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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90달러 유가…유류세만 만지는 물가 대책으론 부족하다
[경제일보] 국제유가가 다시 세계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이어지고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브렌트유는 한때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섰다. 20일(현지시간) 국제 원유시장에서 브렌트유는 장중 배럴당 88.63달러,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82.61달러에 거래됐다. 이후 브렌트유는 89.22달러, WTI는 83.2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4.604%까지 올라섰다. 유가 상승이 에너지 가격에 머물지 않고 물가와 시장금리, 달러 가치, 주가를 동시에 흔드는 복합 충격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 금융시장의 반응은 더 예민하다. 이날 금리 파생상품 시장은 현재 연 2.25%인 유럽중앙은행(ECB)의 예금금리가 2026년 말 2.66%, 2027년 2월에는 2.73%까지 오를 가능성을 반영했다. 통상적인 0.25%포인트 인상 기준으로 사실상 두 차례의 추가 금리 인상을 예상한 셈이다. 에너지 가격이 다시 소비자물가를 밀어 올리면 금리를 낮추기는커녕 추가 인상해야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정학적 충돌이 유조선의 항로를 막고 오른 기름값이 채권금리를 끌어올리며 높은 금리가 기업과 가계의 금융비용을 늘리는 악순환이 재연될 조짐이다. 한국은 이런 충격에 유난히 취약하다. 국내에서 소비하는 원유를 사실상 전량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산업 부문의 에너지 사용 비중도 주요 선진국 가운데 높은 편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한국의 에너지 구조가 화석연료와 해외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외부 공급 충격에 취약하다고 진단한다. 유가가 오르면 정유·석유화학은 물론 항공과 해운, 자동차, 철강, 농수산물과 택배비까지 비용 압력을 받는다. 기업은 오른 원가를 제품 가격에 전가하고 그 부담은 결국 소비자의 장바구니로 돌아간다. 그런데도 정부의 고유가 대책은 여전히 유류세 인하와 주유소 가격 점검이라는 익숙한 처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류세를 낮추는 것은 급격한 가격 상승을 완충하는 데 필요하다. 정유사와 주유소가 국제유가 상승분을 빌미로 가격을 과도하게 올리지 않는지 점검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이미 오른 가격의 일부를 세금으로 보전하고 유통 과정의 부당행위를 막는 사후 대책일 뿐이다. 원유 공급이 실제로 줄거나 해상 운송이 장기간 차질을 빚을 경우에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정부는 유가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세금을 얼마나 낮출 것인지보다 공급이 끊겼을 때 어떤 순서로 대응할 것인지부터 국민과 시장에 밝혀야 한다. 전략 비축유 방출의 가격·수급 기준과 규모, 민간 비축분 동원 방식, 정유사별 원유 도입 차질에 대한 대응체계를 구체화해야 한다. 비축유는 보유량 자체보다 언제, 어떤 조건에서, 얼마나 신속하게 꺼내 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원유 도입선도 더 넓혀야 한다. 중동산 원유가 가격과 정제 효율 면에서 유리하더라도 특정 지역과 해협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국가경제 전체를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시킨다.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 등 대체 공급처와 장기 계약을 확대하고 유종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정유설비의 유연성도 높여야 한다. 평상시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공급망을 분산하는 것은 보험료와 같다. 위기가 발생한 뒤 비싼 현물 원유를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 훨씬 싸다. 해상운송과 보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호르무즈 해협의 위험이 높아지면 유조선 운임과 전쟁보험료가 급등한다. 원유가 확보돼도 배가 움직이지 못하면 국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정부는 국적선사와 정유사, 무역보험기관이 참여하는 비상 운송체계를 점검하고 전쟁 위험 때문에 민간 보험이 사실상 중단될 경우를 대비한 한시적 보증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는 유전에서 정유공장까지 이어지는 운송망 전체의 문제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유류세 인하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류세를 일괄적으로 낮추면 차량을 많이 운행하고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계층이 더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대중교통 이용자나 난방비 부담이 큰 저소득층에는 효과가 제한적이다. 고유가가 장기화한다면 에너지바우처와 대중교통 지원, 영세 자영업자·화물운송 종사자에 대한 선별 지원을 강화하는 편이 재정의 효율성과 형평성에 맞는다. 무엇보다 재정·통화·에너지 정책의 엇박자를 막아야 한다. 국제유가 상승은 수요가 과열돼 발생한 물가와 다르다. 