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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68.7% 증가, 숫자가 너무 좋아서 더 걱정되는 이유
[경제일보]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는 눈부시다. 8월 수출이 982억5000만달러다. 1년 전보다 68.7% 늘었다. 역대 월간 수출 3위다. 6월과 7월에 이어 석 달 연속 900억달러를 넘겼다. 무역수지는 347억5000만달러 흑자다. 더 놀라운 것은 반도체다. 466억5000만달러를 팔았다. 1년 전보다 209% 늘었다. 역대 최대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거대한 수출 기계로 만들고 있다. 컴퓨터 수출도 419.5% 뛰었다. 정부가 경기를 낙관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제조업의 생산과 설비투자는 살아 있고 수출은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숫자가 국민의 장바구니에도 반영되고 있는지 잘 봐야한다. 최근 발표된 7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답은 간단하지 않다. 소매판매는 전월보다 2.4% 줄었다. 전년 같은 달과 비교해도 0.8% 감소했다. 서비스업 생산은 전월보다 1.3% 감소했다. 설비투자만 7.5% 늘었다. 기업이 생산시설에는 돈을 쓰는데 소비자는 지갑을 닫는 모습이다. 더 불편한 숫자도 있다. 6월 말 가계신용은 2019조8000억원이다. 사상 처음 2000조원을 넘어섰다. 한 분기 만에 25조9000억원이 늘었다. 집을 사기 위한 돈도, 생활과 투자를 위한 대출도 함께 증가했다. 수출이 잘되는데 소비는 왜 힘든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병이다. 수출과 내수가 서로 다른 경제처럼 움직인다. 반도체와 대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번 돈으로 성장하지만, 그 돈이 국내 서비스업과 자영업, 가계소득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연결고리는 약하다. 특히 이번 수출 증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반도체가 전체 증가분을 압도한다. 자동차는 29.8% 감소했고 선박도 45.9% 줄었다. 20대 주력 품목 가운데 14개가 증가했지만 모든 산업이 같은 속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순간 위험해진다. 지금의 수출을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힘은 AI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계속되고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한국의 수출은 더 늘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AI 투자 사이클이 꺾이거나 공급망이 재편되면 한국 경제 전체가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수출 기록을 축하하는 것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돈이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의 매출을 늘리고, 얼마나 많은 가계의 소득으로 돌아가는지를 따져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성장률’보다 ‘성장의 전달 과정’을 봐야 한다. 수출기업이 돈을 벌었다고 국민의 삶이 자동으로 좋아지는 시대는 지났다. 대기업의 투자와 중소기업의 매출, 임금과 소비, 지역 상권이 연결되지 않으면 수출 1000억달러 시대도 일부 산업의 기록에 그칠 수 있다. 정부 역시 “수출이 좋다”는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비가 왜 다시 꺾였는지, 가계가 왜 빚을 늘리고 있는지, 건설과 자영업의 체감경기는 왜 회복이 더딘지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8월 소비자심리지수도 104.5로 전월보다 2.3포인트 떨어졌다. 경제 전체에 온기가 퍼지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출 기록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호황을 어떻게 내수의 회복으로 연결할 것인지 답을 찾는 일이다. 반도체가 벌어온 달러가 기업의 곳간에만 머물지 않고 투자와 임금, 협력업체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동네 식당의 매출과 자영업자의 소득, 청년의 일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982억달러의 수출은 분명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경제에서 더 중요한 숫자는 따로 있다. 그 기록이 국민의 삶을 얼마나 바꿨느냐는 숫자다. 수출이 이렇게 좋은데도 국민이 경기를 좋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문제는 국민의 체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구조에 있는지도 모른다. 숫자가 너무 좋을 때 오히려 경제의 그늘을 더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2026-09-01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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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라인 갈아치우면 정책도 달라지나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을 설계해 온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이 물러났다. 김 실장은 지난달 31일 사의를 밝혔고 이재명 대통령은 1일 사표를 수리했다. 이 정부 초대 정책실장으로 부동산과 산업정책, 대미 관세협상 등을 조율해 온 핵심 참모가 출범 1년3개월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앞서 이 대통령은 재정경제부와 국토교통부 등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폭 개각도 단행했다.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4~28일 전국 유권자 25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38.9%로 나타났다. 취임 후 처음 30%대로 내려왔고 7주 연속 하락했다. 조사기관은 집값과 전월세 불안 등을 지지율 하락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정권이 국정 동력을 잃을 때 인적 쇄신은 오래된 처방이다. 장관과 참모를 바꾸면 국민에게 변화의 신호를 줄 수 있고 조직에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정책 실패에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을 바꾸면 정책도 달라지느냐다. 김 정책실장 개인의 공과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최근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부동산과 세제, 금융, 재정 같은 핵심 정책은 정책실장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실과 관계부처, 여당, 관료조직이 함께 논의하고 대통령의 최종 판단을 거쳐 실행된다. 결과가 좋을 때는 ‘정부의 성과’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장관이나 참모 한두 명의 책임으로 정리한다면 같은 오류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집값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목표 자체에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급과 금융, 세제 정책이 시장에 어떤 신호를 줬는지다. 대출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실수요 지원을 확대하고, 공급을 강조하면서도 재건축·재개발이나 토지 활용 문제를 놓고 정책 메시지가 엇갈리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진다. 정책을 만든 사람을 바꾸기 전에 이런 엇박자가 왜 생겼는지부터 찾아야 한다. 세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시장이 움직일 때마다 세율과 공제, 대출규제를 꺼내 들면 국민은 정책의 원칙보다 다음 규제가 무엇일지를 먼저 생각한다. 정책이 시장의 기대를 안정시키는 대신 정부 발표 때마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드는 구조라면 담당 장관 교체만으로 신뢰가 회복되기 어렵다. 재정정책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생산적 재정을 내세우며 AI와 미래산업, 청년과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필요한 방향이다. 그러나 지출 확대와 국가채무 관리, 기존 사업 구조조정의 원칙이 동시에 제시되지 않으면 결국 돈을 더 쓰겠다는 메시지만 시장에 남을 수 있다. 산업정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와 AI부터 SMR·양자·우주·바이오까지 정부가 미래산업을 선정하고 금융과 세제, 연구개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전략산업 육성은 필요하지만 정부가 산업의 승자를 모두 골라주려 하면 민간의 판단과 경쟁이 약해질 수 있다. 어느 선까지 정부가 개입하고 어디서부터 시장에 맡길 것인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정책 하나하나보다 정책을 만드는 방식에 있을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실로 정책 결정이 집중되기 쉽다. 장관은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지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전달되는 순간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렵다. 청와대가 방향을 정하면 부처는 세부안을 만드는 집행기관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책실장과 장관을 아무리 유능한 인물로 바꿔도 한계가 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올라가는 조직에서는 정책 실패가 반복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이 정책은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철학을 가장 빠르게 실행하는 참모만큼 그 정책의 위험을 냉정하게 경고하는 참모도 필요하다. 장관 역시 대통령실의 지시를 받아 적는 자리가 돼선 곤란하다. 경제부처 장관이라면 시장과 기업, 가계의 현실을 근거로 대통령에게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국토부 장관은 집값이 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움직이면 그 원인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수정에 대한 정부의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한번 발표한 정책을 고치는 것을 실패나 후퇴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정책을 오래 끌고 가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거나 부작용이 확인됐다면 빨리 수정하는 것이 오히려 책임 있는 정부다. 다만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정책을 뒤집는 것도 답은 아니다. 수정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부동산이라면 집값과 거래량, 입주 물량, 가계대출과 전월세 가격 등 사전에 정한 지표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할 수 있다. 재정사업이라면 투자 대비 생산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일자리 창출 같은 성과를 측정하면 된다. 정책을 발표할 때부터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유지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면 수정하겠다는 기준을 공개하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정부의 체면보다 정책 효과를 앞세우는 구조다. 여당의 역할도 중요하다. 집권당이 정부 정책을 무조건 방어하면 민심의 경고가 대통령실에 전달될 통로가 사라진다. 여당은 야당보다 먼저 정부 정책의 허점을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이번 인사가 책임 회피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 정책실장이 스스로 사의를 밝혔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만큼 새로운 경제라인이 정책을 다시 정비할 기회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장관과 참모들이 기존 정책을 원점에서 점검한다면 인적 쇄신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얼굴만 바꾸고 정책 결정 구조가 그대로라면 개각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지율 38.9%라는 숫자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 차례 여론조사를 국정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7주 연속 하락이라는 흐름은 정부가 국민이 느끼는 불안을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 신호에 대한 답이 사람 몇 명을 바꾸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정권의 실패는 흔히 사람과 정책,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만든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눈에 잘 보인다. 정책을 고치는 것은 더 어렵고,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려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같은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 이번 개각과 정책실장 교체가 진정한 쇄신이 되려면 새 경제팀에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주고 대통령실도 다른 목소리를 듣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정책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수정하고, 효과가 없는 사업은 접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누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뉴스만이 아니다. 집값과 생활비 부담이 줄고 일자리가 늘고 기업이 투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인사의 성패도 결국 그 결과에서 판가름 난다.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국정 쇄신은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또 다른 인사만 기다리게 된다. 이번 개각이 남겨야 할 진짜 변화는 새 얼굴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을 스스로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부 시스템이다.
