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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다시 3위…세종이 판을 뒤집은 방법
[경제일보] 2025년 국내 대형 로펌의 순위가 바뀌었다. 법무법인 세종은 국세청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 매출 4363억원을 기록하며 광장과 율촌을 앞섰다. 2007년 광장에 자리를 내준 뒤 19년 만에 매출 3위로 돌아왔다. 2021년 말 455명이던 변호사는 2025년 말 603명으로 늘었다. 순위 하나가 바뀐 것보다 그 과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세종은 대형 로펌 경쟁에서 성장 속도가 더딘 곳으로 꼽혔다. 2007년 광장에 밀렸고 2013년에는 율촌에도 뒤졌다. 최근 5년 사이 세종은 조세와 정보통신기술(TMT), 송무와 형사, 공정거래 등 필요한 분야의 사람을 공격적으로 끌어들이며 다시 선두권으로 올라왔다. 1983년 문을 연 세종은 올해로 43년째다. 처음부터 모든 분야를 갖춘 종합로펌은 아니었다. 출발점에는 증권과 금융이 있었고 성장 과정에는 몇 차례 합병이 있었다. 최근의 세종은 여기에 인재 영입이라는 승부수를 더했다. ◆ ‘증권법 1호 박사’가 만든 로펌 세종의 출발에는 신영무 변호사가 있다. 신 변호사는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법복을 벗었다. 미국 예일대 로스쿨에서 증권법을 공부했고 미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 연수와 뉴욕 로펌 근무를 거쳤다. 국내에서 증권법을 전공한 법률가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1980년 귀국한 신 변호사는 남산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1983년 사무실을 광화문 교보빌딩으로 옮기면서 세종합동법률사무소가 출범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김두식 변호사의 성을 더해 영문 이름도 지금의 ‘SHIN & KIM’으로 정착했다. 창업 초기부터 금융과 증권을 주력 분야로 잡았다. 자본시장 개방이 시작되면서 세종은 외국인전용수익증권과 코리아펀드 설립을 자문했다. 삼성전자 해외 전환사채(CB), 삼미종합특수강 해외 신주인수권부사채(BW), 삼성물산 해외 주식예탁증서(DR), 포스코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에도 관여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자본시장으로 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세종은 그 길목에서 금융과 증권을 다룬 경험을 쌓았다. ◆ 창업자 혼자 가져가는 로펌을 만들지 않았다 신영무 변호사가 신경 쓴 것은 사건만이 아니었다. 로펌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운영할지도 중요하게 봤다. 당시 국내 법률사무소 상당수는 창업자의 영향력이 강했고 젊은 변호사가 일정 기간 일한 뒤 독립하는 일도 흔했다. 신 변호사는 미국 로펌에서 경험한 파트너십을 세종에 도입했다. 연공과 성과를 배당에 함께 반영하고 지분을 가진 파트너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 운영 방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세종은 지분 파트너들의 직접 투표로 경영위원을 선출하고 현재 오종한 경영대표를 비롯한 5명의 경영위원이 주요 경영 판단에 참여한다. 한 명의 창업자나 대표에게 경영권을 집중시키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신 변호사는 2013년 세종에서 물러났다. 창업자가 조직을 떠난 뒤에도 로펌 이름과 경영체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개인의 이름으로 시작한 법률사무소를 구성원들이 이어가는 조직으로 바꾸려 했던 초기 선택이 세대교체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 외환위기가 증권·금융 로펌을 바꿨다 1997년 외환위기는 세종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법률시장의 일도 달라졌다. 새로운 투자와 증권 발행보다 부도와 회생, 워크아웃, 채권 회수가 급해졌다. 세종은 대농과 한일합섬, 쌍방울그룹, 미도파, 국제상사, 삼성자동차, 기아자동차, 진로 등 당시 도산 절차를 밟은 기업들의 사건에 관여했다. 대우그룹 워크아웃과 하이닉스·SK글로벌 구조조정에도 참여했다. 금융과 증권을 다루던 변호사들이 부실기업의 채권관계와 구조조정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세종의 기업법무 영역도 M&A와 도산, 기업분쟁으로 넓어졌다. 외환위기가 금융·증권 중심의 로펌을 종합 기업법무 쪽으로 밀어낸 셈이다. 기업의 자금조달 문제와 구조조정, 소송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문만 잘해서는 기업 고객의 문제를 끝까지 맡기 어려웠다. 세종은 2000년대 초 송무를 크게 보강하는 선택을 했다. ◆ 국내 첫 로펌 간 합병…송무를 붙였다 2001년 1월 세종은 열린합동법률사무소와 합쳤다. 열린합동에는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지낸 황상현 당시 부장판사와 이건웅 부장판사 등 법원 출신 변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금융과 기업자문에 강했던 세종에 송무 경험이 많은 변호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국내 법무법인 사이에서 이뤄진 첫 합병으로 알려져 있다. 합병 뒤 세종은 김앤장에 이어 국내 2위권 종합로펌으로 몸집을 키웠다. 제조물 책임 소송 등 대형 송무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2010년에는 세종 출신 변호사들이 설립했던 에버그린을 다시 합쳐 국내외 변호사와 회계사 등 전문인력을 280여명으로 늘렸다. 금융·증권이라는 기존 기반에 송무와 기업분쟁을 붙이는 작업이 계속됐다. 광장도 2001년 한미와 합병하며 기업자문과 송무를 결합했다. 세종은 합병 이후에도 금융·증권을 중심축으로 두고 송무와 기업분쟁을 계속 보강했다. 지금의 세종에는 창립기의 금융·증권과 2000년대 이후 강화한 송무가 함께 남아 있다. 다만 몸집을 키운다고 순위가 계속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 2위권에서 밀려난 뒤 길었던 정체 2000년대 초 세종은 김앤장 다음을 다투는 로펌이었다. 이후 경쟁사들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2007년 광장이 세종을 앞섰고 2013년에는 율촌에도 추월당했다. 기업법무 시장이 M&A와 공정거래, 조세, 노동, 지식재산권, 국제중재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전문인력 확보 경쟁도 거세졌다. 