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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베트남, 현지 명문대와 AI·R&D 인재 육성 확대… 석·박사 교육 협력 강화
삼성베트남이 베트남 주요 공과대학 및 국립 교육기관과 손잡고 인공지능(AI)과 연구개발(R&D) 분야 고급 인재 육성에 나선다. 기존 학부 중심 산학협력을 석·박사 과정과 첨단 연구 분야로 확대하며 현지 기술 인재 확보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삼성베트남은 지난 4일 하노이국립대 공과대학(VNU-UET), 5일 우정통신기술대학(PTIT), 10일 하노이백과대(HUST)와 각각 '2026~2028년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은 AI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기술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고급 연구인력 양성 체계를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협약에 따라 삼성과 각 대학은 정보기술(IT), 인공지능(AI), 멀티미디어, 정보보안, 차세대 통신 네트워크 등 미래 핵심 기술 분야의 석사 과정을 공동 운영한다. 우수 석사 과정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며 삼성베트남 R&D센터(SRV) 소속 엔지니어들의 대학원 교육 참여도 확대할 계획이다. 나기홍 삼성베트남 실장은 "AI 시대에는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심층적 전문성을 갖춘 연구개발 인재 확보가 중요하다"며 "베트남 산업 발전과 기술 인재 육성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협력 프로그램은 교육과 연구, 장학금, 인턴십, 채용 등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삼성은 2026년부터 2028년까지 총 170억 동(VND) 규모의 장학금을 조성해 IT, AI, 전자통신 등 첨단 기술 분야 학생들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기존에 각 대학에 구축한 '삼성 랩(Samsung Lab)'에 최신 연구 장비와 교육 인프라를 추가 지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멀티미디어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교과목 확대와 교육 과정 고도화도 지원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실무 역량을 높이고 산업 현장 수요에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방침이다. 현지 대학들도 이번 협력에 기대를 나타냈다. 처 득 찐 하노이국립대 공과대학 총장과 레 안 뚜안 하노이백과대 이사장은 "이번 협력은 대학의 연구 역량 강화와 첨단 기술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삼성베트남은 2012년부터 베트남 대학들과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현재까지 9개 대학에 11개의 삼성 랩을 구축했으며 소프트웨어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인재 양성을 지원해 왔다. 누적 투자 규모는 약 1800억 동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의 산학협력이 현지 산업 수요와 대학 교육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협력 사례로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성베트남은 이번 협력을 통해 AI와 첨단 기술 분야 인재 저변을 확대하고, 현지 연구개발 역량 강화와 산업 생태계 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26-06-11 11: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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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 동료와 퇴근하는 저녁, 우리는 준비가 됐나
[경제일보] 휴머노이드 로봇이 더 이상 전시장 무대 위의 묘기가 아니라 공장 라인의 동료가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영국 로봇기업 휴머노이드는 독일 자동차·산업부품 기업 셰플러의 글로벌 제조 현장에 2032년까지 1000~2000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투입할 계획이다. 초기 배치는 올해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독일 헤르초게나우라흐와 슈바인푸르트에서 시작된다. 현대차그룹도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오는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 공장에 투입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제 질문은 기술이 가능한가가 아니다. 인간의 일자리와 임금, 세금과 안전망은 준비돼 있는가다. 자동차 공장은 산업혁명의 가장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컨베이어벨트가 노동을 쪼갰고, 산업용 로봇 팔이 용접과 도장을 바꿨다. 이제 그 라인에 사람의 형태를 닮은 기계가 들어온다. 바퀴가 아니라 두 다리로 움직이고, 고정된 팔이 아니라 사람처럼 공간을 인식하며, 단순 반복이 아니라 상황 판단을 흉내 내는 기계다. 공장 안의 로봇은 더 이상 철제 울타리 안에 갇힌 설비가 아니다. 사람 옆에서 상자를 들고, 부품을 옮기고, 위험한 작업을 대신하는 ‘강철 동료’가 되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한국은 이미 인구절벽 앞에 서 있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15~64세 생산연령인구는 2022년부터 향후 10년간 332만명 감소하고,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22년 71.1%에서 2072년 45.8%로 낮아질 전망이다. 노동의 빈자리는 점점 커지고, 숙련 노동자의 은퇴는 빨라지며, 청년 인력은 제조 현장을 기피한다. 이 구조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은 공상과학의 장난감이 아니라 산업 현장의 생존 수단이 된다. 기업 경영의 관점도 분명하다. 