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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하키 대표팀 절반이 KT…42년 스포츠 육성, 아시안게임서 빛났다
[경제일보] KT가 42년간 이어온 스포츠 지원이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결실을 맺었다. 야구·농구·e스포츠에서 소속 선수들이 금메달을 합작했고, 사격에서는 은메달과 동메달을 보탰다. 여자 하키에서는 대표팀 선수 절반을 배출하며 국가대표 선수층을 뒷받침했다. KT는 이번 대회에 kt sports 소속 선수 18명이 5개 종목의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 획득에 기여했다고 4일 밝혔다. 소속 선수의 국가대표 출전 규모는 2022 항저우 대회 당시 13명보다 5명 늘었다. 종목별로는 kt wiz 3명, kt sonicboom 1명, kt rolster 1명, kt 사격단 3명, kt 하키단 10명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프로 스포츠와 실업 스포츠에서 꾸준히 선수단을 운영해온 성과가 여러 종목에서 나타났다. 가장 많은 선수를 배출한 종목은 여자 하키다. 대표팀 주장 이유리를 비롯한 KT 선수 10명이 출전했다. 전체 대표팀 선수 20명의 절반으로, KT 하키단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배출 규모로도 역대 가장 많다. 이들은 대표팀의 주축으로 뛰며 4강 진출에 힘을 보탰다. 사격에서는 KT 선수 3명이 모두 메달을 획득했다. 박하준은 10m 공기소총 혼성 단체전 은메달과 남자 단체전 동메달을 따냈다. 정승우는 50m 소총 3자세 남자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장국희는 스키트 혼성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국희는 이종준과 함께 스키트 혼성 단체전 결선에서 51점을 기록, 중국에 1점 차로 뒤져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사격이 아시안게임 이 종목에서 거둔 첫 메달이다. 2024 파리올림픽 공기소총 혼성 은메달리스트인 박하준도 이번 대회에서 메달 2개를 추가하며 국제무대 경쟁력을 이어갔다. 야구에서는 소형준·오원석·박영현이 한국의 아시안게임 5회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한국은 지난달 27일 결승에서 일본을 3-1로 꺾었다. 남자 농구에서는 문정현이 대표팀과 함께 금메달을 차지했다. e스포츠에서는 kt rolster의 연제길이 대전 격투 단체전 첫 금메달을 합작했다. 배재민·이광노·연제길로 구성된 한국 대표팀은 지난달 26일 결승에서 일본을 5-2로 제압했다. 연제길은 ‘스트리트 파이터 6’ 경기에서 승리를 보태며 우승에 힘을 실었다. 이번 성과의 기반은 장기간 이어온 선수단 운영이다. KT의 스포츠 지원은 1984년 여자 하키단, 1985년 사격단 창단으로 출발했다. 이후 지원 범위를 넓혀 현재 야구·농구·e스포츠를 포함한 5개 종목의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다. kt sports 공식 연혁에 따르면 e스포츠 팀은 1999년 창단됐고, 야구단은 2013년 출범해 2015년부터 KBO리그 1군에 참가했다. 사격단은 앞서 2012 런던올림픽에서 진종오의 금메달 2개를 배출했다. 이번 아시안게임 성적은 국제대회가 열릴 때마다 축적된 선수 육성 역량이 드러난 사례다. 특히 하키와 사격에서 실업팀을 유지하는 것은 선수들이 졸업 이후에도 훈련과 대회 출전을 이어갈 기반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자 하키 대표팀 절반이 한 실업팀에서 나온 이번 대회는 기업의 지속적인 선수단 운영이 국가대표 경쟁력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선주 kt sports 대표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국제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선수들이 자랑스럽다”며 “42년간 다양한 종목과 선수들을 지원해 온 노력이 이번 대회를 통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KT그룹은 앞으로도 다양한 스포츠 종목의 경쟁력과 선수 육성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2026-10-04 11: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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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강원도, 서민금융 복합지원 협약…강원센터 구축 추진
[경제일보] 금융위원회가 강원특별자치도, 서민금융진흥원, 신용회복위원회와 지역 밀착형 서민금융 복합지원 체계를 구축한다. 강원 지역 취약계층이 금융·고용·복지 서비스를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전담 센터와 찾아가는 상담을 확대한다. 4일 금융위에 따르면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에서 △우상호 강원특별자치도지사 △김은경 서민금융진흥원장 겸 신용회복위원장 △정상혁 신한은행장과 '지역 밀착형 복합지원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금융위가 추진 중인 지역별 복합지원 협업체계의 하나다. 부산과 광주, 전북에 이어 네 번째 지역 협약이다. 금융위는 지난 2024년부터 서민·취약계층을 위한 금융·고용·복지 복합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과다 부채와 고금리 등 금융 문제가 실업, 생활고와 맞물려 있는 만큼 정책서민금융 공급뿐 아니라 고용·복지 연계가 함께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전국 52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는 기관별로 흩어져 있던 △금융 △고용 △복지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안내·연계하고 있다. 복합지원 도입 이후 지난 6월까지 금융에서 고용·복지 등 유관 서비스로 연계된 건수는 누적 약 32만건이다. 지방 거주 취약계층은 센터 접근성에 한계가 있었다. 