세종은 오랫동안 상위권을 지켰지만 순위에서는 4~5위권에 머물렀다. 금융과 증권이라는 전통적인 강점만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격차를 다시 벌리기 어려웠다. 변화가 빨라진 것은 2021년 오종한 대표변호사가 경영을 맡으면서부터다. 오 대표는 1989년 세종에 입사해 기업분쟁과 M&A를 맡아온 내부 출신 변호사다. 취임 이후 세종은 부족한 분야를 외부 인재 영입으로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2020년 말 434명이던 세종의 변호사는 2025년 말 603명으로 늘었다. 5년 동안 169명이 증가했고 같은 기간 매출은 93% 늘었다. 대형 로펌 가운데서도 빠른 외형 확장이었다. ◆ 사람을 데려와 팀째 키웠다 세종의 최근 성장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영입 방식이다. 유명한 전관 한두 명을 데려오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세와 TMT, 공정거래, 송무·형사처럼 경쟁력이 부족했던 분야에 필요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붙였다. 조세에서는 2022년 백제흠 변호사를 영입한 뒤 인력을 확대했고 송무에는 법원 출신 변호사들을 보강했다. 방송·통신과 개인정보 분야에도 정부와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이 들어왔다. 결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는 영풍·MBK 연합을 대리했고 한미약품과 콜마그룹의 경영권 분쟁에도 참여했다. 아시아나항공과 HDC현대산업개발 사이의 2500억원대 계약금 소송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을 대리해 대법원까지 승소했다. 송무와 기업분쟁에서 존재감이 커졌다. M&A에서도 대형 거래가 늘었다. 알리익스프레스와 신세계그룹의 온라인 플랫폼 합작법인 설립과 아워홈 경영권 지분 매각, 교보생명의 SBI저축은행 인수 등에 참여했다. 2026년 상반기에는 부동산·SOC 법률자문에서도 거래금액과 건수 기준 선두에 올랐다. 외부에서 데려온 인력이 기존 금융·기업자문 조직과 맞물리면서 업무 폭도 넓어졌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의 2026년 평가에서는 금융과 자본시장, 공정거래, 기업자문·M&A, 국제중재, 송무, 노동, 부동산, 조세, TMT 등 11개 분야가 최고등급인 Band 1을 받았다. 김앤장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초기 금융·증권 중심의 로펌에서 여러 분야를 함께 가져가는 조직으로 업무 구성이 달라졌다. ◆ 19년 만의 3위…격차는 39억원 인재 영입은 숫자로도 나타났다. 세종은 2025년 매출 4363억원으로 전년보다 18% 성장했다. 태평양은 4402억원, 광장은 4309억원을 기록했다. 2위 태평양과 세종의 차이는 39억원, 세종과 광장의 차이는 54억원에 불과했다. 세종에는 19년 만의 3위 복귀지만 안심할 만한 격차는 아니다. 한두 건의 대형 M&A나 송무 수임만으로 순서가 바뀔 수 있다. 공격적인 인재 영입으로 몸집을 키운 만큼 새로 들어온 변호사들과 기존 조직을 얼마나 잘 묶느냐도 중요해졌다. 외형 확대 다음 단계의 문제다. 고객 평가에서는 가능성과 한계가 함께 나타난다. 2025년 한국경제·한국사내변호사회 조사에서 세종은 종합평가와 전문성에서 각각 3위, 서비스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M&A·IPO와 금융 일반, 경영자문에서는 2위였고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 조세·관세에서는 3위였다. 1위 김앤장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김앤장의 2025년 추정 매출은 약 1조6000억원이다. 세종을 포함한 2위권 로펌들이 4000억원대에서 치열하게 순위를 다투는 것과는 시장 규모가 다르다. 세종의 경쟁 상대는 당장 김앤장보다 태평양과 광장, 율촌 쪽에 더 가깝다. ◆ 변호사만 늘리는 경쟁은 끝나고 있다 세종도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문제를 풀어야 한다. 오종한 대표는 최근 로펌이 변호사만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회계사와 세무사, 변리사, 컨설턴트 등이 함께 일하는 조직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세종은 방산·국방과 통상 분야에 비변호사 전문가를 늘리고 AI·디지털 경쟁법팀과 통상산업정책센터도 새로 만들었다. AI도 업무 안으로 들어왔다. 세종은 글로벌 법률 AI 서비스 ‘하비’ 사용 계정을 기존 30개에서 100개로 확대하기로 했다. 계약서 검토에 주로 사용하던 AI를 소장과 준비서면 등 송무 업무로 넓히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변호사를 더 뽑는 방식에서 업무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쟁이 옮겨가고 있다. 600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같은 고객을 놓고 경쟁하지 않고 서로 사건을 연결하는 일도 중요하다. 영입한 스타 변호사의 개인 실적이 조직 전체의 실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매출 4000억원대에서 5000억원대로 넘어가려면 인력의 숫자뿐 아니라 협업과 생산성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 오 대표는 2026년 목표로 5000억원을 언급하면서 외형보다 조직의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법률 수요 상당 부분이 현지 로펌으로 흘러가는 한계도 직접 거론했다. 국내에서 몸집을 키우는 것과 해외에서 한국 기업의 사건을 가져오는 것은 또 다른 경쟁이다. ◆ 밀린 순위를 사람으로 되찾았다 세종의 43년에는 앞선 대형 로펌과 다른 굴곡이 있다. 신영무 변호사는 증권법을 들고 로펌을 만들었고 자본시장이 열리자 금융과 증권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기업 구조조정과 도산으로 업무를 넓혔고 송무가 부족해지자 2001년 열린합동과 합쳤다. 그 뒤 경쟁사들이 더 빨리 성장하면서 세종은 2위권에서 밀려났다. 2021년부터는 방향을 바꿨다. 부족한 분야를 하나씩 오래 키우는 대신 필요한 전문가를 외부에서 데려와 기존 조직과 묶었다. 조세와 TMT, 기업송무, 형사, 공정거래에서 사람이 늘자 사건도 따라왔다. 2025년 세종은 19년 만에 다시 3위에 올라섰다. 창업기의 무기는 증권법이었고 최근의 무기는 사람이다. 한 번 밀린 순위를 되찾는 데 19년이 걸렸다. 세종이 다시 치고 올라온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부족한 곳에 사람을 넣었고 그 사람들이 가져온 사건을 조직의 일로 만들었다. 43년 전 금융과 증권에서 시작한 로펌은 이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다시 순위를 올리고 있다.