로봇은 피로를 덜 느끼고, 위험한 작업을 대신할 수 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다만 여기서 단정은 경계해야 한다. 휴머노이드는 아직 완성된 해법이 아니다. 실제 공장 투입에는 안전성, 신뢰성, 유지보수 비용, 작업 전환 속도, 현장 노동자와의 협업 규칙이 필요하다. 현대차가 아틀라스를 2028년 공장에 투입하고 2030년까지 더 복잡한 공정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이 기술이 오늘 당장 전면 대체가 아니라 단계적 검증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인구는 줄고, 제조 경쟁은 치열해지며, 글로벌 기업들은 더 싸고 빠르고 안정적인 생산체계를 요구한다. 한국 자동차·부품·조선·물류·전자 산업이 휴머노이드 도입을 외면할 수는 없다. 문제는 로봇 도입 여부가 아니라 로봇 도입의 질서다. 시장은 이미 움직이는데 법과 제도, 교육과 세금, 노사관계는 아직 과거의 언어에 머물러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를 설명하며 각자가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을 하고 남의 일을 침범하지 않는 질서를 말했다. 이를 오늘의 공장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통찰은 남는다. 사회는 역할이 새로 나뉠 때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로봇이 위험하고 반복적이며 고강도인 작업을 맡는다면 인간은 설계, 관리, 창의, 공감, 판단, 돌봄의 영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 이동이 가능하려면 교육과 임금, 안전망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기술의 승전보 뒤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 휴머노이드 도입은 어떤 노동자에게는 해방이지만, 어떤 노동자에게는 실직의 예고일 수 있다. 로봇이 허리를 굽혀 무거운 부품을 들 때 인간 노동자의 허리는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까지 대신한다면, 보호받은 것은 노동자의 몸인지 기업의 비용인지 묻게 된다. 기술은 중립적일 수 있어도 기술이 배치되는 시장은 중립적이지 않다. 여기서 ‘로봇세’ 논의가 나온다. 로봇세는 오래된 논쟁이다. 빌 게이츠는 2017년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체해 기업 비용을 줄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부과해 돌봄·교육 같은 인간에게 필요한 일자리에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로봇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어떤 자동화가 과세 대상인지, 혁신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을지, 해외 이전을 부추기지 않을지 모두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구호로서의 로봇세가 아니라 설계로서의 사회계약이다. 로봇 한 대마다 단순히 세금을 매기는 방식은 거칠 수 있다. 그러나 로봇과 AI로 늘어난 생산성, 자동화로 절감한 인건비, 자본집약적 생산에서 발생한 초과이익을 어떻게 사회 전체의 전환 비용으로 연결할 것인지는 논의해야 한다. 재교육 기금, 고용 전환 계정, 지역 제조업 훈련센터, 중장년 노동자의 직무 재설계, 협력사 자동화 지원 같은 구체적 장치가 필요하다. 핵심은 혁신을 벌주는 것이 아니다. 혁신이 만든 과실로 혁신에서 밀려나는 사람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기업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만 그 생산성의 과실이 주주와 경영진, 일부 기술 인력에게만 집중된다면 산업의 정당성은 약해진다. 시장경제가 오래가려면 시장 밖으로 밀려난 사람을 다시 시장 안으로 데려오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유럽도 이 문제를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다만 AI 시스템의 투명성, 표시 의무, 이용자 고지 같은 규범은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 달 AI법 제50조상 특정 AI 시스템의 투명성 의무 이행 지침 초안을 공개했다. 이것이 곧바로 ‘휴머노이드 노동 가이드라인’은 아니다. 그러나 AI와 로봇이 인간의 생활세계로 들어올수록 기술 사용의 투명성, 책임성, 이용자 보호가 제도화되고 있다는 흐름은 분명하다. 한국도 기술 강국이라는 자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고 쓰는 능력만큼, 로봇과 함께 일하는 사회를 설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로봇이 산업 현장에 들어오면 산업안전 규칙도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로봇 옆에서 일할 때 사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로봇이 학습한 작업 데이터는 누구의 자산인가. 로봇 도입으로 줄어든 인건비 중 일부를 노동 전환에 쓸 수 있는가. 협력사와 중소기업도 자동화 혜택을 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로봇 산업은 기술적으로는 앞서가도 사회적으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역할도 분명하다. 한쪽으로는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 실증 특례, 안전 인증, 데이터 표준, 로봇 보험, 산업안전 기준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한쪽으로는 사람에 투자해야 한다. 로봇 정비사, 로봇 운용 관리자, 공정 데이터 분석가, AI 안전 관리자, 현장 재교육 강사 같은 새 직무를 만들어야 한다. 로봇이 기존 일자리를 없애는 속도보다 사람이 새 일자리로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야 사회가 버틴다. 노동계도 냉정해야 한다. 휴머노이드 도입을 전면 거부하는 방식은 오래가기 어렵다. 인구 구조와 글로벌 경쟁, 원가 압박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노동계는 더 구체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로봇 도입 전 고용영향 평가, 전환 배치 계획, 재교육 시간의 유급 인정, 자동화 이익 공유, 산업안전 공동 점검, 협력사 노동자 보호를 교섭 의제로 올려야 한다. “로봇 반대”가 아니라 “인간을 배제하지 않는 로봇 도입”을 요구해야 한다. 기업도 바뀌어야 한다. 