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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파병, 동맹 중요하지만 국익도 계산하라
[경제일보]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둘러싼 정부의 태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그동안 신중론을 펴던 정부가 미국의 공개적인 압박 속에 파병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 등 군사적 자산의 파견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국가의 군사적 판단이 국제정세와 동맹의 요구에 따라 크게 흔들린다면 국민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외교·안보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잘못된 선택 못지않게 원칙 없는 정책 변화다. 파병 여부를 결정한다면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국익이라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부정할 국민은 많지 않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현실인 상황에서 미국과의 안보협력은 대한민국의 핵심적인 전략자산이다. 그렇다고 동맹국의 요구라면 우리의 군대를 어디든 보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맹에도 각자의 국익이 있고 각국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위험에도 차이가 있다. 미국이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하듯 대한민국 역시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냉정하게 따져야 할 것은 경제적 손익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경제의 핵심 에너지 수송로다. 이곳의 안정과 항행의 자유가 흔들리면 국제유가와 해상운임, 보험료 등이 뛰어 우리 경제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분명 대한민국의 중요한 국익이다. 그러나 해협의 안전을 지키는 것과 군사적 충돌의 당사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 군의 파병이 실제로 항행의 안전을 높이는지, 아니면 중동의 군사적 긴장을 키워 유가와 해상보험료를 오히려 끌어올리는지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최악의 경우 한국이 군사적 대립의 한쪽으로 인식되면서 이란의 보복 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원유 수급을 안정시키려던 파병이 오히려 에너지 안보를 위협하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간단하지 않다. 한국 기업들은 중동 곳곳에서 건설·플랜트·에너지·물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경제적 관계가 군사적 선택 하나로 흔들릴 가능성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현지 교민과 기업의 안전 역시 정부가 우선적으로 따져야 할 변수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외교적 이익이 파병에 따른 경제적 위험과 장병의 안전 문제를 상쇄할 만큼 큰지 국민 앞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정말 파병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다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미국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우리에게 어떤 외교·안보상의 실익이 있는지, 원유 수송과 에너지 안보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파병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위험은 어느 정도인지 공개해야 한다. 우리 장병의 임무와 교전 상황 발생 시 대응 범위, 교민과 기업 보호 대책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호르무즈 문제를 한미동맹의 충성도 시험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동맹은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관계가 아니다. 동맹을 지키는 것과 동맹국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어려운 사안에서 우리의 국익과 국민적 우려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협상하는 것이 성숙한 동맹의 모습이다. 지금 세계는 자국의 경제와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국익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자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한다. 대한민국만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손익계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군사적 파병은 명분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끝까지 따져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에 기여하는 방법이 반드시 우리 군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외교적 협력과 국제적 해상안전 활동은 물론 원유 수입선 다변화, 비축유 확대, 대체 수송로 확보 등 다양한 수단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는 군함 한 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를 지키는 종합 전략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파병 여부는 국민과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 할 사안인 만큼 충분한 설명과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도 정부가 파병 검토의 배경과 실익을 국회에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이제 미국의 표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손익계산서를 펼쳐놓고 결정해야 한다.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국민을 설득하고 당당하게 추진하면 된다. 반대로 위험과 비용이 편익보다 크다면 동맹국에도 그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방식의 기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권국가의 외교다. 호르무즈 파병 논란은 정부 외교의 시험대다. 동맹을 중시하되 동맹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에너지 안보를 지키되 군사적 위험을 무분별하게 떠안아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우리 장병의 생명과 국민의 안전, 국가 경제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외교적 명분은 없다. 정부는 더 이상 정치적 유불리에 흔들리지 말고 분명한 원칙과 냉정한 손익계산으로 국민 앞에 서야 한다.
