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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짜리 혁명'의 진실…중국 DUV, ASML 성벽에 첫 균열
[경제일보] 중국이 올해 생산한다는 액침형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는 5대다. 네덜란드 ASML이 올해 출하할 것으로 예상되는 액침형 DUV 장비 약 130대와 비교하면 4%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한 곳에 필요한 장비 수를 감안하면 생산라인을 바꾸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그런데 세계 증시는 이 5대에 크게 흔들렸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액침형 DUV 장비 생산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오자 ASML 주가는 장중 8% 넘게 떨어졌다가 5.8% 하락 마감했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각각 13%, 14% 넘게 급락했다.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CXMT)의 증시 상장과 AI 산업의 투자 수익성 논란, 외국인 매도와 레버리지 청산이 겹쳤지만 중국산 DUV 소식이 불안을 증폭한 것은 분명하다. 시장의 반응만 보면 중국이 당장 ASML을 대체하고 한국 메모리 산업을 추월할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과장이다. 반대로 장비 5대를 만들어낸 일을 선전용 행사로만 치부하는 것도 위험하다. 중국산 DUV의 현재 사업 가치는 작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산업의 방향은 가볍지 않다. ◆ 노광장비 한 대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문제 노광은 반도체 회로가 그려진 마스크에 빛을 쏘아 웨이퍼 위 감광액에 회로를 새기는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에서 사진 인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요구되는 정밀도는 전혀 다르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분의 1에 해당하는 회로를 웨이퍼 위 수십 개 층에 반복해 정확히 포개야 한다. DUV는 193나노미터 파장의 불화아르곤 레이저를 사용한다. 액침형 DUV는 렌즈와 웨이퍼 사이에 초순수를 채워 빛의 굴절률과 렌즈의 개구수를 높인다. 같은 파장의 빛으로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도록 만든 기술이다. ASML의 최신 액침형 DUV 장비는 시간당 300장 이상의 웨이퍼를 처리하면서 1나노미터 이하 수준의 오버레이 정밀도를 목표로 한다. 오버레이는 여러 차례 노광한 회로가 얼마나 정확하게 겹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해상도가 좋아도 위아래 회로가 어긋나면 칩은 작동하지 않는다. 노광장비의 경쟁력은 ‘몇 나노를 찍었느냐’만으로 판정할 수 없다. 시간당 웨이퍼 처리량, 장비 가동률, 오버레이 오차, 초점 제어, 결함 밀도, 장비 간 편차, 유지보수 시간과 소모품 수명까지 모두 맞아야 한다. 연구실에서 회로 하나를 그리는 것과 매일 수천 장의 웨이퍼를 같은 품질로 생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ASML의 진입장벽도 장비 설계도 한 장에 있지 않다. 독일 자이스가 공급하는 초정밀 광학계, 레이저 광원과 웨이퍼 스테이지, 계측 장비, 보정 소프트웨어, 수십 년간 축적한 공정 데이터와 글로벌 유지보수망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다. 장비가 고장 났을 때 몇 시간 안에 복구할 수 있는 현장 인력과 부품 공급망도 경쟁력이다. ASML의 시장 지위는 기계 한 대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만든 결과다. ◆ 863계획에서 아이성나까지 이어진 20년 중국의 노광장비 개발은 최근 시작된 프로젝트가 아니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 초 국가 첨단기술 개발계획인 ‘863계획’을 통해 노광장비 국산화에 착수했다. 2002년 설립된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는 건식 DUV 장비를 개발한 뒤 액침형 장비로 영역을 넓혀왔다. 초기 중국 장비는 90나노급 공정에 머물렀다. 해상도를 높이더라도 처리량과 오버레이, 장시간 안정성이 부족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주력 생산라인에 투입하기 어려웠다. 중국은 이후 광학, 정밀 스테이지, 광원, 계측과 제어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기업과 연구기관을 나눠 육성했다. 이번에 주목받은 아이성나는 2023년 상하이에 설립된 국유자본 지원 기업으로 알려졌다. 설립된 지 2∼3년에 불과한 회사가 갑자기 액침형 DUV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SMEE와 별도 장비업체, 연구기관에 축적된 인력과 기술을 결집한 프로젝트에 가깝다. 기업의 나이는 짧아도 기술 계보는 20년 이상 이어진 셈이다. 보도에 따르면 아이성나는 올해 5대, 2027년 20대의 액침형 DUV 장비를 생산할 계획이다. 초기 공급 대상으로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SMIC와 화훙반도체, D램 업체 CXMT가 거론된다. 다만 장비의 공식 성능표와 고객사 양산 인증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생산을 시작했다’는 표현과 ‘상업적 대량생산에 사용할 수 있다’는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 28나노 장비를 7나노 장비로 부를 수 없는 이유 중국 장비의 목표는 단일 노광 기준 28나노급으로 알려졌다. 28나노는 액침형 DUV가 한 번의 노광으로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정 구간이다. DUV로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리는 방법도 있다. 한 장의 복잡한 회로를 두 개나 네 개의 단순한 패턴으로 나눈 뒤 노광과 식각을 반복하는 다중 패터닝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14나노와 10나노 이하 회로도 구현할 수 있다. 중국이 수입산 DUV를 활용해 7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한 것도 이러한 공정 기술과 관련돼 있다. 그러나 28나노 장비로 7나노급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설명과 7나노 전용 장비를 확보했다는 말은 같지 않다. 노광 횟수가 늘면 마스크와 식각·증착 공정도 증가한다. 생산시간이 길어지고 장비 사용량과 전력, 소재 비용이 커진다. 매번 회로를 정밀하게 포개야 하므로 오버레이 오차가 누적되고 수율도 떨어질 수 있다. 반도체 생산비는 노광장비 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 장의 웨이퍼가 생산라인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양품 칩의 비율이 더 중요하다. 동일한 7나노급 칩을 만들더라도 EUV를 활용한 공정과 DUV 다중 패터닝 공정의 원가와 생산성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중국산 DUV가 28나노 회로를 한 번 찍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 최첨단 반도체 양산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장비 출하 뒤에 기다리는 ‘죽음의 계곡’ 새 장비가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면 설치 직후 생산에 투입되지 않는다. 우선 장비가 제시된 해상도와 오버레이 성능을 반복해 구현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장비에서 생산한 웨이퍼와 결과가 일치하는지도 검증한다. 특정 장비만 다른 결과를 내면 전체 공정을 따로 설계해야 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결함 검증은 더 까다롭다. 미세한 입자나 온도 변화, 진동, 렌즈 왜곡과 광원 불안정이 웨이퍼 수율에 영향을 미친다. 하루나 일주일 동안 정상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개월 이상 연속 가동하면서 성능과 부품 수명, 고장 빈도와 복구 시간을 입증해야 한다. 고객사의 공정 레시피와 연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노광장비는 식각·증착·세정·검사 장비와 맞물려 작동한다. 노광 결과가 달라지면 전후 공정의 조건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장비 인증에는 제조사뿐 아니라 팹의 공정 엔지니어, 소재 업체, 마스크와 계측 기업이 함께 참여한다. 중국산 장비가 넘어야 할 벽은 최초의 5대를 조립하는 일이 아니라 이 장비를 고객 생산라인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가동하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5대는 연구·시험 장비에 머문다. 