2026-09-01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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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살인사건을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아선 안 된다
[경제일보] 경북 경산에서 벌어진 중국인 여성 유학생 살인 사건은 잔혹하다. 경찰에 따르면 중국인 대학 강사 정모씨는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25세 중국인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경북과 경기 등 여러 곳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허위 실종신고를 하고 여장을 한 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이동하며 수사에 혼선을 주려 했다는 혐의도 있다. 경찰 수사에서 혐의가 입증된다면 죄질에 맞는 엄중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사건 보도에 붙은 댓글을 보면 정씨보다 중국을 먼저 문제 삼는 글이 적지 않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말부터 중국인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뒤 강력범죄가 늘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씨는 단체관광객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국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강사다. 이번 사건을 무비자 입국과 연결하는 것부터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를 따지기도 전에 국적부터 앞세우는 반응이 적지 않다는 점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경제 보복과 한한령, 서해 불법조업, 김치와 한복을 둘러싼 논란, 일부 중국인의 기초질서 위반까지 불만이 쌓여왔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우리 국익과 충돌한다면 비판해야 하고 불법행위에는 법대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중국인 한 사람이 저지른 범죄를 섞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살인 혐의를 받는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중국인 전체의 성향을 말하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반감이 개인의 범죄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2023년 체류인구 대비 피의자 비율은 내국인이 2.36%, 중국인이 1.65%였다. 8대 강력범죄에서도 내국인은 인구 대비 약 0.047%, 중국인은 0.031%였다. 중국인 피의자의 절대 숫자가 외국인 가운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많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한국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흉악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정유정은 과외 앱을 통해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했고, 고유정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을 근거로 한국인 전체가 잔혹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범죄자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한국인의 성향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피의자와 피해자의 국적을 함께 놓고 보면 혐중으로 번지는 반응이 얼마나 거친 일반화인지 드러난다. 피의자 정씨만 중국인이 아니다. 살해당한 25세 여성도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원래 저렇다’는 댓글 속에서는 정씨의 중국 국적은 크게 남고 피해자의 중국 국적은 사라진다. 같은 나라에서 온 한 사람은 살인과 시체손괴 혐의를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타국에서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을 중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범주에 넣으면 피해자에게까지 범죄자의 그림자를 씌우게 된다. 국적 하나로 피의자와 피해자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보는 것은 어느 나라 여권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느냐다. 정씨가 피해자를 왜 살해했는지, 범행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과정과 범행 뒤 행적이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다. 그 사실을 밝혀 정씨에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형사책임은 행위자에게 묻는다. 가족이라고 대신 처벌하지 않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책임을 나누지도 않는다.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함께 물을 수도 없다. 현실의 중국인은 범죄 기사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업과 공장에서 일하며 한국 사람들과 매일 부딪쳐 살아간다. 중국은 우리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고 양국의 기업과 사람도 경제와 생활 곳곳에서 이미 깊게 얽혀 있다.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중국인의 대부분은 경찰서나 법정이 아니라 학교와 직장, 시장과 거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중국 정부가 잘못하면 중국 정부를 비판하면 되고 중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한국 법으로 처벌하면 된다. 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인의 범죄는 그렇게 나눠서 볼 일이다. 5000만명이 사는 한국에서도 흉악범은 나온다. 인구가 훨씬 많은 중국에서 흉악범이 나왔다고 중국인 전체의 성향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인 한 명이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한국인 전체를 같은 눈으로 본다면 우리도 불쾌할 수밖에 없다. 정씨의 혐의는 정씨에게 물으면 된다. 살인 혐의도,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했다는 혐의도, 수사를 속이려 했다는 혐의도 정씨의 몫이다. 그 범죄 혐의를 중국인 전체의 죄로 돌려 혐중의 불쏘시개로 삼을 일은 아니다.
