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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라인 갈아치우면 정책도 달라지나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계해 온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이 물러났다. 김 실장은 지난달 31일 사의를 밝혔고 이재명 대통령은 1일 사표를 수리했다. 이 정부 초대 정책실장으로 부동산과 산업정책, 대미 관세협상 등을 조율해 온 핵심 참모가 출범 1년3개월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앞서 이 대통령은 재정경제부와 국토교통부 등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폭 개각도 단행했다.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4~28일 전국 유권자 25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38.9%로 나타났다. 취임 후 처음 30%대로 내려왔고 7주 연속 하락했다. 조사기관은 집값과 전월세 불안 등을 지지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정권이 국정 동력을 잃을 때 인적 쇄신은 오래된 처방이다. 장관과 참모를 바꾸면 국민에게 변화의 신호를 줄 수 있고 조직에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정책 실패에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을 바꾸면 정책도 달라지느냐다. 김 정책실장 개인의 공과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최근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부동산과 세제, 금융, 재정 같은 핵심 정책은 정책실장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실과 관계부처, 여당, 관료조직이 함께 논의하고 대통령의 최종 판단을 거쳐 실행된다. 결과가 좋을 때는 ‘정부의 성과’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장관이나 참모 한두 명의 책임으로 정리한다면 같은 오류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집값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목표 자체에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급과 금융, 세제 정책이 시장에 어떤 신호를 줬는지다. 대출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실수요 지원을 확대하고, 공급을 강조하면서도 재건축·재개발이나 토지 활용 문제를 놓고 정책 메시지가 엇갈리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진다. 정책을 만든 사람을 바꾸기 전에 이런 엇박자가 왜 생겼는지부터 찾아야 한다. 세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시장이 움직일 때마다 세율과 공제, 대출규제를 꺼내 들면 국민은 정책의 원칙보다 다음 규제가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정책이 시장의 기대를 안정시키는 대신 정부 발표 때마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드는 구조라면 담당 장관 교체만으로 신뢰가 회복되기 어렵다. 재정정책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생산적 재정을 내세우며 AI와 미래산업, 청년과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필요한 방향이다. 그러나 지출 확대와 국가채무 관리, 기존 사업 구조조정의 원칙이 동시에 제시되지 않으면 결국 돈을 더 쓰겠다는 메시지만 시장에 남을 수 있다. 산업정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와 AI부터 SMR·양자·우주·바이오까지 정부가 미래산업을 선정하고 금융과 세제, 연구개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전략산업 육성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산업의 승자를 모두 골라주려 하면 민간의 판단과 경쟁이 약해질 수 있다. 어느 선까지 정부가 개입하고 어디서부터 시장에 맡길 것인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정책 하나하나보다 정책을 만드는 방식에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실로 정책 결정이 집중되기 쉽다. 장관은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지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전달되는 순간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렵다. 청와대가 방향을 정하면 부처는 세부안을 만드는 집행기관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책실장과 장관을 아무리 유능한 인물로 바꿔도 한계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올라가는 조직에서는 정책 실패가 반복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이 정책은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빠르게 실행하는 참모만큼 그 정책의 위험을 냉정하게 경고하는 참모도 필요하다. 장관 역시 대통령실의 지시를 받아 적는 자리가 돼선 곤란하다. 경제부처 장관이라면 시장과 기업, 가계의 현실을 근거로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국토부 장관은 집값이 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면 그 원인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수정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한번 발표한 정책을 고치는 것을 실패나 후퇴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정책을 오래 끌고 가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거나 부작용이 확인됐다면 빨리 수정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 있는 정부다. 다만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정책을 뒤집는 것도 답은 아니다. 수정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부동산이라면 집값과 거래량, 입주 물량, 가계대출과 전월세 가격 등 사전에 정한 지표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재정사업이라면 투자 대비 생산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일자리 창출 같은 성과를 측정하면 된다.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유지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수정하겠다는 기준을 공개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정부의 체면보다 정책 효과를 앞세우는 구조다. 여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집권당이 정부 정책을 무조건 방어하면 민심의 경고가 대통령실에 전달될 통로가 사라진다. 여당은 야당보다 먼저 정부 정책의 허점을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이번 인사가 책임 회피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 정책실장이 스스로 사의를 밝혔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만큼 새로운 경제라인이 정책을 다시 정비할 기회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장관과 참모들이 기존 정책을 원점에서 점검한다면 인적 쇄신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얼굴만 바꾸고 정책 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개각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지율 38.9%라는 숫자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 차례 여론조사를 국정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7주 연속 하락이라는 흐름은 정부가 국민이 느끼는 불안을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 신호에 대한 답이 사람 몇 명을 바꾸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정권의 실패는 흔히 사람과 정책,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만든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눈에 잘 보인다. 정책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렵고,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같은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 이번 개각과 정책실장 교체가 진정한 쇄신이 되려면 새 경제팀에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주고 대통령실도 다른 목소리를 듣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수정하고, 효과가 없는 사업은 접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누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뉴스만이 아니다. 집값과 생활비 부담이 줄고 일자리가 늘고 기업이 투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인사의 성패도 결국 그 결과에서 판가름 난다.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국정 쇄신은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또 다른 인사만 기다리게 된다. 이번 개각이 남겨야 할 진짜 변화는 새 얼굴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을 스스로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부 시스템이다.
