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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명 위한 특수분유부터 셀렉스까지…매일유업이 57년간 찾은 '영양의 빈칸'
[경제일보] 매일유업은 지난 57년간 소비자에게 부족한 영양을 찾아 새로운 시장으로 연결해왔다. 1969년 우유가 부족하던 시기 낙농사업으로 출발해 1974년 영유아용 조제분유 생산에 나섰고 이후에는 일반 분유를 먹기 어려운 환아를 위한 특수분유까지 개발하며 영양 수요를 세분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유아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소비자에게는 '락토프리 우유'를 내놓고 중장년층의 단백질 섭취 수요에는 '셀렉스'를 선보였으며 우유 대신 식물성 음료를 찾는 소비자를 겨냥해 두유와 오트음료로 제품군을 넓혀왔다. 질환·연령·소화 능력·식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미충족 수요를 찾아 영양 설계와 유가공 기술로 제품화해온 것이다. 우유와 분유에서 시작한 기술이 50여년 뒤 중장년·고령자·환자의 영양관리까지 이어진 배경도 여기에 있다. '낙농보국'에서 시작한 57년…우유·분유로 식품사업 기반 구축 출발점은 우유였다. 매일유업의 전신 한국낙농가공은 1969년 2월 '낙농보국'을 창업정신으로 출범했다. 같은 해 5월 정부와 김복용 창업주가 각각 절반씩 출자해 자본금 3억원으로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 우유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유를 공급할 낙농 기반 확보가 먼저였다. 매일유업은 1972년 미국산 처녀우 850마리와 호주산 임신우 850마리를 들여왔고 이듬해에는 국내 최초로 젖소를 비행기로 수송하며 원유 공급 기반을 넓혔다. 이렇게 확보한 낙농 기반을 바탕으로 1973년 호남공장을 준공해 테트라팩 우유 생산에 들어갔으며 1974년에는 중부공장을 가동해 조제분유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생산 기반을 갖춘 뒤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 1981년 매일분유를 중동에 수출하며 국내에서 축적한 유가공 역량을 해외시장으로 연결했다. 우유와 분유에서 쌓은 식품 제조·유통 역량은 냉장주스, 발효유, 컵커피와 같은 인접 식품군으로 이어졌다. 1992년 국내 최초 냉장주스 '썬업'을 출시한 데 이어 컵커피·발효유·두유까지 제품군을 넓히며 소비자의 다양한 식음 수요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매일유업이 반복해온 방식은 단순히 제품 종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양과 식생활에서 아직 충족되지 않은 수요를 찾아 새로운 제품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2017년에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회사 구조를 재편했다. 기존 매일유업은 그룹의 지주회사인 매일홀딩스로 바뀌고 우유와 분유 등 유가공 사업은 새로 출범한 매일유업이 맡는 방식으로 분리됐다. 회사의 법인 구조는 달라졌지만 생산시설과 브랜드, 유가공 사업의 역사는 1969년 창립 때부터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350명 위한 특수분유부터 락토프리까지…작은 영양 수요도 제품으로 매일유업의 사업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매출 규모가 큰 우유나 커피보다 1999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자용 특수분유에서 찾을 수 있다.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자는 특정 아미노산 등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하거나 생성되지 않아 모유와 일반 분유는 물론 고기와 쌀밥 같은 일상적인 식품도 자유롭게 섭취하기 어렵다. 매일유업은 이런 환아가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문제가 되는 아미노산은 제거하고 비타민과 미네랄 등 필수 영양성분은 보충한 특수 유아식을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이렇게 시작한 특수분유 생산은 올해로 27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8종 12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특수분유는 효율성이 높은 사업과는 거리가 있다. 2024년 기준 국내 선천성 대사이상 환자는 약 350명 수준에 불과한 데다 일반 제품과 성분이 섞이지 않도록 생산 때마다 일반 분유 공정을 멈추고 설비를 별도로 세척한 뒤 소량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일유업은 20년 넘게 특수분유 생산을 이어오고 있다. 수익성보다 반드시 필요한 수요에 대응하는 이 같은 방식은 매일유업이 강조해온 ‘한 명의 아이도 건강한 삶에서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을 실제 제품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특정 소비자가 기존 제품을 섭취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품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출시한 '소화가 잘되는 우유'다. 우유 속 유당을 소화하기 어려운 소비자를 위해 미세한 필터로 유당을 제거하는 UF(Ultra Filtration) 공법을 적용했다. 출시 당시 국내에서는 락토프리라는 개념이 생소했지만 유당 소화에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 수요가 확인되면서 시장도 빠르게 성장했다. 닐슨 집계 기준 국내 락토프리 우유 시장은 2019년 300억원대에서 2023년 약 870억원으로 두 배 이상 확대됐고 '소화가 잘되는 우유'는 같은 시기 시장점유율 44%로 1위를 기록했다. 2024년에는 출시 19년 만에 누적 판매량 8억개를 넘어서는 등 우유 섭취에 불편을 느끼던 소비자를 새로운 유제품 수요층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2008년 선보인 상하목장은 소비자 선택 기준이 가격에서 원료와 생산 방식, 품질까지 넓어지는 흐름을 겨냥했다. 일반 백색우유와 가격 경쟁을 벌이기보다 유기농 원유와 생산 과정에 가치를 두는 소비자층을 공략하면서 차별화된 시장을 구축했다. 락토프리 우유가 소화 여부에 따른 수요를 겨냥했다면 상하목장은 원료와 생산 방식에 대한 선호를 제품에 반영해 동일한 우유 시장 안에서도 소비 기준을 한층 세분화한 사례다. 분유 기술을 중장년·환자까지…셀렉스·메디웰로 '평생 영양' 공략 인구구조 변화는 매일유업이 공략해야 할 영양 수요의 방향도 바꿨다. 영유아 인구 감소로 우유와 분유 시장의 성장 여력이 줄어드는 사이 고령화와 건강관리 수요는 커졌고 매일유업은 이에 맞춰 분유에서 축적한 영양 설계 역량을 중장년층으로 확장했다. 2018년 선보인 성인영양식 브랜드 '셀렉스'가 대표적이다. 같은 해 식품업계 최초로 근감소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매일사코페니아연구소를 설립해 중장년층의 근육과 단백질 섭취를 연구했다. 이후 △분말형 단백질 △RTD 음료 △프로틴바 △건강기능식품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고 셀렉스 누적 매출은 지난해 5월 5000억원을 넘어섰다. 분유가 성장기 영유아에게 필요한 영양을 설계한 제품이었다면 셀렉스는 연령이 높아지면서 부족해지기 쉬운 단백질과 영양 관리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생애주기별 영양 설계는 고령자와 환자로도 이어져 매일유업은 전문 균형영양식 '메디웰'을 통해 건강 상태에 따라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는 시장까지 공략하고 있다. 올해는 이 사업을 한 단계 더 세분화하며 한림대학교의료원, 푸드테크 기업 슈팹과 환자·고령자 맞춤형 영양식 개발을 위한 협력을 시작했다. 의료기관의 임상 역량과 식품 기술을 결합해 건강 상태에 따라 필요한 영양을 설계하는 것이 목표다. 아이의 연령과 상태에 맞춰 분유를 설계했던 방식이 중장년, 고령자, 환자의 상태별 영양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새로운 영양 수요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는 기존 유가공 기술도 활용되고 있다. 매일유업은 지난 7월 국산 우유를 UF 공법으로 3배 농축한 단백질 RTD 음료 '퓨어틴'을 출시했다. 330㎖ 한 팩에 단백질 23g을 담으면서 유당은 제거했다. 2005년 락토프리 우유에 활용했던 여과 기술을 최근 커지는 단백질 음료 시장에 적용한 것이다. 영양의 빈칸은 식습관에서도 나타났다. 건강과 환경, 소화 문제 등을 이유로 우유 대신 식물성 음료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매일유업도 콩, 아몬드, 귀리를 기반으로 한 제품군을 구축했다. 