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58건
-
반도체 호황에 취한 정부, 민생은 무너진다
[경제일보] 반도체가 잘나간다고 한국 경제까지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수출은 늘고 기업 실적은 뛰는데 일자리가 부족하고 소비가 얼어붙었다면 무슨 소용인가. 반도체 실적에 환호하는 동안 청년은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고, 자영업자는 생존을 걱정한다. 수출의 온기와 민생의 한파가 따로 논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기둥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집약도가 높은 산업의 호황이 대규모 고용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가 확산할수록 생산성과 일자리가 함께 늘 것이라는 기대도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에 더 많은 지원을 쏟는 것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해결할 수는 없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성장축이 필요하다. 답은 서비스산업에 있다. 콘텐츠와 관광, 뷰티, 금융, 물류는 기술과 창의성을 결합해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분야다. K-콘텐츠와 K-뷰티가 이미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국내 기업은 낡은 규제와 부처 간 칸막이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용을 떠받치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내수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제조업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모두 해결하겠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 장기 표류가 이를 상징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개인정보 보호는 지켜야 하지만 이를 이유로 혁신의 문을 닫아걸 수는 없다. 공공성이 중요한 분야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관광·콘텐츠·물류 등은 불합리한 규제와 중복 인허가부터 정비해야 한다. 규제를 무조건 풀자는 것이 아니라 지킬 원칙과 고칠 규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여야가 이해집단의 눈치만 보며 입법을 미루는 동안 기업은 투자를 늦추고 청년은 기회를 잃는다. 정부 지원도 달라져야 한다. 중소 서비스기업의 AI 도입과 인력 재교육을 돕되, 장비 구매나 일회성 보조금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업무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 매출 증가 등 생산성 개선으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콘텐츠·뷰티·관광 기업에는 지식재산권 보호와 해외 유통망, 금융·마케팅 지원을 연결하고, 직업훈련은 수료 인원이 아니라 실제 취업과 임금 상승으로 평가해야 한다. 예산 집행 실적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가 정책의 성적표여야 한다. 서비스산업 혁신은 제조업을 희생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반도체 기술을 서비스와 연결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수출의 성과가 투자와 소비, 고용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다. 제조업의 기술이 서비스 혁신을 이끌고 서비스기업의 창의성이 다시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특정 산업의 호황에 경제 전체가 매달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제의 성적표는 주가나 수출액만으로 매길 수 없다. 청년이 일자리를 얻었는지, 중소기업이 성장했는지, 가계의 소득과 소비가 나아졌는지를 봐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이 좋아졌다고 경제정책까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수출 통계 뒤에 숨어 민생의 부진을 외면하는 것은 경제운용이 아니라 책임 회피다. 반도체 호황은 정부의 공이 아니라 산업이 만든 기회다. 정부가 이 기회에 취해 서비스산업 개혁을 미룬다면 오늘의 수출을 자랑하는 대가로 내일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 반도체 성과를 자랑하기 전에 민생부터 살려라. 정부의 성적표는 수출액이 아니라 국민의 일자리와 소득으로 매겨야 한다.
