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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완 "기업승계, 산업 공급망 안정과 직결"…우리은행, 3조원 투입 구상
[경제일보] 정진완 우리은행장은 "우리은행은 기업의 폐업과 사업 축소를 방지하고 일자리와 기술, 산업 기반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생산적 기업승계 지원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정진완 우리은행장은 1일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에서 진행된 '생산적 기업승계'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승계는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임직원의 고용 유지와 기술력 보존, 산업 내 공급망 안정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 과제"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 행장은 중소기업 대표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가 단순한 상속 문제를 넘어 기업 생태계와 공급망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봤다. 제조업 중심 중소기업이 핵심 기술을 보유한 경우가 많아 승계 실패가 폐업으로 이어지면 대기업과 산업 생태계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 행장은 "기업승계는 단순히 1~2년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을 보고 관리해야 하는 과제"라며 "CEO들과 면담하고 임직원들과도 소통하면서 어떤 방향이 기업과 산업 생태계에 바람직한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10년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업승계 문제를 연구하고 제안해 올바른 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향후 5년간 3조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향후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외국계 사례처럼 펀드 조성도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성후 우리은행 기업승계지원센터 부장은 기업승계지원센터 현황을 소개하며 "생산적 기업승계는 중소기업의 폐업이나 사업 중지를 방지하고 승계를 통해 기업의 기술력 보존, 고용 안정, 공급망 안정성 강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2월 은행권 최초로 기업승계지원센터를 신설하고 회계, 세무, 인수합병(M&A) 분야 전문가를 중심으로 중소·중견기업의 승계를 지원하고 있다. 센터는 승계 지연과 후계자 부재로 인한 일자리 감소, 기술 단절을 막기 위해 경영권 이전을 넘어 고용 안정과 공급망 유지까지 고려한 컨설팅을 제공한다. 우리은행 기업승계지원센터는 총 554개 기업과 업무협약을 맺고 이 중 102곳에 중장기 승계전략, 금융솔루션, 사후 경영 안정화 등을 포함한 컨설팅을 제공했다. 협약 기업 대표자는 50세 이상이 90%를 넘는 등 고령화가 뚜렷했고 자녀 승계를 희망하는 비중이 52.7%로 가장 높았으나 승계 방식을 정하지 못한 기업도 43.7%에 달했다. 센터는 자녀 승계가 가능한 기업에는 가업상속공제와 증여세 특례 등을 고려한 전략을 제시하고 후계자가 없거나 자녀 승계가 어려운 기업에는 MBO와 EBO 등 임직원 승계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기업승계가 개별 기업의 생존을 넘어 고용 유지와 매출 기반 보전, 공급망 안정으로 이어져 지역경제와 산업 생태계에도 파급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우리은행이 향후 5년간 매년 100개 기업씩 총 500개 기업의 승계를 성공시킬 경우 고용 1만명 유지, 매출 기반 10조7000억원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해외 시장에서는 후계자 부재 문제를 금융사의 신규 사업으로 확장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임재호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실장은 "일본 금융회사들은 후계자 부족이라는 사회적 난제를 사업승계 펀드와 MBO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하며 위기를 시장으로 바꿔냈다"며 "국내에서도 기업승계 시장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일본 금융회사들이 사업승계 펀드, 핸즈온 컨설팅, MBO 전용 펀드 등을 통해 중소기업 승계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친족 승계 비중이 줄고 임직원 승계와 제3자 M&A가 확대되면서 금융회사가 지역경제 인프라 역할을 맡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함병훈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친족 간 기업승계 분쟁 사례를 통해 사전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상속 과정에서 경영권 분쟁이 기업 지배구조 갈등으로 확대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창업주의 승계 구도 정리가 미흡하거나 상속세 재원 마련이 부족할 경우 기업 존속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국내에서 임직원 승계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세제와 금융지원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행 가업상속공제와 증여세 과세특례는 자녀 승계를 전제로 설계돼 있어 임직원이 지분을 인수하거나 증여받는 경우에는 세제 혜택을 받기 어렵다. 오너가 임직원에게 지분을 매도할 경우 양도소득세 부담이 발생하고 낮은 가격에 넘기면 증여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함 변호사는 "기업승계는 사업의 지속과 기술력 보존, 종업원들의 고용 유지, 전체 산업의 공급망 안정 관리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발상의 전환을 달리해 사업을 가장 잘 아는 임직원들로 승계 대상을 전환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현행 법령상 존재하는 여러 제약을 고려하면 임직원 승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관련 법령 개정을 통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홍승환 삼일회계법인 파트너는 중소기업 제3자 M&A가 기업승계의 주요 해법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3년간 국내 중소기업 M&A는 연평균 385건, 약 12조3000억원 규모로 전체 M&A 거래의 78.6%를 차지했다. 경영자 고령화와 승계계획 부재로 매도 수요가 늘고 있으며 매수자 측면에서는 전략적 투자자와 재무적 투자자, 중견기업 등이 기술 내재화와 신사업 진출을 위해 인수 주체로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홍 회계사는 "오너 고령화와 승계 이슈가 맞물리면서 중소기업 M&A 시장이 확대되는 초입에 있다"며 "인수자 풀까지 넓어져야 기업승계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이번 간담회를 계기로 기업승계를 생산적 금융의 핵심 지원 분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기업승계를 단순한 상속·증여 문제가 아닌 법률·세무·자금조달·지배구조·M&A 전략이 맞물린 종합 과제로 보고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삼일회계법인, 기술보증기금 등과 협업해 기업별 맞춤형 지원 체계를 강화할 계획이다.