서울에는 6개 센터가 운영 중이지만 면적이 서울의 30배인 강원 지역에는 4개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강원 인구 비중은 서울의 약 16%지만 복합지원 연계자 수는 서울의 10% 수준이다. 협약기관은 강원 지역 안에 '강원 서민금융 복합지원센터'를 구축·운영한다. 센터에는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 민간 금융사 등이 입주해 정책서민금융과 채무조정, 고용·복지 상담, 민간 금융상담을 함께 제공한다. 정책서민금융 상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차주는 민간 금융사 상담으로 바로 연결된다. 제도권 금융 이용이 어려운 취약차주는 정책서민금융으로 연계된다. 지역 맞춤형 금융상품도 마련한다. 협약기관은 복합지원 이용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금리 우대 등 특화 적금·대출 상품 출시를 추진한다. 상환의지가 있는 지역 금융 취약계층이 제도권 금융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취지다. 찾아가는 복합지원 상담도 활성화한다. 협약기관은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방문이 어려운 강원 지역민을 대상으로 현장 상담을 제공하고 서민금융과 고용, 복지 서비스를 연계한다. 기관 간 상담 역량도 높인다.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와 행정복지센터가 서로 상대 기관을 방문해 상담직원 교육을 진행하고 강원 지역 밀착형 복합지원 정책 홍보도 함께 추진한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균형 발전은 선택이나 시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존과 지속 성장을 위한 필수 전략"이라며 "금융위원회도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국민 누구나 복합지원의 혜택을 온전히, 더 세심하게 누리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26-09-04 14: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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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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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AI의 돈은 어디서 왔나
[경제일보]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지난 12일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부총리에 오른 뒤 경제정책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국유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세제를 개편했으며 금융권의 부실을 털어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밀어 올린 개혁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규모 실업과 지방재정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룽지를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중국 경제의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막대한 돈을 장기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의 자금 동원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개혁과 만나게 된다. 원문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연원을 추적하면서 분세제와 국유기업·금융 개혁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분세제(分税制) 개혁 전까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1993년 중앙정부가 가져가는 재정수입은 전체의 22%에 그쳤다. 지방이 세금의 대부분을 거둬 쓰면서 중앙정부는 전국 단위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일 돈이 부족했다. 주룽지는 중앙세와 지방세를 다시 나누고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75%를 중앙 몫으로 돌렸다. 이듬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은 55.7%로 뛰었다. 중앙정부의 곳간이 커지자 경제를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지역별 이해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산업정책을 펼칠 재정 능력이 생겼다. 중앙의 재정력이 커진 만큼 지방정부가 짊어진 부담도 늘었다. 세입은 중앙으로 넘어갔는데 교육·의료를 비롯해 지방이 맡아야 할 지출은 그대로 남은 분야가 많았다. 세계은행도 1994년 개혁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반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정 불균형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지방정부는 부족한 돈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토지와 부동산 개발에 기대고 각종 예산외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뒤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짓누르는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를 1994년 개혁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방정부의 재정 운용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힘을 얻는 동안 지방에서는 다른 문제가 자라난 셈이다. 