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3건
-
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 외교의 좌표는 국익이다
[경제일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서울에 왔다. 중국 외교 수장의 단독 방한은 약 5년 만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왕 부장은 19일 서울에서 마주 앉아 한중 관계와 한반도 정세, 경제협력을 논의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투자 후속협상, 공급망 안정, 인적·문화 교류 확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양국을 오가는 인적 교류가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얼어붙었던 관계가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것은 반길 일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옮길 수 없는 이웃이고, 한국 기업의 거대한 시장이며, 반도체·배터리·핵심광물 공급망에서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상대다. 북한 문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조 장관이 북한의 조속한 대화 복귀를 위해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요청했고, 왕 부장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답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문제는 한중 관계가 움직일 때마다 되살아나는 질문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질문부터 잘못됐다. 대한민국이 한미동맹을 외교·안보의 근간으로 삼는 것과 중국과 경제·외교 협력을 확대하는 것은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 거세질수록 선택을 강요받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국 외교가 모든 사안을 ‘친미냐 친중이냐’의 두 칸짜리 표에 넣는 순간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게 된다. 과거 한중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쓰던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한다)’는 공식도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수출상품이면서 안보자산이고, 배터리는 산업이면서 공급망 전략이다. 희토류와 핵심광물은 원자재인 동시에 외교적 지렛대가 됐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첨단 장비와 소프트웨어에는 수출통제와 동맹정책이 얽혀 있다. 경제와 안보를 각각 워싱턴과 베이징이라는 두 서랍에 나눠 담을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에도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우선 안보의 축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안보의 기초였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그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크다. 이를 미중 사이의 단기적 거래대상처럼 다루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국과 관계를 개선한다고 한미동맹의 신뢰에 의문을 만들 이유도 없다. 다만 동맹이라고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모든 문제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왕 부장이 서울에 도착한 19일 조 장관은 국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연합훈련 규모와 기간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 관계자들조차 사전에 이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과 미국은 당초 11일 일정이던 연합훈련을 5일로 줄이고, 일부 야외기동훈련도 축소하기로 했다. 동맹도 각자의 국익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중동 문제, 한국의 대미 투자 등 여러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한다. 한국 역시 미국의 정책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동맹 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동맹은 서로의 국익을 솔직하게 조정할 수 있을 때 오래간다. 중국에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중국과 경제협력은 확대하되 상호주의와 공급망 안전이라는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외교장관회담에서 양국이 FTA 서비스·투자 협상과 공급망 안정에 협력하기로 한 것은 실용적인 접근이다. 우리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불필요한 규제를 덜 받고 서비스와 투자 분야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면 협상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공급망 안정이라는 말이 중국 의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해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소재 하나, 배터리 원료 하나가 특정 국가의 정책 변화로 막혀 공장이 흔들리는 일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중국과 안정적인 공급선을 유지하는 것과 공급원을 중국 하나에 맡기는 것은 정반대의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탈중국도, 재중국화도 아니다. 중국과 거래하되 중국이 멈춰도 버틸 수 있는 공급망이다. 반도체도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에 중요한 시장이고 한국 기업 역시 중국에 대규모 생산기반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정치적 구호만으로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반면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가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에 놓인 상황에서 안보와 기술유출 문제를 무시한 사업 확대 역시 위험하다. 때문에 분야별 기준이 필요하다. 범용 메모리와 소비재에서는 시장 논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첨단 AI 반도체와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있는 기술에는 보다 엄격한 안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배터리는 중국과 거래하면서 원료 조달국을 넓히고, 핵심광물은 구매계약과 동시에 비축·재활용·대체소재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 북한 문제에서도 중국에 ‘기대할 것’과 ‘기대하지 말 것’을 구분해야 한다. 중국은 북한의 중요한 우방이고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다. 왕 부장은 이번 회담에서 한국과 북한이 평화와 공존의 기회를 찾아가길 바란다며 중국이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대화 복귀에 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중국의 역할을 요청하는 것과 북한 문제를 중국에 맡기는 것은 다르다. 베이징의 대북정책에는 중국 자신의 전략적 이해가 있다. 중국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한국이 원하는 비핵화·평화체제가 모든 지점에서 같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왕 부장 역시 이번 방한에서 한국이 ‘근본적 이익’에 따라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길 희망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공개된 발언이다. 이 말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미국이 한국에 선택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듯 중국 역시 한미동맹이나 한국의 대외정책에 사실상의 선택지를 제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독립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면 그 독립성은 워싱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베이징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국익에 따라 미국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에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주외교다. ‘논어’ 자로편에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려 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동맹이라고 모든 정책이 같을 필요는 없다. 중국과 협력한다고 중국의 전략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 외교다. 모든 사안에서 같은 편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동맹에도, 협력관계에도 건강하지 않다. 오는 11월 선전 APEC은 이를 시험할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적극 검토하고 있고, 왕 부장은 조현 장관의 중국 방문도 제안했다. 관계 복원을 정상회담 사진 한 장으로 끝내지 말고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미리 정리해야 한다. 대중 외교의 성적표는 정상회담 횟수가 아니다. 우리 기업의 시장 접근성이 나아졌는가. 핵심광물과 부품 공급이 더 안정됐는가. 중국 내 한국 기업이 부당한 차별을 덜 받게 됐는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대화를 복원하는 데 중국이 실제로 역할을 했는가. 문화와 관광 분야의 비정상적 장벽이 줄었는가. 이런 구체적인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한미관계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면 된다. 주한미군과 확장억제는 얼마나 안정적인가. 첨단기술 협력에서 한국 기업이 어떤 몫을 얻는가. 막대한 대미 투자가 국내 산업과 일자리에 어떤 결과를 남기는가. 미국의 정책 변화가 한국 기업에 과도한 비용을 떠넘길 때 정부가 얼마나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는가를 봐야 한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가운데 서는 기술이 아니다. 사안마다 어디에 서야 국익이 커지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다. 안보에서는 동맹의 신뢰를 지키고, 경제에서는 시장을 넓히며, 공급망에서는 의존을 줄이고, 기술에서는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 북핵 문제에서는 미국과 공조하면서 중국의 역할도 끌어내야 한다. 하나의 문장으로 모든 외교 문제를 설명하려는 순간 현실은 그 문장보다 복잡해진다. 왕 부장의 방한을 친중 외교의 신호로 읽을 필요도, 한미동맹의 균열로 볼 이유도 없다.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해야 할 외교이고, 한미동맹을 굳건히 관리하는 것 역시 해야 할 외교다.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비로소 외교 노선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편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원칙이 분명하다면 미국에는 동맹으로 당당할 수 있고 중국에는 이웃으로 실용적일 수 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오래된 질문을 버리고, ‘이 선택이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기는가’를 묻는 것. 왕 부장의 5년 만의 방한이 한국 외교에 던진 가장 중요한 숙제다.
