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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뒤에 숨을 수 없는 공직자의 책임
[경제일보] 말은 가볍게 나가지만 그 말이 도착하는 곳은 가볍지 않다. 특히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한 개인의 의견처럼 보이지만 국민은 그것을 정부의 태도, 권력의 감수성, 국가의 품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공직자는 말할 자유를 갖되 그 자유보다 먼저 말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이병태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배재고 야구부의 5·18 민주화운동 조롱성 응원 논란과 관련해 이 부위원장은 SNS에 “5·18이 성역이 됐다”, “북한의 모습”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이후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자신의 입장을 이어갔다. 청와대는 해당 발언이 “혐오와 조롱에 대한 정부의 단호한 거부 기조와 달리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엄중 경고했다. 이후 이 부위원장의 사퇴 의사를 수용했다. 이번 사안을 단순히 한 공직자의 돌출 발언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호돼야 하는냐다. 또 하나는 공직자가 사적 공간에서 한 말도 공적 책임의 대상이 되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뿌리지만 공직자의 언행은 그 뿌리를 흔들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넓게 보장돼야 한다. 불편한 말, 거친 비판, 권력에 대한 조롱까지도 민주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다. 국가가 듣기 싫은 말을 막기 시작하면 자유는 순식간에 허가제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문제 제기 자체를 금기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고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를 다시 상처 입히며 특정 지역과 공동체를 조롱하는 행위까지 자유의 이름으로 덮을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타인의 존엄과 인권을 훼손하는 것까지 옹호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학생들의 미성숙한 응원 구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정에서 어른의 역할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수습을 돕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부총리급으로 불리는 정부 고위직 인사의 말이 논란을 정치적 전선으로 확장시켰다. 배재고 논란의 본질은 청소년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공동체 감수성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이냐다. 하지만 이 부위원장의 발언 이후 논란은 징계의 적절성, 표현의 자유, 5·18의 역사적 의미, 정부 인사 검증 문제로 번졌다. 공직자는 시민과 다르다. 시민은 자신의 말에 대해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공직자의 말은 행정과 정책의 신뢰를 함께 움직인다. 규제합리화위원회는 말 그대로 규제를 합리화하고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한 기구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무는 기업과 시장, 국민 사이의 신뢰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런 인사가 사회적 상처가 깊은 역사 문제를 두고 절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했다면 시장 친화적 규제 개혁의 메시지조차 불필요한 정치 논란에 묻힐 수밖에 없다. 경제도 결국 신뢰 위에서 굴러간다. 정책은 숫자로 설계되지만 실행은 신뢰로 움직인다. 정부가 규제를 풀겠다고 해도 국민이 그 정부의 판단을 믿지 못하면 정책은 저항에 부딪힌다. 기업이 투자하려 해도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 비용이 늘어난다. 공직자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정책 추진력을 갉아먹는 비경제적 비용이다. 규제 합리화라는 좋은 명분도 사회 통합의 감수성을 잃으면 설 자리가 좁아진다. 이번 사퇴는 개인의 낙마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부 인사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전문성은 중요하다. 경제를 알고 시장을 알고 규제의 폐해를 아는 인재는 필요하다. 그러나 고위 공직에 필요한 자격은 전문성만이 아니다. 헌법 가치에 대한 이해,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 공적 언어를 다루는 절제도 전문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국민 통합을 내세운 정부라면 더 그렇다. 통합 인사는 진영을 넓히는 일이지만 상처를 헤집는 언행까지 감싸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어 이인편에는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려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는 구절이 있다. 말을 못하라는 뜻이 아니다. 말이 앞서면 책임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경계다. 공직자의 말은 더 그렇다. 많이 말하는 것이 소통은 아니다. 빨리 반응하는 것이 용기는 아니다. 국민의 상처 앞에서 한 박자 늦추고 자기 확신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책임이다. 물론 이번 논란을 빌미로 공직자의 모든 사적 발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사회로 가서도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위축과 검열을 낳는다. 중요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기준이다. 