주룽지의 개혁은 재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좡다팡샤오(抓大放小)’ 정책 아래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정리하고 대형 국유기업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은 혹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유기업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비효율을 걷어낸 대가를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은행도 바꿨다. 지방정부의 영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자금 배분 권한을 중앙으로 가져오고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세금을 중앙으로 모으고 금융의 돈줄도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특정 반도체 기업이나 AI 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런 개혁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가 만든 것은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분야에 장기간 돈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었다. 그 힘이 20여 년 뒤 반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2014년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반도체 대기금’을 만들었다. 2019년 2기에 이어 2024년에는 등록자본 3440억 위안 규모의 3기 펀드가 출범했다. 중국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했고 공상은행·건설은행·농업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 등 대형 국유은행도 자금을 댔다. 1기 1387억 위안, 2기 2040억 위안에 이어 국가 차원의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서는 이런 힘이 무섭다.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투자를 끊지 않고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10년 이상 돈을 넣을 수 있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부와 국유금융기관이 떠받친다. 지방정부들도 토지와 보조금, 투자기금을 들고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중앙정부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원문에서 CXMT와 YMTC, SMIC 등의 성장 과정에 지방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도 뒤따랐다.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면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지역까지 공장 건설에 나섰고 부실과 중복투자가 생겼다.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는 기술 사기와 파산 사례까지 나왔다. AI에서도 각 지역이 데이터센터와 지능형 컴퓨팅 시설 유치 경쟁에 나서면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손실까지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룽지 시대와 지금의 중국은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값싼 노동력과 빠른 성장, 해외 자본 유입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 규제에도 맞서야 한다. 돈을 모아 한 산업에 집중하는 방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었다. 과거에 효과를 냈던 국가 주도의 투자 방식이 앞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경험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업과 공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규모와 체제는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재정과 금융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원문이 중국 산업정책의 흐름을 한국의 반도체·AI·제조업 전략과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져올 것은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처럼 오랫동안 돈이 들어가는 산업에 자금이 끊기지 않게 할 제도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비슷한 사업에 돈을 붓는 일은 없는지, 기술도 없는 사업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실패가 확인된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지원금은 산업을 키우는 돈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돈으로 바뀐다.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 정부가 국가의 돈을 모으고 움직이는 방식을 바꿨다. 그 힘은 제조업 성장과 반도체 투자에 밑천이 됐지만 지방부채와 부동산 의존, 과잉투자라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국가가 산업을 키운 성공 사례만 보고 투자 규모부터 따라갈 일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에 국가의 미래를 건 한국이라면 중국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도 봐야 한다. 산업정책의 실력은 예산을 크게 잡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투자할 곳과 그만둘 곳을 제대로 가려내는 데서 드러난다.
