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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오픈AI 협력, '칩 이후' 설계해야
[경제일보] 삼성전자와 오픈AI의 관계가 흥미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삼성은 오픈AI가 필요로 하는 첨단 반도체를 만들고, 동시에 오픈AI가 만든 인공지능을 회사 안에서 대규모로 사용한다. 한쪽에서는 공급자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객이다. 글로벌 AI 산업의 가치사슬이 얼마나 빠르게 뒤섞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픈AI는 지난 9일 서울에서 삼성전자와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 협력이 진전되고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기술이나 생산 방식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전자 역시 고객 관련 사안이라며 세부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계기로 시작된 양사의 관계가 메모리 공급을 넘어 차세대 칩 연구·생산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오픈AI의 설명이다. 반대 방향의 거래도 이미 크게 열렸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국내 전 임직원과 전 세계 DX부문 직원에게 ChatGPT Enterprise와 Codex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픈AI는 이를 자사의 역대 최대 규모 기업 도입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연구개발과 제조, 소프트웨어 개발, 제품기획과 마케팅까지 사용 영역도 넓다. 한국 기업들의 AI 도입 속도는 더 가파르다. 오픈AI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국내 기업·기관의 ChatGPT Enterprise 이용자는 1년 전보다 약 28배 늘었다. 불과 1년 사이 생성형 AI가 일부 개발자의 실험도구에서 기업 업무의 기반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모두 반길 일이다. AI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삼성이라고 예외일 이유가 없다. 기업은 국적이 아니라 성능과 생산성을 보고 도구를 선택해야 한다. 오픈AI가 삼성의 반도체를 필요로 하듯 삼성도 오픈AI의 모델과 개발도구를 활용해 연구개발 속도를 높이고 업무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삼성은오픈AI에 무엇을 팔고, 오픈AI를 쓰면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남길 것인가." 이번 협력의 진짜 쟁점은 여기에 있다. 한국은 AI 시대의 핵심 생산국이다. 오픈AI와 삼성이 지난해 맺은 협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스타게이트에 필요한 첨단 메모리 공급을 확대하기로 했다. 오픈AI가 예상한 메모리 수요는 웨이퍼 투입량 기준 월 최대 90만장에 달한다. 삼성은 메모리뿐 아니라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종합 반도체 기업이기도 하다. AI 붐이 거세질수록 이런 생산능력의 가치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칩 공급자’라는 역할 자체를 낮춰 볼 이유는 없다. 세계가 원하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한국 산업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힘이다. AI 서버 한 대도 메모리와 반도체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서 가치사슬이 끝날 때다. 삼성이 첨단 칩을 공급하고 그 칩 위에서 돌아가는 AI 모델과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다시 해외 플랫폼에서 사오는 구조가 굳어질 경우 한국은 AI 시대에도 익숙한 위치에 머물 수 있다. 제조는 강하지만 플랫폼은 약하고, 부품은 팔지만 서비스를 사는 구조다. 반도체와 AI 소프트웨어의 사업 구조는 다르다. 반도체는 생산해 납품하면 매출이 발생한다. 기업용 AI는 고객의 업무 안으로 들어가 매일 사용된다. 개발자가 코드를 짜고 연구원이 자료를 분석하며 생산현장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플랫폼은 업무 방식 자체의 일부가 된다. 사용이 늘수록 생태계와 개발 경험, 서비스 매출이 함께 쌓인다. 때문에 AI 플랫폼 기업들은 오히려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오픈AI는 모델 개발에 머물지 않고 브로드컴과 자체 AI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9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오픈AI는 직접 개발한 AI 모델을 자체 칩 설계에도 활용했고 이미 테이프아웃 단계까지 진행했다. 소프트웨어 기업이 칩이라는 하드웨어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삼성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픈AI가 모델에서 칩으로 내려오고 있다면 삼성은 칩에서 AI로 올라가야 한다. 이 말은 삼성이 오픈AI와 경쟁할 범용 초거대 모델을 당장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이미 앞서 있는 글로벌 플랫폼을 그대로 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더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오픈AI의 AI를 삼성 내부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삼성만이 가질 수 있는 AI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다. 반도체 공정을 예로 들어보자. 수율이 왜 떨어지는지, 어느 장비에서 어떤 이상이 발생하는지, 공정조건을 어떻게 바꾸면 불량률이 낮아지는지에 대한 경험은 삼성의 생산현장에 있다. 