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문제는 국민의 체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구조에 있는지도 모른다. 숫자가 너무 좋을 때 오히려 경제의 그늘을 더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2026-09-01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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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오르고 반도체 흔들린다…'양면 충격' 대비책 서둘러야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약점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곳에 있다. 하나는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폭 좁은 바닷길이고, 다른 하나는 손톱보다 작은 반도체 칩이다. 호르무즈해협이 흔들리면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가격이 뛰고, 반도체 시장이 흔들리면 수출과 증시가 휘청인다. 지난 주말 한국 경제의 두 약한 고리에 동시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이 다시 격화하면서 국제유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지난 17일 브렌트유는 4.59% 오른 배럴당 88.10달러를 기록했다. 미국의 대이란 공격과 이란의 보복이 이어지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과 가스 운반선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결과다. 같은 날 세계 증시는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하락했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는 사흘 연속 떨어지며 최근 고점보다 20% 낮은 수준까지 밀렸다. 유가는 오르고 반도체는 내리는, 한국 경제에는 가장 불편한 조합이 현실이 된 것이다. 상황은 주말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19일(현지시간) 미국은 8일 연속 이란을 공격했고, 이란도 걸프 지역 미군 시설과 주변국을 향해 미사일·무인기 공격을 이어갔다. 산유국 증시는 일제히 약세를 보였고, 시장에는 전쟁이 다시 넓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번졌다. 걸프 산유국들이 수출량을 늘리고 있지만 호르무즈해협의 선박 통행은 다시 줄었다. 최근 하루 통항 선박이 단 3척에 그쳐 5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는 집계도 나왔다. 한국은 이 바닷길의 사소한 변화도 사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나라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 LNG의 약 20%가 호르무즈해협을 거친다. 해협이 완전히 봉쇄되지 않더라도 통항이 느려지고 보험료와 운임이 오르면 그 비용은 정유·석유화학·항공·해운·철강을 거쳐 결국 소비자물가로 넘어온다. 원유 가격 상승에 원화 약세까지 겹치면 충격은 배가된다. 국제유가가 그대로 있어도 환율이 오르면 한국이 지불해야 할 원화 기준 에너지 가격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는 반도체가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 투자 열풍을 타고 치솟았던 반도체주는 과도한 기대와 높은 가격 부담 앞에서 조정을 받고 있다. 대만 TSMC가 큰 폭의 이익 증가를 발표하고도 주가가 하락한 것은 시장이 더 이상 ‘좋은 실적’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AI 기업들의 막대한 설비투자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반도체 수요가 실제 수익으로 얼마나 연결될지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17일 세계 반도체주 하락도 이러한 불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였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품목이 아니다. 지난 6월 한국의 전체 수출은 1022억5000만 달러로 처음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1924억 달러로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을 웃돌았다. 반도체 호황은 무역수지를 지키고 기업 투자를 늘리며 세수를 떠받치는 힘이다. 하지만 그 비중이 커질수록 반도체 가격과 글로벌 AI 투자의 작은 변화가 한국 경제 전체의 진폭을 키운다. 반도체가 잘될 때는 편중이 경쟁력으로 보이지만, 흔들릴 때는 의존으로 돌아온다. 유가 상승과 반도체 하락이 동시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 경제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사오고, 벌어들이는 돈은 소수 수출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수입액이 늘고, 반도체가 꺾이면 수출액이 줄어든다. 무역수지의 양쪽 문이 동시에 압박받는 구조다. 여기에 유가 상승이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리고, 반도체주 하락이 증시와 소비심리를 위축시키면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충격이 서로를 증폭할 수 있다. 정부가 유류세 조정이나 석유시장 단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유류세 인하는 급한 불을 끄는 수단일 뿐, 기름을 실은 배를 한국까지 가져오지는 못한다. 정부는 원유와 LNG의 국가별·항로별 도입 현황, 민간과 공공의 비축 수준, 비축유 방출 조건, 해상보험과 운임 지원 방안, 환율 급등 시 대응 원칙을 하나의 에너지 비상계획으로 공개해야 한다. 