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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은 늘고 고용효과는 줄었다…성장의 성적표를 바꿀 때
[경제일보] 반도체가 날아오르자 수출이 늘고 기업의 이익도 커졌다. 수출이 한국 경제의 생산과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몫 역시 확대됐다. 하지만 일자리의 움직임은 달랐다. 수출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성과는 커졌지만, 같은 금액의 수출이 유발하는 고용은 오히려 줄었다. 한국은행이 21일 발표한 2024년 산업연관표가 보여준 한국 경제의 단면이다. 수출 호황이 곧바로 고용과 가계소득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익숙한 성장 공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숫자는 선명하다. 2024년 국내 생산 가운데 수출이 유발한 비중은 전년 32.7%에서 35.1%로, 부가가치 비중은 25.4%에서 28.2%로 높아졌다. 전 산업의 부가가치율도 41.2%에서 42.0%로 상승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회복과 수출 공산품의 영업잉여 증가, 수입 원자재 가격 하락 등이 영향을 미쳤다. 반면 수출 10억원당 취업유발계수는 5.4명에서 5.0명으로 떨어졌다. 전 산업 평균도 8.2명에서 7.8명으로 낮아졌다. 수출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는데, 단위 수요가 만들어내는 일자리의 수는 감소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경기의 좋고 나쁨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산업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자본집약 산업이다. 최첨단 공장 하나를 짓는 데 수십조원이 들어간다. 생산량과 수익성을 좌우하는 것은 대규모 설비와 미세공정, 자동화 기술과 수율이다. 숙련된 엔지니어와 연구개발 인력의 중요성은 크지만, 생산이 늘어난다고 고용이 같은 비율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생산성 향상의 본질이다. 이를 거슬러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자동화를 늦추거나 불필요한 인력을 유지한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산업이 성장을 주도할수록 기업의 실적과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 사이에 간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수출이 급증해도 신규 채용은 그만큼 늘지 않을 수 있다. 늘어난 이익이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임금과 배당으로 배분되더라도 그 혜택이 모든 산업과 지역에 고르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공장의 생산성 향상이 주변 협력업체의 매출과 고용, 가계의 구매력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얼마나 튼튼한지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여기서 통계를 정확히 읽을 필요가 있다. 2024년 전체 취업자 수는 2857만6000명으로 전년보다 15만9000명 증가했다. 그러나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환산한 전업환산 취업자는 2596만명으로 2만8000명 감소했다. 한국은행은 건설업과 농림수산업의 고용 감소, 근로시간이 짧은 노인 일자리 증가 등을 배경으로 설명했다. 이를 반도체 호황 때문에 전체 일자리가 줄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짧은 근로시간이 반드시 나쁜 일자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상용직 비중은 61.0%에서 61.3%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취업자 수와 실제 노동 투입량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고용 인원만으로 노동시장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수출의 고용 기여도 역시 마찬가지다. 2024년 전체 취업자 가운데 수출이 유발한 비중은 20.7%에서 22.2%로 상승했다. 수출이 일자리를 만드는 역할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수출 규모가 커지면서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몫은 확대됐지만, 수출 10억원당 취업유발 인원은 감소했다. 수출의 양적 성장과 고용 창출의 효율을 구분해야 산업구조의 변화가 제대로 보인다. 