휴머노이드 도입을 단순 비용 절감 프로젝트로만 보면 갈등은 커진다. 로봇은 인간을 대체하는 장비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이기도 하다.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기업의 철학과 제도 설계에 달려 있다. 로봇을 들여오면서 노동자의 숙련을 무시하면 공장은 조용해질지 몰라도 조직의 신뢰는 무너진다. 반대로 로봇을 위험 작업과 반복 작업에 먼저 배치하고, 사람을 더 높은 가치의 업무로 옮기면 자동화는 갈등이 아니라 경쟁력이 된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노동의 종말일 수도 있고, 생산성의 신대륙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가 결정한다. 로봇의 성능은 기업이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로봇이 만든 사회의 품격은 정부와 국회, 기업과 노동계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휴머노이드 동료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같은 라인을 점검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저녁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 인간 노동자의 어깨가 패배감으로 처지지 않게 하려면 지금 준비해야 한다. 로봇이 대신한 노동의 빈자리를 인간의 배움과 이동, 돌봄과 창의의 자리로 바꿔야 한다. 로봇이 만든 부가 인간을 배제하는 자본의 성벽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세우는 사회적 기반이 되게 해야 한다. 결국 모든 혁신의 마침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시장경제의 활력이다. 그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공동체의 의무다. 차가운 금속음 속에 인간의 따뜻한 숨결을 남기는 것, 그것이 휴머노이드 시대 한국 산업이 지켜야 할 기본이고 원칙이며 상식이다.
2026-05-17 09: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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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역사의 이란과 250년 역사의 미국, 호르무즈 해협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까
[경제일보] 세계는 다시 호르무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국제 원유 수송의 심장부이자 세계 경제의 혈관인 이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5천년 역사의 페르시아 문명국 이란과 250년 역사의 초강대국 미국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이란의 종전 협상 답변에 대해 “완전히 용납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중동 정세는 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표면적으로는 핵 협상과 휴전 문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순하지 않다. 이번 충돌의 핵심에는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지정학적 목줄과, 그 배후에 놓인 문명과 패권의 충돌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자유 항행과 국제 질서를 이야기한다. 반면 이란은 국가 생존과 역사적 자존을 이야기한다. 서로 바라보는 세계관 자체가 다르다. 미국은 젊고 강한 나라다. 건국 이후 불과 250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됐다.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와 군사력, 달러 패권과 해양 패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미국은 문제를 압도적 힘과 속도로 해결하려는 국가적 습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은 상대를 극단까지 몰아붙인 뒤 극적인 타결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단기적 압박과 충격 전략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란은 다르다. 오늘날의 이란은 단순한 중동의 한 국가가 아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억과 실크로드의 게이트키핑 경험을 몸속 깊이 간직한 나라다. 기원전 다리우스 시대부터 이미 ‘왕의 길’을 통해 동서 교역망을 통제했던 국가다. 수천 년 동안 외세의 침략과 왕조 교체, 종교 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나라다. 이란은 힘의 크기보다 시간의 길이를 믿는 국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은 이란 문제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 제재를 통해 단기간에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만, 이란은 시간을 길게 끌며 상대의 피로와 내부 균열을 기다린다. 미국 항공모함이 중동 앞바다를 뒤덮을 때 이란은 정면 충돌을 피한다. 대신 대리 세력과 국지전, 비정규전, 해상 교란과 심리전을 활용한다. 약자의 전략이지만, 역설적으로 강자를 가장 지치게 만드는 방식이다. 지금 세계 경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봉쇄되거나 충돌이 장기화되면 국제 유가는 급등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이곳을 지나간다. 한국·일본·중국 같은 동아시아 산업국가들은 직접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한 기름값 문제가 아니다. 석유화학과 철강, 반도체와 해운, 전력과 물류 비용 전체가 흔들린다. 환율 불안과 수입물가 상승은 결국 서민 경제까지 압박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중동발 위기는 곧바로 한국 경제의 생산 원가 상승으로 연결된다. 이미 글로벌 공급망은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쳐 있다. 여기에 호르무즈 변수까지 더해질 경우 세계 경제는 또 하나의 스태그플레이션 공포를 맞이할 수 있다. 현재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비관적 시나리오다.