2026-09-01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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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은 뛰는데 왜 서민 경기는 뛰지 않는가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성적표만 놓고 보면 요즘처럼 반가운 때도 드물다. 수출이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수출 증가를 이끌면서 대외 경쟁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월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수출도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7월 수출 역시 988억9000만 달러로 역대 2위였으며 반도체 수출은 410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가 힘차게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장과 골목의 표정은 그만큼 밝지 않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줄었다고 말한다. 가계는 월급보다 빠르게 오르는 생활비에 지갑을 닫고 있다. 수출은 역대급인데 왜 국민이 느끼는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가. 문제는 거시경제 지표와 실물경제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반도체의 선전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AI 산업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우리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6월 반도체 수출은 448억2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4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1924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제 전체를 반도체 하나의 성적표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고도의 자동화와 자본집약적 생산구조를 갖고 있어 수출 증가가 고용과 내수 확대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도체 수출이 늘었다고 동네 식당 매출이 함께 증가하는 것도, 대기업의 수출 호황이 청년 일자리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성장의 미스매치’다. 수출이 늘고 기업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한 호재다. 문제는 성장의 과실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다. 대기업과 첨단산업에 집중된 성과가 중견·중소기업과 서비스업, 자영업자, 근로자에게 충분히 확산되지 않는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풍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수출 호황을 내수 회복으로 연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첨단산업의 성과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중소·중견기업으로 확산되도록 공급망을 강화하고,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 해외시장 진출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에게도 단기 일자리 숫자보다 AI·반도체·바이오·로봇·에너지 등 미래 산업과 연결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내수와 서비스업을 살리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자영업자에 대한 일회성 지원을 넘어 임대료와 금융비용 등 고정비 부담을 낮추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의 구조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관광·문화·의료·콘텐츠·돌봄 등 고용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여 소비 여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숫자에 취해서는 안 된다. 수출이 잘된다고 경제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체감경기가 어렵다고 수출 호조의 가치를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두 현실을 함께 보는 것이 경제를 제대로 보는 상식이다. 수출은 우리 경제의 엔진이고 내수는 그 엔진이 움직이는 도로다. 엔진만 아무리 좋아도 도로가 무너지면 자동차는 제대로 달릴 수 없다. 진짜 경제 회복은 수출 통계표에서 끝나지 않는다. 청년이 첫 직장을 얻고, 직장인이 월급의 실질가치를 체감하며, 자영업자가 저녁 장사를 걱정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이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성장의 의미가 완성된다. 경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반도체 수출의 기록을 축하하되 그 기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수출의 온기가 산업 전반으로, 기업에서 가계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수출은 잘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경제정책이 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경제지표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성장만이 아니다. 성장의 과실이 더 넓고 깊게 국민에게 돌아가는 성장, 그것이야말로 진짜 경제성장이다.
2026-08-23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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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2000조, 금리 올리면서 빚 늘리는 정책 끝내야
[경제일보] 가계부채가 결국 200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이 지난 19일 발표한 ‘2026년 2분기 가계신용’에 따르면 6월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조8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25조9000억원 늘었다. 증가 폭은 2021년 3분기 이후 가장 컸다. 가계대출은 1891조3000억원으로 24조9000억원 증가했고, 판매신용도 128조5000억원으로 9000억원 늘었다. 2000조원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증가 속도다. 가계부채가 줄기는커녕 다시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은 금리와 부동산, 금융정책 사이에 엇박자가 생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물가를 잡겠다며 기준금리를 올리고 다른 쪽에서는 주택시장과 실수요자를 지원한다며 금융을 풀 경우 정책 효과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인상했다.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물가 상승 압력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판단해서다. 여기에 가계부채와 부동산시장을 둘러싼 금융안정 위험도 여전히 크다고 봤다. 그러나 금리가 올라가는데도 가계대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면 통화정책만으로 부채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계부채의 위험은 단순히 금융기관의 건전성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출이 늘면 금리 상승의 충격도 커진다. 특히 변동금리 대출을 많이 가진 가계와 소득이 불안정한 자영업자, 다중채무자에게 기준금리 인상은 곧바로 이자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한국은행도 최근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취약차주 비중 상승과 일부 취약계층의 채무상환능력 저하를 위험요인으로 지적했다. 가계가 벌어들인 소득 가운데 상당 부분을 원리금 상환에 쓰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소비 감소는 자영업자 매출 감소로 이어지고 다시 내수 부진을 키운다. 가계부채는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 성장과 소비, 자영업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적 문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최근 주택·금융지원 정책은 더욱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와 함께 청년·신혼부부 등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 지원을 강화하고, 주택 공급 촉진을 위한 금융지원도 확대하고 있다. 공급 프로젝트에 필요한 금융지원을 기존 26조3000억원에서 47조8000억원 이상으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3일 내놓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금융 종합대책에서 주택공급 금융지원 확대와 함께 올해 가계부채 총량 증가율 관리 목표를 당초 1.5%에서 3% 수준으로 높였다. 확대된 대출 여력을 주택공급과 청년·실수요자 지원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 대출 수요를 억제하는 시점에 가계부채 총량 증가 허용폭을 두 배로 넓힌 것은 시장에 엇갈린 신호를 줄 소지가 있다. 정책 목적이 다르더라도 통화·금융정책의 방향이 충돌하지 않도록 세밀한 조율이 필요하다.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향은 맞다. 서울과 수도권의 공급 부족이 장기간 이어지면 집값 불안과 대출 증가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정상적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이 일시적인 자금경색 때문에 멈추지 않도록 금융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공급 금융과 주택 구입 금융은 구분해야 한다. 실제 주택 공급을 늘리는 PF와 건설자금은 필요한 곳에 투입하되, 가계의 주택 매수 여력을 무차별적으로 키우는 지원은 신중해야 한다. 저금리·고한도 대출이 실수요자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확대되면 공급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매수 수요부터 자극할 수 있다. 실수요자 보호라는 명분도 정교하게 적용해야 한다. 생애 최초 구입자나 신혼부부, 청년의 주거 사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소득과 상환능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대출 한도를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결국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집을 살 기회를 주는 것과 빚을 낼 기회를 늘리는 것은 같은 정책이 아니다. 가계부채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의 방향을 맞추는 일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리며 수요를 억제하는데 정부가 재정과 금융으로 주택 수요를 크게 늘린다면 한쪽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쪽은 가속페달을 밟는 셈이다. 결국 더 높은 금리와 더 많은 부채라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집값 안정이라는 목표 아래 공급 확대, 대출 규제, 세제 정책이 같은 방향을 가야 한다. 공급은 장기적으로 충분히 늘리되 단기적인 투기 수요와 과도한 레버리지는 누르는 것이 먼저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주택가격 상승을 전제로 과도하게 빚을 내는 구조는 줄여 나가야 한다. 