공직자는 비판할 수 있다. 정책을 두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존엄을 건드리고 사회적 혐오와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언어를 선택했다면 그에 따른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도 숙제를 안게 됐다. 청와대는 초기 경고 이후 사퇴 의사를 수용했지만 앞으로는 사후 수습보다 사전 검증이 중요하다. 과거 발언과 SNS 이력만 기계적으로 훑는 수준을 넘어 고위 공직 후보자가 공적 갈등을 다룰 만한 균형감과 언어 감각을 갖췄는지 살펴야 한다. 전문가는 많지만 공직자는 드물다. 전문성을 공공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공직자다. 이병태 부위원장의 사퇴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직자의 말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직함을 가진 순간 말은 제도와 연결되고 정부와 연결되며 국민의 기억과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공기다. 그러나 공직자의 언어는 그 공기를 탁하게 하지 않을 책임을 함께 진다. 정치는 갈등을 먹고 살 수 있지만 행정은 신뢰를 먹고 산다. 경제정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국민은 오만한 권력을 싫어한다. 공직자의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말은 한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지만 공직자의 말은 한 정부의 수준을 드러낸다. 이번 논란을 통해 정부가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다. 인사는 넓게 하되 공직의 기준은 낮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2026-07-07 15: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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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정치, 파탄의 의회주의… '도(道)'를 잃은 국회에 고함
[경제일보] 대한민국 국회가 길을 잃었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숙명이지만,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건강한 경쟁이 아니라 정치의 자기 파괴에 가깝다. 대화는 실종되고 타협은 조롱받으며, 상대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의회는 민의를 수렴하는 광장이 아니라 다수의 힘과 소수의 저항이 충돌하는 전쟁터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 전체가 맞닥뜨린 심각한 위기다. 최근 국회 원 구성 과정에서 나타난 다수당의 일방적 강행 처리와 입법 독주, 이에 맞선 소수당의 무기력한 저항은 우리 정치가 의회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대화와 절제, 타협을 잃어버렸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수는 숫자의 우위를 절대 권력으로 착각하고, 소수는 국정 운영의 동반자가 아니라 발언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협치는 사라지고 힘만 남았다. 숫자가 정의를 대신하고, 권력이 상식을 밀어내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병들기 시작한다. 특히 필리버스터마저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필리버스터는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니다. 다수결이 놓칠 수 있는 소수의 목소리를 국민에게 끝까지 전달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다. 토론이 귀찮다고 토론을 없애고, 반대 의견이 불편하다고 침묵을 강요하는 국회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지배일 뿐이다. 효율은 행정의 가치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는 숙의와 합의에 있다. 역사는 오만한 권력이 오래가지 못했음을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성경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경고한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민심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다. 오늘 절대다수의 의석을 가진 정당도 내일은 국민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다. 민심은 배를 띄우는 물이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는 거센 파도가 되기도 한다. 노자는 『도덕경』 제9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득 채우고 또 채우는 것은 적당한 때에 멈추는 것만 못하며, 지나치게 날카롭게 갈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오늘의 국회는 바로 이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다수당은 의석을 끝까지 채우려 하고, 야당은 상대를 겨누는 창끝만 더욱 날카롭게 벼른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반드시 모자람만 못하다. 힘은 절제될 때 권위가 되고, 권력은 양보할 때 존경을 얻는다. 끝없이 채우려는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는 100 대 0의 승부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를 조정하여 국민 전체의 이익을 찾는 과정이다. 51 대 49로 결정되더라도 나머지 49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다수는 소수를 품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원칙이지만, 다수의 횡포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국회의 존재 이유도 법안을 빨리 처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론하고 설득하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토론 없는 국회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협치 없는 의회는 민주주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은 국회가 싸우라고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한을 위임했다. 