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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게이트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1주년…전투원 가치 보존·로그라이크 개편 예고
[경제일보] 스마일게이트의 로그라이크 역할수행게임(RPG)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가 출시 1주년을 맞아 게임의 핵심 시스템과 시즌 운영 방식 개편에 나선다. 시즌이 끝나면 기존 전투원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문제를 개선하고, 반복적인 세이브 데이터 육성 과정에 변화를 줘 로그라이크 본연의 재미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15일 스마일게이트는 경기 성남시 분당퍼스트타워에서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미디어 인터뷰를 열고 전투원 가치 보존과 콘텐츠 확충, 시즌 운영 개편을 향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지난 10일 진행한 1주년 기념 쇼케이스 '악몽제'에서 신규 전투원과 시즌5 콘텐츠, 편의성 개선 사항 등을 공개한 데 이어 이날 미디어 인터뷰에서 중장기 개발 방향을 설명했다. 개발진은 지난 1년간 서비스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수집형 RPG와 로그라이크 게임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무게를 둘 방침이다. 특히 특정 시즌에 집중적으로 활용되는 전투원이 시즌 종료 이후에는 충분히 쓰이지 못하는 구조를 핵심 개선 과제로 꼽았다. 최승현 스마일게이트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PD는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는 수집형 게임이지만 시즌이 지나면 해당 시즌 전투원을 더 이상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며 "그동안 시즌을 준비하는 데 급급해서 이런 부분을 놓쳤던 것 같아 최우선으로 수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전투원 가치 보존을 위한 해법으로는 콘텐츠 확충을 제시했다. 현재는 대균열을 중심으로 게임이 운영되면서 신규 픽업 전투원의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시즌별 시스템과 성장 요소도 신규 전투원에 맞춰지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판단이다. 향후 다양한 콘텐츠에서 여러 전투원이 활약할 수 있도록 해 특정 캐릭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계획이다. 시즌6부터는 시즌 콘텐츠와 신규 콘텐츠의 설계도 바뀐다. 이전 시즌에 출시된 전투원도 새로운 시즌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세이브 데이터를 육성하는 과정의 부담도 줄일 예정이다. 세이브 데이터는 전투에 사용하는 카드와 효과 등을 구성해 전투원의 성능과 플레이 전략을 결정하는 요소다. 이용자 사이에서는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데이터를 조정하는 과정이 부담으로 지적돼 왔다. 개발진은 해당 과정에서 이용자가 단기·중기·장기 목표를 세우기 어렵다는 문제도 개선할 방침이다. 기존에는 대균열의 순위 경쟁이 주요 목표로 작용했지만,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이용자에게는 덱을 구성하고 성장시킬 뚜렷한 목적이 부족했다는 설명이다. 시즌6부터 프리시즌을 없애는 것도 운영 방식 개편의 일환이다. 프리시즌은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새로운 로그라이크 요소를 미리 경험하도록 마련됐지만, 오히려 게임의 긴장감과 이용자 참여도를 떨어뜨린다는 판단에 따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시즌을 연속적으로 운영하되, 모든 기간에 높은 집중도를 요구하는 콘텐츠를 배치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로그라이크 콘텐츠인 '출격'도 개편 대상이다. 시즌6에는 출격 환경 전반을 개선하고, 시즌7에는 모듈을 추가해 시즌마다 새로운 플레이 경험을 제공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처럼 장비나 운명 등 일부 요소를 변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로그라이크 특유의 전략 구성과 반복 플레이의 재미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최 PD는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는 라이브 게임으로 저희만이 할 수 있는 좀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일종의 모듈을 추가해서 시즌마다 전혀 새로운 로그라이크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개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토리는 시즌5부터 신과 카오스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전개에 들어간다. 