2026-08-20 09:06:55
-
-
'5대짜리 혁명'의 진실…중국 DUV, ASML 성벽에 첫 균열
[경제일보] 중국이 올해 생산한다는 액침형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는 5대다. 네덜란드 ASML이 올해 출하할 것으로 예상되는 액침형 DUV 장비 약 130대와 비교하면 4%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한 곳에 필요한 장비 수를 감안하면 생산라인을 바꾸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그런데 세계 증시는 이 5대에 크게 흔들렸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액침형 DUV 장비 생산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오자 ASML 주가는 장중 8% 넘게 떨어졌다가 5.8% 하락 마감했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각각 13%, 14% 넘게 급락했다.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CXMT)의 증시 상장과 AI 산업의 투자 수익성 논란, 외국인 매도와 레버리지 청산이 겹쳤지만 중국산 DUV 소식이 불안을 증폭한 것은 분명하다. 시장의 반응만 보면 중국이 당장 ASML을 대체하고 한국 메모리 산업을 추월할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과장이다. 반대로 장비 5대를 만들어낸 일을 선전용 행사로만 치부하는 것도 위험하다. 중국산 DUV의 현재 사업 가치는 작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산업의 방향은 가볍지 않다. ◆ 노광장비 한 대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문제 노광은 반도체 회로가 그려진 마스크에 빛을 쏘아 웨이퍼 위 감광액에 회로를 새기는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에서 사진 인화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요구되는 정밀도는 전혀 다르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분의 1에 해당하는 회로를 웨이퍼 위 수십 개 층에 반복해 정확히 포개야 한다. DUV는 193나노미터 파장의 불화아르곤 레이저를 사용한다. 액침형 DUV는 렌즈와 웨이퍼 사이에 초순수를 채워 빛의 굴절률과 렌즈의 개구수를 높인다. 같은 파장의 빛으로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도록 만든 기술이다. ASML의 최신 액침형 DUV 장비는 시간당 300장 이상의 웨이퍼를 처리하면서 1나노미터 이하 수준의 오버레이 정밀도를 목표로 한다. 오버레이는 여러 차례 노광한 회로가 얼마나 정확하게 겹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해상도가 좋아도 위아래 회로가 어긋나면 칩은 작동하지 않는다. 노광장비의 경쟁력은 ‘몇 나노를 찍었느냐’만으로 판정할 수 없다. 시간당 웨이퍼 처리량, 장비 가동률, 오버레이 오차, 초점 제어, 결함 밀도, 장비 간 편차, 유지보수 시간과 소모품 수명까지 모두 맞아야 한다. 연구실에서 회로 하나를 그리는 것과 매일 수천 장의 웨이퍼를 같은 품질로 생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ASML의 진입장벽도 장비 설계도 한 장에 있지 않다. 독일 자이스가 공급하는 초정밀 광학계, 레이저 광원과 웨이퍼 스테이지, 계측 장비, 보정 소프트웨어, 수십 년간 축적한 공정 데이터와 글로벌 유지보수망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다. 장비가 고장 났을 때 몇 시간 안에 복구할 수 있는 현장 인력과 부품 공급망도 경쟁력이다. ASML의 시장 지위는 기계 한 대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만든 결과다. ◆ 863계획에서 아이성나까지 이어진 20년 중국의 노광장비 개발은 최근 시작된 프로젝트가 아니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 초 국가 첨단기술 개발계획인 ‘863계획’을 통해 노광장비 국산화에 착수했다. 2002년 설립된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는 건식 DUV 장비를 개발한 뒤 액침형 장비로 영역을 넓혀왔다. 초기 중국 장비는 90나노급 공정에 머물렀다. 해상도를 높이더라도 처리량과 오버레이, 장시간 안정성이 부족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주력 생산라인에 투입하기 어려웠다. 중국은 이후 광학, 정밀 스테이지, 광원, 계측과 제어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기업과 연구기관을 나눠 육성했다. 이번에 주목받은 아이성나는 2023년 상하이에 설립된 국유자본 지원 기업으로 알려졌다. 설립된 지 2∼3년에 불과한 회사가 갑자기 액침형 DUV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SMEE와 별도 장비업체, 연구기관에 축적된 인력과 기술을 결집한 프로젝트에 가깝다. 기업의 나이는 짧아도 기술 계보는 20년 이상 이어진 셈이다. 보도에 따르면 아이성나는 올해 5대, 2027년 20대의 액침형 DUV 장비를 생산할 계획이다. 초기 공급 대상으로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SMIC와 화훙반도체, D램 업체 CXMT가 거론된다. 다만 장비의 공식 성능표와 고객사 양산 인증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생산을 시작했다’는 표현과 ‘상업적 대량생산에 사용할 수 있다’는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 28나노 장비를 7나노 장비로 부를 수 없는 이유 중국 장비의 목표는 단일 노광 기준 28나노급으로 알려졌다. 28나노는 액침형 DUV가 한 번의 노광으로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정 구간이다. DUV로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리는 방법도 있다. 한 장의 복잡한 회로를 두 개나 네 개의 단순한 패턴으로 나눈 뒤 노광과 식각을 반복하는 다중 패터닝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14나노와 10나노 이하 회로도 구현할 수 있다. 중국이 수입산 DUV를 활용해 7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한 것도 이러한 공정 기술과 관련돼 있다. 그러나 28나노 장비로 7나노급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설명과 7나노 전용 장비를 확보했다는 말은 같지 않다. 노광 횟수가 늘면 마스크와 식각·증착 공정도 증가한다. 생산시간이 길어지고 장비 사용량과 전력, 소재 비용이 커진다. 매번 회로를 정밀하게 포개야 하므로 오버레이 오차가 누적되고 수율도 떨어질 수 있다. 반도체 생산비는 노광장비 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 장의 웨이퍼가 생산라인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양품 칩의 비율이 더 중요하다. 동일한 7나노급 칩을 만들더라도 EUV를 활용한 공정과 DUV 다중 패터닝 공정의 원가와 생산성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중국산 DUV가 28나노 회로를 한 번 찍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 최첨단 반도체 양산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장비 출하 뒤에 기다리는 ‘죽음의 계곡’ 새 장비가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면 설치 직후 생산에 투입되지 않는다. 우선 장비가 제시된 해상도와 오버레이 성능을 반복해 구현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장비에서 생산한 웨이퍼와 결과가 일치하는지도 검증한다. 특정 장비만 다른 결과를 내면 전체 공정을 따로 설계해야 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결함 검증은 더 까다롭다. 미세한 입자나 온도 변화, 진동, 렌즈 왜곡과 광원 불안정이 웨이퍼 수율에 영향을 미친다. 하루나 일주일 동안 정상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개월 이상 연속 가동하면서 성능과 부품 수명, 고장 빈도와 복구 시간을 입증해야 한다. 고객사의 공정 레시피와 연결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노광장비는 식각·증착·세정·검사 장비와 맞물려 작동한다. 노광 결과가 달라지면 전후 공정의 조건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장비 인증에는 제조사뿐 아니라 팹의 공정 엔지니어, 소재 업체, 마스크와 계측 기업이 함께 참여한다. 중국산 장비가 넘어야 할 벽은 최초의 5대를 조립하는 일이 아니라 이 장비를 고객 생산라인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가동하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5대는 연구·시험 장비에 머문다. 