오늘날 정치권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정당은 경쟁하지만 국가는 공동체다. 여야는 선거에서는 경쟁자일지라도 국정에서는 동반자여야 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치의 본질은 사라지고 적대만 남는다. 소수당 역시 국민이 선택한 헌법기관이다. 그들의 권한을 무력화하는 것은 그들을 지지한 국민의 목소리를 지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 국회는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첫째, 여야가 참여하는 상설 협치협의체를 제도화해 원 구성과 주요 법안은 충분한 협의를 거친 뒤 처리하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둘째, 필리버스터와 상임위원회 토론권 등 소수 의견을 보장하는 제도를 정치적 편의에 따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셋째, 다수당은 숫자의 힘보다 책임의 무게를 먼저 생각하고, 소수당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 있는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넷째, 국회의원 개개인은 당리당략보다 헌법과 국민을 우선하는 의회주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국회에 부여한 책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 말은 더욱 절실하다. 국민 위에 정당이 있을 수 없고, 국민 위에 국회도 있을 수 없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대결보다 대화를, 독주보다 협치를, 승리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힘이 아니라 절제에서 완성되고,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꽃핀다. 지금 국회가 되찾아야 할 것은 더 많은 권력이 아니라 더 깊은 겸손이며,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넓은 포용이다.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오만과 독선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상식과 협치의 길로 돌아갈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힘보다 품격을 기억했고, 국민은 언제나 권력보다 책임을 선택했다. 국회는 이제라도 '도(道)'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무너져가는 의회주의를 살리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2026-07-03 16: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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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X 상장, 인류의 꿈에도 가격표가 붙었다
[경제일보] 스페이스X가 마침내 증시에 올랐다. 미국 시간으로 12일, 한국 시간으로는 13일 새벽이다. 월가의 전광판에 우주기업의 이름이 뜬 순간 사람들은 주가를 봤다. 그러나 그 숫자 뒤에는 더 큰 장면이 있었다. 인류가 오랫동안 국가의 이름으로 꾸어온 우주의 꿈이 이제 민간 기업의 주식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모 규모는 사상 최대였다. 개인투자자들의 청약 열기도 뜨거웠다. 일부 투자자는 배정받지 못했고 일부는 첫 거래에서 프리미엄을 감수하고 뛰어들었다. 시장은 스페이스X를 로켓 회사로만 보지 않았다. 스타링크를 품은 위성통신 회사, 국방과 안보를 움직이는 우주 인프라 기업,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나아가 화성 이주라는 서사를 가진 미래 복합 플랫폼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스페이스X 상장의 본질이다. 로켓이 아니라 서사가 상장한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이 시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궤도에 올렸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시장을 설득했다. 전기차는 테슬라로, 민간 우주는 스페이스X로, 위성인터넷은 스타링크로, 인공지능은 xAI로 밀어붙였다. 과장과 돌출 발언, 정치적 논란과 경영 리스크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한 가지 능력만큼은 증명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를 투자 가능한 상품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스페이스X의 상장은 그래서 단순한 기업공개가 아니다. 국가가 독점하던 우주개발의 질서가 민간 플랫폼 중심으로 옮겨가는 신호다. 과거 우주는 국력의 상징이었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달을 향했다. 오늘의 우주는 다르다. 발사체는 재사용되고 위성은 통신망이 되며, 데이터는 안보와 금융, 전쟁과 재난 대응의 기반이 된다. 우주는 이제 낭만이 아니라 인프라다. 스페이스X는 그 인프라의 문지기 자리를 차지했다. 투자자들이 몰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페이스X가 당장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아직 손실도 크고 미래 사업의 불확실성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시장은 현재의 손익계산서보다 미래의 지배력을 샀다. 스타링크가 지구 저궤도 통신망을 장악하고 로켓 재사용이 발사 비용을 더 낮추며 우주 기반 데이터센터와 국방 네트워크가 현실이 된다면 스페이스X는 항공우주 기업을 넘어 21세기 인프라 제국이 된다. 이번 공모주 열기는 그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베팅이다. 물론 시장의 열광은 늘 조심스럽게 봐야 한다. 