취약차주 지원도 전면적인 채무 탕감이나 이자 보전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상환 의지가 있고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는 차주에게는 만기 조정과 장기·고정금리 전환, 재기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반면 상환능력을 넘어선 신규 대출까지 정책적으로 늘려주는 것은 문제를 미래로 미루는 데 불과하다. 가계부채 문제의 근본에는 부동산에 지나치게 집중된 한국 가계의 자산구조도 있다.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강할수록 가계는 미래 소득을 앞당겨 대출을 받고 주택을 산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 다시 대출이 늘고 그 유동성이 집값을 밀어 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주택 공급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융자산을 통한 장기적인 자산 형성 기회를 넓히고, 전월세 시장을 안정시키며, 주거 이동이 자산투자와 동일시되는 구조도 함께 손봐야 한다. 가계부채 2000조원 돌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다. 저금리와 부동산 상승 기대, 대출 확대와 정책의 반복적인 완화·규제가 오랜 기간 쌓인 결과다. 어느 한 정부나 한국은행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선택은 다를 수 있다. 통화정책과 금융정책, 주택정책이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구조부터 끝내야 한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린다면 정부도 불필요한 수요 자극부터 걷어내야 한다. 주택 공급 금융은 확대하되 가계부채를 다시 끌어올릴 정책대출은 선별해야 한다. 가계부채는 한번 커지면 금리를 내릴 때도, 올릴 때도 경제정책의 발목을 잡는다. 금리를 올리면 이자 부담이 커지고 금리를 낮추면 다시 부동산과 대출을 자극할 수 있다. 2000조원의 부채는 한국경제가 움직일 수 있는 정책 공간을 그만큼 좁히고 있다는 의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출을 조이느냐 푸느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공급에 필요한 돈은 풀되 투기와 과도한 레버리지는 막아야 한다. 취약차주는 정밀하게 가려 보호하는 금융정책이 요구된다. 가계부채 2000조원은 숫자가 아니라 경고다. 금리는 올리면서 빚은 더 늘어나는 정책 조합이 계속된다면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이 떠안는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정책 방향부터 맞춰야 한다. 가계부채를 관리하면서 주택 공급과 실수요자를 보호하는 정교한 균형이 지금 한국경제에 가장 필요한 과제다.
2026-08-20 10: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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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AI의 돈은 어디서 왔나
[경제일보]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지난 12일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부총리에 오른 뒤 경제정책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국유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세제를 개편했으며 금융권의 부실을 털어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밀어 올린 개혁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규모 실업과 지방재정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룽지를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중국 경제의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막대한 돈을 장기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의 자금 동원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개혁과 만나게 된다. 원문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연원을 추적하면서 분세제와 국유기업·금융 개혁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분세제(分税制) 개혁 전까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1993년 중앙정부가 가져가는 재정수입은 전체의 22%에 그쳤다. 지방이 세금의 대부분을 거둬 쓰면서 중앙정부는 전국 단위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일 돈이 부족했다. 주룽지는 중앙세와 지방세를 다시 나누고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75%를 중앙 몫으로 돌렸다. 이듬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은 55.7%로 뛰었다. 중앙정부의 곳간이 커지자 경제를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지역별 이해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산업정책을 펼칠 재정 능력이 생겼다. 중앙의 재정력이 커진 만큼 지방정부가 짊어진 부담도 늘었다. 세입은 중앙으로 넘어갔는데 교육·의료를 비롯해 지방이 맡아야 할 지출은 그대로 남은 분야가 많았다. 세계은행도 1994년 개혁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반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정 불균형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지방정부는 부족한 돈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토지와 부동산 개발에 기대고 각종 예산외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뒤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짓누르는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를 1994년 개혁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방정부의 재정 운용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힘을 얻는 동안 지방에서는 다른 문제가 자라난 셈이다. 주룽지의 개혁은 재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좡다팡샤오(抓大放小)’ 정책 아래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정리하고 대형 국유기업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은 혹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유기업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비효율을 걷어낸 대가를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은행도 바꿨다. 지방정부의 영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자금 배분 권한을 중앙으로 가져오고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세금을 중앙으로 모으고 금융의 돈줄도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특정 반도체 기업이나 AI 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런 개혁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가 만든 것은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분야에 장기간 돈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었다. 그 힘이 20여 년 뒤 반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2014년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반도체 대기금’을 만들었다. 2019년 2기에 이어 2024년에는 등록자본 3440억 위안 규모의 3기 펀드가 출범했다. 중국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했고 공상은행·건설은행·농업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 등 대형 국유은행도 자금을 댔다. 1기 1387억 위안, 2기 2040억 위안에 이어 국가 차원의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서는 이런 힘이 무섭다.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투자를 끊지 않고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10년 이상 돈을 넣을 수 있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부와 국유금융기관이 떠받친다. 지방정부들도 토지와 보조금, 투자기금을 들고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중앙정부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원문에서 CXMT와 YMTC, SMIC 등의 성장 과정에 지방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도 뒤따랐다.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면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지역까지 공장 건설에 나섰고 부실과 중복투자가 생겼다.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는 기술 사기와 파산 사례까지 나왔다. AI에서도 각 지역이 데이터센터와 지능형 컴퓨팅 시설 유치 경쟁에 나서면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손실까지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룽지 시대와 지금의 중국은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값싼 노동력과 빠른 성장, 해외 자본 유입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 규제에도 맞서야 한다. 돈을 모아 한 산업에 집중하는 방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었다. 과거에 효과를 냈던 국가 주도의 투자 방식이 앞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경험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업과 공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규모와 체제는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재정과 금융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원문이 중국 산업정책의 흐름을 한국의 반도체·AI·제조업 전략과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져올 것은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처럼 오랫동안 돈이 들어가는 산업에 자금이 끊기지 않게 할 제도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비슷한 사업에 돈을 붓는 일은 없는지, 기술도 없는 사업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실패가 확인된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지원금은 산업을 키우는 돈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돈으로 바뀐다.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 정부가 국가의 돈을 모으고 움직이는 방식을 바꿨다. 그 힘은 제조업 성장과 반도체 투자에 밑천이 됐지만 지방부채와 부동산 의존, 과잉투자라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국가가 산업을 키운 성공 사례만 보고 투자 규모부터 따라갈 일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에 국가의 미래를 건 한국이라면 중국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도 봐야 한다. 산업정책의 실력은 예산을 크게 잡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투자할 곳과 그만둘 곳을 제대로 가려내는 데서 드러난다.