기존 매일두유에 아몬드브리즈를 더한 데 이어 2021년 귀리를 활용한 '어메이징오트'를 선보였다. 유제품을 주력으로 해온 매일유업이 우유를 마시지 않는 소비자까지 겨냥해 제품군을 확대한 것이다. 올해 8월에는 상하목장 브랜드의 첫 두유 제품인 '콩물두유' 3종도 출시했다. 국산 서리태를 활용한 제품으로 기존 유기농 유제품 중심이던 상하목장 브랜드를 식물성 음료까지 확장했다. 올해 하반기에도 매일유업이 식물성 음료를 주요 성장 품목으로 꼽고 있다는 점에서 일회성 신제품보다 사업 포트폴리오 확대에 가깝다. 이 흐름을 놓고 보면 매일유업의 고객은 점차 연령과 원료의 경계를 넘어섰다. 매일유업은 영유아용 분유부터 유당불내증 소비자를 위한 락토프리 우유, 중장년층 대상 단백질 제품, 환자·고령자용 균형영양식, 식물성 음료까지 고객별 생애주기와 식습관에 따라 제품군을 세분화하고 있다. 뉴트리션 영업익 338%·수출 26% 증가…백색우유·해외 수익성은 과제 이러한 전략은 올해 실적으로도 나타났다. 매일유업의 2026년 상반기 연결 매출은 949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392억원으로 54.3% 늘었다. 2분기만 보면 매출 4800억원, 영업이익 204억원으로 각각 4.8%, 64.4% 증가했다. 특히 조제분유와 성인영양식 등이 포함된 뉴트리션 사업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올해 상반기 뉴트리션 매출은 1204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3.2%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1.6%에서 12.7%로 높아졌다. 수익성 개선 폭은 더 컸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8억원으로 338.3% 늘었고 2분기만 보면 매출 632억원으로 16.4% 증가한 가운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2억원에서 27억원으로 확대됐다. 같은 기간 유가공 부문 매출 증가율이 1%대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뉴트리션 사업이 매일유업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유 사업에는 최근 출생아 반등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출생아 수는 14만5804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4% 늘었다. 지난 6월 출생아 수도 2만3111명으로 15.6% 증가해 24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증가세를 이어갔다. 매일유업도 출생아 증가에 따른 조제분유 판매 호조를 상반기 실적 개선 요인으로 꼽았다. 뉴트리션 사업의 성장세에 맞춰 조직 구조도 재정비했다. 매일유업은 2021년 헬스앤뉴트리션 사업을 분리해 설립한 100% 자회사 매일헬스뉴트리션을 올해 5월 다시 흡수합병했다. 이를 통해 뉴트리션 사업의 글로벌 성장전략을 본사 차원에서 추진하는 동시에 온·오프라인 영업과 상품개발, 마케팅 역량을 한데 묶어 경영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별도 법인에서 키워온 셀렉스 사업을 본체로 편입해 기존 유가공·영양 연구 역량과 판매조직 간 시너지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국내에서 축적한 영양 제품 경쟁력은 해외시장에서도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매일유업의 수출액은 53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6.4% 늘어 같은 기간 2.5% 증가에 그친 내수 매출보다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수출 증가에 힘입어 전체 매출에서 해외가 차지하는 비중도 4.6%에서 5.6%로 높아지면서 해외사업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해외 소비자와의 접점도 넓히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매일두유와 셀렉스 등 8개 제품을 미국 올리브영 패서디나점과 온라인몰에 입점시키며 현지 판매 채널을 확대했다. 저당·고단백 두유와 콜라겐 제품 등을 앞세워 국내에서 세분화해온 식물성·건강관리 수요를 미국의 'K-웰니스' 소비로 연결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특수분유 역시 해외시장으로 공급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매일유업은 중국 알리바바그룹의 헬스케어 계열사 알리건강을 통해 선천성 대사질환자용 특수분유를 현지에 공급해왔으며 이를 통해 국내 수백명의 환자를 위해 유지해온 제품을 해외 희귀질환 환자까지 연결하고 있다. 이처럼 제품별 해외 판매 접점은 넓어지고 있지만 이를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수익성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올해 상반기 수출이 빠르게 증가했음에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6%에 그쳤고 지난해 해외 종속기업인 북경매일유업유한공사와 매일호주유한회사는 각각 7억원과 65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해외 판매 규모를 확대하는 것과 현지 사업 기반을 안정적인 이익으로 연결하는 것은 별개의 과제인 만큼 향후 해외사업의 이익 창출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뉴트리션과 식물성 음료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매일유업의 출발점이자 핵심 사업인 백색우유의 부담은 여전히 크다. 회사는 올해 상반기 원유 공급과잉으로 백색우유 부문에서 손실이 발생한 데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포장재와 수입 원부자재 가격 상승까지 겹치며 원가 부담이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올해 상반기 말 매일유업의 원유 매입가격은 ℓ당 1359.97원으로 지난해 말 1357.71원, 2024년 말 1343.9원보다 높아졌다. 백색우유 소비가 구조적으로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원유 매입 부담은 쉽게 낮추기 어려워 수익성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매일유업은 하반기 백색우유의 손익 구조를 개선하는 한편 조제분유와 셀렉스 등 뉴트리션, 식물성 음료의 국내외 판매를 확대해 사업 포트폴리오 전반의 수익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매일유업이 이제 증명해야 할 것은 '영양의 빈칸'을 발견하는 감각보다 그 빈칸을 충분한 규모의 시장으로 키워내는 힘이다. 국내 유업시장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뉴트리션과 식물성 음료의 외형과 수익성을 함께 높이고 해외에서도 국내에서 검증한 제품 경쟁력을 안착시켜야 한다. 지난 57년간 세분화된 소비자 수요를 제품으로 구현해온 역량이 향후 시장 확대와 수익성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매일유업의 다음 성장 곡선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매일유업 관계자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본질적인 영양 수요를 발굴해 보다 건강한 식음료로 제품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50년 이상 축적한 영양 설계 기술과 지속적인 연구개발(R&D), 소비자 건강 증진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해온 진정성이 고객 신뢰와 브랜드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프리미엄 유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식물성 음료와 성인·장노년층 영양식 등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할 것"이라며 "중국에서 조제분유와 식물성 음료, 셀렉스 등을 판매하고 미국에서도 소비자 접점을 넓히는 등 수출 활로를 확보해 해외시장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2026-08-31 17: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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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이라는 낡은 틀에 미래를 가둘 것인가
