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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헌도 '본업 특화' 시대…유통업계, ESG에 인프라·전문성 더한다
[경제일보] 유통업계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단순 기부를 넘어 본업 인프라와 사업 역량을 사회적 과제 해결에 직접 연결하는 '운영형'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BBQ는 본사 공급망과 전국 가맹점 조리 역량을 지역사회 나눔에 활용하고 쿠팡은 직매입·물류망을 인구감소지역 농가의 판로로 연결하고 있다. 신세계면세점도 여행과 맞닿은 업종 특성을 살려 관광약자의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등 기업이 보유한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사회공헌에 접목하며 일회성 지원보다 지속 가능한 ESG 체계를 구축하는 모습이다. 21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BBQ는 전국 가맹점 및 본사의 식품 공급망, 치킨대학의 조리 인프라를 지역사회 나눔에 활용하고 있다. 제너시스BBQ그룹은 추석을 앞둔 이달 '찾아가는 치킨릴레이', '치킨대학 착한기부', '패밀리와 함께하는 치킨릴레이' 등을 통해 전국 아동·청소년과 어르신에게 치킨 1000마리를 전달했다. '찾아가는 치킨릴레이'는 BBQ가 직접 현장을 찾아 갓 조리한 치킨을 전달하는 사회공헌 활동이다. 나눔을 꾸준히 이어오면서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지역사회에 기부한 치킨은 약 1만8000마리에 달한다. 추석을 앞두고는 원주시청소년쉼터와 이천시청소년쉼터, 용인청소년쉼터 등 9곳을 찾아 현장에서 조리한 치킨을 전달했다. BBQ는 가맹점 교육 시설인 치킨대학도 사회공헌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착한기부'를 통해 치킨대학에서 교육받는 패밀리와 구성원이 직접 조리한 치킨을 지역사회에 전달하고 대한적십자사와 연계해 그룹홈, 청소년복지센터, 노인복지센터 등으로 지원 대상을 넓히고 있다. 전국 가맹점주가 참여하는 '패밀리와 함께하는 치킨릴레이'도 운영하고 있다. 본사가 신선육을 지원하면 각 지역 패밀리가 이를 직접 조리해 지역아동센터와 종합복지관, 아동보육원, 요양원 등에 전달하는 구조다. 이를 통해 본사의 식자재 공급 역량과 가맹점의 조리·지역 네트워크를 결합해 전국 단위 나눔 체계를 이어가고 있다. BBQ 관계자는 "명절을 앞두고 치킨 한 끼가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작은 즐거움이 되고 함께 나누는 정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활동을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가까이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했다. 쿠팡은 전국 단위 직매입과 물류망을 활용해 인구감소지역 농가의 판로를 넓히고 있다. 이 같은 유통망 확대에 힘입어 올해 1~8월 해당 지역 8곳에서 매입한 과일은 7000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했다. 이는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로 지난해 연간 매입량인 약 7600톤에도 근접한 수준이다. 매입 지역은 전남 영암·함평과 경북 성주·의성·영천·고령, 대구 군위 등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진행 중인 지역이 대부분이다. 쿠팡은 이들 지역에서 사과·참외·자두·수박·딸기·무화과 등 30여종을 직매입해 전국 소비자에게 새벽배송한다. 지역 농산물 매입 규모는 해마다 확대되는 추세다. 인구감소지역 등의 과일 매입량은 2022년 3400톤에서 2023년 5600톤, 2024년 6000톤, 지난해 7600여톤으로 꾸준히 늘었다. 올해도 증가세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연말까지 매입량이 8400톤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같은 매입 확대에는 전국으로 넓어진 새벽배송망이 큰 역할을 했다. 쿠팡이 호남·경상·강원 등으로 배송 지역을 확대하면서 과일 구매 수요가 늘었고 이에 맞춰 인구감소지역을 중심으로 산지 매입도 함께 늘렸다. 올해 경북 고령의 매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60%, 전남 함평은 138%, 대구 군위는 73% 증가했다. 확대된 판로는 농가 매출 증가로도 이어지고 있다. 군위 지역 자두 농가 130여곳이 참여하는 '군위농협자두공선출하회'의 쿠팡 매출은 올해 현재까지 1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배 늘었다. 대형 유통사 직매입이 기존 공판장 거래의 가격 변동과 판로 불확실성을 일부 보완하면서 농가의 안정적인 판매 기반을 넓히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쿠팡 관계자는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는 인구감소 지역 농가들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역 농가 매입과 상생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세계면세점은 여행 산업과 맞닿은 업종 특성을 관광약자 지원과 연결했다. 신세계면세점을 운영하는 신세계디에프는 지난 17일 초록우산에 장애아동의 해외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배리어프리 글로벌 문화체험' 기부금 1600만원을 전달했다. 이번 사업은 교통·숙박·관광시설 접근성 등의 제약으로 해외여행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장애아동에게 보호자와 함께하는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장애아동 3가정이 참여하며 아동과 보호자가 1대1로 동행한다. 장애 특성을 고려한 이동과 숙박 환경을 지원하고 여행지도 휠체어 이동과 현지 접근성을 반영해 선정할 예정이다. 신세계디에프가 관광약자를 지원 대상으로 정한 배경에는 면세점이 여행 과정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기존 아동·청소년 사회공헌에서 범위를 넓혀 자사 사업 영역과 연관된 '여행 접근성'을 사회적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신세계디에프 관계자는 "여행의 출발점에 있는 기업으로서 여행 접근성은 우리 업과 가장 가까운 사회적 과제"라며 "장애아동과 가족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함께 추억을 쌓는 데 이번 지원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6-09-21 17: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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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권 800조 반도체 벨트…'제2의 용인'인가, 산업지도 바꿀 새 축인가