반대로 초기 장비에서 발생한 오류와 수율 데이터를 축적해 20대, 50대로 개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왜 하필 5대인가 중국이 올해 5대만 생산하는 이유는 수요가 없어서라기보다 공급망과 조립 역량이 아직 제한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노광장비에는 수만 개의 정밀 부품이 들어간다. 렌즈와 광원, 스테이지, 모터, 센서, 진동 제어장치와 정밀 계측 부품 가운데 하나만 공급이 늦어져도 완제품을 만들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산 장비에는 아직 일본 등 해외에서 들여오는 일부 핵심 부품이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 내 부품업체의 납기와 품질 문제도 생산 확대를 제약하고 있다. ‘국산 장비’라는 표현이 모든 부품의 100% 중국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장비는 부품만 있다고 대량 조립할 수도 없다. 완성된 장비마다 광학계와 스테이지를 정밀하게 보정해야 한다. 생산량을 늘릴수록 장비 간 편차를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단계에서 제조 노하우와 숙련 인력의 차이가 드러난다. ASML이 장기간에 걸쳐 공급망과 생산설비를 확충하고도 연간 액침형 DUV 출하량을 100여 대 수준으로 관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목표가 2026년 5대에서 2027년 20대로 늘어난다는 것은 생산능력이 네 배로 커진다는 의미이지만 ASML과의 규모 차이는 여전히 크다. ◆ ‘낡은 28나노’가 중국에는 중요한 까닭 28나노를 최첨단 기술과 비교해 낡은 공정으로 보는 시각도 바로잡아야 한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AI 가속기는 3나노·5나노 공정에서 생산되지만 자동차와 산업기기, 통신장비, 가전에는 28나노 이상 성숙 공정 반도체가 대량으로 사용된다. 전력관리반도체, 디스플레이 구동칩, 마이크로컨트롤러, 네트워크칩과 각종 센서는 최신 공정을 사용할 필요가 없거나 최신 공정을 적용했을 때 오히려 비용이 증가한다. 세계 반도체 수요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성숙 공정에서 발생한다. 중국이 28나노급 장비를 안정적으로 양산하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곳도 이 시장이다. 중국 팹은 수입 장비의 추가 공급과 유지보수가 제한되더라도 국내 장비로 생산설비를 늘릴 수 있다. 중국 정부와 국유기업은 성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국산 장비를 의무적으로 구매해 초기 시장을 만들어줄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을 장비가 중국 내수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다. 장비업체는 확보한 매출과 생산 데이터를 다시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 있다.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이 기술 격차를 줄이는 시험장이 되는 구조다. ◆ 한국을 먼저 압박할 곳은 HBM이 아닌 범용 D램 중국산 DUV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사업을 단기간에 위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HBM은 미세공정에서 D램 셀을 만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개의 D램 다이를 얇게 가공해 수직으로 쌓고 TSV로 연결해야 한다. 적층·접합, 발열 제어와 신호 무결성, 패키징 수율, 고객사의 GPU·가속기 인증이 모두 필요하다. HBM4 이후에는 로직 베이스 다이와 파운드리 공정, 첨단 패키징 기술의 결합이 더욱 중요해진다. DUV 한 종류를 확보했다고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미국의 대중국 HBM 수출통제까지 고려하면 중국이 한국 기업을 곧바로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한국이 주의 깊게 볼 곳은 일반 D램이다. CXMT는 이미 세계 D램 출하량의 약 8%를 차지하는 4위 업체로 성장했다. 아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기술 및 수익성 격차가 있지만 DDR4와 DDR5, 모바일용 LPDDR 시장에서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중국산 DUV가 양산 인증을 통과하면 CXMT는 수입 장비에 대한 불확실성을 낮추고 증설을 지속할 수 있다. 중국 스마트폰과 PC, 서버업체가 자국산 메모리 채택을 늘리면 CXMT는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전에 중국 내수만으로도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 기업에 나타날 첫 충격은 시장점유율 상실보다 가격 하락일 가능성이 높다. CXMT가 범용 D램 공급을 늘리면 국제 가격의 하단이 낮아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에서 높은 수익을 거두더라도 일반 D램의 수익성이 악화하면 전체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중국산 DUV는 HBM 왕좌를 빼앗는 무기라기보다 범용 메모리 시장의 가격 질서를 바꾸는 기반시설로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미국은 2022년 이후 중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제한하기 위해 노광과 식각·증착·계측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와 첨단 AI 반도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네덜란드와 일본도 일부 장비 수출 제한에 동참했다. 2024년에는 HBM과 장비 생산에 필요한 소프트웨어까지 통제 범위가 확대됐다. 수출통제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은 최첨단 장비를 제때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기존 수입 장비의 유지보수와 부품 공급에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중국이 EUV를 활용한 대규모 첨단공정을 구축하는 시점도 늦어졌다. 하지만 통제에는 반대 방향의 힘도 작용한다. 해외 장비를 살 수 없게 되면 중국 팹은 성능이 부족해도 국산 장비를 시험해야 한다. 정부는 투자 실패를 감수하면서 자금을 공급하고, 고객사는 초기 제품의 결함을 함께 고친다.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선택받기 어려운 장비가 보호된 시장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수출통제가 중국의 개발 비용과 시간을 늘릴 수는 있어도 기술 개발 의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오히려 노광장비 국산화를 경제성의 문제가 아닌 국가안보 과제로 바꿨다. 중국 기업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도 투자를 지속할 수 있다. 미국과 동맹국도 통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우위를 지킬 수 없다. 중국의 기술 진전을 늦추는 동안 차세대 기술과 공급망, 고객 생태계의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 통제가 시간을 벌어주는 정책이라면 혁신은 그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책이다. ◆ 한국 반도체주 급락, 공포와 현실을 구분해야 중국산 DUV 5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가치를 하루아침에 10% 이상 떨어뜨릴 만큼 직접적인 실적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올해와 내년 생산량만 놓고 보면 한국 반도체 공장의 생산능력이나 HBM 수주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다. 지난 28일 주가 급락은 여러 불안이 한꺼번에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비해 빅테크 기업의 수익 창출이 더디다는 우려, CXMT의 자금 조달과 증설 가능성, 중국 장비 국산화, 외국인 대규모 매도와 레버리지 포지션 청산이 겹쳤다. 그럼에도 시장의 과민 반응에는 읽어야 할 메시지가 있다. 투자자들은 장비 5대의 매출 효과가 아니라 ASML 독점과 한국 메모리 지배력이 영구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했다. 지금까지 거의 0으로 보던 중국 장비의 성공 가능성을 아주 낮은 확률이나마 계산에 넣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급락을 전적으로 비이성적 공포라고 단정하는 것도, 중국이 곧 한국을 추월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단기 주가는 과도하게 움직였을 수 있지만 중국 공급망 자립이라는 장기 변수가 현실로 다가온 것은 사실이다.