2026-06-01 1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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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산업 수도' 외치는 후보들…표심 가를 '실행력'
[경제일보] 6·3 지방선거가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광역단체장 선거의 중심 의제는 복지와 교통을 넘어 지역 산업의 생존전략으로 확장되고 있다. 경기에서는 반도체, 경남에서는 우주항공·조선, 울산에서는 자동차·석유화학의 인공지능 전환, 충남에서는 디스플레이·철강·제조업의 AI 접목, 전북에서는 새만금 미래산업 벨트가 승부처로 떠올랐다. 특히 후보마다 ‘미래산업 수도’를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유권자들의 시선은 실제 투자 규모와 기업 유치 가능성, 인프라(전력·용수·부지) 및 전문인력 확보, 규제 권한 등 누가 더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추었느냐에 쏠리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산업 공약이 커진 배경은 지역경제가 더 이상 중앙정부 예산 배분만으로 버티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이차전지, 우주항공, 조선, 석유화학, 철강 같은 전략산업은 모두 국가 경쟁력의 축이지만, 실제 공장과 항만, 산단과 주거지는 지방정부 관할 안에 있다. 중앙정부가 큰 방향을 잡아도 인허가, 산단 조성, 도로·철도 연결, 인재 정착, 민원 조정은 광역단체장의 실행력에 좌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도 반도체 클러스터, 승패 가를 ‘병목 타개’ 가장 치열한 산업 공약 전장은 경기도지사 선거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후보와 국민의힘 양향자 후보는 모두 경기남부 반도체 클러스터 완성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후보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GTX 조기 개통, 신도시·구도심 재정비 등 큰 틀에서는 유사한 방향을 보이고 있지만,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추 후보는 여당 후보로서 추진력과 행정 조정 능력을 강조하고, 양 후보는 반도체 현장 경험과 첨단산업 전문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경기 반도체 공약의 본질은 ‘누가 더 많이 말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병목을 풀 수 있느냐’다. 추 후보는 경기남부 8개 시·군 후보들과 K-반도체 클러스터 공동 공약을 발표하며 설계·소부장·후공정까지 권역 안에서 완결되는 생태계 청사진을 제시했다. 양 후보는 도민 1인당 GRDP 1억원, 고연봉 일자리 10만개, 권역별 첨단산단 조성 등을 제시하며 ‘돈 버는 경기도’를 강조했다. 다만, 양측 모두 전력망 확충, 용수 확보, 수도권 규제 완화, 인력 주거대책 없이는 공약이 클러스터 구호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경남, 우주항공·조선-앵커 산업 시너지 경쟁 경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후보와 국민의힘 박완수 후보는 모두 우주항공청이 있는 사천·진주권을 미래 성장축으로 보고 있다. 김 후보는 전남 고흥, 사천·진주·창원, 여수·광양, 하동까지 연결하는 남해안권 우주항공 산업벨트를 구상하고 있는 반면, 박 후보는 사천을 중심으로 우주항공복합도시를 집중 육성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창원에는 기계·방산·원전 제조 기반이 있고, 거제에는 조선소가 있다. 또 사천에는 우주항공청과 항공산업 기반이 있다. 박 후보는 경남을 중부·동부·서부·남부·북부 5개 권역으로 나눠 창원은 제조AI·SMR·방산, 동부권은 물류·첨단소재, 서부권은 우주항공, 남부권은 조선·해양플랜트로 육성하겠다는 권역별 전략을 제시했다. 반면, 김 후보는 부울경 메가시티와 청년 일자리, 광역 교통망을 결합해 산업 인력의 정착 조건을 개선하겠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울산, 신산업 유치보다 절박한 주력산업 ‘AI 전환’ 울산은 산업 공약의 성격이 다른 지역과 다소 차이가 있다.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는 문제보다 기존 주력 산업의 생존 및 전환이 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은 울산을 산업수도로 만든 기반이지만,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 탄소 규제, 전기차 전환이 동시에 밀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울산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국민의힘 김두겸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김상욱 후보는 서로 다른 AI 활용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김두겸 후보는 지난 4년간 기업 투자유치 36조원, 개발제한구역 해제, 분산에너지법 제정 등을 성과로 내세우며 AI 수도, 소버린AI 집적단지, 수중데이터센터, 양자융합원, UAM, K-배터리, 암모니아 벙커링, 북극항로 거점항만을 제시했다. 반면, 김상욱 후보는 노동 중심 산업AX, 울산형 직업전환 보장제, 청년AX아카데미, 숙련노동자 AI 동행사업, 석유화학 안전진단 특화 SLLM 모델 개발을 내세우고 있다. 김두겸 후보의 공약은 현직 시장의 연속성과 대형 프로젝트 추진력이 강점이다. 다만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도시, 항만·에너지 허브 구상은 전력 수급과 주민 수용성, 국가계획 반영 여부가 관건이다. 김상욱 후보의 노동 중심 AX는 산업전환 과정에서 일자리 충격을 줄이는 장점이 있지만, 기업이 실제 설비투자와 데이터 개방에 참여할 유인이 충분한지가 숙제다. 울산의 진짜 승부처는 ‘신산업 유치’보다 ‘구산업의 고부가 전환’이다. 충남, 제조업 AI 접목…기업 유치-지역 정착 간극 ‘숙제’ 충남은 경기와 함께 반도체·디스플레이·철강 공급망의 후방을 맡는 산업권이다. 이에 충남도지사 선거에 나선 민주당 박수현 후보와 국민의힘 김태흠 후보는 모두 AI와 충남·대전 통합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박 후보는 중소기업과 협력사를 위한 AI 원스톱 지원체계, 직무 전환 노동자 재교육 수당, 생활밀착형 AI 서비스를 내세웠고, 김 후보는 AI 전문인력 3만명 양성, 첨단 반도체 후공정 생산거점, 천안 종축장 글로벌 빅테크 기업 유치, 민선 9기 80조원 투자유치를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박 후보는 천안·아산의 반도체·디스플레이·모빌리티, 당진·서산의 석유화학·제철·제조 등에 AI를 접목하고 AI 오픈랩, GPU·NPU 클라우드 인프라, 현장형 AX 인재 양성을 제시했다. 김 후보는 민선 8기부터 추진해온 투자유치와 베이밸리 구상을 바탕으로 대기업·빅테크 유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 공약들의 관전 포인트는 AI가 실제 제조 현장에 얼마나 스며들 수 있느냐다. 