수십 년간 축적한 제조 노하우는 범용 AI 기업이 돈을 주고도 단숨에 얻기 어려운 자산이다. ChatGPT와 Codex를 활용해 엔지니어의 일을 빠르게 만드는 것은 첫 단계다. 그 다음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삼성의 공정지식과 엔지니어링 경험을 AI 기술로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생산 최적화와 반도체 설계, 품질관리와 장비 유지보수에 특화된 AI 역량이 삼성 내부에 남아야 한다. 그래야 AI 사용료가 비용으로 끝나지 않고 경쟁력으로 전환된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삼성SDS와 오픈AI가 맺은 협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삼성SDS는 스타게이트 AI 데이터센터의 설계·구축·운영뿐 아니라 오픈AI 모델을 기업 업무에 도입하려는 고객을 대상으로 컨설팅과 구축·운영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삼성이 단순히 오픈AI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용 AI 사업에 참여할 통로도 이미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 방향을 더 키워야 한다. 삼성·오픈AI 협력의 성적표가 ‘삼성이 HBM을 얼마나 팔았는가’와 ‘삼성 직원이 ChatGPT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라는 두 숫자로만 남아서는 부족하다. 차세대 칩을 함께 연구하면서 어떤 설계 역량을 쌓았는지, AI를 제조현장에 적용하면서 어떤 독자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삼성SDS가 기업용 AI 시장에서 얼마나 새로운 사업을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외부 기술의 활용과 내부 역량의 축적이 함께 가야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노붐 오르가눔’에서 ‘지식과 인간의 힘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원인을 알지 못하면 원하는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네 세기가 지난 AI 시대에도 산업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그 기술을 이해하고 자기 능력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픈AI의 뛰어난 AI를 쓰는 것은 경쟁력이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 외부 AI 없이는 핵심 업무를 개선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기술과 사람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의존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글로벌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데이터와 업무지식,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쌓는다면 협력은 산업 역량을 키우는 지렛대가 된다. 때문에 삼성·오픈AI 관계를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느냐’는 식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이 기회다. 오픈AI에는 삼성의 메모리와 반도체 제조능력이 필요하다. 삼성에는 최전선 AI 모델과 개발도구가 필요하다. 서로 필요한 것이 분명할 때 협상력도 생긴다. 중요한 것은 이 교환의 끝이다. 칩을 팔아 매출을 얻고 AI를 사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까지는 좋은 거래다. 하지만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은 그 거래가 끝난 뒤 무엇이 남았는지에 달려 있다. "삼성 내부에 AI를 이해하고 설계할 사람이 남았는가.", "제조 노하우가 독자적인 AI 역량으로 바뀌었는가.", "오픈AI와 함께 만든 경험이 삼성의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로 이어졌는가." 이 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국내 ChatGPT Enterprise 이용자가 1년 만에 28배 늘었다는 숫자도 같은 의미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이 AI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빨리 늘어나는 것과 AI 산업이 빨리 성장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AI를 많이 쓰는 나라와 AI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파는 나라는 다르다. 한국이 후자로 가려면 삼성 같은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계적인 제조기업이 글로벌 AI를 가장 빨리 도입하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다시 제조 AI와 기업용 서비스로 만들어낸다면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강점을 AI 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할 수 있다. 삼성과 오픈AI의 협력 확대를 반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픈AI가 삼성의 칩을 더 많이 사는 것도 중요하다. 삼성 직원이 오픈AI의 AI를 더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협력의 궁극적인 성적표는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삼성이 칩을 팔고 AI를 사는 동안, 삼성과 한국에 어떤 AI 기술과 사업이 새로 남았는가. 공급자와 고객 사이에는 아직 넓은 공간이 있다. 삼성·오픈AI 협력이 그 공간을 한국의 기술과 사람, 서비스로 채우는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좋은 기술협력은 많이 사고 많이 파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거래가 끝난 뒤 서로에게 없던 능력이 남을 때 비로소 전략적 협력이 된다.
