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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의 비용을 국민에게 떠넘긴 국회
[경제일보] 국회가 검사의 보완수사권을 없앴다.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보완해야 할 수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찰이 다시 맡고 사건 당사자는 더 오래 기다리게 됐다. 권한을 없애는 데만 서두른 입법이 국민에게 그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경찰이 수사를 마쳐 검찰에 넘긴 사건이라고 해서 모두 기소할 수 있는 상태인 것은 아니다. 계좌 추적이 빠지기도 하고 핵심 참고인을 조사하지 않은 채 송치되기도 한다. 범죄 혐의는 포착했지만 적용할 죄명을 잘못 판단한 사건도 있다. 지금까지 검사는 기록을 검토한 뒤 필요한 조사를 직접 해 빈틈을 메울 수 있었다. 앞으로는 경찰에 다시 수사를 요구해야 한다. 보완수사는 검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경찰 수사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해 기소 여부를 가리는 실무 절차다. 검사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일을 맡을 경찰 인력과 전문성을 먼저 갖춘 뒤 제도를 바꾸는 것이 순서였다. 국회는 거꾸로 갔다. 권한부터 없애고 대책은 시행 뒤에 마련하겠다는 식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검찰이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한 사건이 6만5913건이다. 경찰 수사관 한 명에게 접수되는 사건은 지난해 평균 133.8건에 달했다. 사건은 이미 쌓여 있고 처리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이런 경찰에 연간 10만건이 넘는 보완수사를 더 맡겼다. 인력을 얼마나 늘릴지, 법률 전문성을 어떻게 보강할지, 처리 기간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검사의 보완수사가 없어진다고 사건 처리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경찰 수사가 부족하면 공소청은 보완수사를 요구하고 경찰은 사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돌아온 기록이 여전히 미흡하면 같은 절차가 반복된다. 검사가 직접 확인하면 끝날 일을 두 기관이 기록을 주고받으며 처리하게 된다. 수사와 기소를 나눴다는 정치적 성과 뒤에서 사건 당사자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형사사건에서 시간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폐쇄회로TV 영상은 지워지고 통신·금융 자료의 확보는 어려워진다. 참고인의 기억도 흐려진다. 사기와 횡령 피해자는 형사사건 결과를 기다리느라 손해배상과 재산 환수에 필요한 대응을 미루게 된다. 피의자도 결론 없이 수사 대상에 묶이면 직업과 영업, 사회생활에서 손실을 입는다. 입법자가 잃는 것은 없지만 사건 당사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잃는다. 경찰의 첫 판단을 다른 법률가가 다시 살피는 절차가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화도 유기 사건은 검찰의 보완수사를 거쳐 유기 혐의가 유기치상으로 바뀌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도 보완수사를 통해 성폭행 목적이 확인됐다. 처음 수사한 기관이 놓친 증거와 법리를 다시 검토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사례다. 국회는 이 검증 절차를 없애면서 이를 대신할 수단을 내놓지 못했다. 검사에게 새로 준 ‘사실관계 확인’ 권한은 대안이 되기 어렵다. 검사가 사건 관계인의 말을 듣고 자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확보한 진술과 자료는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 검사가 중요한 진술을 확인해도 경찰이 같은 사람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피해자는 경찰과 검찰을 오가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사건 기록도 다시 움직인다. 보완수사의 이름만 없앴을 뿐 필요한 일과 시간은 고스란히 남겼다. 검찰청은 10월 2일 문을 닫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한다. 중수청의 직급과 인사, 검찰 수사관 6000여명의 배치, 경찰과 중수청의 관할, 공소청과 경찰의 업무 절차를 정해야 한다. 손질해야 할 하위 법령도 900여개에 이른다. 72년간 이어진 형사사법 체계를 뒤엎으면서 현장에서 사건을 맡을 사람과 업무 기준조차 정하지 못한 채 시행일을 못 박았다. 수사기관의 간판을 바꾸고 관할을 나누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건이 어느 기관 소관인지 다툼이 생겼을 때 누가 신속히 결론을 내릴지, 잘못 이첩된 사건을 어떻게 되돌릴지, 보완수사 요구가 지연될 때 누가 책임질지를 정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정부와 국회는 가장 어려운 일은 뒤로 미룬 채 법률 통과를 개혁의 완성처럼 내세웠다. 경찰의 부실 수사를 통제할 장치도 허술하다. 개정법은 경찰이 정당한 이유 없이 보완수사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공소청장이 징계나 직무배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비슷한 제도는 2021년부터 있었지만 실제 직무배제 요구는 한 건에 그쳤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제도를 다시 법전에 적어놓고 책임 통제가 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법안에 국회는 ‘중대한 위법 수사’와 ‘소추재량권의 현저한 일탈’을 공소기각 사유로 추가했다. 