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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이 공장을 멈추는 시대, 사이버보안도 산업안보다
[경제일보] 공장을 멈추게 하는 것은 정전이나 설비 고장만이 아니다. 이제는 외부에서 침투한 악성코드 하나가 생산과 출하를 동시에 흔든다. 공장 문을 열지 않고도 생산관리 시스템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시대다. 생산시설이 디지털로 연결될수록 효율은 높아지지만, 한 번의 침입이 불러올 피해도 커진다. 지난 3월 미국 의료기기업체 스트라이커는 사이버 공격으로 생산과 주문 처리, 출하에 차질을 겪었다. 회사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공시에 따르면 내부 정보기술 시스템에서 발생한 사고가 세계 각지의 사업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연결형 의료기기 자체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회사는 밝혔지만, 전산망 장애만으로도 제조와 공급이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달 프랑스에서는 수백 개 슈퍼마켓의 냉장·냉동설비가 공격받았다. 일부 시설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면서 식품 폐기 피해가 발생했다. 정보가 유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설비의 작동이 교란된 것이다. 사이버 공격의 피해 범위가 전산실 밖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유럽연합 사이버보안청(ENISA)이 지난 9월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제조업은 주요 공격 대상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다. 2025년 EU 관련 관측 사이버 사건 중 제조업 비중은 7%였다. 이 수치가 세계 제조업의 피해 규모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조시설이 더 이상 사이버 공격의 주변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국 제조업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철강, 배터리 공장에서는 생산설비와 센서가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AI가 설비 이상을 예측한다. 협력업체와 생산정보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일도 흔해졌다. 과거에는 공장 안에서만 움직이던 기계가 외부 시스템과 연결되는 구조다.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공격자가 노릴 수 있는 통로도 그만큼 많아졌다. 문제는 디지털 전환의 속도에 보안 투자가 따라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스마트공장 투자계획에는 생산량 증가와 불량률 감소, 인건비 절감 효과가 구체적인 숫자로 담긴다. 반면 보안 투자의 성과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고가 나지 않으면 비용을 들인 이유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경영진이 보안 예산을 뒤로 미루기 쉬운 구조다. 그러나 생산라인이 멈춘 뒤에야 투자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이미 늦다. 산업현장의 보안은 일반 사무실 전산망보다 까다롭다. 공장 운영기술(OT)은 생산공정을 직접 제어한다. 사무용 컴퓨터는 보안 업데이트를 위해 잠시 꺼둘 수 있지만, 24시간 가동하는 제철소나 석유화학 공장의 설비는 그렇지 않다. 업데이트 하나에도 생산 일정과 설비 안전을 따져야 한다. 오래된 장비에 최신 네트워크를 연결해 사용하는 공장이라면 위험을 찾아내는 일부터 쉽지 않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산업 운영기술 보안 지침을 별도로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생산시설에서는 정보 유출을 막는 것 못지않게 설비를 안전하게 가동하고, 장애가 발생했을 때 정상 상태로 복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설비에 접속할 수 있는지, 외부 유지보수 업체의 접근 권한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침입이 확인되면 어느 공정부터 분리할지까지 미리 정해둬야 한다. 대기업 공장만 안전하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자동차와 반도체 생산은 수많은 협력업체에 의존한다. 부품업체의 전산망이 멈추면 납품이 지연되고, 설비 유지보수 업체의 원격 접속 계정이 탈취되면 공장 내부로 공격이 이어질 위험도 있다. 공급망의 어느 한 곳이 취약하면 전체 생산 일정이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중소 협력업체에 대기업과 같은 수준의 투자를 요구할 수도 없다. 보안 전문인력을 구하기 어렵고 생산설비를 세워 점검할 여력도 부족하다. 대기업이 보안 기준을 높이면서 비용은 협력업체에 떠넘긴다면 현장의 취약점은 그대로 남는다. 공동 점검과 취약점 진단, 사고 대응 훈련에 대기업이 참여해야 할 이유다. 정부의 스마트공장 정책도 보완할 대목이 있다. 자동화 설비를 얼마나 보급했는지,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만으로 사업 성과를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기존 공장의 보안 취약점을 점검하고 노후 제어설비를 개선하는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반도체와 에너지, 물류처럼 생산 중단의 파급효과가 큰 분야는 사고 발생 이후의 복구 능력까지 살펴야 한다. 기업 경영진도 보안을 전산 담당 부서에만 맡겨둘 수 없는 단계에 왔다. 공장의 생산설비와 외부 접속망이 얼마나 안전한지, 공격이 발생하면 어느 정도의 생산 차질이 예상되는지 정기적으로 보고받아야 한다. 신규 설비 투자와 마찬가지로 보안 예산에도 경영진의 판단과 책임이 따른다. AI가 보안의 해답을 모두 제공하지도 않는다. AI는 이상 징후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공격자 역시 이를 활용한다. 최신 기술을 들여놓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관리다. 접근 권한을 제한하고, 시스템 변경 이력을 남기고, 비상시 수동으로 설비를 통제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첨단 공장일수록 이런 기본이 허술해서는 안 된다. 제조업 경쟁력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생산량과 기술력, 수출 실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위기에도 공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가 기업의 실력을 가른다. 보안 투자를 미뤄 아낀 비용은 장부에 남지만, 사고로 멈춘 생산라인의 손실은 거래처와 시장의 신뢰까지 흔든다. 한국 제조업은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왔다. 이제 그 설비를 지키는 데도 그만한 관심을 기울일 차례다. 사이버보안은 전산실의 부대비용이 아니다. 생산시설의 안전과 가동을 책임지는 산업 인프라다.
2026-10-27 15: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