금리를 올린다고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거나 원유 공급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가 상승으로 물가 기대가 확산되고 임금과 서비스 가격까지 오르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려 수요를 억누를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에너지 가격을 이유로 추가 금리 인상 전망이 확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물가와 환율 안정을 위해 긴축 기조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경기 부양을 명분으로 광범위한 현금 지원과 정책대출을 늘린다면 한쪽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쪽은 가속페달을 밟는 꼴이 된다. 재정 지원은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직접 피해를 본 계층과 업종에 집중하고 물가를 다시 자극할 수 있는 보편적 수요 부양은 자제해야 한다. 통화정책에만 물가 안정의 부담을 떠넘기지 말고 에너지 정책은 공급 충격을 줄이고 재정정책은 취약 부문을 선별 지원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나눠야 한다. 국제유가가 다시 90달러 선을 위협하고 있다. 아직 물리적 공급 부족이 전면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심할 때가 아니다. 최근 유가가 과거의 극단적인 전망보다 안정된 것은 미국의 생산 확대와 전략비축유 방출, 중국의 수요 감소, 일부 해상운송 재개 등이 충격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완충 장치가 언제까지 작동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정부는 국제유가가 오를 때마다 유류세율을 조정하는 임시 처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와 전략 비축유 방출 기준, 비상 운송·보험 지원, 취약계층 보호, 재정·통화정책 간 조율을 아우르는 국가 차원의 고유가 대응체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는 단순히 주유소 가격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국가경제의 생명선을 지키는 일이다. 다시 배럴당 90달러 선을 넘나드는 유가는 정부에 묻고 있다. 다음 위기도 세금으로 버틸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는 에너지 대응의 구조 자체를 바꿀 것인가.
2026-07-21 18: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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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오르고 반도체 흔들린다…'양면 충격' 대비책 서둘러야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약점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곳에 있다. 하나는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폭 좁은 바닷길이고, 다른 하나는 손톱보다 작은 반도체 칩이다. 호르무즈해협이 흔들리면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가격이 뛰고, 반도체 시장이 흔들리면 수출과 증시가 휘청인다. 지난 주말 한국 경제의 두 약한 고리에 동시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이 다시 격화하면서 국제유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지난 17일 브렌트유는 4.59% 오른 배럴당 88.10달러를 기록했다. 미국의 대이란 공격과 이란의 보복이 이어지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과 가스 운반선의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결과다. 같은 날 세계 증시는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하락했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는 사흘 연속 떨어지며 최근 고점보다 20% 낮은 수준까지 밀렸다. 유가는 오르고 반도체는 내리는, 한국 경제에는 가장 불편한 조합이 현실이 된 것이다. 상황은 주말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19일(현지시간) 미국은 8일 연속 이란을 공격했고, 이란도 걸프 지역 미군 시설과 주변국을 향해 미사일·무인기 공격을 이어갔다. 산유국 증시는 일제히 약세를 보였고, 시장에는 전쟁이 다시 넓어질 수 있다는 불안이 번졌다. 걸프 산유국들이 수출량을 늘리고 있지만 호르무즈해협의 선박 통행은 다시 줄었다. 최근 하루 통항 선박이 단 3척에 그쳐 5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는 집계도 나왔다. 한국은 이 바닷길의 사소한 변화도 사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나라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 LNG의 약 20%가 호르무즈해협을 거친다. 해협이 완전히 봉쇄되지 않더라도 통항이 느려지고 보험료와 운임이 오르면 그 비용은 정유·석유화학·항공·해운·철강을 거쳐 결국 소비자물가로 넘어온다. 원유 가격 상승에 원화 약세까지 겹치면 충격은 배가된다. 국제유가가 그대로 있어도 환율이 오르면 한국이 지불해야 할 원화 기준 에너지 가격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는 반도체가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 투자 열풍을 타고 치솟았던 반도체주는 과도한 기대와 높은 가격 부담 앞에서 조정을 받고 있다. 