표면적으로 AI 교육이나 인재 양성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 중소 제조업체들이 데이터를 정리하고 시스템을 바꾸며 인력을 재교육하기까지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따라서 충남의 산업 공약은 ‘기업 유치’와 ‘지역소득 정착’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구체적 대안이 마련될 때 완성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전북, ‘기회의 땅’ 새만금 ‘실질적 대안’ 관건 전북도지사 선거는 가장 큰 변동성을 안고 있는 선거판이다. 새만금은 부지와 항만, 공항, 재생에너지, 대규모 산업단지를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동시에 전력망, 기반시설, 인허가, 기업 수요라는 벽을 넘어야 한다. 민주당 이원택 후보와 무소속 김관영 후보는 모두 새만금을 전북 성장의 핵심 무대로 삼는다. 이 후보는 전북성장공사 설립과 체감 성장을 내세웠고, 김 후보는 대기업 15개, 투자 50조원 유치를 목표로 제시했다. 김 후보의 강점은 현직 도정에서 축적한 투자유치 성과를 확장하겠다는 실행 서사다. 그는 피지컬AI, 수소, 방산, 금융중심지, 새만금 미래산업 전진기지를 앞세워 향후 4년간 50조원 투자유치와 대기업 15개 유치를 약속했다. 이 후보는 새만금 200조원 투자유치, 300만평 규모 AI반도체 메가클러스터,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관련 기업 유치 구상을 내세우며 중앙정부·여당과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다만, 두 공약 모두 전북 자체 산업 생태계의 두께와 전문인력 공급 능력을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결국 이번 지방선거의 산업정책 승자는 산업 이름을 가장 많이 외친 후보가 아니다”라며 “유권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기업 생태계와 연결되는지, 중앙정부 권한이 필요한 규제를 풀 현실적 통로가 있는지, 전력·용수·항만·철도·주거 같은 인프라의 우선순위가 분명한지, 지역 대학과 직업교육이 산업 인력 수요를 따라갈 수 있는지, 투자유치가 지역소득과 청년 정착으로 이어지는 장치를 갖췄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번 선거는 사실상 대한민국 산업지도의 다음 4년을 결정하는 선거가 됐다”며 “‘무엇을 유치하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후보들의 막판 설득력이 선거 결과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2026-05-31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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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끝났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경제일보] 판결문은 남았지만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휴일에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법원으로 향했던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다음 날 새벽 법원 청사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사회적 관심이 컸고 판결 전후로 정치적 해석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재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멈춰야 할 것은 단정이다. 고 신종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마지막 선택을 특정 재판이나 특정 판결과 곧바로 연결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유서에는 김건희 여사 재판과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가까운 동료들조차 사정을 알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사망 원인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죽음의 이유는 남은 사람들이 편한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을 정치적 해석의 재료로 삼는 순간 고인의 마지막은 다시 진영의 소음 속에 묻힌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다. 사망 원인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여 있던 업무 환경이 적정했는지는 별개의 검토 대상이다. 원인을 단정하지 않는 태도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따져보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고인은 서울고법 형사15-2부 재판장으로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들을 맡았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 항소심도 그중 하나였다. 서울고법 형사1부가 내란 사건 전담 재판부로 지정되면서 기존 주요 사건들이 다른 재판부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고인이 속한 재판부의 부담도 커졌다는 말이 법원 안팎에서 나왔다. 사회적 관심 사건은 사건 수 하나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록이 두껍고 쟁점이 복잡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무겁지만 부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일 하나를 잡아도 해석이 붙고 증거 판단 하나에도 정치적 의미가 덧씌워진다. 법정 안에서는 증거와 법리로 다투지만 법정 밖에서는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목소리들이 판결을 기다린다. 판사가 어느 한쪽의 기대와 다른 결론을 내리면 판결문은 사라지고 판사 이름이 먼저 불려 나온다. 항소심 재판장은 1심 결론을 다시 읽는 자리가 아니다. 사실인정의 빈틈, 증거능력의 경계, 공모관계의 추론, 양형의 균형을 다시 따져야 한다. 특히 1심 판단을 일부 뒤집는 판결은 부담이 더 크다. 판결문 한 문장은 상고심의 검증과 여론의 공격을 동시에 견뎌야 한다. 법률가에게는 충분히 다툴 수 있는 쟁점도 정치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배신과 응징의 문제로 바뀐다. 법리 판단은 줄어들고 의도 추궁이 앞선다. 김건희 여사 사건 항소심 판결도 법률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1심과 달리 일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부분은 상급심에서 다시 다퉈질 수 있다. 그것이 재판 절차다. 그러나 판결 비판은 판결문 안의 논리와 증거 판단을 향해야 한다. 