2026-09-01 08: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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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국가책임' 9년, 끝까지 책임진 건 가족이었다
[경제일보] 생활고와 간병 부담에 짓눌린 50대 남성이 친형을 살해하고 80대 어머니에게도 흉기를 휘둘렀다. 수원지법은 살인과 존속살해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 남성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범죄의 결과만 놓고 보면 무거운 형이 선고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법원이 형을 정하면서 적시한 사정은 따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남성은 부친이 숨진 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정신질환이 있는 형을 혼자 부양했다.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생계가 어려워졌고 간병 스트레스도 극심해졌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을 양형에 참작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의 책임을 묻는 절차다. 법원이 간병 부담과 생활고를 참작했다고 해서 살인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판결문에 적힌 양형사유는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무너졌는지를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대목이다. 정부가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17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치매환자를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며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겠다고 했다.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치매안심센터를 전국에 설치하고 의료비 부담을 낮추며 장기요양 지원을 확대했다. 치매를 더 이상 한 집안의 문제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름부터 무거웠다. ‘지원 확대’도 아니고 ‘관리 강화’도 아닌 ‘국가책임’이었다. 정부가 스스로 책임의 범위를 넓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9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이 실제 가정에서 어디까지 작동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를 거쳐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정권은 두 번 바뀌었고 치매 관련 조직과 사업, 예산은 계속 늘었다. 그런데 치매환자를 먹이고 씻기고 병원에 데려가고 밤새 지켜보는 마지막 책임은 아직도 가족에게 남아 있다. 정부 조사에서도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절반 가까이가 돌봄 부담을 호소했다.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소진도 반복해서 확인됐다. 정부가 몰랐던 문제가 아니다. 수년 전부터 통계에도 잡히고 정책보고서에도 적혀 있던 문제다. 이번 용인 사건은 그 숫자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치매 노모와 정신질환 형을 한 사람이 동시에 돌봤다. 간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다. 복지행정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신호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치매환자와 정신질환자가 한 집에 있고 보호자는 한 명뿐이다. 그 보호자가 생업까지 포기했다. 소득도 줄고 외부와의 접촉도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 상황을 국가의 돌봄망이 붙잡지 못했다면 제도가 어디에서 끊겼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치매안심센터가 몇 곳인지, 상담을 몇 건 했는지는 행정 보고서에 필요한 숫자다. 국가책임제의 성적표는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보호자 한 사람이 간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생계까지 흔들릴 때 국가가 그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하루 몇 시간이라도 돌봄을 대신했는지, 버틸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보호자를 다른 제도와 연결했는지가 성적표가 돼야 한다. 국가는 치매환자를 등록하고 검진하고 상담하는 일에는 상당한 체계를 갖췄다. 정작 가족이 무너지지 않도록 책임을 나눠 갖는 부분은 여전히 허술하다. 국가가 책임진다고 했지만 밤을 새운 사람은 가족이었고 직장을 그만둔 사람도 가족이었다. 생활비와 간병비를 걱정하며 끝까지 버틴 사람 역시 가족이었다. 그래서 ‘치매 국가책임제’와 지금의 현실 사이에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국가는 환자를 관리했지만 가족은 환자의 삶을 떠안았다. 국가가 제도를 만들었지만 가족은 자신의 직업과 소득, 일상을 내놓았다. 책임의 가장 무거운 부분이 여전히 가족에게 남아 있다면 간판만 국가책임제인 셈이다. 이재명 정부도 이 문제에서 전임 정부를 바라볼 처지가 아니다. 정부가 바뀌면 장관과 정책 이름은 바뀌지만 국가의 약속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치매 국가책임제를 계승하고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확대하겠다면 문재인 정부가 내건 ‘국가책임’이라는 미완의 약속도 함께 넘겨받은 것이다. 새로운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지원 대상자가 몇 명 늘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혼자 중증환자를 돌보는 사람, 간병 때문에 생업을 포기한 사람, 생활비가 끊긴 가정부터 찾아내야 한다. 도움을 신청하러 찾아오는 사람만 지원하는 복지로는 이미 지쳐 쓰러진 사람을 잡아낼 수 없다. 법의 시간과 복지의 시간도 다르다. 형법은 범죄가 벌어진 뒤 책임을 묻는다. 복지행정은 범죄나 극단적인 선택, 가족 붕괴가 벌어지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사후에 정확하게 처벌하는 국가보다 사전에 한 가정을 붙잡는 국가가 훨씬 어렵지만 ‘국가책임’을 내걸었다면 그 어려운 일을 하겠다는 뜻이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범행이 벌어진 뒤 국가 시스템은 정확하게 작동했다. 경찰은 피고인을 체포했고 검찰은 기소했으며 법원은 증거와 양형사유를 따져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형사사법기관은 각자의 절차에 따라 역할을 했다. 문제는 그 전에 작동했어야 할 국가의 돌봄망이다. 살인사건의 판결문에 ‘치매를 앓는 모친과 정신질환이 있는 형을 홀로 부양했다’는 문장이 남았다. 간병 때문에 직장까지 그만둔 한 사람이 가족을 죽이는 순간까지 갔다. ‘치매는 국가가 책임진다’고 선언한 지 9년이 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책은 발표할 때가 아니라 국민이 가장 어려울 때 평가받는다. 센터의 숫자도, 예산의 규모도, 지원 실적도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면 다시 따져봐야 한다. ‘국가책임제’라는 이름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국가가 책임진다던 9년 동안, 끝까지 버티고 끝내 무너진 것은 가족이었다.
2026-08-30 12: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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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사, 임금표 너머 '미래 일자리'를 봐야
[경제일보] 현대자동차 노사가 길었던 줄다리기를 일단 멈췄다. 지난 5월 상견례 이후 111일 만이다. 지난 24일부터 이어진 밤샘 교섭 끝에 마련된 잠정합의안에는 월 기본급 10만원 인상, 성과금 400%와 1270만원, 주식 15주, 복지포인트 50만원 등이 담겼다. 내년 하반기 200명, 2028년 300명 등 기술직 500명을 새로 뽑는 방안에도 합의했다. 오는 31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하면 올해 임금협상은 마무리된다. 숫자만 놓고 보면 적지 않은 보상이다. 노조는 올해 조합원 1인당 임금 인상 효과를 4084만원 정도로 추산한다. 좋은 성과를 낸 기업이 그 과실을 노동자와 나누는 것은 시장경제에서도 자연스럽다. 숙련된 노동력과 안정적인 노사관계 역시 기업 경쟁력을 만드는 자산이다. 기업의 성과가 주주와 경영진에게만 돌아가고 현장을 지킨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속 가능한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번 합의를 ‘얼마를 더 받았느냐’의 문제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현대차 노사가 마주한 진짜 협상은 오히려 이제부터다. 자동차 산업의 판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교섭 과정에서 노조는 60시간 파업했고, 생산라인 기준 가동 중단 시간은 120시간에 달했다. 지난 21일에는 2016년 이후 10년 만에 하루 8시간 전면파업까지 벌어졌다. 업계는 약 5만5200대가 생산 차질을 빚었고, 이를 판매단가로 환산한 매출 차질 규모가 2조3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한다. 이 수치를 실제 영업손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갈등의 비용이 회사와 조합원만이 아니라 협력업체·고객·지역경제로 번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권리다. 회사가 비용과 경쟁력을 따지는 것도 경영의 책무다. 문제는 두 요구가 해마다 파업을 거친 뒤에야 절충되는 구조다. 임금협상의 승자가 누구인지 가리는 동안 생산이 멈추고 협력업체가 일감을 걱정한다면 노사 모두가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커질 수 있다. 이번 잠정합의에서 그래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성과금 400%보다 다른 곳에 있다. 현대차 노사는 피지컬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같은 미래 기술의 도입이 기업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데 공감하고, 신사업과 신기술 추진 경과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산업 전환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제조 경쟁력 강화와 제도 개선에도 함께 나서기로 했다. 