2026-08-14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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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사장님'…자영업 과잉의 한국경제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자영업자가 많다는 점이다. 골목마다 음식점과 카페, 편의점, 미용실, 학원, 배달·운송 사업자가 몰려 있다. 외형상으로는 창업 열기가 강한 사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양질의 일자리 부족, 조기 퇴직, 재취업 시장의 한계, 사회안전망의 빈틈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계청의 2025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비임금근로 및 비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비임금근로자는 655만4000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22.6%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143만5000명,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424만1000명이었다. 비임금근로자는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를 함께 포함하는 개념이다.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의 자영업 비중은 주요 선진국보다 높은 편으로 분류된다. 다만 국가별 통계는 단순 비교에 주의가 필요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영업률은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지만, 국가마다 법인화된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 처리 방식이 다를 수 있다. 세계은행의 국제노동기구(ILO) 모델 추정치도 고용주, 자기계정근로자, 생산자협동조합원, 무급가족종사자 등을 자영업 범주에 포함한다. 그럼에도 큰 흐름은 분명하다. 한국은 자영업자만 따로 봐도 20% 안팎, 무급가족종사자를 포함한 비임금근로자 기준으로는 20%대 초반 수준이다. 반면 미국은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 자릿수 중후반에서 10% 안팎으로 집계되고, 독일과 일본도 대체로 10% 안팎으로 한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높은 자영업 비중은 단순한 개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노동시장 구조가 만들어낸 현상에 가깝다. 경제가 고도화될수록 영세 자영업 비중은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전문 서비스 기업이 구매력과 물류, 마케팅, 디지털 시스템을 앞세워 개인 점포를 대체하거나 흡수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더 낮은 가격과 표준화된 서비스를 선택하고 근로자는 사업 위험을 직접 부담하는 자영업보다 안정적인 임금근로를 선호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에서 자영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임금근로자가 의료보험, 연금, 유급휴가, 실업보험 등 각종 제도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실직하더라도 실업급여와 재취업 지원을 통해 일정 기간 버틸 수 있다. 약국, 슈퍼마켓, 식당, 자동차 정비, 요양 서비스 등 생활 서비스의 상당 부분도 대형 체인과 기업 중심으로 운영된다. 개인이 점포를 열어 생계를 해결해야 할 압력이 한국보다 낮은 셈이다. 창업과 유지 비용도 차이가 있다. 미국과 유럽은 건축·소방·위생 규정, 장애인 편의시설 기준, 노동법 준수 부담이 크다. 진입 장벽이 높은 만큼 무리한 생계형 창업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다만 유럽도 국가별 차이는 크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는 가족 사업과 관광·소매 서비스 비중이 커 북유럽이나 독일보다 자영업 비중이 높은 편이다. 한국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압축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빠르게 이동했지만 기업 일자리가 이를 모두 흡수하지 못했다. 제조업과 대기업은 성장했지만 직접 고용의 폭은 제한적이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복지 격차도 커졌다. 안정적인 일자리에 진입하지 못한 인력은 소규모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개인서비스업으로 흘러갔다. 조기 퇴직과 늦은 실질 은퇴도 한국 자영업 구조를 키운 요인이다. 50대 전후로 주된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지만 경력을 살릴 재취업 시장은 충분하지 않다.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공백이 발생하고 퇴직금은 생계형 창업의 초기 자금으로 쓰인다. 음식점, 카페, 편의점, 프랜차이즈, 배달·운송업 등은 비교적 진입이 쉽지만, 같은 업종에 창업자가 몰리면서 과당경쟁이 반복된다. 자영업은 한국 경제에서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다. 기업과 노동시장이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인력을 받아들이고, 퇴직 이후 소득 공백을 메우는 제2의 노동시장 기능을 해온 것이다. 문제는 이 완충지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비 증가보다 점포 수가 빠르게 늘면 매출은 나뉘고, 임대료와 인건비, 원재료비, 플랫폼 수수료 부담은 커진다. 결국 상당수 자영업자는 ‘사장’이라는 이름과 달리 장시간 노동과 낮은 수익성에 노출된다. 동아시아 국가와 비교해도 한국의 구조는 독특하다. 일본은 장기고용 문화와 정년 후 재고용 제도, 대형 유통망 발달로 한국보다 자영업 비중이 낮은 편이다. 중국은 농업 인구와 비공식 경제, 플랫폼 노동 비중이 커 자영업률이 높게 나타날 수 있지만, 이는 OECD 회원국 중심의 선진국 비교와는 별도로 봐야 한다. 대만은 중소기업과 소규모 제조업 생태계가 발달해 자영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으로 평가되지만, 공식 통계 기준을 따로 확인해 비교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자영업 문제를 창업 지원만으로 풀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창업 교육과 금융 지원이 필요하더라도 이미 포화된 업종에 더 많은 창업자를 밀어 넣는 방식은 한계가 크다는 것이다. 핵심은 양질의 임금 일자리 확대, 중장년 재취업 시장 개선, 직업훈련 강화, 실업·연금 안전망 보완으로 꼽힌다. 한 노동시장 전문가는 “한국의 높은 자영업 비중은 창업 정신이 강해서라기보다 노동시장이 충분한 선택지를 제공하지 못한 결과에 가깝다”며 “자영업자는 경제 활력의 한 축이지만, 동시에 임금 노동시장이 흡수하지 못한 인력이 스스로 위험을 떠안는 구조의 반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영업 대책은 소상공인 지원 정책인 동시에 고용·복지·은퇴 정책이어야 한다”며 “창업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와 재취업 기회, 실업·연금 안전망을 넓히는 것이 근본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2026-08-0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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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쉬고, 노인은 일한다… 뒤집힌 노동시장의 경고
