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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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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AI의 돈은 어디서 왔나
[경제일보]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지난 12일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부총리에 오른 뒤 경제정책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국유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세제를 개편했으며 금융권의 부실을 털어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밀어 올린 개혁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규모 실업과 지방재정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룽지를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중국 경제의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막대한 돈을 장기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의 자금 동원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개혁과 만나게 된다. 원문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연원을 추적하면서 분세제와 국유기업·금융 개혁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분세제(分税制) 개혁 전까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1993년 중앙정부가 가져가는 재정수입은 전체의 22%에 그쳤다. 지방이 세금의 대부분을 거둬 쓰면서 중앙정부는 전국 단위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일 돈이 부족했다. 주룽지는 중앙세와 지방세를 다시 나누고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75%를 중앙 몫으로 돌렸다. 이듬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은 55.7%로 뛰었다. 중앙정부의 곳간이 커지자 경제를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지역별 이해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산업정책을 펼칠 재정 능력이 생겼다. 중앙의 재정력이 커진 만큼 지방정부가 짊어진 부담도 늘었다. 세입은 중앙으로 넘어갔는데 교육·의료를 비롯해 지방이 맡아야 할 지출은 그대로 남은 분야가 많았다. 세계은행도 1994년 개혁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반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정 불균형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지방정부는 부족한 돈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토지와 부동산 개발에 기대고 각종 예산외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뒤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짓누르는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를 1994년 개혁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방정부의 재정 운용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힘을 얻는 동안 지방에서는 다른 문제가 자라난 셈이다. 주룽지의 개혁은 재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좡다팡샤오(抓大放小)’ 정책 아래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정리하고 대형 국유기업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은 혹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유기업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비효율을 걷어낸 대가를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은행도 바꿨다. 지방정부의 영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자금 배분 권한을 중앙으로 가져오고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세금을 중앙으로 모으고 금융의 돈줄도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특정 반도체 기업이나 AI 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런 개혁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가 만든 것은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분야에 장기간 돈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었다. 그 힘이 20여 년 뒤 반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2014년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반도체 대기금’을 만들었다. 2019년 2기에 이어 2024년에는 등록자본 3440억 위안 규모의 3기 펀드가 출범했다. 중국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했고 공상은행·건설은행·농업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 등 대형 국유은행도 자금을 댔다. 1기 1387억 위안, 2기 2040억 위안에 이어 국가 차원의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서는 이런 힘이 무섭다.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투자를 끊지 않고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10년 이상 돈을 넣을 수 있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부와 국유금융기관이 떠받친다. 지방정부들도 토지와 보조금, 투자기금을 들고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중앙정부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원문에서 CXMT와 YMTC, SMIC 등의 성장 과정에 지방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도 뒤따랐다.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면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지역까지 공장 건설에 나섰고 부실과 중복투자가 생겼다.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는 기술 사기와 파산 사례까지 나왔다. AI에서도 각 지역이 데이터센터와 지능형 컴퓨팅 시설 유치 경쟁에 나서면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손실까지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룽지 시대와 지금의 중국은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값싼 노동력과 빠른 성장, 해외 자본 유입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 규제에도 맞서야 한다. 돈을 모아 한 산업에 집중하는 방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었다. 과거에 효과를 냈던 국가 주도의 투자 방식이 앞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경험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업과 공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규모와 체제는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재정과 금융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원문이 중국 산업정책의 흐름을 한국의 반도체·AI·제조업 전략과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져올 것은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처럼 오랫동안 돈이 들어가는 산업에 자금이 끊기지 않게 할 제도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비슷한 사업에 돈을 붓는 일은 없는지, 기술도 없는 사업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실패가 확인된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지원금은 산업을 키우는 돈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돈으로 바뀐다.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 정부가 국가의 돈을 모으고 움직이는 방식을 바꿨다. 그 힘은 제조업 성장과 반도체 투자에 밑천이 됐지만 지방부채와 부동산 의존, 과잉투자라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국가가 산업을 키운 성공 사례만 보고 투자 규모부터 따라갈 일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에 국가의 미래를 건 한국이라면 중국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도 봐야 한다. 산업정책의 실력은 예산을 크게 잡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투자할 곳과 그만둘 곳을 제대로 가려내는 데서 드러난다.