세계 산업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바이오, 양자기술 등 첨단산업의 경쟁은 이제 기술 하나의 우열을 넘어 누가 더 빨리 연구하고, 제품화하고, 시장을 선점하느냐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기술 패권 경쟁에서 1년은 길고 하루는 짧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노동시장 제도는 과연 이런 속도전에 맞춰져 있는가. 최근 일본의 노동시간 제도와 연구개발 분야의 규제 완화 움직임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일본 역시 전체 노동자에게 월 100시간의 초과근무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월 45시간·연 360시간의 상한을 두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도 월 100시간 미만, 연 720시간 등의 제한을 둔다. 다만 신기술·신상품·신서비스의 연구개발 업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시간외근로 상한 규정의 적용을 제외하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모든 노동을 똑같은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발상의 차이다. 연구개발 현장은 일반적인 생산라인과 다르다. 반도체 설계자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실험 결과가 나오는 순간이 따로 있고, 새로운 알고리즘을 완성하기 위해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 경쟁사의 신제품이 발표되거나 기술적 돌파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연구개발팀이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를 장시간 노동의 미화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과로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창의성을 훼손한다. 건강을 잃은 근로자에게 혁신을 요구할 수도 없다. 노동시간 규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근로자의 건강과 휴식권을 보호하고 기업이 무분별한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보호와 경직성은 같은 말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노동시장 제도가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산업별·직무별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특히 AI와 반도체처럼 연구개발의 속도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분야에서 획일적인 시간 규제는 기업과 연구자 모두에게 제약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주 52시간제는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제도로 진화시키는 일이다. 정부도 AI 연구개발 현장의 특성을 고려해 특별연장근로 확대 등을 검토하고 있다. 현장의 현실과 제도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점을 정부 역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제 논의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연구개발과 일반 생산업무를 구분하고 업무의 성격과 위험, 전문성, 자율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제도를 차등화해야 한다. 모든 근로자를 동일한 시간표로 묶어 놓는 것이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다.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와 반복 업무 종사자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노동 보호라기보다 규제의 획일화가 될 수 있다. 노사 자율성도 확대해야 한다. 정부가 일률적으로 근무 형태를 정하기보다 기업과 근로자가 업종과 업무 특성에 맞춰 근로시간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자율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근로자의 명시적 동의와 적절한 보상, 건강 보호, 휴식권 보장, 근로시간 기록과 사후 점검 등을 전제로 해야 한다. 노동정책의 기준도 ‘얼마나 오래 일했느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AI 시대의 연구개발은 장소와 시간의 경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출근해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고 생산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정시에 퇴근한다고 혁신적인 것도 아니다. 노동의 질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꿔야 한다. 기업의 책임 역시 분명해야 한다. 규제 완화가 무제한 노동을 허용하는 면허증이 돼서는 안 된다. 전문 연구인력에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만큼 높은 수준의 임금 보상과 건강관리, 충분한 휴식, 근로시간 기록과 사후 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규제 완화와 노동자 보호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설계하면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치권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선이고 더 유연하게 일하는 것은 곧 노동권 후퇴라는 이분법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반대로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낡은 사고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세계는 이미 ‘더 오래 일하는 나라’와 ‘덜 일하는 나라’의 경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필요한 순간에는 신속하게 집중할 수 있는 나라가 경쟁에서 앞서간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을 보유하고 있고 AI와 첨단 제조업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 기업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 최고의 노동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과 산업의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법과 제도 역시 그 속도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 일본의 사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월 100시간’이라는 숫자가 아니다. 연구개발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획일적인 규제를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예외와 자율성을 제도 안에 설계한 유연성의 철학이다. 우리도 이제 주 52시간제의 성역을 허물자는 논쟁을 넘어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은 ‘52시간’이라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근로자의 건강과 휴식이라는 본질이다. 그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연구개발, 스타트업, 첨단 제조업 등 미래산업의 특성에 맞는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에는 기술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경쟁국의 기업도 우리 기업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계 시장의 투자자 역시 한국의 복잡한 규제체계를 이해해 줄 의무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권의 후퇴가 아니라 노동제도의 선진화다. 보호할 것은 확실히 보호하되 기업과 연구자가 필요한 순간 집중할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구개발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연구개발의 속도를 높이려면 사람의 창의성을 가두는 낡은 규제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제 질문을 바꿀 때다. ‘몇 시간 일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해야 대한민국의 생산성과 혁신을 가장 높일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AI 시대에 맞는 노동개혁의 출발점이다.