큰 꿈이 곧 좋은 투자는 아니다. 거대한 비전은 때로 거대한 거품을 만든다. 우주 산업은 긴 시간과 막대한 자본, 규제와 기술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발사 실패 한 번, 위성망 장애 한 번, 규제기관의 제동 한 번이 주가를 흔들 수 있다. 머스크 개인에게 집중된 의사결정 구조도 리스크다. 투자자가 산 것은 회사의 실적만이 아니라 머스크라는 인물의 신화다. 신화는 시장을 끌어올리지만 한순간에 시장을 냉각시키기도 한다. 그래도 이번 상장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미래 산업의 경쟁은 더 이상 반도체 하나, 자동차 하나, 통신망 하나로 나뉘지 않는다. 로켓과 위성,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전기차와 로봇, 국방과 통신이 하나의 생태계로 묶이고 있다. 스페이스X는 이 융합의 한복판에 있다. 우주에서 인터넷을 깔고 지상에서는 데이터를 모으며 AI는 그 데이터를 해석하고 로봇과 자동차는 물리 세계를 움직인다. 이것이 머스크가 그리는 세계다. 우리가 이 상장을 남의 나라 증시 이벤트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조선, 방산, 통신망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우주 플랫폼은 아직 약하다. 발사체와 위성, 위성통신과 우주 데이터 서비스, 군사용 저궤도 네트워크를 하나로 묶는 산업 설계가 부족하다. 정부 주도 프로젝트는 있었지만, 민간이 수익을 만들고 그 수익을 다시 기술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는 아직 얕다. 국내 증시에서 스페이스X 관련주가 들썩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위성 부품, 항공우주 소재, 발사체, 방산, 통신 장비, 지상국 관련 기업에 투자자 관심이 몰릴 수 있다. 하지만 냉정해야 한다. 스페이스X가 오른다고 국내 모든 우주항공주가 실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테마는 빠르고 산업은 느리다. 주가는 하루 만에 움직이지만 공급망 진입은 수년이 걸린다. 투자자는 이름이 비슷한 기업보다 실제 기술과 매출, 글로벌 고객을 봐야 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우주항공청 출범만으로 우주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주개발은 구호가 아니라 조달, 규제, 보험, 인력, 시험장, 발사장, 데이터 활용 시장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군과 민간, 대학과 기업,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산업 운영 능력이 필요하다. 스페이스X의 강점은 로켓 기술 하나에 있지 않다. 실패를 반복해도 다시 쏠 수 있는 제도와 자본, 정부 수요와 민간 시장을 연결하는 생태계에 있다. 한국은 늘 기술을 따라잡는 데 강했다. 그러나 플랫폼을 만드는 데는 약했다. 부품을 잘 만들고, 제조를 잘하고, 납기를 맞추는 데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시장의 규칙을 선점하고 생태계를 설계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우주산업에서도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남의 로켓에 부품을 넣는 나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위성과 통신, 데이터와 안보 서비스를 묶어 스스로 플랫폼을 만드는 나라가 될 것인가. 스페이스X 상장은 이 질문을 한국 앞에 던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비전은 거칠다. 때로 위험하고 때로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바꾼 것은 분명하다. 그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고 끌고 왔다. 국가가 계획서에서 맴돌던 우주를 기업의 공장과 증시의 전광판으로 가져왔다. 이것이 그의 힘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세계는 완벽한 합의와 정교한 보고서로만 전진하지 않는다. 때로는 무모한 기업가, 참을성 없는 자본, 실패를 감수하는 기술자들이 역사를 앞으로 밀어붙인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머스크를 찬양하는 일이 아니다. 머스크를 부러워만 하는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인물이 나와도 버틸 수 있는 제도, 그런 기업이 커질 수 있는 시장, 그런 실패를 견딜 수 있는 자본이다. 기술 관료가 모든 것을 허가하고 정치가 모든 위험을 피하려 하며 여론이 실패 한 번에 기업을 매장하는 구조에서는 스페이스X 같은 회사가 나오기 어렵다. 우주산업은 안전해야 하지만 완전히 무위험일 수는 없다. 위험을 통제하는 것과 위험을 아예 허용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스페이스X 상장은 자본시장의 사건이지만 본질은 문명의 사건이다. 인류의 꿈에도 가격표가 붙었다. 그 가격이 적정한지는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주가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 거품이 섞였을 수도 있고 아직 시장이 충분히 평가하지 못한 미래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주가 다시 산업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스페이스X 주가를 보며 테마주를 사고파는 나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우주와 통신, AI와 방산, 제조와 데이터를 묶어 한국형 우주 플랫폼을 설계할 것인가. 사상 최대 IPO의 불빛은 뉴욕 나스닥 전광판에 켜졌지만 그 질문은 서울과 사천, 대전과 판교, 그리고 한국의 산업 현장 전체를 향하고 있다. 꿈은 돈이 될 때 빠르게 현실이 된다. 그러나 돈만 좇는 꿈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페이스X가 보여준 것은 비전과 자본이 결합할 때 미래가 얼마나 빨리 당겨지는가다. 한국이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우주를 낭만으로만 말하지 말고 산업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산업으로만 보지 말고 국가의 미래로 다뤄야 한다. 스페이스X 상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제 한국의 우주 시간표를 다시 쓸 때다.