이제 산업의 성과를 설명하는 숫자도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첨단산업의 경쟁력은 수출액과 설비투자 규모, 세계시장 점유율을 중심으로 평가돼 왔다. 반도체 수출이 얼마나 늘었는지, 어느 기업이 수십조원을 투자하는지, 글로벌 시장에서 몇 위를 차지했는지가 산업정책의 성적표를 채웠다. 모두 중요한 지표다. 수출과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고용과 소득을 늘릴 기반도 약해진다. 다만 그것만으로 한 산업의 성과가 국민경제에 얼마나 넓고 깊게 전달됐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령 수출액이 크게 늘었더라도 핵심 소재와 장비를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왔다면 국내에 남는 부가가치는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국내 설계와 소재·부품·장비, 소프트웨어 기업이 함께 성장했다면 생산과 고용의 파급효과는 더 넓게 나타날 여지가 있다. 반도체 공장 하나의 경제적 의미도 공장 안에서만 계산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 공장이 국내 협력업체의 기술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연구개발과 전문서비스 분야에 어떤 수요를 만들었는지, 생산성이 높아진 성과가 임금으로 얼마나 연결됐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AI와 자동화의 확산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AI는 일부 업무를 대체하는 동시에 새로운 직무와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지는 산업의 특성과 기술 도입 방식, 노동자의 직무전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자동화 투자가 늘어난다는 이유만으로 고용이 감소한다고 단정할 수도, 첨단산업이 성장하니 양질의 일자리도 저절로 늘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고용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생산성 향상의 성과가 어디로 흘러가느냐다. 노동자 한 사람이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성과가 임금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신규 채용이 크게 늘지 않더라도 가계소득은 개선될 수 있다. 반대로 기업의 부가가치는 커지는데 노동소득이 정체된다면 수출 호황이 소비로 이어지는 힘은 약해질 수 있다. 물론 이번 산업연관표만으로 임금 분배나 가계의 체감경기가 악화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산업별 임금과 노동소득분배율, 신규 채용과 고용 유지, 가계 소비를 함께 살펴야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출액 하나로 성장의 성과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논어’ 학이편에서 유자(有子)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 근본이 서야 길이 열린다)’고 했다. 경제성장의 근본은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성에 있다. 다만 그 성과가 기업의 장부에서 끝나지 않고 국민의 소득과 생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까지 살펴야 성장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반도체의 성공을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첨단산업은 한국 경제가 가진 소중한 자산이다. 그 산업의 생산성을 낮춰 일자리를 억지로 늘리는 방식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소식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국민의 체감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은 놓쳐서는 안 된다. 기업의 실적이 좋아졌다는 사실과 국민의 삶이 나아졌다는 판단 사이에는 확인해야 할 과정이 남아 있다. 한국은행의 산업연관표는 그 과정을 들여다볼 출발점이다. 수출이 얼마나 늘었는지뿐 아니라 국내에 얼마의 부가가치를 남겼고, 어떤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생산성 향상이 임금과 소득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함께 살펴볼 때 성장의 성과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반도체가 높이 날아오른 것은 분명하다. 이제 살펴야 할 것은 그 성장의 힘이 한국 경제의 다른 산업과 노동자, 가계에 얼마나 넓게 닿고 있는가다. 수출은 성장의 출발점이다. 그 성과가 국민의 소득과 일자리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보여줄 때 비로소 성장의 성적표가 완성된다.