2026-08-14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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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금리 인상, 물가 잡다 내수를 더 얼려선 안 된다
[경제일보] 한국은행이 추가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는 11일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기준금리를 2.75%로 올린 데 이어 국내 수요 회복에 따른 물가 압력을 경계하고 있다. 물가 안정이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는 점에서 필요한 대응이다. 그러나 금리를 올리는 데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의 대출금리가 상승하고 가계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높아진다. 특히 대출 의존도가 높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취약차주에게 금리 인상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지금 한국경제는 금리를 올리기에도, 그대로 두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반도체 수출과 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성장률 전망은 개선되고 있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내수경기는 여전히 차갑다. 소비 회복은 더디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어려움도 계속되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건설업의 부실 우려도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만 바라보고 금리를 빠르게 올리면 거시경제 지표는 안정될지 몰라도 내수와 취약 부문의 부담은 그만큼 무거워진다. 반대로 가계와 기업 부담만 걱정해 물가 상승 압력을 방치하면 실질소득이 줄고 서민경제가 더 큰 피해를 입는다. 한국은행이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 이유다. 최근의 물가 흐름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국제유가와 환율 같은 외부 요인뿐 아니라 내수 회복과 임금, 서비스 가격 등 국내 요인이 물가를 자극하고 있다면 통화당국으로서는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물가 상승세가 굳어지면 나중에는 더 큰 폭의 금리 인상이 필요해진다. 그렇다고 기준금리를 물가만 잡는 단일 처방전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통화정책은 경제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는 순간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자영업자 대출과 기업 대출에 동시에 충격이 전달된다. 통화정책의 효과가 강력한 만큼 부작용도 폭넓게 살펴야 한다. 가장 우려되는 곳은 가계부채다. 한국의 가계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부채를 안고 있다.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높은 차주에게 추가 금리 인상은 월 원리금 부담 증가로 바로 이어진다. 주거비와 생활물가 부담까지 커진 상황에서 이자 비용이 다시 늘어나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소비 감소는 자영업자의 매출 감소로 연결되고 다시 내수 침체를 키우는 악순환으로 번진다. 취약차주에 대한 정교한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금리 인상 자체를 막기보다 그 과정에서 충격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원리금을 상환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금리 부담을 겪는 차주에 대해서는 채무조정과 장기·고정금리 전환 등 현실적인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자영업자 대책도 단순한 만기 연장에 그쳐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이후 누적된 부채에 경기 부진과 고금리가 겹치면서 경쟁력이 있는 사업자와 사실상 상환 능력을 잃은 사업자를 구분할 필요성이 커졌다. 정상 사업자에게는 금융 지원을 제공하되 회생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는 폐업과 재취업, 채무조정을 연결하는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부동산 PF도 경계해야 한다. 금리가 높아질수록 사업성이 낮은 개발사업의 금융비용은 커지고 부실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부실을 무조건 금융권이 떠안게 하는 것도, 정부가 세금으로 막아주는 것도 답이 아니다. 사업성이 없는 사업장은 신속하게 정리하고 정상 사업장은 자금이 막혀 쓰러지지 않도록 선별 지원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은행과 정부 정책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올리는데 정부가 재정지출 확대와 각종 지원책으로 수요를 크게 자극한다면 정책 효과는 상쇄된다. 한쪽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쪽은 가속페달을 밟는 식이어서는 경제의 불확실성만 커진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집값 불안을 막겠다며 대출을 규제하면서 동시에 특정 계층에 과도한 금융 지원을 제공하면 시장에는 엇갈린 신호가 간다. 실수요자는 보호하되 투기성 레버리지를 억제한다는 명확한 원칙 아래 금융·세제·공급 정책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역할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금리 결정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기준으로 중앙은행이 독립적으로 해야 한다. 정부가 경기나 정치적 이유로 금리 결정에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책 효과와 위험 요인에 대한 정보 공유와 거시정책 조율은 훨씬 정교하게 이뤄져야 한다. 금리 결정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다. 추가 인상이 필요하더라도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야 한다. 물가 기대가 급격하게 높아지지 않는다면 한 차례 금리를 올린 뒤 소비와 고용, 부동산과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금리는 한번 올린 뒤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다는 이유만으로 긴축 여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호황과 자영업자·중소기업이 느끼는 경기는 크게 다르다. 평균적인 성장률만 보고 금리를 결정하면 경제 내부의 양극화를 놓친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이른바 '성장의 역설'이다. 수출과 반도체 투자로 성장률이 높아지면 수요와 물가가 상승해 금리를 올려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그 금리 인상의 비용은 반도체 대기업보다 대출이 많은 가계와 자영업자에게 더 크게 돌아간다. 성장의 과실과 긴축의 비용이 서로 다른 곳에 집중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통화정책으로 경제 전체의 물가를 관리하되 재정과 금융정책은 취약계층에 정밀하게 집중해야 한다. 모든 국민의 이자를 대신 내주는 식의 보편적 지원은 물가를 다시 자극한다. 상환 능력과 소득, 부채 수준에 따라 지원 대상을 정교하게 선별해야 한다. 물가 안정과 내수 회복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가가 불안하면 실질소득이 줄고 소비도 위축된다. 반대로 내수가 무너지면 성장과 고용이 흔들린다. 