2026-06-13 13: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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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의 덫과 침묵의 바다,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러나 꽃은 향기로 사람을 모으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향기보다 적대와 혐오의 냄새가 더 짙다. 6·3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정책 경쟁보다 진영 결집에 몰두하고 있고, 유권자들은 서로 다른 현실 속에서 각자의 선거를 치르고 있다. 같은 나라, 같은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대한민국 안에 두 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40년 가까이 정치 현장을 취재하며 수많은 선거를 지켜봤지만, 지금처럼 국민이 깊이 갈라지고 정치가 극단적 진영 논리에 포획된 시기는 드물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양성 속의 공존인데, 오늘의 정치 현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방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여당은 정의를 독점한 듯 행동하고, 야당은 저항의 명분을 독점한 듯 주장한다. 그 사이에서 국민은 편을 강요받는다. 이 같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심리의 본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왔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자료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른바 '확증 편향'이다. 문제는 디지털 시대가 이런 인간의 약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제공한다. 보수는 보수의 논리만 듣고, 진보는 진보의 주장만 접한다. 서로 다른 정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는 위험하다.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문제가 발생해도 지지층은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결집한다.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서다. 언론 탓을 하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며, 음모론을 동원해 스스로를 설득한다. 정치적 판단이 이성의 영역에서 감정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더욱 위협하는 것은 확증 편향보다도 '침묵의 나선' 현상이다. 정치권은 늘 여론을 말한다. 하지만 여론이란 과연 무엇인가. 광장의 함성인가, 유튜브 조회 수인가, 댓글 창의 전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진짜 민심은 오히려 조용한 곳에 숨어 있다. 대부분의 시민은 정치에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시장에서 하루하루 삶을 꾸려간다.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관계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침묵한다. 특히 지금처럼 정치적 낙인과 조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큰 목소리가 다수의 의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선거 결과가 전문가들의 예측을 뒤집어 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 의견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 정치적 소음을 외면한 사람들이 투표소에서 비로소 자신의 뜻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상대 진영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착각이다.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국민 전체의 목소리로 오인하는 순간 정치는 현실 감각을 잃는다. 그리고 현실 감각을 잃은 정치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인류의 고전은 이런 인간의 오만을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듯하는 것이 가장 높은 경지"라고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 상대방에게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인정이야말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덕목이라는 의미다. 성경 역시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불가에서도 자기 허물을 먼저 돌아보라고 가르친다. 동서양의 모든 지혜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오만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승자독식의 게임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당선된 순간부터는 지지자만이 아니라 반대했던 국민까지 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이다. 이번 지방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유권자들은 진영의 구호보다 후보의 자질과 정책을 살펴야 한다. 정치인들은 혐오와 선동 대신 설득과 통합을 말해야 한다. 언론 또한 클릭 수 경쟁을 넘어 공론장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확증 편향의 감옥 속에서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존의 길을 찾을 것인가. 그동안 언론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이 민심을 안다고 믿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국민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성찰한 정치만이 오래 살아남았다. 선거의 진정한 승자는 개표 결과로 결정되지 않는다. 선거 이후에도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치가 존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승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성찰의 침묵이다. 