2026-09-22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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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GA 재본격화… 미국 조선 재건 누가 이끄나
[사진=ChatGPT] [경제일보] 미국 조선업 재건을 둘러싼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의 경쟁이 다시 본격화하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과 통상 불확실성으로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가 미국 정부의 정보요청(RFI)을 계기로 실무 검토 단계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RFI로 본격화된 한미 조선 협력 11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국방부와 해군은 국내 조선사들에 전투함과 급유함 건조·설계 역량을 묻는 RFI를 보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전투함 관련 역량을 미 국방부에 전달했고, 미 해군의 중형급 급유함 RFI에는 삼성중공업까지 포함해 국내 조선 3사가 회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RFI는 곧바로 발주를 뜻하지 않는다. 다만 미국 정부가 한국 조선사의 건조 실적, 설계 인력, 연간 생산능력, 현지 협력 구도 등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이재명 대통령에게 “미국 군함 10척을 빠르게 건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발언과 맞물리면서 마스가가 구호를 넘어 실제 사업 검토 단계로 진입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마스가는 미국 조선업 재건을 목표로 한 한미 제조업·안보 협력 프로젝트다. 미국 백악관은 지난해 4월 ‘미국 해양 지배력 회복’ 행정명령을 통해 조선업과 해양 산업, 관련 인력 기반을 되살리는 것이 국가안보와 경제 번영을 위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한국 조선업에 손을 내미는 배경에는 중국과의 조선 역량 격차가 있다. 미국은 해군력과 상선 건조 능력을 동시에 끌어올려야 하지만, 자체 조선소만으로는 단기간에 생산능력을 회복하기 어렵다. 한국 조선사들이 보유한 설계·건조·공정관리 역량이 미국 조선 재건의 현실적인 보완재로 떠오른 이유다. 조선 3사 전략 경쟁 본격화 가장 앞서 있는 곳은 한화오션이다. 한화오션은 한화시스템과 함께 미국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며 현지 거점을 확보했다. 한화는 2024년 필리조선소 인수에 1억 달러를 투자했고, 이후 시설과 인력, 생산능력 개선을 위한 추가 투자도 진행해왔다. 한화오션의 강점은 ‘미국 안에 있는 조선소’와 ‘한국의 함정 건조 역량’을 함께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화는 미 해군 함정 발주와 관련한 법·제도 개정 흐름을 주시하면서, VARD, 한화필리조선소, 한화디펜스USA와의 협업을 기반으로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개념설계 사업에 참여하는 등 주요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뛰어들고 있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한국의 건조 역량과 미국 현지 생산 거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비용·납기·정책 리스크 측면에서 경쟁력 있는 사업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미국 해양방산 시장에 선제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다만 현재까지 한화오션의 미 함정 MRO는 군수지원함을 중심으로 진행돼왔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현재는 관련 규제 내에서 수행이 가능한 MRO 사업을 다각도로 검토 및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한 만큼 향후 법·제도 변화에 따라 MRO와 신조 사업의 확장 가능성을 함께 열어두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방산 조선사와의 협력망을 넓히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2024년 미국 해군보급체계사령부와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해 향후 5년간 미 해군과 해상수송사령부 소속 함정 MRO 사업 입찰 자격을 확보했고, 이후 미 7함대 소속 4만1000톤급 화물보급함 ‘앨런 셰퍼드’함과 ‘세사르 차베즈’함 정비 사업을 잇달아 수주했다. 지난해 4월에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선박 생산성 향상 및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양사는 함정 건조 비용과 납기 개선, 조선소 디지털화, 공정 자동화, 로봇·AI 도입, 생산인력 교육, 기자재 공급망 참여 등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GE에어로스페이스, L3해리스, 안두릴, ABS 등과의 협력까지 감안하면 HD현대중공업은 미국 현지 조선소를 직접 보유한 한화오션과 달리 미국 방산·기술·선급·기자재 기업을 촘촘히 묶는 네트워크형 전략에 가깝다. 삼성중공업은 급유함과 군수지원함 분야에서 미국 시장 접점을 넓히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제너럴다이내믹스 산하 미국 조선사 나스코와 차세대 군수지원함 기본설계 사업에 참여했고, 미국 비거 마린 그룹과는 미 해군 MRO 사업 협력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LNG선과 해양플랜트, 자동화 조선소 기술에서 강점을 가진 만큼 전투함보다 지원함과 상선 성격의 군수 분야에서 역할을 찾는 구도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삼성중공업은 전투함 사업을 해온 회사는 아니기 때문에 전투함보다는 급유함이나 군수지원함 쪽에서 역할을 찾고 있다”며 “미국에서는 군수지원함이 전투함과 달리 상선 성격에 가까운 영역으로 분류돼 삼성중공업도 접근 가능한 분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조선사들이 보유한 자동화·로봇 기술도 미국 조선업의 인력 부족 문제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들 세 기업의 전략은 다르다. 