반대로 초기 장비에서 발생한 오류와 수율 데이터를 축적해 20대, 50대로 개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왜 하필 5대인가 중국이 올해 5대만 생산하는 이유는 수요가 없어서라기보다 공급망과 조립 역량이 아직 제한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노광장비에는 수만 개의 정밀 부품이 들어간다. 렌즈와 광원, 스테이지, 모터, 센서, 진동 제어장치와 정밀 계측 부품 가운데 하나만 공급이 늦어져도 완제품을 만들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산 장비에는 아직 일본 등 해외에서 들여오는 일부 핵심 부품이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 내 부품업체의 납기와 품질 문제도 생산 확대를 제약하고 있다. ‘국산 장비’라는 표현이 모든 부품의 100% 중국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장비는 부품만 있다고 대량 조립할 수도 없다. 완성된 장비마다 광학계와 스테이지를 정밀하게 보정해야 한다. 생산량을 늘릴수록 장비 간 편차를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단계에서 제조 노하우와 숙련 인력의 차이가 드러난다. ASML이 장기간에 걸쳐 공급망과 생산설비를 확충하고도 연간 액침형 DUV 출하량을 100여 대 수준으로 관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목표가 2026년 5대에서 2027년 20대로 늘어난다는 것은 생산능력이 네 배로 커진다는 의미이지만 ASML과의 규모 차이는 여전히 크다. ◆ ‘낡은 28나노’가 중국에는 중요한 까닭 28나노를 최첨단 기술과 비교해 낡은 공정으로 보는 시각도 바로잡아야 한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AI 가속기는 3나노·5나노 공정에서 생산되지만 자동차와 산업기기, 통신장비, 가전에는 28나노 이상 성숙 공정 반도체가 대량으로 사용된다. 전력관리반도체, 디스플레이 구동칩, 마이크로컨트롤러, 네트워크칩과 각종 센서는 최신 공정을 사용할 필요가 없거나 최신 공정을 적용했을 때 오히려 비용이 증가한다. 세계 반도체 수요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성숙 공정에서 발생한다. 중국이 28나노급 장비를 안정적으로 양산하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곳도 이 시장이다. 중국 팹은 수입 장비의 추가 공급과 유지보수가 제한되더라도 국내 장비로 생산설비를 늘릴 수 있다. 중국 정부와 국유기업은 성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국산 장비를 의무적으로 구매해 초기 시장을 만들어줄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을 장비가 중국 내수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다. 장비업체는 확보한 매출과 생산 데이터를 다시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 있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이 기술 격차를 줄이는 시험장이 되는 구조다. ◆ 한국을 먼저 압박할 곳은 HBM이 아닌 범용 D램 중국산 DUV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사업을 단기간에 위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HBM은 미세공정에서 D램 셀을 만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개의 D램 다이를 얇게 가공해 수직으로 쌓고 TSV로 연결해야 한다. 적층·접합, 발열 제어와 신호 무결성, 패키징 수율, 고객사의 GPU·가속기 인증이 모두 필요하다. HBM4 이후에는 로직 베이스 다이와 파운드리 공정, 첨단 패키징 기술의 결합이 더욱 중요해진다. DUV 한 종류를 확보했다고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미국의 대중국 HBM 수출통제까지 고려하면 중국이 한국 기업을 곧바로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한국이 주의 깊게 볼 곳은 일반 D램이다. CXMT는 이미 세계 D램 출하량의 약 8%를 차지하는 4위 업체로 성장했다. 아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기술 및 수익성 격차가 있지만 DDR4와 DDR5, 모바일용 LPDDR 시장에서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중국산 DUV가 양산 인증을 통과하면 CXMT는 수입 장비에 대한 불확실성을 낮추고 증설을 지속할 수 있다. 중국 스마트폰과 PC, 서버업체가 자국산 메모리 채택을 늘리면 CXMT는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전에 중국 내수만으로도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 기업에 나타날 첫 충격은 시장점유율 상실보다 가격 하락일 가능성이 높다. CXMT가 범용 D램 공급을 늘리면 국제 가격의 하단이 낮아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에서 높은 수익을 거두더라도 일반 D램의 수익성이 악화하면 전체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중국산 DUV는 HBM 왕좌를 빼앗는 무기라기보다 범용 메모리 시장의 가격 질서를 바꾸는 기반시설로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미국은 2022년 이후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제한하기 위해 노광과 식각·증착·계측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와 첨단 AI 반도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네덜란드와 일본도 일부 장비 수출 제한에 동참했다. 2024년에는 HBM과 장비 생산에 필요한 소프트웨어까지 통제 범위가 확대됐다. 수출통제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은 최첨단 장비를 제때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기존 수입 장비의 유지보수와 부품 공급에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중국이 EUV를 활용한 대규모 첨단공정을 구축하는 시점도 늦어졌다. 하지만 통제에는 반대 방향의 힘도 작용한다. 해외 장비를 살 수 없게 되면 중국 팹은 성능이 부족해도 국산 장비를 시험해야 한다. 정부는 투자 실패를 감수하면서 자금을 공급하고, 고객사는 초기 제품의 결함을 함께 고친다.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선택받기 어려운 장비가 보호된 시장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수출통제가 중국의 개발 비용과 시간을 늘릴 수는 있어도 기술 개발 의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오히려 노광장비 국산화를 경제성의 문제가 아닌 국가안보 과제로 바꿨다. 중국 기업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도 투자를 지속할 수 있다. 미국과 동맹국도 통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우위를 지킬 수 없다. 중국의 기술 진전을 늦추는 동안 차세대 기술과 공급망, 고객 생태계의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 통제가 시간을 벌어주는 정책이라면 혁신은 그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책이다. ◆ 한국 반도체주 급락, 공포와 현실을 구분해야 중국산 DUV 5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가치를 하루아침에 10% 이상 떨어뜨릴 만큼 직접적인 실적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올해와 내년 생산량만 놓고 보면 한국 반도체 공장의 생산능력이나 HBM 수주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다. 지난 28일 주가 급락은 여러 불안이 한꺼번에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비해 빅테크 기업의 수익 창출이 더디다는 우려, CXMT의 자금 조달과 증설 가능성, 중국 장비 국산화, 외국인 대규모 매도와 레버리지 포지션 청산이 겹쳤다. 그럼에도 시장의 과민 반응에는 읽어야 할 메시지가 있다. 투자자들은 장비 5대의 매출 효과가 아니라 ASML 독점과 한국 메모리 지배력이 영구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했다. 지금까지 거의 0으로 보던 중국 장비의 성공 가능성을 아주 낮은 확률이나마 계산에 넣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급락을 전적으로 비이성적 공포라고 단정하는 것도, 중국이 곧 한국을 추월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단기 주가는 과도하게 움직였을 수 있지만 중국 공급망 자립이라는 장기 변수가 현실로 다가온 것은 사실이다.