국민과 기업이 알아야 할 것은 “당장 문제없다”는 안심의 말이 아니라 어느 단계에서 어떤 조치가 작동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표다. 정부는 지난 3월 중동 상황 대응본부를 가동하면서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에 대비해 대체 도입선과 운항 일정, 보험·운임 문제를 점검했다. 수급 위기가 가시화되면 국내 비축기지의 석유를 시장에 공급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미 마련된 대책이 있다면 이제는 최근의 충돌 격화와 통항 감소를 반영해 다시 공개적으로 점검할 때다. 비상계획은 서랍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내용을 알고 움직일 때 효과가 있다. 기업도 공급망을 평상시의 평균값으로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정유·석유화학·항공사는 유가와 운임이 동시에 급등하는 상황을, 자동차·배터리·철강사는 원자재 가격과 환율이 함께 오르는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반도체 기업 역시 AI 투자가 둔화하고 메모리 가격이 조정받는 경우에 대비해 설비투자와 현금흐름을 점검해야 한다. 기업별 스트레스 테스트를 의무적으로 공개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주요 업종과 금융회사가 복합 충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정부와 시장이 함께 확인해야 한다. 손자병법 ‘허실’에는 “먼저 싸움터에 이르러 적을 기다리는 자는 편안하고, 뒤늦게 싸움터에 달려가는 자는 피로하다”는 말이 나온다. 경제안보도 다르지 않다. 유조선의 통항이 끊어진 뒤 도입선을 찾고, 반도체 가격이 급락한 뒤 수출 다변화를 외쳐서는 늦다. 위기는 대책을 새로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미리 만든 대책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시간이다. 정부가 시장의 모든 위험을 없앨 수는 없다. 국제유가도, 세계 반도체 가격도 서울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부 변수라는 이유로 손을 놓아서도 안 된다. 정부의 역할은 가격을 통제하는 데 있지 않다.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비축하고, 도입선을 넓히며, 위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있다. 반도체를 더 강하게 키우는 일과 반도체 외 수출 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모순이 아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천연가스와 에너지저장장치를 조화롭게 활용해 수입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일도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한국 경제의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다. 에너지 안보와 수출 다변화는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구호가 아니라, 평상시에 비용을 지불하며 구축해야 할 보험이다. 기름값은 뛰고 반도체는 흔들리고 있다. 두 현상을 별개의 뉴스로 읽으면 대책도 조각난다. 하지만 이를 한국 경제의 이중 취약성으로 읽으면 해야 할 일이 선명해진다. 에너지 비상계획을 공개하고, 기업별 공급망을 점검하며, 수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둥을 세워야 한다. 호르무즈해협과 반도체 시장은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흔들림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나라 경제 전체가 함께 휘청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다.
2026-07-20 09: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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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상반기 무역 25조위안 첫 돌파…수입 22% 늘고 가전 수출도 호조
[경제일보] 중국의 올해 상반기 상품 수출입 규모가 처음으로 25조위안을 넘어섰다. 수입 증가율이 수출 증가율을 웃돈 가운데 가전제품도 중국의 주력 수출품 역할을 이어갔다. 주택 임대시장에서는 대학 졸업철을 맞아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임대료가 오름세를 보였다. 14일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상품 수출입 총액은 25조4700억위안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9% 증가했다. 상반기 수출입 규모가 25조위안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수출은 14조7300억위안으로 13.4% 늘었다. 수입은 10조7400억위안으로 22.1% 증가했다. 수입 증가율이 수출보다 8.7%포인트 높았다. 중국의 상반기 무역수지는 3조9900억위안 흑자를 기록했다. 수입이 수출보다 빠르게 늘면서 무역 흑자 규모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 줄었다. 수출에서는 기계와 전자제품이 성장을 이끌었다. 상반기 기계·전자제품 수출액은 9조3600억위안으로 지난해보다 20.1% 증가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3.5%에 달했다. 반도체와 첨단 장비 등을 포함한 고기술 제품 수출도 39% 늘었다. 교역 상대국도 다변화됐다. 중국과 일대일로 참여국 간 교역액은 12조9700억위안으로 14.8% 증가해 전체 무역의 절반을 넘어섰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교역은 각각 16.2%, 19.6% 늘었고 유럽연합과의 교역도 10.2% 증가했다. 