판사를 향해 정치적 의도를 추정하거나 개인을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흘러가면 사법 감시는 제 기능을 잃는다. 재판의 독립은 법관이 비판받지 않을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동시에 법관이 진영 정치의 표적이 되어도 괜찮다는 뜻도 아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그러나 판결을 쓰는 사람의 고통까지 판결문에 적히지는 않는다. 선고가 끝나면 사람들은 결론만 본다. 유죄냐 무죄냐, 1심을 유지했느냐 뒤집었느냐, 형이 무겁냐 가볍냐만 남는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재판부가 어떤 기록을 읽고 어떤 문장을 고치고 어떤 부담을 견뎠는지는 법정 밖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법관의 직업적 숙명이라고 넘겨온 그 지점에 한국 사법의 오래된 문제가 있다. 법원은 오랫동안 성실한 법관의 밤샘 노동을 제도의 여력처럼 써왔다. 기록을 집으로 가져가고 주말에 법원에 나오고 판결문을 몇 번이고 고치는 일은 법관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성실한 법관이 많다는 사실은 제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제도가 업무 처리 능력으로 계산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한계는 무너진다. 법관의 독립은 고립과 다르다. 외부 권력과 여론에서 벗어나 판단하라는 말은 그 무게를 혼자 견디라는 뜻이 아니다. 독립된 판단을 가능하게 하려면 조직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재판부에는 그에 맞는 인력과 시간과 행정 지원이 따라야 한다. 사건 배당은 균형을 가져야 하고 일정 조정은 현실을 반영해야 하며 법관의 건강 이상 신호를 확인하는 장치도 있어야 한다. 판사를 혼자 두면서 독립을 말하는 것은 독립의 의미를 좁게 읽는 것이다. 고인은 불면증 증세가 심각했지만 재판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처방받고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은 무겁다. 판사가 자신의 건강보다 재판 차질을 먼저 걱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직업윤리로 보면 책임감일 수 있다. 조직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 신호다. 재판을 책임지는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업무가 계속 굴러가야 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들여다봤어야 할 문제다. 판사들은 자신의 부담을 밖으로 잘 말하지 않는다. 판결로 말해야 한다는 직업 문화가 강하고 법원 내부 사정을 드러내는 일도 조심스러워한다. 법원 조직은 때때로 그 침묵을 안정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견딜 만한 것은 아니다. 침묵은 법관 사회의 미덕일 수 있지만 동시에 위험을 늦게 발견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판사가 무너지는 순간이 돼서야 조직이 움직인다면 이미 늦다. 서울고법이 이번 일을 계기로 법관들의 실질적인 업무 부담 경감과 제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리기로 한 것은 필요한 조치다. 다만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법원은 추상적인 업무 경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준을 내놓아야 한다. 사회적 관심 사건의 배당 원칙, 고난도 형사사건 담당 재판부의 사건 수 조정, 재판연구 인력의 보강, 판결문 작성 부담 완화, 장기 미제 사건과 긴급 사건의 우선순위 조정 기준이 필요하다. 법관의 정신건강 관리도 복지 차원을 넘어 재판 안전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정치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권은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법원을 공격하고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같은 법원, 같은 절차, 같은 법관을 두고 결론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사법부 독립을 말한다. 판결 비판은 가능하다. 정치권도 판결에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법관 개인을 향해 정치적 낙인을 찍는 일은 다르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압박이다. 정치권의 언어가 재판을 압박한다면 언론의 보도 방식은 그 압박을 키우거나 줄인다. 사회적 관심 재판을 보도할 때 법리보다 파장을 앞세우고 쟁점보다 진영의 반응을 먼저 배치해온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판결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채 결론만 뽑아 정치적 의미를 붙이는 보도는 재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일에 가깝다. 법원이 국민을 설득하려면 판결문이 더 친절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도 재판을 전달하려면 최소한 판결의 문맥과 법리의 뼈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법 불신이 커진 시대에 법원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판결문은 더 치밀해야 하고 절차는 더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사법 불신이 법관 개인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사를 공격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판부의 의도를 단정하는 문화는 결국 법원을 더 약하게 만든다. 한 판사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사인을 추정하는 일이 아니다. 고인을 특정 정치 사건의 상징으로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이제 질문은 사망 원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향해야 한다. 주요 재판이 왜 소수 재판부에 집중되는지, 사회적 관심 사건을 맡은 판사가 왜 외부 비난과 내부 부담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지, 법관의 건강 문제가 왜 재판 차질이라는 말 앞에서 뒤로 밀려왔는지 따져야 한다. 고인의 마지막 마음은 누구도 대신 말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법관 한 사람이 주요 재판의 무게, 조직 내부의 부담, 외부의 시선, 건강의 한계 속에서 홀로 오래 서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사법부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해야 할 일은 추모의 말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재판을 맡은 사람을 지키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재판도 지켜진다. 