2026-07-29 16:16:24
-
中, 상하이 WAIC서 'AI 기술자립·글로벌 질서' 동시 선언
[경제일보] 중국이 상하이 세계인공지능대회(WAIC)를 무대로 인공지능(AI) 기술 자립 성과와 글로벌 AI 질서 주도 의지를 동시에 드러냈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에 맞서 자체 칩과 오픈소스 모델, 휴머노이드 로봇을 전면에 배치하는 한편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을 끌어안는 별도의 국제협력 체계 구축에도 나섰다. 19일 중국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지능 파트너, 함께 만드는 미래’를 주제로 한 ‘2026 WAIC 및 AI 글로벌 거버넌스 고위급 회의’가 지난 17일 상하이에서 개막해 20일까지 이어진다. 행사는 상하이 엑스포와 장장, 시안(웨스트번드) 등 3개 권역에서 진행된다. 전시 면적은 처음으로 10만㎡를 넘어섰으며 1100여개 기업이 3000여개 기술과 제품을 출품했다. 이 가운데 300여개 제품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다. 포럼은 140여개, 해외 참석 인사는 1400여명 규모다. ◆시진핑 “AI는 공공재”…기술 봉쇄에 정면 대응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WAIC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개막식에 직접 참석했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기조연설에서 AI가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면서도 국가안보를 이유로 AI와 첨단기술의 교류를 제한하거나 특정 국가가 기술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중 반도체·AI 수출통제와 기술 동맹 확대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시 주석은 오픈소스 AI를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공공재로 규정하고 기술 격차로 인해 새로운 불평등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향후 5년간 개발도상국 관계자 5000명에게 AI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아세안과 아프리카연합, 아랍연맹, 브릭스 등과 국제 AI 응용 협력센터를 구축하겠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AI 기술과 인프라가 부족한 글로벌 사우스를 지원해 미국 중심의 기술 질서와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제도적 기반도 마련됐다. 개막 전날인 16일 중국 주도로 추진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 설립 협정에 러시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 29개국이 서명했다. WAICO는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AI 기술 협력과 역량 강화, 국제 규범 논의를 추진하는 독립적인 정부 간 기구를 지향한다. 중국이 AI 규칙과 표준을 논의하는 상설 다자기구를 출범시킴으로써 미국 주도의 기술·공급망 연대에 대응하는 별도의 축을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화웨이 ‘슈퍼노드’ 첫 공개…칩 한계, 시스템으로 돌파 산업 전시장에서는 중국의 ‘AI 자립’ 전략이 구체적인 제품으로 나타났다. 화웨이는 자체 개발한 어센드 AI 가속기를 기반으로 만든 대규모 AI 컴퓨팅 시스템 ‘아틀라스 950 슈퍼포드’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수천개의 어센드 프로세서를 고속 네트워크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컴퓨팅 자원처럼 작동하도록 설계한 장비다. 미국의 수출통제로 엔비디아의 최첨단 칩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단일 칩의 성능 격차를 대규모 클러스터와 네트워크 기술로 보완하려는 중국식 해법이다. 화웨이는 이를 통해 대규모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연산 능력을 자체 생태계 안에서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중국 서버 기업 수곤도 중국산 가속기 10만개를 연결한 AI 슈퍼클러스터 ‘수곤 8000’을 전시했다. 화웨이뿐 아니라 서버와 네트워크, 냉각장치, 데이터센터 운영 기술까지 중국산 공급망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거대언어모델 경쟁도 한층 격화됐다. 중국 AI 스타트업 문샷AI는 총 2조8000억개의 매개변수를 갖춘 오픈웨이트 모델 ‘키미 K3’를 공개했다. 회사 측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공개형 AI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키미 K3는 미국 빅테크의 폐쇄형 모델과 달리 개발자가 모델 구조와 가중치를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의 연산장비 규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대규모 모델 개발과 오픈소스 생태계 확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휴머노이드와 자율주행, AI 에이전트도 행사장의 주요 축을 이뤘다. 유니트리를 비롯한 중국 로봇 기업들은 보행과 물체 운반, 작업 협업이 가능한 휴머노이드를 선보였다. 중국 당국은 올해 휴머노이드 로봇 연간 생산량이 10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 중소기업 8곳 참가…“직접 보고 경쟁력 점검해야”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창업 지원기관인 글로벌혁신센터(KIC 중국)가 전시 부스를 마련했으며 국내 중소기업 8곳이 참가했다. 김종문 KIC 중국 센터장은 1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들이 WAIC를 비롯한 중국의 주요 기술 전시회에 직접 와서 상황을 봐야 한다”며 “세계와 중국 시장에서 자사의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빨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중국의 빠른 제품 개발과 공급망 경쟁력에도 주목했다. 그는 “시제품을 빠르고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 테스트하려면 중국 공급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의 현재 개발 속도로는 중국 기업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올해 전시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연구개발 초기 단계의 기술부터 실제 상용 제품까지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기업 간 협업 사례도 대거 제시했다는 평가다. 과거 중국 기업들이 핵심 기술과 제품 사양 공개에 소극적이었다면 최근에는 기술력을 외부에 알리고 생태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중국 시장은 기회인 동시에 강력한 경쟁 공간이다. 제조 공급망과 방대한 내수시장, 빠른 실증 환경을 활용할 수 있지만 가격 경쟁과 제품 출시 속도, 현지 기업 간 협업 능력에서 밀릴 경우 한국 기업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 중국의 핵심 AI 산업 규모는 지난해 1조2000억위안을 넘어섰으며 관련 기업은 6200개 이상으로 집계됐다. 중국 대형 제조기업의 30% 이상이 AI를 도입했고 주요 스마트공장은 공정의 70% 이상에 AI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중국 측은 추산하고 있다. ◆‘기술 전시회’ 넘어 미·중 AI 질서 경쟁 무대로 이번 WAIC는 단순한 산업 전시회를 넘어 미·중 AI 패권 경쟁의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안전한 공급망을 중심으로 동맹국을 묶는 전략을 추진한다면 중국은 오픈소스 모델과 저비용 AI 서비스, 개발도상국 역량 지원을 앞세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여전히 미국에 뒤처져 있지만 대규모 칩 연결 기술과 데이터센터, 응용서비스, 로봇 등 ‘풀스택’ 생태계를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개별 제품의 최고 성능보다 자체 공급망 안에서 칩과 모델, 소프트웨어, 로봇을 연결하는 데 힘을 싣는 모습이다. 