2026-08-14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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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책 선거, 피해는 시민에게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는 지역의 향후 4년을 맡길 시장·도지사·구청장·군수·지방의원·교육감을 골라야 한다. 그런데 정작 선거판에서 시민이 확인해야 할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 교통, 주거, 교육, 돌봄, 지방재정, 산업전환 같은 의제는 뒤로 밀리고, 상대를 흠집 내는 말싸움과 진영 결집 구호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방선거는 본래 가장 생활에 가까운 선거다. 대통령 선거가 국가의 방향을 묻는 선거라면, 지방선거는 시민의 하루를 묻는 선거다. 출근길 버스 배차 간격을 줄일 사람은 누구인가. 낡은 원도심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아이를 맡길 학교와 돌봄 인프라는 충분한가. 청년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일할 산업 기반은 있는가. 고령층의 병원 접근성은 어떻게 높일 것인가. 자영업자의 임대료와 골목상권 문제를 누가 풀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지방선거의 본질이다. 정책 경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별로 교통망 확충, 산업단지 조성, 공항·철도·도청 이전, 지방세 활용 방안 등 크고 작은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문제는 공약의 존재가 아니라 공약의 검증이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은 어떻게 나뉘는지, 이미 추진 중인 사업과 충돌하지 않는지, 임기 안에 실현 가능한지 따지는 장면이 드물다. 선거가 정쟁으로 흐르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숫자다. 예산 총액, 사업 기간, 지방채 부담, 민간투자 조건, 행정 절차, 법적 근거 같은 숫자와 제도가 뒷전으로 밀린다. 그 빈자리를 구호가 채운다. ‘반드시 해내겠다’, ‘심판해야 한다’, ‘정권을 지켜야 한다’,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만 시민의 삶을 바꾸는 설계도는 아니다. 지역 행정은 열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도로 하나, 학교 하나, 병원 하나를 세우는 데도 예산과 인허가, 주민 수용성, 장기 운영비가 따라붙는다. 정쟁은 그 복잡한 문제를 한 줄 구호로 단순화한다. 정쟁 선거의 폐해는 분명하다. 첫째, 행정의 우선순위가 뒤틀린다. 후보는 지역의 구조적 문제보다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쉬운 이슈를 선택한다. 둘째, 공약의 품질이 낮아진다. 재원과 실현 가능성보다 표를 얻기 쉬운 장밋빛 약속이 늘어난다. 셋째, 선거 이후 협치가 어려워진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 선거는 당선 뒤에도 의회와 집행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을 가로막는다. 결국 시민은 더 비싼 행정비용을 치른다. 특히 올해 지방선거는 경제 환경이 녹록지 않은 가운데 치러지고 있다. 고물가의 기억은 아직 생활비 곳곳에 남아 있고,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에너지 가격 불안,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 지역 제조업의 산업전환 압박도 크다.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바꿀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어떻게 지원할지, 청년층의 주거와 일자리를 어떻게 연결할지, 고령화 지역의 의료·돌봄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에 따라 지역의 생존력이 달라진다. 정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방선거 때마다 중앙당은 지역 일꾼을 말하지만 실제 선거운동은 중앙 정치 구도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여당은 국정 안정론을, 야당은 견제론을 앞세운다. 물론 지방정부도 중앙정부 정책과 예산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중앙 프레임이 지역 의제를 집어삼키는 순간, 지방선거는 시민의 생활 선거가 아니라 정당의 중간평가 이벤트로 전락한다. 후보들도 달라져야 한다. 상대의 약점을 말할 수 있다. 선거는 경쟁이고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과 네거티브는 다르다. 검증은 공직 수행 능력, 이해충돌, 재정 운용, 정책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일이다. 네거티브는 시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감정의 소모전이다. 후보가 상대를 공격하는 데 쓴 시간만큼, 시민은 자신의 삶을 바꿀 정책을 들을 기회를 잃는다.