2026-07-29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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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디올백 종결' 뒤집어 보는 경찰…권익위는 누구의 권익을 지켰나
[경제일보]경찰이 20일 정부세종청사 국민권익위원회를 압수수색했다. 대상은 유철환 전 권익위원장과 정승윤 전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 사용하던 사무실 등이다. 경찰청 3대 특검 인계사건 특별수사본부는 지난 16일 정 전 부위원장의 주거지도 압수수색했다. 적용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이다. 수사의 출발점은 300만원짜리 가방이 아니다. 권익위가 2024년 김건희씨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을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하는 과정에서 수뇌부가 실무진의 조사와 전원위원회의 심의에 부당하게 개입했는지가 핵심이다. 당시 언론이 흔히 사용한 ‘무혐의’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권익위는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아니다. 형사책임의 유무를 확정하는 기관이 아니라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를 조사해 수사기관이나 감사기관에 이첩·송부할 사안인지 판단하는 반부패 행정기관이다. 권익위가 내린 결론은 형사재판의 무죄판결이 아니라 신고사건의 종결 결정이었다. 그 종결 결정이 정상적인 조사와 심의를 거쳐 나왔는지를 경찰이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처벌 규정이 없다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문제 사건은 202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씨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취임 후 서울 서초동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최재영 목사로부터 300만원 상당의 명품가방을 받았다. 참여연대는 2023년 12월 19일 김씨와 윤 전 대통령 등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권익위에 신고했다. 권익위는 신고 접수 후 업무일 기준 116일이 지난 2024년 6월 10일 사건을 종결했다. 부패방지권익위법은 신고사항을 접수일부터 6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하고, 보완이 필요할 때도 30일 범위에서만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권익위는 최장 90일의 법정 처리기간도 넘겼다. 정승윤 당시 부위원장은 대통령 배우자를 제재하는 규정이 청탁금지법에 없다는 점을 종결 이유로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과 가방 제공자의 직무 관련성, 가방이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는지도 논의한 뒤 종결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배우자 본인을 직접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는 설명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청탁금지법은 금품을 받은 공직자 배우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로 사건 전체를 끝낼 수는 없다. 청탁금지법은 공직자의 배우자가 공직자의 직무와 관련해 금품을 받는 행위를 금지한다. 공직자가 배우자의 수수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하지 않은 공직자를 처벌하는 구조도 두고 있다. 금품 제공자에 대한 제재 규정도 있다. 헌법재판소 역시 청탁금지법이 배우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는 대신 공직자의 신고 의무와 불이행에 대한 제재를 두고 있다는 법률 구조를 전제로 판단했다. 따라서 권익위가 확인했어야 할 대상은 김씨 개인의 처벌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가방 제공과 대통령 직무 사이에 관련성이 있었는지, 윤 전 대통령이 가방 수수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알게 된 뒤 소속 기관장에게 신고하거나 반환·인도 조치를 했는지, 제공자의 행위가 청탁금지법에 저촉되는지까지 조사했어야 했다. 배우자 처벌 조항이 없다는 문구는 조사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에 가까웠다. 권익위는 법률의 한 문장을 꺼내 사건 전체에 덮었다. 법조문을 좁게 잘라 읽으면 결론은 쉬워진다. 그러나 반부패기관의 임무는 권력자에게 가장 유리한 문구를 찾아주는 데 있지 않다.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 법률이 요구하는 책임의 범위를 가려내는 것이 권익위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사 마감일 밤, 조사 대상 대통령과 만난 권익위 2인자 2026년 출범한 권익위 정상화 추진 태스크포스의 조사 결과는 당시 종결 결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권익위 TF에 따르면 정 전 부위원장은 담당 부서의 의견과 달리 판단을 유보하고 추가 보완을 반복적으로 지시해 사건 처리를 지연시켰다. 전원위원회가 열리기 약 2시간 전에는 일부 정무직·상임위원을 따로 불러 수사기관 이첩이나 송부가 아닌 ‘사건 종결’을 처리 방향으로 제시한 사실도 확인됐다. 더 심각한 대목은 대통령 관저 회동이다.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사건 처리기간 중 윤 전 대통령 등과 심야에 대통령 관저에서 약 1시간 동안 비공식 회동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회동 시점은 당초 사건 처리 마감일 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윤 전 대통령은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권익위 신고사건의 피신고자였다. 조사기관의 수뇌부가 조사 대상자를 비공식적으로 만난 셈이다. 권익위가 회동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경찰이 밝혀야 한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사건 처리 방향에 관한 요청이나 언급이 있었는지, 회동 뒤 실무진에 어떤 지시가 내려갔는지, 회동 사실을 전원위원들에게 알렸는지가 수사의 중심에 놓인다. 조사 대상자와 조사기관 수뇌부의 비공식 접촉은 그 자체로 기관의 공정성을 훼손한다. 법률가라면 사건 당사자와 심판자의 접촉이 어떤 의심을 낳는지 모를 수 없다. 사건 당사자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혜를 의심할 만한 접촉부터 피하는 것이 공직자의 의무다.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면 법률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직업적 양심의 문제다.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문구까지 의결서에 추가 TF가 확인한 의결서 작성 과정도 정상적인 행정기관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권익위 의결서는 원칙적으로 사건을 조사한 담당 부서가 전원위원회의 논의와 의결 내용에 따라 작성한다. 그런데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상정 의안에 없거나 전원위원회에서 논의하지 않은 사항을 의결서에 직접 추가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전원위원회는 장식물이 아니다. 여러 위원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사건을 심의하고 다수 의견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든 합의제 기관이다. 회의 전에 결론을 정해 놓거나 회의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사후에 의결서에 넣었다면 합의제 의사결정의 외형만 빌린 셈이다. 의결서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문이 아니다. 실제 회의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내용을 기록하는 공문서다. 수뇌부가 원하는 결론에 맞춰 의결서의 논리를 사후 보강했다면 전원위원들의 심의권과 실무진의 고유 업무를 침해했는지가 문제 된다.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한다. 대법원은 실무 담당자에게 법령과 절차에 따른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있는데도 상급자가 그 기준과 절차를 어기도록 지시한 경우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시해 왔다. 경찰은 정 전 부위원장과 유 전 위원장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실무진이 원래 작성한 보고서와 최종 의결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전원위원들의 독립적인 판단이 침해됐는지를 문서와 전자정보로 확인해야 한다. 직권남용죄 성립은 부당한 지시가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무진이 법령상 의무가 없는 일을 실제로 했거나 고유한 권한 행사가 방해된 결과까지 입증해야 한다. 이번 압수수색의 성패도 그 연결고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복원하느냐에 달렸다. 반대 의견을 낸 간부에게 돌아온 발언 제한과 업무 배제 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장 참담한 대목은 실무 책임자였던 김모 부패방지국장의 죽음이다. 김 국장은 명품가방 사건이 종결된 지 약 두 달 뒤인 2024년 8월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공개된 김 국장의 메시지에는 “지난 20년간 만든 제도를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가방 건과 관련된 여파가 너무 크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국장은 종결 결정에 반대 의견을 표시한 권익위원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특정 사건 하나와 곧바로 연결해 형사책임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익위 자체 TF가 확인한 조직 내부의 처우는 별개의 문제다. TF는 정 전 부위원장이 사건 종결에 반대했던 김 국장의 회의 발언권을 제한하고 주요 사건 업무에서 배제했으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토대로 공개적으로 비난한 정황을 확인했다. 권익위는 해당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하고 정 전 부위원장의 현 소속기관에 비위 사실을 통보하기로 했다. 고인과 유족에게 기관 차원의 사과도 결정했다.