2026-09-10 09: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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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부산서 'AI ON THE LAND' 공개…도시 데이터로 미래도시 구현
[경제일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도시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도시계획과 재난관리, 주거서비스까지 연결하는 미래도시 모델을 선보인다. LH는 부산 백스코에서 개최되는 ‘2026 월드 스마트시티 엑스포(WSCE 2026)’에서 AI 도시 개념을 테마파크로 형상화한 WONDER LH : AI ON THE LAND 전시관을 운영한다고 8일 밝혔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WSCE는 국토교통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부산시가 공동 주최하며 LH, K-Water, 벡스코, 스마트도시협회가 주관한다. 스마트시티 정책의 홍보와 우리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 스마트시티 정책과 기술을 공유하고 협력사업을 발굴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행사다. 행사는 이날부터 오는 11일까지 3일간 개최된다. LH가 제시한 AI 도시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각종 데이터를 AI가 분석하고 이를 도시계획과 개발, 관리·운영, 주택과 생활서비스에 다시 연결하는 미래도시 모델이다. 단순히 개별 시설에 AI 기술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의 데이터를 모아 관리하고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구조다. 전시관도 이러한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5개 영역으로 구성했다. 도시지능센터 역할을 하는 ‘CITY BRAIN’을 중심으로 데이터허브인 ‘CITY HUB’, 통합관제 기능을 보여주는 ‘CITY EYE’, 도시 인프라와 공간을 담은 ‘CITY PARK’, 시민 일상의 ‘CITY LIFE’가 서로 연결되는 모습이다. 핵심 공간인 CITY BRAIN에서는 대형 미디어 타워와 휴머노이드 로봇을 활용해 도시 데이터를 AI가 분석하고 이를 도시 운영에 활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CITY EYE에서는 재난관리플랫폼과 ‘늘봄 A-EYE’를 통해 신도시와 건설현장의 안전관리 방식을 소개한다. 도시 공간과 생활 분야에 적용되는 기술도 전시한다. CITY PARK에는 보행자의 안전을 높이는 ‘보행안전솔루션’과 AI를 활용해 공원 조성을 지원하는 ‘AI 파크 빌더’를 배치했다. CITY LIFE에서는 주거서비스 플랫폼인 ‘LH HOMEZ 앱’과 제로에너지하우스 등을 선보인다. LH는 전시와 함께 AI·데이터를 활용한 도시문제 해결 방안도 논의한다. 10일에는 ‘폭염 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신도시 더위 회피 방안’을 주제로 ‘LH COMPAS 국제 콘퍼런스’를 열고 ‘2026 LH COMPAS 국토도시 데이터 분석 공모전’ 시상식도 진행한다. 같은 날에는 제7회 글로벌 비즈니스 컨벤션(GBC)도 열린다. LH가 해외 도시개발 사업에서 축적한 경험과 스마트시티 기술을 민간 기업과 공유하고 국내 기업이 해외 사업에 함께 진출할 수 있는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행사다. 2020년 시작된 GBC는 해외 도시개발 사업과 민간 동반 진출 방안을 공유하는 행사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LH 관계자는 “이번 엑스포를 통해 LH가 그려가는 미래 AI 도시의 모습을 다양한 콘텐츠로 선보이고자 한다”며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 사회와 기술에 대응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2026-09-09 14: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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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부터 수주하고 조선소 만든 HD현대…54년 '선행투자 DNA'
[경제일보] HD현대의 출발은 일반적인 순서와 거리가 멀었다. 공장을 지은 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소가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배부터 수주했다. 1971년 10월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따냈고, 이듬해 3월 울산 미포만에서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공사와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됐다. 1974년 2월 첫 선박을 진수했고 같은 해 6월 조선소 1단계 준공과 VLCC 2척 명명식을 열었다. 시장과 공장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주부터 한 뒤 생산기반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이었다.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수주와 건조량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 경험은 이후 HD현대 경영에서 반복됐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생산능력과 기술을 시장이 충분히 커지기 전에 확보하고, 부족한 사업은 직접 만들거나 인수했다. 성공할 경우 시장 선점 효과가 컸지만 판단이 빗나가면 대규모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HD현대의 54년은 이른바 ‘선행투자 DNA’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역사다. 배 만들다 엔진·전력·건설기계까지…필요한 것은 직접 확보 HD현대의 사업 확장은 조선소 안에서 시작됐다. 배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박의 심장인 엔진이 필요했다. 현대중공업은 1976년 엔진사업부를 발족했고, 1978년 대형엔진공장을 완공했다. 1977년에는 중전기사업부를 세워 변압기와 전력기기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건설장비와 로봇도 같은 흐름이었다. 