한화오션은 필리조선소와 MRO 경험을 앞세운 ‘현지 거점형’이다. HD현대중공업은 미 해군 MRO 실적과 헌팅턴 잉걸스 협력을 기반으로 한 ‘방산 네트워크형’이다. 삼성중공업은 전투함보다 급유함·군수지원함에 초점을 맞춘 ‘비전투 지원함형’ 전략에 가깝다. 결국 관건은 누가 미국의 제도 장벽을 먼저 넘고, 한국식 생산 시스템을 미국 조선 재건 과정에 실제로 이식하느냐다. 마스가가 여는 조선 생태계 확장 수혜는 조선소에만 머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마스가가 본격화되면 엔진, 전장, 통신체계, 친환경 기자재, 선박관리, MRO 서비스 등으로 파급 효과가 확산될 수 있다. 한화엔진, 한화시스템, HD현대마린솔루션, HD현대마린엔진 등 한화·HD현대 계열 밸류체인뿐 아니라 국내 기자재업체에도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다만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미국 함정 건조는 법·제도와 보안, 원산지, 노조, 인력 양성, 현지 조달망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RFI가 실제 발주로 이어지려면 미국 내 건조 규정 완화, 현지 조선소 투자, 한국 인력·기술 투입 방식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 단순히 “한국이 빨리 지을 수 있다”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결국 마스가의 본질은 조선소 투자 경쟁이 아니다. 미국 안보 공급망 재편 속에 한국 조선 생태계가 얼마나 깊이 편입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한화오션은 미국 안에서 생산 거점을 확보했고,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와 협력망을 구축했으며, 삼성중공업은 지원함·MRO 시장에서 접점을 넓히고 있다. 미국 조선 재건의 첫 실전 무대에서 조선 3사의 승부가 시작됐다.
2026-07-11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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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주체를 다시 짜라 ①기업·재벌편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시대는 한국경제에 기술 도입을 넘어선 전방위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은 AI를 비용 절감 수단이 아니라 조직과 사업모델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소비자는 편리함에 머무르지 않고 데이터 주권과 알고리즘 감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정부는 규제 완화와 산업 지원을 넘어 인프라, 인재, 안전망, 신뢰 체계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이에 본지는 이번 기획을 통해 AI시대 한국경제 3주체의 역할 변화와 개혁 과제를 짚고, 한국경제가 관성의 경제에서 학습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한국 대기업들이 인공지능(AI) 전환의 한복판에 섰다. 반도체 기업은 AI 서버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패키징 경쟁에 뛰어들고 있고, 플랫폼 기업은 초거대 AI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강화하고 있다. 자동차·조선·철강·금융권도 생산공정 자동화, 로봇, AI 상담, 리스크 관리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투자 시계도 빨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을 축으로 대규모 AI·반도체 투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약 800조원 규모의 신규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에 참여하고, 충청권에는 81조원 규모의 반도체 패키징 클러스터가 조성된다. 또 SK·GS·네이버 등이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참여하고 장기적으로 관련 투자가 1000조원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구상도 내놨다. 실제 정부는 지난달 29일 SK·GS·네이버와 협력해 1단계로 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SK가 5GW, GS가 2.4GW, 네이버가 1GW 규모로 참여하며 관련 투자 규모는 550조원으로 제시됐다. 투자 규모만 놓고 보면 한국 기업들은 다시 한 번 ‘큰 판’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AI 투자가 곧 AI 경쟁력은 아니다”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기업 AI 전략 담당자는 “지금은 어느 그룹이나 AI 조직과 태스크포스는 갖추고 있지만 실제 업무에 적용하려면 데이터 접근권, 보안, 법무, 감사, 성과평가가 모두 걸린다”며 “AI 도입보다 어려운 것은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무는 일”이라고 말했다. HBM이 바꾼 증시 서열…AI가 기업가치 기준 흔든다 AI 전환은 이미 국내 증시의 기업가치 평가 기준도 바꾸고 있다. 대표 사례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수요 확대와 HBM 시장 선점 효과에 힘입어 지난달 22일 코스피 장중 시가총액에서 삼성전자를 앞질렀다. 이는 단순한 주가 순위 변화가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범용 메모리 중심에서 AI용 고부가 메모리와 패키징, 고객 맞춤형 공급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과거에는 생산능력과 원가 경쟁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AI 반도체 기업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 차세대 HBM을 얼마나 빨리 개발·공급할 수 있는지가 기업가치를 좌우한다. 