다만 WAICO가 실제 국제규범을 만드는 영향력 있는 기구로 자리 잡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참여국이 중국·러시아와 신흥국 중심으로 구성된 데다 AI 안전과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국가 통제 등 핵심 의제에 대한 국가별 입장 차이도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WAIC를 통해 기술과 산업, 외교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도 중국 AI를 단순한 추격자나 저가 경쟁자로 평가하기보다 기술 수준과 공급망, 사업화 속도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중국 기술을 무조건 경계하거나 의존하는 선택이 아니다. 활용할 공급망과 협력 분야는 찾되 반도체와 AI 모델, 데이터, 로봇 등 핵심 분야에서 독자 경쟁력을 확보하는 ‘선별적 협력’ 전략이 요구된다”며 “올해 상하이 WAIC는 중국 AI의 약점보다 중국이 그 약점을 어떤 속도와 방식으로 메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2026-07-19 14:56:50
-
-
중국 AI, '모델 경쟁' 넘어 공장과 소비시장으로 들어간다
[경제일보] 중국이 인공지능(AI)을 제조업과 소비시장, 공급망에 접목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한때 중국 AI 업계는 수백 개 모델이 쏟아지는 ‘백모대전’으로 불렸다. 지금은 누가 더 큰 모델을 내놓느냐보다, 누가 공장과 행정, 유통 현장에 먼저 안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경쟁이 됐다. 중국계 대형언어모델의 사용량 증가는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해외 개발자용 AI 모델 플랫폼인 오픈라우터(OpenRouter) 집계에 따르면 중국계 모델의 주간 토큰 호출량은 최근 18조8100억개를 기록하며 8주 연속 미국계 모델을 앞섰다. 토큰은 AI가 문장을 이해하고 만들어내는 단위다. 호출량이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용자가 중국 모델을 실제 서비스와 개발 업무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다만 이 수치를 세계 전체 AI 시장의 절대적 점유율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픈라우터는 여러 AI 모델을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게 한 플랫폼일 뿐, 모든 기업과 소비자의 AI 사용량을 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중국 모델의 사용량이 빠르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고, 오픈소스 모델이 많으며, 중국 안팎의 기업들이 자사 서비스에 붙이기 쉽다는 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AI, 공장과 행정·유통 현장으로 중국 AI 업계가 주목하는 곳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제조업 현장이다. 중국에는 행정 서비스부터 전자상거래, 배달, 금융, 공장 운영까지 AI를 적용할 수 있는 수요처가 넓게 깔려 있다. 소비자 서비스에 AI 챗봇을 붙이고, 공장에서는 설비 이상을 감지하며, 유통업체는 재고와 배송 경로를 조정하는 식이다. 중국 정부도 AI를 소비와 서비스업에 결합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최근 중국 상무부는 AI를 상품과 서비스 소비에 접목하기 위한 17개 조치를 발표했다. 가전제품을 단순 전자기기에서 지능형 기기로 전환하고, 휴머노이드 로봇과 AI 기반 생활서비스 시장을 키우겠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가진 제조업 기반은 강점으로 꼽힌다.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센서, 통신장비, 로봇, 서버, 전력 설비를 한 공급망 안에서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산업은 소프트웨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냉각장치, 전력망, 광통신, 로봇과 각종 전자부품이 함께 필요하다. ◆ 공급망박람회에 들어온 AI 중국국제공급망촉진박람회에서도 AI는 가장 눈에 띄는 분야였다. 올해 박람회는 기존 ‘디지털 기술 공급망’을 ‘디지털·지능 기술 공급망’으로 넓히고, 별도의 AI 전시구역도 만들었다. AI 에이전트, 휴머노이드 로봇, AI 안경, AI 반도체 등이 한자리에 전시됐다. 박람회의 변화는 중국이 AI를 독립된 기술 산업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를 바꾸는 도구로 본다는 점을 보여준다. AI 에이전트가 기업의 주문과 재고, 고객 응대를 맡고, 로봇이 물류센터와 공장에 들어가며, AI 안경 같은 기기는 소비재 시장으로 이어진다. 반도체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광통신 기업이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공급망을 쉽게 떼어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이자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풍력 설비 생산이 집중된 곳이다. AI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첨단 제조업을 한꺼번에 늘리려면 중국의 생산 능력과 부품 조달망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적지 않다. 물론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와 기술 규제는 중국 AI 산업의 부담이다. 고성능 AI 칩 확보에는 여전히 제약이 있다. 중국이 AI 모델의 이용량과 응용 서비스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최첨단 반도체와 핵심 장비에서는 미국 기업과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과제는 남아 있다. ◆ 맥도날드가 보는 중국 공급망 글로벌 소비기업의 움직임도 중국 시장의 성격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맥도날드 중국 법인은 중국에서 쓰는 식재료의 90% 이상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다. 단순히 중국에 매장을 내는 수준을 넘어, 농축산물과 가공식품, 물류, 냉장유통을 현지 공급망 안에서 해결하는 방식이다. 맥도날드는 올해도 약 1000개 매장을 추가로 열 계획이다. 중국의 모든 성급 행정구역에 매장을 두게 되면서 앞으로는 베이징·상하이·광저우 같은 대도시보다 중소도시와 지방 시장의 비중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매장 확장은 소비시장 공략이지만, 그 뒤에는 식재료 조달과 냉장물류, 배달, 모바일 주문 시스템이 함께 따라붙는다. 중국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이 보는 것은 소비자 수만이 아니다. 대규모 생산과 빠른 배송, 디지털 결제, 지역별 유통망을 한 번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중국의 소비 회복이 기대만큼 빠르지 않더라도, 기업들이 공급망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다. 중국은 제조업 국가에서 AI 강국으로 단숨에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첨단 반도체와 핵심 소프트웨어, 고급 인재 확보를 놓고는 여전히 미국과 경쟁해야 한다. 그렇지만 AI가 공장과 유통, 행정, 소비 서비스에 들어가는 속도만 놓고 보면 중국은 이미 큰 시험장을 갖고 있다. 중국이 노리는 것은 AI 모델 하나의 성능 경쟁이 아니다. 값싼 AI를 빠르게 보급하고, 제조업과 물류망에 연결해 산업 비용을 낮추며, 소비자 서비스까지 넓히는 일이다. 공급망과 내수시장을 함께 가진 나라만 할 수 있는 방식이다.