중국 해관총서는 세계 경제와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하반기에는 수출입 증가세가 둔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다만 수출 시장이 여러 지역으로 분산돼 있고 민간기업과 첨단산업의 수출이 증가하고 있어 무역 성장 기반은 유지될 것으로 전망했다. 주택 임대시장에서는 계절적인 수요 회복이 나타났다. 중국 부동산 조사기관인 중즈연구원에 따르면 6월 전국 50개 주요 도시의 평균 주택 임대료는 ㎡당 월 33.97위안으로 전달보다 0.08% 올랐다. 4월과 5월 두 달 연속 이어진 하락세가 멈췄다. 6월은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과 이사를 준비하면서 임대주택을 집중적으로 구하는 시기다. 신규 임대 수요가 늘면서 50개 도시 가운데 16곳의 임대료가 전달보다 올랐다. 33곳은 하락했고 1곳은 변동이 없었다. 다만 전국 임대시장이 본격적인 상승세로 돌아섰다고 보기는 이르다. 6월 평균 임대료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2.82% 낮았다. 올해 상반기 누적으로도 50개 도시 평균 임대료는 0.56% 하락했다. 전달 대비 0.08% 상승은 장기적인 회복이라기보다 졸업철 수요가 반영된 계절적 반등에 가깝다. 지역별 차이도 컸다.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1선 도시의 6월 평균 임대료는 전달보다 0.38% 올랐다. 베이징과 상하이, 선전은 4개월 연속 상승했다. 상하이는 0.95%, 베이징은 0.31%, 선전은 0.23% 올랐다. 올해 상반기 1선 도시의 평균 임대료는 0.60% 상승했다. 반면 2선 도시는 1.20%, 3·4선 도시는 0.79% 하락했다. 일자리와 인구가 몰리는 대도시에서는 임대 수요가 회복되고 있지만 중소도시는 여전히 공급 과잉과 수요 부족의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가전제품은 중국의 전통적인 수출 주력 품목으로 존재감을 이어갔다. 올해 상반기 중국의 가전제품 수출액은 3609억6000만위안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에어컨과 선풍기, 냉장고 등 더위를 식히거나 식품을 보관하는 가전제품 수출액은 1079억1000만위안이었다. 전체 가전 수출의 약 30%에 해당한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고온 현상이 나타나면서 냉방 가전 수요가 수출을 뒷받침했다. 상반기 TV 수출액은 500억위안을 넘었고 냉장고와 진공청소기 수출액도 각각 300억위안을 웃돌았다. 중국 자체 브랜드 제품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전체 수출 가전 가운데 중국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달했다. 중국 브랜드 가전제품의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2% 증가했다.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주요 품목도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중국은 전기차와 리튬이온 배터리, 태양광 제품을 이른바 ‘신 3종’으로 부르며 수출을 확대해 왔다. 동시에 휴대전화와 컴퓨터, 가전제품으로 대표되는 기존 주력 제품도 수출 기반을 받치고 있다. 상반기 중국 경제에서는 수출과 수입이 모두 두 자릿수로 증가하고 대도시 임대 수요와 가전 수출도 회복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다만 임대료가 전국적으로 전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지역별 격차도 이어지고 있어 일부 지표의 반등을 내수 전반의 회복으로 확대해 해석하기에는 이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6-07-14 18: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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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서비스 팔고 로봇 내보내고…여름 항공권은 낮췄다
[경제일보] 중국 경제에서 수출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처럼 공산품만 대량으로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식재산권과 문화 콘텐츠, 여행 같은 서비스 수출이 늘고 있고, 공장 자동화에 쓰이는 산업용 로봇도 해외 시장으로 나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항공 운임 부담이 낮아지면서 여행 수요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서비스 수출이 무역수지 끌어올려 6일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1~5월 서비스무역 규모는 3조994억8000만위안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 증가했다. 수출은 1조2304억6000만위안으로 15.9% 늘었지만, 수입은 1조8690억2000만위안으로 0.4% 증가에 그쳤다. 서비스무역 적자는 6385억6000만위안으로 1년 전보다 1607억2000만위안 줄었다. 수입이 크게 줄었다기보다 수출이 빠르게 늘어난 결과다. 지식집약형 서비스는 전체 서비스무역의 44.2%를 차지했다. 지식재산권 사용료와 개인 문화·엔터테인먼트 서비스 수출 증가율이 높았다. 여행 서비스 수출도 31.3% 늘었다. 중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 방문객 증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비스무역 적자 축소를 중국 서비스산업의 전면적 변화로 볼 단계는 아니다. 서비스무역은 환율, 해외여행, 운송 수요에 따라 수치가 크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콘텐츠와 기술, 지식재산권 사용료가 수출 항목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 로봇 수출, 완제품 판매 넘어 공장 설계로 산업용 로봇 수출도 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 통계에 따르면 올해 1~5월 산업용 로봇 수출은 8만6597대로 전년 동기보다 39.5% 증가했다. 5월 한 달 수출은 2만90대로 51.2% 늘었다. 