2026-09-14 0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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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대신 내부 확장…태평양이 종합로펌이 된 방법
[경제일보] 1980년 12월 서울 서소문.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김인섭 변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건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해외 로스쿨이나 외국 로펌 경력은 없었다. 김 변호사가 내세운 목표는 한국 법률시장에서 출발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로펌을 만드는 것이었다. 6년 뒤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배명인 변호사와 이정훈 변호사 등이 합류하면서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가 출범했다. 영문명 ‘BKL(Bae, Kim & Lee)’은 배명인·김인섭·이정훈 세 창업자의 성에서 따왔다. 1987년 법무법인으로 전환했고 1995년 지금의 법무법인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46년이 흐른 현재 태평양은 김앤장에 이어 국내 매출 2위 로펌이다. 2025년 법무법인 매출은 4402억원, 특허법인과 해외법인을 합친 매출은 4702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전년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약 25% 늘었다. 국내 변호사는 지난 6월 기준 628명으로 김앤장 다음으로 많다. 김앤장이 국제금융과 외국 기업 자문에서 출발했고 광장이 서로 다른 두 로펌의 합병으로 기업자문과 송무를 결합했다면 태평양의 길은 달랐다. 국내 송무에서 시작해 기업자문과 M&A를 붙이고 국제중재와 공정거래, 조세, 노동, 기업형사로 영역을 넓혔다. 외부 로펌과의 대형 합병 없이 필요한 분야를 조직 안에서 키워온 것이 태평양 성장사의 한 축이다. ◆ 법정에서 시작한 ‘한국형 로펌’ 창업자 김인섭 변호사는 1963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법조 생활을 시작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냈다. 1980년 법원을 떠나 변호사 개업을 할 때 김 변호사가 구상한 조직은 몇 명의 변호사가 사무실을 함께 쓰는 합동사무소와는 달랐다. 당시 한국 법률시장은 개인 변호사의 송무가 중심이었다.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기업법무 시장도 열리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대형 종합로펌은 막 걸음을 떼던 시기였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법관 경험을 토대로 송무를 맡으면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법률서비스를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로펌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6년 태평양합동법률사무소 출범은 개인사무소에서 조직형 로펌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배명인·김인섭·이정훈을 비롯해 이재식·황의인 변호사 등이 초기 조직을 만들었고 이후 기업법무를 담당할 변호사들이 잇달아 합류했다. 송무에서 시작한 조직에 기업자문과 금융, 지식재산권 분야가 하나씩 붙었다. 태평양이 당시 내세운 말은 ‘한국적인 국제로펌’이었다. 외국 로펌의 운영방식을 그대로 옮겨오는 대신 국내 법률시장과 법조 실무에 뿌리를 두고 국제 업무까지 처리하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김인섭 변호사는 훗날 이를 ‘한국적 국제로펌’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 외환위기, 송무 로펌이 기업 안으로 들어갔다 태평양의 업무가 크게 넓어진 시기는 1990년대 후반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 매각과 구조조정, 워크아웃이 한꺼번에 진행됐다. 기업의 생존 문제가 법률 문제로 이어지면서 송무뿐 아니라 금융과 M&A, 기업회생을 함께 다룰 변호사들이 필요해졌다. 태평양은 기아자동차 파산 처리와 대우그룹 계열사의 워크아웃 등에 참여했다. 법원에서 분쟁을 처리하던 변호사들이 기업의 재무상태와 채권관계, 구조조정 과정까지 들여다보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회생과 M&A 업무 경험도 쌓였다. 1998년에는 서소문을 떠나 강남 테헤란로로 본사를 옮겼다.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모이는 곳으로 로펌의 중심도 이동했다. 태평양이 송무를 중심으로 성장한 법률사무소에서 기업의 거래와 경영 문제까지 다루는 종합로펌으로 몸집을 키우던 때였다. 외환위기는 태평양에 새로운 숙제도 안겼다. 국내 기업을 둘러싼 분쟁의 상대가 외국 기업과 해외 자본으로 넓어지면서 국내 법원만 알아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늘었다. 태평양은 다음 승부처로 국제분쟁을 택했다. ◆ 2002년 국제중재팀 만들고 해외로 태평양은 2002년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국제중재팀을 만들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해외 투자와 수출이 늘면서 계약 분쟁을 해외 중재기관에서 해결하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었다. 국제중재가 지금처럼 대형 로펌의 주요 업무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 2009년에는 현대 측을 대리해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IPIC)에 넘어갔던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를 통해 되찾는 사건에 참여했다. 국제중재팀을 만든 지 7년 만이었다. 기업 간 국제분쟁을 넘어 국가를 상대로 한 투자분쟁으로 업무 범위도 넓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이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2012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약 6조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태평양은 정부 측 대리를 맡았다. 13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은 2025년 원 판정이 취소되면서 한국 정부가 배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결과로 끝났다. 해외 거점도 늘렸다. 2004년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에 사무소를 열었고 이후 상하이와 홍콩, 하노이, 호찌민, 두바이, 싱가포르 등으로 진출했다. 국내 기업이 해외로 이동하는 곳을 따라 법률서비스의 범위도 넓혔다. ◆ 기업의 싸움이 바뀌자 ‘경영권 분쟁’을 따로 떼냈다 기업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단순한 계약 위반이나 손해배상 소송을 넘어 기업 지배권을 두고 주주와 경영진, 국내 기업과 해외 펀드가 맞붙는 사건이 늘었다. 태평양이 일찍부터 공을 들인 분야 가운데 하나가 경영권 분쟁이다. 2000년대 초 SK그룹과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분쟁에서 태평양은 SK 측을 대리했다. 소버린이 최태원 회장을 이사회에서 밀어내기 위해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고 법원에 소집 허가까지 신청하자 태평양은 SK 측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법원이 소버린의 신청을 기각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SK 측에 유리하게 끝났다. 태평양은 2012년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별도의 경영권 분쟁팀을 만들었다. M&A 변호사와 송무 변호사를 한 조직에 모아 주주총회와 이사회, 가처분, 공개매수 등 경영권 싸움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도 참여하며 이 분야를 주요 업무로 이어가고 있다. 경영권 분쟁은 태평양의 출발점이었던 송무와 이후 키운 기업자문이 만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회사법과 자본시장법을 알아야 하고 주주총회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도 대응해야 한다. 태평양이 오랫동안 두 분야를 함께 키운 효과가 드러나는 시장이다. ◆ 로펌도 회사처럼 운영했다 업무 분야만 넓힌 것은 아니었다. 조직 운영에서도 몇 차례 변화를 먼저 시도했다. 2007년에는 국내 대형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법무법인(유한)으로 조직을 바꿨다. 