[경제일보] 정부가 서남권에 최대 896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추진하면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지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그동안 경기 남부에 집중됐던 생산기반을 서남권으로 확장해 AI 시대에 대응할 새로운 생산축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단순히 공장 몇 곳을 짓는 사업이 아니라 메모리 생산과 첨단 패키징, AI 데이터센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인력양성까지 연결하는 전국 단위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점에서 산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전날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를 열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앰코와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정부 발표 기준 총 투자 규모는 896조원이다. 이번 구상의 의미는 투자 규모보다 산업지도의 변화에 있다. 그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성장해왔지만, AI 시대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면서 수도권 단일 생산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커지고 있다. 서남권 반도체 벨트는 용인 클러스터의 단순 복제가 아니라 수도권 생산기반을 지방으로 확장하고, 전력·용수·패키징·AI 데이터센터까지 결합한 새로운 반도체 축을 세우려는 시도다.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의 기흥·화성·평택 캠퍼스와 SK하이닉스 이천·청주 공장을 축으로 세계 최대 메모리 생산벨트가 형성됐다. 여기에 용인 국가산단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까지 추진되면서 수도권은 세계적인 메모리 생산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AI 시대가 열리면서 기존 생산체계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HBM 등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는 반면, 수도권은 전력과 용수, 부지 확보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서남권을 새로운 생산축으로 제시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번 구상의 핵심은 단순한 공장 이전이 아니다. 정부는 서남권에 메모리 팹 4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거점을 조성하고, 충청권은 첨단 패키징, 동남권·대경권은 소부장과 미래 반도체 산업을 맡는 전국 분산형 클러스터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수도권과 지방이 역할을 분담하는 새로운 산업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는 약 470조원을 투입해 메모리 팹 2기와 1GW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방안을 발표했고, 삼성전자는 약 425조원을 투자해 메모리 팹 2기와 국가 AI 컴퓨팅센터 등을 조성하는 구상을 공개했다. 앰코는 광주에 1조원을 투자해 첨단 패키징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내세운 공통 조건은 '입지'가 아니라 '인프라'였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전력과 용수, 인력, 정주 여건, 인센티브가 갖춰질 경우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역시 용인 클러스터만으로는 미래 메모리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대규모 부지와 안정적인 전력·용수 공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를 '제2의 용인'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성격은 다소 다르다. 용인이 기존 수도권 반도체 벨트의 연장선이라면, 서남권은 수도권 밖에 새로운 생산축을 만드는 첫 시도에 가깝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면서 국가 전체의 생산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성공 여부는 공장보다 인프라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팹은 24시간 안정적인 전력과 막대한 공업용수가 필요한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이다. 정부는 서남권에 필요한 전력 6.3GW와 용수 65만톤을 공급하고, 송전망과 용수 인프라를 패스트트랙 방식으로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용인에도 약 15GW의 전력과 150만톤의 용수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후공정 경쟁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앰코의 광주 투자로 서남권은 메모리 생산뿐 아니라 첨단 패키징까지 연결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AI 반도체 시대에는 HBM과 AI 가속기의 성능을 높이는 첨단 패키징이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있어 생산과 후공정이 함께 구축돼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충청권을 패키징 거점으로 육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입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광주 미래차 국가산단 △빛그린국가산단 △첨단3지구 △나주 에너지국가산단 △영암·해남 솔라시도 △광주 군공항 종전부지 △무안 국가산단 후보지 등 7곳을 검토 대상으로 제시했다. 기업이 선호하는 부지를 중심으로 전력과 용수, 도로 등 기반시설을 패키지로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서남권 반도체 벨트의 성패는 투자 규모가 아니라 실행 속도에 달려 있다"며 "삼성과 SK, 앰코의 투자 계획이 현실화되려면 전력망 구축과 용수 공급, 인허가 단축, 기업 투자 집행이 계획대로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제2의 용인'이라는 이름을 넘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이제 발표가 아니라 실행이 증명해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2026-07-01 16: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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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배 한 척이 아니다
