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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 겸직'보다 무거운 공직의 책임
[경제일보]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비례대표 의원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거듭 분명히 밝혔다. 용 후보자는 지난 10일 기자회견에서 의원과 국무위원의 겸직은 “법률이 허용하는 것”이라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야당 현역 의원을 장관으로 지명한 데에는 연합정치의 의미가 있다는 설명도 내놨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국회법 제29조는 국회의원이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을 겸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용 후보자가 장관에 임명된 뒤 의원직을 유지한다고 해서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의 질문은 법전의 마지막 조항에서 끝나지 않는다. 할 수 있느냐와 해야 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이번 논란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장관은 대통령을 보좌해 한 부처의 정책과 예산, 인사를 책임지는 행정부의 핵심 구성원이다. 국회의원은 정부를 감시하고 법과 예산을 심사한다. 우리 헌법과 국회법이 두 직책의 겸직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 자체를 제도적 모순이라고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의원 출신 장관이 국회와 정부 사이의 소통을 돕는 장점도 있다. 다만 비례대표 의원이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지역구 의원이 의원직을 내려놓으면 일정 기간 해당 지역의 대표가 사라지고 보궐선거가 필요할 수 있다. 비례대표 의원은 사퇴하더라도 명부의 후순위 후보자가 의석을 승계한다. 국회의 의석 자체가 비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비례대표 의원이 국무위원으로 입각할 때 의원직을 내려놓는 관행이 이어져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아예 비례대표 의원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될 경우 의원직에서 퇴직하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까지 발의됐다. 개별 후보자를 겨냥한 입법이 돼서는 안 되겠지만, 이번 논란이 현행 겸직 제도의 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용 후보자에게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그가 의원직을 내려놓으면 기본소득당은 원내 의석을 잃는다. 용 후보자 스스로도 자신이 당의 유일한 현역 의원이고, 사퇴할 경우 기본소득당이 원외정당이 되는 어려움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2024년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명부를 통해 당선됐기 때문에 후순위 승계자가 기본소득당 소속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고민이다. 소수정당에서 국회의원 한 명이 갖는 무게는 거대정당의 한 석과 다르다. 원내 발언권과 입법 활동, 정당의 존재감이 그 한 석에 걸릴 수 있다. 다당제와 정치적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작은 정당의 원내 활동을 가볍게 볼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사정이 오히려 선택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기본소득당의 원내 지위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 의원으로 남으면 된다. 성평등가족부를 이끌어 정부 정책을 책임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 장관직을 선택하면 된다. 소수정당의 어려움은 두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하게 하는 이유일 수는 있어도, 두 자리를 모두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연합정치라는 설명 역시 마찬가지다. 야당 정치인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정치 실험이다. 서로 다른 정당이 정책 목표를 공유하고 정부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협치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다만 연합정치의 의미는 장관으로 정부에 참여하는 데서 이미 구현된다. 의원직까지 반드시 함께 보유해야 연합정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관으로 국무회의에 들어가 정부 정책을 함께 책임지면서 동시에 야당 의원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책임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 정부 정책이 성공하면 장관의 성과이고, 정치적 부담이 생기면 야당 의원의 위치로 돌아가는 구조여서는 곤란하다. 공직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지가 많은 것이 아니라 책임의 위치가 분명한 것이다. 때문에 이번 문제를 법률상 ‘이해충돌’이라는 단어 하나로 재단할 필요도 없다. 현행법이 허용하는 직책인 만큼 불법적인 이해충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더 정확한 문제는 역할의 충돌과 정치적 책임이다. 의원은 정부를 묻는 자리이고 장관은 정부의 답을 내놓는 자리다. 한 사람이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법은 허용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겸직이 바람직하다는 뜻까지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비례대표 의석은 개인의 정치적 재산으로 보기 어렵다. 유권자는 후보 개인에게 직접 한 표를 준 것이 아니라 정당과 명부에 투표했다. 앞 순번 후보가 다른 길을 선택하면 후순위 후보가 이어받도록 제도를 만든 것도 비례대표 의석의 이런 성격 때문이다. 이번 사안을 용 후보자 개인의 문제로만 끝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누구에게는 겸직을 허용하고 누구에게는 사퇴를 요구한다면 결국 논란은 반복된다. 비례대표 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을 계속 허용할 것인지, 아니면 입각할 경우 의원직을 내려놓도록 할 것인지 국회가 일반적인 원칙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제도를 고치기 전까지는 선택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돌아간다. 현행법이 겸직을 허용하기 때문에 대통령도 사퇴를 강제할 수 없고 국회 역시 의원직을 빼앗을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 정치적 판단이다. ‘예기’ 예운편에는 ‘대도지행야 천하위공(大道之行也 天下爲公)’이라는 말이 나온다. 큰 도가 행해지면 천하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다. 공직도 그렇다. 장관 자리도, 국회의원 자리도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당의 소유물이 아니다. 모두 국민으로부터 일정 기간 맡겨진 자리다. 용 후보자가 기본소득당의 유일한 의원으로 남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대신 장관직을 맡지 않으면 된다. 반대로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서 국정을 책임지는 길을 택한다면 그 역시 존중해야 한다. 대신 비례대표 의석을 내려놓는 것이 자연스럽다. 두 선택 모두 정치적 비용이 따른다. 공직을 맡는다는 것은 원래 그 비용까지 감수하는 일이다. 법이 두 자리를 허용한다는 사실이 두 자리를 모두 가져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번 논란에서 국민이 묻는 것도 법률 조문 하나가 아니다. 장관이 되겠다는 사람이 무엇을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문제다. 장관도 하고 의원도 하겠다는 선택보다 어느 한쪽을 택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지는 정치가 더 설득력 있다. 책임정치는 자리를 얼마나 많이 갖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리를 선택하고 그 선택의 대가를 얼마나 분명하게 감당하느냐에서 시작한다.