대만 TSMC가 큰 폭의 이익 증가를 발표하고도 주가가 하락한 것은 시장이 더 이상 ‘좋은 실적’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AI 기업들의 막대한 설비투자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반도체 수요가 실제 수익으로 얼마나 연결될지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17일 세계 반도체주 하락도 이러한 불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였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품목이 아니다. 지난 6월 한국의 전체 수출은 1022억5000만 달러로 처음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1924억 달러로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을 웃돌았다. 반도체 호황은 무역수지를 지키고 기업 투자를 늘리며 세수를 떠받치는 힘이다. 하지만 그 비중이 커질수록 반도체 가격과 글로벌 AI 투자의 작은 변화가 한국 경제 전체의 진폭을 키운다. 반도체가 잘될 때는 편중이 경쟁력으로 보이지만, 흔들릴 때는 의존으로 돌아온다. 유가 상승과 반도체 하락이 동시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 경제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사오고, 벌어들이는 돈은 소수 수출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수입액이 늘고, 반도체가 꺾이면 수출액이 줄어든다. 무역수지의 양쪽 문이 동시에 압박받는 구조다. 여기에 유가 상승이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리고, 반도체주 하락이 증시와 소비심리를 위축시키면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충격이 서로를 증폭할 수 있다. 정부가 유류세 조정이나 석유시장 단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유류세 인하는 급한 불을 끄는 수단일 뿐, 기름을 실은 배를 한국까지 가져오지는 못한다. 정부는 원유와 LNG의 국가별·항로별 도입 현황, 민간과 공공의 비축 수준, 비축유 방출 조건, 해상보험과 운임 지원 방안, 환율 급등 시 대응 원칙을 하나의 에너지 비상계획으로 공개해야 한다. 국민과 기업이 알아야 할 것은 “당장 문제없다”는 안심의 말이 아니라 어느 단계에서 어떤 조치가 작동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표다. 정부는 지난 3월 중동 상황 대응본부를 가동하면서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에 대비해 대체 도입선과 운항 일정, 보험·운임 문제를 점검했다. 수급 위기가 가시화되면 국내 비축기지의 석유를 시장에 공급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미 마련된 대책이 있다면 이제는 최근의 충돌 격화와 통항 감소를 반영해 다시 공개적으로 점검할 때다. 비상계획은 서랍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내용을 알고 움직일 때 효과가 있다. 기업도 공급망을 평상시의 평균값으로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정유·석유화학·항공사는 유가와 운임이 동시에 급등하는 상황을, 자동차·배터리·철강사는 원자재 가격과 환율이 함께 오르는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반도체 기업 역시 AI 투자가 둔화하고 메모리 가격이 조정받는 경우에 대비해 설비투자와 현금흐름을 점검해야 한다. 기업별 스트레스 테스트를 의무적으로 공개할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주요 업종과 금융회사가 복합 충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정부와 시장이 함께 확인해야 한다. 손자병법 ‘허실’에는 “먼저 싸움터에 이르러 적을 기다리는 자는 편안하고, 뒤늦게 싸움터에 달려가는 자는 피로하다”는 말이 나온다. 경제안보도 다르지 않다. 유조선의 통항이 끊어진 뒤 도입선을 찾고, 반도체 가격이 급락한 뒤 수출 다변화를 외쳐서는 늦다. 위기는 대책을 새로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미리 만든 대책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시간이다. 정부가 시장의 모든 위험을 없앨 수는 없다. 국제유가도, 세계 반도체 가격도 서울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부 변수라는 이유로 손을 놓아서도 안 된다. 정부의 역할은 가격을 통제하는 데 있지 않다.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비축하고, 도입선을 넓히며, 위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있다. 반도체를 더 강하게 키우는 일과 반도체 외 수출 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모순이 아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천연가스와 에너지저장장치를 조화롭게 활용해 수입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일도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한국 경제의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다. 에너지 안보와 수출 다변화는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구호가 아니라, 평상시에 비용을 지불하며 구축해야 할 보험이다. 기름값은 뛰고 반도체는 흔들리고 있다. 두 현상을 별개의 뉴스로 읽으면 대책도 조각난다. 하지만 이를 한국 경제의 이중 취약성으로 읽으면 해야 할 일이 선명해진다. 에너지 비상계획을 공개하고, 기업별 공급망을 점검하며, 수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둥을 세워야 한다. 호르무즈해협과 반도체 시장은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흔들림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나라 경제 전체가 함께 휘청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정책의 기본이다.