그 침묵 속에서만 진짜 민심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2026-05-31 13: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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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 "일베 폐쇄·징벌배상 검토 필요"…혐오표현 규제 공론화 예고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조롱·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 일간베스트저장소와 같은 사이트의 폐쇄·과징금 부과까지 포함한 제도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 추도식이 열린 봉하마을에서 일베 이용자로 추정되는 방문객들이 조롱성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 직후다. 이 대통령은 24일 소셜미디어에 “‘봉하마을서 일베 손가락질 사진 찍어’…조수진 노무현재단 이사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공유하며 “엄격한 조건 하에 조롱·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 징벌배상 및 일베처럼 조롱·혐오를 방치·조장하는 사이트 폐쇄, 징벌배상, 과징금 등 필요 조치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공론화와 실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일베처럼 조롱·모욕으로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데 대해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처벌을 포함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병존한다”며 “국무회의에도 지시하겠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라고 적었다. 논란은 전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 추도식에서 불거졌다. 노무현재단 이사인 조수진 변호사는 일베 이용자로 추정되는 방문객들이 현장에서 조롱성 행동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조 변호사가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하며 혐오표현 처벌법 제정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현장에는 일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진 티셔츠를 입은 청년들이 특정 손가락 모양으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다만 이들의 실제 소속이나 조직적 동원 여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단계는 아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민주화운동과 사회적 참사, 정치적 추모 공간을 겨냥한 조롱성 표현에 강경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앞서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논란 당시에도 이 대통령은 역사적 아픔을 상업적 이벤트 소재로 삼은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에는 특정 기업 마케팅을 넘어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 운영자의 책임 문제로 논의가 확장됐다. 단순 게시물 작성자 처벌을 넘어, 조롱·혐오 표현을 반복적으로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사이트 자체에 과징금, 징벌배상, 폐쇄 등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검토하자는 취지다. 쟁점은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보호의 경계다. 현행법은 명예훼손, 모욕, 불법정보 유통 등 개별 조항을 통해 일부 표현을 규제하지만 혐오표현 전반을 직접 포괄하는 일반법은 마련돼 있지 않다. 국내 법학계에서도 혐오표현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하는 견해가 오랫동안 맞서왔다. 일베 폐쇄 논란은 과거에도 반복됐다. 2013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노 전 대통령을 폄훼하는 게시물이 확산되며 사이트 폐쇄론이 제기됐고, 당시에도 표현의 자유 침해 여부를 놓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충돌했다. 2018년에도 일베 폐쇄 국민청원에 23만명 이상이 동의하면서 청와대가 폐쇄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답한 바 있다. 사이트 폐쇄나 접속 차단은 특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불법정보에 대한 차단은 현행 제도상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지만, 특정 사이트 전체를 폐쇄하는 것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과잉금지 원칙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도화가 추진된다면 반복성, 고의성, 피해의 중대성, 운영자의 방치·조장 여부, 사법적 통제 절차가 명확해야 한다. 그럼에도 추모 공간을 찾아가 고인을 조롱하고 이를 온라인 인증 문화로 소비하는 행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도 커지고 있다. 정치적 풍자와 비판은 보호돼야 하지만, 특정 개인의 죽음이나 민주화운동 희생자, 사회적 참사를 조롱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기본 질서를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발언은 혐오표현 규제 논의를 다시 정치권의 전면 의제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국무회의 차원의 검토를 시작하면 법무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방심위,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관련 제도와 해외 사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혐오표현과 사회적 갈등 조장에 대한 책임 강화를 주장할 가능성이 크고, 야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정부의 표현 규제 권한 확대를 우려할 수 있다. 핵심은 ‘무엇을 막을 것인가’보다 ‘어떤 기준과 절차로 제한할 것인가’다. 혐오와 조롱을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정당하더라도, 규제 기준이 모호하면 정치적 비판이나 풍자까지 위축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엄격한 조건”이 실제 제도 설계에서 어떻게 구체화될지가 향후 논의의 중심이 될 전망이다.