법무법인(유한)은 구성원 변호사의 책임을 일정 범위로 제한하고 규모가 커진 로펌을 조직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든 형태다. 변호사 개인의 사무실을 크게 만든 수준에서 벗어나 수백 명의 전문가가 일하는 조직에 맞는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려는 선택이었다. 공익활동도 조직 안에 넣었다. 2001년 공익활동위원회를 만들었고 2009년에는 공익법률지원 활동을 전담하는 재단법인 동천을 설립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태평양이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 프로보노 조직을 만든 뒤 별도 공익재단까지 설립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2020년에는 22년간 머물던 강남을 떠나 종로 센트로폴리스로 본사를 옮겼다. 당시 약 650명의 전문가를 포함해 1300여 명이 여러 건물에 나뉘어 근무하던 조직을 한 건물에 모았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와 금융기관, 법원 등과의 접근성을 고려한 이전이었다. ◆ 송무와 자문을 함께 키운 46년 태평양의 현재 업무를 보면 처음부터 키워온 송무와 이후 확대한 기업자문이 함께 남아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태평양의 기업·M&A와 송무, 조세, 공정거래 등을 국내 주요 분야로 평가하고 있다. 기업·M&A에는 200명이 넘는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다. 최근 대형 사건도 한 분야에 몰리지 않는다. 론스타 ISDS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아일리아 특허 분쟁,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한전KPS 중대재해 사건 등을 맡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형사재판에도 김앤장과 함께 참여해 대법원 무죄 확정까지 변론했다. 실적도 회복됐다. 태평양의 2025년 법무법인 매출은 4402억원으로 2024년 3918억원보다 12.4% 늘었다. 김앤장을 제외한 법무법인 가운데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며 6년 만에 2위로 올라섰고 올해 상반기 성장률도 약 25%로 주요 대형 로펌 가운데 가장 높았다. 현재 업무집행대표는 이준기 변호사가 맡고 있다. 1996년 태평양에 입사한 이 대표는 M&A와 해외투자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고 삼성·한화 빅딜과 금호타이어 인수 등 대형 거래를 자문했다. 외부에서 경영자를 데려오기보다 조직 안에서 성장한 변호사가 경영을 맡고 있다는 것도 태평양의 세대교체를 보여준다. ◆ 2위 탈환했지만 격차는 사라졌다 매출 2위 복귀만으로 앞으로의 경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2025년 태평양 매출은 4402억원이었지만 세종은 4363억원, 광장은 4309억원이었다. 2위부터 4위까지 불과 93억원 안에 들어와 있다. 한두 건의 대형 사건이나 인재 이동으로 순서가 달라질 수 있는 격차다. 기업 고객의 평가에서도 태평양이 모든 분야를 앞서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태평양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 평가에서 각각 4위를 기록했다.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 조세·관세, 금융 등 주요 분야에서도 4위권이었다. 세종은 최근 공격적인 인재 영입을 바탕으로 매출을 빠르게 늘렸고 광장과 율촌 역시 M&A와 송무, 규제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대형 로펌 사이의 변호사 이동도 잦아졌다. 태평양이 2025년 되찾은 2위 자리를 지키려면 과거에 쌓은 송무 경쟁력과 최근 확대하는 기업자문을 동시에 끌고 가야 한다. 태평양도 사람을 늘리고 있다. 지난 6월 국내 변호사는 628명으로 1년 전보다 41명 증가해 주요 대형 로펌 가운데 증가 폭이 가장 컸다. AI와 디지털금융, 공급망, 통상, 중대재해 등 새로운 규제 분야에도 별도 조직을 두고 있다. ◆ 국내 법정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넜다 태평양의 출발점에는 국제금융 계약서도, 두 대형 로펌의 합병도 없었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가 1980년 서소문에 연 작은 법률사무소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송무를 했다. 기업이 커지자 기업자문과 금융, M&A를 붙였고 외환위기가 터지자 구조조정 업무를 키웠다. 국내 기업의 분쟁이 해외로 넘어가자 국제중재팀을 만들었고 기업 경영권을 둘러싼 싸움이 늘자 경영권 분쟁팀을 따로 꾸렸다. 그 과정에서 다른 대형 로펌을 합병하거나 조직을 나눠 새 로펌을 만드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필요한 분야를 내부에서 만들고 사람을 영입해 조직 안에 쌓았다. 1980년 김인섭 변호사가 말했던 ‘한국적인 국제로펌’도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태평양으로 이어졌다. 법정에서 출발한 로펌은 이제 국제중재와 M&A, 공정거래, 조세, 기업형사를 함께 다룬다. 태평양이 46년 동안 넓혀온 영역이다.
2026-09-11 09: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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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더 큰 수사권 줬다면 통제장치도 함께 세워야
[경제일보] 수사권 조정의 핵심은 권한을 나누는 데 있었다. 검찰에 집중됐던 수사·기소 권한을 분산하고 경찰의 독립적 수사 역량을 키우자는 취지였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권한을 넘긴 만큼 책임과 통제 장치도 함께 세웠느냐다. 최근 제주에서 벌어진 실종사건 허위 종결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제주서부경찰서 실종팀에서 근무한 한 경찰관은 자신이 처리한 실종사건 298건 가운데 27건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11건은 허위 종결로 확인됐다. 실제로 연락하지 않고 소재가 확인된 것처럼 처리하거나, 실종자가 사망했다는 허위 내용을 시스템에 입력해 관리 대상에서 해제한 사례도 드러났다. 기존 허위 종결 사건 당사자 2명은 이후 숨진 채 발견됐다. 다만 이 사건에서 말하는 ‘실종사건 종결’과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행사하는 형사소송법상 ‘불송치 결정’은 같은 제도가 아니다. 전자는 실종신고 관리와 관련된 경찰 업무이고, 후자는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형사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지 않는 절차다. 두 제도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형사사법 개혁과 맞닿는 지점은 분명하다. 경찰의 판단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그 판단을 점검하고 바로잡는 장치도 정교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초기 사건들은 해당 경찰관의 야간 1인 당직 때 처리됐다. 당시 별도의 보고·검토 절차가 있더라도 전산상 실종 해제는 담당자가 직접 할 수 있었다. 경찰은 논란 이후 관리자가 해제 사유와 입력 내용을 다시 확인한 뒤 최종 승인하도록 이중장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인의 일탈로만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은 수사기관이면서 거대한 행정조직이다. 내부 위계와 동료 관계가 강한 조직에서는 부실 판단이나 잘못된 관행이 내부에서 충분히 걸러지지 않을 위험이 존재한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경찰개혁추진단도 제 식구 감싸기, 사건 암장, 무단 종결, 증거 은폐·조작, 수사정보 유출, 개인정보 침해를 ‘6대 폐단’으로 지목했다. 외부 감사 확대와 수사 제척사유 강화, 피해자 설명 책임, 부실 수사의 법적 책임 강화도 대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거치면서 경찰은 일반 형사사건의 1차 수사에서 훨씬 큰 역할을 맡게 됐다. 앞으로 검찰의 직접수사 영역이 더 줄어들수록 경찰 판단의 무게는 커진다. 수사를 시작할지, 더 이어갈지, 불송치할지에 대한 결정 하나가 국민의 권리와 직결된다. 물론 형사사건에는 이미 통제 장치가 있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하면 고소인이나 피해자 등은 이의를 신청할 수 있고, 검사는 위법하거나 부당한 불송치에 대해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충실히 작동하느냐와, 실종사건처럼 형사 불송치 절차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영역의 공백이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경찰에게 권한이 많다’는 데서 멈춰서는 곤란하다. 