중국 로봇 기업들은 로봇 한 대를 납품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생산라인 설계, 자동화 설비 구축, 소프트웨어 연결, 유지·보수까지 묶어 공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해외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로봇 가격보다 설치 이후가 더 중요하다. 기존 설비와 연결되지 않으면 생산성이 오르지 않고, 고장이 났을 때 현장 대응이 늦으면 공장 전체가 멈출 수 있다. 중국 기업들이 자동화 설비와 운영 서비스를 함께 내세우는 것도 이런 이유다. 가격 경쟁력과 부품 조달 능력은 중국 기업의 강점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전자제품 생산 현장에서 쌓은 자동화 경험도 해외 진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밀 감속기와 고성능 제어장치, 센서, 반도체 등 핵심 부품에서는 일본·유럽·미국 기업이 여전히 강세를 보인다. 해외 서비스망과 브랜드 신뢰도도 중국 업체들이 더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수출 물량이 늘었다고 해서 장기 경쟁력까지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유류할증료 인하, 7월 초 항공권도 하락 중국 국내 여행시장에서는 항공료 부담이 낮아졌다. 중국 항공사들은 7월 5일부터 국내선 유류할증료를 내렸다. 800㎞ 이하 노선은 1인당 50위안, 800㎞ 초과 노선은 100위안으로 조정됐다. 직전보다 각각 30위안, 50위안 낮아진 수준이다. 항공권 가격은 유류할증료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항공사 증편 규모와 예약률, 휴가철 수요, 노선별 경쟁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다만 유류할증료 인하는 소비자가 체감하는 여행비를 낮추는 요인이다. 7월 상순에는 항공사 공급 확대와 휴가 수요의 시차가 겹치면서 일부 노선에서 정상 운임의 10~30% 수준 항공권도 나왔다. 베이징~항저우 노선은 항공권과 공항시설 사용료, 유류할증료를 합친 가격이 고속철도 2등석보다 낮게 형성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 흐름이 휴가철 내내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학교 방학과 직장인 휴가가 본격화되는 7월 중순 이후에는 인기 관광지와 장거리 노선을 중심으로 운임이 다시 오를 수 있다. 유류할증료 인하가 여행 수요를 자극할 수는 있어도, 여름 성수기의 가격 상승을 모두 막기는 어렵다. ◆ 수출은 바깥으로, 소비는 안에서 최근 중국 경제는 수출과 내수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비스 수출과 산업용 로봇 수출은 늘고 있지만, 내수 소비는 업종별 차이가 크다. 항공료 인하는 여행 수요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가계의 전반적 소비심리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중국이 기대를 거는 분야는 서비스 수출과 제조업 고도화, 국내 여행 수요다. 서비스에서는 기술과 콘텐츠를 수출하고, 제조업에서는 로봇과 자동화 설비를 앞세우며, 내수에서는 여행과 생활 소비의 부담을 낮추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서비스와 로봇 수출의 증가는 중국 경제가 단순 조립·가공 수출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수출 증가가 기업의 이익과 고용, 가계 소득으로 이어져야 내수 회복에도 힘이 붙을 수 있다. 항공권이 싸졌다는 소식만으로 소비가 되살아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2026-07-06 18: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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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9000 돌파 이후…'1만피'는 통과점인가, 과열의 경고인가
[경제일보] 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9000선을 돌파하면서 국내 증시의 다음 고지가 어디인지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스피 8000’은 상징적 목표였지만, 반도체 업황 개선과 외국인 매수세가 겹치면서 시장의 시선은 이미 1만선을 넘어 1만2000선까지 향하고 있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는 지난 18일 9063.84에 마감하며 사상 처음으로 9000선을 넘어섰다. 장중에는 9100선도 돌파했다. 이날 장 초반에는 9300선까지 넘어서며 랠리의 속도를 더했다. 증권가에서는 반도체 이익 모멘텀, 기업 실적 전망 상향, 외국인 자금 유입을 근거로 코스피 추가 상승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다만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경계론도 동시에 나온다. 금리 인상 가능성, 유가와 환율 변동, 반도체 업황 피크아웃 우려, 특정 업종 쏠림 현상은 언제든 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는 요인이다. 코스피 9000 돌파가 한국 증시의 구조적 재평가인지, 유동성과 반도체 랠리가 만든 단기 과열인지에 대한 논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반도체가 끌어올린 코스피…이익 전망이 지수 상단을 다시 열었다 이번 코스피 랠리의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다. 인공지능 확산,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증가, 메모리 가격 상승, 서버 투자 확대가 맞물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대형주의 실적 전망이 빠르게 상향되고 있다. 