2026-06-24 17:23:10
-
오픈AI, 보안 특화 AI 'GPT-5.5-사이버' 출시…데이브레이크 확장
[경제일보] 오픈AI가 사이버 보안 특화 인공지능(AI) 모델과 글로벌 보안 협력 프로그램을 동시에 확대했다. AI가 취약점을 찾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보안 업계의 병목이 ‘발견’에서 ‘패치 적용’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오픈AI는 22일(현지시간) 보안 특화 AI 모델 ‘GPT-5.5-사이버’ 정식 버전을 신뢰 기관과 검증된 방어자 대상으로 제한 출시하고 사이버 보안 계획 ‘데이브레이크’를 확대한다고 밝혔다. 데이브레이크는 오픈AI의 모델과 코덱스 시큐리티, 신뢰 기반 접근 체계, 보안 파트너를 묶어 취약점 검증과 위험 우선순위 판단, 패치 생성·검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GPT-5.5-사이버는 취약점 재현 능력을 측정하는 사이버짐 벤치마크에서 85.6%를 기록했다. 기존 범용 모델 GPT-5.5의 81.8%보다 높은 수치다. 오픈AI는 이 모델이 대규모 코드베이스를 분석하고 보안 관련 구성요소를 식별하며 취약 코드의 도달 가능성을 추적하고 통제된 환경에서 패치를 개발·시험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픈AI는 보안의 병목이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심각한 취약점을 찾는 데 희소한 전문성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AI가 복잡한 코드베이스를 빠르게 탐색하면서 취약점 보고가 늘어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오픈AI는 “취약점 보고서만으로는 누구도 보호할 수 없다”며 “진정한 가치는 문제를 검증하고 영향을 파악하며 패치를 개발·시험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코덱스 시큐리티도 업데이트됐다. 오픈AI에 따르면 코덱스 시큐리티는 지난 3월 연구 미리보기 출시 이후 3만개 이상의 코드베이스와 3000만건 이상의 커밋을 스캔했다. 사람이 직접 고친 것으로 표시한 보안 이슈는 7만건 이상이며 자동으로 해결된 것으로 판단된 사례도 50만건을 넘었다. 데이브레이크 파트너 프로그램도 확대됐다. 오픈AI 공식 파트너 명단에는 아카마이, 체크포인트, 시스코, 클라우드플레어, 크라우드스트라이크, 다크트레이스, 엘라스틱, 포티넷, IBM, 옥타, 팰로앨토네트웍스, 프루프포인트, 레드햇, 센티넬원, 소포스, 테너블, 지스케일러 등이 포함됐다. 글로벌 시스템통합·컨설팅 파트너로는 IBM, 액센츄어, EY, KPMG, PwC, 코그니전트, NCC그룹 등이 참여한다. 오픈AI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취약점을 확인하고 보완하는 ‘패치 더 플래닛’ 계획도 공개했다. 트레일오브비츠, 해커원 등과 협력해 보안 연구자와 오픈소스 유지관리자가 취약점 검증과 패치 적용을 함께 진행하는 구조다. cURL, Go, Python, Sigstore, pyca/cryptography 등 30개 이상의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국도 협력 대상에 포함됐다. 오픈AI는 최근 한 달 동안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유럽연합 기관 등과 Trusted Access for Cyber 파트너십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제이슨 권 오픈AI 최고전략책임자는 서울에서 데이브레이크를 소개하며 한국 정부와 기관, 기업이 첨단 AI 보안 역량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발표는 앤트로픽의 최상위 모델 ‘미토스5’와 ‘페이블5’가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 논란에 휘말린 시점과 맞물린다. 일부 외신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과 해외 기관의 해당 모델 접근을 제한하도록 요구했고 앤트로픽이 규정 준수를 위해 모델 접근을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고성능 AI 모델이 사이버 공격과 방어 양쪽에 모두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AI 기업의 보안 모델 배포 방식도 국가안보 이슈가 되고 있다. 오픈AI는 GPT-5.5-사이버를 일반 공개가 아니라 검증된 방어자 대상의 제한 접근 방식으로 운영한다. 강력한 사이버 능력을 방어 목적으로 활용하되, 오용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신원 확인, 접근 범위 제한, 모니터링, 사람의 검토를 병행하겠다는 구조다. 한편 AI 보안 경쟁은 이제 취약점을 더 많이 찾는 싸움에 머물지 않는다. 발견한 취약점을 얼마나 빠르게 검증하고 실제 패치로 연결하느냐가 승부처가 되고 있다. 오픈AI의 데이브레이크 확대는 AI 모델 경쟁이 사이버 보안의 운영 체계와 국제 규범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은 과제는 강력한 AI 보안 도구를 방어자에게 충분히 열어주면서도 공격 도구로 전용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일이다.