2026-07-20 09: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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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건 경제 불확실성이다
[경제일보] 전쟁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총성이 멎은 뒤에도 전쟁은 유가에 남고 환율에 남고 물류비에 남고 기업의 투자계획서와 가계의 장바구니에 남는다. 미국과 이란이 전쟁 종식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계 금융시장은 즉각 안도했다. 국제유가는 급락했고 주요 증시는 반등했다. 전쟁 프리미엄이 빠지자 시장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환호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가 아니라 냉정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경제 불확실성이다. 휴전문서 한 장이 원유 생산시설을 하루아침에 복구하지 못한다. 해협 재개방 선언이 곧바로 선박 보험료를 낮추지도 않는다. 국제유가가 하루 이틀 떨어졌다고 해서 물가가 곧장 안정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은 정치적으로는 합의로 끝나지만 경제적으로는 비용 청구서가 도착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번 미국·이란 전쟁이 세계경제에 남긴 첫 번째 상처는 에너지 시장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가 지나는 핵심 길목이다. 그 길목이 전쟁의 인질이 되자 세계는 다시 한 번 에너지 안보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경제 생존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합의 이후 브렌트유 가격은 급락했지만 이것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단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유가가 내려도 공급망은 즉시 회복되지 않는다. 산유국의 생산설비, 정제시설, 항만, 보험, 선박 운항, 금융결제망은 모두 시간이 필요한 시스템이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기억이다. 한번 흔들린 시장은 쉽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사들은 통항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선언보다 실제 항로의 안전을 본다. 보험사는 합의문보다 재발 가능성을 계산한다. 정유사와 항공사, 석유화학 기업은 현물가격보다 3개월 뒤, 6개월 뒤의 조달 안정성을 본다. 그래서 전쟁 뒤의 경제는 늘 ‘안정’이 아니라 ‘안정 확인’의 시간을 요구한다. 불확실성은 가격 그 자체보다 더 비싸다. 이번 합의는 세계 중앙은행에도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전쟁 중 급등한 에너지 가격은 물가를 밀어 올렸다. 유가가 떨어지면 물가 압력은 완화되지만 이미 오른 운송비와 원재료비, 기대인플레이션은 시차를 두고 경제 전반에 스며든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물가가 불안하면 움직이기 어렵다. 금리를 유지하면 경기 회복은 더뎌지고 금리를 내리면 다시 물가와 환율이 흔들릴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통화정책의 안개는 더 짙어질 수 있다. 한국경제에는 이 불확실성이 더 예민하게 작용한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큰 나라다. 원유와 가스 가격이 오르면 기업의 생산비가 먼저 오른다. 정유·화학·철강·항공·해운은 물론이고 전력비 부담이 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산업에도 파장이 간다. 유가가 오르면 무역수지가 흔들리고 무역수지가 흔들리면 환율이 불안해진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뛰고 수입물가가 뛰면 소비자물가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중동의 포성이 서울의 주유소 가격표와 서민 밥상으로 번지는 구조다. 합의 이후 유가가 안정된다면 한국경제에는 분명 숨통이 트인다. 기업의 원가 부담은 줄고 항공·해운·석유화학·자동차 등 에너지 민감 업종은 불확실성을 덜 수 있다. 고유가에 짓눌렸던 소비심리도 일부 회복될 수 있다. 환율 안정은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에도 긍정적이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부담이 낮아지면 한국경제는 다시 회복 궤도에 올라설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경기 반전의 신호로 과대해석해서는 안 된다. 종전 합의가 곧 경기부양책은 아니다. 전쟁은 이미 비용을 남겼다. 기업들은 몇 달 동안 비싼 원료와 물류비를 감당했다. 일부 기업은 납기와 계약조건을 조정했고 일부 가계는 고유가와 고물가 속에서 소비를 줄였다. 