대신증권은 최근 코스피 목표치를 기존 8800에서 1만1500으로 올려 잡았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반도체 이익 모멘텀 강화와 실적 전망 상향 조정 흐름이 코스피 상승 여력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선행 주당순이익(EPS)이 꺾이기 전까지는 코스피 상단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대신증권은 특히 반도체 업종의 2분기 영업이익과 순이익 증가율이 전 분기 대비 각각 56%, 37%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메모리 가격 상승세까지 감안하면 향후 실적 추정치가 추가로 상향 조정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더 공격적인 전망을 내놨다. 골드만삭스는 코스피 목표치를 기존 9000에서 1만2000으로 상향했다. 올해 코스피가 이미 큰 폭으로 올랐지만 기업 이익 성장세를 감안하면 추가 상승 여력이 남아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시장이 메모리 호황의 지속 기간을 지나치게 짧게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코스피 1만1000, DB증권은 1만1700을 제시했다. 현대차증권과 IBK투자증권도 강세 시나리오에서 1만2000선을 열어두고 있다. 증권가의 공통된 논리는 명확하다. 코스피 상승의 핵심은 유동성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것이다. ◆‘1만피’ 전망의 근거…저평가 해소와 외국인 매수세 코스피 1만선 전망이 힘을 얻는 또 다른 이유는 밸류에이션 부담이 과거 급등장에 비해 크지 않다는 평가다. 지수는 급등했지만 기업 이익 전망이 더 빠르게 올라가면서 주가수익비율(PER) 부담이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는 한국 반도체주의 선행 PER이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수세도 코스피 강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도체 업황 회복이 글로벌 투자자의 포트폴리오 재편을 이끌면서 한국 증시가 아시아 시장 내 핵심 투자처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인공지능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 기업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면서 과거와 다른 재평가 국면이 열렸다는 시각도 나온다. 기업 실적 개선이 반도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전력기기, 조선, 방산, 금융, 자동차 등 일부 업종에서도 이익 전망 상향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가 지수를 끌고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 전반의 이익 체력이 함께 개선된다면 코스피 1만선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현실적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코스피 9000 돌파 이후 시장의 관심은 이제 지수 레벨보다 이익 전망의 지속성에 있다”며 “반도체 이익 추정치가 계속 올라가고 외국인 매수세가 유지된다면 1만선 돌파는 시간의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과열 경고도 커진다…반도체 쏠림과 금리 변수는 부담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스피가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기술적 과열 부담은 커졌다. 8000선 돌파 이후 9000선 안착까지 걸린 시간이 짧았던 만큼 차익 실현 매물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 특히 지수 상승이 반도체 대형주에 집중된 만큼 특정 업종 조정이 곧바로 지수 전체의 변동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금리 변수도 부담이다. 주가 상승 속도가 실물경제 개선 속도보다 빠를 경우 중앙은행의 긴축 경계감이 다시 커질 수 있다. 물가가 예상보다 끈질기게 버티거나 유가가 재차 상승할 경우 금리 인상 가능성이 시장을 압박할 수 있다. 고금리 환경에서는 성장주와 고밸류 업종의 조정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환율도 변수다. 원화 강세는 외국인 자금 유입에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수출기업의 이익 전망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대로 원화 약세가 심해질 경우 외국인 투자심리가 흔들릴 수 있다. 유가 상승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치면 수입 물가와 무역수지에도 부담이 된다. 무엇보다 시장이 경계하는 것은 반도체 업황의 피크아웃 논란이다. 현재는 메모리 가격 상승과 AI 투자 확대가 실적 전망을 밀어올리고 있지만, 공급 증가나 수요 둔화 신호가 나타나면 시장은 빠르게 선반영에 나설 수 있다. 코스피 랠리의 핵심 엔진이 반도체인 만큼, 반도체 사이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지수 전망도 동시에 조정될 수 있다. ◆코스피 1만 시대의 조건…실적·제도·수급의 삼박자 필요 향후 코스피가 1만선을 넘어 1만2000선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게 자본시장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선 실적이다. 반도체 기업의 이익 전망 상향이 계속되고, 비반도체 업종으로 실적 개선이 확산돼야 한다. 지수 상승이 소수 대형주에만 의존할 경우 랠리의 지속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제도 개혁이다. 코스피가 구조적으로 재평가되기 위해서는 주주환원 확대, 자사주 소각, 배당정책 개선,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실적이 좋아도 주주에게 돌아가는 몫이 작다면 한국 증시의 할인 요인은 완전히 해소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수급이다. 