한 사회의 미래는 노동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일할 사람은 일하지 못하고, 쉬어야 할 사람은 생계를 위해 일터를 떠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구조적 병에 걸린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업 문턱 앞에서 좌절한 채 구직을 포기하고, 환갑과 칠순을 넘긴 노년층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벽부터 경비실과 청소 현장, 배달과 단순노무 일자리로 향하고 있다. 청년은 쉬고 노인은 일하는 기이한 풍경은 우리 노동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거다. 표면적으로는 고용률이 유지되고 실업률도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 청년층에서는 '쉬었음' 인구와 니트(NEET)족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다 지쳐 아예 노동시장을 떠나는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고령층 고용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생산성이 높은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난 결과가 아니다. 부족한 연금과 불안한 노후를 메우기 위한 생계형 노동이 대부분이다. 숫자는 좋아졌지만 내용은 오히려 악화된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경기 침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 노동시장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중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가 맞물린 결과다. 청년들이 원하는 대기업과 공공기관, 정보기술(IT)·첨단산업 분야의 일자리는 제한적인 반면,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다. 임금과 복지, 승진 기회에서 큰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중소기업 취업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고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청년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자신의 역량을 펼칠 무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사람은 넘치는데 일할 사람은 없다는 모순은 노동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결국 청년들은 취업 준비 기간만 길어지고, 사회 진출은 늦어지며, 결혼과 출산까지 미루게 된다. 노동시장의 문제가 인구 감소와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반면 고령층의 현실은 더욱 절박하다. 기대수명은 길어졌지만 노후 준비는 충분하지 못하다. 국민연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고 퇴직금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은퇴 이후에도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 단순노무직이다. 경비원, 청소원, 공공근로 등 이른바 생계형 일자리가 고령층 고용 증가를 떠받치고 있다. 이는 고령자의 경험과 전문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낭비이기도 하다. 이제 노동시장 개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도전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산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 혁신과 기업 투자 활성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성장 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과도한 임금과 복지 격차를 줄이고,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를 확대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첫 직장의 선택이 평생의 소득과 계층을 결정하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청년들에게 도전만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정년 연장 논의 역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고령화 시대에 일정한 정년 연장은 불가피한 흐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정년만 늘리는 방식은 청년 고용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해법은 세대 간 일자리 나누기에 있다.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 직무급제를 함께 도입하고 고령 근로자의 숙련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적합 직무를 확대해야 한다. 절감된 인건비는 청년 신규 채용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고령자의 안정적인 고용과 청년의 새로운 기회는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추구해야 할 과제다. 공자는 "정치는 백성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고,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생긴다"고 했다. 안정된 일자리는 개인의 생계를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지금처럼 청년은 미래를 잃고 노인은 노후를 잃는 노동시장을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 노동계와 경영계는 더 이상 기득권 수호와 이해관계만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청년에게는 희망을, 장년에게는 존엄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만들어야 한다. 세대가 서로의 일자리를 빼앗는 구조가 아니라 경험과 혁신이 공존하는 노동시장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초고령 사회를 앞둔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시대적 과제다. 노동개혁의 골든타임은 결코 길지 않다.