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는 실무자의 의견이 조직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발언 제한과 업무 배제로 돌아왔다면 권익위의 내부 통제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반대 의견을 설득하지 못하자 사람을 배제하고 결론을 밀어붙이는 조직에서 합의제 의사결정은 작동할 수 없다. 부하 직원에게 청렴을 교육하면서 정작 수뇌부는 권력자의 사건 앞에서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면 그보다 모순적인 일도 없다. 법률가의 지식이 권력의 방패가 될 때 유 전 위원장과 정 전 부위원장은 모두 법률가다. 유 전 위원장은 판사 출신이고 정 전 부위원장은 검사 출신 법학교수다. 법률의 문언과 행정절차가 왜 존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법률가 출신 고위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책임은 법조문을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권력자가 불편해하더라도 법과 절차에 따라 판단하고, 실무자가 외압 없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 일을 하라고 장관급 위원장과 차관급 부위원장 자리를 맡긴다. 법률 지식을 권력자의 책임을 가리는 데 사용하면 무지보다 해롭다. 법을 모르는 사람은 잘못 해석할 수 있지만, 법을 아는 사람이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문구를 찾아 붙이면 법률은 책임을 묻는 기준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기술로 전락한다. 청탁금지법에 대통령 배우자 직접 처벌 규정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은 없다. 국민이 권익위에 물은 것은 법 조항 한 줄이 아니었다. 대통령 배우자가 고가의 금품을 받고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최고 권력자에게도 일반 공직자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지를 물었다. 권익위 수뇌부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116일을 끈 뒤 배우자 처벌 규정이 없다는 설명을 내놓고 사건을 닫았다. 그 과정에서 조사 대상 대통령과 비공식 회동이 있었고, 회의 직전 종결 방향을 제시했으며,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내용이 의결서에 들어갔다는 것이 권익위 자체 조사 결과다. 이런 정황이 확인되고도 공직자의 재량이나 법률 해석의 차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다. 재량은 정해진 절차 안에서 행사할 때 보호받는다. 법률 해석은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반대 의견을 검토한 뒤 내놓아야 설득력을 얻는다. 결론을 정해 놓고 절차를 거꾸로 밟았다면 재량이 아니라 권한의 사유화다. 권익위가 잃은 것은 한 사건의 신뢰가 아니다 권익위는 스스로를 ‘대한민국 반부패 총괄기관’이라고 소개한다.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방지법을 관장하고 공직사회 청렴도를 평가하며 부패 신고자를 보호하는 기관이다. 그런 기관이 최고 권력자의 배우자 사건 앞에서 처리기간을 넘기고, 조사 대상자와 수뇌부가 비공식으로 만나고, 실무진의 반대 의견을 누르고, 회의에서 논의하지 않은 내용까지 의결서에 넣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권익위가 잃은 것은 김건희씨 사건 하나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일반 공무원과 국민에게 청렴을 요구할 자격을 잃었다. 민원인에게 절차를 지키라고 말하고 공직자에게 배우자의 금품 수수를 신고하라고 교육하면서 대통령 부부에게는 법의 빈틈부터 찾아줬다는 인식이 남았다. 공직자는 정권과 함께 일할 수 있지만 정권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임명권자에게 인간적인 의리를 느낄 수는 있어도 법률상 직무를 그 의리 아래 둘 수는 없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펴 결론을 정하는 사람이라면 반부패기관의 수뇌부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경력, 판사와 검사를 지냈다는 이력, 법을 가르친다는 직함도 공직자의 양심을 대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법과 절차를 잘 아는 사람이 본분을 저버렸다면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경찰 수사는 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밝히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대통령 관저 회동과 사건 지연, 사전회의, 의결서 수정, 실무진 배제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권익위의 독립적인 심의 절차가 권력을 위해 훼손됐다면 그 책임을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물어야 한다. 권익위 간판에는 아직도 ‘청렴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그 문구를 다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권익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 반부패기관의 신뢰는 홍보 문구나 사과문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법을 굽힌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내고 그에 맞는 책임을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2026-07-20 1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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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하메네이 장례식 공식 개시…반미 구호 속 엿새 애도
[경제일보] 이란이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 절차를 공식 시작했다. 지난 2월 미국·이스라엘 공습으로 숨진 뒤 전쟁 상황 탓에 장례를 미뤄온 지 4개월여 만이다. 미국 독립기념일이자 건국 250주년인 4일 장례가 본격화되면서 이란 내부의 반미·반이스라엘 정서도 다시 고조되고 있다. 장례식은 4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대형 예배장소인 이맘호메이니 대모살라 광장에서 시작됐다. 하메네이의 운구 행렬이 도착하기 전부터 광장 주변에는 추모객이 몰렸다. 일부 조문객들은 복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들고 “미국에 죽음을”, “복수”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란 당국은 장례 기간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몰릴 것으로 보고 교통, 숙박, 식사 지원에 나섰다. 로이터는 이란 당국이 앞으로 이어질 장례 행렬에 수백만명의 동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메네이는 1989년 최고지도자에 오른 뒤 37년간 이란의 정치와 군사, 종교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장례는 단순한 추모 행사가 아니라 이슬람공화국 체제 결속을 과시하는 정치적 무대이기도 하다. 장례 일정은 오는 9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테헤란 모살라에서 일반 조문이 진행된 뒤 운구는 이란 중부 종교도시 곰으로 옮겨진다.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 나자프와 카르발라에서도 장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마지막 매장은 하메네이의 고향이자 이란 북동부의 대표 시아파 성지인 마슈하드 이맘 레자 성지 인근에서 진행된다. 하메네이는 지난 2월28일 미국·이스라엘 공습으로 관저에서 가족 일부와 함께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슬람 장례 관습상 매장은 사망 직후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쟁과 보안 위험 때문에 장례는 휴전 이후로 연기됐다. 이란 입장에서는 이번 장례가 전쟁을 견뎌냈다는 체제의 내구성을 보여주는 행사이자 대미·대이스라엘 강경 기조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행사장 주변에서는 군과 경찰, 바시즈 민병대의 경계가 강화됐다. 이란은 장례 기간 미국과 이스라엘의 추가 공격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장례가 미국 독립기념일과 겹쳤다는 점도 상징성이 크다. 이란은 하메네이 장례를 통해 반미 결집을 극대화하려 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한 보복 요구도 내부 여론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관심은 하메네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모즈타바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의 참석 여부에도 쏠린다. 모즈타바는 부친이 숨진 2월28일 공습 당시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후 공개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례식에 직접 참석할 경우 새 권력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장면이 될 수 있지만 불참할 경우 건강 이상설과 권력 장악력 논란이 다시 커질 수 있다. 하메네이 장례식은 추모와 정치가 뒤섞인 장면이다. 이란 지도부는 대규모 조문 행렬을 통해 체제 결속과 반미 저항의 상징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난 뒤 이란이 마주할 현실은 더 복잡하다. 전쟁의 상처, 제재로 약해진 경제, 새 최고지도자의 정통성 문제, 미국과의 후속 협상이 동시에 남아 있다. 하메네이의 관이 마슈하드에 묻힌 뒤에도 이란 권력의 불안정성은 쉽게 묻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2026-07-04 12: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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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아크, 신규 클래스 '차원술사' 띄운다…여름 업데이트로 복귀 장벽 낮춘다