1982년 건설장비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봇 분야에서는 1984년 용접기술연구소에 로봇 전담팀을 만들고, 1985년 산업용 로봇사업에 진출했다. 1987년 국내 최대 규모 로봇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별도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조선에 필요한 기술을 밖에서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확보한 것이다. 축적된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소 밖 시장으로 뻗었다. 2000년에는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자체 중형 디젤엔진인 ‘힘센엔진’을 개발했다. 선박용에서 시작한 중전기 사업은 현재 HD현대일렉트릭으로 성장해 글로벌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에 변압기와 전력기기를 공급한다. 사업 확장은 인수합병으로도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가 갖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70%를 넘겨받아 지분율을 91.13%까지 높였다. 11년 만의 경영권 재확보였다. 2021년에는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조선과 에너지에 건설기계를 더하면서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넓혔다.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했다. 기존 주력사업이 성숙한 뒤 새로운 산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쌓은 대형 제조·설비 운영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미리 확보했다. 해양플랜트 3조 적자 쇼크…선행투자의 수업료 먼저 뛰어드는 경영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실패가 2010년대 해양플랜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시장이 침체하자 국내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봤다. 현대중공업 역시 대형 해양 프로젝트 수주를 확대했다. 하지만 선박과 해양플랜트는 사업구조가 달랐다. 해양플랜트는 발주처 요구에 따른 설계 변경이 잦았고 제작·설치 과정도 복잡했다.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저가 수주와 공정 지연이 겹쳤다. 여기에 국제유가 급락까지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 연결 기준 3조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창립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손실 전체가 해양플랜트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세계 조선경기 부진과 조선·플랜트 등 여러 사업의 원가 상승이 함께 영향을 미쳤지만 해양플랜트의 대규모 부실이 실적 악화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2015년에도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약 1조300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반영됐다. 현대중공업은 2014~2015년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뒤 2016년 전사 기준 흑자로 돌아섰다. 해양플랜트 실패는 HD현대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시장에 먼저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과 설계 역량, 계약조건, 원가와 공정 위험을 함께 통제하지 못하면 선행투자가 오히려 대규모 부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HD현대의 선행투자는 과거의 ‘속도 우선’에서 수익성과 현금흐름, 데이터에 기반한 ‘관리형 선행투자’로 성격이 달라졌다. 사람보다 AI가 먼저 판단하는 조선소…54년 DNA의 2막 HD현대는 현재 다시 미래 시장보다 앞서 설비와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상은 선박이 아니라 조선소 자체다.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 계열사들은 2021년부터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빅데이터와 디지털트윈, 로봇, AI를 이용해 노동집약적인 조선소를 지능형 생산시설로 바꾸는 작업이다. 2023년에는 디지털트윈을 기반으로 작업과 장비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1단계 ‘눈에 보이는 조선소’를 구축했다. 2026년까지 생산 데이터를 연결해 공정을 예측·최적화하는 2단계를 거쳐 2030년에는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한 ‘지능형 자율 운영 조선소’를 완성한다는 목표다. 회사가 제시한 목표는 생산성 30% 향상과 건조기간 30% 단축이다. 이는 실제 달성 실적이 아닌 2030년 목표치다. 로봇도 조선소에 투입한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로보틱스는 미국 페르소나AI 등과 조선 용접용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2026년까지 시제품 개발을 끝내고 2027년부터 현장 실증과 상용화를 진행하는 계획이다. 조선업의 고질적인 숙련인력 부족과 안전 문제를 AI와 로봇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다. 과거에는 새로운 도크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렸다면 앞으로는 같은 조선소에 AI와 로봇을 넣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선행투자가 바뀌고 있다. 