외국인 매수세가 유지되는 가운데 연기금과 개인투자자의 장기 자금이 안정적으로 유입돼야 한다. 단기 테마성 매수만으로는 1만선 안착이 어렵다. 시장이 과열될수록 장기 투자자 기반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결국 코스피 9000 돌파는 끝이 아니라 시험대”라며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한국 증시를 새로운 고지로 밀어올린 것은 분명하지만 1만피와 1만2000피가 현실이 되려면 이익 증가가 실제 실적으로 확인돼야 하고, 상승의 온기가 반도체 밖으로 확산돼야 하며, 자본시장 제도 개선도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2026-06-19 09: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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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재건기금, 한국 외교의 새 시험대다
[경제일보] 전쟁은 끝나는 순간에도 계산서를 남긴다. 폭격은 군사작전의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그 뒤처리는 언제나 경제의 언어로 돌아온다. 유가, 해상운임, 보험료, 환율, 재건비, 동맹 분담금. 총성이 멎은 뒤 세계가 마주하는 것은 평화의 감격만이 아니다. 누가 얼마를 낼 것인가라는 차가운 질문이다.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기로 하면서 중동 정세는 일단 한숨을 돌리는 분위기다. 호르무즈 해협의 정상화, 이란 원유 수출 관련 제재 완화, 동결자금 접근, 핵 프로그램 후속 협상 등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그러나 진짜 논란은 다른 곳에서 불거졌다. 3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50조원 규모로 거론되는 이란 재건기금이다. 이 MOU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역내 파트너들과 함께 최소 3000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재건·경제개발 계획을 마련하기로 했다. 일부 외신에선 유럽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기업들의 참여 가능성까지 언급됐다. 문제는 명분이다.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쪽은 미국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뒷수습 비용은 다른 나라와 기업의 지갑으로 충당되는 모양새가 된다면 이는 재건기금이 아니라 우회 배상금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측에서 ‘배상이라는 단어가 없을 뿐 재건은 전쟁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정부 돈이 아니라 민간 투자’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민간 투자는 때로 외교 압박의 부드러운 이름이 된다. 특히 제재 해제, 금융거래 허가, 원유 수출 정상화가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한국 외교가 곤란해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다. 동시에 원유 수입국이고, 중동 해상교통로에 생명줄을 걸고 있는 통상국가다.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경제에 단순한 해상로가 아니다. 에너지 안보의 목줄이다. 중동 전쟁이 확산될 때마다 한국의 물가와 무역수지는 흔들렸다. 따라서 이란과의 긴장 완화, 해상교통 정상화, 원유 공급 안정은 한국에도 분명한 이익이다. 문제는 그 이익이 곧바로 3000억 달러 재건기금 참여의 명분으로 이어지는가다. 한국은 신중해야 한다. 평화 비용과 전쟁 비용은 다르다. 국제사회의 안정 회복을 위한 인도적 지원, 에너지 인프라 복구, 민간 기업의 정상적 수주 참여는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만든 전쟁의 정치적 부담을 동맹국 재정이나 한국 기업의 투자 리스크로 떠넘기는 구조라면 선을 그어야 한다. 동맹은 공동의 안보를 위한 장치이지 일방의 전략 실패를 비용으로 보전해주는 수표책이 아니다. 더구나 이란 재건기금은 아직 최종 합의의 산물이 아니다. MOU는 60일 협상 기간을 전제로 한 중간 합의에 가깝다. 핵 프로그램의 향방, 제재 해제의 순서, 동결자금의 사용, 호르무즈 해협의 장래 관리 방식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협상이 틀어지면 미국은 다시 군사적 압박을 꺼낼 수 있고, 이란은 해협을 또다시 협상 카드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섣불리 재건기금 참여 의사를 밝히는 것은 외교적 선의가 아니라 전략적 조급증이 될 수 있다. 고전 <논어>에는 “이익을 보고도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눈앞의 이익을 보되, 그것이 마땅한 길인지 먼저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란 재건 사업에는 분명 경제적 기회가 있다. 건설, 플랜트, 에너지, 금융, 물류, 정보통신 분야에서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발휘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기회라는 이름으로 위험을 덮어서는 안 된다. 제재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시장, 정치적 불확실성이 큰 국가, 미국과 이란의 합의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구조에 들어가는 일은 기업에도 국가에도 가벼운 선택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세워야 할 원칙은 명확하다. 첫째, 정부 재정 투입은 국민적 동의와 국회 검토 없이 추진돼선 안 된다. 