2026-09-07 10: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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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리 인상, 한국 경제에 던진 세 가지 경고
[경제일보] 일본은행이 움직였다. 16일 일본은행은 단기 정책금리를 0.75%에서 1.0%로 0.25%포인트 올렸다. 1995년 이후 3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결정 배경은 분명하다. 미국·이란 전쟁이 남긴 에너지 가격 충격, 호르무즈 해협 불안, 공급망 훼손, 그리고 기업 간 가격 전가가 소비자물가로 번질 가능성이다. 일본은행이 중동발 인플레이션 위험과 엔화 약세를 금리 인상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은 총성과 함께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유조선 항로로 오고 해상보험료로 오고 원유 선물 가격으로 오며 중앙은행 회의장 의사봉 소리로 온다. 미국과 이란 간 긴장이 완화되고 유가가 하락했다는 소식도 있지만 그것이 곧 물가 위험의 종료를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 브렌트유가 배럴당 78.96달러까지 떨어졌지만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과 공급 정상화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일본의 금리 인상이 일본만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에는 적어도 세 가지 경고가 담겨 있다. 첫째는 환율 경고다. 둘째는 물가 경고다. 셋째는 금리 경고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 금리와 달러 흐름에 주로 신경을 써왔다. 그러나 일본이 저금리 시대의 끝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아시아 자금 흐름도 달라진다. 엔화 금리가 오르면 엔 캐리 트레이드의 매력은 약해진다. 낮은 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던 돈의 일부는 되돌아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신흥시장 통화와 주식, 채권은 변동성을 맞는다. 원화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일본 금리 1.0%는 여전히 미국이나 한국보다 낮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 수준보다 방향이다. 일본은행이 “더 이상 무제한 완화의 시대에 머물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순간, 시장은 일본 자금의 귀환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한국 채권시장에는 장기금리 상승 압력으로, 주식시장에는 외국인 수급 불안으로, 외환시장에는 원·엔, 원·달러 변동성 확대로 나타날 수 있다. 물가에도 경고음을 울렸다. 한국은 일본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낮다고 말하기 어렵다. 원유와 LNG, 석유제품 가격이 오르면 기업 원가가 먼저 오른다. 이어 전기요금, 운송비, 항공료, 식품 가격, 외식 가격으로 번진다. 이미 한국의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3.1%로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석유류 가격과 국제항공료 상승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국은행이 올해 물가 전망을 2.2%에서 2.7%로 올렸고 향후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가가 무서운 것은 한 번 오르면 제자리로 쉽게 돌아오지 않는 데 있다. 원유 가격이 내려도 물류비와 인건비, 가공비를 거쳐 소비자가격에 붙은 인상분은 남는다. 일본은행이 우려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기업 간 거래에서 시작된 가격 전가가 소비자 단계의 광범위한 품목으로 번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일본은행 결정을 보면 원유 가격 상승이 기업 간 가격 전가를 빠르게 만들고 이것이 소비자물가로 파급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한국은행도 같은 길목에 서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물가안정에 중점을 두고 늦지 않게 금리를 인상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주요 중앙은행의 긴축 전환은 한국은행의 하반기 금리 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경고는 정책의 착시다. 유가가 하루 이틀 떨어졌다고 해서 물가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전쟁 프리미엄이 빠지는 속도보다 공급망의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느리다. 에너지 인프라가 손상됐고 보험료와 운임, 재고 확보 비용은 이미 기업 장부에 반영됐다. 유럽중앙은행 인사들도 중동 긴장이 완화된 뒤에도 에너지 가격 압력이 남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경제의 딜레마는 여기서 깊어진다. 금리를 올리면 가계부채와 내수에 부담이 간다. 금리를 묶어두면 물가와 환율이 흔들린다. 한국은 가계부채가 크고 자영업 경기의 회복력도 약하다. 그렇다고 물가를 방치할 수도 없다. 중앙은행이 물가 기대를 놓치면 훗날 더 큰 금리 인상으로 되갚아야 한다. 지금의 0.25%포인트는 고통스럽지만 뒤늦은 1%포인트는 더 잔인하다. 기업에도 메시지는 분명하다. 일본 금리 인상은 단순한 금융 뉴스가 아니다. 에너지 조달, 원자재 재고, 환헤지, 차입 구조, 해외 생산망을 다시 점검하라는 경고장이다. 특히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항공, 해운 등 에너지와 환율에 민감한 업종은 ‘전쟁 이후’가 아니라 ‘전쟁의 비용이 장부에 남는 시간’을 봐야 한다. 원가 상승분을 가격에 전가할 수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실적 격차도 커질 것이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심성 보조금 경쟁이 아니다. 에너지 취약계층과 물류·운송·중소 제조업에 대한 정밀 지원, 전략 비축, 수입선 다변화, 전력망 투자, 환율 급변 대응 장치가 필요하다. 통화정책이 물가 기대를 붙잡는다면 재정정책은 충격이 가장 약한 곳으로 몰리지 않도록 완충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브레이크를 밟고 정부는 안전벨트를 채워야 한다. 동양 고전 <춘추좌씨전>에는 ‘안거위사(安居危思)’라는 말이 있다.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유가가 조금 내렸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일본이 금리를 올렸다는 것은 이웃 나라 중앙은행이 위험을 먼저 본 것이다. 한국이 그 경고를 남의 일로 흘려듣는다면 다음 차례는 원화와 물가와 가계 이자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본의 금리 인상은 한국 경제에 묻고 있다. 우리는 전쟁이 남긴 비용을 제대로 계산하고 있는가. 물가를 잡겠다는 의지는 충분한가. 환율과 자본시장 변동성에 대비하고 있는가. 답은 어렵지 않다. 지금은 낙관보다 대비가 필요한 시간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는 착각이다.