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말싸움은 기사화하기 쉽고 강한 표현은 제목이 된다. 그러나 지역 유권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공약의 비교표와 재원 검증, 후보의 행정 경험, 기존 사업의 연속성과 수정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다. 지방선거 보도는 누가 누구를 비판했는지보다, 그 비판이 사실인지, 대안은 있는지, 비용은 얼마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시민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돈은 어디서 마련하겠다는 것인가’, ‘임기 안에 가능한가’, ‘실패하면 무엇을 조정할 것인가’ 등을 물어야 한다. 정쟁의 소음은 큰 목소리로 번지지만 정책의 힘은 구체적인 질문에서 자란다. 유권자가 구호보다 숫자를 요구할 때 후보는 달라진다.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은 어느 정당이 더 크게 이기느냐만이 아니다. 선거 이후 시민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느냐다. 교통난이 줄고, 빈 상가가 채워지고, 지역 병원이 버티고, 학교가 안정되고, 청년이 떠나지 않는 도시를 만들 수 있느냐가 본질이다. 그 일을 하라고 지방권력을 맡기는 것이다. 정책 선거가 실종되면 피해는 추상적인 국민에게 가지 않는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 학원비를 걱정하는 부모, 매출 부진에 버티는 자영업자, 일자리를 찾아 떠날지 고민하는 청년, 병원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는 노인에게 간다. 정쟁의 비용은 늘 생활인의 지갑과 시간과 기회로 청구된다. 6·3 지방선거는 아직 늦지 않았다. 남은 기간만이라도 여야와 후보들은 중앙정치의 칼날을 거두고 지역의 장부를 펼쳐야 한다. 누가 더 세게 공격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정확히 진단하고, 더 현실적인 해법을 내놓고, 더 책임 있게 실행할 수 있는지를 겨뤄야 한다. 지방선거의 주인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다. 선거판의 언어가 다시 시민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선거가 끝난 뒤에도 지역이 남고, 행정이 남고, 미래가 남는다.
2026-05-19 16: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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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장밋빛 공약 남발…재원은 어디서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21일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판은 이제 공천의 시간에서 공약의 시간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야는 앞다퉈 지역 발전, 주거 안정, 교통 혁신, 청년 지원, 돌봄 확대를 말한다. 유권자 입장에서 공약 경쟁은 반가운 일이다. 정쟁보다 정책이 낫고 비방보다 비전이 낫다. 문제는 그 비전의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느냐다. 돈이 없는 공약은 약속이 아니라 구호다. 재원 없는 복지는 지속될 수 없고 재정 검증 없는 개발은 다음 세대에게 넘기는 어음이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정당 10대 공약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5극3특’ 완성을 목표로 한 균형발전, 지방 핵심 산업 육성, AI·바이오·문화·방산 등 첨단산업 육성, RE100·기후위기 대응을 전면에 내세웠다. 국민의힘은 수도권 반값 전세, 월세 세액공제 확대,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폐지, 청년 월세 지원 확대, 교통망 확충, 지역경제 부활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조국혁신당은 ‘99년 평생 안심 내 집’, 진보당은 버스 공영화, 개혁신당은 지방 규제 샌드박스 전결권 등을 앞세웠다. 방향만 놓고 보면 모두 그럴듯하다. 지역은 살아야 하고 청년은 머물러야 하며 주거비는 낮아져야 하고 교통망은 넓어져야 한다. 하지만 유권자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그래서 얼마가 들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민주당의 균형발전과 지방산업 육성은 막대한 인프라 투자와 세제·재정 지원을 전제로 한다. 국민의힘의 반값 전세와 청년 월세 지원 확대 역시 공공주택 공급, 임대 재원, 세액공제 확대에 따른 세수 감소를 동반한다. 도시철도 조기 완공, 재건축 규제 완화, 청년 자산형성, 돌봄 확대, 공공임대 장기 거주, 버스 공영화 가운데 돈 들지 않는 공약은 거의 없다. 공약집에는 ‘추진’과 ‘확대’와 ‘완성’이 넘치지만 정작 재원 조달표는 빈칸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공약 경쟁은 뜨겁다.