재판은 국가가 시민에게 행사하는 가장 무거운 권한 중 하나다. 그래서 판사는 냉정해야 하고 독립적이어야 하며 비판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판사를 고립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법정의 권위는 판사의 침묵과 희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건 배당, 충분한 지원, 절제된 공론장, 판결 비판과 인신공격을 구별하는 사회적 감각 위에서 유지된다. 재판은 끝났다. 판결문은 남았다. 그러나 그 판결문을 쓴 판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 문장 앞에서 법원은 업무 부담을 말해야 하고 정치권은 판결 비판의 선을 돌아봐야 하며 언론은 재판을 소비해온 방식을 점검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누구의 책임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죽음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26-05-30 1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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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신기루 세수', 미래 산업의 초석으로만 써야 한다…경제일보 국회 정책 간담회서 다수 의견
[경제일보] 반도체 경기 회복이 한국 재정에 유례없는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폭발, D램 가격 반등이 맞물리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실적이 수직 상승한 결과다. 이에 따라 정부 세수에도 예상치 못한 거대한 여력이 생기며 이른바 ‘초과세수’ 활용 방안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모처럼 찾아온 재정 여유를 두고 빚을 갚을 것인지, 국민에게 나눌 것인지, 아니면 미래 성장에 투자할 것인지를 둘러싼 백가쟁명식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27일 본지가 개최한 국회 정책 간담회에서도 노사와 전문가, 정관계 인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초과이익 환류 방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이날 논의의 결론은 비교적 분명했다. 이번 초과세수는 단 한 푼도 일회성 소비나 선심성 복지 지출로 소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직 미래 세대의 생존과 국가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생산적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재정 운용의 기본 원칙이자 상식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무엇보다 이번 반도체 호황은 우리 기업들이 압도적 생산 경쟁력만으로 만들어낸 결과라기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AI 수요 급증에 따른 메모리 가격 상승 효과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냉정하게 시장을 돌아보면 위기 신호도 적지 않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D램 시장 점유율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고, 대만과 미국 등 경쟁국 역시 천문학적 설비 투자를 통해 공급 확대에 나서고 있다. 공급 물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순간 현재의 가격 상승세는 언제든 꺾일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사이클 산업이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영구적 구조 세입으로 착각해 현금성 지원이나 포퓰리즘 재원으로 활용한다면, 업황이 꺾이는 순간 재정 부담은 고스란히 미래 세대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물론 AI와 첨단 산업 중심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K자형 양극화’를 외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고소득층과 첨단 산업 종사자만 혜택을 누리고 임시·일용직과 자영업자들이 소외되는 현실 역시 분명한 과제다. 다만 전 국민 대상 현금 살포나 단기 소비 지원은 재정 효율성만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실제 충격을 받은 취약계층에 한정한 선별적·집중적 복지가 보다 현실적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기업 초과이익의 기계적 분배론이나 단순 국채 상환 중심 접근 역시 한계가 있다. 지금 한국 경제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이미 2% 아래로 하락하고 있으며 저성장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초과세수를 단순 소비로 소진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자산을 현재 세대가 앞당겨 사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AI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생산시설뿐 아니라 첨단 패키징, 전력망 구축, 데이터센터 인프라, 핵심 인재 양성,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등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 AI와 로봇,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차세대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전략적 투자도 병행돼야 한다. 특히 특정 산업에 전체 수출의 30% 이상을 의존하는 현재의 구조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취약점 가운데 하나다. 이번 반도체 초과세수는 단순한 ‘공돈’이 아니다. 다음 산업 패권 경쟁에 대비하기 위한 마지막 전략 자산에 가깝다. 정치권 역시 이 재원을 선거용 현금성 정책이나 단기 인기 영합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 재정은 경기가 좋을 때 미래를 위해 축적하고, 위기 때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도체 호황으로 얻은 초과세수는 미래 산업 경쟁력을 위한 종잣돈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다음 불황을 견디고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지키는 길이다.