2026-06-23 13:39:05
-
배경훈, "앤트로픽 수출통제 힘든 시기…기술주권 힘 합쳐 돌파"
[경제일보]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미국 정부의 앤트로픽 최신 인공지능(AI) 모델 수출 통제와 관련해 자체 기술 역량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첨단 AI 모델 접근권이 국가 안보와 기술 주권의 문제로 부상한 만큼 기업과 출연연, 정부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배 부총리는 18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가전략기술 선도 넥스트(NEXT) 프로젝트 추진대회’에서 “최근 미국이 앤트로픽의 최신 모델을 통제하고 수출을 제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더더욱 우리의 자체적인 기술 역량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략기술 확보가 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며 “그동안 개별 부처별, 기업별로 따로 고민했던 것들을 하나로 모아 국가적으로 대응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해 기업과 출연연이 힘을 합쳐 어려운 시기를 잘 돌파하자”고 당부했다. 최근 앤트로픽을 둘러싼 논란은 AI 기술 주권 문제를 다시 부각시켰다.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앤트로픽의 고성능 모델 미토스 5와 페이블 5에 대한 외국 국적자 접근을 제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여파로 앤트로픽은 해당 모델 접근을 광범위하게 중단했다. 한국은 앞서 앤트로픽의 AI 보안 프로젝트 ‘글래스윙’에 참여하며 사이버보안 모델 미토스 접근권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의 통제 기조가 강화되면서 실제 협력 범위에는 불확실성이 생겼다. 정부가 이날 추진대회를 연 배경도 여기에 있다. 넥스트 프로젝트는 세계 최고·최초 성과 창출을 목표로 산·학·연·정이 10대 분야 55개 전략기술 임무를 추진하는 사업이다. 행사에는 과기정통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와 네이버클라우드, 삼성전자 등 산업계, 서울대와 KAIST 등 학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등 출연연이 참석했다. 정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AI 전환 선도, 통상·안보 주도권, 미래혁신 기반이라는 3개 핵심 임무를 제시했다. 기존 국가전략기술 체계에 소재, 에너지, 지능형 전력망 등 유망 기술과 경제안보 관점에서 필요한 국방 반도체 기술도 보강했다. 분야별 임무는 국가전략기술 체계에 맞춰 도출하고 2027년부터 관계부처가 공동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도 신규 임무에는 산업현장 자율 의사결정 AI 개발, 휴머노이드 자율로봇 공존사회 원천기술 확보, AI 기반 보안 취약점 원천 탐지·대응 기술 개발, 경제안보형 공급망 핵심소재 개발 등이 포함됐다. AI 모델 접근이 외교·안보 변수에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국내에서 원천기술과 응용기술을 함께 확보하려는 흐름이 강화되는 모습이다. 배 부총리는 과기정통부가 최근 시작한 ‘K-문샷’ 프로젝트도 국가전략기술의 큰 체계 안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계뿐만 아니라 금융권도 이 자리에 모인 만큼 함께 추진해 나가자”고 말했다. 도전형 연구개발을 개별 사업으로 흩어놓기보다 국가 전략기술 로드맵과 연결해 성과를 내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넥스트 프로젝트 내 핵심사업을 올해 말 국가전략기술육성법상 국가전략기술연구개발사업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지정 사업에는 연구개발 예산 배분·조정 시 우선 검토, 기업 매칭 비율 완화 등의 혜택이 부여된다. 기술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예산과 제도 지원을 묶겠다는 것이다. 부처 간 기술 관리 체계도 손본다. 과기정통부, 재정경제부, 산업통상부는 국가전략기술육성법, 조세특례제한법,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산업기술보호법 등 4개 법령에 흩어진 513개 기술의 관리 체계를 정비한다. 4개 법령에 모두 포함되는 기술은 중점 지원영역으로 분류해 투자와 조세특례 등 지원 역량을 집중할 방침이다. 민관 협력 플랫폼도 만들어진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넥스트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켜 국가전략기술 분야별 추진 현황을 논의할 계획이다. 기술별로 기업, 대학, 출연연, 정부 부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를 줄이고 공동 대응 체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2026-06-18 17:06:52
-
정부, 美 AI 통제 속...앤트로픽과 안전·보안 동맹
[경제일보]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첨단 인공지능(AI) 모델 접근을 제한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 정부가 앤트로픽과 AI 안전·사이버보안 협력에 나섰다. 고성능 AI 모델이 사이버 공격과 방어 양쪽에 모두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한국이 글로벌 AI 안전망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8일 앤트로픽과 AI 안전성 확보 및 사이버보안 협력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AI가 사이버 공격과 방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한국어 맥락에서의 AI 모델 안전성 및 오남용 위험을 평가하는 데 협력할 예정이다. 자율형 AI 에이전트에 대한 레드팀 평가도 협력 대상에 포함됐다. 앤트로픽은 챗봇 ‘클로드’와 코딩 특화 도구, AI 에이전트 기술로 빠르게 성장한 프런티어 AI 기업이다. 최근에는 사이버보안 특화 고성능 모델인 ‘미토스’와 관련한 글로벌 논란의 중심에도 섰다. 앤트로픽의 프로젝트 글래스윙은 미토스 계열 모델을 활용해 핵심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을 찾고 고치는 방어 목적의 AI 보안 협력체다. 한국에서는 KISA와 주요 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약의 의미는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선다. AI 모델이 고도화되면서 보안 위험은 두 방향으로 커지고 있다. 방어자는 AI로 취약점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지만 공격자 역시 AI를 활용해 악성코드 변형, 취약점 탐색, 피싱 자동화, 침투 시나리오 생성을 시도할 수 있다. 정부가 앤트로픽과 손잡은 것은 이 같은 양면성을 제도권 안에서 평가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과기정통부는 한국 AI 안전연구소와 앤트로픽 간 협력을 통해 AI 모델 및 자율형 AI 에이전트 안전성 평가를 추진할 방침이다. 금융 분야 등 국가적 파급력이 큰 영역에서 AI 기반 취약점 발굴과 사이버 위협 정보 공유도 실무적으로 논의한다. 한국어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델 오남용, 허위정보 생성, 보안 우회 가능성 등을 함께 점검하는 것도 주요 과제다. 정부는 이번 협약을 글로벌 AI 협력 벨트의 한 축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AI 인프라, 프런티어 모델, 연구 협력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과 접점을 넓혀왔다면 앤트로픽과의 협력은 안전성과 보안 분야를 보강하는 성격이 강하다. AI 산업 경쟁력이 커질수록 모델 성능 못지않게 안전성 평가와 사이버 복원력이 국가 경쟁력의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검증대에 오른 부분은 미국의 AI 기술 통제 기조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앤트로픽의 고성능 모델 미토스 5와 페이블 5에 대해 외국 국적자의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앤트로픽은 적용 범위를 선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모델 접근을 광범위하게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조치가 이어질 경우 한국 정부와 기업이 프로젝트 글래스윙을 통해 확보하려던 미토스 접근권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다. 과기정통부는 앤트로픽과 소통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앤트로픽 역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첨단 AI 모델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와 기술 주권 기조에 따른 불확실성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 협약은 한국 AI 정책의 방향을 보여준다. 단순히 해외 모델을 쓰는 것을 넘어 고성능 AI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평가하고 방어 기술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특히 AI 에이전트가 실제 시스템을 조작하고 코드를 작성하며 업무를 수행하는 단계로 넘어가면 모델 안전성과 사이버보안은 분리하기 어려운 과제가 된다. 성과는 접근권과 실행력에서 갈릴 전망이다. 미토스 같은 첨단 모델에 대한 안정적 접근이 보장되지 않으면 협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한국어 환경의 안전성 평가, 금융·공공 분야 취약점 발굴, 국내 보안 인력과 글로벌 모델의 결합이 실질 성과로 이어진다면 한국은 AI 안전·보안 분야에서 독자적 입지를 넓힐 수 있다.