2026-08-30 13: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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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9명 실종에 정부 대응팀 20명으로 확대…헬기 수색 총력
[경제일보] 네팔 대홍수로 한국인 9명의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정부가 현지 수색·구조를 지원하기 위한 대응 인력을 20명으로 확대한다. 사고 현장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유실돼 육로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부는 헬기를 추가 투입하기 위한 네팔 당국과의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외교부는 29일 외교부 1명과 소방청 8명으로 구성된 정부 합동신속대응팀 9명을 네팔에 추가 파견한다고 밝혔다. 추가 대응팀은 이날 오후 2시 인천공항을 출발해 현지시간 오후 5시께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할 예정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 27일 임상우 외교부 재외국민보호·영사담당 정부대표를 단장으로 하는 11명 규모의 신속대응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이번 추가 파견으로 현지 대응 인력은 모두 20명으로 늘어난다. 추가 대응팀은 기존 인력과 함께 실종자 수색과 구조 지원, 네팔 당국과의 현장 접근 협의 등을 맡는다. 현재 연락이 두절된 한국인은 모두 9명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직원 6명과 한국남동발전 직원 3명으로, 이들은 네팔 북부 라수와 지역의 어퍼 트리슐리-1(UT-1)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 고립됐던 다른 한국인 10명은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정부와 기업 측은 이들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실종자 9명에 대한 수색에 대응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현장 접근이다. 이번 홍수와 토석류로 사고 지역의 도로가 크게 유실되면서 차량을 이용한 접근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정부와 기업 측은 카트만두에서 헬기를 확보해 현장 수색에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대응팀과 두산에너빌리티, 한국남동발전은 모두 6대의 헬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헬기를 확보했다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팔 당국이 추가 홍수와 산사태, 악천후 등을 이유로 헬기 운항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8일에는 한국 측이 확보한 헬기의 현장 투입이 제한됐고, 이후 남동발전 측 헬기 1대가 수색에 나섰다. 29일에는 두산에너빌리티 측 헬기 1대도 수색 투입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나머지 헬기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네팔 측과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헬기 수색은 단순한 공중 정찰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는 소방 전문인력을 추가 투입해 현장 접근이 가능해질 경우 수색 범위를 넓히고, 드론 등을 활용해 토석류가 쓸고 내려간 지역을 정밀하게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네팔 정부의 외국 구조 지원에 대한 입장 변화도 변수다. 네팔 당국은 초기에는 자국 군과 보안기관 중심으로 수색·구조를 진행하며 외국 구조팀의 직접적인 현장 투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29일부터는 수력발전소 터널 구조와 DNA 검사, 법의학 조사 등 일부 분야에 외국 전문가의 지원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네팔 정부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지원 요청을 받아왔지만 초기에는 외국 구조팀의 직접적인 수색 참여를 제한했다. 한국인 실종자 가족들은 현장 접근을 위해 헬기를 신속하게 투입하고 수색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는 이번 재해가 히말라야 고지대의 빙하 붕괴에서 시작해 얼음과 암석의 대규모 이동, 토석류와 홍수로 이어졌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전했다. 이번 재난의 규모는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다. 네팔과 중국 티베트 접경지역을 강타한 이번 재해로 네팔과 티베트 양측에서 대규모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AP통신은 네팔에서 579명, 중국 티베트에서 7명이 사망했으며 전체 실종자가 약 2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인 실종자들이 위치했던 UT-1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은 이번 재난의 직접적인 피해 지역 가운데 하나다. 현장에는 대규모 토석류가 밀려들었고 도로와 주변 시설이 훼손되면서 구조대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산악지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추가 산사태와 낙석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도 실종자 가족 지원에 나섰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국내에 있는 실종자 가족들을 직접 면담하고 수색 상황과 정부 대응 계획을 설명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실종자 9명 가운데 4명의 가족은 네팔 현지에 있으며 5명의 가족은 국내에 있다. 정부는 현지 대응팀 증원을 계기로 수색 역량을 확대하는 동시에 네팔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헬기 운항 제한을 최대한 해소한다는 방침이다. 무엇보다 실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만큼 현장 접근권을 확보하고 수색 범위를 넓히는 것이 구조의 첫 관문이 될 전망이다. 한편 이번 사고는 해외 인프라 사업 현장에서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현지 재난 대응체계와 우리 정부·기업의 구조 역량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정부는 추가 인력을 현지에 투입해 실종자 수색을 지원하고, 기업들도 자체적으로 확보한 헬기와 현장 정보를 활용해 구조 작업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네팔 홍수, 한국인 실종, 네팔 대홍수, 정부 합동신속대응팀, 두산에너빌리티, 한국남동발전, UT-1, 수력발전소, 헬기 수색, 히말라야가능해질 경우 수색 범위를 넓히고, 드론 등을 활용해 토석류가 쓸고 내려간 지역을 정밀하게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네팔 정부의 외국 구조 지원에 대한 입장 변화도 변수다. 네팔 당국은 초기에는 자국 군과 보안기관 중심으로 수색·구조를 진행하며 외국 구조팀의 직접적인 현장 투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29일부터는 수력발전소 터널 구조와 DNA 검사, 법의학 조사 등 일부 분야에 외국 전문가의 지원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네팔 정부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지원 요청을 받아왔지만 초기에는 외국 구조팀의 직접적인 수색 참여를 제한했다. 