신규 시즌 '눈 위에 맺힌 약속'에서는 극지 행성 니발리스에 추락한 방주 '프론트노바'와 그 위에 형성된 '천상의 방벽'을 무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들의 목적과 세계관에 감춰진 비밀, 새로운 적대 세력과 갈등도 순차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스토리 분량 확대보다는 연출의 완성도를 먼저 높이는 데 집중한다. 개발진은 기존 텍스트 중심의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삽화와 영상 등 시각적 연출을 활용해 세계관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게임 내 상품 구성도 확대된다. 1주년 시즈널 전투원 로스바이세를 통해 처음 선보이는 '스페셜 등급 외출복'은 기존 의상과 달리 포트레이트와 전투 화면, SD 캐릭터, 모델링, 에고 스킬 연출 등 다양한 게임 내 리소스를 교체하는 방식이다. 기존 외출복도 단계적으로 디럭스 등급까지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스페셜 등급 상품은 개발 일정에 맞춰 추가할 계획이다. 김기범 스마일게이트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DD는 "신규 전투원을 기획할 때마다 캐릭터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연출이라든지 재미있게 제공할 수 있는 기믹들을 최대한 연구해서 업데이트하려고 준비한다"며 "그중에서도 시즌 전투원 같은 경우에는 특별함이 느껴질 수 있도록 저마다의 전문 분야에서 어느 정도 룰브레이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디자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1주년 업데이트에서는 대균열을 클리어 중심의 '토벌전'과 순위 경쟁 중심의 '공훈전'으로 분리하고, 전투 배속과 기억의 조각 재구성 기능 등을 도입한다. 12월에는 두 이용자가 협력해 몬스터와 보스를 상대하는 첫 멀티플레이 콘텐츠 '연합작전 코어 브레이크'를 선보일 예정이다. 별도의 세이브 데이터 없이 전투원을 선택해 시작할 수 있도록 해 플레이 부담을 낮추는 것이 특징이다. 개발진은 오는 12월 로드맵 발표를 통해 시즌 운영 개편의 구체적인 방향도 공개할 예정이다. 1주년을 계기로 신규 콘텐츠를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즌마다 전투원과 성장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식 자체를 개선해 장기 서비스 기반을 다진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26-10-15 17: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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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으로 태어나 또 합병으로…대륙아주, 1000억 넘어 새 판 짠다
[경제일보] 2009년 3월 법무법인 대륙과 아주가 한집 살림을 시작했다. 국제소송과 기업분쟁에서 경험을 쌓은 대륙과 해외 네트워크를 넓혀온 아주가 합쳐졌다. 이름도 두 법인의 간판을 그대로 붙인 ‘대륙아주’였다. 그해 두 조직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건물로 사무실까지 합쳤다. 17년이 흐른 2026년 대륙아주는 다시 합병을 택했다. 이번 상대는 기업 인수·합병과 금융·테크 자문을 중심으로 성장한 법무법인 린이다. 두 법인은 지난 4월 합병 업무협약을 맺었고 10월 통합 법인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새 법인의 이름은 9월 말 현재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2025년 대륙아주의 매출은 1027억원이었다. 창립 이후 처음 1000억원을 넘어섰다. 린의 410억원을 합치면 1437억원이고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변호사 수도 대륙아주 247명과 린 137명을 합쳐 384명이다. 합병이 마무리되면 변호사 수로는 국내 6위권, 매출로는 8위권 규모가 된다. 대륙아주의 역사는 한 조직이 처음부터 몸집을 키운 과정과 다르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조직을 합치고 부족한 분야에 사람을 더하면서 체급을 올렸다. 2009년의 합병이 대륙아주를 만들었다면 2026년의 합병은 대륙아주의 다음 크기를 정하는 승부다. ◆ 미국 법정으로 간 ‘대륙’ 대륙의 시작은 1992년이다. 