무엇이 중대한 위법이고 어느 정도가 현저한 일탈인지 기준도 두지 않았다. 앞으로 정치인과 대형 형사사건 피고인들은 수사 위법과 공소권 남용을 내세워 공소기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법원은 유무죄에 앞서 수사와 기소 과정부터 따로 심리해야 한다. 공소기각 판단이 상급심에서 뒤집히면 사건은 다시 하급심으로 돌아간다. 공소기각 사유 확대는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다는 법안의 취지와도 맞닿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법사위 심사 막판에 들어갔다. 왜 별도 공론화 없이 끼워 넣었는지, 현재 중단된 이재명 대통령 관련 재판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국회는 설명하지 않았다. 여당은 기존 대법원 판례를 법률에 옮겼다고 하지만 판례로 처리할 수 있었던 사안이라면 굳이 지금 조항을 신설한 이유부터 밝혀야 한다. 방탄 입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입법 과정이 그 의심을 키웠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은 검찰청 간판을 내렸다는 사실만으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수사가 더 정확해지고 사건 처리가 빨라졌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경찰의 업무는 늘고 사건은 늦어지며 잘못된 수사를 바로잡을 수단마저 약해진다면 그것을 개혁의 성과로 내세울 수 없다. 국민이 형사사법에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수사와 제때 나오는 결론이다. 수사권을 옮기려면 그 업무를 맡을 인력과 예산을 확보하고 부실 수사를 바로잡을 절차부터 마련했어야 한다. 국회는 경찰을 얼마나 보강할지, 사건이 얼마나 늦어질지, 그 책임을 누가 질지 답하지 않은 채 법부터 통과시켰다. 검찰청을 없앤 날짜는 정치권의 기록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늦어져 피해 회복의 기회를 놓친 국민에게는 그 날짜가 아무 의미도 없다. 국회가 없앤 것은 검사의 권한이지만 국민이 잃는 것은 권리를 구제받을 시간이다. 그 시간을 되돌려줄 방법부터 마련하지 않았다면 이번 입법은 개혁이 아니라 책임의 전가다.
2026-08-0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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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원구성 답보…법사위 싸움에 민생경제 볼모 잡혔다
[경제일보] 22대 국회 하반기 원구성이 또다시 멈춰 섰다. 국회 의장단은 선출됐지만 정작 국회를 굴러가게 할 상임위원장 배분은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에서 막혀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국정과제와 민생입법을 뒷받침하려면 법사위원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힘은 입법의 최종 관문인 법사위를 야당이 맡아야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다고 맞선다. 여기에 정무위원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 주요 경제 상임위원장 배분까지 얽히면서 협상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또 자리 싸움에 갇혔다. 여당은 책임정치를 말하고, 야당은 견제정치를 말한다. 말만 놓고 보면 둘 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정치권의 권력 계산일 뿐이다. 국민에게 더 절박한 것은 대출금리, 장바구니 물가, 전기요금, 일자리, 집값, 세금이다. 국회가 상임위원장 명패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가계의 이자 부담은 줄지 않고 기업의 투자 결정은 미뤄지며 정부 정책은 국회 문턱에서 멈춰 선다. 법사위는 국회 입법의 수문장이다. 각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쳐 본회의로 간다. 그래서 여야가 법사위원장을 놓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여당은 법사위를 야당에 넘기면 국정과제 입법이 막힐 수 있다고 본다. 야당은 여당이 법사위까지 장악하면 입법 독주를 막을 장치가 사라진다고 우려한다. 양쪽 모두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러나 법사위가 입법 품질을 높이는 관문이 아니라 정쟁의 병목으로 변질된다면 그 논리는 국민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 상임위 공백이다. 정무위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금융시장과 공정거래 질서를 다루는 핵심 상임위다. 재경위는 세제와 재정, 거시경제 정책을 좌우한다. 산자위는 반도체, 에너지, 통상, 산업경쟁력의 최전선이다. 예결위는 정부 예산의 마지막 문턱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구조개혁과 경기 대응이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다. 자본시장 밸류업, 가계부채 관리,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정리, 금융소비자 보호, 소상공인 지원, 반도체·AI·에너지 투자, 세수 관리, 민생 예산 조정이 모두 국회 논의와 맞물려 있다. 국회가 멈추면 경제정책도 멈춘다. 그 피해는 가장 먼저 가계로 간다. 