[경제일보] 스마일게이트가 올여름 ‘로스트아크’의 성장 구조를 손보고 신규 클래스와 최상위 레이드, 이용자 편의성 개선을 담은 대규모 업데이트를 선보인다. 최근 성장 중심 콘텐츠로 게임 경험이 무거워졌다는 이용자 피로를 줄이고 신규·복귀 이용자가 다시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스마일게이트는 온라인 쇼케이스 ‘2026 로아온 썸머’를 열고 여름 시즌 업데이트 로드맵을 공개했다. 이날 방송에는 정소림 캐스터와 전재학 로스트아크 디렉터가 출연했으며 약 6만명의 이용자가 동시 시청했다. 전 디렉터는 “최근 스토리와 콘텐츠가 다소 무겁고 성장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게임 경험이 딱딱해졌다는 고민이 있었다”며 “이번 여름은 누구나 쉽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말랑말랑 프로젝트’를 통해 로스트아크만의 즐거움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업데이트의 중심에는 여름 한정 이벤트 공간 ‘마하라카 썸머 캠프’가 있다. 신규 모험가 육성과 이용자 교류, 미니게임, 보상 교환 기능을 갖춘 종합 커뮤니티 공간으로 꾸며진다. 파도타기, 모래놀이, 펀치머신, 버스킹 등 놀이 콘텐츠와 함께 AI와 대결하는 보드게임 ‘티카투카’도 추가된다. 신규·복귀 이용자 지원책도 전면 개편된다. 기존 익스프레스 시스템을 대체하는 ‘모코코 베이스 캠프’가 도입된다. 워밍업 프로그램을 통해 짧은 플레이만으로 아이템 레벨 1700까지 성장할 수 있고 점프업 부스트를 활용하면 1720까지 추가 성장이 가능하다. 재련과 학습 부담으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던 신규 이용자 문제를 줄이려는 조치다. 신규 오리지널 클래스 ‘차원술사’는 7월 8일 출시된다. 남성 요즈 계열 클래스인 차원술사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환영술을 사용한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무기로 활용하며 공격 적중 시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전투 스타일은 시간 관리자와 공간 검사 두 갈래로 제공된다. 8월 5일에는 신규 최상위 콘텐츠인 두 번째 그림자 레이드 ‘죽음의 계율자 벨가르딘’이 추가된다. 카다룸 제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8인 공격대 콘텐츠로 총 2개 관문으로 구성된다. 입장 레벨은 노말 1750, 하드 1770, 나이트메어 1780이다. 신규 성장 장비 ‘완갑’도 벨가르딘과 함께 도입된다. 완갑은 기존 장비처럼 재련을 통해 성장하지만 아이템 레벨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독립 성장 시스템이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함께 제공하며 최대 고대 등급까지 성장할 수 있다. 레이드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구조 개편도 이뤄진다. 카제로스 레이드 4막과 종막에는 싱글 모드가 추가된다. 그림자 레이드부터는 새로운 난이도 체계인 ‘매칭 모드’가 도입된다. 무제한 부활과 전멸 실패 제거, 전투 지원 버프 등을 적용해 파티 플레이 경험은 유지하되 부담을 낮춘다. 반면 나이트메어와 익스트림 난이도는 최상위 이용자를 위한 도전 콘텐츠로 차별화한다. 8월에는 과거 엔드 콘텐츠 보스를 다시 만나는 4인 레이드 ‘종언의 잔영’도 추가된다. 천공의 파수꾼, 모르페, 프로켈, 라우리엘 등 기존 보스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9월에는 익스트림 3막과 종막 업데이트도 예정돼 있다. 편의성 개선도 병행된다. 카드 프리셋은 보스 취약 속성에 맞춰 자동 변경되고 아크 그리드는 현재 보유 코어 기준 최적 전투력으로 자동 세팅하는 기능이 추가된다. 가공 완료 젬 일괄 분해 기능도 지원한다. 여름 시즌 컬래버레이션도 진행된다. 7월에는 서울 성수동 대림창고에서 무신사와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고 협업 아바타를 선보인다. 8월에는 맘스터치와 협업한 한정 메뉴와 굿즈를 출시한다. 로스트아크 최초의 드롭스 이벤트도 치지직과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전 디렉터는 “언제든 돌아올 모험가를 맞이할 수 있도록 성장 지원과 플레이 환경 개선에 집중했다”며 “올겨울에는 2부 스토리 전반과 코어 플레이 경험 변화까지 포함한 대규모 업데이트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2026-06-21 13: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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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끝났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경제일보] 판결문은 남았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휴일에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법원으로 향했던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다음 날 새벽 법원 청사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사회적 관심이 컸고 판결 전후로 정치적 해석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재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멈춰야 할 것은 단정이다. 고 신종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마지막 선택을 특정 재판이나 특정 판결과 곧바로 연결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유서에는 김건희 여사 재판과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가까운 동료들조차 사정을 알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사망 원인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죽음의 이유는 남은 사람들이 편한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을 정치적 해석의 재료로 삼는 순간 고인의 마지막은 다시 진영의 소음 속에 묻힌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다. 사망 원인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여 있던 업무 환경이 적정했는지는 별개의 검토 대상이다. 원인을 단정하지 않는 태도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따져보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고인은 서울고법 형사15-2부 재판장으로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들을 맡았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 항소심도 그중 하나였다. 서울고법 형사1부가 내란 사건 전담 재판부로 지정되면서 기존 주요 사건들이 다른 재판부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고인이 속한 재판부의 부담도 커졌다는 말이 법원 안팎에서 나왔다. 사회적 관심 사건은 사건 수 하나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록이 두껍고 쟁점이 복잡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무겁지만 부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일 하나를 잡아도 해석이 붙고 증거 판단 하나에도 정치적 의미가 덧씌워진다. 법정 안에서는 증거와 법리로 다투지만 법정 밖에서는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목소리들이 판결을 기다린다. 판사가 어느 한쪽의 기대와 다른 결론을 내리면 판결문은 사라지고 판사 이름이 먼저 불려 나온다. 항소심 재판장은 1심 결론을 다시 읽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인정의 빈틈, 증거능력의 경계, 공모관계의 추론, 양형의 균형을 다시 따져야 한다. 특히 1심 판단을 일부 뒤집는 판결은 부담이 더 크다. 판결문 한 문장은 상고심의 검증과 여론의 공격을 동시에 견뎌야 한다. 법률가에게는 충분히 다툴 수 있는 쟁점도 정치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배신과 응징의 문제로 바뀐다. 법리 판단은 줄어들고 의도 추궁이 앞선다. 김건희 여사 사건 항소심 판결도 법률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1심과 달리 일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부분은 상급심에서 다시 다퉈질 수 있다. 그것이 재판 절차다. 그러나 판결 비판은 판결문 안의 논리와 증거 판단을 향해야 한다. 판사를 향해 정치적 의도를 추정하거나 개인을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흘러가면 사법 감시는 제 기능을 잃는다. 재판의 독립은 법관이 비판받지 않을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동시에 법관이 진영 정치의 표적이 되어도 괜찮다는 뜻도 아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그러나 판결을 쓰는 사람의 고통까지 판결문에 적히지는 않는다. 선고가 끝나면 사람들은 결론만 본다. 유죄냐 무죄냐, 1심을 유지했느냐 뒤집었느냐, 형이 무겁냐 가볍냐만 남는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재판부가 어떤 기록을 읽고 어떤 문장을 고치고 어떤 부담을 견뎠는지는 법정 밖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법관의 직업적 숙명이라고 넘겨온 그 지점에 한국 사법의 오래된 문제가 있다. 법원은 오랫동안 성실한 법관의 밤샘 노동을 제도의 여력처럼 써왔다. 기록을 집으로 가져가고 주말에 법원에 나오고 판결문을 몇 번이고 고치는 일은 법관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성실한 법관이 많다는 사실은 제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제도가 업무 처리 능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한계는 무너진다. 법관의 독립은 고립과 다르다. 외부 권력과 여론에서 벗어나 판단하라는 말은 그 무게를 혼자 견디라는 뜻이 아니다. 독립된 판단을 가능하게 하려면 조직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재판부에는 그에 맞는 인력과 시간과 행정 지원이 따라야 한다. 사건 배당은 균형을 가져야 하고 일정 조정은 현실을 반영해야 하며 법관의 건강 이상 신호를 확인하는 장치도 있어야 한다. 판사를 혼자 두면서 독립을 말하는 것은 독립의 의미를 좁게 읽는 것이다. 고인은 불면증 증세가 심각했지만 재판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처방받고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은 무겁다. 판사가 자신의 건강보다 재판 차질을 먼저 걱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직업윤리로 보면 책임감일 수 있다. 조직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 신호다. 재판을 책임지는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업무가 계속 굴러가야 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들여다봤어야 할 문제다. 판사들은 자신의 부담을 밖으로 잘 말하지 않는다. 판결로 말해야 한다는 직업 문화가 강하고 법원 내부 사정을 드러내는 일도 조심스러워한다. 법원 조직은 때때로 그 침묵을 안정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견딜 만한 것은 아니다. 침묵은 법관 사회의 미덕일 수 있지만 동시에 위험을 늦게 발견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판사가 무너지는 순간이 돼서야 조직이 움직인다면 이미 늦다. 서울고법이 이번 일을 계기로 법관들의 실질적인 업무 부담 경감과 제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리기로 한 것은 필요한 조치다. 