임금표 밖으로 노사협상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이 합의가 제대로 실행된다면 올해 임협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을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자동차 회사를 넘어 로봇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중심 제조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할 계획이다. 초기에는 부품 서열작업부터 시작해 검증을 거쳐 조립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힌다는 구상이다. 노조 역시 이번 교섭 과정에서 AI·자동화 확산에 따른 고용안정을 주요 문제로 제기했다. 이 변화 앞에서는 ‘자동화를 막을 것이냐, 받아들일 것이냐’는 식의 논쟁부터 낡았다. 자동화를 막으면 일자리가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경쟁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한국 공장의 원가 경쟁력이 떨어지면 생산물량 자체가 해외로 이동할 수 있다. 반대로 로봇을 많이 넣으면 기업이 자동으로 경쟁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공정을 이해하고 로봇을 운용하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품질을 관리할 숙련된 사람이 없다면 첨단설비도 비싼 쇳덩이에 불과하다. 결국 미래의 노사협상은 ‘사람이냐 로봇이냐’가 아니라 ‘사람이 로봇과 함께 어떤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를 다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산직 500명 신규채용 합의는 반갑다. 청년들에게 질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열고 세대교체의 숨통을 틔운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숫자를 채우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새로 들어올 인력의 직무가 앞으로 10년 뒤에도 필요한 일인지까지 설계해야 한다. 미래 공장에 필요한 생산직의 모습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생산공정을 이해하면서 로봇과 자동화설비를 다루고, 설비 데이터를 읽어 고장을 예측하며 품질 문제를 현장에서 해결하는 노동자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기존 직원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 감소부터 걱정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재교육과 직무전환을 통해 새로운 공정으로 이동할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고용안정의 가장 좋은 방법은 없어지는 일을 억지로 붙들어두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기존 노동자가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임금 문제 역시 이제 생산성과 떼어놓고 논의하기 어렵다. ‘임금이 오르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단순 공식은 맞지 않는다.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인력이 높은 생산성과 품질을 만들어낸다면 기업에는 오히려 이익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고 그 성과를 공정하게 배분받는 구조는 장기적인 신뢰를 만든다. 반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고정비만 계속 높아지고, 파업에 따른 생산중단이 반복되며, 해외 공장보다 국내 생산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로벌 기업은 결국 어디에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계산한다. 국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선의만으로 국내 생산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현대차 역시 녹록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기차에서는 중국 업체와 가격·기술 경쟁이 격화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현지 생산 확대가 요구된다. 원자재와 공급망, 관세, 환율까지 경영환경을 흔드는 변수도 적지 않다. 회사와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생산성을 함께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성과급을 생산성과 기계적으로 연동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자동차 품질과 기술개발, 브랜드 가치처럼 단순한 시간당 생산대수로 계산하기 어려운 성과도 많다. 하지만 노사가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협상한다면 동시에 ‘다음 성과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도 협상해야 한다. 생산성이 얼마나 개선됐는지, 품질 경쟁력을 어떻게 높일지, 신기술 도입으로 줄어드는 직무와 늘어나는 직무가 무엇인지, 직원 재교육에는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 국내 공장의 역할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까지 노사 테이블 위에 올라와야 한다. 협력업체도 빠져서는 안 된다. 현대차 공장이 파업하면 부품업체 생산라인도 영향을 받는다. 완성차 노동자는 성과금을 받지만 협력업체 노동자는 원청의 생산중단으로 일감을 잃는 구조라면 산업 전체의 노사 상생이라 부르기 어렵다. 노사협상의 비용이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곳으로 전가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대기업 노사에게 있다. ‘주역’ 계사전에는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노사가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좋은 일자리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겠다는 목표만큼은 함께할 수 있다. 올해 임협은 아직 잠정합의다. 조합원 투표라는 마지막 절차도 남아 있다. 가결된다면 노사는 길었던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산라인이 다시 돌아간다고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기차와 로봇, AI가 공장을 바꾸는 속도는 임금협상 주기보다 빠르다. 앞으로의 노사관계는 매년 기본급 몇 만원과 성과금 몇 퍼센트를 놓고 싸우는 데 머물 수 없다. 청년을 어떤 일자리로 뽑고, 기존 숙련인력을 어떤 기술자로 바꾸며, 자동화로 높아진 생산성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더 큰 의제가 돼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눌 성과가 계속 만들어지는 회사를 함께 만드는 일이다. 현대차 노사의 다음 협상 테이블에는 임금표와 함께 생산성, 직무전환, 청년고용, 로봇과 AI의 시간표가 나란히 놓여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의 몫도 지키고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지키는 길이다.
2026-08-26 08: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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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외친 정부, 정작 서울 재건축은 묶어뒀다
[경제일보] 이재명 정부는 지난 13일 수도권에 23만호 이상을 추가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름도 ‘주택 신속공급 방안’이다. 공급이 부족하니 더 많이, 더 빨리 짓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실제 주택을 늘릴 수 있는 재건축·재개발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정반대다. 서울시는 재건축·재개발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을 3년간 한시적으로 풀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규제를 풀 경우 재건축 기대감이 커져 집값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다. 집값을 잡겠다고 정비사업에 묶인 주택의 거래까지 계속 막겠다는 것이다.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은 투기과열지구에서 재건축은 조합설립인가 이후, 재개발은 관리처분인가 이후 새로 집을 산 사람이 원칙적으로 조합원 자격을 승계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투기 수요를 막기 위해 만든 규제다. 문제는 투기만 막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거래와 사업의 자금 흐름까지 함께 묶는다는 데 있다. 지난해 10·15 대책 이후 서울 전역이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되면서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을 받는 정비사업장은 42곳에서 159곳으로 늘었다. 강남 3구와 용산구를 겨냥하던 규제가 서울 전역으로 번진 것이다. 사업성과 가격 수준이 전혀 다른 지역까지 똑같은 잣대가 적용됐다. 그 부담은 투기세력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서울시가 새로 규제를 받게 된 117개 구역을 조사한 결과 분담금 부담과 주거 이전, 상속 문제 등으로 집을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한다는 사례가 127건 확인됐다. 절반가량은 분담금 부담 때문이었다. 재건축 공사비가 뛰고 추가 분담금이 억 단위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끝까지 사업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도 있다. 이들에게 집을 팔고 빠져나갈 길까지 막아 놓으면 사업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이 늘고 조합 내부 갈등이 커지면 사업은 그만큼 늦어진다. 투기를 막겠다며 공급사업의 자금 순환까지 막는 것은 정책의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다. 정부 정책의 모순은 다른 대책과 비교하면 더 선명해진다. 정부는 이번 공급대책에서 재개발 조합설립 동의율을 75%에서 70%로 낮추고 시공사 선정 절차와 이주비 관련 규제도 손질하기로 했다. 정비사업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시간을 줄여야 공급이 빨라진다는 사실을 정부도 인정한 셈이다. 