어떤 판단을 내렸고, 그 판단이 어떻게 기록되며, 누가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지를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사건 종결에는 충분한 이유가 남아야 한다. ‘혐의 없음’이나 ‘소재 확인’ 같은 결과만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자료를 확인했고, 어떤 절차를 거쳤으며, 왜 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남겨야 한다. 특히 실종·성범죄·아동·가정폭력처럼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사건은 종결 기준을 더 엄격하게 둘 필요가 있다. 둘째, 고위험 사건에는 내부 결재를 넘어선 점검 장치가 필요하다. 모든 사건을 외부기관이 다시 심사하는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장기 실종이나 중대한 피해 사건, 담당자 단독 판단 비중이 큰 사건은 일정 비율을 표본 감사하거나 외부위원회가 사후 검증하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셋째, 신고자와 피해자에게 종결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형사사건의 불송치에는 법정 이의신청 절차가 있지만 실종사건 등 다른 경찰 업무에서는 재검토 요구 통로가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가 있다. 사건이 왜 끝났는지 설명하고, 이의가 있을 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다시 판단을 요구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려야 한다. 넷째, 부실 처리의 책임도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 실수와 고의적 은폐는 구분해야 하지만 허위 기록, 사건 암장, 증거 삭제처럼 중대한 행위는 징계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형사책임과 지휘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조직도 긴장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집정관을 두 명으로 두고 임기를 제한한 것도 상호 견제를 제도화하려는 장치였다. 권력은 선의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나온 제도였다. 현대 형사사법 역시 다르지 않다. 좋은 경찰관이 많다는 믿음과 경찰 권한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견제 장치는 경찰을 불신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경찰의 판단을 더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다. 이번 제주 사건을 계기로 ‘성인실종법’ 제정 필요성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일반 성인 실종은 아동·치매환자 등에 적용되는 별도 법률의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어 제도적 공백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실종사건 종결 때 객관적 증빙을 남기고 제3기관이 수사·수색 과정을 점검하는 방안도 논의할 만하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줄였다는 이유로 경찰의 역할 확대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권력분산의 목적은 한 기관의 힘을 다른 기관에 옮겨 싣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의 기본권이 어느 한 조직의 자의적 판단에 좌우되지 않도록 견제와 책임의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경찰개혁은 경찰을 약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정당한 수사는 흔들림 없이 할 수 있게 하고, 잘못된 판단은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신속하게 걸러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검찰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역할을 키웠다면 책임의 기준 역시 달라져야 한다. 사건을 왜 끝냈는지 기록이 남고, 그 판단이 잘못됐을 때 다시 들여다볼 통로가 작동해야 국민도 경찰의 판단을 신뢰한다. 제주 실종사건이 보여준 것은 한 경찰관의 일탈만이 아니다. 담당자의 잘못된 판단을 제때 걸러내지 못한 시스템의 허점이다. 경찰권이 커지는 시대라면 개혁의 다음 순서는 분명하다. 더 많은 권한에 걸맞은 더 촘촘한 책임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2026-09-09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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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한미·송무 광장, 합병으로 만든 종합로펌
[경제일보] 2001년 6월 7일 서울 신라호텔. 기업자문과 금융에 강했던 법무법인 한미와 송무로 이름을 알린 법무법인 광장이 합병을 선언했다. 새 로펌의 이름을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국문 이름은 옛 광장의 ‘법무법인 광장’을 쓰고 영문 이름은 한미가 사용하던 ‘Lee & Ko’를 남겼다. 당시 한미와 광장을 합친 국내외 변호사는 120명을 넘어섰다. 김앤장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규모의 대형 로펌이 등장했다. 기업자문과 금융은 한미가 쌓아온 경험을 가져왔고 송무에는 옛 광장의 강점이 더해졌다. 서로 부족했던 분야를 한 조직 안에 넣으면서 지금의 종합로펌 광장이 출발했다. 광장의 역사를 따라가려면 2001년보다 24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업자문과 송무가 처음부터 한 조직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시장에서 성장한 두 로펌이 자신에게 없던 역량을 상대에게서 찾으면서 2001년 합병으로 이어졌다. ◆ 판사 그만두고 기업들이 있는 도심으로 1977년 이태희 변호사가 서울 중구 소공동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지금 광장의 출발점이다. 이 변호사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 판사를 지냈다.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판사직을 그만두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의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국내로 돌아온 이 변호사는 법원 주변이 아니라 기업들이 몰려 있던 서울 도심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 변호사의 업무는 개인 송사와 재판이 중심이었지만 이 변호사는 기업의 계약과 투자, 해외 거래를 자문하는 서구식 로펌을 염두에 뒀다. 한진그룹과 한국전력, 포항제철, 한국은행, 외환은행 등이 초기 고객으로 이름을 올렸다.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과 국내 기업의 해외 거래도 맡았다. 1981년 고광하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한미합동법률사무소로 확대됐다. 이태희의 ‘Lee’와 고광하의 ‘Ko’를 따 영문 이름을 ‘Lee & Ko’로 정했다. 1985년에는 법무법인 한미로 조직을 바꿨다. 훗날 고 변호사가 독립한 뒤에도 Lee & Ko라는 이름은 남았다. ◆ 기업자문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송무 한미는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일찍부터 송무를 보강했다. 부장판사를 지낸 유경희 변호사가 합류해 송무를 맡았고 기업자문과 금융, 송무, 지식재산권, 보험 등으로 업무를 나눴다. 1990년대에는 변호사가 사건을 받아 혼자 처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업무 분야별 전문팀도 두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이 커지면서 로펌에 들어오는 일도 달라졌다. 외국인 투자와 해외 증권 발행, 금융거래, M&A가 늘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 구조조정 업무가 쏟아졌다. 한미가 강점을 보이던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에는 좋은 시장이었다. 그러나 고객의 분쟁까지 계속 맡으려면 송무 역량을 더 키워야 했다. 기업에 계약과 거래를 자문하다 분쟁이 생기면 대형 송무를 다른 로펌에 맡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자문에서 고객을 확보해도 법정 분쟁까지 이어서 맡는 데 한계가 있었다. 종합로펌으로 커지려면 기업자문과 금융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미가 찾던 것은 강한 송무였다. 