2026-06-17 17: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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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건 경제 불확실성이다
[경제일보] 전쟁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총성이 멎은 뒤에도 전쟁은 유가에 남고 환율에 남고 물류비에 남고 기업의 투자계획서와 가계의 장바구니에 남는다. 미국과 이란이 전쟁 종식과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합의했다는 소식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계 금융시장은 즉각 안도했다. 국제유가는 급락했고 주요 증시는 반등했다. 전쟁 프리미엄이 빠지자 시장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환호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가 아니라 냉정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경제 불확실성이다. 휴전문서 한 장이 원유 생산시설을 하루아침에 복구하지 못한다. 해협 재개방 선언이 곧바로 선박 보험료를 낮추지도 않는다. 국제유가가 하루 이틀 떨어졌다고 해서 물가가 곧장 안정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은 정치적으로는 합의로 끝나지만 경제적으로는 비용 청구서가 도착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번 미국·이란 전쟁이 세계경제에 남긴 첫 번째 상처는 에너지 시장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가 지나는 핵심 길목이다. 그 길목이 전쟁의 인질이 되자 세계는 다시 한 번 에너지 안보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경제 생존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합의 이후 브렌트유 가격은 급락했지만 이것은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단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유가가 내려도 공급망은 즉시 회복되지 않는다. 산유국의 생산설비, 정제시설, 항만, 보험, 선박 운항, 금융결제망은 모두 시간이 필요한 시스템이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기억이다. 한번 흔들린 시장은 쉽게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사들은 통항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선언보다 실제 항로의 안전을 본다. 보험사는 합의문보다 재발 가능성을 계산한다. 정유사와 항공사, 석유화학 기업은 현물가격보다 3개월 뒤, 6개월 뒤의 조달 안정성을 본다. 그래서 전쟁 뒤의 경제는 늘 ‘안정’이 아니라 ‘안정 확인’의 시간을 요구한다. 불확실성은 가격 그 자체보다 더 비싸다. 이번 합의는 세계 중앙은행에도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전쟁 중 급등한 에너지 가격은 물가를 밀어 올렸다. 유가가 떨어지면 물가 압력은 완화되지만 이미 오른 운송비와 원재료비, 기대인플레이션은 시차를 두고 경제 전반에 스며든다.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물가가 불안하면 움직이기 어렵다. 금리를 유지하면 경기 회복은 더뎌지고 금리를 내리면 다시 물가와 환율이 흔들릴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통화정책의 안개는 더 짙어질 수 있다. 한국경제에는 이 불확실성이 더 예민하게 작용한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큰 나라다. 원유와 가스 가격이 오르면 기업의 생산비가 먼저 오른다. 정유·화학·철강·항공·해운은 물론이고 전력비 부담이 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산업에도 파장이 간다. 유가가 오르면 무역수지가 흔들리고 무역수지가 흔들리면 환율이 불안해진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뛰고 수입물가가 뛰면 소비자물가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중동의 포성이 서울의 주유소 가격표와 서민 밥상으로 번지는 구조다. 합의 이후 유가가 안정된다면 한국경제에는 분명 숨통이 트인다. 기업의 원가 부담은 줄고 항공·해운·석유화학·자동차 등 에너지 민감 업종은 불확실성을 덜 수 있다. 고유가에 짓눌렸던 소비심리도 일부 회복될 수 있다. 환율 안정은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에도 긍정적이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부담이 낮아지면 한국경제는 다시 회복 궤도에 올라설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경기 반전의 신호로 과대해석해서는 안 된다. 종전 합의가 곧 경기부양책은 아니다. 전쟁은 이미 비용을 남겼다. 기업들은 몇 달 동안 비싼 원료와 물류비를 감당했다. 일부 기업은 납기와 계약조건을 조정했고 일부 가계는 고유가와 고물가 속에서 소비를 줄였다. 