한쪽에서는 정비사업의 속도를 높이겠다며 규제를 풀고, 다른 한쪽에서는 집값이 오를 수 있다며 사업의 출구를 막아 놓는다. 정책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울의 주택 공급 구조를 보면 더 그렇다. 서울에는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 빈 땅이 거의 없다. 정부가 공공청사와 유휴부지, 그린벨트와 각종 공공부지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도 새로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건축·재개발은 다르다. 사업할 땅이 이미 있고 소유자도 있다. 도로와 지하철, 학교 같은 기반시설도 상당 부분 갖춰져 있다. 구역 지정과 조합 설립, 사업시행인가까지 수년간 진행해 온 사업장도 적지 않다. 서울에서 주택을 늘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다. 서울시는 2031년까지 정비사업을 통해 31만호를 착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가운데 3년 안에 착공할 수 있는 85개 구역 8만5000호를 따로 골라 사업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없는 땅을 새로 찾는 것보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사업의 시간을 줄이는 편이 훨씬 빠르다. 그런데 정부는 이 사업들의 거래 규제를 그대로 두고 또 다른 공급부지를 찾는다. 공급정책의 순서가 뒤집혔다. 재건축 규제 완화가 강남과 한강변 일부 인기 단지의 가격을 자극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서울 25개 구의 정비사업을 한꺼번에 묶어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압구정과 강북의 사업성 낮은 정비구역을 같은 규제로 다루는 것은 정밀한 정책이 아니라 행정 편의다. 가격이 과열되는 지역은 대출과 세제, 토지거래허가제, 자금출처 조사로 관리하면 된다. 사업 단계와 보유 기간, 지역별 가격 수준에 따라 조합원 지위 양도 요건을 세분화하는 방법도 있다. 투기 대응 수단은 따로 있는데 공급사업의 출구까지 잠글 이유는 없다. 서울시가 요구한 것도 영구적인 전면 자유화가 아니다. 3년간 한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이다. 전면 완화가 어렵다면 실거주 장기보유자나 과도한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조합원부터 예외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선택지는 있는데 정부는 가장 손쉬운 현상 유지에 머물러 있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 공급을 서두른다고 한다. 수도권에 23만호 이상을 추가 공급하고 공공부지를 발굴하며 각종 절차를 앞당기겠다고 한다. 공급 부족이 집값과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먼저 움직여야 할 곳도 분명하다. 정부가 돈을 들여 새 사업을 만드는 것보다 민간이 자기 돈을 들여 짓겠다는 주택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것이 빠르다. 이미 수년간 행정 절차를 밟아 온 사업부터 착공시키는 것이 공급정책의 기본 순서다. 재건축·재개발은 오늘 규제를 푼다고 내년에 바로 입주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서울시는 정비사업 기간을 평균 18.5년에서 12년까지 줄이겠다고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10년 안팎이 걸린다. 지금 늦춘 1년은 몇 년 뒤 입주물량에서 그대로 빠진다. 과거 정부들이 부동산 정책에서 반복해 온 잘못도 비슷했다. 집값이 오르면 규제를 늘리고, 규제로 사업이 늦어져 공급이 부족해지면 다시 공급대책을 내놨다. 당장의 가격만 잡으려다 몇 년 뒤 공급 부족을 키우는 악순환이었다. 이재명 정부가 공급을 말하기 시작했다면 정책도 공급에 맞춰야 한다. 집값 과열이 두렵다고 서울의 정비사업을 묶어 놓고 다른 곳에서 23만호, 30만호를 외친다고 주택이 빨리 생기지는 않는다. 가격은 가격대로 관리하고 공급은 공급대로 움직여야 한다. 둘을 한꺼번에 묶어 놓으면 집값도 잡지 못하고 공급 시계만 늦어진다. 공급을 늘리겠다는 정부가 먼저 풀어야 할 것은 새 택지가 아니다. 자신이 채워 놓은 규제의 자물쇠다.
2026-08-25 09: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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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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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인선 '밀실 합의', 사법독립 위해서라도 끝내야
[경제일보] 대법관을 뽑는 절차는 법에 정해져 있다. 후보를 천거받아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심사하고, 대법원장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통령에게 제청한다. 국회가 동의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법에는 없는 절차 하나가 마지막 관문처럼 작동해 왔다. 대법원과 대통령실이 최종 후보를 놓고 사전에 의견을 맞추는 물밑 협의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다음 달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면 제청했다. 그동안 대법원장이 대통령실과 후보를 조율한 뒤 대통령을 만나 제청해 온 관행과 달랐다. 청와대는 “협의를 건너뛴 유례없는 일방 통보”라며 반발했고, 손 후보 제청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이번 일을 조희대 대법원장과 이재명 대통령 가운데 누가 맞느냐는 싸움으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헌법 제104조는 대법관을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제청권과 동의권, 임명권을 세 기관에 나눠 놓은 것이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를 미리 합의해야 한다는 절차는 헌법에도 법률에도 없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관행이 헌법상 절차가 될 수는 없다. 법에 없는 관행이 실제 인선에서는 법정 절차만큼이나 강하게 작동해 왔다. 양측이 뜻을 맞추면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합의가 깨지면 지금처럼 제청과 임명 절차가 멈춘다. 누가 언제까지 양보해야 하는지, 대통령이 제청된 후보를 돌려보낼 수 있는지, 대법원장이 다시 후보를 골라야 하는지 정해진 기준도 없다. 관행은 합의가 될 때 편리하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작동하는 것이 제도다. 앞단의 절차는 오히려 꽤 공개돼 있다. 후보자를 천거받고 심사 대상자의 학력과 주요 경력, 재산 관계를 공개한다. 국민 의견도 받는다. 후보추천위가 검증 자료를 살펴 후보를 압축한다. 대법원도 이런 절차를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해 왔다. 그렇게 공개 검증을 거친 후보들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면 문이 닫힌다. 대통령실이 누구를 반대했는지, 대법원은 왜 특정 후보를 고집했는지, 어떤 기준에서 이견이 생겼는지는 국민이 알기 어렵다. 앞에서는 후보자의 재산까지 내놓고 검증받으면서 정작 마지막 한 사람을 고를 때만 물밑 협의에 맡겨 온 셈이다. 그 결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자리는 다섯 달 넘게 비었다. 후보추천위는 지난 1월 후보 4명을 추천했다. 그런데도 대법원과 대통령실의 의견 조율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8일 조 대법원장이 손 후보를 서면 제청하면서 갈등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법에 없는 협의가 풀리지 않으면서 헌법기관 구성원의 공석이 길어진 것이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제청이 이뤄지기 전 기존 후보들을 상대로 후보추천 절차를 다시 진행하는 방안까지 타진했다.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협의가 풀리지 않자 이미 끝난 추천 절차를 처음부터 되돌리는 방안이 검토된 것이다. 일부 후보가 반대하면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법에 따라 후보추천위가 후보를 골랐는데 물밑 협의가 막혔다는 이유로 법정 절차를 다시 돌리려 했다면 본말이 뒤집힌다. 후보추천위보다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비공식 합의가 더 높은 단계에 놓였다는 얘기가 된다. 법에 정해진 절차가 관행에 밀려서는 안 된다. 청와대도 대법원도 이 관행에 기대 왔다. 청와대가 오랜 관행을 근거로 사전 협의를 당연한 권한처럼 요구하면 대통령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제청 단계까지 뻗게 된다. 대법원도 대통령실과 협의를 이어오다가 합의가 깨진 뒤에야 독립된 제청권을 내세운다면 그동안 왜 법에 없는 절차에 기대 왔는지 설명해야 한다. 지금의 충돌은 바로 그 모순에서 시작됐다. 사법독립은 대통령의 개입을 막는 동시에 대법원장의 권한도 절차 안에 묶어 두는 일이다. 대법관은 대통령의 사람도, 대법원장의 사람도 아니다. 법률과 헌법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국민의 권리를 판단하는 자리다. 그런 사람을 뽑는 절차라면 누가 어떤 권한을 행사하는지부터 분명해야 한다. 사전 협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법에 넣으면 된다. 누가 의견을 낼 수 있는지, 어느 범위까지 협의할 수 있는지, 언제까지 제청과 임명 절차를 끝내야 하는지 정하면 된다. 헌법상 제청권과 임명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절차라면 없애야 한다. 지금처럼 법 밖에 둔 채 합의가 될 때는 관행이라고 따르고, 틀어지면 서로 헌법상 권한을 들고나오는 방식은 더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앞으로 대법관 인선은 더 잦아진다. 대법관 정원이 단계적으로 26명까지 늘어나면서 현 대통령 임기 동안 새로 임명되는 대법관 수도 크게 늘어난다. 현행 일정대로라면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중 최대 22명의 대법관 임명에 관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법원의 구성이 크게 바뀌는 시기에 최종 인선 방식을 비공식 합의에 계속 맡겨 둘 수는 없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바뀔 때마다 인선 방식까지 달라져서는 안 된다. 두 기관장이 뜻을 맞출 때만 굴러가는 절차라면 제도라고 하기 어렵다. 사법독립을 사람의 선의나 두 사람의 관계에 맡길 수는 없다. 헌법은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주고 국회에 동의권을, 대통령에게 임명권을 줬다. 각자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라는 뜻이다. 헌법이 나눠 놓은 권한을 밀실에서 다시 합칠 이유는 없다.