그 무렵 옛 광장에는 정반대의 고민이 있었다. ◆ 자문 85% 한미, 송무 70% 광장 옛 광장은 박우동 전 대법관과 권광중 전 사법연수원장 등 법원 출신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송무에서 이름을 쌓았다. 재판 경험과 법원 인력에서는 강했지만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단기간에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기업법무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상황에서 송무만으로 성장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2001년 당시 한미의 업무 가운데 자문 비중은 약 85%였다. 반면 광장은 송무 비중이 약 70%였다. 한미에는 대형 송무가 필요했고 광장에는 기업자문과 국제거래 경험이 필요했다. 두 로펌의 강점과 약점이 정확히 반대쪽에 놓여 있었다. 그해 초 양측 대표들의 만남에서 합병 이야기가 나왔다.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해외 대형 로펌과 경쟁하려면 자문과 송무를 모두 갖춘 규모도 필요했다. 필요한 분야를 처음부터 키우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이미 경험을 축적한 조직과 합치는 길을 택했다. 논의가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두 로펌은 합병을 결정했다. 한미는 광장의 송무를 얻었고 광장은 한미의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얻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출범한 통합 광장은 서로 부족했던 부분을 합쳐 만든 로펌이었다. ◆ 합치는 것보다 어려웠던 한 조직 만들기 합병은 변호사 숫자와 고객 명단을 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건을 가져온 변호사가 계속 사건을 쥐는 대신 업무 성격에 따라 전문부서가 맡도록 했다. 한미와 광장 출신 변호사 사이의 보수와 사건 배분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출신 로펌에 따라 이해가 갈리지 않도록 공통의 기준을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로펌 합병은 일반 기업의 합병과도 차이가 있다. 공장이나 설비보다 사람이 자산인 조직이다. 이름난 변호사가 빠져나가면 사건과 고객도 함께 이동할 수 있다. 합병 뒤 인사와 보수, 사건 배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통합의 성패가 갈린다. 광장은 1999년 한미에서 도입했던 운영위원회 제도를 통합 법인의 경영체제로 이어갔다. 설립자나 대표변호사 한 사람에게 인사와 사건 배분이 몰리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기업자문 중심의 한미와 송무 중심의 광장이 갖고 있던 조직문화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맞춰갔다. 2001년 합병은 부족한 업무 분야를 보완했지만 두 조직을 실제로 하나로 만드는 일은 그 뒤에 시작됐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합병 자체보다 합병 이후의 조직 통합이 더 긴 시간을 차지했다. ◆ 창업자가 지분을 후배에게 넘겼다 세대교체에서도 광장만의 선택이 있었다. 이태희 변호사를 비롯한 1세대 변호사들은 퇴임하면서 로펌 지분을 남겨두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2009년 물러나면서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설립자가 지분과 경영권을 계속 쥐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은 후배 변호사들의 경영 참여로 이어졌다. 어쏘시에이트로 입사한 변호사가 파트너를 거쳐 경영대표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현재 경영을 총괄하는 김상곤 대표변호사 역시 광장에서 경력을 쌓아온 내부 인사다. 개인 사무소에서 출발한 조직이 세대를 거치면서 구성원 중심의 로펌으로 바뀌었다. 2001년 합병이 2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세대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합병계약은 한 번으로 끝났지만 한미와 광장 출신이 따로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창업자의 지분 정리와 운영위원회 중심 경영은 통합을 굳히는 장치가 됐다. 결국 광장은 업무만 합친 것이 아니었다. 기업자문과 송무를 합친 뒤 사람과 지분, 경영방식까지 하나의 조직 안에 다시 배치했다. ◆ M&A와 송무, 지금도 광장의 두 축 합병 당시 두 로펌이 들고 온 강점은 지금도 광장의 주요 업무로 남아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광장의 기업·M&A와 금융, 자본시장, 공정거래 분야 등을 국내 상위권으로 평가했다. 기업·M&A와 공정거래는 국내 ‘Band 1’에 올랐다. 송무 분야에도 약 15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직 대법관과 법관 출신 인력도 다수 포함돼 있다. 최근 실적에서도 M&A의 비중은 크다. 광장은 2025년 SK스페셜티 매각과 아워홈 인수, SK그룹 리밸런싱 거래 등에 참여했다. 프랑스 에어리퀴드의 4조6000억원 규모 DIG에어가스 인수도 자문했다. 2025년 광장의 M&A 분야 매출은 전년보다 30% 이상 늘었다. 2026년 상반기 블룸버그 집계에서도 광장은 국내 M&A 법률자문에서 47건, 42억1600만달러를 기록했다. 거래금액과 건수 모두 김앤장에 이어 2위였다. 1970년대 한미가 시작한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광장의 주요 수익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무와 형사 분야에서도 인력을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법원장과 형사재판장, 영장전담판사 출신 변호사를 잇달아 영입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 사건 1심에서도 변호인단으로 참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옛 광장이 들고 온 송무 역시 통합 법인의 한 축을 맡고 있다. ◆ 익숙했던 2위 자리에도 경쟁 붙었다 광장의 앞길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25년 매출은 4309억원으로 전년 4111억원보다 4.82% 늘었다. 외형은 커졌지만 경쟁 로펌의 성장 속도가 더 빨랐다. 태평양이 4402억원, 세종이 4363억원을 기록하면서 광장은 두 로펌에 뒤졌다. 오랫동안 김앤장 다음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광장에도 새로운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매출 규모뿐 아니라 M&A와 금융, 송무 등 주력 분야에서 대형 로펌 간 인재 영입 경쟁도 거세지고 있다. 기업 고객이 로펌을 고르는 기준도 전문성과 서비스, 비용까지 세분화되고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광장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 평가에서 각각 5위를 기록했다. M&A·IPO는 4위,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도 5위였다. 오랜 업력과 규모만으로 경쟁 로펌을 앞서기 어려워진 시장이다. 반면 2026년 상반기 M&A 실적은 다시 2위로 올라섰다. 공정거래와 자본시장, 국제통상에서도 국제 평가기관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에서 이어진 기업자문과 옛 광장의 송무를 지금의 시장에 맞게 얼마나 다시 키우느냐가 광장이 풀어야 할 문제다. ◆ 부족한 곳을 합쳐 만든 광장 광장에는 지금도 두 로펌의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광장’이고 해외에서는 ‘Lee & Ko’다. 하나는 송무로 성장한 로펌에서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1977년 기업자문으로 출발한 한미에서 이어졌다. 2001년 합병 때 어느 한쪽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이름만 나눠 가진 것도 아니다. 한미는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가져왔고 광장은 송무 경험을 보탰다. 합병 뒤에는 사건 배분과 보수 체계를 맞췄고 창업자들이 물러나면서 지분과 경영권도 후배들에게 넘겼다. 광장은 처음부터 모든 분야를 잘했던 로펌이 아니었다. 기업자문에 강했던 조직은 송무가 부족했고 송무에 강했던 조직은 기업자문이 부족했다. 두 로펌은 상대의 강점을 자기 조직 안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택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시작한 합병은 25년이 지나 광장의 기업자문과 송무라는 두 축으로 남았다. 부족한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대신 이미 잘하는 조직과 합쳤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커진 출발점이었다.