한번 미뤄진 투자는 다시 집행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한번 닫힌 소비지갑은 유가가 떨어졌다는 뉴스 하나로 곧바로 열리지 않는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봐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지금 필요한 정책은 ‘전쟁이 끝났으니 정상화됐다’는 낙관론이 아니라, ‘전쟁이 끝났지만 불확실성은 남았다’는 위험관리다. 물가가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 통화정책은 신중해야 한다. 동시에 취약계층과 에너지 다소비 업종에는 선별 지원이 필요하다. 고유가의 부담은 모든 국민에게 같지 않다. 대기업은 헤지와 장기계약으로 버틸 수 있지만 영세 자영업자와 운송업자, 농어민, 저소득층은 유가 변동을 그대로 맞는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 같은 단기 처방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 한시적 완충장치는 있어야 하지만 재정 여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전략비축 체계 점검, 핵심 원자재 공급망 확보, 항만·해운 리스크 관리, 기업의 환율·유가 헤지 역량 강화다. 전쟁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싸게 사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효율만 따지던 공급망의 시대가 저물고, 회복탄력성을 따지는 공급망의 시대가 왔다. 기업도 달라져야 한다. 중동 리스크를 일시적 외부 변수로만 볼 수 없다. 지정학은 이제 재무제표의 바깥에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가, 환율, 운송, 보험, 재고, 투자, 배당까지 모두 흔드는 변수다. 최고경영자는 매출 목표만이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 시나리오를 들여다봐야 한다. 에너지 가격이 배럴당 70달러일 때와 100달러일 때, 호르무즈 통항이 정상일 때와 부분 제한될 때, 환율이 100원 더 오를 때의 손익을 따져야 한다. 위기 대응은 전쟁이 난 뒤 만드는 문서가 아니라 평시에 쌓아두는 체력이다. 금융시장도 안도 랠리에 취해서는 안 된다. 전쟁 합의 이후 주가가 오르고 유가가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종종 정치적 이벤트에 먼저 환호하고 실물경제의 복구 속도를 뒤늦게 확인한다. 유가 하락이 물가 안정으로 이어질지, 물가 안정이 금리 인하로 이어질지, 금리 인하가 소비와 투자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열린 질문이다. 지금의 시장 반등은 ‘평화 배당’이라기보다 ‘공포 할인 해소’에 가깝다. 여기서 고전의 지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은 “용병을 잘하는 자는 다시 징병하지 않고, 군량을 세 번 싣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싸움터에서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보급의 비용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경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실력은 전쟁의 승패보다 전쟁 뒤 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에서 드러난다. 에너지, 물류, 금융, 물가, 환율의 보급선을 관리하지 못하면 평화의 이름 아래서도 경제는 계속 흔들린다. 이번 미국·이란 합의는 세계경제에 시간을 벌어줬다. 하지만 시간을 번 것과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다르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린다고 해도 세계경제는 이미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봤다. 국제유가가 내려간다고 해도 한국경제는 수입 에너지 의존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증시가 오른다고 해도 기업과 가계가 체감하는 불확실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책당국은 이제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유가·환율·물류비의 변동이 물가와 산업별 비용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망을 장기계약·비축·대체선 확보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셋째, 전쟁 이후 완화된 시장 분위기를 구조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가 지나가면 개혁의 긴장도 함께 풀린다. 그러나 다음 위기는 늘 우리가 방심할 때 온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경제 불확실성이다.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끝났다는 선언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숫자와 가격과 계약과 기대 속에 남아 서서히 비용을 청구한다. 지금 한국경제가 해야 할 일은 평화의 뉴스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경제의 균열을 차분히 메우는 일이다. 평화는 합의문으로 시작되지만 경제의 안정은 준비된 국가만이 얻을 수 있다.