2026-08-24 09: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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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은 뛰는데 왜 서민 경기는 뛰지 않는가
[경제일보] 한국 경제의 성적표만 놓고 보면 요즘처럼 반가운 때도 드물다. 수출이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수출 증가를 이끌면서 대외 경쟁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월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수출도 같은 기간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7월 수출 역시 988억9000만 달러로 역대 2위였으며 반도체 수출은 410억1000만 달러에 달했다. 숫자만 보면 한국 경제가 힘차게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장과 골목의 표정은 그만큼 밝지 않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줄었다고 말한다. 가계는 월급보다 빠르게 오르는 생활비에 지갑을 닫고 있다. 수출은 역대급인데 왜 국민이 느끼는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가. 문제는 거시경제 지표와 실물경제의 체감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반도체의 선전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AI 산업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우리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6월 반도체 수출은 448억2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4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상반기 반도체 수출은 1924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제 전체를 반도체 하나의 성적표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고도의 자동화와 자본집약적 생산구조를 갖고 있어 수출 증가가 고용과 내수 확대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도체 수출이 늘었다고 동네 식당 매출이 함께 증가하는 것도, 대기업의 수출 호황이 청년 일자리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성장의 미스매치’다. 수출이 늘고 기업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한 호재다. 문제는 성장의 과실이 어디로 흘러가느냐다. 대기업과 첨단산업에 집중된 성과가 중견·중소기업과 서비스업, 자영업자, 근로자에게 충분히 확산되지 않는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풍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수출 호황을 내수 회복으로 연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첨단산업의 성과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중소·중견기업으로 확산되도록 공급망을 강화하고,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 해외시장 진출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에게도 단기 일자리 숫자보다 AI·반도체·바이오·로봇·에너지 등 미래 산업과 연결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내수와 서비스업을 살리는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자영업자에 대한 일회성 지원을 넘어 임대료와 금융비용 등 고정비 부담을 낮추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의 구조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관광·문화·의료·콘텐츠·돌봄 등 고용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여 소비 여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숫자에 취해서는 안 된다. 수출이 잘된다고 경제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체감경기가 어렵다고 수출 호조의 가치를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두 현실을 함께 보는 것이 경제를 제대로 보는 상식이다. 수출은 우리 경제의 엔진이고 내수는 그 엔진이 움직이는 도로다. 엔진만 아무리 좋아도 도로가 무너지면 자동차는 제대로 달릴 수 없다. 진짜 경제 회복은 수출 통계표에서 끝나지 않는다. 청년이 첫 직장을 얻고, 직장인이 월급의 실질가치를 체감하며, 자영업자가 저녁 장사를 걱정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이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성장의 의미가 완성된다. 경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반도체 수출의 기록을 축하하되 그 기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수출의 온기가 산업 전반으로, 기업에서 가계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수출은 잘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라는 국민의 질문에 경제정책이 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경제지표도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성장만이 아니다. 성장의 과실이 더 넓고 깊게 국민에게 돌아가는 성장, 그것이야말로 진짜 경제성장이다.
2026-08-23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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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을 아파트로 채울 것인가
[경제일보] 주택 문제만큼 우리 사회의 감정을 쉽게 자극하는 정책도 드물다. 집값이 오르면 공급 확대를 외치고, 공급 대책이 나오면 개발 논란이 뒤따른다. 청년 주거 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늘리자는 주장에도 반대가 있고, 도심의 빈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목소리에도 환경과 역사 보존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만큼 주택 문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터전과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용산공원 부지 내 청년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정부·여당이 청년층의 주거 안정을 위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와 규제 완화, 도심 공급 방식 등을 놓고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여야의 정치적 공방까지 겹치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리는 모양새다. 그 질문은 간단하다. 청년들의 주거 불안을 해소하면서도 용산공원이 가진 역사적·환경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을 찾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용산공원은 평범한 국유지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군이 주둔했던 공간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상징성이 큰 곳이다. 서울 한복판에 남은 대규모 녹지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도시의 허파이자 근현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으로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주택이 절실한 청년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다. 결혼과 출산, 취업과 독립, 삶의 계획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만으로 서울에서 안정적인 주거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신뢰도 흔들린다. 청년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을 ‘집이냐 공원이냐’라는 이분법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공원을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단순하고, 공원은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역시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 도시에는 주거와 환경, 역사와 개발, 현재와 미래가 함께 존재한다. 정책은 이 가치들의 충돌을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더욱이 서울의 주택 문제는 특정 부지 하나를 개발한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서울의 집값과 전월세 불안에는 공급 부족뿐 아니라 교통망, 직주근접, 교육, 금융, 세제, 재건축·재개발 규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정부가 도심의 귀한 땅을 활용한다면 무엇보다 ‘얼마나 많이 지을 것인가’보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지을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특히 공공주택 정책에서 숫자 경쟁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몇 호를 공급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 한복판의 비싼 땅에 지은 상징적인 주택 몇 천 호가 아니라 합리적인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양질의 주택이다. 공급 지역과 교통, 생활 인프라, 임대료, 관리비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용산공원 주변을 포함한 도심 공급 전략도 보다 넓은 시야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 이전 부지, 유휴 국공유지, 철도·차량기지, 저이용 공공시설 부지, 역세권 복합개발 등 도심 곳곳에는 주택 공급과 도시 재생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기존 주거지의 재건축·재개발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드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개발 가능한 곳을 찾았다고 무조건 아파트를 올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시의 녹지와 역사문화 자산은 한번 훼손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특히 용산공원처럼 상징성이 큰 공간이라면 개발 여부뿐 아니라 장기적인 도시계획과 세대 간 형평성까지 따져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정치의 절제다. 주택 공급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반대 의견을 ‘공급을 막는 발목잡기’로 몰아서는 안 된다. 공원 보존을 주장하는 쪽 역시 주거난을 호소하는 청년들을 개발 논리에 희생되는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 자기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합리적인 해법은 사라진다. 특히 국가의 중요한 공간을 놓고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앙정부는 국가 차원의 주택 공급 필요성을 설명하고,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환경에 관한 전문적 판단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두 기관이 공개적인 검증과 협의를 통해 최선의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립적인 전문가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용산공원의 역사·환경적 가치와 주택 공급의 필요성을 동시에 평가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와 장기적인 도시계획을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한번 결정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은 신중하게 결정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공원은 한번 훼손하면 복원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반면 청년 주거 문제는 용산공원 하나에 모든 해법을 걸지 않고도 여러 지역과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치밀한 비교와 검토가 필요하다. 동시에 정부는 용산공원 논란을 핑계로 청년 주택 공급을 미뤄서도 안 된다. 청년 주거 안정은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도심 곳곳의 유휴부지를 찾아 공급을 확대하고, 역세권 고밀 개발과 재건축·재개발을 합리적으로 활성화하며, 공공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공급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에는 늘 비용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고, 그 편익을 누가 누리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용산공원을 지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다. 청년에게 안정적인 집을 제공하는 것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이다. 용산공원이 정쟁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청년 주거 문제가 정치적 구호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숫자를 앞세운 밀어붙이기도, 보존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무조건적인 반대도 아니다. 청년에게는 집을, 시민에게는 공원을, 도시에는 미래를 남기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 한쪽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이고 협치의 출발점이다.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이 또 하나의 소모적인 정치 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서울의 주택 공급과 도시계획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집값을 잡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도시의 소중한 자산을 잃어서도 안 되고, 공원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청년들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과거를 지키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도시정책이고, 지금 우리 정치가 보여줘야 할 상식이다.