2026-09-11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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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은 사람 아닌 제도를 보고 해야 한다
[경제일보] 헌법에는 권력을 주는 조항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고치지 못하도록 막는 조항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28조 2항이 그렇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 짧은 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조항에는 권력과 헌법의 관계에 대한 무거운 원칙이 들어 있다. 헌법을 고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위해 고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9일 파리 동포간담회에서 자신의 임기를 직접 언급했다. 취임 초 정상외교 일정을 많이 잡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의 임기는 헌법상 명확하게 제한돼 있기 때문에” 정상외교를 빨리 시작해야 효과를 오래 누릴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정상외교에 관한 설명이었지만 정치권에서 대통령 4년 중임·연임제 개헌과 현직 대통령의 향후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 주목받았다. 대통령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제128조다. 대통령 임기 연장이나 중임 변경을 위한 개헌은 개헌 제안 당시 대통령에게 효력이 없도록 못 박았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개헌이 현직 권력자의 집권 연장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그런데 최근 개헌 논의는 이 단순한 원칙에서 자꾸 벗어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 또는 연임제로 바꾸는 권력구조 개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임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도 재확인했다. 야권에서는 중임제와 임기 단축이 결합할 경우 현직 대통령의 향후 재출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반대편에서는 연임제 개헌의 경우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나온다. 개헌의 필요성보다 ‘이재명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느냐’가 정치적 관심사가 돼버린 셈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개헌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임기를 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통령과 국회, 정부와 사법부가 어떤 관계를 맺고 국가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가의 기본설계다. 지금 개헌한다면 그 기준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가 아니라 2030년, 2040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권력구조가 필요한가여야 한다. 19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지 거의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크게 변했다. 경제 규모도, 인구 구조도, 지방의 현실도 달라졌다.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 역시 1987년과 같지 않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장단점도 충분히 경험했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음 선거를 의식해야 하고 임기 후반에는 급격한 레임덕이 나타나는 문제,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가 엇갈리면서 선거가 사실상 상시화되는 문제도 있다. 반대로 4년 중임제는 국민에게 대통령을 한 번 더 평가할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권력 집중이 장기화할 위험도 있다. 그러니 논의할 것은 많다. 대통령 임기만 고칠 일도 아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어디까지 조정할 것인지, 국회의 견제 기능은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국무총리의 역할은 어떻게 할 것인지, 감사원과 검찰·경찰 등 권력기관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지방분권과 기본권, 국민투표와 개헌 절차도 논의 대상이다.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개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을 먼저 놓고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동양 고전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라는 말이 나온다.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법의 적용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2000여 년 전의 말이지만 헌법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헌법은 좋은 지도자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권력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은 헌법이다. 그래서 헌법 제128조 2항의 정신은 중요하다. 헌법을 고치는 사람이 그 결과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개헌의 정당성을 지키는 일종의 ‘이해충돌 방지장치’다. 헌법을 바꾸는 정치세력과 그 헌법의 혜택을 받는 정치세력을 분리해야 개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생긴다. 여야 모두 이 원칙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야 한다. 여권은 개헌 논의를 현직 대통령의 정치 일정과 연결할 여지를 스스로 차단해야 한다. 야권 역시 모든 개헌 논의를 ‘집권 연장 시도’라고 규정하며 정치적 의심부터 앞세우는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실제 현행 헌법에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 연장과 중임 변경을 제한하는 조항이 존재한다. 개헌 논쟁은 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이번 발언을 한 걸음 더 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기는 헌법상 제한돼 있다”는 언급에서 그칠 게 아니라 개헌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권력구조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고 개헌 논의를 제도의 문제로 되돌릴 수 있다. 개헌에는 더 중요한 관문도 있다. 헌법 제130조에 따르면 개헌안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고, 이후 국민투표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가 투표해 투표자 과반수가 찬성해야 확정된다. 어느 한 정당이나 대통령 혼자 밀어붙일 수 없는 구조다. 헌법 자체가 개헌을 ‘합의의 정치’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누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4년 연임제와 중임제의 장단점을 공개적으로 비교하고 대통령·국회·사법부 사이의 권력 배분 방안을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여야와 헌법학자,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개헌 논의기구를 만들어 쟁점을 정리할 수도 있다. 개헌은 정치공학이 되는 순간 실패한다. 현직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설계해도 안 되고,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해서도 안 된다. 헌법은 특정 정치인을 위한 계약서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까지 적용받을 국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파리에서 말한 대로 대통령의 임기는 헌법에 의해 제한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권도 그 헌법의 정신을 받아들일 차례다. 사람은 임기가 끝나면 떠난다. 헌법은 남는다. 개헌의 출발점은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이어야 한다.
2026-09-10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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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참사가 경제를 망친다, 검증 시스템부터 뜯어고쳐라
[경제일보] 또 인사 참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사가 만사”라고 외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인사가 망사”라는 국민의 냉소다. 장관 후보자들을 둘러싸고 부동산 투기, 편법 절세, 세금 문제, 도덕성 논란이 꼬리를 물고 있다. 대통령이 지명하기 전에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사안들이다. 그런데도 걸러내지 못했다면 대통령실 인사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증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논란이 재연된다. 후보자의 결격 사유를 사전에 걸러내기보다 언론 보도와 야당의 문제 제기로 드러난 뒤 해명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은 검증이 아니라 사후 수습이다. 그런데도 여권은 “인사청문회를 지켜보자”는 말만 되풀이한다. 청문회가 대통령실의 부실 검증을 대신하는 장치인가. 국민이 묻는 것은 청문회에서 무엇이 밝혀질지가 아니라 왜 이런 사람이 애초에 후보자 명단에 올랐느냐는 것이다. 특히 법무부 장관처럼 법치와 사법 질서를 책임지는 자리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국민에게 법과 원칙을 요구하는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준법·도덕성 논란조차 명확하게 해소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어떻게 공정과 법치를 말할 수 있겠는가. 고위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흠잡기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인사 실패는 정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경제와 시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 정책은 결국 사람이 집행한다. 장관의 전문성과 리더십에 따라 정책의 방향과 속도가 달라지고 기업의 투자와 고용 판단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사가 흔들리면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기업은 투자를 늦출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통상 압력, 인공지능(AI) 패권 경쟁, 저성장 등 복합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정부가 인사 논란으로 국정 역량을 소진해서는 안 된다. 시장에 치명적인 것은 잘못된 정책만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정책이다. 장관이 바뀌고 정책이 흔들리며 대통령실이 해명에 매달리는 일이 반복되면 기업은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 외국인 투자자 역시 정책의 지속성과 행정 능력을 따질 수밖에 없다. 관료사회도 위축된다.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기보다 정치권과 대통령실의 눈치를 보게 된다. 경제가 속도전을 벌여야 할 때 정부 조직이 인사 논란에 발목 잡히면 그 비용은 결국 기업과 국민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후보자 몇 명을 교체하는 땜질식 처방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인사 검증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고쳐야 한다. 부동산·세금·병역·논문뿐 아니라 이해충돌, 직무 전문성, 정책 역량, 공직 수행 능력까지 종합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검증 과정에서 결격 사유를 발견하고도 묵인하거나 축소했다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코드 인사를 버려야 한다.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 정치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과 전문성,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참모가 아니라 “이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가 필요하다. 그것이 대통령과 국정을 지키는 길이다. 대통령도 결단해야 한다. 한번 지명한 사람을 끝까지 감싸는 것이 대통령의 권위는 아니다. 잘못된 인사를 인정하고 철회하는 것이 오히려 강한 리더십이다. 반복되는 검증 실패라면 최종 인사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기업은 정부에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일관된 정책과 예측 가능한 행정을 요구한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인사의 실패가 정책의 실패로 이어지고 정책의 실패가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이번 인사 논란을 또 하나의 정치적 소란으로 넘긴다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사람만 바꿔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시스템과 책임 구조, 인사의 기준을 함께 바꿔야 한다. 대통령실은 더 이상 변명과 방어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부실 검증의 책임을 인정하고 인사 시스템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흠결 있는 후보자는 과감히 철회하고 검증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는 한편, 인재 풀도 백지에서 다시 짜야 한다. 경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장의 신뢰도 무한정 용서하지 않는다. 인사에서 무너지면 정책이 흔들리고 정책이 흔들리면 시장의 신뢰도 무너진다. 지금이 인사 시스템을 환골탈태시킬 마지막 기회다.