한국인 실종자 가족들은 현장 접근을 위해 헬기를 신속하게 투입하고 수색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는 이번 재해가 히말라야 고지대의 빙하 붕괴에서 시작해 얼음과 암석의 대규모 이동, 토석류와 홍수로 이어졌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전했다. 이번 재난의 규모는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다. 네팔과 중국 티베트 접경지역을 강타한 이번 재해로 네팔과 티베트 양측에서 대규모 사망·실종자가 발생했다. AP통신은 네팔에서 579명, 중국 티베트에서 7명이 사망했으며 전체 실종자가 약 2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인 실종자들이 위치했던 UT-1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은 이번 재난의 직접적인 피해 지역 가운데 하나다. 현장에는 대규모 토석류가 밀려들었고 도로와 주변 시설이 훼손되면서 구조대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산악지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추가 산사태와 낙석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도 실종자 가족 지원에 나섰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국내에 있는 실종자 가족들을 직접 면담하고 수색 상황과 정부 대응 계획을 설명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실종자 9명 가운데 4명의 가족은 네팔 현지에 있으며 5명의 가족은 국내에 있다. 정부는 현지 대응팀 증원을 계기로 수색 역량을 확대하는 동시에 네팔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헬기 운항 제한을 최대한 해소한다는 방침이다. 무엇보다 실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만큼 현장 접근권을 확보하고 수색 범위를 넓히는 것이 구조의 첫 관문이 될 전망이다. 이번 사고는 해외 인프라 사업 현장에서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현지 재난 대응체계와 우리 정부·기업의 구조 역량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정부는 추가 인력을 현지에 투입해 실종자 수색을 지원하고, 기업들도 자체적으로 확보한 헬기와 현장 정보를 활용해 구조 작업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2026-08-29 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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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만 골라 쓴다"…LG유플러스, '유독 Pick'에 AI·생활 혜택 더했다
[경제일보]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새로운 유료 구독 카테고리로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기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중심이던 구독 플랫폼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생활 혜택과 AI 서비스를 원하는 대로 골라 쓰는 방식으로 구독 플랫폼 '유독'에 혜택들을 추가하며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25일 LG유플러스는 자사의 구독 플랫폼 '유독'의 대표 상품인 '유독 Pick'에 CGV 1+1 예매권과 배달의민족, 카카오 이모티콘 플러스 이용권 등을 새롭게 추가하고 특화 AI 상품 8종을 Pick 추가 혜택으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유독 Pick은 유튜브 프리미엄, 디즈니+, 구글 AI Pro 등 주요 서비스를 메인으로 이용하면서 식음료·쇼핑 등 생활 혜택을 추가로 선택하는 상품이다. 고객은 자신의 이용 목적에 따라 혜택을 선택할 수 있고 매월 다른 혜택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 이번 개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AI 혜택 확대다. LG유플러스는 유독에서 구글 AI Pro를 비롯해 학술·전문 검색 AI '라이너', 영상 편집 AI '키네마스터', 여러 생성형 AI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우수AI' 등 총 10종의 AI 구독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가운데 8종을 유독 Pick의 추가 혜택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AI가 구독 시장의 새로운 성장 분야로 부상하면서 기존 OTT 중심의 구독 소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리서치 기업 오픈서베이의 '구독 경제 트렌드 리포트 2026'에 따르면 생성형 AI 유료 구독률은 전년 대비 8.4%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 9개 카테고리 가운데 가장 큰 상승폭이다. 반면 도서·웹툰 등을 포함한 콘텐츠 멤버십은 같은 기간 5.7% 포인트 감소했다. 소비자들이 구독 서비스를 선택하는 기준도 단순히 많은 서비스를 확보하는 것에서 실제 이용 빈도와 비용 대비 효용을 따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AI의 경우 업무와 학업, 콘텐츠 제작 등 활용 목적이 뚜렷한 만큼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사용한 뒤 다른 서비스로 바꾸려는 수요도 나타날 수 있다. 이에 LG유플러스는 매월 혜택을 변경할 수 있도록 설계된 유독 Pick의 상품 구조를 하나의 서비스를 장기간 유지하는 방식보다 여러 혜택을 조합해 비용 부담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춰 설계했다. 예를 들어 '유튜브 프리미엄 Pick 생활 혜택형'은 유튜브 프리미엄과 함께 메가커피 2잔, 배스킨라빈스·파리바게뜨 할인 쿠폰, 올리브영·다이소 기프트카드, 스노우·카카오 이모티콘 플러스 등 다양한 혜택 가운데 원하는 서비스를 매월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추가금을 지불하면 CGV 1+1 영화 예매권 1매를 이용할 수 있다. 고객이 필요에 따라 여러 개의 Pick 상품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해 OTT와 생활 혜택, AI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구조도 마련했다. 앞서 LG유플러스는 지난해에도 원하는 AI 서비스를 골라 할인받는 '유독 Pick AI'를 선보이며 AI 구독 시장에 진입한 바 있다. 당시에는 대화형 검색 AI와 특화 AI를 조합해 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품을 구성했으며, 이번에는 AI 전용 상품을 넘어 일반 유독 Pick의 추가 혜택으로 AI 서비스를 편입하면서 AI를 기존 구독 고객에게 확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AI를 별도의 전문 상품으로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OTT나 생활 서비스와 묶어 고객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조용성 LG유플러스 제휴사업담당 상무는 "이번 개편은 고객의 구독료 부담을 낮추는 동시에 고객이 원하는 혜택만 골라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핵심"이라며 "생활밀착형 혜택은 물론 국내 최대 규모의 특화 AI 라인업을 갖춘 유독 Pick을 통해 고객이 필요에 따라 AI 상품을 자유롭게 변경하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독 경험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2026-08-25 0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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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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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조 미래대응기금, 미래투자 명분이 '정부 쌈짓돈' 돼선 안 된다