2026-07-19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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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1550원 시대, 시장은 정부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의 체력을 묻고 있다
[경제일보] 외환당국이 50조원이 넘는 외환시장 안정 자금을 투입하며 방어에 나섰음에도 원·달러 환율이 끝내 1550원을 돌파했다. 정부는 "과도한 쏠림 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시장은 이미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환율은 정부의 의지를 반영하는 숫자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체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아무리 많은 달러를 시장에 풀어도 경제의 기초 체력이 흔들리면 환율은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이번 환율 급등은 단순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아니라 우리 경제 전반에 누적된 구조적 불안이 한꺼번에 분출되고 있다는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환율 상승이 일시적인 외부 충격에만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국채 급증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있으며, 달러 강세는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국내 증시는 성장 동력을 잃은 채 외국인 자금 이탈이 이어지고 있고, 수출 증가세마저 둔화되면서 원화 가치는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외부 악재와 내부 취약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위기인 것이다. 정부는 시장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동원하고 있다. 물론 급격한 환율 변동을 완화하기 위한 시장 개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응급처치일 뿐이다. 병의 원인을 치료하지 않은 채 해열제만 반복해서 투여하는 방식으로는 경제를 정상 궤도로 되돌릴 수 없다. 시장은 외환보유액 규모보다 국가 경제의 성장성과 재정 건전성, 그리고 정책의 신뢰를 더욱 냉정하게 평가한다. 더 큰 문제는 국내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는 금리와 환율이 동시에 상승하는 상황에서 금융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이는 다시 소비자 물가와 금리를 자극한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의 이자 부담은 급증하고 소비는 위축된다. 소비 둔화는 기업 투자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성장률 하락과 실업 증가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환율 문제는 외환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활과 국가 경제 전반을 뒤흔드는 복합 위기인 것이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시장 개입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투자자들이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신뢰할 수 있도록 경제의 기초 체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생산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구조개혁에 속도를 내야 한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첨단산업과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산업정책도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장기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시급하다. 가계부채 관리 역시 보다 정교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대출 억제와 규제 강화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투기성 부채는 철저히 관리하고,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계층의 상환 능력을 지원하는 맞춤형 대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부동산 정책과 금융 정책, 통화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정책 간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는 외환위기가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은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임시방편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렀다. 1997년 외환위기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의 환율 급등 역시 또 하나의 경고장일 수 있다. 시장은 정부의 발표보다 행동을, 구호보다 정책의 일관성을, 단기 처방보다 국가의 경쟁력을 보고 있다. 환율 155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 경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정한 성적표다. 외환시장 방어라는 미봉책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 체질을 근본부터 바꾸는 개혁에 나설 것인가는 이제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가 경제는 의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신뢰로 지탱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장을 향한 안심 메시지가 아니라, 국민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다.