다만 AI 반도체 호황이 항상 주가 상승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8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미국 반도체주 약세와 AI 붐 지속성에 대한 우려 속에 장중 동반 약세를 보였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AI 반도체가 한국 증시의 핵심 테마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시장은 이제 단순한 실적 증가보다 지속 가능한 가격 결정력과 고객 기반을 본다”며 “AI 사이클이 길어질수록 기업 간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열사 울타리에 갇힌 데이터, AI 경쟁력의 병목 AI 경쟁력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같은 하드웨어 투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업 내부의 데이터 활용 구조가 핵심 변수다. 한국 대기업은 제조, 금융, 유통, 통신, 물류 등 방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계열사별·부서별로 데이터가 분산돼 있고, 보안과 개인정보, 감사 리스크 때문에 실제 활용은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한 제조업계 관계자는 “공장에는 설비 데이터가 쌓이고, 영업부서에는 고객 데이터가 쌓이며, 구매부서에는 공급망 데이터가 쌓이지만 이를 하나의 모델로 연결하는 일은 쉽지 않다”며 “AI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기술 문제가 아니라 내부 승인 절차에서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재벌 구조의 강점이던 수직계열화도 AI시대에는 양면성을 갖는다. 위기 때 빠르게 자원을 동원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데이터와 인재가 계열사 내부에 갇히면 개방형 혁신에는 불리할 수 있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대기업들이 AI 스타트업과 협업을 말하지만 실제 계약 단계에서는 지식재산권, 데이터 소유권, 보안 조항이 지나치게 무겁다”며 “함께 실험하고 성과를 나누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AI 도입보다 어려운 건 일하는 방식의 개혁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사내 업무에 도입하면서 보고서 초안 작성, 회의록 정리, 시장조사, 고객 응대, 코드 작성, 번역, 계약서 검토 등에서 AI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AI를 업무 도구로 배포하는 것만으로 생산성 향상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지난 5월 arXiv에 공개된 조원익·김성훈·김근혜의 포지션 페이퍼 ‘Adopting AI in Practice Does Not Guarantee the Productivity Boost’는 AI 도입이 곧바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논문은 인력 구성, 구성원의 기초 역량, 학습곡선, 인센티브 구조, 목표 설정의 유연성 등이 AI 생산성 효과를 좌우한다고 분석했다. 한 경영학 교수는 “AI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라며 “기업이 AI를 제대로 쓰려면 어떤 업무를 AI에 맡기고 어떤 판단은 사람이 책임질지 조직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간관리자의 역할 변화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중간관리자는 자료를 취합하고 보고서를 다듬고 리스크를 걸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정보 수집과 문서 작성의 상당 부분을 보조하면서 중간관리자의 경쟁력은 보고서 작성 능력이 아니라 문제 정의, 결과 검증, 부서 간 조정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AI 전환은 청년 채용과 인재 육성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반복적 사무 업무와 초급 분석 업무가 AI로 대체되면 신입사원이 조직에서 배우는 첫 단계가 줄어들 수 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AI 도입 이후 신입사원에게 맡길 수 있는 단순 업무는 줄어드는 반면, 처음부터 문제 해결형 역량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며 “채용 규모를 줄이는 유혹이 생기지만 장기적으로는 인재 풀이 약해질 수 있어 재교육 체계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AI 거버넌스도 기업 경쟁력 됐다 AI 활용이 확대될수록 기업의 책임도 커진다. 한국은 AI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있으며, 고영향 AI에 대한 인간 감독과 투명성 확보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금융, 보험, 의료, 채용, 교육처럼 개인의 권리와 직접 연결되는 분야에서는 AI가 어떤 데이터를 사용했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으며, 오류가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질지가 중요해진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AI 상담이나 대출심사는 소비자 편의성을 높일 수 있지만 설명 책임이 약하면 민원과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AI를 많이 쓰는 회사보다 AI 판단을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하는지가 앞으로 더 중요한 평판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AI 활용이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지려면 조직 운영 방식의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대기업의 성장 방식은 계열사 내부에서 원료 조달, 부품 생산, 완제품 제조, 금융 지원을 묶는 수직계열화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AI 분야에서는 데이터, 클라우드,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인재가 기업 안팎에 분산돼 있어 외부 스타트업과 대학, 협력사와의 공동 개발과 실험이 중요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경쟁력이 투자 규모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반도체 설비 확충과 데이터센터 구축은 AI 전환의 기반에 해당하지만 이후에는 내부 인재 재교육, 중간관리자 역할 재정립, AI 활용 책임 체계, 외부 생태계와의 협업 구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 대기업의 AI 경쟁력은 대규모 투자 이후의 실행 구조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며 “총수의 투자 결정을 현장의 실험과 조직 학습으로 연결하고, 계열사 중심의 폐쇄형 운영을 개방형 협력 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향후 AI 전환의 핵심 변수로 꼽힌다”고 말했다.