김대희 변호사가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고 1994년 특수부 검사 출신 함승희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함·김 법률사무소’로 이름을 바꿨다. 1996년 법무법인 대륙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름을 알린 사건은 국내 법정에만 있지 않았다. 1997년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사고 때 피해자들을 대리해 미국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했다. 외환위기 때에는 파생금융상품으로 손실을 본 대한생명을 대리해 미국 투자은행 JP모간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성과를 냈다. 해외 기업이나 금융회사를 상대로 한 분쟁 경험이 일찍 쌓였다. 당시 국내 기업의 해외 거래가 빠르게 늘면서 소송도 국경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국내법만 알고 법정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외국 법률과 금융거래 구조를 함께 알아야 하는 사건이 늘었다. 대륙은 국제분쟁과 기업 송무에서 자리를 잡았다. 기업 인수·합병과 자본시장 업무도 늘렸다. 2009년 합병 직후에는 연합인포맥스가 집계한 3분기 인수·합병 법률자문에서 발표 기준 2위에 올랐다. 대륙이 쌓은 송무 경험은 이후 대륙아주의 분쟁해결과 기업형사 업무로 이어졌다. ◆ 러시아부터 베트남까지 간 ‘아주’ 아주의 출발은 1993년이다. 김진한 변호사가 아주종합법률사무소를 열었고 이듬해 법무법인 아주로 전환했다. 대륙이 국제분쟁을 파고들었다면 아주가 먼저 공을 들인 곳은 해외 현장이었다. 아주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등 옛 소련권 국가로 나갔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에도 거점을 만들었고 오스트리아와 아랍에미리트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자원개발과 건설 등으로 해외에 나간 한국 기업의 현지 법률 문제를 맡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 기업들의 해외 투자가 늘면서 이런 네트워크의 활용도도 높아졌다. 국내 본사에서 계약서를 검토하는 것과 현지 정부·기업을 상대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아주가 확보한 현지 경험은 대륙이 갖고 있던 국제소송과 기업분쟁 역량과 맞물릴 여지가 있었다. 두 조직은 2008년부터 합병을 준비했다. 이듬해 3월 대륙아주 출범을 공식화했고 같은 해 9월 역삼동 동훈타워로 사무실을 합쳤다. 이름만 합친 채 조직을 따로 두지 않고 처음부터 한 공간에서 일하는 길을 택했다. ◆ 첫 합병은 ‘한 사무실’에서 시작했다 로펌 합병에서 어려운 것은 계약서보다 사람이다. 어느 조직 출신이 경영을 맡을지부터 보수와 사건 배분, 고객관리 방식을 다시 정해야 한다. 변호사가 이동하면 고객과 사건도 함께 빠져나갈 수 있다. 합병 이후 조직을 실제로 하나로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대륙아주는 출범 첫해 두 로펌의 사무실부터 합쳤다. 합병 뒤에도 각자 사무실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별도 조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피했다. 당시 대륙아주는 ‘서두르지 않으며 뿌리를 튼튼히 한다’는 기조 아래 서로의 조직문화를 인정하면서 업무를 합쳐갔다. 기업 인수·합병과 기업공개, 국제중재, 해상·항공, 구조조정으로 업무도 넓어졌다. 2013년에는 기업공개 법률자문에서 연간 3위를 기록했고 2014년에는 법무법인(유한)으로 조직을 바꿨다. 이후 공정거래와 조세, 금융, 에너지 분야도 인력을 늘렸다. 합병 효과가 곧바로 압도적인 외형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앤장과 빅5가 수백 명의 변호사를 확보하면서 대륙아주는 중대형 로펌 위치에서 오랜 경쟁을 벌였다. 다시 속도가 붙은 것은 2017년 이후다. ◆ 이규철 체제에서 다시 몸집 키워 이규철 대표변호사는 2017년부터 대륙아주 경영을 맡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이 대표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에서 특검보로 활동한 뒤 대륙아주에 합류했다. 2019년과 2021년, 2023년에 이어 2025년 네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이 대표 체제에서 대륙아주는 전통적인 송무와 기업자문에 새로운 분야를 붙였다. 