2026-09-09 1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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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검증의 출발선" 청와대 사전 검증은 무엇을 했나
[경제일보]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검증을 대신하는 절차가 아니다. 국회가 후보자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마지막 문턱에 가깝다. 그 문턱에 누구를 세울 것인지를 먼저 가려내는 일은 인사권자의 몫이다. 이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청문회는 검증 장치가 아니라 잘못된 인사를 뒤늦게 수습하는 무대가 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에 청와대가 내놓은 설명은 그래서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청문 제도 자체가 후보자에 대한 국민적 검증 과정”이라며 두 후보자가 “인사위원장의 책임 아래 인사 시스템을 거쳐 지명된 후보”인 만큼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국민 눈높이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사 검증체계를 갖추고 강화하겠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사청문회는 국민을 대신한 국회의 공개 검증 절차다. 아직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후보자를 낙마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고, 청문회를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다만 인사 시스템을 거쳐 지명했다면서 왜 곧바로 검증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것인가. 김 후보자에게는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과 관련한 청탁 의혹과 과거 음주운전 문제가 제기됐다. 김 후보자는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고 반박하면서도 민원 전달 과정에는 신중했어야 했다고 밝혔고, 음주운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용 후보자에게는 비례대표 의원직과 장관직의 겸직 문제, 당 운영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 등이 제기되고 있다. 각각의 의혹과 적격성은 청문회에서 사실관계를 더 따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명 전 어디까지 검토됐느냐는 것이다. 이미 알고도 장관직 수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청와대가 그 판단에 책임을 지면 된다. 반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사전 검증에 구멍이 있었다는 뜻이다. 둘 중 어느 경우든 “청문회에서 검증하자”는 말만으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국회법은 국무위원 후보자 등에 대해 국회가 인사청문회를 열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에게서 후보자를 고르는 책임을 넘겨받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 이후 국회가 공직 수행 능력과 도덕성 등을 공개적으로 다시 검증하는 견제 장치다. 사전 검증과 인사청문은 순서만 다른 같은 검증이 아니다. 책임의 주체부터 다르다. 청와대 검증은 대통령의 책임이고, 국회 청문회는 국회의 책임이다. 이 단순한 구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청와대가 후보자의 재산과 세금, 범죄·징계 이력, 이해충돌 가능성, 과거 행적과 정무적 리스크를 충분히 확인한 뒤 “이 정도 문제를 감안해도 국정을 맡길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명이다. 청문회는 그 판단에 누락이나 왜곡이 없는지 국민 앞에서 다시 따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전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할 문제가 지명 직후 쏟아지고, 그때마다 “청문회에서 보자”는 답이 반복되면 인사의 책임 구조가 거꾸로 선다. 대통령이 고르고 청와대가 검증했는데, 최종적으로 후보자의 적격 여부를 발견하고 판단하는 책임은 국회와 언론, 국민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방식이 반복될 때 생기는 ‘지명의 관성’이다. 후보자를 발표한 뒤에는 철회 비용이 커진다. 인사 실패를 인정해야 하고 야당의 공세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이미 지명했다는 이유 자체가 후보자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되기 쉽다. 검증의 판단 기준이 ‘공직에 적합한가’에서 ‘청문회를 버틸 수 있는가’로 바뀌는 순간이다. 제대로 된 사전 검증은 흠결을 하나도 없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현실 정치에 거의 없다. 핵심은 어떤 흠결까지 받아들일 것인지 기준을 미리 세우는 것이다. 음주운전이나 세금 체납, 부동산 투기, 연구윤리 위반, 갑질, 이해충돌, 수사·징계 이력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검증 항목부터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부족하다. 공직의 성격에 따라 어느 정도의 흠결을 결격으로 볼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산업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전문성의 기준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제는 탈락 사유였던 문제가 오늘은 해명 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도 곤란하다. 법적 결격과 정치적·윤리적 부적격을 구분하는 기준도 필요하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장관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장관은 형사재판에서 유죄인지 무죄인지만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에게 정책의 준수를 요구하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다. 법률상 임명 가능성과 국민이 기대하는 공직 윤리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그때그때 여론을 보며 판단해서는 인사 원칙이 생기지 않는다. 책임선도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 청와대 인사는 인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후보 추천과 검증, 정무적 판단이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인사수석실까지 신설됐지만 후보자 논란이 반복되면서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누가 후보자를 추천했는지까지 모두 공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사에는 보안이 필요하다. 후보군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할 이유도 충분하다. 하지만 지명 이후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면 최소한 내부적으로는 추천 단계에서 놓쳤는지, 검증 과정에서 확인하지 못했는지, 알고도 정무적으로 수용했는지를 구분하고 책임을 남겨야 한다. 알고도 선택했다면 대통령과 인사위원회가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몰랐다면 검증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상서’ 고요모에는 ‘지인즉철 능관인(知人則哲 能官人)’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지혜이며, 그래야 사람을 제대로 벼슬에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수천 년 전에도 국정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를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서 찾았다. 인사가 어려운 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고 완벽한 후보자는 없다. 사생활과 공적 검증의 경계를 어디에 둘지도 쉽지 않다. 지나치게 가혹한 검증은 유능한 인재가 공직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준이 필요하다. 정권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느슨하고 반대편 사람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어느 정부에서든 대체로 예측할 수 있는 기준 말이다. 청와대가 이번에 인사 검증체계를 강화하겠다고 한 것은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강화하겠다’는 말만 반복해서는 같은 문제가 다음 개각에서 다시 돌아온다. 검증 항목을 표준화하고, 중대한 결격 사유와 해명 가능한 사안을 구분하며, 추천·검증·정무 판단의 책임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지명 뒤 예상하지 못한 중대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어떤 단계에서 놓쳤는지 복기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또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인사청문회는 청와대 검증의 실패를 대신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국회가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명하기 전에 제대로 검증하는 것은 그보다 먼저 존재하는 권한이자 책임이다. 청문회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겠다면 사전 검증은 형식이 된다. 반대로 청와대가 자신 있게 검증을 마쳤다면 논란이 불거졌을 때 “청문회에서 보자”에 앞서 왜 그 문제를 감수하고도 지명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사의 신뢰는 흠결 없는 사람을 찾아내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왜 골랐고, 무엇을 확인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지 분명할 때 생긴다. 청문회는 검증의 시작이 아니다. 대통령의 인사검증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국민 앞에서 확인하는 마지막 문턱이어야 한다.