2026-07-09 16: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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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자문기구 "AI 전환, 성장만으론 부족…혁신·포용 국가전략 필요"
[경제일보]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와 국민경제자문회의가 인공지능(AI) 전환 시대의 국가 전략 마련을 주문했다. AI가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고용과 교육, 지역 격차를 동시에 흔드는 만큼 혁신과 포용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와 국민경제자문회의는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AX 도전과 대응: 혁신·성장·포용을 위한 국가전략’을 주제로 공동 심포지엄을 열었다. 양 자문회의는 AI 전환 경쟁력 확보와 포용적 전환을 위한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이경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개회사에서 “AI가 기업과 산업, 교육과 고용을 비롯한 사회 전반과 일상에 깊이 결합하고 있다”며 “기회와 격차 문제를 함께 살피고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 전략을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 확산을 새로운 기회로 봤다. 그는 제조 경쟁력과 데이터, 디바이스 역량을 바탕으로 AI 풀스택 전략을 구축하고 국가 차원의 협력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모델만이 아니라 반도체와 클라우드, 네트워크, 제조 현장 적용까지 연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정부와 산업계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축사를 통해 AI 전환기 미래 전략 확보를 위해 정부와 산업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첫 세션에서는 제조 피지컬 AI 도입 전략과 AX 산업 생태계 강화가 논의됐다. 장영재 KAIST 교수는 AI가 정보기술 시스템 중심을 넘어 센서와 통신장비, 데이터 인프라가 함께 발전하는 생태계형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제조 분야를 기반으로 한 AX 혁신과 ‘다크 팩토리’ 턴키 수출 전략도 제안했다. 피지컬 AI는 AI가 현실 세계의 설비와 로봇, 제조 공정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움직이는 기술 흐름이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제조업과 결합할 경우 생산성 향상과 공정 자동화, 스마트팩토리 수출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핵심 소프트웨어와 운영체계를 해외 기술에 의존하면 제조 경쟁력의 부가가치가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권용현 LG유플러스 부사장은 소버린 AI 생태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내 자체 스택이 갖춰지지 않으면 매출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유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통신망과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디바이스, AI 모델을 국내 산업 생태계 안에서 연결해야 실질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육과 노동시장 재설계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류근관 서울대 명예교수는 AI 확산이 노동수요를 숙련 수준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재편하는 ‘스킬 축 J커브’ 구조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선택과 집중형 교육체계 구축을 핵심 전략으로 제시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는 AI 교육 확대와 격차 해소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애주기형 맞춤형 AI 교육체계를 구축해 학생과 재직자, 고령층이 각자의 수준에 맞게 AI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AI 전환이 특정 계층의 기회로만 작동하지 않도록 교육 접근성을 넓혀야 한다는 취지다. 이번 심포지엄은 AI 정책의 초점이 기술 개발에서 산업 구조와 노동, 교육, 포용 전략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가 확산되면 기업의 업무 방식과 제조 현장, 고용 구조는 빠르게 바뀔 수밖에 없다. 국가 전략도 모델 개발이나 규제 완화에 머물 수 없다. 양 자문회의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제기된 정책 제안과 현장 의견을 향후 대통령 자문과 정책 제언 과정에 반영하고 후속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AI 전환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산업 의제가 아니다. 한국이 제조와 데이터, 인재 기반을 실제 경쟁력으로 연결하려면 기술 투자와 교육 개편, 산업 생태계 전략을 같은 속도로 추진해야 한다.