2026-10-15 17:36:56
-
-
-
최태원표 AI 인재 육성…SK, 청년 50명에 월 300만원 지원
[경제일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강조해 온 인공지능(AI) 시대 인재 육성이 청년 지원 프로그램으로 확대된다. SK는 학위나 취업과 관계없이 청년들이 AI를 활용해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스스로 진로를 설계할 수 있도록 교육과 활동비를 지원한다. 12일 SK에 따르면 그룹 인재육성 플랫폼 마이써니는 2년제 비학위 프로그램 'SK AIGEN(아이젠)'을 신설하고 첫 참가자 모집에 나선다. 아이젠은 AI와 세대(Generation)를 결합한 명칭으로, AI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청년세대를 뜻한다. 이번 프로그램은 정해진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대신 참가자가 직접 해결할 문제를 선정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개인과 기업,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AI 기술로 해결하면서 실무 경험과 협업 역량을 쌓도록 설계했다. 교육은 2년간 전일제로 진행된다. 첫해에는 참가자가 개인 또는 팀 단위로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 방안을 구체화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동료들과 협력하며 프로젝트 수행 능력을 높인다. 2년 차에는 각자가 설정한 진로와 활동 계획에 따라 실제 현장에서 과제를 수행한다. SK는 분야별 전문가와 멘토를 연결해 프로젝트 진행을 돕고 참가자들이 관심 분야에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교육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서울대학교 AI연구원과도 협력한다. 서울대 AI연구원은 AI 기술을 사회학과 경제학, 행정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접목해 연구하는 기관이다. 아이젠에서는 참가자들의 인문학적 사고 확장과 진로 설계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참가자에게는 교육 기간인 24개월 동안 매월 300만원의 성장지원금이 지급된다. 1인당 최대 7200만원으로, 별도의 역량 교육과 프로젝트 멘토링, 활동공간도 제공된다. 다만 학위 취득이나 특정 기업 입사는 보장하지 않는다. 지원 대상은 2년간 전일제 활동이 가능한 만 19~34세 청년이다. 학력이나 전공보다는 문제 해결 의지와 성장 가능성을 중심으로 선발한다. 기술과 연구뿐 아니라 문화예술, 공공,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1기 모집은 오는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다. 이후 선발 절차를 거쳐 12월 말 약 50명을 확정하고 2027년 3월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아이젠에는 최 회장이 강조해 온 AI 시대 인재 육성 방향이 반영됐다. SK는 기술 발전으로 지식 습득과 정보 처리 방식이 변화하는 만큼 스스로 판단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타인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5월 KBS '인재전쟁2' 강연에서 "AI시대에는 지식을 빨리 습득하고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훈련은 이제 AI로 대체된다"며 "(인재는)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고 여러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전인적(全人的) 역량을 함께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SK가 오랫동안 이어온 '인재보국(人材報國)' 철학과도 연결된다. 인재를 길러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참가자들에게 교육 종료 후 취업이나 활동에 관한 별도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SK 관계자는 "매년 신규 참가자를 선발해 아이젠을 그룹의 대표적인 AI 인재 육성 프로그램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2026-10-12 09:36:48
-
-
-
-
-
-
-
-
-
김기홍 JB금융 회장, ROE 13% 질적 성장…캐피탈·동남아로 사업 확대
[경제일보] 김기홍 회장이 이끄는 JB금융그룹이 수익성과 자본효율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지배주주지분 순이익은 385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4.1% 증가했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3.0%, 보통주자본(CET1)비율은 12.53%를 기록했다. 김 회장은 위험가중자산이익률(RORWA)을 중심으로 자산별 수익성을 관리하는 질적 성장 전략을 추진해왔다. 은행·캐피탈의 수익 기반을 넓히는 한편 인도네시아 여신금융과 금융특화 인공지능(AI) 등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RORWA 중심 질적 성장…반기 최대 순익 김 회장은 금융감독원 부원장보와 KB국민은행 수석부행장, JB자산운용 대표를 거쳐 지난 2019년 3월 JB금융 회장에 취임했다. 2022년과 지난해 연임에 성공해 세 번째 임기를 맡고 있다. 현 임기는 오는 2028년 3월까지다. 취임 이후에는 자산 규모 확대보다 위험가중자산 대비 이익과 자본효율을 중시하는 경영을 추진했다. 은행과 비은행 계열사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수익성과 건전성을 함께 고려해 자본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올해 상반기 JB금융의 RORWA는 2.03%로 지난해 말 1.91%보다 0.12%포인트(p) 높아졌다. 총자산이익률(ROA)은 1.07%, 영업이익경비율(CIR)은 36.9%를 기록했다. CET1비율은 지난해 말 12.58%에서 12.53%로 0.05%포인트 낮아졌지만 12% 중반을 유지했다. JB금융은 대출이 위험에 비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내는지, 조달비용과 신용비용을 빼고도 수익성이 있는지를 따져 여신을 T1~T4로 구분한다. 두 기준에서 모두 수익성이 높은 T1은 확대하고 한쪽만 높은 T2·T3는 선별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수익성이 낮은 T4는 비중을 조정해 사업구조를 개선한다. ◆JB우리캐피탈 34% 성장…그룹 수익구조 다변화 JB금융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385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4.1% 증가하며 반기 최대를 기록했다. 