2026-05-24 09: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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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권력과 변화의 무대인가...동양철학의 거울에 비추어본 '런웨이'
[경제일보] 물은 흐를 때 모든 것을 감춘다. 그러나 물이 빠지는 순간, 바닥의 형상이 드러난다. 수락석출(水落石出). 이 말은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가 「후적벽부」에서 자연을 묘사하며 남긴 구절이다. “산은 높고 달은 작아지며, 물은 줄고 돌이 드러난다.” 본래는 계절의 변화를 노래한 문장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인간과 권력, 그리고 진실을 설명하는 가장 정밀한 은유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이 문장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기도 하다. 화려한 패션과 권력의 세계를 그린 이 작품은, 결국 물이 빠지는 순간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현대적 우화다. 영화의 중심에 선 미란다 프리슬리는 한 시대의 권력을 상징한다. 회의실에서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코트를 벗어 던지면, 주변 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동작 하나에 반응한다. 패션쇼 좌석 배치에서 단 한 번 눈을 치켜뜨는 장면만으로도 업계의 위계가 재편된다. 그녀의 권력은 명령이 아니라 분위기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절대성은 영원하지 않다. 속편적 영화 장면에서 ‘런웨이’가 디지털 환경 속에서 흔들리는 장면, 광고주가 종이 잡지보다 플랫폼 데이터를 우선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더 이상 개인의 손에만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도덕경』이 말하듯,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이 살아남는다. 미란다는 그 진리를 가장 늦게, 그러나 가장 깊이 체감하는 인물이다. 반면 앤디 색스는 권력의 세계에 들어와 스스로를 잃어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초반, 그녀가 허름한 옷차림으로 런웨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동료들의 시선은 조롱에 가깝다. 그러나 이후 몽타주 장면에서 그녀는 고급 브랜드 의상을 입고 뉴욕 거리를 당당히 걷는다. 문제는 그 변화가 단순한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균열이라는 점이다. 파리 패션쇼 직전, 앤디가 전화 한 통으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장면은 성공의 대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그녀는 센 강의 다리 위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그 순간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다. 『중용』이 말하는 균형, 곧 외부의 성공과 내부의 자아 사이에서 중심을 찾는 결단이다. 에밀리 찰튼은 또 다른 얼굴이다. 그녀는 미란다의 기준을 완벽히 내면화한 인물이다. 파리 패션쇼에 가기 위해 극단적으로 식사를 줄이고, 끝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은 집착의 극단을 보여준다. 『불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집착은 곧 고통의 근원이다. 반면 나이젤은 통찰과 균형의 상징이다. 앤디에게 “패션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산업과 문화의 흐름”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제시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승진이 좌절되는 순간, 그는 능력과 공정성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체현한다. 이는 『주역(周易)』이 밝히는 변화의 법칙, 곧 성한 것은 반드시 쇠한다는 이치를 보여준다. 이 네 인물은 권력, 자각, 집착, 통찰이라는 네 축으로 구성된 인간 존재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 구조는 단순히 영화 속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미디어 산업의 변화와 정확히 겹쳐진다. ‘런웨이’는 단순한 패션 잡지가 아니라 전통적 레거시 미디어의 상징이다. 과거에는 편집장이 곧 권력이었고, 정보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 그 구조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특히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스와 같은 세계 유수의 매체들조차 전통적 방식만으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이들은 디지털 전환을 넘어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질서 앞에 서 있다. 알고리즘이 기사 배치를 좌우하고, 인공지능이 초안을 작성하며, 독자의 관심은 데이터로 실시간 분석된다.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전 과정이 재편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AI·콘텐츠·유통(CD) 위기’다. 콘텐츠의 생산과 배포 구조가 기술에 의해 재정의되면서, 기존 미디어의 권력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과거 미란다가 “이것은 단순한 파란색이 아니라 세룰리안 블루다”라고 말하며 패션의 계보를 설명하던 장면은, 레거시 미디어가 자신이 만든 질서를 해설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AI 시대의 미디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를 제시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런웨이가 플랫폼에 밀려나듯, 전통 미디어 역시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 변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던져지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하나의 근본적 진실로 수렴한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구조는 반드시 변하며, 인간은 그 변화 속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수락석출, 물이 빠지면 돌이 드러난다. 유동성과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본질이다. 미란다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받아들이고, 앤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내려놓는다. 에밀리는 집착 속에서 흔들리고, 나이젤은 통찰 속에서도 좌절한다. 이 모든 장면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기술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 권력이 분산된 시대에 인간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덕경』은 흐름을 따르라 하고, 『불경』은 집착을 버리라 하며, 『중용』은 균형을 지키라 하고, 『주역』은 변화에 대비하라 한다. 서로 다른 듯 보이는 이 가르침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부 기준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성공은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며, 권력은 소유가 아니라 과정이며, 인간은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이다. 물이 빠진 뒤에도 남아 있을 자신의 ‘돌’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남긴 가장 냉정하면서도 깊은 통찰이다.