2026-06-25 15: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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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가 만든 성장, 나라 경제의 착시가 되어선 안 된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의미 있는 성장 지표를 받아 들었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1.7%, 전년 동기 대비 3.6% 성장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수출 증가와 설비투자 확대가 성장을 이끌었다. 장기간 이어진 경기 둔화 속에서 반가운 소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는 숫자 하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장률은 높아졌지만 시장의 체감 온도는 여전히 낮다. 대기업 실적은 개선됐지만 중소 제조업 현장은 여전히 어렵다. 수출은 늘었지만 청년 취업난은 계속되고 지방 산업단지는 일감 부족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간극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번 성장률은 경제 회복이 아니라 ‘통계의 위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성장의 핵심 동력은 단연 반도체다. 글로벌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함께 메모리 및 첨단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고 한국 기업들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올해 1분기 성장률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반도체의 호조가 곧 한국 제조업 전체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조업 생산은 증가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상당수 업종은 사실상 정체 상태에 가깝다. 거대한 엔진 하나가 경제 전체를 끌어올린 셈이다. 엔진이 강한 것은 다행이지만 차체 곳곳이 흔들리는데 속도계 숫자만 보고 안심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제조업 생태계의 힘으로 성장해 왔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기계, 전자, 소재·부품 산업이 서로 맞물려 국가 경쟁력을 만들어냈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중소기업과 협력업체, 지역 산업단지, 숙련 기술자들이 존재했다. 대기업 혼자 만든 성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첨단 반도체와 AI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전통 제조업과 중소기업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지만 협력업체들은 원가 상승과 인건비, 고금리 부담에 시달린다. 수도권 첨단 클러스터에는 자금과 인재가 몰리지만 지방 산업단지는 노후 설비와 인력 유출로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경제 회복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도체는 분명 한국의 핵심 전략산업이다. 정부가 전력과 용수, 세제, 연구개발(R&D),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기업만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대만, 유럽 모두 국가 차원의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지원이 산업정책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고부가가치 산업이지만 고용 창출 효과는 제한적이다. 자동화 수준이 높고 생산 효율 중심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출액은 커도 그 효과가 모든 지역과 가계로 곧장 확산되지는 않는다. 반도체 호황만으로 민생 회복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 위험한 것은 착시다. 성장률이 좋다는 이유로 경제 전반이 안정됐다고 판단하는 순간 정책은 느슨해질 수 있다. 반도체가 버텨주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산업의 침체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수출 지표 개선에 가려 내수 부진과 자영업 위기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위기는 눈에 보이지만 착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경제 변동성도 커진다. AI 투자 확대가 이어지면 성장세는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수요 둔화나 공급 과잉, 미·중 기술 갈등 심화, 대만해협과 중동 정세 불안 같은 변수들이 현실화되면 충격은 곧바로 한국 경제로 전이된다. 