금융 취약계층 지원, 서민금융 보강, 전세사기 피해 지원, 소상공인 채무조정, 통신비·에너지비 부담 완화 같은 민생 법안은 상임위가 열려야 논의된다. 여야가 법사위 명패를 두고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서민은 이자 고지서를 먼저 받는다. 국회의 하루 공전은 정치권에는 협상 전략일지 몰라도 가계에는 생활비 압박이다. 민생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가 정작 민생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기업도 피해자다. 기업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세법이 어떻게 바뀔지, 산업지원 예산이 유지될지, 금융규제가 풀릴지 조여질지, 노동·환경·공정거래 규정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알 수 없으면 투자를 미룬다. 투자가 늦어지면 고용도 늦어진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AI 데이터센터, 에너지 인프라처럼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한 산업은 국회와 정부의 정책 신호에 민감하다. 정치권이 상임위 배분을 놓고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해외 경쟁자는 투자 속도를 높인다. 국회의 정쟁은 기업에는 비용이고 국가경제에는 기회 손실이다. 정부도 발목이 잡힌다. 정부는 예산과 법률이라는 두 바퀴로 움직인다.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도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종이 위 계획에 머문다. 경기 대응책을 내놓아도 입법과 예산 뒷받침이 없으면 효과는 반감된다. 정부가 국회를 우회하려 하면 행정 독주 논란이 생기고 국회가 정부를 무조건 막으면 국정 마비가 된다. 여당은 다수의 힘을 절제해야 하고 야당은 견제의 이름으로 국회 정상화를 볼모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대치는 어느 한쪽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양쪽 모두 국민경제 앞에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논어>에는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 있다. 국회가 지금 밝아야 할 것은 자리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이다. 상임위원장 자리가 권력 배분의 전리품처럼 취급되는 순간 국회는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당 간 점령지가 된다. 법사위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법사위가 국민을 위해 작동하느냐다. 정무위가 어느 당 몫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시장 안정과 소비자 보호, 공정거래 질서가 제대로 논의되느냐다. 정치권은 원구성 협상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이 보기에는 어렵다기보다 염치가 없어 보인다. 국회는 다수결만으로 움직여서도 안 되지만 소수의 발목잡기로 멈춰서도 안 된다. 다수당은 책임 있게 의제를 추진하되 야당의 견제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 야당은 견제하되 국회 공백을 협상 카드로 써서는 안 된다. 상임위원장 배분은 정치적 협상의 대상일 수 있지만 국회 마비는 협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계산해야 할 것은 의석수가 아니라 손실이다. 국회가 하루 늦어질 때 민생 법안은 얼마나 밀리는가. 금융시장 불확실성은 얼마나 커지는가. 기업 투자 결정은 얼마나 지연되는가. 정부 예산 심사는 얼마나 압박받는가. 이런 비용표를 국민 앞에 내놓는다면 여야가 지금처럼 쉽게 강대강 대치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국민은 법사위원장 이름보다 자신의 대출금리를 더 걱정한다. 정무위원장 배분보다 금융사고와 불완전판매 방지를 더 원한다. 예결위원장 몫보다 내년 예산이 어디에 쓰일지를 더 궁금해한다. 기업은 어느 당이 상임위를 차지했는지보다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원한다. 정부는 정쟁의 승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국정 동력을 필요로 한다. 국회는 싸우라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싸움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문을 열고 회의를 열고 법안을 올리고 예산을 따져야 한다. 그다음에 치열하게 다투면 된다. 문도 열지 않은 채 열쇠를 누가 쥘지만 다투는 정치는 국민에게 설명할 수 없다. 국회를 열지 않는 정치는 견제가 아니라 직무유기다. 22대 국회 하반기 원구성 협상은 단순한 자리 싸움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정치 리스크를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다. 여야가 법사위와 경제 상임위를 놓고 끝까지 힘겨루기를 벌인다면 그 비용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이 낸다. 가계는 이자로 내고 기업은 투자 지연으로 내며 정부는 정책 실기라는 이름으로 낸다. 경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국회가 멈춰도 시장은 움직이고 국회가 싸워도 국민의 청구서는 날아온다. 여야가 정말 민생을 말하려면 원구성부터 끝내야 한다. 권한을 나누는 협상보다 책임을 나누는 합의가 먼저다. 국회의 주인은 정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 상식을 잊는 순간, 원구성 싸움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위험이 된다.