2026-06-16 15: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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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추경', 퍼주기 아닌 구조 전환의 결단이어야 한다
[경제일보] 정부가 고심 끝에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결정했다. 대통령의 시정 연설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추경 논의가 시작된다. 지금의 상황은 평시가 아니다.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전쟁의 여파는 이미 국내 물가와 산업 현장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장바구니 물가는 치솟고, 기업의 생산 라인은 원가 부담에 흔들린다. 이번 추경은 단순한 경기 보완이 아니라, 사실상 ‘전시(戰時) 대응’에 준하는 비상 처방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기 국면일수록 재정의 쓰임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추경은 국민의 세금이자 미래 세대의 부담이다. 정치적 고려가 개입된 ‘나눠먹기식 예산’은 단기적 체감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물가를 자극하고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넓고 얕은 지원이 아니라, 좁고 깊은 ‘정밀 타격’이다. 무엇보다 이번 추경의 첫 번째 원칙은 ‘핀셋 지원’이어야 한다. 전쟁 여파로 직격탄을 맞은 계층과 산업은 이미 분명하다.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한계 상황에 몰린 중소 제조업, 고금리와 소비 위축에 동시에 짓눌린 자영업자, 그리고 에너지 비용 상승으로 생계가 위협받는 취약계층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지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다. “모두에게 조금씩”이 아니라 “절박한 곳에 충분히”라는 원칙이 지켜질 때, 비로소 재정의 효율성과 정당성이 확보된다. 동시에 이번 추경은 ‘현재의 위기 대응’을 넘어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두 번째 축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은 이번 위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외부 충격에 따라 경제 전반이 흔들리는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단순히 유류세를 낮추거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일시적 완화에 불과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체질을 바꾸는 전략적 투자다. 우선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전략 비축 확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특정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물류·비축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비용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보험이다. 아울러 신재생 및 대체 에너지에 대한 투자 역시 속도를 내야 한다. 글로벌 에너지 질서는 이미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기술 개발과 인프라 구축에 선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 종속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효율 혁신도 빼놓을 수 없다. 공급을 늘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소비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산업 전반의 고효율 설비 전환과 에너지 절감 기술에 대한 지원은 단기 비용을 넘어 장기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결국 에너지 안보는 ‘얼마나 확보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덜 의존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이제 시선은 국회로 향한다. 추경은 타이밍이 생명이다. 여야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며 시간을 허비하는 순간, 민생의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국회는 예산 항목 하나하나를 정쟁의 도구로 삼기보다, 국민의 삶이라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불필요한 사업은 과감히 덜어내되, 민생과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예산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입법부의 책무다.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번 추경이 또 하나의 ‘단기 처방’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위기를 계기로 경제 구조를 바꾸는 ‘전환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정책의 방향과 실행에 달려 있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 기회는 준비된 선택과 결단이 있을 때만 현실이 된다. 정부와 국회는 이번 추경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돈의 배분이 아니라, 국가의 우선순위를 재정의하는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 아래, 민생을 살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추경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내야 할 답이다.
2026-04-01 09: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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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입'에 출렁이는 시장, 숫자로 드러난 위기…이제 근본 처방이 필요.