다만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법원은 추상적인 업무 경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준을 내놓아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의 배당 원칙, 고난도 형사사건 담당 재판부의 사건 수 조정, 재판연구 인력의 보강, 판결문 작성 부담 완화, 장기 미제 사건과 긴급 사건의 우선순위 조정 기준이 필요하다. 법관의 정신건강 관리도 복지 차원을 넘어 재판 안전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정치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권은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법원을 공격하고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같은 법원, 같은 절차, 같은 법관을 두고 결론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사법부 독립을 말한다. 판결 비판은 가능하다. 정치권도 판결에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법관 개인을 향해 정치적 낙인을 찍는 일은 다르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압박이다. 정치권의 언어가 재판을 압박한다면 언론의 보도 방식은 그 압박을 키우거나 줄인다. 사회적 관심 재판을 보도할 때 법리보다 파장을 앞세우고 쟁점보다 진영의 반응을 먼저 배치해온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판결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채 결론만 뽑아 정치적 의미를 붙이는 보도는 재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일에 가깝다. 법원이 국민을 설득하려면 판결문이 더 친절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도 재판을 전달하려면 최소한 판결의 문맥과 법리의 뼈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법 불신이 커진 시대에 법원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판결문은 더 치밀해야 하고 절차는 더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사법 불신이 법관 개인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사를 공격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판부의 의도를 단정하는 문화는 결국 법원을 더 약하게 만든다. 한 판사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사인을 추정하는 일이 아니다. 고인을 특정 정치 사건의 상징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이제 질문은 사망 원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향해야 한다. 주요 재판이 왜 소수 재판부에 집중되는지,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판사가 왜 외부 비난과 내부 부담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지, 법관의 건강 문제가 왜 재판 차질이라는 말 앞에서 뒤로 밀려왔는지 따져야 한다. 고인의 마지막 마음은 누구도 대신 말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법관 한 사람이 주요 재판의 무게, 조직 내부의 부담, 외부의 시선, 건강의 한계 속에서 홀로 오래 서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사법부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해야 할 일은 추모의 말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재판을 맡은 사람을 지키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판도 지켜진다. 재판은 국가가 시민에게 행사하는 가장 무거운 권한 중 하나다. 그래서 판사는 냉정해야 하고 독립적이어야 하며 비판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판사를 고립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법정의 권위는 판사의 침묵과 희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건 배당, 충분한 지원, 절제된 공론장, 판결 비판과 인신공격을 구별하는 사회적 감각 위에서 유지된다. 재판은 끝났다. 판결문은 남았다. 그러나 그 판결문을 쓴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 문장 앞에서 법원은 업무 부담을 말해야 하고 정치권은 판결 비판의 선을 돌아봐야 하며 언론은 재판을 소비해온 방식을 점검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누구의 책임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죽음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26-05-30 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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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고가 붕괴, 이것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경제일보] 1966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구조물이 노쇠해 무너졌다면, 사람들은 세월 탓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소문 고가도로는 무너지기 7년 전에 이미 D등급 판정을 받았다. 그 뒤로도 콘크리트 탈락이 반복됐고, 사고 당일 새벽에는 구조물이 2.9cm 주저앉는 이상 징후까지 확인됐다. 그 모든 경고를 알면서도 사람을 현장 안으로 들여보낸 끝에 세 명이 죽었다.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부를 수는 없다. 서소문 고가도로는 충정로역과 시청역을 잇는 길이 335m의 구조물로, 2019년 정밀 안전진단에서 시설물 안전등급 'D등급' 판정을 받았다. 콘크리트 강도 저하와 철근 부식, 전 구간에 걸친 탈락 흔적이 확인됐다. D등급이란 즉각적인 사용 제한과 정밀 검토를 요하는 상태, 사실상 '지금 당장 손을 써야 한다'는 행정적 선고다. 그런데 서울시가 선택한 것은 철거가 아니었다. 보수 공사와 통행차량 중량 제한이라는 차선책으로 버텼고, 그 사이 2021년 바닥판 탈락, 2024년 콘크리트 탈락과 보 강선 파손이 잇따랐다. 철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D등급 판정으로부터 6년이 지난 2025년 4월이었다. 구조물은 그 6년 동안 무너질 이유를 차곡차곡 쌓았고, 사람들은 그 이유를 보고도 외면했다. 사고 당일의 경위는 인재의 성격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경의중앙선 열차가 고가 아래를 통과하는 탓에 철거 작업은 새벽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하루 세 시간으로 묶여 있었다. 사고 전날 새벽 그 시간대에 슬래브 절단 작업을 진행하던 중 구조물이 2.9cm 주저앉는 단차가 발생했다. 공사 관계자들은 이상 징후를 인지하고 작업을 중단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적인 대응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12시간 후, 그들은 임시 보강재도 없이 현장관리소장과 감리단장, 외부 전문가를 현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균열이 발생한 지점에 추가적인 지지 구조를 구축하지 않은 채 '긴급 안전진단'을 강행한 것이다. 무너질 가능성이 눈앞에 드러난 구조물 위에 사람을 올려보내는 것이 안전진단이라면, 그 진단의 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붕괴 1분 30초 전, 그 고가 아래로 열차가 지나갔다. 5분여 전에는 KTX도 통과했다. 수십 명을 태운 열차가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직후 상판이 내려앉은 것이다. 이 몇 분의 격차를 '다행'이라는 말로 정리해 버리기에는, 우리가 그 행운에 기대온 세월이 너무 길다. 우연이 막아낸 대참사를 안전 관리의 성과로 착각하는 사회는, 다음번 우연을 기다리는 사회일 뿐이다. 경찰은 국과수·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합동 감식에 착수하고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수사 중이다. 단차 발생 후 보고 체계가 작동했는지, 현장 진입을 지시한 것이 누구인지, 그 결정이 어떤 근거 위에 내려졌는지는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법적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과, 이번 사고가 왜 인재인지를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32년이 흘렀다. 그 뒤로 이 나라는 건설 안전 제도를 수차례 개편했고,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무거운 법률도 만들었다. 그런데도 2026년 서울 도심에서 D등급 구조물이 6년을 방치되고, 이상 징후를 앞에 두고 관계자들이 무방비로 현장에 투입되는 일이 되풀이된다. 제도는 쌓였는데 현장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32년 동안 고쳐온 것은 서류였지 현장의 문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번 사고의 희생자들은 이름 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었다. 현장관리소장과 감리단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안전 체계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인지, 잘못된 지시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멈춘다'는 선택지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구조 속에 있었는지 그것을 가리는 것은 수사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상 징후가 확인된 구조물 앞에서 작업을 멈추고 사람을 빼낼 수 있는 권한과 문화가 그 현장에 없었다는 것은, 세 사람의 죽음이 이미 답으로 내놓았다. 노후 구조물 D등급 이하 시설의 조속한 처리 기준을 법제화하고, 이상 징후 발생 시 현장 진입 기준을 명문화하는 일은 더 미룰 수 없다.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현장에서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이 아무 눈치 없이 작업을 세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그 결단이 허용되지 않는 한, 어떤 법률도 어떤 감리 체계도 사람의 목숨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 서소문 고가는 60년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세 사람을 그 아래로 들여보낸 결정은 사람이 내렸다.