조선 밖에서는 전력기기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올랐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과 국내에서 변압기 생산능력을 확대해 왔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증가,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가 맞물리면서 세계적으로 변압기 공급부족이 심해진 데 따른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의 올해 6월 말 수주잔고는 85억 달러로 6개월 전보다 23% 증가했다. 3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고 일부 고객과는 2030년 인도 물량까지 협의하고 있다. 과거 중전기사업부로 시작한 사업이 반세기 뒤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망으로 성장한 셈이다. HD현대는 지난해 세계 조선업계 최초로 누적 선박 5000척 인도 기록도 세웠다. 1974년 첫 VLCC를 시작으로 68개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공급한 결과다. 54년 전 미포만에서는 배를 지을 조선소조차 없는 상태에서 먼저 선박을 수주했다. 지금은 AI가 스스로 공정을 판단하는 조선소와 아직 수요가 더 커질 전력 인프라에 미리 투자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투자 방식이다. 1970년대 선행투자가 창업자의 결단과 실행력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수주잔고와 데이터, 자동화 기술, 글로벌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HD현대의 DNA는 무조건 남보다 빨리 뛰어드는 데 있지 않다. 앞으로 필요할 기술과 생산능력을 먼저 정하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이를 실제 산업으로 만드는 능력에 가깝다.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었던 승부수는 HD현대를 세계 최대 조선사로 키웠다. 해양플랜트는 같은 DNA가 얼마나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업계 관계자는 “2030년 AI 자율조선소와 전력기기가 또 하나의 ‘미포만 신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 “다만 분명한 것은 HD현대가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생산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선행투자는 여전히 HD현대의 가장 강력한 성장 DNA이자 가장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위험”이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08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08 09: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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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안엔 신세계, 키아프 밖엔 현대…백화점 '아트 VIP' 공략법
[경제일보] 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은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구매 상담을 나누는 컬렉터,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미술계 관계자들로 분주했다. 관람객들은 형형색색의 회화와 조형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한참동안 작품을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 작품은 카메라에 담았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을 발견한 관람객은 곧장 갤러리 관계자에게 가격과 작품 정보를 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미술계 관계자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안부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코엑스에서는 국내 최대 아트페어 '키아프 서울 2026'과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2026'이 동시에 열리며 서로 다른 색깔의 미술시장을 한자리에서 선보였다. 같은 코엑스, 다른 온도…프리즈 '여백'·키아프 '다채로움' 프리즈 전시장에 들어서자 공간 분위기부터 한층 정제돼 있었다. 넓은 흰 벽에 작품 몇 점만 여유 있게 배치한 부스가 많았고 작품과 작품 사이에도 충분한 여백이 느껴졌다. 크기가 압도적인 대형 작품과 한눈에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니멀한 작업이 한 공간에 어우러지면서 전시장 자체가 하나의 고급 쇼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갤러리 직원과 컬렉터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조용히 작품 상담을 이어가는 모습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반면 키아프 전시장은 한층 다채롭고 활기찬 인상이었다. 강렬한 색채의 회화부터 인물과 풍경을 직관적으로 담아낸 작품, 크고 작은 조형물까지 장르와 분위기가 각기 다른 작품들이 부스마다 이어졌다. 한 부스를 지나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 등장하는 식이어서 전시장을 걷는 동안 시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관람객들도 눈에 띄는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며 비교적 자유롭게 전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같은 코엑스에서 열린 두 아트페어였지만 관람 방식에는 분명한 온도 차가 있었다. 키아프가 다양한 장르와 작품을 폭넓게 펼쳐 보이며 '둘러보는 재미'를 줬다면 프리즈는 작품 수와 공간 여백을 조절해 개별 작품과 갤러리의 존재감을 보다 또렷하게 드러내는 인상이었다. 두 아트페어가 각기 다른 관람 경험을 보여주는 사이 유통기업들도 현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고가 미술품을 구매하는 컬렉터와 미술 애호가 상당수가 백화점 최상위 VIP와 명품·고급 소비재 핵심 고객층과 맞물리는 만큼 올해 프리즈에서는 신세계그룹이, 키아프에서는 현대백화점이 각각 전용 공간과 고객 프로그램을 앞세워 이들을 맞이했다. 