2026-06-18 16:09:55
-
-
한일 경제공동체, 늦었다는 자각속에 원칙이 있어야
19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시의는 있다. 이 논의는 결코 이른 구상이 아니다. 오히려 늦었다. 한국과 일본 정상은 오는 5월 19~20일 안동에서 올해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는다. 셔틀외교는 복원되고 있지만, 국제질서의 변화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여 왔다. 지금 세계는 더 이상 예전의 세계가 아니다. 교역은 시장의 논리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기술은 무기가 되었고, 공급망은 외교의 수단이 되었으며, 제재는 통상의 언어가 되었다. 미중 정상 간 대화가 이어져도 대만 문제는 여전히 양국 관계의 뇌관으로 남아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통제는 더 노골적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동맹국 기업에까지 대중 수출통제를 사실상 강제하려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고,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쯤 되면 질서는 이미 바뀐 것이다. 바뀐 질서를 읽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도태된다. 에너지 질서의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IMF는 아시아가 중동발 에너지 충격에 다른 지역보다 더 취약하다고 경고했다. 중동산 연료 의존이 크고, 제조업 비중이 높은 경제구조 탓에 유가와 물류가 흔들리면 성장과 물가가 함께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중동발 에너지 충격의 여파로 4월 도매물가가 3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었다. 국제정세의 급변이 추상적 위험이 아니라 현실의 비용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늦지 않은 깨달음이 아니라, 늦었기 때문에 더 절박한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증에 기대어 거창한 말부터 앞세워서는 안 된다. 한일 경제공동체는 선언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일 관계는 늘 필요에 의해 가까워졌다가, 역사 앞에서 흔들리기를 반복해 왔다. 그런 만큼 지금 필요한 것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방파제다. 양국 산업 당국이 올해 3월 공급망 파트너십 약정을 체결하고 정례 산업·통상 정책대화를 출범시킨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공급망 교란이 닥쳤을 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산업기반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말보다 무겁다. 공동체란 이름보다 먼저 이런 장치가 쌓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다. 경제가 급하다고 역사를 접어둘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역사 문제를 덮은 채 서두르는 협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지금도 유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국은 그 선언에서 과거를 직시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만들자고 했다. 미래지향은 과거 망각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직시 위의 화해, 그 위의 협력이었다. 한일 관계가 다시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순서를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안동 회담의 과제는 분명하다. 큰말을 경계하고, 작은 합의를 무겁게 만드는 일이다. 에너지 비상 대응, 핵심광물 확보, 반도체와 첨단산업 협력, 공급망 이상 징후의 조기 공유, 불필요한 통상 충돌의 억제 같은 것들이다. 이런 기초가 쌓여야 비로소 한일 경제협력은 정치의 계절을 덜 타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박수받을 선언문이 아니다. 시장과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협력의 구조다. 맹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라 했다. 때를 얻는 것보다 형세를 얻는 것이 낫고, 형세를 얻는 것보다 사람의 화합이 낫다는 뜻이다. 지금 한일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국제질서 변화의 파고를 읽는 냉정함,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솔직함, 그리고 감정이 아니라 원칙 위에서 협력을 설계하는 절제다. 한일 경제공동체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장밋빛 구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늦었다는 자각에서 출발할 때만, 그 말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2026-05-17 09:27:15
-
시진핑, 美 CEO들 만나 "중국 개방 더 넓어질 것"…대만엔 강경 경고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을 계기로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베이징을 찾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들을 직접 만나 중국 시장 개방과 미중 경제 협력 확대를 강조했다. 다만 정상회담에서는 대만 문제를 미중 관계의 핵심 사안으로 규정하며 강한 경고 메시지도 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CCTV 등에 따르면 시 주석은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미국 기업인들을 접견했다. 이날 회담에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등이 참석했다. 외신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 경제사절단에 미국 주요 빅테크와 산업계 인사들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기업인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중국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미국 기업계의 뛰어난 대표들을 데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에게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라고 독려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미국 기업들이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 깊이 참여해왔고 양측 모두 이익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중국의 개방의 문은 더 크게 열릴 것”이라며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더 넓은 전망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이터도 시 주석이 미국 기업인들에게 중국 시장 접근 확대를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도 방중 경제사절단의 상징성을 부각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기업인들과 함께 왔다”며 “기업 내 2인자나 3인자가 아니라 최고경영자들만 원했다”고 말했다. 이는 이번 방중이 안보 외교를 넘어 무역과 투자, 공급망 안정, 첨단기술 협력까지 포괄하는 경제 외교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머스크와 팀 쿡, 젠슨 황의 동행은 미중 경제 관계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테슬라는 중국을 핵심 생산·판매 시장으로 두고 있고, 애플은 중국 공급망과 소비 시장 의존도가 크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수출통제와 중국 시장 접근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기업이다. 젠슨 황은 CCTV 인터뷰에서 미중 정상이 양국 관계를 개선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경제 협력 메시지와 달리 안보 의제에서는 긴장이 드러났다.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만 문제가 미중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만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양국 관계가 충돌하거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 주석은 “‘대만 독립’과 대만 해협의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며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미중 관계의 가장 중요한 공통분모라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방중 전 대만 무기 판매 문제를 시 주석과 논의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나온 메시지다. 무역 문제에서는 양측 모두 협상 모멘텀 유지를 강조했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무역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며 미중 경제·무역 관계의 본질은 상호 이익과 협력이라고 말했다. 전날 미국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중국 허리펑 부총리 간 경제·무역 협상이 진행된 데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했다고 평가했다. 로이터는 양국이 희토류와 관세, 무역 휴전 유지 등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두 정상은 중동 정세, 우크라이나 사태, 한반도 문제 등 국제 현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은 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이번 회담은 약 135분 동안 진행됐다. 중국 CCTV는 회담이 오전 10시15분께 시작해 135분가량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이 약 100분간 진행됐던 것과 비교하면 논의 시간이 길어진 셈이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경제 협력과 전략 경쟁이 동시에 작동하는 현장을 보여줬다. 양국은 무역과 투자, 기업 협력에서는 안정적 관리 필요성에 공감했지만 대만과 AI, 반도체, 이란 등 안보·기술 의제에서는 입장 차를 그대로 드러냈다. 향후 관건은 정상회담 이후 구체적 후속 조치다. 미국 기업의 중국 시장 접근 확대, 희토류 공급 안정, 무역 휴전 유지 등이 실제 합의로 이어질 경우 단기적으로 시장 불확실성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대만 무기 판매와 AI 반도체 수출통제 문제는 어느 한쪽이 쉽게 양보하기 어려워 미중 갈등의 불씨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이후 베이징 톈탄공원을 방문하고 국빈 만찬과 티타임 등 2박3일 방중 일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방중이 미중 관계의 전면적 해빙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경제 협력 채널을 복원하면서도 핵심 안보 갈등을 관리하는 제한적 안정 국면을 만드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2026-05-14 15: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