2026-05-28 08: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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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초과세수, '나눠 쓰기'보다 '국가 재투자'가 먼저다
[경제일보] 반도체 경기 회복이 한국 재정의 새 변수가 됐다. 인공지능(AI) 확산,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증가, D램 가격 반등이 맞물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기업 실적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그 결과 정부 세수에도 예상 밖의 여력이 생기고 있다. 문제는 이 돈을 어디에 쓰느냐다. 빚을 갚을 것인가, 국민에게 나눌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성장에 투자할 것인가.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한양대 겸임교수)은 27일 발표자료 ‘100조 반도체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에서 초과세수 활용의 세 갈래 선택지를 제시했다. 핵심은 단순하다. 반도체 호황으로 생긴 재정 여력을 일회성 소비로 소진할 것이 아니라, 국가채무 관리와 미래 산업 투자에 우선 배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이번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초과세수의 성격 때문이다. 세수가 늘어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조적 세입 증가인지, 특정 산업 호황에 따른 일시적 수입인지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이지만 동시에 경기 변동성이 큰 산업이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항구적 복지 지출이나 반복성 현금 지원의 재원으로 삼으면, 불황기가 왔을 때 재정은 다시 적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김 실장의 발표자료는 이 지점을 분명히 짚는다. 2019년 이후 한국 재정은 적자 흐름을 이어왔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총수입과 총지출은 2019년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졌고, 2026년에도 총지출이 총수입을 웃도는 구조가 이어지는 것으로 제시됐다. 국가채무도 빠르게 늘어 2026년 전망 기준 1415조원, 2027년 전망 기준 1533조원으로 증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2027년 56.6%까지 오르는 것으로 제시됐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이는 초과세수를 단순한 ‘쓸 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재정은 경기 좋을 때 고삐를 죄고, 경기 나쁠 때 버팀목이 돼야 한다. 호황기에 생긴 여력을 정치적 인기 지출로 먼저 쓰면 정작 위기 때 쓸 탄약이 줄어든다. 중도보수적 재정 운용의 기본은 여기에 있다. 국가는 벌 때 아껴야 하고, 빚이 늘었을 때는 갚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분배의 필요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발표자료는 경기 회복이 모든 계층에 균등하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도 함께 제시했다. 이른바 ‘K자형 회복’이다. 고소득층과 디지털 기업은 회복의 상단에 있지만, 임시·일용근로자와 자영업자, 전통 기업은 회복의 하단에 놓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자료를 활용한 발표자료에서는 2024년 1분기부터 2025년 1분기까지 소득 1분위의 처분가능소득이 3.6% 감소한 반면, 4분위와 5분위는 각각 5.6%, 5.9% 증가한 것으로 제시됐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따라서 분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방식이다. 재정 여력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전 국민 현금성 지원이나 단기 소비 진작책을 반복하는 것은 재정 원칙에 맞지 않는다. 지원이 필요하다면 취약계층, 저소득 근로자, 한계 자영업자처럼 실제 충격이 집중된 계층에 한정해야 한다. 넓고 얕은 지원보다 좁고 두터운 지원이 재정 효율에도 맞고, 시장 질서에도 덜 해롭다. 더 중요한 선택지는 투자다. 한국 경제는 이미 저성장의 문턱을 넘었다. 발표자료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해 왔고, 노동·자본·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도 과거보다 낮아졌다는 점을 제시한다. 한국은행 자료를 인용한 발표자료에 따르면 잠재성장률은 2001∼2005년 5.1%에서 20162020년 2.5% 수준으로 낮아졌다. 성장잠재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초과세수를 단순 소비로 쓰는 것은 미래 세대의 몫을 현재 세대가 앞당겨 쓰는 일에 가깝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반도체 호황도 영원하지 않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최근 큰 폭으로 개선되는 흐름을 보였고, DDR4·DDR5 가격도 급등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사이클 산업이다. 가격이 오를 때는 세수가 늘지만, 가격이 꺾이면 기업 이익과 법인세 수입도 함께 줄어든다. 특정 시점의 초과세수를 영구 재원처럼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경쟁국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발표자료는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뿐 아니라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점유율 확대 흐름을 제시했다. 2024년 1분기 1% 수준으로 표시된 CXMT 점유율은 2025년 4분기 4%까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격차는 크지만, 중국의 추격은 가격 경쟁과 공급망 재편을 통해 한국 기업의 수익성을 압박할 수 있다.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이런 상황에서 초과세수의 최우선 사용처는 분명해진다. 첫째, 국가채무 관리다. 최소한 일정 비율은 채무 상환이나 적자 보전에 자동 배분하는 재정준칙이 필요하다. 둘째, 미래 산업 투자다. AI 반도체, 첨단 패키징, 전력망, 데이터센터, 인재 양성, 소부장 국산화, 국가전략기술 연구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 지원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재정은 느슨해지고 산업 정책은 흔들린다. 발표자료가 제시한 세계 데이터센터 수요 전망도 이를 뒷받침한다. 맥킨지 자료를 인용한 발표자료에 따르면 세계 데이터센터 수요는 2025년부터 2030년까지 빠르게 증가하고, 특히 AI 워크로드 수요가 큰 폭으로 확대될 것으로 제시됐다.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는 반도체, 전력, 냉각,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다. 한국이 이 흐름을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하려면 세수 증가분을 소비가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 투입해야 한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반도체가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절대적이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6년 1분기 36.1%까지 높아진 것으로 제시됐다. 주요 품목별 수출에서도 반도체는 자동차, 일반기계, 석유제품 등을 크게 앞서는 핵심 품목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비중 역시 국내 증시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반도체가 흔들리면 수출, 세수, 증시, 고용, 환율까지 함께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초과세수, 갚을까 나눌까 투자할까 그러나 국가경제가 특정 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는 장점이자 약점이다. 반도체 호황은 성장의 기회지만, 동시에 편중의 위험을 키운다. 초과세수는 이 위험을 줄이는 데 써야 한다. 반도체 초과세수로 반도체만 더 키우자는 의미가 아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AI, 로봇, 방산, 바이오, 에너지, 미래 모빌리티 등 다음 성장 축을 넓히는 데 써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은 초과세수를 ‘누가 더 많이 나눠줄 것인가’의 경쟁으로 끌고 가기 쉽다. 그러나 재정은 선거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기 있는 지출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지출이다. 국민에게 돈을 돌려주는 방식도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재정건전성 회복과 성장잠재력 확충이라는 큰 원칙 안에서 제한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에 찾아온 귀한 기회다. 하지만 기회는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비용으로 바뀐다. 초과세수를 모두 써버리는 국가는 다음 불황에 빚으로 버틴다. 초과세수를 빚 갚기와 미래 투자에 배분하는 국가는 다음 호황의 체력을 만든다. 결론은 분명하다. 반도체 초과세수는 ‘공돈’이 아니다. 국민 경제가 특정 산업의 위험을 떠안고 얻은 성과다. 따라서 그 쓰임도 신중해야 한다. 먼저 갚고, 필요한 곳에 선별적으로 나누며, 남은 힘은 미래 성장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이 재정의 상식이고, 산업국가 한국이 선택해야 할 책임 있는 길이다.
