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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AI를 쓰는 시대, 판결의 책임은 누가 지나
[경제일보]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한 판사가 법률 검토에 챗GPT를 사용했다. 판사가 작성한 재판 명령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판례 두 건이 들어갔다. 수사기관은 형사처벌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지만 징계 문제는 남았다. 변호사가 AI의 거짓 답변을 법정에 냈다는 소식은 이제 낯설지 않다. 판결문을 쓰는 판사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법원도 지난 2월 생성형 AI를 재판 실무에 들였다. 대법원 판례와 법령·결정례·주석서 등을 분석해 관련 법률 쟁점을 찾고 핵심 내용을 정리해 주는 시스템이다. 대법원은 앞으로 사건의 요지와 쟁점을 분석하는 기능까지 추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I가 판례를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록을 읽고 사건의 뼈대를 잡는 단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법원은 이 시스템을 공개하면서 AI 답변에 부정확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최종 판단과 책임은 이용자의 검토와 판단에 따른다고도 했다. 판사가 사용한다면 판사가 책임진다는 말이다. 원칙은 맞다. 그러나 책임자를 적어 놓는 것과 실제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다르다. 판례 검색을 맡기는 것과 사건의 쟁점을 정리하도록 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수천 쪽의 기록 가운데 무엇을 앞에 놓고 무엇을 뒤로 밀었는지가 재판의 방향을 바꾼다. AI가 먼저 짠 틀에 따라 판사가 기록을 읽었다면 판단의 출발점부터 영향을 받은 셈이다. 판사가 AI의 답변을 고쳐 썼다고 해서 그 영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국민에게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으로 심판한다. 재판은 판결문에 적힌 주문만을 뜻하지 않는다. 증거를 살피고 사실을 인정하며 어떤 법률을 적용할지 정하는 모든 과정이 재판이다. 그 과정의 일부를 AI에 맡겼다면 법관이 어디까지 직접 판단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판결문만으로 이를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판사가 AI에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 없다. AI가 어떤 답변을 내놓았는지도 확인하기 어렵다. 판사가 그 답변을 어떻게 검증했는지는 더 알기 힘들다. 판결이 잘못됐다는 의심이 생겨도 AI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추적할 기록이 없다면 책임을 따지는 일부터 막힌다. 항소심에서 판결을 고치면 된다는 말로 끝낼 수도 없다. 형사재판의 구속과 실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 가사재판은 양육권과 면접교섭을 바꾸고 민사재판은 재산을 압류하고 처분한다. 잘못된 판결이 뒤집힐 때까지 당사자가 치른 시간과 비용은 되돌리기 어렵다. 재판상 과오가 발견됐다고 국가배상책임이 곧바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책임의 빈틈은 쉽게 생긴다. AI 업체는 최종 결정자가 판사라고 할 수 있다. 판사는 AI를 참고자료로만 썼다고 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는 개별 재판은 재판부의 권한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다. 누구도 책임을 부인하지 않는 듯 말하면서 실제 책임은 어느 곳에도 남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 피해는 재판 당사자가 떠안는다. 유럽연합은 법원이 구체적인 사건의 사실과 법률을 조사·해석하는 데 쓰는 AI를 고위험 인공지능으로 분류했다. 사람의 실질적인 감독과 사용기록도 요구한다. 영국 사법부는 판사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자료에 대한 책임이 판사 개인에게 있다고 못박았다. 기술을 쓰지 말라는 규제가 아니다. 기술을 쓰려면 그만큼 무거운 검증 의무를 지라는 요구다. 한국도 법관용 AI 가이드북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례 검색과 기록 요약·쟁점 추출·판결 초안 작성·증거 평가를 구분해 허용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AI에 입력한 질문과 답변은 일정 기간 보존해야 한다. 사실인정이나 법률 판단에 AI 결과가 반영됐다면 항소심이 사용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판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 당사자에게 알리는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 판사에게 재판권을 준 이유는 판사가 법률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기록을 직접 읽고 당사자의 말을 들은 뒤 자신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뜻이다. 빠른 판결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국민이 알 수 있는 판결이다. AI는 판사의 시간을 줄여줄 수 있다. 책임까지 줄여줄 수는 없다. 판결문에는 AI의 이름이 아니라 판사의 이름이 찍힌다. 재판에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들어올수록 판사가 남겨야 할 판단의 흔적은 더 많아져야 한다. 사법부가 먼저 정할 것은 AI를 얼마나 넓게 쓸지가 아니다. 잘못된 판결이 나왔을 때 누구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다.
2026-09-16 11: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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