두 목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경제정책의 실력이다. 한국은행 역시 시장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추가 금리 인상의 조건이 무엇인지, 어떤 물가와 금융 지표를 중점적으로 보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시장이 금리 경로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가계와 기업도 대출과 투자를 계획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는 금리 수준 자체보다 더 큰 불안을 부른다. <논어>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있다. 통화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물가를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물가를 잡겠다는 이유로 경제의 약한 고리까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이라는 원칙을 지키되 금리 인상이 가계와 자영업자, 부동산 PF와 내수에 미칠 충격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도 중앙은행의 긴축 효과를 상쇄하는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면 국민에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취약 부문의 충격을 줄일 안전장치를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물가를 잡는 것도 결국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다. 물가는 안정됐지만 가계와 자영업자가 먼저 무너지는 정책이라면 성공한 통화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2026-08-12 10: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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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300만 시대, 지금 필요한 것은 문을 여는 용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지혜다
대한민국은 이제 '외국인 30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저출산과 초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산업 현장과 농어촌, 돌봄과 서비스업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력은 더 이상 보조 인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정부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이민청 신설과 이민정책 체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 정책은 단순히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경제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국가의 미래 전략이다. 숫자를 늘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 안에서 신뢰를 쌓고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민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산업 현장의 빈자리를 메우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노동력만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다. 각자의 언어와 문화, 종교, 생활방식, 가치관을 함께 가지고 온다. 결국 이민정책은 노동시장 정책인 동시에 문화정책이며 교육정책이고 지역공동체 정책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민 자체가 사회 갈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사회 통합이 갈등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언어 장벽이 방치되고 지역사회와의 교류가 단절되며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부족할 때 오해와 편견은 쉽게 증폭된다. 반대로 체계적인 적응 교육과 공정한 법 집행, 주민 간 지속적인 소통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지역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우리 사회 역시 이제는 '다문화 수용'과 '사회 통합'을 같은 무게로 바라봐야 한다. 외국인 주민에게 한국 사회의 언어와 법질서, 생활문화를 이해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투자다. 동시에 기존 국민들도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서로를 존중하는 시민의식을 키워야 한다. 통합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적응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존의 또 다른 전제는 공정한 법치다. 법은 국적과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불법 체류나 범죄에는 엄정하게 대응하되, 성실하게 일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외국인에게는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원칙 있는 법 집행은 배제가 아니라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늘리는 일이다. 외국인 밀집지역을 방치하기보다 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이용하는 문화센터와 도서관, 체육시설,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학교와 마을 단위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서로 얼굴을 알고 대화를 나누는 공동체에서는 막연한 두려움보다 이해와 신뢰가 자란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현재 여러 부처에 분산된 이민정책을 통합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입국 이전부터 정착, 취업, 자녀교육, 귀화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지역별 산업 수요와 정주 여건을 고려한 맞춤형 이민정책을 추진해 특정 지역에 인구가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도 예방해야 한다. 아울러 이민정책은 정부만의 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 수용 규모와 속도, 필요한 인력의 분야, 사회통합 정책 등에 대해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감 없는 정책은 쉽게 갈등으로 이어지지만, 충분한 설명과 참여를 바탕으로 한 정책은 공동체의 신뢰를 키운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단일문화 사회라는 과거의 인식에 머물 수 없다. 그렇다고 다양성만을 강조하며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다양성과 공동체는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두 축이다. 외국인 300만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새로운 기회다. 중요한 것은 문을 얼마나 크게 여느냐가 아니라, 그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기존 국민과 함께 같은 규칙을 존중하며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다. 성숙한 이민정책은 인구 감소를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가 신뢰 속에서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서 비로소 그 가치를 완성한다.