2026-07-01 15: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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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의 정면충돌, 사회적 대타협이 시급하다
[경제일보] 정년 65세 논의가 다시 국회와 노사정의 의제로 올라왔다. 더불어민주당 정년연장특별위원회는 현행 60세인 법정 정년을 2029년부터 단계적으로 올려 2037년 65세에 이르게 하는 방안과 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함께 검토하고 있다. 아직 최종 합의안은 아니다. 그러나 정년과 연금 수급 연령의 간극을 더는 방치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는 사회적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현행 법정 정년은 60세 이상이다. 반면 1969년 이후 출생자는 65세부터 국민연금 노령연금을 받는다. 직장을 떠난 뒤 연금이 나오기까지 5년을 견뎌야 하는 세대가 생겼다는 뜻이다. 퇴직금과 개인연금으로 메우라는 식으로 넘길 수 있는 간격이 아니다. 주택담보대출과 자녀 지원, 부모 부양을 거친 뒤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세대에게 60세 이후의 소득 단절은 생활 자체를 흔드는 변수다.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기존 일자리의 혜택을 더 누리려는 집단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생산현장과 기술직, 영업과 관리 업무에는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숙련이 있다. 인구 감소로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건강과 능력이 있는 근로자를 나이만으로 노동시장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도 한계에 닿고 있다. 고령층의 계속고용은 노후소득 보장과 인력 활용이라는 두 과제를 함께 안고 있다. 청년층이 바라보는 현실은 다르다. 대기업과 공공기관, 금융회사 등 안정된 일자리의 채용문은 좁아졌다. 공개채용은 줄고 경력직 중심 채용은 늘었다. 학업을 마친 뒤 첫 직장을 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취업준비와 단기 일자리를 오가는 청년도 많다. 지난 5월 청년층 고용률은 43.8%로 1년 전보다 2.4%포인트 낮아졌고, 실업률은 7.2%로 0.6%포인트 높아졌다. 청년에게 정년 연장은 자신의 취업 순서가 더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소식으로 들릴 만하다. 세대 갈등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60세 정년 의무화의 영향을 분석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는 민간기업에서 정년 연장의 혜택을 받는 고령 근로자가 1명 늘 때 청년 고용이 약 0.2명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대규모 사업장과 고용보호가 강한 업종, 기존 정년이 낮았던 사업체에서 그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났다. 기업이 인건비와 정원을 조정할 때 해고 대신 신규 채용을 줄이는 선택을 한다면, 정년 연장은 청년에게 채용 감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고령층의 일자리를 줄여 청년 채용을 늘리자는 결론도 현실성이 없다. 업종에 따라 고령 근로자의 경험과 청년의 기술 적응력이 결합할 때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다.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에는 숙련 인력의 계속고용이 경영의 숨통을 틔울 수도 있다. 공공부문에서 청년 의무고용과 임금 조정을 병행한 경우에는 고령층 고용 증가가 청년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정년 연장 자체보다 이를 어떤 조건 아래 시행하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이다. 정년 65세를 추진하려면 청년 채용을 함께 보장하는 약속이 필요하다. 정년 연장의 혜택이 큰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단계별 청년 신규채용 계획을 노사 협의에 담고, 그 이행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고령 근로자의 계속고용을 지원하는 세제와 재정 지원도 청년 채용 유지, 직무훈련 확대, 인턴의 정규직 전환과 연동할 필요가 있다. 정년은 연장됐는데 청년 채용은 줄어드는 상황을 막을 장치가 있어야 한다. 임금체계 개편도 피할 수 없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연공급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정년만 늘리면 기업은 신규 채용보다 기존 인력 유지에 더 많은 비용을 쓰게 된다. 그렇다고 나이를 이유로 임금을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은 갈등만 키운다. 맡은 일의 난도와 책임, 숙련도와 성과를 반영하는 보상체계로 옮겨 가야 한다. 고령 근로자에게는 기술 전수와 품질 관리, 현장 교육처럼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업무를 맡기고, 청년에게는 새 업무와 승진의 기회를 넓히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중소기업에는 대기업과 같은 처방을 들이밀 수 없다. 인력과 자금 여력이 부족한 사업장에 획일적 정년 연장을 요구하면 조기퇴직과 외주화, 비정규직 확대를 부를 우려가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임금 부담과 직무 전환 비용을 지원하되, 청년 채용과 숙련 전수 프로그램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고령 근로자의 계속고용이 인력난 해소로 이어지는 곳도 있고, 경영 부담으로 작용하는 곳도 있다는 점을 제도에 반영해야 한다. 과도기 대책도 서둘러야 한다. 2037년 65세라는 장기 목표만 내세우고 그 사이 60세 정년을 맞는 세대의 소득 공백을 외면하면 또 다른 불공정이 생긴다. 정년 상향 속도와 재고용 의무 시점,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함께 맞춰야 한다. 제도 전환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는 5년의 소득 공백을 떠안고, 누군가는 그 부담을 피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청년에게 기다리라고만 할 수도 없고, 고령층에게 일터를 비우라고만 할 수도 없다. 정년 연장 논의는 한 세대의 고용을 지키기 위한 법률 개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고령층의 소득 공백을 줄이고 청년의 첫 일자리 기회를 지키며,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임금과 직무 체계를 만드는 일까지 함께 풀어야 한다. 정년 65세를 둘러싼 논쟁의 기준은 퇴직 연령을 몇 살로 높였느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령 근로자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면서도 청년의 출발선이 더 뒤로 밀리지 않았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 조건을 갖춘 합의라야 세대 갈등을 줄이는 제도 개편으로 남을 수 있다.