2026-08-23 1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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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주문한 '전략적 자율성', 한국식 답은 따로 있다
[경제일보] 왕이 외교부장이 서울을 떠나며 숙제 하나를 남겼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진정한 전략적 자율성’을 갖고 진영 대결이나 편 가르기에 나서지 않았으면 한다는 주문이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과의 관계를 서로 충돌하지 않게 발전시키라는 말도 덧붙였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외교 수장이 한국 땅에서 한국 외교의 좌표를 거론한 셈이다. 표면만 보면 틀렸다고 할 이유는 많지 않다. 강대국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국익을 판단하는 것은 주권국가 외교의 기본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렬할수록 한국에는 오히려 더 많은 선택지와 더 정교한 계산이 필요하다. 문제는 중국이 말하는 ‘전략적 자율성’과 한국이 가져야 할 전략적 자율성이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라는 데 있다. 왕 부장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한국이 진영 대결과 ‘편들기’를 피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동시에 한반도 긴장을 푸는 근본적 방법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중국의 기존 입장도 되풀이했다. 중국의 시각에서 전략적 자율성은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받아들여야 할 자율성은 조금 달라야 한다. 미국의 요구가 국익에 맞지 않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듯, 중국의 요구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거리를 두는 것만 자율이고 중국의 전략적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자율일 수는 없다. 자율성의 주어는 미국도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출발점은 한미동맹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현실의 위협으로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안보의 중심축이다. 이를 미·중 관계의 온도에 따라 조절할 거래 카드로 만들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동맹을 모든 정책에 대한 자동 동의서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최근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 이후 한미는 을지 자유의 방패 연합훈련 기간을 11일에서 5일로 줄이고 야외기동훈련도 축소했다. 한국 외교부 장관은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 정부 관계자 상당수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미국 역시 북미대화와 이란 문제, 한국의 대미 투자 등 자신의 전략적 이해를 계산하며 움직인다는 의미다. 동맹도 국익을 계산한다. 그렇다면 한국이라고 계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미동맹을 튼튼하게 유지하되 한국의 안보와 산업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결정에는 충분한 협의와 상호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동맹을 약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니라 오래가게 만드는 태도다. 중국과의 경제협력 역시 감정이 아니라 계산의 영역에 놓아야 한다. 왕 부장과 조현 외교부 장관은 한중 자유무역협정 서비스·투자 후속협상, 공급망 안정, 인적·문화 교류 확대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선전 APEC을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양국 인적 교류가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관계의 정상화는 한국 경제에도 필요한 일이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주요 시장이고 반도체·배터리·화학·소비재 기업에는 거대한 생산·판매 거점이다. 희토류와 배터리 소재를 비롯한 공급망에서도 중국을 지워놓고 산업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정치적 선명성을 얻겠다고 경제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실용외교가 아니다. 다만 중국과 협력하는 것과 중국에 의존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희토류와 흑연, 배터리 소재처럼 한 국가의 정책 변화가 한국 공장을 멈춰 세울 수 있는 품목이라면 거래는 지속하되 공급선은 넓혀야 한다.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하면서 호주·캐나다·동남아·중남미의 대체 공급망을 확보하고, 국내 비축과 재활용도 함께 키워야 한다. 중국과 잘 지내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중국이 공급을 멈춰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첨단기술은 더욱 세밀해야 한다. 범용 반도체와 소비재에는 시장의 논리를 최대한 존중하되 첨단 AI 반도체와 군사 전용 가능 기술에는 안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중국과의 FTA 서비스·투자 협상에서도 한국 시장을 여는 만큼 중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받는 규제와 차별을 줄이라는 상호주의가 따라야 한다. ‘관계 개선’ 자체가 외교의 목표가 아니라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가 목표여야 한다. 북한 문제에서는 중국의 이번 메시지를 더 냉정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왕 부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를 한반도 긴장 완화의 근본 해법으로 제시했다. 북미 사이의 불신과 군사적 긴장이 한반도 문제를 악화시킨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화가 끊긴 채 제재와 군사 대응만 반복한다고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미국에만 돌리는 진단은 불완전하다. 왕 부장이 서울에 있던 20일 북한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했다. 북한의 핵무력 강화와 미사일 개발은 평양 스스로 내린 선택이다. 중국이 미국에는 정책 변화를 요구하면서 북한에는 같은 수준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중재자로서의 설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할은 필요하다. 조 장관이 북한을 대화로 돌려세우는 데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한 것도 그래서다. 왕 부장 역시 남북의 평화적 공존과 대화 재개를 위해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베이징이 원하는 ‘한반도 안정’과 서울이 추구해야 할 ‘비핵화된 평화’가 완전히 같은 목표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맹자’ 공손추 하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나온다. 국제정세가 아무리 유리해도 스스로의 전략과 내부 합의가 없으면 국익을 지키기 어렵다. 미·중 경쟁이라는 ‘천시’와 한반도라는 ‘지리’ 사이에서 한국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은 어느 나라의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는 국익의 기준이다. 미국과 동맹이라고 모든 정책에서 같아질 필요는 없다. 중국과 협력한다고 중국이 원하는 외교적 좌표에 설 이유도 없다.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이해가 충돌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선을 긋는 것이 외교다. 왕 부장의 ‘전략적 자율성’ 주문을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 대신 한국식으로 다시 정의하면 된다. 안보는 한미동맹을 중심에 두되 동맹 내부에서도 국익을 말한다. 중국과는 시장과 공급망, 북핵 문제에서 적극 협력하되 기술과 경제안보의 경계는 지킨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한국 기업에 일방적인 비용을 요구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양쪽 모두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과감하게 얻는다. 오는 11월 선전 APEC과 한중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이 원칙의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정상회담 사진보다 중국 시장의 문턱이 실제 낮아졌는지, 공급망이 더 안전해졌는지, 문화·인적 교류의 비정상적인 장벽이 사라지는지, 북한을 대화로 돌려세우는 데 중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봐야 한다. 전략적 자율성은 미국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느냐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 얼마나 가까워졌느냐로 잴 일은 더욱 아니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필요한 협력은 하되, 지켜야 할 국익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것이 한국식 전략적 자율성이다. 중국이 주문한 답을 그대로 제출할 필요는 없다. 답안지는 대한민국이 스스로 쓰면 된다.