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고 군사 충돌이 확대되는 경우다. 이 경우 이란은 직접 봉쇄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조선 공격과 해상 교란을 통해 국제 유가를 급등시킬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군사 보복에 나설 것이고, 중동 전역은 장기 불안 국면에 들어갈 수 있다. 세계 금융시장은 급격한 조정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중간 시나리오다. 가장 현실적인 그림일 수 있다. 양측이 공개적으로는 강경 발언을 이어가면서도 물밑 협상을 병행하는 형태다. 군사적 긴장은 유지되지만 전면전은 피하는 방식이다. 국제 유가는 높은 수준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시장은 장기 불확실성 속에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중동에서 가장 자주 반복된 패턴이기도 하다. 셋째는 낙관적 시나리오다. 핵 문제와 항행 보장 문제에서 일정 수준의 절충이 이뤄지는 경우다. 미국은 체면을 세우고, 이란은 공개적 굴복 이미지를 피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국제 유가는 안정을 되찾고 금융시장도 반등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강경 기류를 볼 때 단기간에 이런 합의가 도출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다. 해양 패권과 문명 전략, 속도의 정치와 시간의 정치가 충돌하는 장면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졌지만,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정학적 생존 감각을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살아남는다(柔弱勝剛强)”고 말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국은 언제나 압도적 힘으로 등장했지만, 긴 시간 살아남은 것은 오히려 끈질긴 문명과 기억이었다. 호르무즈 해협의 파도는 단순한 바닷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석유와 달러, 종교와 문명, 역사와 패권이 함께 흐르고 있다. 지금 세계는 다시 묻고 있다. 과연 이번에는 누가 시간의 편에 서게 될 것인가.
2026-05-11 10: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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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월스트리트 피치북 쓰고 신용평가하는 시대...한국 금융당국은 대비하고 있는가
[경제일보] 미국 월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던 투자은행(IB)의 회의실에서 애널리스트와 회계사, 변호사들이 수백 장의 투자제안서(Pitch Book)를 만들었다. 기업 인수합병(M&A) 자료와 신용평가 메모, 리스크 분석 보고서와 회계 결산서는 오랜 경험을 가진 금융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작업을 인공지능(AI)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AI 개발사인 Anthropic(앤트로픽)은 최근 금융권 전용 AI 에이전트 10종을 공개했다. 투자제안서 작성, 회계 결산, 신용평가 메모 초안 작성 등 금융권 핵심 업무를 자동화하는 기능들이다. 이는 단순한 챗봇 서비스가 아니다. 금융산업의 두뇌 노동 자체를 AI가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이 변화의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금융은 원래 보수적인 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규제가 많고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AI 도입 속도가 빠른 이유는 명확하다. 데이터 규모가 방대하고 반복 업무가 많으며 비용 절감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처럼 피로하지 않고, 24시간 문서를 읽고 요약하며, 수천 개 데이터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다. 특히 생성형 AI는 단순 계산을 넘어 문서 작성과 논리 구성까지 수행하기 시작했다. 앤트로픽의 행보는 단순한 기술 발표가 아니다. 그것은 AI 산업의 전장이 소비자 서비스에서 기업용(B2B)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산업 초창기에는 챗GPT와 같은 대중 서비스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핵심은 기업 업무 자동화다. 특히 금융은 AI 기업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시장 중 하나다. 수익 규모가 크고, 고객 충성도가 높으며, 성공 사례가 만들어질 경우 산업 전체로 확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앤트로픽은 이미 금융 특화 서비스인 ‘클로드 포 파이낸셜 서비스’를 통해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시타델, AIG 등 대형 금융사를 고객으로 확보했다. 또 금융 IT 기업인 FIS와 협력해 금융범죄 탐지 AI 시스템 개발에 나섰고, 월가 금융회사들과 함께 15억 달러 규모의 합작법인까지 설립했다. AI 기업이 이제 금융 인프라 자체를 장악하려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AI의 역할이 ‘보조 도구’에서 ‘업무 대행자’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AI는 이메일 초안 작성이나 간단한 검색 지원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는 투자은행의 피치북 제작과 신용평가 메모 작성, 회계 결산 등 고난도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 인간 전문가가 하던 핵심 지식 노동을 AI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금융업의 구조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 투자은행의 주니어 애널리스트 수요는 줄어들 수 있다. 회계법인의 단순 감사 업무도 축소될 수 있다. 반면 AI 모델을 검증하고 리스크를 통제하는 새로운 직무는 늘어날 것이다. 