특정 산업 하나가 경제 전체의 방파제이자 동시에 급소가 되는 구조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지금 한국 경제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반도체의 성공을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AI 시대의 수혜가 메모리 반도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데이터센터, 전력기기, 냉각장비, 로봇, 제조 자동화, 통신장비, 보안, 소프트웨어, 소재·부품 산업까지 연결돼야 한다. 반도체가 앞에서 끌고 다른 산업이 뒤따라야 진짜 산업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중소·중견 제조업의 생산성 강화도 시급하다. 한국 산업의 가장 약한 고리는 대기업이 아니라 산업의 ‘허리’다. 스마트공장과 공정 자동화, 에너지 효율 개선, 기술 인력 재교육, 수출 판로 확대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해야 한다. 단순한 보조금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 금융과 기술, 인력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지역 산업 생태계도 살펴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하나가 전국 산업의 미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조선과 자동차 부품, 철강, 화학, 기계, 뿌리산업 등 지역마다 필요한 전략은 다르다. 지방 산업단지가 쇠퇴하는데 수도권 첨단산업만 성장한다면 국가 경제의 균형은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인력 문제 역시 심각하다. 반도체 인력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용접공과 정밀가공 기술자, 배터리 공정 엔지니어, AI 기반 제조 소프트웨어 인력까지 산업 전반에서 숙련 인력이 부족하다. 대학 정원 확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마이스터고와 전문대, 지역대학, 기업 훈련체계가 산업 현장과 직접 연결돼야 한다. 내수 회복도 중요하다. 수출이 경제의 엔진이라면 내수는 국민 생활의 체감 온도다. 성장률이 높아도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 국민은 경기 회복을 실감하지 못한다. 물가와 금리, 주거비, 가계부채, 자영업 침체가 여전히 소비를 짓누르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좋아도 동네 상권이 무너지면 경제 회복은 공허한 말이 된다. 정부의 메시지도 정직해야 한다. 좋은 지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되 한계 역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반도체는 강하지만 제조업 전반은 아직 불안하다. 수출은 회복되고 있지만 내수는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다. 대기업은 선전하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은 여전히 어렵다. 이 현실을 숨기지 않는 것이 정책 신뢰의 출발점이다. 정치권 역시 경제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여당은 성장률만 내세워 자화자찬하고 야당은 체감 경기만 부각해 경제 전체를 부정한다면 둘 다 무책임하다. 산업 현장은 정치 구호보다 전기료와 금리, 인력난, 해외 주문 상황을 더 절박하게 체감하고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중요한 기회를 맞고 있다. 반도체 호황은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다. 단기적인 성과 홍보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산업 구조를 재정비하고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데 활용할 것인가. 한 산업의 호황을 국가 경제 전체의 건강으로 착각하면 다음 위기는 더 깊어진다. 반대로 지금 제조업의 허리를 보강하고 산업 생태계를 넓히며 내수와 고용의 약한 고리를 보완한다면 반도체 호황은 진짜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경제의 기본 원리는 단순하다. 한 산업만 강한 경제보다 여러 산업이 함께 버티는 경제가 더 강하다. 대기업 몇 곳만 좋은 경제보다 중소기업과 지역 산업이 함께 살아나는 경제가 오래간다. 성장률 숫자보다 국민이 일자리와 소득으로 체감하는 경제가 진짜 건강한 경제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하나의 산업에 국가 경제의 미래를 모두 걸 수는 없다. 산업의 뿌리가 깊고 생태계가 넓어야 경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도체 호황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적 격차와 취약성을 함께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이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은 분명 의미 있는 성적표다. 그러나 한 과목 점수가 높다고 학생 전체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도체가 만든 성장의 빛이 강할수록 그 그늘 또한 더 냉정하게 봐야 한다. 지금 그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호황 속에서 다음 위기의 씨앗을 키우게 될 것이다.
2026-05-06 0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