[경제일보] 정부가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미래 산업과 청년 등에 장기 투자하는 '미래대응기금'을 추진한다. 기획예산처가 지난 21일 밝힌 구상에 따르면 내국세가 최근 10년 안팎의 평균 증가율을 웃돌 경우 초과분을 기금에 적립한다. 세수가 부진할 때는 기금을 재정 안전판으로 활용해 변동성을 완화한다는 구상이다. 초과세수와 세계잉여금, 여유자금 운용수익 등도 재원으로 활용한다. 구체적인 규모는 다음 달 예산안과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확정되지만 첫해부터 100조원을 넘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의 문제의식에는 일리가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크게 늘었을 때 이를 단기 소비성 지출에 모두 써버리기보다 인공지능(AI), 첨단산업, 청년, 지방, 인재 등 미래 성장에 투자하자는 방향은 평가할 만하다. 경기 호황기에 세입이 늘었다고 지출을 급격히 확대했다가 불황기에 세수가 줄면서 다시 긴축에 나서는 재정 운용의 반복도 줄어들 수 있다.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을 일종의 '재정 저수지'로 설명하는 이유다. 문제는 규모가 커질수록 통제장치도 강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100조원 안팎의 자금을 정부가 장기간 운용한다면 사실상 또 하나의 거대한 재정계정이 생기는 셈이다. 미래투자라는 명분만 앞세우고 사용처와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면 정부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쌈짓돈'이나 '슈퍼 예비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정부 설명대로 연간 기금운용계획 자체는 국회의 심사를 받는다. 다만 국가재정법 제70조는 일정 요건 아래 기금운용계획의 주요항목 지출금액을 국회에 변경안을 제출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금융성 기금은 주요항목 지출금액의 20%, 금융성 기금은 30% 범위다. 미래대응기금처럼 대규모 기금이 신설될 경우 이 운용상 재량이 국회의 사전 통제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별도의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래대응기금에는 일반 기금보다 강화된 재정통제 장치를 두는 편이 맞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 변경이나 신규 사업 편성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고 국회 심의 없이 조정할 수 있는 범위도 일반 기금보다 엄격하게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분야별 투자 한도와 사용 목적도 법률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미래라는 이름만 붙이면 무엇이든 투자할 수 있는 구조가 돼서는 안 된다. 사업 평가도 엄격해야 한다. 정부는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에 집중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분야다. 그러나 범위가 넓을수록 각 부처가 기존 사업을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기금에 얹을 가능성도 커진다. 기존 예산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업이나 단순 현금성 지원까지 미래대응기금으로 돌린다면 기금 신설의 의미가 없다. 특히 AI와 첨단산업 투자는 성과를 냉정하게 측정하는 일이 관건이다. 투입된 정부 재원이 얼마나 많은 민간투자를 끌어냈는지, 기술 수준과 생산성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일자리와 수출에 어떤 효과를 냈는지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 성과가 없는 사업은 과감하게 지원을 끊는 일몰제도 함께 검토할 만하다. 청년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 주거와 교육, 자산형성은 장기적으로 필요한 정책이지만 일회성 세수 호황을 영구적인 복지 지출의 재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번 시작한 지원은 중단하기 어렵다. 반도체 경기가 꺾여 기금 적립이 줄었을 때도 계속 지급해야 하는 사업이라면 결국 일반재정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재원의 지속 가능성은 미래대응기금의 가장 큰 숙제다. 정부 구상은 최근 10년 안팎의 내국세 증가 추세보다 세수가 더 늘었을 때 초과분을 적립하는 방식이다. 현재처럼 반도체 기업의 실적이 좋고 법인세가 크게 늘어날 때는 기금이 빠르게 쌓일 수 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3~5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될 수 있고, 세계 경기나 기술 경쟁에 따라 세수 전망이 급변할 수도 있다. 정부는 호황 때 적립하고 불황 때 꺼내 쓰는 구조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때문에 어느 수준까지 적립하고 어느 상황에서 얼마를 사용할 것인지 명확한 규칙이 필요하다. 세입이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기금을 일반회계 적자 보전에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미래투자기금이라는 성격도 흐려질 수 있다. 국가채무와의 관계도 따져볼 대목이다. 세수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왔을 때 그 돈을 모두 투자에 돌리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국가채무가 빠르게 늘어난 상황이라면 일부는 빚을 갚아 미래의 이자 부담을 줄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미래투자와 재정건전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기금에 들어오는 추가세수 가운데 일정 비율을 국가채무 상환에 우선 배분하거나, 국가채무비율과 재정수지에 따라 적립과 상환 비율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준칙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그때그때 판단하는 방식보다 사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재정 신뢰를 높인다. 기금 운용의 투명성도 중요하다. 투자 대상과 수익률, 손실, 사업별 집행 내역을 정기적으로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순리다.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평가기구를 두고 국회와 감사원이 상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수십조원의 돈이 움직이는데 의사결정 과정이 정부 내부에만 머문다면 정치적 사업이나 지역 나눠주기 예산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원칙이 유지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미래대응기금은 본질적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재정장치다. 특정 정부의 국정과제나 공약사업을 지원하는 계정이 돼서는 곤란하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기술과 시장성, 국가 경쟁력이라는 동일한 기준이 흔들리지 않아야 기금이 신뢰를 유지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벌어들인 세수를 미래에 재투자한다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저출생과 생산성 하락, 잠재성장률 둔화에 직면한 한국경제에는 이런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 재정도 단기 경기 대응을 넘어 성장의 토대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다만 좋은 목적이 좋은 제도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100조원 규모의 기금을 만들면서 통제장치가 약하다면 미래투자보다 재정 낭비의 통로가 될 위험이 더 크다. 