금융산업은 이제 사람 중심 조직에서 인간과 AI가 함께 움직이는 하이브리드 조직으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AI가 단순 효율화 수준을 넘어 금융 의사결정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용평가와 리스크 분석은 금융의 핵심 권한이다.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어떤 기업을 투자 대상으로 판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만약 AI가 그 판단 과정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된다면 금융의 권력 구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 미국 금융권은 이미 전면전에 들어갔다. JPMorgan Chase 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은행 내부에 AI 전담 부서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백 개 활용 사례가 진행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리스크 관리, 금융사기 탐지, 마케팅, 디자인, 회의 기록, 문서 검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AI가 투입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다. 월가는 이미 AI를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보고 있다. 과거 인터넷이 금융산업을 바꿨다면, 이제 AI는 금융업의 사고 체계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인간이 데이터를 읽고 판단하던 시대에서 AI가 데이터를 읽고 인간이 최종 승인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 금융권도 AI 도입을 이야기하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들이 생성형 AI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일부 챗봇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념검증(PoC)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조직 전체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려는 전략은 부족하다. 금융당국 역시 규제와 보안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AI 금융 시대의 산업 구조 변화에 대한 국가 전략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속도다. 미국은 이미 AI 전담 조직을 만들고 금융업 전체를 재편하고 있는데, 한국은 여전히 시범 사업과 규제 검토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AI 산업은 속도의 게임이다. 초기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데이터와 경험을 축적하며 압도적 우위를 갖게 된다. 한국 금융권이 지금처럼 느리게 대응할 경우 글로벌 금융 경쟁력 자체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데이터 주권 문제다. 금융 데이터는 국가 경제의 핵심 자산이다. 만약 국내 금융회사들이 해외 AI 플랫폼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한국 금융의 핵심 정보와 의사결정 구조가 외국 기술기업에 종속될 위험도 있다. 단순한 편의성 문제가 아니라 금융 안보의 문제다. 금융당국도 이제는 사고를 바꿔야 한다. AI를 단순히 규제 대상이나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국가 금융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첫째, 금융 AI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둘째, 금융권의 AI 실증 사업을 과감히 허용하는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 셋째, 국내 AI 기업과 금융회사 간 협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넷째, 금융 데이터 보안과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전략 플랫폼도 고민해야 한다. 물론 AI에는 위험도 존재한다. 잘못된 데이터 학습은 금융 사고를 초래할 수 있고, 알고리즘 편향은 신용 차별 문제를 낳을 수 있다. AI 기반 금융사기가 오히려 더 정교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낙관도, 막연한 공포도 아니다. 핵심은 통제 가능한 혁신이다. 도덕경에는 “변화에 앞서 움직이는 자가 흐름을 얻는다”는 뜻의 지혜가 담겨 있다. 산업혁명의 역사는 결국 먼저 준비한 자의 역사였다. 인터넷 시대에 뒤처진 기업들이 사라졌듯이, AI 금융 시대에도 대응하지 못한 금융회사는 경쟁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월스트리트에서는 AI가 피치북을 만들고 신용평가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현재의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한국 금융산업의 문 앞까지 와 있다. 문제는 하나다. 한국 금융당국과 금융권은 과연 이 거대한 변화에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가.
2026-05-10 09: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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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풍력 100조 대전환' vs '30년 재정통의 경제 회복'…미래와 현실 격돌