2026-08-04 17: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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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성장'을 말할 때다
[경제일보]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 중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3일 귀국했다. 집권 1년은 성과를 자축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데 머물 시점이 아니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힐 때다. 지금 정부가 제시해야 할 가장 절박한 국가 의제는 성장이다. 분배와 복지, 공정과 통합도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 없이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 관계를 복원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유럽과 신흥국으로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점은 평가할 만하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소비 회복도 경제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 버팀목이 됐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0%로 전망하면서 반도체 경기와 수출 증가를 긍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최근에는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해졌다는 판단 아래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올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지표만으로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건설투자의 회복은 더디다. 미국의 관세정책과 국제 금융시장 불안, 중국의 산업 추격도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지방경제와 청년 고용으로 온기가 충분히 퍼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남아 있다. 성장률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지속 가능성과 확산성이다. 이번 순방은 이런 한계를 돌파할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글로벌 인공지능 기업과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인공지능(AI) 협력과 투자 확대를 논의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핵심광물과 에너지, 식량, 방산 등 경제안보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특히 한국과 브라질은 남미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와의 무역협정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실무그룹 구성과 핵심광물 협력 확대에 뜻을 모았다. 중남미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먼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리튬과 구리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의 주요 공급처이자 방산·조선·원전·바이오·식품 산업의 잠재시장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공급망의 블록화를 재촉하는 상황에서 자원과 시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이 특정 국가와 특정 시장에 편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면 중남미와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하지만 정상외교에서 체결한 양해각서와 공동성명은 출발점일 뿐이다. 외교적 약속이 기업의 수주와 투자,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순방은 사진과 구호만 남긴다. 정부는 국가별 후속 사업을 정리한 경제외교 이행표를 만들어 국민과 기업에 공개해야 한다. 핵심광물 확보 물량과 장기 구매계약, 현지 광산 공동개발, 방산 수출 금융, 바이오 인허가 협력, 메르코수르 무역협정 협상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금융기관이 따로 움직이는 낡은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미래산업을 선택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AI·반도체·조선·방산·바이오는 한국이 이미 일정한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췄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다. 이들 산업을 단순히 개별 기업의 사업으로 보지 말고 인재와 전력, 용수, 데이터, 금융, 세제, 통상외교가 결합된 국가 프로젝트로 다뤄야 한다. AI 경쟁력은 선언이나 연구개발 예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망과 첨단 그래픽처리장치 확보, 산업 데이터 활용, 전문인력 양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 산업도 공장 건설 지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반도체, 첨단 패키징까지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조선과 방산은 수출금융과 유지·보수 체계를 강화하고, 바이오는 임상과 인허가에 걸리는 시간을 경쟁국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규제혁신도 더 이상 부처별로 몇 건의 규제를 없앴다는 실적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의 존재만이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같은 사안을 놓고 부처마다 해석이 다르고 정권이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기준이 흔들린다면 기업은 공장을 짓거나 신사업에 뛰어들기 어렵다. 신산업 규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처리시한제를 도입하고, 정부가 기한 내 답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제도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정부 지원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세제와 금융, 인프라를 제공한다면 기업은 국내 투자와 고용, 협력업체와의 성과 공유로 응답해야 한다. 해외 투자 확대가 불가피하더라도 연구개발과 핵심 제조기반, 양질의 일자리는 국내에 남기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기술 축적과 청년의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성장정책을 소수 기업을 위한 특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책임도 무겁다. 여야가 모든 경제정책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 동안 세계 각국은 AI와 반도체, 에너지와 방산을 놓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성장전략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회는 첨단산업 전력망과 인재 양성, 기업 투자와 규제혁신에 필요한 법안을 정파적 이해에서 떼어내 처리해야 한다. 정부 역시 야당과 기업, 노동계의 의견을 듣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주역>에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나온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 더 나아가기 어려운 변곡점에 서 있다. 수출 대기업과 수도권, 추격형 제조업에 기댄 성장 모델을 혁신기업과 지역,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선도형 성장 모델로 바꾸지 못하면 저성장은 일상이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1년이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 기반을 세운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남미 순방에서 확보한 외교적 공간을 공급망과 시장, 투자와 일자리로 바꾸는 일이 그 첫 시험대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시간을 끝내고 경제가 국민의 삶을 일으키는 시간을 열어야 한다. 성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지 않다. 정부는 이제 성장의 필요성을 주저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다만 그 성장은 소수의 숫자를 키우는 성장이 아니라 기업의 혁신과 노동의 정당한 보상, 지역의 기회와 국민통합을 함께 이끄는 성장이어야 한다. 취임 1년 이후의 국정은 바로 그 목표에 집중돼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대전환의 골든타임은 이미 시작됐다.
2026-08-03 0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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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뒤에 숨을 수 없는 공직자의 책임