2026-09-08 0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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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은행 자문에서 국내 최대 로펌까지…김앤장 53년
[경제일보] 김앤장은 법정이 아니라 기업의 계약서에서 출발했다. 1973년 김영무·장수길 변호사가 문을 연 김·장 법률사무소의 초기 고객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이었다. 국내 은행과 기업이 해외에서 자금을 빌릴 때 계약서를 검토하고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를 자문했다. 변호사의 주된 무대가 법정이던 시절, 김앤장은 기업의 거래 현장으로 먼저 들어갔다. 53년이 지난 지금 김앤장은 국내 최대 로펌이다. 변호사만 1400명이 넘고 변호사를 포함한 법률전문가는 2000명을 웃돈다. 2025년 매출은 업계에서 1조6000억~1조7000억원 수준으로 추산한다. 2위권 대형 로펌과도 상당한 격차를 두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김앤장보다 먼저 기업법무 시장에 자리 잡은 법률사무소도 있었다. 김앤장이 선두로 치고 올라온 과정에는 한국 기업이 다음에 필요로 할 법률서비스를 먼저 준비하는 방식이 있었다. ◆ 판·검사 대신 기업법무 택한 김영무 창업자 김영무 변호사의 이력부터 당시 법조계의 통상적인 경로와 달랐다. 1964년 제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았다. 서울대 사법대학원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비교법을 공부했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J.D.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는 미국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은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며 빠르게 성장했다. 차관을 들여오고 외국 회사와 합작법인을 세우면서 계약도 복잡해졌다. 국내법뿐 아니라 외국법과 국제거래에 익숙한 변호사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김영무 변호사는 이 시장을 파고들었다. 법정에서 이미 벌어진 분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기업이 거래를 하기 전 계약을 짜고 위험을 줄이는 업무에 무게를 뒀다. 지금은 흔한 기업법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장수길 변호사의 합류는 김앤장의 빈 곳을 채웠다. 장 변호사는 고등고시를 거쳐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원 판사를 지냈다. 김영무 변호사가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맡았다면 장 변호사는 송무와 중재, 지식재산권을 담당했다. 김앤장이라는 이름은 두 사람의 성에서 따왔다. ◆ 기업이 해외로 나가자 로펌도 따라갔다 김앤장의 성장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궤를 같이했다. 1970~1980년대 해외 차관과 외국인 투자가 늘면서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가 커졌다. 기업들이 합작회사를 만들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김앤장이 일찍 쌓은 국제거래 경험을 찾는 기업도 늘었다. 1976년 합류한 정계성 변호사는 금융 분야를 맡았다. 공기업과 기업의 해외 차입, 국제자본시장 업무를 담당했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 기업의 외자유치와 금융거래를 자문했다. 1980년 입사한 정경택 변호사는 외국인 투자와 M&A, 공정거래 분야를 키웠다. 1983년 GM과 대우자동차의 합작투자, 1991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쌍용정유 지분 인수, 1997년 미국 P&G의 쌍용제지 인수 등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굵직한 거래에 참여했다. 기업의 거래 방식이 바뀔 때마다 김앤장의 조직도 달라졌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자 금융 전문가가 늘었고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이 많아지자 외국인투자 분야를 키웠다. M&A가 활발해지자 기업거래 변호사를 늘렸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화되자 경쟁법 전문가를 붙였다. 김앤장이 몸집을 키운 과정은 변호사를 무작정 늘린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시장이 먼저 움직였고 그 시장에 맞춰 사람을 채웠다. ◆ 유명 변호사 한 명보다 팀으로 승부 김앤장의 또 다른 특징은 사건을 맡는 방식이다. 대형 사건을 이름난 변호사 한 명에게 맡기기보다 사건 성격에 따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한 팀으로 묶는다. M&A 사건이라면 기업법무 변호사뿐 아니라 공정거래와 금융, 조세, 노무 전문가가 함께 들어간다. 규제가 걸린 산업에서는 해당 부처나 감독기관을 경험한 전문가도 참여한다. 현재 김앤장 공정거래 분야에는 국내외 변호사와 경제학자, 산업 전문가, 전직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 등 150명 넘는 전문인력이 참여하고 있다. 자본시장 분야에도 80명 이상의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기업 입장에서 대형 로펌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천억원, 수조원이 오가는 거래나 회사의 존립이 걸린 사건에서는 법률 하나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정거래와 세금, 노동, 인허가 문제가 동시에 터진다. 김앤장은 이를 한 조직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만들어왔다. 젊은 변호사를 키우는 방식에도 일찍부터 해외 경험을 넣었다. 파트너와 후배 변호사가 함께 사건을 맡게 하고 해외 로펌 연수도 활용했다. 정계성 대표도 1982~1983년 미국 뉴욕 셔먼앤드스털링에서 실무를 익혔다. 사건을 맡아 경험을 쌓고 해외에서 새로운 거래 방식을 익힌 변호사들이 돌아와 다시 큰 사건을 맡았다. 이 과정이 수십 년 반복되면서 분야별 전문인력이 쌓였다. ◆ 외환위기, 김앤장이 한 단계 커진 시기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의 지형을 뒤흔들었다. 기업들이 자산을 팔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외자유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해외 자본과 국내 기업 사이에서 거래 조건을 만들고 정부 규제를 검토할 법률전문가의 역할도 커졌다. 김앤장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를 다뤄왔다. 국내 기업들이 급하게 해외 자본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이미 관련 업무를 해본 변호사들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M&A 시장이 커지면서 김앤장의 업무도 금융과 외국인투자에서 M&A, 공정거래, 조세, 구조조정으로 빠르게 넓어졌다. 김앤장 연혁에는 이 무렵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변호사 수가 100명을 넘어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형 거래를 맡으면서 경험이 쌓였고 그 경험을 보고 또 다른 기업이 찾아왔다. 새로운 사건이 들어오면 다시 전문인력을 늘렸다. 김앤장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선두로 올라선 배경이다. ◆ 계약서에서 시작해 기업 형사사건까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김앤장이 맡는 사건의 규모는 달라졌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과정에서는 14개국 경쟁당국의 기업결합 심사가 필요했다. 김앤장은 4년여에 걸친 기업결합 심사와 항공 관련 인허가 자문에 참여했다.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와 삼성바이오로직스 인적분할, 한앤컴퍼니의 SK스페셜티 인수 등 조 단위 거래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6년 상반기 국내 M&A 법률자문 시장에서는 자문금액 26조3406억원, 68건으로 1위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 시장점유율은 33.27%였다.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송무와 기업형사 분야에서도 대형 사건을 맡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형사재판에 참여해 1·2·3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SK실트론 사건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 처분을 취소하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승소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글과 메타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과징금 취소소송에서는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를 검토하던 법률사무소의 업무는 이제 M&A와 공정거래, 국제중재, 개인정보, 기업형사로 넓어졌다. 기업이 겪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로펌이 다루는 영역도 함께 넓어진 것이다. ◆ 커진 영향력, 커진 감시 국내 최대 로펌이라는 자리는 사건만 많이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나 기업인이 정부 조사와 형사사건에 직면하면 김앤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 법원과 검찰, 정부 부처와 규제기관 출신 전문가도 적지 않다. 김앤장의 사건 대응력이 높아지는 만큼 전관과 이해충돌을 둘러싼 논란도 따라붙는다. 2025년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의 외부인 접촉 보고 가운데 김앤장 관련 보고는 로펌 중 가장 많은 363건이었다. 접촉 보고는 사건 관계인과의 만남 자체를 기록하는 제도여서 이 숫자가 곧 부적절한 접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규제기관 출신 인력을 대거 보유한 로펌이 해당 기관의 규제를 받는 기업을 대리하는 문제는 늘 감시 대상이 된다. 김앤장이 커질수록 사건 수임 못지않게 이해충돌 관리와 전관 논란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중요해졌다. 고객 평가 역시 전문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김앤장은 종합평가와 전문성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서비스 평가는 3위였고 소송비용의 합리성은 6위였다. 복잡한 사건에 여러 분야의 전문인력을 투입하는 방식은 강점이지만 비용이 높다는 평가도 피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규모가 항상 고객 만족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 시장이 열리기 전에 사람을 준비했다 김앤장의 53년을 보면 몇 번의 중요한 갈림길이 있었다. 기업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할 때 국제금융을 키웠고 외국 자본이 국내로 들어올 때 외국인투자 업무를 늘렸다. 기업 인수·합병이 본격화되기 전에 M&A 전문가를 확보했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해지자 경쟁법 인력을 늘렸다. 지금은 AI와 데이터, 공급망, 경제안보, 글로벌 통상, 기업지배구조가 기업법무의 새로운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앤장도 이 분야에 전문조직과 인력을 늘리고 있다. 김앤장이 53년 동안 한 선택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복잡하지 않다. 기업이 법률 문제에 부딪힌 뒤 변호사를 찾았다면 김앤장은 그보다 먼저 그 문제를 다룰 사람을 준비했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에서 시작한 김앤장이 국내 최대 로펌으로 성장한 데에는 그 시간차가 있었다.