[경제일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제주특별자치도는 단순한 변방의 섬이 아니다. 인구 70만명의 소규모 광역자치단체이지만, 제주의 선거판은 대한민국이 직면한 굵직한 난제들이 얽혀 있는 거대한 용광로다. 제2공항 건설을 둘러싼 개발과 보전의 딜레마, 관광산업의 체질 개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에너지 전환과 청년 일자리 문제까지, 제주는 대한민국의 균형발전과 미래 정책이 시험대에 오르는 최전선이다. 이번 제주도지사 선거는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후보와 국민의힘 문성유 후보의 명운을 건 양자 대결로 압축됐다. 위 후보는 치열했던 당내 경선 결선 투표에서 문대림 의원을 꺾고 최종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일찌감치 문성유 전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 사장을 단수 공천하며 대항마로 내세웠다. 정치적 중량감과 거대 담론을 앞세운 '정치인'과, 실물 경제와 예산 구조에 밝은 '행정·재정가'의 대결. 이들의 상반된 이력만큼이나 제주를 향한 비전과 해법도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위성곤, 여당 프리미엄과 'AI·해상풍력' 거대 플랜 '승부수' 위 후보의 가장 큰 무기는 탄탄한 지역 기반과 '여당 후보'로서의 정책 실행력이다. 서귀포시를 지역구로 20·21·22대 내리 3선을 지낸 그는 제주 민심의 기저를 누구보다 잘 읽어내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앞서 위 후보는 예비후보 등록 기자회견에서 오영훈 현 지사, 문대림 의원과 손을 맞잡고 "하나 된 힘으로 본선 승리를 이루겠다"고 천명했다. 이는 경선 과정에서 빚어진 파열음을 조기에 불식시키고 여권의 조직력을 극대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포석으로 읽힌다. 위 후보가 그리는 제주의 미래는 이른바 '에너지·AI 대전환'이다. 국가 AI 데이터센터 유치, 10GW 규모의 해상풍력 단지 조성, 초고압직류송전(HVDC) 망을 통한 전력 공급 구상이 핵심이다. 제주의 거센 바람을 전력과 도민 소득(바람연금)으로 환원하고,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물류등가제'와 스마트 물류거점 조성으로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약의 스케일이 큰 만큼 맹점도 뚜렷하다. 막대한 재원 조달과 환경 파괴 논란, 주민 수용성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문 후보 측이 "100조원 규모에 달하는 사업의 구체적인 자금 조달 계획을 밝히라"고 정조준한 것도 위 후보의 거대 담론이 자칫 '선거용 장밋빛 청사진'에 그칠 수 있다는 날 선 비판이다. ◆30년 '예산통' 문성유, 실용주의와 관광 구조 개편 이에 맞서는 문 후보는 철저히 '실물 경제'와 '민생'에 방점을 찍고 있다. 기획재정부 예산실과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을 거치며 국가 경제의 밑그림을 그려온 30년 관료의 경험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다. 앞서 제주MBC와의 인터뷰에서 문 후보는 "국가 경제정책과 예산을 다뤄온 전문성을 바탕으로 위기에 처한 제주 경제를 반드시 회복시키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거창한 이념이나 구호 대신 실질적인 도민 삶의 질 개선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문 후보의 핵심 타깃은 위기에 처한 '제주 관광'이다. 양적 팽창에 매몰되어 도민의 실질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깨겠다는 것이다. 문 후보는 축제·행사 음식의 '가격 및 중량 사전등록제', '24시간 관광 불편 환불센터' 운영 등을 공약하며 이른바 '바가지·지루함·수익 유출 없는 3무(無) 관광'을 주창했다. 관광객 수라는 허수 대신 도민의 지갑을 채우고 지역 상권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실용적 접근이다. 하지만 문 후보 앞에도 험난한 과제가 놓여 있다. 낮은 초기 인지도와 불리한 정당 지형이다. 제주에서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민주당의 아성을 단기간에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보수층의 결집을 넘어 중도층을 견인할 '한 방'이 절실하다. ◆여론조사 공정성 논란, 그리고 침묵하는 39% 현재 겉으로 드러난 여론의 지표는 위성곤 후보의 압도적 우세를 가리킨다. KBS제주방송총국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KBS제주방송총국 의뢰, 한국리서치 조사, 2026년 4월 13~14일, 제주도내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휴대전화 안심번호 추출, 면접원 전화면접 방식, 지역·성별·연령별 가중치 부여, 응답률 27.9%,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위 후보는 47%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6%에 그친 문 후보를 크게 앞섰다. 하지만 이 수치를 본선 경쟁력으로 직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36%)거나 '모름·무응답'(3%)으로 답한 태도 유보층, 이른바 부동층이 무려 39%에 달한다. 유권자 10명 중 4명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조사 방식에 대한 공정성 논란도 변수로 작용했다. 여론조사 발표 당시 문 후보 측은 해당 여론조사의 가상대결 문항에서 자신을 국민의힘 소속으로 명시하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KBS제주 측은 선거법상 선관위에 등록된 경력을 사용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향후 본선 레이스가 본격화되고 정당 간 대립 전선이 명확해지면, 숨죽이고 있는 39%의 민심이 어느 쪽으로 쏠릴지가 이번 선거의 최종 승패를 가를 전망이다. 이번 선거의 승패를 가를 핵심 의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제주 사회의 가장 큰 뇌관인 '제2공항' 문제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주민투표 실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차기 도지사의 갈등 조정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또한 '관광 경제의 질적 전환' 문제도 주요 변수다. 지난해 제주 방문 관광객은 전년 대비 소폭 증가했지만, 내국인은 줄고 외국인이 급증하는 기형적 구조를 보였다. 양적 지표와 도민 체감 경기 사이의 괴리를 메울 해법이 절실한 상황이다. 아울러 섬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한 물류비와 생활비 부담 문제도 승패를 가를 승부처 중 하나다. 정치권 관계자는 "진영 논리에 갇힌 맹목적 투표가 아니라 상식과 원칙에 입각해 제주의 미래를 책임질 적임자를 찾고 있다"며 "제2공항을 둘러싼 소모적 갈등에 마침표를 찍고, 팍팍한 도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리더십이 요구되는 분위기"라고 했다.