2026-08-21 11: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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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 외교의 좌표는 국익이다
[경제일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서울에 왔다. 중국 외교 수장의 단독 방한은 약 5년 만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왕 부장은 19일 서울에서 마주 앉아 한중 관계와 한반도 정세,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 공급망 안정, 인적·문화 교류 확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양국을 오가는 인적 교류가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얼어붙었던 관계가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것은 반길 일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옮길 수 없는 이웃이고, 한국 기업의 거대한 시장이며, 반도체·배터리·핵심광물 공급망에서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상대다. 북한 문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조 장관이 북한의 조속한 대화 복귀를 위해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했고, 왕 부장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답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문제는 한중 관계가 움직일 때마다 되살아나는 질문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질문부터 잘못됐다.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을 외교·안보의 근간으로 삼는 것과 중국과 경제·외교 협력을 확대하는 것은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 거세질수록 선택을 강요받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국 외교가 모든 사안을 ‘친미냐 친중이냐’의 두 칸짜리 표에 넣는 순간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게 된다. 과거 한중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쓰던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한다)’는 공식도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수출상품이면서 안보자산이고, 배터리는 산업이면서 공급망 전략이다. 희토류와 핵심광물은 원자재인 동시에 외교적 지렛대가 됐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첨단 장비와 소프트웨어에는 수출통제와 동맹정책이 얽혀 있다. 경제와 안보를 각각 워싱턴과 베이징이라는 두 서랍에 나눠 담을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에도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우선 안보의 축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안보의 기초였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그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이를 미중 사이의 단기적 거래대상처럼 다루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국과 관계를 개선한다고 한미동맹의 신뢰에 의문을 만들 이유도 없다. 다만 동맹이라고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모든 문제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왕 부장이 서울에 도착한 19일 조 장관은 국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연합훈련 규모와 기간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관계자들조차 사전에 이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과 미국은 당초 11일 일정이던 연합훈련을 5일로 줄이고, 일부 야외기동훈련도 축소하기로 했다. 동맹도 각자의 국익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중동 문제, 한국의 대미 투자 등 여러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한다. 한국 역시 미국의 정책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동맹 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맹은 서로의 국익을 솔직하게 조정할 수 있을 때 오래간다. 중국에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중국과 경제협력은 확대하되 상호주의와 공급망 안전이라는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외교장관회담에서 양국이 FTA 서비스·투자 협상과 공급망 안정에 협력하기로 한 것은 실용적인 접근이다. 우리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덜 받고 서비스와 투자 분야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면 협상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공급망 안정이라는 말이 중국 의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해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소재 하나, 배터리 원료 하나가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로 막혀 공장이 흔들리는 일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중국과 안정적인 공급선을 유지하는 것과 공급원을 중국 하나에 맡기는 것은 정반대의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탈중국도, 재중국화도 아니다. 중국과 거래하되 중국이 멈춰도 버틸 수 있는 공급망이다. 반도체도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에 중요한 시장이고 한국 기업 역시 중국에 대규모 생산기반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정치적 구호만으로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반면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가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에 놓인 상황에서 안보와 기술유출 문제를 무시한 사업 확대 역시 위험하다. 때문에 분야별 기준이 필요하다. 범용 메모리와 소비재에서는 시장 논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첨단 AI 반도체와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있는 기술에는 보다 엄격한 안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배터리는 중국과 거래하면서 원료 조달국을 넓히고, 핵심광물은 구매계약과 동시에 비축·재활용·대체소재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 북한 문제에서도 중국에 ‘기대할 것’과 ‘기대하지 말 것’을 구분해야 한다. 중국은 북한의 중요한 우방이고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다. 왕 부장은 이번 회담에서 한국과 북한이 평화와 공존의 기회를 찾아가길 바란다며 중국이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대화 복귀에 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중국의 역할을 요청하는 것과 북한 문제를 중국에 맡기는 것은 다르다. 베이징의 대북정책에는 중국 자신의 전략적 이해가 있다. 중국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한국이 원하는 비핵화·평화체제가 모든 지점에서 같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왕 부장 역시 이번 방한에서 한국이 ‘근본적 이익’에 따라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길 희망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공개된 발언이다. 이 말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미국이 한국에 선택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듯 중국 역시 한미동맹이나 한국의 대외정책에 사실상의 선택지를 제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독립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면 그 독립성은 워싱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베이징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국익에 따라 미국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에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주외교다. ‘논어’ 자로편에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려 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동맹이라고 모든 정책이 같을 필요는 없다. 중국과 협력한다고 중국의 전략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 외교다. 모든 사안에서 같은 편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동맹에도, 협력관계에도 건강하지 않다. 오는 11월 선전 APEC은 이를 시험할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적극 검토하고 있고, 왕 부장은 조현 장관의 중국 방문도 제안했다. 관계 복원을 정상회담 사진 한 장으로 끝내지 말고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미리 정리해야 한다. 대중 외교의 성적표는 정상회담 횟수가 아니다. 우리 기업의 시장 접근성이 나아졌는가. 핵심광물과 부품 공급이 더 안정됐는가. 중국 내 한국 기업이 부당한 차별을 덜 받게 됐는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대화를 복원하는 데 중국이 실제로 역할을 했는가. 문화와 관광 분야의 비정상적 장벽이 줄었는가. 이런 구체적인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한미관계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면 된다. 주한미군과 확장억제는 얼마나 안정적인가. 첨단기술 협력에서 한국 기업이 어떤 몫을 얻는가. 막대한 대미 투자가 국내 산업과 일자리에 어떤 결과를 남기는가. 미국의 정책 변화가 한국 기업에 과도한 비용을 떠넘길 때 정부가 얼마나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가를 봐야 한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가운데 서는 기술이 아니다. 사안마다 어디에 서야 국익이 커지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다. 안보에서는 동맹의 신뢰를 지키고, 경제에서는 시장을 넓히며, 공급망에서는 의존을 줄이고, 기술에서는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 북핵 문제에서는 미국과 공조하면서 중국의 역할도 끌어내야 한다. 하나의 문장으로 모든 외교 문제를 설명하려는 순간 현실은 그 문장보다 복잡해진다. 왕 부장의 방한을 친중 외교의 신호로 읽을 필요도, 한미동맹의 균열로 볼 이유도 없다.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해야 할 외교이고, 한미동맹을 굳건히 관리하는 것 역시 해야 할 외교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비로소 외교 노선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편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원칙이 분명하다면 미국에는 동맹으로 당당할 수 있고 중국에는 이웃으로 실용적일 수 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오래된 질문을 버리고, ‘이 선택이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기는가’를 묻는 것. 왕 부장의 5년 만의 방한이 한국 외교에 던진 가장 중요한 숙제다.
2026-08-20 09:0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