2026-06-29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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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강국의 첫 조건은 구호가 아니라 전기다
[경제일보]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국가 핵심사업으로 규정하고 입지 규제와 인허가 절차를 완화하며 세제 지원의 길을 여는 내용이다. 늦었지만 필요한 입법이다. 인공지능 경쟁은 더 이상 연구실의 알고리즘 경쟁만이 아니다.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학습시키고 누가 더 안정적으로 추론 서비스를 돌리며 누가 더 싼 비용으로 컴퓨팅 자원을 확보하느냐의 싸움이다. 그 중심에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그러나 이번 법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전력 직접구매계약, 이른바 PPA 특례가 제외됐다. 당초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한 안에는 관련 특례가 포함됐지만 법사위 논의 과정에서 빠졌다. 정부는 비수도권 전력계통영향평가 면제, 인허가 절차 단축, 규제 완화 등은 남겼다. 그러나 데이터센터 산업의 심장에 해당하는 전력 조달 문제는 미완으로 남았다. 법안은 통과됐지만 핵심 병목은 그대로인 셈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이름만 데이터센터일 뿐 실상은 전기를 먹고 연산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과거의 데이터센터가 정보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창고에 가까웠다면,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GPU와 서버가 돌아가는 산업 설비다. 전통적인 인터넷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높은 전력 밀도와 냉각 능력, 안정적 송전망, 예비 전원 체계를 요구한다. 대형 AI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소도시 규모의 전력을 요구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기반은 데이터이지만 그 데이터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전기다. 이 상식을 외면한 채 “AI 3강”을 말하는 것은 허공에 성을 짓는 일이다. 반도체도 전기가 없으면 멈추고 배터리도 전기가 없으면 생산할 수 없으며 AI도 전기가 없으면 학습하지 못한다. 산업정책의 언어는 그럴듯해졌지만 전력정책의 현실은 여전히 더디다.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겠다고 말하면서 송전망은 누가 깔 것인지, 발전원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지역 주민의 수용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전기요금 체계는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흐릿하다. 물론 PPA 특례를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기후에너지부가 전력망 부담을 우려한 데는 이유가 있다. 특정 대형 사업자에게 전력 조달 특례를 열어줄 경우 전력계통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값싼 전기를 대기업과 빅테크가 먼저 가져가고 그 부담이 일반 국민과 중소기업 전기요금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걱정도 가볍게 볼 수 없다. AI 산업을 키우자고 전력시장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특례는 산업을 살릴 수도 있지만 잘못 설계하면 새로운 특권이 된다. 그렇다고 전력 문제를 뒤로 미룬 채 법안 통과만 서두르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다. 산업계가 원하는 것은 무제한 특혜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전력 조달 체계다. 어느 지역에 들어가면 얼마의 전력을 언제부터 쓸 수 있는지, 어떤 조건으로 재생에너지나 LNG 발전과 연계할 수 있는지, 송전망 증설 비용은 누가 어떻게 부담하는지, 전기요금은 어떤 원칙으로 적용되는지 알아야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크면 기업은 한국을 기다리지 않는다. 데이터센터는 전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세계는 이미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전력 인프라와 AI 클러스터를 묶어 투자한다. 중동은 풍부한 에너지와 자본을 앞세워 AI 컴퓨팅 허브를 꿈꾼다. 일본은 지방 거점과 전력망을 연결해 데이터센터 유치에 나섰다. 유럽은 친환경 전력과 데이터 주권을 결합한다. 이 경쟁에서 한국이 내세울 것은 반도체 제조 능력, 통신 인프라, 우수한 엔지니어, 빠른 산업 실행력이다. 여기에 안정적 전력 공급이 빠지면 경쟁력은 절반이 된다. AI 데이터센터 정책은 산업정책이면서 에너지정책이고, 지역정책이며, 안보정책이다. 국가 AI 모델을 만들고 금융·의료·제조·국방 데이터를 처리하며 기업의 AI 전환을 떠받치는 인프라가 외국 클라우드와 해외 데이터센터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기술 주권의 공백이다. 