반대로 국회 통제와 성과 평가, 재정준칙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설계하면 정부가 강조하는 신속한 미래투자의 장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통제의 균형이다. 정부가 신속하게 미래 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되 큰 돈이 움직일 때는 국회의 감시와 국민의 검증을 반드시 거치도록 해야 한다. 미래대응기금은 이름 그대로 미래를 위한 돈이어야 한다. 정부가 쓰기 편한 돈이 돼선 안 된다. 반도체 호황이 가져온 세수를 청년과 AI, 지역과 인재에 투자하겠다면 그만큼 더 엄격한 회계와 평가, 국회 통제를 받아야 한다. 미래를 위한 100조원이 정부의 쌈짓돈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기금 조성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2026-08-24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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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인선 '밀실 합의', 사법독립 위해서라도 끝내야
[경제일보] 대법관을 뽑는 절차는 법에 정해져 있다. 후보를 천거받아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심사하고, 대법원장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통령에게 제청한다. 국회가 동의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법에는 없는 절차 하나가 마지막 관문처럼 작동해 왔다. 대법원과 대통령실이 최종 후보를 놓고 사전에 의견을 맞추는 물밑 협의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18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다음 달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면 제청했다. 그동안 대법원장이 대통령실과 후보를 조율한 뒤 대통령을 만나 제청해 온 관행과 달랐다. 청와대는 “협의를 건너뛴 유례없는 일방 통보”라며 반발했고, 손 후보 제청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이번 일을 조희대 대법원장과 이재명 대통령 가운데 누가 맞느냐는 싸움으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헌법 제104조는 대법관을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제청권과 동의권, 임명권을 세 기관에 나눠 놓은 것이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를 미리 합의해야 한다는 절차는 헌법에도 법률에도 없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관행이 헌법상 절차가 될 수는 없다. 법에 없는 관행이 실제 인선에서는 법정 절차만큼이나 강하게 작동해 왔다. 양측이 뜻을 맞추면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합의가 깨지면 지금처럼 제청과 임명 절차가 멈춘다. 누가 언제까지 양보해야 하는지, 대통령이 제청된 후보를 돌려보낼 수 있는지, 대법원장이 다시 후보를 골라야 하는지 정해진 기준도 없다. 관행은 합의가 될 때 편리하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작동하는 것이 제도다. 앞단의 절차는 오히려 꽤 공개돼 있다. 후보자를 천거받고 심사 대상자의 학력과 주요 경력, 재산 관계를 공개한다. 국민 의견도 받는다. 후보추천위가 검증 자료를 살펴 후보를 압축한다. 대법원도 이런 절차를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해 왔다. 그렇게 공개 검증을 거친 후보들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면 문이 닫힌다. 대통령실이 누구를 반대했는지, 대법원은 왜 특정 후보를 고집했는지, 어떤 기준에서 이견이 생겼는지는 국민이 알기 어렵다. 앞에서는 후보자의 재산까지 내놓고 검증받으면서 정작 마지막 한 사람을 고를 때만 물밑 협의에 맡겨 온 셈이다. 그 결과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자리는 다섯 달 넘게 비었다. 후보추천위는 지난 1월 후보 4명을 추천했다. 그런데도 대법원과 대통령실의 의견 조율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8일 조 대법원장이 손 후보를 서면 제청하면서 갈등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법에 없는 협의가 풀리지 않으면서 헌법기관 구성원의 공석이 길어진 것이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제청이 이뤄지기 전 기존 후보들을 상대로 후보추천 절차를 다시 진행하는 방안까지 타진했다.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협의가 풀리지 않자 이미 끝난 추천 절차를 처음부터 되돌리는 방안이 검토된 것이다. 일부 후보가 반대하면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법에 따라 후보추천위가 후보를 골랐는데 물밑 협의가 막혔다는 이유로 법정 절차를 다시 돌리려 했다면 본말이 뒤집힌다. 후보추천위보다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비공식 합의가 더 높은 단계에 놓였다는 얘기가 된다. 법에 정해진 절차가 관행에 밀려서는 안 된다. 청와대도 대법원도 이 관행에 기대 왔다. 청와대가 오랜 관행을 근거로 사전 협의를 당연한 권한처럼 요구하면 대통령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제청 단계까지 뻗게 된다. 대법원도 대통령실과 협의를 이어오다가 합의가 깨진 뒤에야 독립된 제청권을 내세운다면 그동안 왜 법에 없는 절차에 기대 왔는지 설명해야 한다. 지금의 충돌은 바로 그 모순에서 시작됐다. 사법독립은 대통령의 개입을 막는 동시에 대법원장의 권한도 절차 안에 묶어 두는 일이다. 대법관은 대통령의 사람도, 대법원장의 사람도 아니다. 법률과 헌법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국민의 권리를 판단하는 자리다. 그런 사람을 뽑는 절차라면 누가 어떤 권한을 행사하는지부터 분명해야 한다. 사전 협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법에 넣으면 된다. 누가 의견을 낼 수 있는지, 어느 범위까지 협의할 수 있는지, 언제까지 제청과 임명 절차를 끝내야 하는지 정하면 된다. 헌법상 제청권과 임명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절차라면 없애야 한다. 지금처럼 법 밖에 둔 채 합의가 될 때는 관행이라고 따르고, 틀어지면 서로 헌법상 권한을 들고나오는 방식은 더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앞으로 대법관 인선은 더 잦아진다. 대법관 정원이 단계적으로 26명까지 늘어나면서 현 대통령 임기 동안 새로 임명되는 대법관 수도 크게 늘어난다. 현행 일정대로라면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중 최대 22명의 대법관 임명에 관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법원의 구성이 크게 바뀌는 시기에 최종 인선 방식을 비공식 합의에 계속 맡겨 둘 수는 없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바뀔 때마다 인선 방식까지 달라져서는 안 된다. 두 기관장이 뜻을 맞출 때만 굴러가는 절차라면 제도라고 하기 어렵다. 사법독립을 사람의 선의나 두 사람의 관계에 맡길 수는 없다. 헌법은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주고 국회에 동의권을, 대통령에게 임명권을 줬다. 각자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라는 뜻이다. 헌법이 나눠 놓은 권한을 밀실에서 다시 합칠 이유는 없다.