한번 미뤄진 투자는 다시 집행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한번 닫힌 소비지갑은 유가가 떨어졌다는 뉴스 하나로 곧바로 열리지 않는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봐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지금 필요한 정책은 ‘전쟁이 끝났으니 정상화됐다’는 낙관론이 아니라, ‘전쟁이 끝났지만 불확실성은 남았다’는 위험관리다. 물가가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 통화정책은 신중해야 한다. 동시에 취약계층과 에너지 다소비 업종에는 선별 지원이 필요하다. 고유가의 부담은 모든 국민에게 같지 않다. 대기업은 헤지와 장기계약으로 버틸 수 있지만 영세 자영업자와 운송업자, 농어민, 저소득층은 유가 변동을 그대로 맞는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 같은 단기 처방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 한시적 완충장치는 있어야 하지만 재정 여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전략비축 체계 점검, 핵심 원자재 공급망 확보, 항만·해운 리스크 관리, 기업의 환율·유가 헤지 역량 강화다. 전쟁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싸게 사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효율만 따지던 공급망의 시대가 저물고, 회복탄력성을 따지는 공급망의 시대가 왔다. 기업도 달라져야 한다. 중동 리스크를 일시적 외부 변수로만 볼 수 없다. 지정학은 이제 재무제표의 바깥에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가, 환율, 운송, 보험, 재고, 투자, 배당까지 모두 흔드는 변수다. 최고경영자는 매출 목표만이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 시나리오를 들여다봐야 한다. 에너지 가격이 배럴당 70달러일 때와 100달러일 때, 호르무즈 통항이 정상일 때와 부분 제한될 때, 환율이 100원 더 오를 때의 손익을 따져야 한다. 위기 대응은 전쟁이 난 뒤 만드는 문서가 아니라 평시에 쌓아두는 체력이다. 금융시장도 안도 랠리에 취해서는 안 된다. 전쟁 합의 이후 주가가 오르고 유가가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종종 정치적 이벤트에 먼저 환호하고 실물경제의 복구 속도를 뒤늦게 확인한다. 유가 하락이 물가 안정으로 이어질지, 물가 안정이 금리 인하로 이어질지, 금리 인하가 소비와 투자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열린 질문이다. 지금의 시장 반등은 ‘평화 배당’이라기보다 ‘공포 할인 해소’에 가깝다. 여기서 고전의 지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은 “용병을 잘하는 자는 다시 징병하지 않고, 군량을 세 번 싣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싸움터에서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보급의 비용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경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실력은 전쟁의 승패보다 전쟁 뒤 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에서 드러난다. 에너지, 물류, 금융, 물가, 환율의 보급선을 관리하지 못하면 평화의 이름 아래서도 경제는 계속 흔들린다. 이번 미국·이란 합의는 세계경제에 시간을 벌어줬다. 하지만 시간을 번 것과 문제를 해결한 것은 다르다.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린다고 해도 세계경제는 이미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봤다. 국제유가가 내려간다고 해도 한국경제는 수입 에너지 의존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증시가 오른다고 해도 기업과 가계가 체감하는 불확실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책당국은 이제 세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유가·환율·물류비의 변동이 물가와 산업별 비용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추적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망을 장기계약·비축·대체선 확보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셋째, 전쟁 이후 완화된 시장 분위기를 구조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가 지나가면 개혁의 긴장도 함께 풀린다. 그러나 다음 위기는 늘 우리가 방심할 때 온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경제 불확실성이다. 전쟁은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끝났다는 선언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숫자와 가격과 계약과 기대 속에 남아 서서히 비용을 청구한다. 지금 한국경제가 해야 할 일은 평화의 뉴스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경제의 균열을 차분히 메우는 일이다. 평화는 합의문으로 시작되지만 경제의 안정은 준비된 국가만이 얻을 수 있다.