2026-05-27 22: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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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는 중국 지방정부 : 한국도 반도체 초과세수를 생태계 구축에 활용해야 한다
[경제일보] 중국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단순한 ‘세계의 공장’이 아니다. 값싼 노동력으로 글로벌 기업의 하청 생산기지 역할을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지금 중국 지방정부들이 벌이고 있는 가장 치열한 전쟁은 바로 ‘반도체 생태계 전쟁’이다. 최근 중국 장쑤성 소주(蘇州) 장자강(張家港)에서 열린 한·중 경제무역협력 교류회 현장을 둘러보며 새삼 놀란 것은, 중국 지방도시들의 태도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단순히 공장 하나 유치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도시 전체가 반도체 산업단지와 첨단 제조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AI 시대의 패권은 결국 반도체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특히 중국 지방정부들은 지금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을 사실상 ‘국가 전략 자산’ 수준으로 대우하고 있다. 한국 안에서는 중소기업 취급을 받는 기업들이 중국에 가면 귀빈이 된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직접 공항 영접을 나오고, 세제 혜택과 공장 부지 제공은 기본이며, 연구개발 자금과 인력 지원까지 패키지로 제안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반도체 산업은 이제 단순 제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첨단 문명 생태계다. AI 반도체, HBM(고대역폭 메모리), 첨단 패키징, 전력반도체, 차량용 반도체, 산업용 센서, 로봇칩, 양자컴퓨팅까지 미래 산업의 핵심은 모두 반도체와 연결된다. 그리고 반도체 산업의 진짜 경쟁력은 단순히 삼성전자나 TSMC 같은 대기업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소재, 화학, 특수가스, 웨이퍼, 정밀가공, 초정밀 부품, 산업용 로봇, 테스트 장비, 패키징, 설계 인력, 대학 연구소, 금융, 물류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지금 바로 그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중국 지방정부들의 움직임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상하이권은 AI 반도체와 설계 생태계 구축에 집중하고 있고, 장쑤성과 저장성은 첨단 제조 및 패키징 분야를 키우고 있다. 광둥성은 화웨이와 BYD를 축으로 차량용 반도체와 AI 기기 생태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쓰촨성과 충칭은 후공정 및 테스트 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중국은 중앙정부가 방향을 정하면 지방정부가 곧바로 움직인다. 산업단지 조성, 세금 감면, 금융 지원, 공장 인허가, 연구소 설립, 대학 협력까지 거의 전시 체제 수준으로 밀어붙인다. 지금 중국 지방도시들 사이에서는 “한국 반도체 기업 하나라도 더 유치하라”는 경쟁이 치열하다. 왜냐하면 한국 기업들이 들어오면 그 도시의 산업 수준 자체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기술과 인재, 공급망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함께 들어온다. 중국은 이미 단순 추격 단계를 넘어섰다. 이제는 생태계 전체를 삼키려 한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다. HBM 경쟁에서도 앞서 있다. 그러나 정작 국내 산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우려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부장 중소기업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력난은 심각하고, 지방 산업단지는 비어가고 있으며, 규제와 비용 부담은 계속 커진다. 특히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인해 지역 제조업 생태계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 전략의 부재다. 반도체는 이미 국가 안보 산업이 되었는데도 한국은 아직도 개별 기업의 경쟁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생태계 전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비전과 장기 전략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중국은 도시 단위로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기업 단위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인재 문제다. 이제 반도체 전쟁은 단순 기술 전쟁이 아니다. 인재 전쟁을 넘어 생태계 전쟁으로 넘어가고 있다. 중국은 한국과 대만, 일본의 기술 인력을 공격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 기업을 연결한 대규모 지원 체계를 만들고 있다. 주택 제공, 연구비 지원, 세제 혜택은 물론이고 가족 정착까지 지원한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반도체 학과를 늘린다고 하지만 정작 현장 인력은 부족하다. 청년들은 제조업을 기피하고, 지방 대학은 무너지고 있다. 중소 소부장 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지방정부들이 한국 기업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는 역사적 기회를 맞고 있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전략 파트너로 본다. 일본 역시 반도체 부활을 위해 한국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영원하지 않다. “물이 들어왔을 때 배를 띄워야 한다”는 말은 지금 같은 시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일본은 이미 국가 차원의 생태계 전략에 들어갔다. TSMC 구마모토 공장에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했고, 라피더스(Rapidus)를 통해 차세대 반도체 국산화에 나섰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대학과 기업이 사실상 국가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수십조 원 규모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단순 공장 지원이 아니다. 연구개발, 인재 양성, 공급망 재편, 안보 전략까지 모두 포함된 국가 산업 전략이다. 결국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를 단순 기업 산업이 아니라 국가 문명 경쟁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이제 결단해야 한다. 최근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크게 늘고 있다면, 그 초과세수를 단순 재정 메우기에 사용할 것이 아니라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전략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첫째,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를 강화해야 한다. 수도권 중심 구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충청권, 전북, 경북, 동해안권까지 연결한 국가 반도체 벨트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소부장 기업을 국가 전략산업 수준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기업들이 무너지면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도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셋째, 대학과 연구소를 산업 생태계와 직접 연결해야 한다. 이공계 인재들이 제조업과 지역 산업으로 유입되도록 파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넷째, 장기 산업 금융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는 단기간 수익 산업이 아니다. 10년, 20년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적 각오다. 지금 세계는 AI 혁명 시대의 새로운 산업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반도체는 그 중심이다. 반도체를 잃는 국가는 미래 산업 패권을 잃는다. 중국 지방정부들의 움직임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단순히 “잘나가는 반도체 기업 몇 개 있는 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반도체 생태계 국가로 진화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남는 길이다.