2026-09-08 0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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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된다고 다 해도 되나…공직자의 '공정 감수성'이 무너지고 있다
[경제일보] 공직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모두 해도 되는 자리도 아니다. 공직자와 공직후보자에게는 법률의 최소 기준을 넘어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이라는 더 높은 잣대가 따라붙는다. 최근 잇따른 논란은 이 당연한 원칙을 다시 묻게 한다.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재정 비상상황’을 선언했다. 경기도는 재정난을 이유로 5465억원 규모의 세출 구조조정에 나섰고, 직원들에게도 고통 분담을 주문했다. 그런데 추 지사가 도청 인근 156㎡ 아파트를 12억2000만원에 전세 계약한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기도는 업무 효율을 위해 관련 규정에 따라 계약했고, 계약 당시에는 재정 상황의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규정을 어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상징이다. 직원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서 최고 책임자가 상대적으로 넓고 비싼 관사를 사용하는 모습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재정 비상이 정말 심각하다면 먼저 줄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 지도자가 보여주는 것이 순리다. 조직은 말보다 행동을 먼저 본다.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비례대표 의원직 겸직 논란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법적으로 겸직이 가능한지 여부와 국민이 이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공직은 가능한 권리를 최대한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제한할 줄 아는 자리여야 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치료제 임상시험 승인과 관련해 식약처장에게 신속한 처리를 요청하는 취지의 문자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 후보자는 민원 전달일 뿐 부정한 로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현 단계에서 위법을 단정해선 곤란하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의 문자 한 통이 평범한 민원인의 전화 한 통과 같은 무게일 리는 없다. 의원은 법을 만들고 예산을 심사하며 정부기관을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 지위에서 “빨리 처리해달라”는 말은 의도와 무관하게 행정기관을 압박하는 신호로 읽힌다. 이 세 사례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관사, 하나는 겸직, 하나는 민원 전달 문제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모두 법 위반 여부를 따지기 전에 공직자의 자기 절제가 충분했는지를 묻게 한다. 정치권은 이런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규정에 따른 것이다” “관행이었다”고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공직 윤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직원들에게 긴축과 희생을 요구한다면 자신부터 절제해야 하고, 국민에게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면 자신도 권력의 지름길을 경계해야 한다. 최근 여론 흐름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국갤럽의 지난 1~3일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40%, 부정 평가는 51%였다. 20대 긍정 평가는 25%로 전주보다 6%포인트 떨어졌다. 부정평가 이유에서는 ‘인사’가 9%로 올라섰다. 한 번의 조사 결과만으로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인사 논란이 특히 청년층의 공정 감수성을 건드렸다는 정치권의 해석에는 귀 기울일 대목이 있다. 2030 세대가 특권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단순하다. 취업과 주거, 자산 형성에서 치열한 경쟁을 겪는 세대에게 ‘누군가는 자리도 갖고, 혜택도 갖고, 인맥도 활용한다’는 인상은 강한 박탈감으로 돌아온다. 공직자가 이를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말로 넘기면 민심과 더 멀어진다. 정치는 법률가의 시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합법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적절한지를 판단해야 하는 영역이다. 규정상 가능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해친다면 스스로 한 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장관과 도지사, 국회의원처럼 권한이 큰 자리일수록 기준은 엄격해져야 한다. 권력이 크면 책임도 커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공직 후보자 검증도 달라져야 한다. 재산과 세금, 전과 여부만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이해충돌 가능성, 특혜의식, 권한 행사 방식, 공적 자원을 대하는 태도까지 함께 봐야 한다. 결국 국민이 묻는 것은 ‘법을 어겼느냐’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공직을 맡을 자세가 돼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정권의 인사는 능력만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도덕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사람인가에 대한 신뢰가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 공직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해명이 아니다. 법과 규정을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선택을 하는 문화다. 특권처럼 보이는 관사는 줄이고 이해충돌의 여지가 있는 자리는 내려놓고 권한 있는 사람의 전화 한 통도 조심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절제가 쌓여 공직의 신뢰가 만들어진다. 공직은 가능한 것을 모두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절제, 누릴 수 있어도 내려놓는 태도에서 공직의 품격이 드러난다.
2026-09-07 14: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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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일 때는 공소취소, 장관 후보 되니 '권한 없다'
[경제일보]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임명권자에게만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다. 검찰과 교정, 출입국, 인권과 형사사법 행정을 총괄하고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까지 떠맡는 자리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과의 적절한 거리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3일 이재명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 논란에 선을 그었다. 김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소취소를 할 직접적인 권한도 없고 검찰총장을 통해 지휘할 생각도 지금 없다”고 밝혔다.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는 공판검사의 권한이며 이를 존중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과거 발언과의 간극이다. 김 후보자는 의원 시절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관련 의원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 대통령 사건은 국가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정치인의 입장이 공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국회의원과 법무부 장관은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의원은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자리지만 장관은 법과 절차를 집행하는 자리다. 오히려 장관 후보자로서 과거 정치적 주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로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권한의 유무보다 신뢰의 문제다. 법무부 장관에게 직접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없다는 설명은 맞다. 현행 체계에서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와 취소는 검사가 판단한다. 다만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하며,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한다. 이 때문에 장관의 과거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태도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신뢰와 직결된다. 더욱이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형사사건이라면 기준은 한층 엄격해진다. 법무부 장관이 과거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를 주장했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장관이 된 뒤에도 같은 판단을 유지하는가. 검찰이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이를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대통령과 여권의 정치적 이해보다 형사사법 절차를 앞세울 수 있는가. 김 후보자가 답해야 할 대목도 여기에 있다. 공소취소가 법적으로 가능하냐는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장관으로 취임한 뒤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어떤 원칙을 적용할지, 이해충돌 우려가 생길 경우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절제할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정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검찰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든 취소하든 국민이 그 결정을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받아들이면 형사사법의 신뢰는 흔들린다. 장관이 실제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정치적 발언이 결정 과정 전체에 의심을 덧씌울 수 있다. 그래서 권력기관의 장에게는 법에 적힌 권한보다 더 넓은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 법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법은 사람보다 오래가야 한다’는 사고다. 통치자의 이해에 따라 법이 흔들리는 순간 공화정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고 봤다.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원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사정이 바뀌어도 형사사법의 기준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이면서 동시에 법치의 관리자다. 두 역할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법무행정의 목표로 읽히는 순간 장관의 독립성은 약해진다. 반대로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라도 법과 절차 앞에서는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신뢰는 유지된다. 우리 정치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된 이유도 이 경계가 자주 흐려졌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 인사와 수사 방향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고, 여권은 검찰개혁을, 야권은 권력수사를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법무부는 정치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정치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장관의 말과 검찰의 판단이 정쟁의 소재로 소비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줄여야 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과거 정치적 발언을 문제 삼는 데서 멈출 일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취임 이후 대통령 사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서 어떤 원칙을 적용하느냐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고 검찰의 법적 판단을 존중하며, 지휘권 행사 기준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태도가 관건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같은 기준에서 접근하는 편이 낫다. “공소취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단답형 공방보다 대통령 사건에서 장관의 이해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 수사지휘권 행사의 기준은 무엇인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를 묻는 편이 생산적이다. 김 후보자가 “지휘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은 방향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국민이 궁금한 것은 현재의 말보다 취임 이후의 행동이다. 의원 시절의 정치적 주장을 장관이 된 뒤에도 법과 원칙보다 앞세운다면 우려는 현실이 된다. 반대로 정치적 이해와 거리를 두고 형사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면 과거 발언과의 간극도 설명력을 얻는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의 법률대리인이 아니다. 정권의 이해를 지키는 자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형사사법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본래의 책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봐야 할 것도 결국 그 점이다. 과거의 발언 자체보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지킬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과의 정치적 거리를 스스로 확보하고, 법과 절차를 흔들지 않는 태도로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신뢰는 강한 권한 행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법 앞에서는 더 멀리 서는 절제에서 나온다.