2026-06-16 15: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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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는 한국 경제의 생명선"…에너지·통상 전문가들, 공급망 취약성 경고
[경제일보] “호르무즈는 말 그대로 우리 경제의 중요한 생명선입니다.” 20일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2026 제1차 기후경제통상포럼: 호르무즈 쇼크와 에너지 지정학, 한국의 생존 전략’ 세미나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국제통상학회와 한국자원경제학회가 공동 주최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위기가 한국 산업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에 미칠 영향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고, 중동산 에너지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정 원장은 호르무즈 사태가 단순한 원유 문제가 아니라 산업 공급망 전반의 복합 충격으로 번질 수 있다고 봤다. 특히 나프타와 헬륨 수급 불안이 주요 변수로 거론됐다. 나프타는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이고, 헬륨은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인다. 원유 수송 차질이 석유화학과 반도체 등 한국 주력 제조업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도 공급망 구조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정성 산업통상부 통상차관보는 “특정 국가와 특정 운송 경로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리스크는 결국 다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룰 기반 무역 질서가 흔들리는 전환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다. 공급망 재편 과정은 “달리는 자전거를 갈아타는 것”에 비유됐다. 기존 거래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수입선과 운송 경로를 확보해야 하는 만큼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비용과 위험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호르무즈 리스크가 에너지 가격 상승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호르무즈 해협이 원유뿐 아니라 LNG와 석유제품의 주요 운송로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 세계 LNG 물동량의 약 2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만큼 운송 차질이 발생하면 가격 충격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석유화학 업계도 영향권에 들어간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NCC 중심 구조로 운영된다. 나프타 가격이 오를수록 원가 부담이 커지고,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이미 수익성이 낮아진 화학업계에는 추가 부담으로 이어진다. LNG 가격 상승도 제조업 전반의 전력 비용과 연결된다. LNG는 국내 발전 연료 중 하나로, 수급 불안이 장기화하면 전력 도매가격과 산업용 전기요금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2차·3차 충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유가 상승은 식량 가격과 물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저 케이블 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 원유 수송 차질을 넘어 디지털 인프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중 자원 패권 경쟁도 주요 변수로 다뤄졌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에너지 수입국에서 순수출국으로 전환했다. 중동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중동 분쟁에 대한 전략적 부담도 과거보다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에 비해 전문가들은 중국이 희토류 공급망을 앞세워 무기화할 수 있는 국가로 부상했다고 입을 모았다. 희토류는 전기차, 풍력터빈, 반도체 장비뿐 아니라 첨단 무기 체계에도 쓰이는 핵심 자원이다. 미국조차 희토류 공급망 탈중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한국도 높은 대중 의존도를 고려해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국의 수출 통제 방식도 과거보다 정교해졌다는 분석이다. 희토류 통제가 단순한 금지가 아니라 허가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만큼 통제를 조였다 풀었다 하며 상대국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제언도 이어졌다. 전략 비축과 수입선 다변화, 자원 확보 체계 정비가 주요 과제로 꼽혔다. 한국은 전략 비축은 비교적 잘하고 있지만, 다른 대응 체계는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평가다. 에너지 안보를 단순한 자원 조달 문제가 아니라 경제 안보와 산업 경쟁력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미 원유와 LNG 공급 불안이 에너지 가격을 흔들고 있고, 나프타와 헬륨 수급 차질은 석유화학·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원가와 생산 안정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날 포럼에서는 호르무즈 위기가 단기적인 국제 유가 급등 이슈를 넘어 한국 산업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 △핵심 자원 확보 △비축 체계 강화가 앞으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과제이자 해결해야 할 문제다.
2026-05-20 17: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