[경제일보] 말은 가볍게 나가지만 그 말이 도착하는 곳은 가볍지 않다. 특히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한 개인의 의견처럼 보이지만 국민은 그것을 정부의 태도, 권력의 감수성, 국가의 품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공직자는 말할 자유를 갖되 그 자유보다 먼저 말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이병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배재고 야구부의 5·18 민주화운동 조롱성 응원 논란과 관련해 이 부위원장은 SNS에 “5·18이 성역이 됐다”, “북한의 모습”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이후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자신의 입장을 이어갔다. 청와대는 해당 발언이 “혐오와 조롱에 대한 정부의 단호한 거부 기조와 달리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엄중 경고했다. 이후 이 부위원장의 사퇴 의사를 수용했다. 이번 사안을 단순히 한 공직자의 돌출 발언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호돼야 하는냐다. 또 하나는 공직자가 사적 공간에서 한 말도 공적 책임의 대상이 되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뿌리지만 공직자의 언행은 그 뿌리를 흔들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넓게 보장돼야 한다. 불편한 말, 거친 비판, 권력에 대한 조롱까지도 민주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다. 국가가 듣기 싫은 말을 막기 시작하면 자유는 순식간에 허가제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문제 제기 자체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고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를 다시 상처 입히며 특정 지역과 공동체를 조롱하는 행위까지 자유의 이름으로 덮을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타인의 존엄과 인권을 훼손하는 것까지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학생들의 미성숙한 응원 구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정에서 어른의 역할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수습을 돕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부총리급으로 불리는 정부 고위직 인사의 말이 논란을 정치적 전선으로 확장시켰다. 배재고 논란의 본질은 청소년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공동체 감수성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냐다. 하지만 이 부위원장의 발언 이후 논란은 징계의 적절성, 표현의 자유, 5·18의 역사적 의미, 정부 인사 검증 문제로 번졌다. 공직자는 시민과 다르다. 시민은 자신의 말에 대해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공직자의 말은 행정과 정책의 신뢰를 함께 움직인다. 규제합리화위원회는 말 그대로 규제를 합리화하고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한 기구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무는 기업과 시장, 국민 사이의 신뢰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런 인사가 사회적 상처가 깊은 역사 문제를 두고 절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했다면 시장 친화적 규제 개혁의 메시지조차 불필요한 정치 논란에 묻힐 수밖에 없다. 경제도 결국 신뢰 위에서 굴러간다. 정책은 숫자로 설계되지만 실행은 신뢰로 움직인다. 정부가 규제를 풀겠다고 해도 국민이 그 정부의 판단을 믿지 못하면 정책은 저항에 부딪힌다. 기업이 투자하려 해도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 비용이 늘어난다. 공직자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정책 추진력을 갉아먹는 비경제적 비용이다. 규제 합리화라는 좋은 명분도 사회 통합의 감수성을 잃으면 설 자리가 좁아진다. 이번 사퇴는 개인의 낙마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부 인사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전문성은 중요하다. 경제를 알고 시장을 알고 규제의 폐해를 아는 인재는 필요하다. 그러나 고위 공직에 필요한 자격은 전문성만이 아니다. 헌법 가치에 대한 이해,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 공적 언어를 다루는 절제도 전문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국민 통합을 내세운 정부라면 더 그렇다. 통합 인사는 진영을 넓히는 일이지만 상처를 헤집는 언행까지 감싸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어 이인편에는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려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는 구절이 있다. 말을 못하라는 뜻이 아니다. 말이 앞서면 책임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경계다.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많이 말하는 것이 소통은 아니다. 빨리 반응하는 것이 용기는 아니다. 국민의 상처 앞에서 한 박자 늦추고 자기 확신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책임이다. 물론 이번 논란을 빌미로 공직자의 모든 사적 발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사회로 가서도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위축과 검열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기준이다. 공직자는 비판할 수 있다. 정책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존엄을 건드리고 사회적 혐오와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언어를 선택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도 숙제를 안게 됐다. 청와대는 초기 경고 이후 사퇴 의사를 수용했지만 앞으로는 사후 수습보다 사전 검증이 중요하다. 과거 발언과 SNS 이력만 기계적으로 훑는 수준을 넘어 고위 공직 후보자가 공적 갈등을 다룰 만한 균형감과 언어 감각을 갖췄는지 살펴야 한다. 전문가는 많지만 공직자는 드물다. 전문성을 공공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공직자다. 이병태 부위원장의 사퇴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직자의 말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직함을 가진 순간 말은 제도와 연결되고 정부와 연결되며 국민의 기억과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공기다. 그러나 공직자의 언어는 그 공기를 탁하게 하지 않을 책임을 함께 진다. 정치는 갈등을 먹고 살 수 있지만 행정은 신뢰를 먹고 산다. 경제정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국민은 오만한 권력을 싫어한다. 공직자의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말은 한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지만 공직자의 말은 한 정부의 수준을 드러낸다. 이번 논란을 통해 정부가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다. 인사는 넓게 하되 공직의 기준은 낮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2026-07-07 15: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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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원구성 답보…법사위 싸움에 민생경제 볼모 잡혔다
[경제일보] 22대 국회 하반기 원구성이 또다시 멈춰 섰다. 국회 의장단은 선출됐지만 정작 국회를 굴러가게 할 상임위원장 배분은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에서 막혀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국정과제와 민생입법을 뒷받침하려면 법사위원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힘은 입법의 최종 관문인 법사위를 야당이 맡아야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다고 맞선다. 여기에 정무위원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 주요 경제 상임위원장 배분까지 얽히면서 협상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또 자리 싸움에 갇혔다. 여당은 책임정치를 말하고, 야당은 견제정치를 말한다. 말만 놓고 보면 둘 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정치권의 권력 계산일 뿐이다. 국민에게 더 절박한 것은 대출금리, 장바구니 물가, 전기요금, 일자리, 집값, 세금이다. 국회가 상임위원장 명패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가계의 이자 부담은 줄지 않고 기업의 투자 결정은 미뤄지며 정부 정책은 국회 문턱에서 멈춰 선다. 법사위는 국회 입법의 수문장이다. 각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쳐 본회의로 간다. 그래서 여야가 법사위원장을 놓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여당은 법사위를 야당에 넘기면 국정과제 입법이 막힐 수 있다고 본다. 야당은 여당이 법사위까지 장악하면 입법 독주를 막을 장치가 사라진다고 우려한다. 양쪽 모두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러나 법사위가 입법 품질을 높이는 관문이 아니라 정쟁의 병목으로 변질된다면 그 논리는 국민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 상임위 공백이다. 정무위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금융시장과 공정거래 질서를 다루는 핵심 상임위다. 재경위는 세제와 재정, 거시경제 정책을 좌우한다. 산자위는 반도체, 에너지, 통상, 산업경쟁력의 최전선이다. 