은행 계열사들의 순이익이 감소한 가운데 JB우리캐피탈이 성장하며 그룹 실적을 뒷받침했다. 전북은행은 945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9.0% 감소했고 광주은행은 1467억원으로 1.2% 줄었다. 반면 JB우리캐피탈은 1768억원으로 34.2% 증가했다. JB자산운용과 JB인베스트먼트는 각각 15억원, 53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JB우리캐피탈은 개인신용대출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동차담보대출과 비부동산 기업금융, 투자금융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말 자동차담보대출 잔액은 1조9299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345억원 증가했다. 기업금융 자산은 4조4522억원, 투자금융 자산은 1조7065억원으로 같은 기간 각각 2770억원, 2335억원 늘었다. 그룹 차원에서는 은행과 캐피탈의 사업 역량을 연계해 특화 여신을 확대한다. JB금융은 JB우리캐피탈의 자동차담보대출 취급 경험을 전북은행과 광주은행에 적용해 관련 상품과 영업을 넓힐 계획이다. 외국인대출도 그룹의 주요 특화 여신 사업으로 추진한다. 전북은행·광주은행·JB우리캐피탈은 기존 외국인 근로자 중심의 고객군을 유학생과 장기체류 외국인으로 확대하고 있다. 체류자격과 국내 정착 단계에 따라 상품을 세분화해 취업·정주 과정에서 금융거래를 이어가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이들 3사의 외국인대출 잔액은 상반기 말 1조904억원이며 연말 목표는 1조3000억원이다. ◆인도네시아 진출…동남아 사업 기반 확장 JB우리캐피탈은 이달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으로부터 현지 여신전문금융사 KB부코핀파이낸스 인수와 관련한 대주주 변경 승인을 확보했다. JB우리캐피탈은 지난해 7월 KB부코핀파이낸스 지분 85%를 약 29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현지 금융당국의 승인으로 주요 인허가 절차를 마쳤으며 지분 취득 완료 후 현지 사업 확대에 나설 계획이다. JB금융은 이미 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에서 금융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프놈펜상업은행(PPCBank)과 자산운용업을 운영하고 미얀마에서는 소액대출업, 베트남에서는 증권업을 영위한다. 캄보디아 프놈펜상업은행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264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5.9% 증가했다. JB금융은 기존 은행·소액대출·증권 사업에 인도네시아 여신금융을 추가해 동남아 수익 기반을 넓힐 계획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기이륜차를 중심으로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한다. JB우리캐피탈은 AI 핀테크기업 에이젠글로벌의 현지 법인과 협력해 전동이륜차 구매자금과 운전자 신용대출, 배터리 매입자금 대출 등을 추진한다. 국내 자동차금융 사업에서 축적한 여신심사와 상품 운영 경험을 현지 시장에 적용하려는 구상이다. 기존 기업금융 중심의 사업을 개인 고객으로 확대하고 전기이륜차 구매와 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 수요를 확보할 계획이다. ◆주주환원 50%·금융특화 AI…성장전략 구체화 수익성 중심 경영과 함께 주주환원도 확대하고 있다. JB금융의 지난해 총주주환원율은 45.0%로 전년 32.4%보다 12.6%포인트 상승했다. 올해 목표는 50%이며 중장기 ROE 목표는 15%다. 지난 7월에는 1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취득·소각을 결정했다. 취득 예정액 가운데 약 820억원은 올해 말까지, 나머지 약 180억원은 내년 1월 신탁계약 만료 전까지 취득할 계획이다. 확보한 주식은 전량 소각한다는 방침이다. JB금융은 최근 업스테이지와 금융특화 AI 에이전트 개발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전북은행·광주은행·JB우리캐피탈의 금융업무에 AI 기술을 접목해 업무 효율과 서비스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올해 우선 추진 과제는 △컴플라이언스 △여신 프로세스 △IT 개발 프로세스 △디지털 마케팅 △AI 컨택센터다. 금융특화 AI 모델을 그룹 안에 도입하고 기존 인력의 업무 역량 전환과 신규 사업 배치도 추진한다. 김 회장은 수익성 중심 경영을 유지하면서 해외사업과 AI를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 여신금융 사업을 본격화하고 금융특화 AI를 은행·캐피탈 업무에 적용해 2030년 기준 연간 1000억원 이상의 가치 창출을 추진한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29일자 15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29 07:38:14
-
차례상 대신 여행가방…전통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
[경제일보] 형식에 매달려 본질을 놓쳐선 안 돼…조상 공경과 가족애라는 가치는 지키되 시대착오적 관습은 과감히 바꿔야 명절의 풍경이 달라졌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전국의 도로는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다. 집집마다 차례상을 준비하고 전을 부쳤으며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명절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공항 출국장은 여행객으로 넘쳐나고 호텔과 리조트는 일찌감치 예약이 끝난다. 차례상을 준비하는 대신 여행가방을 챙겨 가족과 휴식을 떠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다. ‘민족의 대이동’이 ‘가족의 휴식 여행’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전통이 무너지고 가족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효와 경로의식이 사라지고 젊은 세대가 조상과 고향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40년 넘게 우리 사회의 변화를 지켜본 필자의 눈에는 이 현상을 단순한 ‘전통의 붕괴’로만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물어야 한다. 전통은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전통은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활문화다. 