2026-09-04 16: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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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도 쿠팡 주식 거래…美 정·관계 전방위 연결 주목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 운용사를 통해 쿠팡 주식을 거래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쿠팡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과의 연결고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쿠팡이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확대해온 가운데 통상·외교 핵심 인사들의 자문 이력까지 드러나면서 향후 한미 통상 현안에서도 쿠팡 문제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 측은 투자 결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5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윤리청(OGE)이 최근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재산신고 자료에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쿠팡 주식을 모두 18차례 매수·매도한 내역이 포함됐다. 거래는 대통령이 직접 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부 운용사가 관리하는 투자계좌를 통해 이뤄졌다. 공개된 신고서는 정확한 거래금액 대신 일정 금액 구간만 기재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보유한 쿠팡 주식은 최대 13만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전체 자산 규모를 감안하면 비중은 크지 않지만, 최근 쿠팡이 한미 통상 현안의 중심에 선 상황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의 투자계좌 운용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실제 거래도 외부 운용사가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미국 행정부가 쿠팡 관련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자산 포트폴리오에 쿠팡 주식이 포함된 점을 두고 이해충돌 가능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나온다. 특히 거래 시점이 쿠팡을 둘러싼 한미 갈등 국면과 일부 겹친다는 점도 주목된다. 지난해 말 국내에서 쿠팡 관련 국회 논의가 이어졌고, 올해 들어서는 미국 정치권이 한국 정부의 쿠팡 규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는 쿠팡 문제를 포함한 한국의 미국 기업 규제와 관련한 조사와 보고서를 잇달아 내놨다. 쿠팡과 미국 행정부 핵심 인사들의 과거 업무 관계도 확인됐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로펌 킹앤드스폴딩 파트너로 재직하던 2024년 쿠팡으로부터 강연·자문 사례금 1만달러를 받은 사실을 재산신고서에 기재했다. USTR은 미국 기업이 해외에서 받는 차별이나 비관세장벽 문제를 다루는 핵심 통상 부처다. 엘리슨 후커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도 취임 전 컨설팅 회사 재직 당시 쿠팡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보수를 받은 것으로 신고했다. 후커 차관은 SK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국내 주요 기업에도 같은 형태의 자문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이력만으로 현재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통상과 외교를 담당하는 핵심 인사들이 과거 쿠팡과 업무 관계를 맺었던 사실이 공개되면서 국내에서는 미국 정부의 쿠팡 관련 대응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배경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나온다. 미국 정치권의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미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는 지난 1일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차별적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공개하며 쿠팡 사례를 비중 있게 다뤘다. 이어 백악관도 한국 정부가 쿠팡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우려를 공개적으로 밝히며 통상 현안으로 확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한국 정부는 개인정보 보호와 소비자 보호 등 국내 법령에 따른 조치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측이 기업의 입장을 중심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통상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규제 취지와 법 집행 배경을 미국 측에 지속적으로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쿠팡의 대미 네트워크가 단기간에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한다. 쿠팡은 미국 연방 로비공개법에 따라 올해 1분기 약 109만달러(약 17억원)를 로비 자금으로 지출했다고 신고했다. 로비 대상에는 의회뿐 아니라 국무부, 재무부, 상무부, 무역대표부(USTR), 농무부, 중소기업청 등 주요 정부 기관이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일반적인 통상 전략으로 볼 수 있지만, 향후 쿠팡을 둘러싼 논란이 한미 통상 협상과 별개 사안으로 보기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한다. 정부와 국회 역시 법적 근거와 규제 목적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대미 대응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6-07-05 13: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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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손보는 스튜어드십 코드, 감시자도 감시받아야 한다
[경제일보] 한국 자본시장에서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주인은 누구인가.” 상장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이사회와 경영진은 때로 오너 일가의 뜻을 더 무겁게 받아들였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굴리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도 기업의 주인이라기보다 조용한 손님처럼 주주총회장 한쪽에 앉아 있었다.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결정에도 침묵했고, 일반 주주가 손해를 보는 합병이나 배당정책에도 뒤늦게 반대표를 던지는 정도에 머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도입된 것이 스튜어드십 코드다. 기관투자자가 고객과 수익자의 돈을 맡은 수탁자로서 투자대상 기업을 점검하고 필요하면 의결권과 주주권을 행사하라는 행동지침이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6년 12월 도입됐다. 이후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우정사업본부 등 4대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사모펀드 운용사, 벤처캐피털 등 수백 개 기관이 참여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참여기관은 249곳이었다. 기관투자자의 반대 의결권 행사와 주주제안이 늘어나는 등 일정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10년의 성적표는 절반의 성공에 가깝다. 가입 기관은 늘었지만 실제 무엇을 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코드에 참여한다고 선언해도 이행보고서를 제대로 쓰지 않거나, 써도 각 기관 홈페이지에 흩어져 비교와 검증이 어려웠다. 금융위에 따르면 과거 이행보고서를 공시한 기관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책임투자’라는 간판은 걸었지만 책임의 내용을 시장이 확인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정부와 한국ESG기준원이 추진하는 이번 개정안은 바로 그 약한 고리를 겨냥한다. 핵심은 수탁자 책임 활동 보고서를 매년 한국ESG기준원에 제출하도록 하고, 이행 여부를 점검해 공시하는 것이다. 기관투자자는 고객과 수익자에게 수탁자 책임 정책과 이행 현황을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왜 지키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기존 국내 상장주식 중심이던 적용 대상도 채권, 인프라, 부동산, 비상장주식 등으로 넓어질 전망이다. 수탁자 책임 활동의 고려 요소도 지배구조를 넘어 환경·사회·지배구조, 즉 ESG 전반으로 확대된다. 