프리즈 안으로 들어간 신세계…전시와 '브랜드 공간' 사이 프리즈 전시장 내부에 마련된 '신세계 라운지'는 일반적인 기업 홍보 부스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곳곳에 배치된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했고 내부에는 프랑스 작가 폴 콕스의 색채감 강한 작품들이 이어졌다. 여기에 에코백 증정 이벤트까지 더해지면서 차분한 갤러리와 감각적인 팝업의 요소가 한 공간에 공존했다. 라운지에서는 폴 콕스 특별전 'L'Immensité du Quotidien: The Monumental Everyday'를 열고 작가가 수년간 매일 저녁 명상을 불투명 수채물감으로 기록한 'Diary' 연작 336점을 한꺼번에 공개했다. 라운지 외관에도 작품을 대형 이미지로 구현해 프리즈 전시장을 오가는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신세계가 이처럼 프리즈 한복판에 그룹 이름을 내건 별도 공간을 만든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신세계그룹은 올해부터 오는 2030년까지 5년간 프리즈 서울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한다. 단순 행사 후원보다 프리즈라는 글로벌 문화 플랫폼 안에서 신세계가 구축해온 공간과 콘텐츠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행사장 밖에서도 프리즈와의 연결을 이어갔다.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에서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연작 등을 전시하고 클래식 공연도 마련했다. 프리즈 티켓이 없는 방문객도 이용할 수 있는 공간까지 문화 프로그램을 넓힌 것이다. 이 같은 행보는 신세계가 60여 년간 이어온 문화예술 사업의 연장선에 있다. 1963년 문을 연 신세계갤러리를 시작으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트리니티 가든, 스타필드 별마당도서관, 조선호텔앤리조트 아트 프로그램까지 계열사 공간 곳곳에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목해왔고 이번 프리즈 파트너십을 통해 그 무대를 글로벌 아트페어 현장으로까지 넓혔다. 키아프 밖에 자리 잡은 현대百…VIP '머무는 공간'에 집중 프리즈 전시장 안에서 그룹 문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운 신세계와 달리 현대백화점은 키아프를 VIP 고객이 머물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풀어냈다. 키아프 전시장과 같은 층 외부에 마련된 현대백화점 VIP 라운지는 화이트 톤의 차분한 인테리어로 꾸며졌고 내부에는 작품 전시와 함께 관람객이 쉬어갈 수 있는 카페와 널찍한 좌석이 마련됐다. 작품을 둘러보던 고객들은 음료를 받아 들고 천천히 전시를 감상하거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라운지에는 도예가 강석영과 섬유·설치 작가 정소윤의 작품이 전시됐다. 신세계 라운지가 프리즈 전시장 안에서 하나의 독립된 전시 공간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현대백화점 라운지는 장시간 작품을 둘러본 VIP 고객이 머물며 쉬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현대백화점과 키아프의 관계는 올해로 5년째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2022년 한국화랑협회와 국내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이후 매년 키아프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왔다. 올해는 현장 라운지를 넘어 백화점 내부 프로그램까지 키아프와의 연계를 넓혔다. 개막일인 지난 2일 무역센터점에서는 키아프 VIP와 현대백화점 우수 고객을 대상으로 작가 프레젠테이션과 리셉션을 결합한 '아트 이브닝: 6분40초의 미학'을 진행했고 압구정본점·무역센터점·판교점·더현대 서울 문화센터에서는 키아프 프리뷰 강좌인 '하이스트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전시와 작품 구매로도 이어진다. 전국 주요 점포에서 진행 중인 '2026 더현대 아트스테이지'를 통해 압구정본점과 목동점 등에서 회화와 현대 공예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일부 작품은 온라인몰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키아프 현장에서 시작된 미술 경험을 VIP 행사와 문화센터 강좌, 점포 전시, 온라인 판매까지 이어가는 방식이다. 프리즈는 '브랜드', 키아프는 '스펙트럼'…유통사 아트 전략 달랐다 두 유통기업의 전략이 달랐던 것처럼 키아프와 프리즈가 기반을 둔 미술시장도 차이가 있다. 2002년 시작한 키아프 서울은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 규모 아트페어로 올해 25주년을 맞아 18개국 175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국내 갤러리를 중심으로 해외 갤러리까지 폭넓게 참여하고 현대미술부터 근현대·전통미술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2003년 영국에서 출발한 프리즈는 2022년 아시아 최초 개최지로 서울을 택한 글로벌 아트페어다. 올해는 30개 국가·지역에서 130개가 넘는 갤러리가 참여했으며 가고시안·하우저앤워스·글래드스톤·리슨 등 세계 미술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갤러리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초반 전시장에서 체감한 분위기 차이도 이 같은 구성에서 비롯됐다. 키아프가 국내 미술시장의 다양한 장르와 참여 화랑을 폭넓게 보여주는 장이라면 프리즈는 글로벌 주요 갤러리와 작가를 중심으로 각 브랜드의 색깔과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성격이 강하다. 두 아트페어의 성격 차이는 유통기업들의 참여 방식에서도 확인됐다. 신세계는 프리즈 안에서 그룹의 문화 브랜드를 직접 보여주는 데 집중했고 현대백화점은 키아프를 기존 VIP 고객 프로그램과 백화점 콘텐츠로 연결했다. 같은 아트페어 후원이라도 신세계는 공간 브랜딩에, 현대백화점은 고객 관리에 방점을 찍었다. 작품을 보기 위해 코엑스를 찾은 사람들 사이에서 두 백화점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VIP 고객과의 관계를 넓히고 있었다.
2026-09-03 17: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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