2026-05-02 19: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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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당국, 학생 폭력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교단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서서히가 아니라,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최근 또다시 학생이 교사를, 그것도 학교장실에서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충격을 넘어 참담함을 안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단 한 번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는 현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교육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교육 현장의 논쟁은 ‘교사의 체벌’에 집중돼 있었다. 과도한 체벌과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 속에 사회는 일정 부분 이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교사가 학생을 폭행했다는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학생이 교사를 때리고 모욕하며 위협하는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균형은 무너졌고, 교단의 권위는 사실상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 이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학생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시스템의 붕괴이며, 교육당국의 무능이 낳은 구조적 결과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재발 방지 대책’을 내세우지만, 현장은 달라진 것이 없다. 도대체 교육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사의 기본적인 교육권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행정이라면 그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서 공자는 “君君臣臣父父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라 했다. 각자의 자리가 바로 서야 질서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실에서는 이 기본 질서가 무너졌다. 교사는 지도자가 아니라 ‘민원 대상자’가 되었고, 학생은 배움의 주체를 넘어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역할이 전도된 공간에서 교육이 제대로 설 리 없다. 『도덕경』 역시 경고한다. “法令滋彰 盜賊多有”, 법과 규정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혼란이 커진다는 의미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규정은 넘쳐나지만, 정작 현장에서 작동하는 권한과 책임은 사라졌다. 교사는 학생을 제지할 실질적 수단이 없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만 떠안는다. 이런 구조에서 누가 교단에 서려 하겠는가. 이제는 분명히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교사의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교육은 무너진다. 권위는 억압이 아니라 질서의 기반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교권 보호를 선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질적 제도로 강화해야 한다. 교사에 대한 폭행과 협박에는 즉각적인 분리 조치와 강력한 법적 대응이 가능해야 한다. 교육청과 수사기관이 연계된 대응 체계를 구축해 교권 침해를 중대한 사안으로 다뤄야 한다. 문제 학생에 대한 분리 교육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반복적인 폭력이나 위협 행위를 보이는 학생은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해 상담과 교정을 병행해야 한다. 이는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학부모 책임 역시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처럼 학교가 모든 부담을 떠안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교권 침해 사안에 대해 학부모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하고, 필요한 경우 합당한 책임을 묻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아울러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 권한을 복원해야 한다. 모든 지도가 ‘아동학대’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에서는 어떤 교사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 명확한 기준과 보호 장치를 통해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당국의 태도다. 형식적인 대책을 넘어 책임 있는 결단과 실행이 필요하다.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대응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미봉책으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교실의 질서다. 교사가 두려움 속에서 수업을 하고, 학생이 이를 조롱하는 교실에서 미래를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지금의 현실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 기초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신호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교단을 지키는 일은 곧 사회를 지키는 일이다. 교육당국이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 피해는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2026-04-15 14:4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