2026-05-28 0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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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일베 폐쇄·징벌배상 검토 필요"…혐오표현 규제 공론화 예고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조롱·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 일간베스트저장소와 같은 사이트의 폐쇄·과징금 부과까지 포함한 제도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 추도식이 열린 봉하마을에서 일베 이용자로 추정되는 방문객들이 조롱성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 직후다. 이 대통령은 24일 소셜미디어에 “‘봉하마을서 일베 손가락질 사진 찍어’…조수진 노무현재단 이사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며 “엄격한 조건 하에 조롱·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 징벌배상 및 일베처럼 조롱·혐오를 방치·조장하는 사이트 폐쇄, 징벌배상, 과징금 등 필요 조치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공론화와 실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일베처럼 조롱·모욕으로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데 대해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처벌을 포함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병존한다”며 “국무회의에도 지시하겠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라고 적었다. 논란은 전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 추도식에서 불거졌다. 노무현재단 이사인 조수진 변호사는 일베 이용자로 추정되는 방문객들이 현장에서 조롱성 행동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조 변호사가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하며 혐오표현 처벌법 제정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현장에는 일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진 티셔츠를 입은 청년들이 특정 손가락 모양으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다만 이들의 실제 소속이나 조직적 동원 여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단계는 아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민주화운동과 사회적 참사, 정치적 추모 공간을 겨냥한 조롱성 표현에 강경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앞서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논란 당시에도 이 대통령은 역사적 아픔을 상업적 이벤트 소재로 삼은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에는 특정 기업 마케팅을 넘어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 운영자의 책임 문제로 논의가 확장됐다. 단순 게시물 작성자 처벌을 넘어, 조롱·혐오 표현을 반복적으로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사이트 자체에 과징금, 징벌배상, 폐쇄 등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검토하자는 취지다. 쟁점은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보호의 경계다. 현행법은 명예훼손, 모욕, 불법정보 유통 등 개별 조항을 통해 일부 표현을 규제하지만 혐오표현 전반을 직접 포괄하는 일반법은 마련돼 있지 않다. 국내 법학계에서도 혐오표현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하는 견해가 오랫동안 맞서왔다. 일베 폐쇄 논란은 과거에도 반복됐다. 2013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노 전 대통령을 폄훼하는 게시물이 확산되며 사이트 폐쇄론이 제기됐고, 당시에도 표현의 자유 침해 여부를 놓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충돌했다. 2018년에도 일베 폐쇄 국민청원에 23만명 이상이 동의하면서 청와대가 폐쇄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답한 바 있다. 사이트 폐쇄나 접속 차단은 특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불법정보에 대한 차단은 현행 제도상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지만, 특정 사이트 전체를 폐쇄하는 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과잉금지 원칙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도화가 추진된다면 반복성, 고의성, 피해의 중대성, 운영자의 방치·조장 여부, 사법적 통제 절차가 명확해야 한다. 그럼에도 추모 공간을 찾아가 고인을 조롱하고 이를 온라인 인증 문화로 소비하는 행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도 커지고 있다. 정치적 풍자와 비판은 보호돼야 하지만, 특정 개인의 죽음이나 민주화운동 희생자, 사회적 참사를 조롱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기본 질서를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발언은 혐오표현 규제 논의를 다시 정치권의 전면 의제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국무회의 차원의 검토를 시작하면 법무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방심위,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관련 제도와 해외 사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혐오표현과 사회적 갈등 조장에 대한 책임 강화를 주장할 가능성이 크고, 야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정부의 표현 규제 권한 확대를 우려할 수 있다. 핵심은 ‘무엇을 막을 것인가’보다 ‘어떤 기준과 절차로 제한할 것인가’다. 혐오와 조롱을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정당하더라도, 규제 기준이 모호하면 정치적 비판이나 풍자까지 위축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엄격한 조건”이 실제 제도 설계에서 어떻게 구체화될지가 향후 논의의 중심이 될 전망이다.
2026-05-24 09: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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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초과이익, 그 몫은 누구에게 있는가
[경제일보]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급한 불을 껐다. 파국 직전 멈춰 선 파업 시계는 잠정합의안이라는 봉투에 담겨 조합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인공지능(AI) 호황의 파도를 탄 반도체 부문이 창출할 거대한 초과이익, 그 잉여는 과연 누구의 몫인가. 노조가 요구했던 ‘영업이익의 15%’라는 숫자는 단순한 임금협상을 넘어 한국 자본주의의 기본 문법을 묻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이재명 대통령조차 이 문제를 피해 가지 않았다. 외신들은 대통령이 노조의 ‘세전 영업이익 배분’ 주장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노동 친화적 정부의 수장이 특정 기업 노사 문제에 이런 메시지를 낸 것은 가볍지 않다. 반도체는 일반 제조업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심장이다. 정부가 긴급조정권까지 검토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노사 분쟁이 회사 담장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국가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파업의 위험이 크다고 해서 노동자의 몫을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막대한 이익을 냈다고 해서 그 전부가 임금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기업의 이익은 성격이 있다. 매출에서 온갖 비용을 제하고 남는 금액은 단순한 현금 더미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과거 투자에 대한 회수, 미래를 위한 재투자 재원, 주주가 떠안은 위험에 대한 보상, 국가가 징수할 세금 그리고 구성원에게 돌아갈 성과 보상이 뒤섞여 있다. 이 복잡한 꾸러미를 어느 한쪽이 “이것은 내 몫”이라고 선을 긋는 순간 기업은 생산 조직이 아니라 분배 투쟁의 경기장이 된다. 회사의 비용에는 눈에 보이는 운영비용과 잘 보이지 않는 자본비용이 있다. 임금, 전력비, 협력업체 대금은 장부에 선명히 잡힌다. 그러나 더 무거운 것은 자본비용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에 수십조 원, EUV 장비 한 대에 수천억 원이 들어간다. 오늘 쏟아부은 자본이 내일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메모리 가격은 곤두박질치고 경쟁사는 무섭게 추격한다. 불과 2023년,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은 6조 원대까지 추락했다. 호황기의 초과이익만 보려면 이 혹독했던 적자의 기억도 함께 봐야 한다. 2023년의 손실은 누가 떠안았나. 임금을 받은 노동자는 월급을 토해내지 않았다. 협력업체도, 채권자도 약속된 돈을 받았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주주였다. 주가는 이익 전망을 따라 흔들리고 자기자본은 손실을 흡수한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기본 원리다. 주주가 마지막에 남는 것을 가져가는 ‘잔여청구권’을 갖는 이유는 모든 것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초격차는 엔지니어들의 밤샘 노동 위에 세워졌다. 그들에게 충분하고 투명한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 노조가 “성과급 산정 기준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성과주의를 말하려면 성과의 계산법부터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영구적 권리처럼 임금으로 고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영업이익은 주주의 돈이기 전에 회사의 미래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HBM, 차세대 D램, 파운드리 미세공정. 이 모든 것은 오늘의 이익을 내일의 기술에 쏟아부어야만 유지되는 살얼음판 경쟁이다. 오늘의 초과이익을 모두 현금으로 나눠버리면 내일의 연구개발은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반도체 산업에서 투자를 멈춘 기업의 운명은 죽음뿐이다. 유럽의 사례는 서늘한 경고다. 유럽은 오랫동안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모범을 자처했다. 노동자 보호, 사회적 합의의 이름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AI와 반도체의 시대에 유럽은 주도권을 잃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EU 경쟁력 보고서에서 투자 부족과 생산성 둔화를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본진에서 나온 자기반성이었다. 한국은 유럽을 닮을 여유가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밀리면 그 충격은 주주 몇 명의 손실로 끝나지 않는다. 협력업체, 수출, 세수, 청년 일자리까지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인다. 그래서 삼성의 이익 논쟁은 임금협상인 동시에 산업정책이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성과 보상이 필요하다면 길은 있다. 현금 성과급만이 답은 아니다. 회사의 장기 가치 상승에 참여하는 주식 보상이야말로 노동자와 주주의 이해를 맞추는 진정한 공동체의 길이다. 위험은 주주에게만 남기고 이익은 매년 영업이익 비율로 먼저 떼어가자는 구조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손실 없는 잔여청구권이며 세상에 그런 권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삼성전자 노사가 잠정합의에 이른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투표가 끝나도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AI가 만들어낼 거대한 초과이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이다. 그때마다 분노와 구호로 답하면 산업은 버티지 못한다. 상식은 단순하다. 노동은 존중받아야 하고 위험을 건 자본도 존중받아야 한다. 국가는 세금으로 기업은 미래 투자로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면 나머지는 무너진다. 삼성의 초과이익은 모두의 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청구할 수는 없다. 그것이 주식회사의 질서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나눌 이익 자체가 사라진다.