[경제일보]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막 벗어난 한국 경제가 또다시 거대한 파고에 직면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발 전쟁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우리 경제의 핵심 지표를 흔들고 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위협하며 상승 압력을 지속하고,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를 넘나들며 외환시장 불안을 키우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역시 다시 3%대를 자극하며 ‘고물가 재점화’ 우려를 낳고 있다. 성장률 전망치는 하향 조정이 이어지고, 내수 소비는 좀처럼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수출마저 반도체 회복에 기대는 ‘외줄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의 기초체력 전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시장의 변동성이 펀더멘털이 아닌 외부 변수, 그것도 특정 인물의 발언에 과도하게 좌우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경 발언 한마디에 코스피가 급락하고, 유화적 메시지에 반등하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다. 글로벌 리스크에 민감한 개방경제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같은 ‘발언 의존형 시장’은 우리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심리 문제가 아니라, 외환·자본시장 방어 체계가 아직 충분히 견고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부는 비상경제 대응 체제를 가동하며 유류세 인하, 외환시장 구두 개입, 정책금융 확대 등 일련의 조치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이러한 대응은 대부분 ‘단기 처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가 상승에 따른 유류세 인하는 물가 충격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수는 있지만, 재정 여력을 소진시키는 동시에 구조적 에너지 의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환율 급등에 대한 구두 개입 역시 시장 심리를 진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미 기업과 가계는 고금리·고환율·고물가라는 ‘3중고’ 속에서 버티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비상경제 대응을 일회성 조치의 집합이 아닌, 장기 전략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에너지 구조의 근본적 전환이 시급하다. 중동 의존도가 높은 원유 수입 구조를 다변화하고, 재생에너지 및 대체에너지 투자 확대를 통해 외부 충격에 대한 내성을 키워야 한다. 동시에 고환율 환경을 단순히 방어할 것이 아니라, 수출 경쟁력 강화와 수입 구조 개선이라는 기회로 전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내수 회복을 위한 보다 과감한 조치도 요구된다. 지금의 소비 위축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구조적 불안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이고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정책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소비 심리는 살아나기 어렵다. 규제 혁파를 통한 투자 활성화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기업이 불확실성 속에서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제도적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핵심 역할이다. 아울러 금융시장 안정 장치도 한층 정교화해야 한다. 외환보유액 관리, 통화 스와프 확대, 시장 안정 펀드 운용 등 다양한 수단을 체계적으로 결합해 ‘충격 흡수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시장이 외부 변수에 흔들리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늘의 처방’이 아니라 ‘내일의 전망’이다. 지금처럼 하루 단위로 대응책이 바뀌는 상황에서는 기업도, 가계도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정부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포함한 중장기 경제 로드맵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성장률, 물가, 환율, 금리 등 주요 거시지표에 대한 현실적인 전망과 이에 따른 정책 대응 방향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거센 폭풍 속에 놓여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임기응변이 아니라 일관된 전략이다. 시장을 진정시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신뢰이며, 신뢰는 예측 가능한 정책에서 나온다. ‘트럼프의 입’에 출렁이는 경제를 방치한 채 땜질식 대응에 머문다면 위기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단기 처방을 넘어 구조적 해법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정부가 경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가 될 수 있을지, 그 시험대에 올라 있다.