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반려동물 입양 지원금과 권역별 동물복지 거점 확대 등을 담은 ‘반려가족 행복수도 서울’을 제시했고,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배차 간격을 2분으로 줄이고 강북횡단선·면목선 등 7개 도시철도 노선을 조기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생활 밀착형 공약과 교통 공약은 모두 시민의 체감도가 높다. 그러나 복지센터 신설도, 입양지원금도, 철도 조기 완공도 결국 예산 사업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조차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하물며 재정자립도가 낮은 기초자치단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농어촌기본소득도 이번 지방선거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농어촌기본소득은 군 단위 인구감소지역 10곳에서 시범 추진 중이고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대상지를 5곳가량 늘릴 계획이다. 여당 소속 후보들은 확대를 주장하고 국민의힘 일부 기초단체장 후보들도 도입을 말한다. 기본소득의 취지가 농촌 소멸 대응과 지역 순환경제에 있다면 논의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현금 지급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정책은 금세 선거용 상품권으로 변질된다. 농촌을 살릴 것인가, 표심을 살 것인가. 그 경계는 재원과 효과 검증에서 갈린다. 이미 현장에서는 현금성·무료화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창원시장 선거에서는 결혼식 비용 100만원, 산후조리원 비용 50만원, 운전면허 취득 비용 50만원 지원 공약이 나왔고, 마창대교 통행료 전면 무료화와 시내버스 전면 무료화 공약도 제시됐다. 창원시의 재정자립도가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 연속 20%대에 머물렀고, 2024년 시 채무가 3656억원이다. 재워이 어디서 나올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지방재정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행정안전부가 공개한 2026년 지방교부세 예산은 제1차 추경 기준 총 74조343억원이다. 보통교부세 66조2373억원, 특별교부세 2조485억원, 부동산교부세 4조6982억원, 소방안전교부세 1조503억원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지방정부 상당수가 자체 수입만으로 기본 행정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교부세 자체가 지방세 등 수입으로 충당할 수 없는 부족분을 보전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2024년 결산 기준 전국 광역단체 본청 지방채무가 38조2971억원, 예산 대비 채무비율이 14.86%다. 전국 지자체 평균 재정자립도는 41.62%에 그쳤고,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서울·세종·경기만 50%를 넘었다. 이런 재정 구조에서 수조원대 개발사업과 현금성 지원, 교통 무료화, 공공주택 확대를 동시에 약속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출 구조조정 없이 새 지출을 얹으면 채무가 늘고, 국비 확보만 외치면 중앙정부 의존이 커진다. 결국 부담은 주민 세금, 지방채, 미래 예산 삭감으로 돌아온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는 ‘무엇을 해주겠다’보다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미루고, 무엇으로 조달하겠다’를 물어야 한다. 후보도 솔직해야 한다. 국비 확보가 필요하면 어느 부처, 어느 사업, 어느 법적 근거로 확보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지방채를 발행한다면 상환 계획을 내야 한다. 민자사업이면 수익 보전 구조와 이용자 부담을 공개해야 한다. 기존 예산을 줄이겠다면 어떤 사업을 줄일 것인지 말해야 한다.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면 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필요한 예산이 무엇인지 특정하지 못하면, 그것은 재원 대책이 아니라 수사에 불과하다. 정책 경쟁은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선거 때 후보들이 지역의 미래를 놓고 다투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공약은 장밋빛 청사진이 아니라 납세자의 계약서여야 한다. 계약서에는 대가와 조건과 책임이 들어간다. 여야가 진정 지방을 살리고 민생을 돕겠다면, 이제 공약 발표장에 예산표를 함께 세워야 한다. 숫자 없는 약속은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약(空約)이다. 지방선거 21일 전, 유권자가 들어야 할 말은 더 화려한 구호가 아니다. “재원은 여기서 마련하겠다”는 정직한 답이다.
2026-05-13 13:5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