2026-08-24 09: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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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을 아파트로 채울 것인가
[경제일보] 주택 문제만큼 우리 사회의 감정을 쉽게 자극하는 정책도 드물다. 집값이 오르면 공급 확대를 외치고, 공급 대책이 나오면 개발 논란이 뒤따른다. 청년 주거 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늘리자는 주장에도 반대가 있고, 도심의 빈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목소리에도 환경과 역사 보존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만큼 주택 문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터전과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용산공원 부지 내 청년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정부·여당이 청년층의 주거 안정을 위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와 규제 완화, 도심 공급 방식 등을 놓고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여야의 정치적 공방까지 겹치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리는 모양새다. 그 질문은 간단하다. 청년들의 주거 불안을 해소하면서도 용산공원이 가진 역사적·환경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을 찾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용산공원은 평범한 국유지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군이 주둔했던 공간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상징성이 큰 곳이다. 서울 한복판에 남은 대규모 녹지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도시의 허파이자 근현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으로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주택이 절실한 청년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다. 결혼과 출산, 취업과 독립, 삶의 계획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만으로 서울에서 안정적인 주거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신뢰도 흔들린다. 청년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을 ‘집이냐 공원이냐’라는 이분법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공원을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단순하고, 공원은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역시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 도시에는 주거와 환경, 역사와 개발, 현재와 미래가 함께 존재한다. 정책은 이 가치들의 충돌을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더욱이 서울의 주택 문제는 특정 부지 하나를 개발한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서울의 집값과 전월세 불안에는 공급 부족뿐 아니라 교통망, 직주근접, 교육, 금융, 세제, 재건축·재개발 규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정부가 도심의 귀한 땅을 활용한다면 무엇보다 ‘얼마나 많이 지을 것인가’보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지을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특히 공공주택 정책에서 숫자 경쟁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몇 호를 공급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 한복판의 비싼 땅에 지은 상징적인 주택 몇 천 호가 아니라 합리적인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양질의 주택이다. 공급 지역과 교통, 생활 인프라, 임대료, 관리비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용산공원 주변을 포함한 도심 공급 전략도 보다 넓은 시야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 이전 부지, 유휴 국공유지, 철도·차량기지, 저이용 공공시설 부지, 역세권 복합개발 등 도심 곳곳에는 주택 공급과 도시 재생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기존 주거지의 재건축·재개발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드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개발 가능한 곳을 찾았다고 무조건 아파트를 올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시의 녹지와 역사문화 자산은 한번 훼손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특히 용산공원처럼 상징성이 큰 공간이라면 개발 여부뿐 아니라 장기적인 도시계획과 세대 간 형평성까지 따져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정치의 절제다. 주택 공급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반대 의견을 ‘공급을 막는 발목잡기’로 몰아서는 안 된다. 공원 보존을 주장하는 쪽 역시 주거난을 호소하는 청년들을 개발 논리에 희생되는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 자기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합리적인 해법은 사라진다. 특히 국가의 중요한 공간을 놓고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앙정부는 국가 차원의 주택 공급 필요성을 설명하고,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환경에 관한 전문적 판단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두 기관이 공개적인 검증과 협의를 통해 최선의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립적인 전문가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용산공원의 역사·환경적 가치와 주택 공급의 필요성을 동시에 평가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와 장기적인 도시계획을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한번 결정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은 신중하게 결정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공원은 한번 훼손하면 복원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반면 청년 주거 문제는 용산공원 하나에 모든 해법을 걸지 않고도 여러 지역과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치밀한 비교와 검토가 필요하다. 동시에 정부는 용산공원 논란을 핑계로 청년 주택 공급을 미뤄서도 안 된다. 청년 주거 안정은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도심 곳곳의 유휴부지를 찾아 공급을 확대하고, 역세권 고밀 개발과 재건축·재개발을 합리적으로 활성화하며, 공공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공급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에는 늘 비용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고, 그 편익을 누가 누리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용산공원을 지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다. 청년에게 안정적인 집을 제공하는 것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이다. 용산공원이 정쟁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청년 주거 문제가 정치적 구호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숫자를 앞세운 밀어붙이기도, 보존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무조건적인 반대도 아니다. 청년에게는 집을, 시민에게는 공원을, 도시에는 미래를 남기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 한쪽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이고 협치의 출발점이다.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이 또 하나의 소모적인 정치 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서울의 주택 공급과 도시계획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집값을 잡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도시의 소중한 자산을 잃어서도 안 되고, 공원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청년들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과거를 지키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도시정책이고, 지금 우리 정치가 보여줘야 할 상식이다.
2026-08-23 1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