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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한중 수교 34년, 차이를 인정하는 지혜와 상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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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한중 수교 34년, 차이를 인정하는 지혜와 상생의 길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양규현 사장
2026-08-25 08:02:52
양규현 경제일보 사장
양규현 경제일보 사장
[경제일보] 1992년 8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수교 합의서에 서명했다. 냉전의 마지막 장벽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만과의 단교가 불러온 반발과 혐한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북방외교의 대동맥을 열었다. 한·중 수교는 경제적 도약의 새로운 엔진이자 한반도 평화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34년이 지난 오늘, 그때의 환호는 어느새 냉철한 성찰로 바뀌었다. 최근 방한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남북한을 ‘서로 다른 두 국가’로 규정하며 북한의 이른바 ‘두 국가론’에 호응한 것은 한·중 관계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수교 당시 우리가 기대했던 중국의 역할과 오늘 중국이 보여주는 한반도 인식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물론 지난 34년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한·중 교역의 폭발적 증가는 한국 경제의 성장에 커다란 동력이 됐고, 양국 국민의 왕래와 문화 교류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수준으로 확대됐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러나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안보적 신뢰까지 자동으로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사드(THAAD) 사태는 그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시켰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공급망과 시장의 취약성으로 되돌아왔고,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은 선택의 압박을 받는 구조에 놓였다. 지난 34년은 경제적 상호의존과 전략적 불신이 동시에 심화 된 ‘동상이몽의 세월’이기도 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이라 했다.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맞물려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중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협력이라는 ‘있음’만 바라보고 체제와 가치의 차이라는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없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협력은 기대가 되고,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은 적대감으로 변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환상도, 혐오도 아니다. 중국을 무조건 낙관해서도 안 되지만 감정적으로 밀어내서도 안 된다. 냉철한 국익과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중국과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지켜야 할 원칙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상대의 체제를 바꾸려 하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성숙한 외교다.

《도덕경》의 “지자불언(知者不言)”은 오늘의 외교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섣불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외교 역시 말의 크기보다 전략의 깊이가 중요하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자극을 줄이고, 동시에 우리의 원칙과 국익은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특히 정치·안보의 갈등이 민간 교류의 길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 경제 협력을 공급망 다변화와 첨단산업 협력으로 고도화하고, 문화 교류를 지속하며, 미래세대의 인적·지적 교류를 더욱 넓혀야 한다. 정부 간 관계가 흔들릴 때일수록 국민과 기업, 청년과 문화가 이어지는 튼튼한 가교가 필요하다. 국가 간 관계의 진정한 자산은 정상회담의 사진보다 오랜 시간 축적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전도서가 말하듯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이제 한·중 관계도 지나간 34년을 미화하거나 부정할 때가 아니라 냉정하게 재평가하고 다시 꿰맬 때다. 수교가 곧 우호를 의미하지 않았듯, 갈등이 곧 단절을 의미해서도 안 된다.

한·중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은 ‘친중’이나 ‘반중’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익’이어야 한다. 중국과의 협력은 하되 의존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되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며, 갈등은 관리하되 교류의 문은 닫지 않는 외교가 필요하다.

34년 전 우리는 한·중 수교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환호했다. 이제 34년 후의 우리는 그 기대를 냉정하게 다시 써야 한다. 진정한 한·중 관계의 미래는 상대를 우리 뜻대로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나간 34년의 교훈 위에 세워야 할, 새로운 한·중 관계의 대도(大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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