2026-05-23 18: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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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트랩에 투영된 중화(中華)의 서열: 의전(儀典)으로 읽는 중국 외교의 본색
[경제일보] 국가 간 외교에서 의전은 단순한 형식이나 예법을 넘어선다. 그것은 말 없는 언어이자, 자국의 전략적 속내와 상대국에 대한 냉정한 손익계산서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다. 특히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 믿으며 예의(禮義)와 서열, 그리고 체면(面子)을 극도로 중시해 온 중국 외교에서 공항 영접의 격(格)은 상대국의 전략적 가치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최근 방중한 글로벌 정상들을 맞이한 베이징 서오두(首都) 공항의 풍경은 오늘날 중국이 바라보는 세계 질서의 재편도와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중 영접을 둘러싸고 외교가 안팎에서 ‘홀대론’과 ‘격하론’ 등 설왕설래가 분분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공항 마중에 전직 상무위원을 역임한 국가부주석(정치국원)을 내보냈다. 언뜻 거물급 인사를 배치한 듯 보이지만, 실권을 쥔 현직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련되게 포장된 ‘외교적 메시지’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해석은 다른 정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확신으로 굳어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공항 트랩 아래에서 그를 맞이한 이는 중국 외교의 총괄 수장이자 시진핑의 심복인 왕이(王毅)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이었다. 실질적인 대미(對美) 전선에서 동맹 이상의 밀착을 과시하는 러시아에 대해 확실한 예우를 갖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 전승절 행사를 전후해 중국을 찾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영접에는 무려 중국 권력 서열 5위인 차이치(蔡奇) 중앙서기처 서기 겸 상무위원이 직접 공항으로 나갔다. 혈맹이자 지정학적 최전방 보루인 북한에 대해 중국이 부여하는 전략적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서열의 숫자로 명백히 보여준 장면이다. 중국 외교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영접의 변천사’는 그들의 국력 신장 및 대외 전략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과거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냉전의 장막을 걷고 베이징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 체제의 2인자이자 외교 총사령관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직접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당시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미국의 손이 절실했던 중국으로서는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극진한 예우이자, 생존을 위한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도광양회(韜光養晦) 시대에도 중국은 서방 강대국 정상들이 방문할 때마다 철저히 격식을 맞추며 몸을 낮췄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다르다. 시진핑 체제 이후 대국외교(大國外交)와 분발유위(奮發有爲)를 표방하며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이제 미국을 향해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이번 영접 격은 중국이 미국을 두려워하거나 눈치 보지 않으며, 이제는 겉치레식 환대에 연연하기보다 ‘대등한 G2 관계’로서 냉정하게 국익 대 국익으로 맞서겠다는 오만함과 자신감의 발로다. 반면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붙잡아야 할 러시아와 북한이라는 전통적 우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서열과 격식을 갖추며 ‘우리 편’을 챙기는 실리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 역사와 사상의 뿌리인 『도덕경(道德經)』 제61장에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대국자는 하류야(大國者 下流也), 천하교(天下之交), 천하지빈(天下之牝)”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천하의 물이 모여드는 곳이자 천하의 어머니와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자(老子)는 대국일수록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아랫자리에 처해야(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진정으로 천하의 인심을 얻고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세울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현재 시진핑의 중국이 보여주는 의전 외교는 노자의 이런 현명한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공항 영접 하나에도 치밀하게 서열을 매기고, 상대국의 힘과 이용 가치에 따라 환대와 홀대의 수위를 조절하는 모습은 대국(大國)의 풍모라기보다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옹졸한 패권주의의 단면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혈맹이라며 서열 5위를 내보내고, 견제해야 할 상대에게는 은근한 엇박자의 격을 적용하는 세태는 단기적으로는 외교적 기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주변국들로 하여금 중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에 대해 신뢰보다는 끊임없는 경계심과 피로감을 느끼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의전의 격을 바꾸어 상대의 기를 꺾는 방식은 일시적인 전술은 될 수 있어도 천하를 아우르는 도(道)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대국 외교란 공항 트랩에 누구를 내보내느냐는 형식적 서열 정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노자의 말대로 스스로를 낮추어 천하의 물을 품어 안는 포용력과 예측 가능한 규범을 보여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영접 인물의 서열로 아군과 적군을 가르고 대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중국의 영접 외교 변천사는,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외교적 고립감과 조급증을 방증하는 씁쓸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2026-05-20 10: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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