2026-06-22 09: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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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은 뒷전, 당권만 좇는 여의도의 씁쓸한 자화상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선장과 항해사는 서로 조타기를 잘못 잡았다며 멱살잡이만 하고 있다. 갑판 아래에서는 승객들이 물이 차오르는 공포에 떨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모습이 꼭 그렇다. 6·3 지방선거가 끝난 지 2주가 지났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선거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거의 교훈을 되새기기는커녕 선거 결과를 둘러싼 책임 공방과 당권 투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여의도는 민심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권력을 계산하는 공간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예외가 아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자 지도부를 향한 사퇴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진정 묻고 있는 것은 누가 대표직을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다. 왜 국민이 등을 돌렸는가, 왜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안타깝게도 정치권은 그 질문을 외면한 채 차기 권력의 향배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부실 관리 사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였다. 선거 관리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났고 국민의 신뢰는 상처를 입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폐업을 고민하고 청년들은 취업난에 신음하며 노년층은 생활비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민생 대책이 아니라 계파 갈등과 권력 재편 이야기뿐이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인지, 정치인 자신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자가 바르면 백성도 자연히 바르게 따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는 바름보다 유불리를 먼저 따지고 있다. 국민의 고통보다 당내 권력 지형에 더 관심을 보이고, 국가의 미래보다 다음 전당대회와 공천을 더 걱정하는 모습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성인은 자기 자신을 뒤로하고 백성을 앞세운다"고 했다. 또한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이 살아남는다"고 가르쳤다. 지도자는 권력을 움켜쥐려 할수록 결국 그 권력에 갇히게 되고, 백성의 목소리를 낮은 자세로 듣는 자만이 오래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권은 어떠한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대신 상대 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 더 익숙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양당 모두 선거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이를 내부 권력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선거 책임론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변질되는 순간, 정치의 품격은 무너진다. 국민의 채찍질은 쇄신을 위한 것이지 계파 싸움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책임 정치다. 권한을 가졌다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이 있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선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는 책임지는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모두가 남의 탓을 한다. 정부는 야당을 탓하고 야당은 정부를 탓한다. 당 지도부는 전임 지도부를 탓하고 계파는 상대 계파를 탓한다.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서로를 향한 비난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경 잠언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도자가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몰락은 시작된다는 경고다.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의 경고를 무시한 정권과 정당 가운데 오래 살아남은 사례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저성장과 고물가, 인구 감소와 청년 실업, 인공지능(AI) 시대의 산업 재편, 국제 질서의 불확실성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권력 다툼에만 몰두한다면 국가는 방향을 잃고 국민은 희망을 잃게 된다. 정당은 권력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적 기관이다. 대표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당권은 국민을 위한 봉사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수단이 목적이 되고 봉사가 권력욕으로 변질되면 정치는 본래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배가 침몰할 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잘못을 따지는 싸움이 아니다. 승객을 구하기 위한 협력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에도 필요한 것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다. 국민은 더 이상 변명하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다. 국민은 책임지는 지도자, 듣는 지도자, 행동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여야는 이제 당권이라는 독배를 내려놓아야 한다. 선거 결과에 담긴 국민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민생이라는 본분으로 돌아와야 한다. 쇄신 없는 권력투쟁의 끝은 공멸이다. 반대로 책임 정치와 협치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위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정치는 권력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다. 그 가장 단순한 진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 정치가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할 상식이다.
2026-06-18 17:4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