2026-09-0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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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상, 2026년 대졸 신입사원 채용…7개 직무 모집 外
[경제일보] 현대해상이 올해 대졸 신입사원 채용을 실시한다고 4일 밝혔다. 지원서는 이날부터 오는 21일 오후 6시까지 현대해상 채용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한다. 모집 직무는 △디지털·데이터분석 △IT·정보보호 △보험계리·수리 △자산운용 △기업보험 △점포영업관리 △손해사정 등 총 7개다. 지원 자격은 대학 학사 학위 졸업자 또는 내년 2월 졸업예정자다. 서류전형과 1차 면접, 최종 면접을 거쳐 선발하며 입사 예정일은 내년 1월 1일이다. 현대해상은 오는 11일과 16일 오전 10시 직무별 현직자와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온라인 채용상담회도 개최한다. 별도 사전 신청 없이 참여할 수 있으며 채용담당자와 현직자가 직무 및 채용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현대해상 채용관계자는"“현대해상은 기업문화 핵심가치인 'HEART'(Honor 정도, Excellence 탁월, Action 실행, Respect 존중, Trust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지향적인 마인드와 책임감을 갖춘 우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며"현대해상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우수한 인재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 신한라이프, 보이스피싱 대응 FDS 고도화…이상거래 실시간 탐지 신한라이프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기존 시스템을 고도화한 신규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구축했다고 4일 밝혔다. 이번 시스템은 로그인부터 지급 신청까지 주요 거래 과정에서 고객의 접속·거래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이상거래 여부를 판단한다. 탐지 결과에 따라 △추가 인증 △실시간 거래 제한 △고객 응대 △SMS 안내 등 단계별 대응 절차도 적용한다. 신한라이프는 지난 3월부터 약 5개월간 보이스피싱 대응 체계를 고도화해 왔다. 최근 금융회사와 통신사, 수사기관 등이 보유한 보이스피싱 의심정보를 공유·활용하는 체계가 본격 가동된 데 맞춰 시스템을 구축했다. 통합 모니터링 기능과 시각화된 관리 화면도 적용해 이상거래 탐지부터 대응까지 전 과정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보이스피싱 수법 변화에 맞춰 탐지 시나리오를 추가하거나 조정할 수 있도록 해 새로운 금융사고 유형에도 대응할 수 있게 했다. 신한금융그룹의 보이스피싱 공동대응 체계와도 연계했다. 그룹사 간 공유되는 보이스피싱 의심정보를 FDS에서 활용해 이상거래 탐지와 대응을 강화한다. 신한라이프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갈수록 다양하고 지능화되면서 이상거래를 빠르게 탐지하고 적시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문 FDS와 그룹사 간 공동대응 체계를 바탕으로 고객의 소중한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고객이 보다 안심하고 보험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 삼성화재, AI 중심 모빌리티 변화 논의…'제4회 Mobility Conference' 개최 삼성화재가 3일 임직원을 대상으로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빌리티 산업 변화를 살펴보고 자동차보험 경쟁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는 '제4회 Mobility Conference'를 개최했다고 4일 밝혔다. 올해로 4회를 맞은 이번 행사는 'Shift the Engine, Move the Future'를 슬로건으로 AI 기술 확산에 따른 모빌리티 변화와 자동차보험의 미래 경쟁력 확보 방안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사내 세션에서는 △AI 기반 업무 혁신 △모빌리티 관련 사업 △자율주행 기술 확산에 따른 보험산업 대응 방향 등을 주제로 발표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보상 프로세스 변화와 신규 사업 기회, 기술 발전에 따른 시장 환경 변화 등을 공유하고 대응 과제를 논의했다. 외부 전문가 세션에서는 김상균 경희대학교 교수가 ‘AI가 다시 쓰는 이동의 법칙’을 주제로 AI 기술이 이동 경험과 자동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소개했다. 새롭게 형성되는 모빌리티 생태계와 보험산업의 대응 과제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AI와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으로 이동 환경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며 "이번 콘퍼런스가 산업 변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026-09-04 17: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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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청 615명 철회, 준비 안 된 개혁의 대가는 국민이 치른다
[경제일보] 중대범죄수사청에 가겠다고 신청했던 검찰 인력 615명이 막판에 지원을 철회했다. 당초 2376명이던 특례임용 신청자는 1761명으로 줄었다. 신청자의 4명 중 1명꼴이다. 중수청 정원 2874명과 비교하면 최종 신청자는 61.3%에 그친다. 철회자 대부분은 검찰 수사관으로 알려졌다. 중수청이 맡을 부패·경제·마약·방위사업·사이버범죄 등은 숙련된 수사 경험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계좌를 추적하고 압수수색 자료를 분석하며 사건 기록을 다뤄온 실무 인력이 출범 직전에 대거 발을 뺀 셈이다. 정부는 경찰과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등을 경력채용하고 공소청 공무원을 상대로 내년 4월 말까지 추가 특례임용을 하겠다고 한다. 중수청은 오는 10월 2일 출범한다. 출범은 10월인데 인력 충원은 내년 4월까지다. 사람을 제대로 채우기도 전에 문부터 열겠다는 얘기다. 1761명도 실제 근무 인원은 아니다. 정부는 근무 희망지와 경력, 전문성 등을 따져 다시 임용 대상을 정한다. 출범 당일 중수청에서 일할 사람은 지금보다 줄어들 수 있다. 숫자를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경험 많은 수사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번 철회 과정만 봐도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검찰 구성원에게 중수청으로 갈지 공소청에 남을지 선택하라고 했지만 철회 시한인 8월 31일까지 공소청 직제는 확정되지 않았다. 어느 기관에서 일할지 결정하라면서 그 기관의 정원과 보직, 근무지, 승진이 어떻게 될지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철회 시한을 앞두고 공소청의 정원 감축 폭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직제안 윤곽이 알려지자 상당수 수사관이 잔류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전해졌다. 중수청과 공소청을 만드는 법은 지난 3월 제정됐다. 시행일도 10월 2일로 정했다. 그런데 중수청의 조직과 정원, 인사 기준을 담은 하위법령은 8월 18일에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출범 45일 전이었다. 형사소송법은 더 늦었다. 검사의 수사 권한을 없애고 보완수사 요구와 재수사 요구 절차를 손질한 개정법은 8월 4일 공포됐다. 시행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때였다. 수십 년간 이어온 수사와 기소의 관계를 바꾸면서 현장에서 적용할 법을 출범 직전에야 확정했다. 형사사건은 간판을 바꾸고 사람을 옮긴다고 그대로 이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건을 누가 맡을지,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은 어떻게 이어갈지, 부족한 수사는 어디에 다시 맡길지, 사건 기록과 증거물은 어떻게 넘길지 하나라도 엇박자가 나면 수사가 늦어진다. 수사가 늦어지면 피해자는 기다려야 한다. 증거가 사라질 수 있고 피의자 신병 확보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구속 사건에서는 하루가 피의자의 신체 자유와 직결된다. 정부 조직 하나를 바꾸는 문제와 차원이 다르다. 검찰 개혁의 명분이 준비 부족을 덮어주지는 못한다. 수사와 기소를 나누겠다고 결정했다면 법과 직제, 인사와 전산, 사건 이관 절차를 먼저 갖춰 놓았어야 한다. 