2026-05-21 14: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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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 이름의 미궁, 언제까지 죽음의길을 찾을 것인가
경남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울려 퍼지던 구호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원청의 교섭 참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화물연대 조합원이 대체 차량과 충돌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지난달 10일,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시행된 이후 현장의 혼란이 비등점으로 치닫더니,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소실로 이어진 것이다. 노조 측은 이번 사고가 법 시행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긋는다. 이전부터 실질적인 지휘·감독을 받아왔기에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라는 목소리를 높여왔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형용모순이다.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범위를 확장하는 것 자체가 노란봉투법의 골자이자 핵심 쟁점이기 때문이다. 법의 울타리 안에서 권리를 찾으려는 투쟁이 법의 모호함이 만든 균열 사이에서 비극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노란봉투법 시행 한 달 만에 나타난 지표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하청 노조 소속 14만여 명이 368개 원청 기업을 상대로 동시다발적인 교섭을 요구하고 나섰다. 노동위원회에 접수된 ‘단체교섭 거부 시정 요구’ 건수는 단 한 달 만에 지난해 1년 치에 육박하는 279건을 기록했다. 산업 현장은 그야말로 법적 분쟁과 대립의 화약고가 되었다. 그동안 노란봉투법 시행 전부터 여러 차례 지면을 통해 경고해 왔다.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사회적 합의 없이 밀어붙이는 입법은 노사 모두를 공멸의 길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현장의 불확실성이 물리적 충돌로 비화할 수 있음을 누차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관계 당국은 귀를 닫았다. '입법 성과'라는 전리품에 취해 현장의 비명을 외면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차가운 주검이다.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우리는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인가. 사태의 근본 원인은 법 조항의 추상성에 있다.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라는 문구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해석을 낳는다. 원청 기업 입장에서는 수많은 하청업체 노조와 일일이 교섭 테이블에 앉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자칫 경영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 반면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지시를 내리는 진짜 주인을 찾겠다며 거리로 나선다. 이 평행선 같은 대립 사이에는 ‘대화’가 실종되어 있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법 조문을 방패 삼고, 집단행동을 창 삼아 맞붙는다. 고대 인류의 지혜를 담은 경전들은 한결같이 가르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상식이자 인류 문명을 지탱해 온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사 관계에는 오직 ‘나의 권리’만 있을 뿐 ‘상대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누구 한쪽의 완승으로 끝날 수 없는 싸움이다. 노사 관계는 일방향적인 복종도, 파괴적인 투쟁도 아닌 '상대성'에 기반한 계약 공동체다.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방식은 결국 스스로가 속한 생태계를 파괴하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첫째, 정부와 입법부는 즉각적인 법 보완에 착수해야 한다. 사용자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여 현장의 자의적 해석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모호한 법은 정의가 아니라 흉기다. 산업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교섭 체계를 설계하고, 현장의 혼란을 중재할 전문적인 기구를 강화해야 한다. 둘째, 노동계는 투쟁의 선명성보다 협상의 실효성을 고민해야 한다. 교섭권 쟁취가 곧 생존권 보장이라는 믿음은 이해하나, 그것이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방식이어야 하는지는 자문해봐야 한다. 셋째, 경영계는 변화된 시대 정신을 수용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복잡해진 고용 구조 속에서 원청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갈등을 봉합할 수 없다. 하청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 곧 원청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 진주에서 스러진 노동자의 명복을 빌며, 우리는 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다. 죽음으로 쓴 경고장을 읽고도 대화와 타협의 자리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문명’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자신의 입장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역지사지'의 지혜가 절실하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란, 법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대화로 채우려 노력할 때 완성된다. 빠른 시일 내에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더 이상의 '예견된 인재'를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를 넘어 범죄에 가깝다. 비극의 사슬을 끊어내는 열쇠는 결국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과 '책임 있는 자세'에 있다.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내일의 희망이 되려면, 지금 당장 극한의 대립을 멈추고 타협의 테이블로 복귀해야 한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무너진 현장을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2026-04-21 1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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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발 '에너지 전시상황', 노사정 대타협으로 국난 극복의 길 열어야
[경제일보]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가스 시설과 유전을 겨냥한 ‘에너지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LNG 공급의 20%를 담당하는 카타르 라스라판 시설이 피격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글로벌 경제는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혼돈에 빠졌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고, 원·달러 환율은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500원을 넘어섰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한민국에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경제 전시 상황’이다. 산업 현장의 비명은 이미 현실이 됐다.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린 석유화학업계를 시작으로 자동차, 전자 부품사들까지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며 계약 이행 불능을 통보하고 있다. 원자재 공급 차질이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까지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우방국을 통해 원유 물량을 확보하고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공급망의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이 거대한 파고를 넘기 역부족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대외적 혈투 속에서 벌어지는 대내적 갈등이다. 국가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노동계는 총파업을 예고하며 전운을 고조시키고 있다. 물론 ‘해고는 죽음’이라는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류의 고전인 『도덕경』에는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품으며, 충기(沖氣)로써 화합한다(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和)”는 가르침이 있다. 서로 대립하는 힘이 충돌만 할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통로를 통해 기운을 섞어 조화를 이루어야 생명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화합의 지혜’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안한 ‘덴마크식 유연 안정성’ 모델은 우리 노동시장이 가야 할 고통스러운, 그러나 필연적인 길이다. 기업은 고용 유연성을 통해 생존의 활로를 찾고, 노동자는 두터운 사회안전망 속에서 재기를 보장받는 ‘사회적 대타협’이 시급하다.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중소기업·비정규직·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상생의 구조를 짜야 한다. 국난의 시기다. 나만 살겠다는 ‘각자도생’은 결국 ‘공멸’로 귀결될 뿐이다. 경영진은 투명한 경영과 고통 분담으로 신뢰를 쌓고, 노동계는 극한 투쟁 대신 국가 경제의 기반을 지키는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정부 역시 친노동 혹은 친기업이라는 이분법적 굴레에서 벗어나, 냉철한 원칙과 상식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비바람이 거셀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나무처럼, 이번 위기를 에너지 안보와 노동 개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그것만이 벼랑 끝에 선 민생을 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2026-03-20 09: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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