따라서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다면 전통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농경사회와 대가족을 바탕으로 형성된 명절 풍습을 핵가족과 맞벌이, 1인 가구가 늘어난 오늘날에도 과거와 똑같이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특히 명절은 오랜 기간 누군가의 희생 위에 유지돼 왔다.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차례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일은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장거리 귀성에 따른 교통체증과 비용 부담도 컸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기는커녕 결혼, 출산, 취업, 재산 문제를 캐묻다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 위로받아야 할 명절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시간이 되어버린 이유다. 여기서 형식과 본질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차례상에 몇 가지 음식을 올렸느냐가 중요한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중요한가, 아니면 정해진 날에 반드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는 형식이 중요한가. 답은 어렵지 않다.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릇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면 바꾸면 된다. 차례상을 간소화한다고 조상을 덜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차례를 생략한다고 효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 자연을 거닐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돌아보는 것 역시 가족애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부모와 자녀가 오랜만에 마주 앉아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명절이 지켜야 할 본질에 가깝다. 물론 변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전통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전통에는 한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축적돼 있다. 조상을 기억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가족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은 지켜야 한다. 다만 그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까지 과거와 똑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차례를 간소화하고 가족 구성원이 번갈아 준비할 수도 있다.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족사진을 펼쳐놓고 조상의 삶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고향을 찾기 어렵다면 전화나 영상통화로 부모와 친지의 안부를 묻는 것도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의 형태가 아니라 그 의식에 담긴 마음이다.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그렇게 변화해왔다. 한복은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 달라졌고 음식은 새로운 식재료와 조리법을 받아들이며 발전했다. 전통음악도 새로운 장르와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얻었다. 유독 명절 문화만 수십 년 전의 틀에 묶어둘 이유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가 전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전통은 강요한다고 계승되지 않는다. 의미를 느끼고 공감할 때 이어진다. 젊은 세대가 명절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을 모른다”고 탓하기에 앞서 왜 그렇게 됐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명절이 가족에게 의무와 스트레스로 기억된다면 전통은 다음 세대에서 끊길 수밖에 없다. 반대로 명절이 가족과 함께 웃고 쉬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으로 기억된다면 그것 자체가 새로운 전통이 된다. ‘차례상 대신 여행가방’은 그래서 전통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형식 중심의 전통에서 가치 중심의 전통으로 이동하는 사회 변화의 한 단면일 수 있다. 물론 고향집에 모여 차례를 지내는 가족도 소중하다. 여행을 떠나는 가족도 나름의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장소도, 음식도, 의식의 형식도 아니다. 가족이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존중하느냐가 핵심이다. 40년 전과 지금의 가족은 다르다. 사는 곳도, 일하는 방식도, 가족의 규모도 달라졌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변해야 한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만이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사람을 위해 전통이 존재해야지, 전통을 위해 사람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 전통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 박제가 된다. 시대와 함께 변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낡은 형식은 과감히 덜어내되 조상 공경과 가족애라는 소중한 가치는 더욱 단단하게 이어가야 한다. 이번 명절에도 누군가는 차례상 앞에 앉고, 누군가는 여행가방을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느 쪽도 전통의 배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가족이 서로를 생각하고 존중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명절의 본뜻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의 가치가 오늘의 삶에서도 살아 숨 쉬도록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는 일이다.
2026-09-27 15:21: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