둘째, 민간 기업 참여는 철저히 자율과 수익성, 제재 리스크 검토를 전제로 해야 한다. 셋째, 미국의 동맹 압박이 있더라도 한국의 에너지 안보와 기업 이익, 국제법적 정당성을 함께 따져야 한다. 넷째, 재건기금이 사실상 전쟁 배상금 성격을 띤다면 한국은 그 부담 주체가 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중동 뉴스가 아니다. 트럼프식 거래 외교가 한국에 던지는 또 하나의 청구서다. 방위비, 관세, 반도체, 조선, 에너지에 이어 이제는 중동 재건 비용까지 동맹의 이름으로 압박받을 수 있다. 한국 외교는 더 이상 ‘미국이 요구하면 검토한다’는 수동적 태도로 버티기 어렵다. 동맹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맹의 이름으로 국익 계산을 포기하는 순간, 외교는 전략이 아니라 추종이 된다. 이란의 재건은 필요하다. 전쟁 피해를 입은 민간과 산업 인프라를 복구하는 일은 국제사회가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전쟁을 멈추는 것과 전쟁의 비용을 떠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은 평화에는 기여하되, 책임의 범위는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이 시작한 전쟁의 계산서가 한국의 기업과 국민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이란 재건기금 논란 앞에서 한국 외교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이다.
2026-06-18 16: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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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건 경제 불확실성이다
[경제일보] 전쟁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총성이 멎은 뒤에도 전쟁은 유가에 남고 환율에 남고 물류비에 남고 기업의 투자계획서와 가계의 장바구니에 남는다. 미국과 이란이 전쟁 종식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계 금융시장은 즉각 안도했다. 국제유가는 급락했고 주요 증시는 반등했다. 전쟁 프리미엄이 빠지자 시장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환호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가 아니라 냉정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경제 불확실성이다. 휴전문서 한 장이 원유 생산시설을 하루아침에 복구하지 못한다. 해협 재개방 선언이 곧바로 선박 보험료를 낮추지도 않는다. 국제유가가 하루 이틀 떨어졌다고 해서 물가가 곧장 안정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은 정치적으로는 합의로 끝나지만 경제적으로는 비용 청구서가 도착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번 미국·이란 전쟁이 세계경제에 남긴 첫 번째 상처는 에너지 시장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가 지나는 핵심 길목이다. 그 길목이 전쟁의 인질이 되자 세계는 다시 한 번 에너지 안보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경제 생존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합의 이후 브렌트유 가격은 급락했지만 이것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단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유가가 내려도 공급망은 즉시 회복되지 않는다. 산유국의 생산설비, 정제시설, 항만, 보험, 선박 운항, 금융결제망은 모두 시간이 필요한 시스템이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기억이다. 한번 흔들린 시장은 쉽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사들은 통항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선언보다 실제 항로의 안전을 본다. 보험사는 합의문보다 재발 가능성을 계산한다. 정유사와 항공사, 석유화학 기업은 현물가격보다 3개월 뒤, 6개월 뒤의 조달 안정성을 본다. 그래서 전쟁 뒤의 경제는 늘 ‘안정’이 아니라 ‘안정 확인’의 시간을 요구한다. 불확실성은 가격 그 자체보다 더 비싸다. 이번 합의는 세계 중앙은행에도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전쟁 중 급등한 에너지 가격은 물가를 밀어 올렸다. 유가가 떨어지면 물가 압력은 완화되지만 이미 오른 운송비와 원재료비, 기대인플레이션은 시차를 두고 경제 전반에 스며든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물가가 불안하면 움직이기 어렵다. 금리를 유지하면 경기 회복은 더뎌지고 금리를 내리면 다시 물가와 환율이 흔들릴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통화정책의 안개는 더 짙어질 수 있다. 한국경제에는 이 불확실성이 더 예민하게 작용한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큰 나라다. 원유와 가스 가격이 오르면 기업의 생산비가 먼저 오른다. 정유·화학·철강·항공·해운은 물론이고 전력비 부담이 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산업에도 파장이 간다. 유가가 오르면 무역수지가 흔들리고 무역수지가 흔들리면 환율이 불안해진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뛰고 수입물가가 뛰면 소비자물가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중동의 포성이 서울의 주유소 가격표와 서민 밥상으로 번지는 구조다. 합의 이후 유가가 안정된다면 한국경제에는 분명 숨통이 트인다. 기업의 원가 부담은 줄고 항공·해운·석유화학·자동차 등 에너지 민감 업종은 불확실성을 덜 수 있다. 고유가에 짓눌렸던 소비심리도 일부 회복될 수 있다. 