[경제일보] 지난 4일 저녁,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한민국 선사 HMM이 운항하는 벌크선 ‘나무호’가 폭발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선박은 두바이항으로 예인되며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즉각 이란의 소행이라 단정했고, 우리 외교부는 신중한 태도로 현장 감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긴박한 뉴스들 사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읽어내야 할 것은 범인의 정체나 파공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아홉 시간이나 떨어진 저 머나먼 이국의 좁은 바다가 사실은 우리 경제의 심장과 실핏줄로 연결된 ‘대동맥’이라는 서늘한 자각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지도 위에서는 인색하게 그어진 한 줄기 가느다란 물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산업의 눈으로 그곳을 투시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곳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석유화학 원료와 선박 보험료, 해상 운임과 환율, 그리고 우리네 거실의 전기요금과 시장 바구니 물가가 한데 엉켜 지나가는 거대한 에너지의 통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5분의 1이 이 좁은 목구멍을 지나며, 그중 80% 이상의 목적지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제조 국가들이다. ‘호르무즈가 기침을 하면 한국 경제는 독감을 앓는다’는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 강국’이라는 자부심 아래 눈부신 성장을 일궈왔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반도체 공장은 평택과 용인에 위용을 자랑하고, 자동차 공장은 울산과 광주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거대한 조선소들은 거제와 영암의 바다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계 장치들을 돌리는 근원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반도체 라인을 움직이는 전기의 연료, 화학 공장의 젖줄인 나프타, 철강 용광로를 달구는 에너지는 모두 저 위태로운 바닷길을 타고 들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뼈아픈 역설을 마주한다. 제조 강국은 필연적으로 ‘수입 강국’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수출품은 화려하게 포장돼 항만을 떠나지만, 한국의 생산 능력은 그보다 훨씬 앞서 항만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원자재의 물결 위에 서 있다. 바닷길이 흔들리면 공장도 흔들린다. HMM 나무호의 화재를 단순히 해운사 한 곳의 불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약점을 비추는 섬뜩한 조명탄이다. 정부가 이번 사고에 대해 신중을 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안보 위기일수록 국가는 비명보다 사실을 먼저 붙들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편승해 말을 앞세우면 선박의 화재는 외교적 난제로 번지고, 이는 곧 통상 압력과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특히 호르무즈 같은 예민한 바다에서는 말 한마디가 보험료가 되고, 그 보험료는 즉시 물류비용과 물가로 전이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해상 리스크를 평소 산업 정책의 본류(Mainstream)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산업 정책을 논할 때 떠올리는 단어들은 대개 세액 공제, 보조금, 규제 완화, 인력 양성 같은 것들이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공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기술이 초격차를 유지한다 한들, 그 공장으로 향하는 항로가 불안하면 모든 공정은 무너진다. 원료는 늦어지고, 에너지는 비싸지며, 제품의 납기는 흔들린다. 진정한 의미의 공급망은 공장 담장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해협과 항만의 안전, 보험 시장의 안정성, 해군력의 투사 범위, 그리고 세련된 외교와 비축 시스템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묶여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한 공급망이라 부를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경고하듯 호르무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에너지 병목’이다. 이 숫자의 무게 앞에서 ‘중동 리스크’라는 말은 너무 가볍다. 이것은 정유사나 해운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와 철강이 한배를 탄 공동체의 운명이다. 손자는 손자병법 첫머리에서 “전쟁은 나라의 큰일이며, 생사와 존망이 달린 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 있어 바닷길 또한 그와 같다. 항로는 단순한 물류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생산과 물가와 일자리가 흐르는 혈맥이다. 혈맥이 막히면 장기가 괴사하듯, 항로가 흔들리면 민생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에너지와 핵심 원자재의 비축 체계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비축은 평상시에는 불필요한 비용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국가의 생존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장치다. 아울러 특정 지역과 항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조달 다변화 전략을 더 치밀하게 짜야 한다. 원가가 조금 더 들더라도 ‘안전한 대안’을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가장 저렴한 비용이다. 마지막으로 해운, 보험, 금융, 국방, 외교를 하나로 묶는 ‘범정부 해상 공급망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산업 정책의 범주에 해군력과 해상 보험 정책이 포함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도 이 사건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정쟁의 소재로 삼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선박이 바다에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비상시 대체 항로는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실질적인 시스템이 없는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HMM 나무호의 불은 꺼졌지만, 그 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다. 우리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자랑해왔다. 그러나 제조 강국의 진정한 실력은 공장 안의 효율성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위기의 바다를 통과해 원료를 들여오고, 거친 파도를 뚫고 제품을 내보내며, 예기치 못한 비용 충격을 견뎌내는 맷집까지가 진짜 산업 경쟁력이다. 호르무즈에서 탄 것은 선박 한 척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온 ‘안전한 바닷길’이라는 안일한 환상도 함께 그을렸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업 정책은 공장 부지를 닦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물과 전기, 사람과 원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오가는 바닷길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산업 정책의 본질이다. 한국 경제의 목줄이 바다에 걸려 있다면, 그 바다를 지키는 일 또한 엄중한 ‘산업의 이름’으로 명명돼야 마땅하다.
2026-05-07 09: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