방향은 옳다. 한국 증시는 오랫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구조적 저평가에 갇혀 있었다. 낮은 배당, 불투명한 지배구조,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사이의 이해충돌, 이사회 독립성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정부가 말하는 밸류업도 결국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주주와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누고, 경영진이 자본비용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기관투자자의 역할은 작지 않다. 기관이 침묵하면 기업은 변하지 않는다. 기관이 원칙 있게 묻고 따지면 이사회는 긴장한다. 특히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는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다. 국민의 노후자금, 직장인의 퇴직연금, 개인투자자의 펀드 자금을 맡은 관리자다. 이들이 기업의 사업모델, 재무상황, 자본배분, 지배구조를 살피는 것은 정치적 개입이 아니라 수탁자의 기본 책무다. 기업이 현금을 쌓아두고도 투자를 하지 않는지, 대주주에게 유리한 거래가 일반주주에게 불리하지 않은지 따지는 것은 시장경제의 정상 작동에 속한다. 주주권 행사를 ‘기업 때리기’로만 보는 낡은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밝은 면만 볼 수는 없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칼날은 기업을 향하지만, 그 칼을 쥔 기관투자자도 감시받아야 한다. 문제는 누가 감시하느냐다. 이번 개정안에서 이행점검의 실무는 한국ESG기준원이 맡고, 스튜어드십 코드 발전위원회가 최종 검토·의결하는 구조다. 그런데 시장 일각에서는 이 점검 체계의 독립성을 우려한다. 발전위원회에 자산운용업계 인사가 참여하고, ESG기준원이 의결권 자문이나 의안분석 서비스 등 금융투자업계와 거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지적이다. 피점검 대상과 점검 주체 사이에 이해상충 가능성이 있다면 제도의 신뢰는 출발선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ESG기준원은 스튜어드십 코드 지원 조직을 별도로 운영하고, 의결권 자문 등 다른 업무와 공간·인력·정보교류를 차단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위도 내부정보 교류 차단장치를 통해 이해상충 가능성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신뢰는 선언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아도 이해상충이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구조다. 감시자는 실제로 독립적이어야 하고, 동시에 독립적으로 보여야 한다. 영국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원류는 2010년 영국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관투자자의 무관심과 단기주의가 위기를 키웠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영국은 재무보고위원회(FRC)를 중심으로 코드의 이행력을 높여왔다. 한국도 같은 모델을 그대로 베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업계가 업계를 점검한다’는 의심을 줄일 장치는 필요하다. 자율규범이라는 이름 아래 점검이 느슨하면 시장은 냉소하고, 정부 입김이 과도하면 기업과 기관투자자는 정치적 압박으로 받아들인다. 반민반관형 독립기구, 외부 전문가 중심의 평가위원회, 이해상충 공개 의무 같은 보완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ESG와 공동관여 활동도 신중해야 한다. ESG 요소를 고려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이지만, 기업의 본질적 경쟁력과 무관한 정치적 구호로 흐르면 책임투자는 방향을 잃는다. 여러 기관투자자가 함께 기업과 대화하는 공동관여도 영향력을 키울 수 있지만, 특정 기업을 압박하는 집단행동처럼 비치면 시장의 자율성과 경영 판단을 위축시킬 수 있다. 주주권 행사는 강해야 하지만 무리해서는 안 된다. 자본시장 개혁은 칼보다 저울에 가까워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은 한국 자본시장에 필요한 수술이다. 기업가치를 높이고, 주주권을 정상화하며, 기관투자자의 책임을 실질화하는 방향은 맞다. 특히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 미만 기업이 여전히 절반 안팎에 이르는 현실에서 기관투자자의 침묵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시장은 이제 ‘착한 기관’이 아니라 ‘책임 있는 기관’을 요구한다. 다만 제도의 성패는 문구가 아니라 집행에 달려 있다. 보고서를 의무화해도 내용이 부실하면 또 하나의 서류 행정이 된다. ESG를 넣어도 평가 기준이 모호하면 ESG 워싱만 키운다. 점검 체계를 만들어도 감시자가 독립적이지 않으면 시장은 믿지 않는다. 기관투자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면 그 책임을 점검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10년의 과제는 분명하다. 침묵하는 기관을 깨우는 것, 그리고 그 기관을 감시하는 눈까지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둘이 함께 갈 때 한국 증시는 숫자의 상승을 넘어 신뢰의 상승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26-06-22 14: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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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방선거, 한 표의 기준은 생활과 책임이다
[경제일보] 오늘 유권자는 다시 투표소 앞에 선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단순한 지방 권력 교체의 절차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1년 만에 치러지는 첫 전국 단위 선거이고, 국정 안정과 정권 견제라는 두 구호가 정면으로 맞붙는 정치적 시험대다. 여야는 저마다 심판을 말한다. 여당은 국정 동력을 위해 지방 권력의 교체를 호소하고, 야당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최소한의 힘을 달라고 말한다. 선거에서 심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방선거의 본질이 심판 구호 하나로 덮여서는 안 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을 다시 뽑는 선거가 아니다. 국회를 새로 구성하는 선거도 아니다. 시장과 도지사, 구청장과 군수, 지방의원과 교육감을 뽑는 선거다. 이들이 다루는 것은 거대한 이념보다 가까운 생활이다. 버스 노선, 주차장, 학교 안전, 돌봄, 병원 접근성, 재난 대응, 쓰레기 처리, 노후 주거 정비, 지역 일자리, 산업단지 규제, 소상공인 지원이 모두 지방 행정의 영역이다. 주민의 하루를 바꾸는 일은 대개 중앙정치의 연설장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회의실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오늘의 한 표는 정당에 대한 호불호만으로 행사돼서는 안 된다. 어느 후보가 우리 지역의 재정을 제대로 이해하는가. 누가 선심성 공약과 실제 가능한 정책을 구분할 수 있는가. 누가 예산을 아끼고, 필요한 곳에는 과감히 쓸 수 있는가. 누가 개발 이익과 환경 보전, 성장과 복지, 교통과 주거의 균형을 설명할 수 있는가. 유권자가 물어야 할 기준은 분명하다. 내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할 사람인가. 지역의 돈을 자기 정치가 아니라 주민의 삶에 쓸 사람인가. 지금 지방은 위기 앞에 서 있다. 수도권은 과밀과 주거비에 눌려 있고, 비수도권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에 흔들리고 있다. 지역 대학은 학생을 구하지 못하고, 중소도시는 병원과 학교와 일자리를 동시에 걱정한다. 지방소멸은 더 이상 먼 미래의 말이 아니다. 반대로 일부 지역은 산업 전환의 기회를 맞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바이오, 관광, 물류, 에너지 산업은 지방정부의 판단에 따라 지역의 새 먹거리가 될 수도 있고,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지방정부의 실력이 곧 지역의 생존 능력이 되는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지방선거를 중앙정치의 대리전으로만 소비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여야가 심판론을 외치는 것은 정치의 속성상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유권자까지 그 언어에 갇힐 필요는 없다. 중앙정치의 분노와 피로가 투표장을 지배하면 정작 지역의 문제는 뒤로 밀린다. 선거가 끝나면 중앙정치의 구호는 사라지지만, 부실한 지자체장과 무능한 지방의회는 4년 동안 주민 곁에 남는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이 치른다. 정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방선거를 정권 안정론이나 정권 견제론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한다. 공천은 정당의 가장 엄중한 책임이다. 