소버린 AI를 말하려면 소버린 컴퓨팅이 있어야 하고 소버린 컴퓨팅을 말하려면 소버린 전력 전략이 있어야 한다. 전기는 AI 주권의 하부 구조다. 이번 법안이 비수도권 입지를 강조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수도권에 데이터센터가 몰리면 전력망과 부동산, 냉각수, 주민 수용성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다. 지역으로 분산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 이전은 구호만으로 되지 않는다. 지방에 땅이 있다고 데이터센터가 서는 것이 아니다. 전력이 있어야 하고, 송전망이 있어야 하며, 통신망과 냉각 조건, 전문 인력, 지방정부의 행정 역량이 있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력 없는 지역에 깃발만 꽂으면 또 하나의 보여주기 사업이 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AI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얼마나 지을 것인지부터 국가 전력수급계획과 맞춰야 한다.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소, 냉각 인프라, 통신망, 산업단지를 따로따로 볼 일이 아니다. AI 클러스터는 전력 클러스터와 함께 설계돼야 한다. 산업부처는 유치 실적을 말하고 에너지 부처는 부담을 말하며 지자체는 기대만 말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국가 차원의 조정자가 필요하다. 전기요금 원칙도 세워야 한다. AI 데이터센터가 국가 전략산업이라고 해서 값싼 전기를 무한정 보장할 수는 없다. 전력망 증설 비용과 안정성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 대형 사업자는 필요한 비용을 정당하게 부담하고 국가는 그 대신 인허가와 계통 접속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국민 부담으로 기업 투자비를 보조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반대로 모든 부담을 기업에 떠넘기고 행정 절차만 복잡하게 두는 것도 투자를 막는다. 원칙은 간단하다. 혜택을 받는 자가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고 국가는 공정한 룰을 제공해야 한다. 환경 문제도 피할 수 없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기와 물을 쓴다. 탄소 배출과 냉각수 문제를 외면하면 지역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환경 논리만 앞세워 모든 투자를 막을 수도 없다. 재생에너지, 고효율 냉각, 폐열 활용, 분산형 전원, LNG와 저장장치의 조합을 현실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탄소중립과 AI 경쟁력은 서로를 부정하는 목표가 아니다. 기술과 비용을 놓고 냉정하게 조합해야 할 국가 과제다. 정치권도 책임을 나눠야 한다. AI 산업을 키운다며 법안을 만들고 사진을 찍는 일은 쉽다. 어려운 일은 전력망을 깔고, 주민을 설득하고, 비용 분담의 원칙을 세우고, 부처 간 이해를 조정하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첨단산업 유치 공약은 넘치지만 정작 변전소와 송전선로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뒤로 물러선다. 그 결과 한국의 산업정책은 화려한 비전과 낡은 인프라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전력 해법 없는 특별법은 반쪽짜리다. 인허가를 빠르게 해도 전기가 없으면 서버는 돌지 않는다. 세제를 깎아줘도 송전망이 없으면 투자는 오지 않는다. 국가 핵심사업으로 지정해도 전력 조달이 불확실하면 기업은 해외로 간다. 이것이 기본이고 상식이다. 한국은 반도체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 AI 시대에는 반도체를 넘어 컴퓨팅 인프라를 가져야 한다. 칩을 잘 만드는 나라에서 칩을 가장 잘 쓰는 나라로 가야 한다. 그러려면 전기, 냉각, 통신, 보안, 데이터, 인재가 한 묶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AI 강국론은 슬로건이 된다. 정부와 국회는 이번 법안 통과를 성과로 포장하기보다 빠진 부분을 직시해야 한다. 전력 특례를 다시 넣느냐 빼느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에 맞는 전력시장, 송전망 투자, 지역 입지, 비용 분담, 환경 기준, 데이터 주권의 전체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 법 하나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본 체계를 바꾸는 일이다. AI 강국의 첫 조건은 말이 아니다. 전기다. 전기가 있어야 데이터가 돌고, 데이터가 돌아야 모델이 크고, 모델이 커야 산업이 바뀐다. 전력 없는 AI 전략은 모래 위의 전략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구호가 아니라 더 단단한 기반이다. 국회와 정부가 그 상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26-05-07 15: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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