2026-03-25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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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낡은 '엄포', 기름값 잡는 도깨비방망이 아니다
2026년 3월, 남녘에는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서민들의 경제 기상도는 여전히 혹한기다. 장바구니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정점에는 언제나 그렇듯 ‘기름값’이 자리하고 있다. 주유소 미터기에서 맹렬한 속도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는 운전자들의 심정은 한숨을 넘어 분노에 가깝다. 국제 유가가 들썩인다는 뉴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동네 주유소의 가격표는 즉각 반응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광판의 숫자가 바뀐다. 반면 국제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소식에는 묵묵부답이다. 내릴 때는 깃털처럼 천천히, 올릴 때는 로켓처럼 솟구친다는 이른바 ‘비대칭 전가’ 현상이다. 수십 년째 반복되어 온 한국 석유 시장의 고질적인 불신 구조가 2026년 봄에도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국민적 비난 여론이 비등점을 향해 치닫자 정부는 익숙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합동 점검반을 가동하고 “위기를 틈탄 편승 인상과 매점매석을 엄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주유소와 정유사를 향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을 너무나 자주 목격해 왔다. 유가 급등기마다 정부는 ‘엄정 대응’을 외쳤고 업계는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했으며 결국 가격은 시장의 논리대로 움직였다. 정부의 엄포가 실효성 있는 대책이라기보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행정적 의식(儀式)’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이 오래된 촌극 속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제각각이다. 최일선에 있는 주유소 업주들은 “우리는 동네북이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정유사가 공급 가격을 올리는데 소매상이 무슨 재주로 가격을 억제하느냐는 것이다. 임대료와 인건비 상승, 전기차 확산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 속에서 마진을 줄이라는 것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국내 주유소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알뜰주유소와의 경쟁으로 박리다매 구조가 고착화된 지 오래다. 공은 자연스럽게 정유사로 넘어간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논리는 견고하다. 한국은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국가이며 국내 공급가는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환율에 연동되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폭리는 오해”라며 영업이익률이 높지 않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유류세 등 세금 비중이 가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재고 관리의 마법’에 있다. 유가 상승기에는 비싸게 들여올 원유를 대비해 미리 가격을 올린다는 ‘선반영’ 논리를 펴고 하락기에는 과거에 비싸게 사 둔 재고 소진을 이유로 인하를 늦춘다. 기업 입장에서야 리스크 관리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불공정 게임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과점 체제인 정유 업계가 가격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한, 이러한 불신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부의 대응 방식에 있다. 가격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 그리고 원가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의 변수다. 정부가 관치(官治)의 칼을 빼 든다고 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파고를 막을 수는 없다. 과거 이명박 정부 시절의 ‘기름값 묘한 발언’이나 박근혜 정부의 알뜰주유소 정책, 문재인 정부의 유류세 인하 등 역대 정권마다 갖가지 처방을 내놨지만 시장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던 시도는 대부분 단기 미봉책에 그쳤다. 더욱이 정부의 경고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가격 구조의 가장 큰 지분을 정부 자신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휘발유 가격의 상당 부분은 유류세(교통세·주행세·교육세)와 부가가치세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정유사의 매출도 늘지만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수도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서민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분담하고자 한다면 민간 기업의 팔을 비틀어 가격을 누르라고 호통칠 것이 아니라 세금 구조의 탄력성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정교한 정책 대안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낡은 방식의 단속이나 엄포가 아니다. 시장의 투명성과 경쟁을 촉진하는 ‘시스템’이다. 소비자는 스마트폰 앱으로 10원이라도 싼 주유소를 찾아 헤매는데 정유사의 공급 가격 산정 방식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영업비밀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가격 결정의 블랙박스를 유지하는 한, 시장의 신뢰는 요원하다. 정부는 윽박지르는 심판자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룰을 만드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의 시대로 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석유는 서민 경제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같다. 유가 급등은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이는 곧 실질 소득 감소로 이어져 민생을 옥죄게 된다. 이 엄중한 시기에 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보여주기식 현장 점검 사진이 아니다. 유류세 탄력 세율의 적기 운용, 알뜰주유소의 실질적 경쟁력 강화, 그리고 정유사 유통 마진 구조에 대한 투명한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다. 시장은 권력의 목소리보다 명확한 원칙에 반응한다. 요란한 경고장은 잠시 소나기를 피할 우산은 될지언정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2026년의 대한민국 정부가 1970년대식 물가 단속반의 추억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화려한 엄포가 아니라 주유기 앞에서 느끼는 박탈감을 해소해 줄 합리적이고 정교한 시장 질서다. 그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다.
2026-03-08 09: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