사람을 배치하고 실제 사건을 놓고 문제를 확인한 뒤 문을 여는 것이 순서다. 정부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10월 2일이라는 날짜를 먼저 정해놓고 사람과 조직, 절차를 그날에 맞추고 있다. 출범 한 달을 남겨놓고 인력이 흔들렸고 공소청 직제도 늦어졌다. 부족한 인력은 출범 뒤에도 계속 뽑겠다고 한다. 615명 철회는 우연히 튀어나온 숫자가 아니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선택을 재촉하자 현장의 사람들이 움직인 결과다. 정부가 중수청 출범에 필요한 조건을 먼저 갖췄다면 이런 대규모 철회가 나왔을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10월 2일 이후다. 중수청과 경찰, 공소청 사이에서 사건이 오가고 보완수사가 늦어지면 피해는 곧바로 국민에게 간다. 정부는 조직을 만들었다고 발표하면 끝이지만 피해자는 사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개혁의 성패는 검찰청 간판을 예정된 날짜에 내리는 데 있지 않다. 범죄를 제대로 수사하고 피해자를 제때 보호하는 데 있다. 수사가 늦어지고 사건이 밀린다면 이름을 무엇으로 바꿨든 실패다. 준비가 부족하면 일정을 늦추는 것이 책임 있는 행정이다. 날짜를 지키기 위해 수사기관부터 열고 부족한 사람과 절차를 뒤에서 채우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졸속이다. 정부가 10월 2일 중수청 간판을 다는 데 성공하더라도 수사가 늦어지고 사건이 표류한다면 그 대가는 정부가 치르지 않는다. 사건 당사자와 범죄 피해자, 결국 국민이 치른다. 615명 철회가 보여준 것은 인력 부족만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개혁을 밀어붙였을 때 누가 그 비용을 떠안게 되는지다.
2026-09-02 10: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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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살인사건을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아선 안 된다
[경제일보] 경북 경산에서 벌어진 중국인 여성 유학생 살인 사건은 잔혹하다. 경찰에 따르면 중국인 대학 강사 정모씨는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25세 중국인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경북과 경기 등 여러 곳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허위 실종신고를 하고 여장을 한 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이동하며 수사에 혼선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있다. 경찰 수사에서 혐의가 입증된다면 죄질에 맞는 엄중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건 보도에 붙은 댓글을 보면 정씨보다 중국을 먼저 문제 삼는 글이 적지 않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말부터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뒤 강력범죄가 늘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씨는 단체관광객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국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강사다. 이번 사건을 무비자 입국과 연결하는 것부터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를 따지기도 전에 국적부터 앞세우는 반응이 적지 않다는 점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경제 보복과 한한령, 서해 불법조업, 김치와 한복을 둘러싼 논란, 일부 중국인의 기초질서 위반까지 불만이 쌓여왔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우리 국익과 충돌한다면 비판해야 하고 불법행위에는 법대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중국인 한 사람이 저지른 범죄를 섞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살인 혐의를 받는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중국인 전체의 성향을 말하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반감이 개인의 범죄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23년 체류인구 대비 피의자 비율은 내국인이 2.36%, 중국인이 1.65%였다. 8대 강력범죄에서도 내국인은 인구 대비 약 0.047%, 중국인은 0.031%였다. 중국인 피의자의 절대 숫자가 외국인 가운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많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흉악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정유정은 과외 앱을 통해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했고, 고유정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을 근거로 한국인 전체가 잔혹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범죄자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한국인의 성향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피의자와 피해자의 국적을 함께 놓고 보면 혐중으로 번지는 반응이 얼마나 거친 일반화인지 드러난다. 피의자 정씨만 중국인이 아니다. 살해당한 25세 여성도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댓글 속에서는 정씨의 중국 국적은 크게 남고 피해자의 중국 국적은 사라진다. 같은 나라에서 온 한 사람은 살인과 시체손괴 혐의를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타국에서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을 중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범주에 넣으면 피해자에게까지 범죄자의 그림자를 씌우게 된다. 국적 하나로 피의자와 피해자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보는 것은 어느 나라 여권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느냐다. 정씨가 피해자를 왜 살해했는지, 범행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과정과 범행 뒤 행적이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다. 그 사실을 밝혀 정씨에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형사책임은 행위자에게 묻는다. 가족이라고 대신 처벌하지 않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책임을 나누지도 않는다.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함께 물을 수도 없다. 현실의 중국인은 범죄 기사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업과 공장에서 일하며 한국 사람들과 매일 부딪쳐 살아간다. 중국은 우리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고 양국의 기업과 사람도 경제와 생활 곳곳에서 이미 깊게 얽혀 있다.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중국인의 대부분은 경찰서나 법정이 아니라 학교와 직장, 시장과 거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중국 정부가 잘못하면 중국 정부를 비판하면 되고 중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한국 법으로 처벌하면 된다. 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범죄는 그렇게 나눠서 볼 일이다. 5000만명이 사는 한국에서도 흉악범은 나온다. 인구가 훨씬 많은 중국에서 흉악범이 나왔다고 중국인 전체의 성향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인 한 명이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한국인 전체를 같은 눈으로 본다면 우리도 불쾌할 수밖에 없다. 정씨의 혐의는 정씨에게 물으면 된다. 살인 혐의도,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했다는 혐의도, 수사를 속이려 했다는 혐의도 정씨의 몫이다. 그 범죄 혐의를 중국인 전체의 죄로 돌려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을 일은 아니다.
2026-09-01 08:3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