당선 가능성만 보고 후보를 세우고, 지역을 잘 아는 인물보다 계파와 충성도를 앞세운다면 지방자치는 허울만 남는다. 지방의회 역시 마찬가지다. 집행부를 감시하지 못하는 의회, 예산서를 읽지 못하는 의원, 주민보다 정당의 눈치를 보는 지방정치는 민주주의의 하부 구조를 약하게 만든다. 교육감 선거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교육은 한 지역의 미래를 정하는 가장 긴 호흡의 정책이다. 기초학력, 사교육비, 학교폭력, 교권, 디지털 교육, 지역 간 교육 격차는 모두 현장에서 풀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교육감 선거는 늘 정보 부족 속에 치러진다. 유권자가 후보를 모른 채 투표장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학교는 다시 이념과 구호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 교육감은 교육 행정가이지 진영의 대리인이 아니다. 오늘 유권자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함이다. 마음에 드는 정당이 있어도 후보를 봐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이라도 지역을 위해 일할 사람인지 따져야 한다. 공약집을 읽고, 이력을 보고, 전과와 재산, 납세와 병역, 이해충돌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선거는 감정의 배출구가 아니라 책임의 계약이다. 투표용지에 찍는 도장은 분노의 낙인이 아니라 앞으로 4년을 맡기는 위임장이다. 투표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남이 결정한다. 정치가 싫다고 투표장을 떠나면 조직화된 표가 지역의 미래를 가져간다. 지방선거에서 한 표의 가치는 중앙선거보다 더 직접적이다. 몇 표 차이로 구의원과 군의원이 바뀌고, 그 한 사람이 조례와 예산을 바꾼다. 작은 선거일수록 한 표는 더 무겁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말이 아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 가서 자기 판단을 남기는 일이다. 좋은 정치가 저절로 오지 않듯, 좋은 지방정부도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묻는 시민이 있어야 답하는 후보가 나오고, 따지는 유권자가 있어야 책임지는 정치가 가능하다. 오늘의 기준은 상식이어야 한다. 지역을 아는 사람, 예산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갈등을 부추기기보다 해결할 사람, 정당의 명령보다 주민의 삶을 먼저 볼 사람을 골라야 한다. 심판도 필요하고 견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것은 생활이고 책임이다. 6.3 지방선거의 한 표는 중앙정치의 함성 속에서도 결국 우리 동네의 내일을 선택하는 일이다.
2026-06-03 13: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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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방선거 사전투표 시작…후보 자질·정책 잘 따져 주권 행사해야
[경제일보] 6·3 지방선거의 문이 먼저 열린다. 사전투표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다. 유권자는 주소지와 관계없이 전국 사전투표소 어디에서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투표소에 갈 때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보다 덜 뜨겁고, 국회의원 선거보다 덜 주목받는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는 오히려 더 가까운 선거다. 버스 노선과 배차 간격, 재개발과 재건축, 학교와 돌봄, 골목상권과 지역 일자리, 청년 주거와 노인 복지, 쓰레기 처리와 하천 정비가 모두 지방정부의 손을 거친다.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지방의원과 교육감을 누구로 뽑느냐에 따라 한 도시의 4년이 달라진다. 지방선거를 ‘작은 선거’로 여기는 순간, 우리 일상의 큰 결정권을 남에게 맡기는 셈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가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후보의 자질이다. 자질은 말솜씨가 아니다. 선거운동 기간에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도 아니다. 공직을 맡을 만한 도덕성, 이해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절제, 예산을 다룰 능력, 주민의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태도, 위기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품격이 자질이다. 지방권력은 중앙권력보다 감시의 눈이 느슨해지기 쉽다. 단체장과 지방의회가 한 정당으로 쏠리면 견제 장치도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유권자는 후보의 전과, 재산 형성 과정, 병역·납세, 과거 공직 수행 평가, 막말과 혐오 발언 여부까지 차분히 살펴야 한다. 정책은 더 냉정하게 봐야 한다. 선거 때마다 지역마다 ‘철도 신설’ ‘산단 조성’ ‘청년 일자리’ ‘무상 복지’ ‘관광도시 도약’ 같은 말이 쏟아진다. 듣기 좋은 공약일수록 더 물어야 한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중앙정부 권한인지 지방정부 권한인지 구분했는가. 이미 추진 중인 사업을 이름만 바꿔 새 공약처럼 내세운 것은 아닌가. 임기 4년 안에 가능한 사업인가. 주민 갈등을 조정할 방안은 있는가. 좋은 공약은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숫자와 일정, 책임 주체가 분명한 약속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책·공약마당에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후보자 측이 제출한 정책·공약 자료가 게시돼 있다. 선관위는 선거 진행 중에는 후보자 공약 정보를 제공하고, 선거 종료 뒤에는 당선인 공약 정보를 제공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유권자가 마음만 먹으면 정당의 10대 정책, 후보자별 공약, 지역별 쟁점을 비교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는 셈이다. 사전투표는 단순히 ‘미리 하는 투표’가 아니다. 바쁜 직장인, 자영업자, 돌봄 노동자, 출장·이동이 많은 유권자에게 참정권의 문턱을 낮추는 제도다. 선거일 당일 일정이 불확실하다면 사전투표는 주권을 놓치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다만 편리해진 만큼 더 신중해야 한다.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후보 이름과 정당 기호만 볼 것이 아니라, 최소한 내 지역의 핵심 현안과 후보별 해법은 확인해야 한다. 지방선거의 위험은 ‘묻지마 투표’다. 중앙정치에 대한 분노나 호감만으로 지방정부를 선택하면 지역의 구체적 문제는 뒤로 밀린다. 여당을 도와야 한다는 구호도, 야당을 견제해야 한다는 구호도 유권자의 판단 기준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장과 도지사, 구청장과 군수, 지방의원은 중앙정치의 대리인이 아니라 주민의 생활을 책임질 일꾼이다. 정당을 보되 인물을 함께 보고, 구호를 듣되 실행 능력을 따져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다. 정치의 바탕은 신뢰라는 뜻이다. 오늘의 지방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뢰는 선거운동 차량의 확성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뢰는 후보의 삶, 말과 행동의 일관성, 공약의 실현 가능성,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유권자가 그 신뢰를 검증하지 않으면, 선거 뒤 실망할 권리도 약해진다. 이번 지방선거는 지역의 미래를 정하는 선거다.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도시, 집값과 교통난에 눌린 수도권, 산업전환의 갈림길에 선 제조업 도시, 교육과 돌봄 부담이 커진 모든 지역이 각자의 해법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과제들은 진영의 함성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숫자를 아는 행정,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29일과 30일 사전투표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워도, 한 표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민주주의는 거창한 연설보다 평범한 시민의 기표에서 완성된다. 후보의 자질을 따지고,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살피고, 내 지역의 4년을 누구에게 맡길지 숙고해야 한다. 투표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사전투표의 시작은 유권자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도시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 답은 정당도, 여론조사도, 선거 구호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오직 시민의 한 표만이 답할 수 있다.
2026-05-29 10:3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