2026-05-1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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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거울, 카네기와 록펠러에 길을 묻다
[경제일보]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대정신은 언제나 두 거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한 명은 시대의 단단한 뼈대를 세우는 자이며 다른 한 명은 그 뼈마디 사이사이에 뜨거운 피를 돌게 하는 자다. 19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포효와 함께 미국이라는 미완의 대륙이 꿈틀거릴 때 역사는 두 사내를 선택했다. 스코틀랜드의 잿빛 가난을 짊어지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 소년,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불우한 유년의 상처를 신앙과 회계장부로 봉합하며 자라난 청년, 존 D. 록펠러. 오늘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해일 앞에 서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파도는 이제 인류 문명의 모든 해안선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 현기증 나는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화려한 기술의 신기루에 취해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150년 전 철과 석유라는 문명의 두 기둥으로 세상을 재편했던 카네기와 록펠러의 삶은, 안개 자욱한 AI 시대의 본질과 승리 법칙을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투영한다. 이것은 낡은 위인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생존에 관한 준엄한 질문이다. ◆ 미국의 뼈대를 벼려낸 자, 앤드류 카네기 앤드류 카네기의 삶은 아메리칸드림의 원형 그 자체다. 1848년, 13살의 소년은 증기선 뒷간에 숨어 신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손에 쥔 것이라곤 희망이라는 이름의 누더기뿐이었다. 방직 공장의 실패 감는 소년에서 전보 배달부, 철도 회사 직원을 거치며 그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을 뼈에 새겼다. 그가 본 것은 멈추지 않는 미국의 팽창 에너지였다. 서부로, 서부로 뻗어 나가는 철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마천루, 대륙의 혈맥을 잇는 거대한 교량. 카네기는 이 모든 야망의 근간에 무엇이 꿈틀대고 있는지 보았다. 바로 ‘철(鐵)’이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통찰이 번뜩였다. "인프라의 기반을 장악하는 자가 시대를 지배한다." 그는 금광을 찾아 헤매는 투기꾼이 아니었다. 금광으로 가는 길을 깔고 그 길 위를 달릴 기관차를 만들고 금을 캐는 데 쓸 곡괭이를 만드는 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에게 철강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의 미래를 떠받칠 단단한 골격이었다. 그의 철강 제국은 광적인 집념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채였다. 결정적 계기는 영국에서 목격한 ‘베세머 공정’의 혁명적 잠재력을 꿰뚫어 본 순간 찾아왔다. 펄펄 끓는 쇳물에 공기를 불어넣어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이 신기술은 연금술에 가까웠다. 2주가 꼬박 걸리던 강철 생산 시간은 단 15분으로 줄었고 원가는 폭락했다. 남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 그는 전 재산을 걸고 이 신기술의 심장을 미국으로 가져왔다. 기술의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자만이 경쟁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는 마치 오늘날 AI 기업들이 최신 반도체 공정과 아키텍처에 명운을 거는 모습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의 제국은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스스로 호흡하는 유기체였다. 그는 ‘수직 통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만의 생태계를 완성했다. 철강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미네소타의 철광석 광산에서부터 펜실베이니아의 석탄 광산, 원료를 실어 나르는 오대호의 증기선과 철도 회사까지. 원료 채굴에서 제품 생산, 운송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신의 제국 안에 편입시켰다. 외부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누구도 원가로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한 것이다. 외부의 기술이나 자원에 의존하는 순간 제국의 고삐를 놓치게 된다는 냉엄한 현실을 그는 간파했다. 이 거대한 제국을 움직이는 피는 ‘원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정교한 실시간 원가 회계 시스템을 도입했다. 매일 아침 그의 책상에는 각 공정에서 발생한 비용이 1센트 단위까지 보고되었다. “이익은 알아서 따라오게 하고 비용을 감시하라”는 그의 말은 카네기 제국의 제1계명이었다. 이 서슬 퍼런 숫자에 대한 집착이 그의 용광로에서 나온 쇠를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고 값싼 강철로 만들었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지탱하는 우아하고도 강인한 강철 케이블, 미국 대륙을 동서로 관통한 수만 킬로미터의 철도 레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한 마천루의 H빔. 그 모든 것이 카네기의 용광로에서 벼려낸 미국의 뼈대였다. 그러나 그는 부를 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다”라는 그의 신념은 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미국 전역에 1689개의 도서관을 짓고 카네기 홀을 건립했다. 그는 물리적 인프라를 넘어 지식과 문화라는 정신의 인프라까지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 미국의 혈관을 장악한 자, 존 D. 록펠러 카네기가 미국의 단단한 골격을 만들었다면 록펠러는 그 거대한 몸에 검고 뜨거운 피를 돌게 한 인물이다. 그의 무기는 땅속에서 솟아난 검은 황금, 바로 ‘석유’였다. 