예결위는 정부 예산의 마지막 문턱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구조개혁과 경기 대응이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다. 자본시장 밸류업, 가계부채 관리,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정리, 금융소비자 보호, 소상공인 지원, 반도체·AI·에너지 투자, 세수 관리, 민생 예산 조정이 모두 국회 논의와 맞물려 있다. 국회가 멈추면 경제정책도 멈춘다. 그 피해는 가장 먼저 가계로 간다. 금융 취약계층 지원, 서민금융 보강, 전세사기 피해 지원, 소상공인 채무조정, 통신비·에너지비 부담 완화 같은 민생 법안은 상임위가 열려야 논의된다. 여야가 법사위 명패를 두고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서민은 이자 고지서를 먼저 받는다. 국회의 하루 공전은 정치권에는 협상 전략일지 몰라도 가계에는 생활비 압박이다. 민생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가 정작 민생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기업도 피해자다. 기업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세법이 어떻게 바뀔지, 산업지원 예산이 유지될지, 금융규제가 풀릴지 조여질지, 노동·환경·공정거래 규정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알 수 없으면 투자를 미룬다. 투자가 늦어지면 고용도 늦어진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AI 데이터센터, 에너지 인프라처럼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한 산업은 국회와 정부의 정책 신호에 민감하다. 정치권이 상임위 배분을 놓고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해외 경쟁자는 투자 속도를 높인다. 국회의 정쟁은 기업에는 비용이고 국가경제에는 기회 손실이다. 정부도 발목이 잡힌다. 정부는 예산과 법률이라는 두 바퀴로 움직인다.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도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종이 위 계획에 머문다. 경기 대응책을 내놓아도 입법과 예산 뒷받침이 없으면 효과는 반감된다. 정부가 국회를 우회하려 하면 행정 독주 논란이 생기고 국회가 정부를 무조건 막으면 국정 마비가 된다. 여당은 다수의 힘을 절제해야 하고 야당은 견제의 이름으로 국회 정상화를 볼모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대치는 어느 한쪽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양쪽 모두 국민경제 앞에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논어>에는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 있다. 국회가 지금 밝아야 할 것은 자리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이다. 상임위원장 자리가 권력 배분의 전리품처럼 취급되는 순간 국회는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당 간 점령지가 된다. 법사위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법사위가 국민을 위해 작동하느냐다. 정무위가 어느 당 몫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시장 안정과 소비자 보호, 공정거래 질서가 제대로 논의되느냐다. 정치권은 원구성 협상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이 보기에는 어렵다기보다 염치가 없어 보인다. 국회는 다수결만으로 움직여서도 안 되지만 소수의 발목잡기로 멈춰서도 안 된다. 다수당은 책임 있게 의제를 추진하되 야당의 견제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 야당은 견제하되 국회 공백을 협상 카드로 써서는 안 된다. 상임위원장 배분은 정치적 협상의 대상일 수 있지만 국회 마비는 협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계산해야 할 것은 의석수가 아니라 손실이다. 국회가 하루 늦어질 때 민생 법안은 얼마나 밀리는가. 금융시장 불확실성은 얼마나 커지는가. 기업 투자 결정은 얼마나 지연되는가. 정부 예산 심사는 얼마나 압박받는가. 이런 비용표를 국민 앞에 내놓는다면 여야가 지금처럼 쉽게 강대강 대치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국민은 법사위원장 이름보다 자신의 대출금리를 더 걱정한다. 정무위원장 배분보다 금융사고와 불완전판매 방지를 더 원한다. 예결위원장 몫보다 내년 예산이 어디에 쓰일지를 더 궁금해한다. 기업은 어느 당이 상임위를 차지했는지보다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원한다. 정부는 정쟁의 승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국정 동력을 필요로 한다. 국회는 싸우라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싸움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문을 열고 회의를 열고 법안을 올리고 예산을 따져야 한다. 그다음에 치열하게 다투면 된다. 문도 열지 않은 채 열쇠를 누가 쥘지만 다투는 정치는 국민에게 설명할 수 없다. 국회를 열지 않는 정치는 견제가 아니라 직무유기다. 22대 국회 하반기 원구성 협상은 단순한 자리 싸움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정치 리스크를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다. 여야가 법사위와 경제 상임위를 놓고 끝까지 힘겨루기를 벌인다면 그 비용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이 낸다. 가계는 이자로 내고 기업은 투자 지연으로 내며 정부는 정책 실기라는 이름으로 낸다. 경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국회가 멈춰도 시장은 움직이고 국회가 싸워도 국민의 청구서는 날아온다. 여야가 정말 민생을 말하려면 원구성부터 끝내야 한다. 권한을 나누는 협상보다 책임을 나누는 합의가 먼저다. 국회의 주인은 정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 상식을 잊는 순간, 원구성 싸움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위험이 된다.
2026-06-29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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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국정 2년차 수석급 참모진 개편…지지율 경고등에 칼 빼들어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 2년 차를 맞아 청와대 수석급 참모진을 대폭 교체하며 국정 쇄신과 개혁 드라이브 강화에 나섰다. 최근 지방선거 결과와 지지율 하락세를 계기로 국정 운영 기조를 재정비하는 동시에 인공지능(AI)·에너지 전환, 노동 개혁, 공급망 대응 등 핵심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홍보소통수석, 민정수석, 사회수석과 국가안보실 1·3차장을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향후 임명될 AI미래기획수석까지 포함하면 전체 수석급 참모 11명 가운데 6명이 바뀌는 중폭 이상의 개편이다. 대통령실은 이번 인사에 대해 국정 2년 차를 맞아 소통과 개혁 동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브리핑에서 "좀 더 개혁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홍보·민정 라인 교체다. 홍보소통수석에는 성기홍 전 연합뉴스 사장이, 민정수석에는 한찬식 변호사가 각각 임명됐다. 최근 지방선거 이후 나타난 민심 변화와 지지율 하락 흐름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국민 체감형 정책 성과를 높이겠다는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 브리핑에서 "대통령이, 당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라며 "냉정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책 추진 체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한찬식 신임 민정수석은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 설치와 형사소송법 개정 등 검찰개혁 후속 과제를 맡게 된다. 강건작 국가안보실 1차장은 군 구조개혁과 자주국방 역량 강화 작업을 담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 정책 라인도 한층 강화됐다. 문진영 전 사회수석 후임으로 약사이자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경자 수석이 임명됐다. 앞서 민주노총 출신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한국노총 출신 이옥남 노동비서관이 합류한 데 이어 노동계 출신 인사들이 정책 전면에 배치되는 모습이다. 경제·산업 정책 측면에서는 공급망과 경제안보 대응 역량 강화가 주목된다. 송기호 경제안보비서관을 국가안보실 3차장으로 승진 발탁한 것은 미국의 관세 정책과 중동 리스크 등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외교·안보와 경제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환경 속에서 경제안보 컨트롤타워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반면 경제성장수석과 재정기획보좌관 등 경제 라인은 유임됐다. 지난 1년간 추진해 온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AI와 에너지 전환, 자본시장 활성화, 부동산 안정화, 국토 균형발전 등 핵심 과제의 성과 창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만 하정우 전 수석의 출마로 공석이 된 AI미래기획수석 인선은 이번 발표에서 제외됐다. AI 국가전략을 총괄할 적임자 물색에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2026-06-21 14: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