환율 안정은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에도 긍정적이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부담이 낮아지면 한국경제는 다시 회복 궤도에 올라설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경기 반전의 신호로 과대해석해서는 안 된다. 종전 합의가 곧 경기부양책은 아니다. 전쟁은 이미 비용을 남겼다. 기업들은 몇 달 동안 비싼 원료와 물류비를 감당했다. 일부 기업은 납기와 계약조건을 조정했고 일부 가계는 고유가와 고물가 속에서 소비를 줄였다. 한번 미뤄진 투자는 다시 집행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한번 닫힌 소비지갑은 유가가 떨어졌다는 뉴스 하나로 곧바로 열리지 않는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봐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지금 필요한 정책은 ‘전쟁이 끝났으니 정상화됐다’는 낙관론이 아니라, ‘전쟁이 끝났지만 불확실성은 남았다’는 위험관리다. 물가가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 통화정책은 신중해야 한다. 동시에 취약계층과 에너지 다소비 업종에는 선별 지원이 필요하다. 고유가의 부담은 모든 국민에게 같지 않다. 대기업은 헤지와 장기계약으로 버틸 수 있지만 영세 자영업자와 운송업자, 농어민, 저소득층은 유가 변동을 그대로 맞는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 같은 단기 처방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 한시적 완충장치는 있어야 하지만 재정 여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전략비축 체계 점검, 핵심 원자재 공급망 확보, 항만·해운 리스크 관리, 기업의 환율·유가 헤지 역량 강화다. 전쟁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싸게 사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효율만 따지던 공급망의 시대가 저물고, 회복탄력성을 따지는 공급망의 시대가 왔다. 기업도 달라져야 한다. 중동 리스크를 일시적 외부 변수로만 볼 수 없다. 지정학은 이제 재무제표의 바깥에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가, 환율, 운송, 보험, 재고, 투자, 배당까지 모두 흔드는 변수다. 최고경영자는 매출 목표만이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 시나리오를 들여다봐야 한다. 에너지 가격이 배럴당 70달러일 때와 100달러일 때, 호르무즈 통항이 정상일 때와 부분 제한될 때, 환율이 100원 더 오를 때의 손익을 따져야 한다. 위기 대응은 전쟁이 난 뒤 만드는 문서가 아니라 평시에 쌓아두는 체력이다. 금융시장도 안도 랠리에 취해서는 안 된다. 전쟁 합의 이후 주가가 오르고 유가가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종종 정치적 이벤트에 먼저 환호하고 실물경제의 복구 속도를 뒤늦게 확인한다. 유가 하락이 물가 안정으로 이어질지, 물가 안정이 금리 인하로 이어질지, 금리 인하가 소비와 투자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열린 질문이다. 지금의 시장 반등은 ‘평화 배당’이라기보다 ‘공포 할인 해소’에 가깝다. 여기서 고전의 지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은 “용병을 잘하는 자는 다시 징병하지 않고, 군량을 세 번 싣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싸움터에서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보급의 비용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경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실력은 전쟁의 승패보다 전쟁 뒤 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에서 드러난다. 에너지, 물류, 금융, 물가, 환율의 보급선을 관리하지 못하면 평화의 이름 아래서도 경제는 계속 흔들린다. 이번 미국·이란 합의는 세계경제에 시간을 벌어줬다. 하지만 시간을 번 것과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다르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린다고 해도 세계경제는 이미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봤다. 국제유가가 내려간다고 해도 한국경제는 수입 에너지 의존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증시가 오른다고 해도 기업과 가계가 체감하는 불확실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책당국은 이제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유가·환율·물류비의 변동이 물가와 산업별 비용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망을 장기계약·비축·대체선 확보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셋째, 전쟁 이후 완화된 시장 분위기를 구조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가 지나가면 개혁의 긴장도 함께 풀린다. 그러나 다음 위기는 늘 우리가 방심할 때 온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경제 불확실성이다.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끝났다는 선언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숫자와 가격과 계약과 기대 속에 남아 서서히 비용을 청구한다. 지금 한국경제가 해야 할 일은 평화의 뉴스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경제의 균열을 차분히 메우는 일이다. 평화는 합의문으로 시작되지만 경제의 안정은 준비된 국가만이 얻을 수 있다.
2026-06-16 15: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