그의 유년기는 카네기보다 더 어둡고 축축했다. 떠돌이 약장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그는 일찍부터 돈의 비정함과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두 가지였다. 모든 수입과 지출을 1페니까지 기록하는 회계장부의 철저함과 수입의 10분의 1을 반드시 헌금하는 신앙의 경건함. 이 두 원칙이 훗날 그의 무자비한 사업 방식과 숭고한 자선 활동이라는 모순적인 삶의 두 축이 된다. 록펠러의 천재성은 남들이 ‘기름’이라는 노다지에 홀려 땅을 팔 때 그는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보았다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펜실베이니아에 석유가 터져 나오자 수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시추공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그 도박판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석유 채굴은 예측 불가능한 행운의 게임이지만 일단 채굴된 원유를 정제하고 운송하여 판매하는 것은 ‘반드시 돈이 되는 사업’임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석유 산업의 혈관, 즉 정제와 유통망을 장악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무기는 회계장부였다. 그는 카네기를 능가하는 비용 통제의 화신이었다. 원유 1갤런을 운반하는 데 쓰는 나무통 가격을 2.5달러에서 1달러 미만으로 낮추기 위해 직접 통 제조 공장을 세웠다. 통을 밀봉하는 데 쓰던 40개의 땜납을 39개로 줄여보라고 지시한 일화는 그의 경영 철학을 상징한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작은 차이들이 모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가격 경쟁력의 성벽을 쌓았다. 그는 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휘둘렀다. 바로 ‘유통망 장악’이었다. 당시 유일한 운송 수단이던 철도 회사와 비밀리에 리베이트 계약을 맺어 경쟁사보다 훨씬 싼 값에 석유를 운송했다. 심지어 경쟁사가 지불하는 운송비의 일부까지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국가의 대동맥과도 같은 철도망을 자신의 사적인 무기로 만든 것이다. 경쟁사들은 이유도 모른 채 피를 말리며 고사해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합류가 아니면 파산’이라는 냉혹한 흡수 전략으로 시장을 평정했다.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과 유통망을 무기로 그는 경쟁 정유사들을 차례로 무릎 꿇렸다. 그는 경쟁사의 장부를 샅샅이 보여주며 스탠더드 오일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거부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가격 전쟁을 일으켜 파산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무질서한 경쟁을 ‘죄악’으로 여겼고 독점을 통한 ‘질서’와 ‘안정’이야말로 산업의 발전이라 믿었다. 결국 그는 미국 정유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완성했다. 그의 석유는 등유가 되어 인류의 밤을 밝혔고 가솔린이 되어 자동차 시대를 열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현대 산업을 움직이는 운영 체제(OS) 그 자체였다. 그는 비정한 독점가라는 평생의 멍에를 짊어졌지만 훗날 록펠러 재단을 통해 의학과 교육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하며 부의 의미를 다시 썼다. ◆ AI 시대, 변하지 않는 법칙의 귀환 역사의 거울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카네기의 철과 록펠러의 석유. 이 둘은 2차 산업혁명 시대의 물리적, 에너지적 기반이었다. 오늘날 AI 시대의 철과 석유는 무엇인가. 카네기의 철은 단연코 AI 모델의 두뇌인 ‘반도체’다. 록펠러의 석유는 그 반도체를 깨우는 ‘전력’과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클라우드 인프라’다. 놀랍게도 오늘날 AI 패권 전쟁의 승자들은 150년 전 두 거인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라는 새로운 ‘철’의 생산 방식을 독점하고 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클라우드 서비스라는 ‘석유 유통망’을 장악하고 전 세계 AI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통행세’를 거두고 있다. 이들 모두 반도체 설계부터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모든 것을 장악하는 수직 통합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견고히 쌓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지각 변동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뼈대를 만드는 카네기가 될 것인가, 그 뼈대 속을 흐르는 혈액을 공급하는 록펠러가 될 것인가. 혹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인프라 위에서 살아가는 단순한 소비자에 머무를 것인가. 카네기와 록펠러는 웅변한다. 시대의 본질을 꿰뚫고 그 기반이 되는 인프라를 장악해야만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AI 모델을 가져다 쓰는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만의 반도체를, 우리만의 데이터센터를, 우리만의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술의 급소를 찌르는 혁신, 외부 의존도를 끊는 수직적 장악력, 상대를 질식시키는 원가 통제. 150년 묵은 이 법칙들은 AI 시대에 더욱 서슬 퍼렇게 귀환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운율은 반복된다. 철과 석유의 시대가 남긴 거대한 메아리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준엄한 경고이자 다시없을 기회다. 제2의 카네기, 제2의 록펠러가 될 수 있는 창은 아직 열려 있다. 그 창을 향해 과감히 몸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그저 창밖의 풍경이 변하는 것을 구경만 할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2026-04-27 17: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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