중대재해와 원자력, 에너지·인프라, 공공정책, 국제업무에 인력을 늘렸다. 2025년에는 기존 팀 단위 조직을 그룹 중심으로 다시 짜면서 여러 분야가 한 사건을 함께 맡는 구조도 강화했다. 성과는 매출에서 나타났다. 2024년 933억원이던 매출은 2025년 1027억원으로 10% 늘었다. 국내 변호사는 같은 기간 244명에서 247명으로 거의 늘지 않았다. 특허법인과 관세법인, 컨설팅 계열사를 합친 전체 매출은 1152억원이었다. 다만 변호사 1인당 매출은 4억1606만원이었다. 화우와 율촌, 태평양, 세종, 광장 등 주요 대형 로펌이 7억원 안팎을 기록한 것과 차이가 있다. 외형을 키운 뒤에는 사건의 부가가치와 생산성을 더 끌어올려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 중대재해부터 AI 상담까지 대륙아주는 최근 몇 년 동안 대형 로펌들이 상대적으로 늦게 뛰어든 시장에도 손을 댔다. 대표적인 분야가 중대재해다. 기업의 안전관리 체계를 점검해 중대재해처벌법 준수 상태를 인증하는 사업을 도입했고 2026년 7월까지 240여개사가 인증을 받았다. 2024년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인공지능 법률상담 서비스 ‘AI 대륙아주’를 선보였다. 네이버의 대규모 언어모델을 활용해 민사와 형사, 가사 등 법률 질문에 답하는 서비스였다. 국내 로펌이 직접 일반인 대상 AI 법률상담 서비스를 내놓은 첫 사례로 소개됐다. 출시 직후 대한변호사협회가 변호사법 위반 가능성을 문제 삼으면서 논란도 일었다. 기술을 법률서비스에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법조계가 부딪힌 사건이었다. 대륙아주는 서비스 자체보다 리걸테크 경쟁에서 먼저 시험대를 밟은 로펌으로 이름을 알렸다. 해외에서도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미국 워싱턴DC와 아프리카 관련 업무를 확대하면서 기존 아시아 중심 해외법무에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대륙이 국제분쟁에서 시작하고 아주가 해외 현장을 찾아갔던 초기 경험을 다시 꺼낸 것이다. ◆ 1000억원 넘자 다시 합병을 택했다 대륙아주는 2025년 처음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다. 독자적으로 중견 로펌의 벽 하나를 넘은 직후 또 다른 로펌과 합치는 결정을 내렸다. 상대는 2017년 김앤장 출신 임진석 변호사가 세운 린이다. 린은 기업 인수·합병과 금융, 플랫폼·테크 등 기업자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대륙아주는 송무와 형사·행정, 해외법무와 신산업 규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왔다. 양측은 고객과 업무가 크게 겹치지 않는다는 점을 합병의 장점으로 보고 있다. 두 법인은 지난 4월 29일 업무협약을 맺고 합병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양측 대표와 같은 수의 위원이 참여하고 주요 사안은 만장일치로 정하기로 했다. 합병 법인의 이름과 의사결정 구조도 이 위원회에서 논의한다. 새 이름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9월에는 통합 법인의 이름을 일반에 공모해 2000건이 넘는 제안을 받았지만 심사가 길어지면서 당초 15일로 예정됐던 발표를 미뤘다. 17년 동안 사용한 ‘대륙아주’라는 간판도 이번 합병과 함께 바뀔 가능성이 있다. ◆ 합치면 변호사 수 6위…매출은 8위권 2025년 기준 대륙아주의 매출은 1027억원, 린은 410억원이다. 단순 합산하면 1437억원이다. 지평의 1327억원을 넘어서는 규모지만 YK의 1694억원에는 못 미친다. 국내 변호사 수에서는 순위가 더 올라간다. 지난해 말 대륙아주 247명과 린 137명을 합하면 384명이다. 같은 기준 화우의 369명을 넘어서 6위권에 들어간다. 사람 숫자와 매출 순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규철 대표도 합병 뒤 변호사 1인당 매출을 끌어올리는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합병 전 두 법인의 생산성은 기존 빅6보다 낮다. 사람을 합쳐 400명에 가까운 조직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상위권 로펌과 경쟁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합병 뒤에는 고객 충돌도 정리해야 한다. 한 사건에서 서로 반대편을 대리하던 두 로펌이 한 조직이 되면 어느 사건을 포기할지 정해야 한다. 보수체계와 파트너 지분, 사건 배분과 경영 방식도 하나로 맞춰야 한다. 로펌 합병의 성패는 변호사 숫자를 더한 뒤부터 갈린다. ◆ 중견 로펌에도 ‘합치지 않으면 밀린다’ 대륙아주와 린의 합병은 두 로펌만의 일이 아니다. 올해 국내 중견 로펌에서는 합병 논의가 잇따르고 있다. 바른과 동인도 합병을 추진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LKB앤파트너스와 평산이 합쳐 LKB평산이 출범했다. 위에서는 김앤장과 빅5가 대기업의 대형 거래와 분쟁을 가져간다. 아래에서는 YK처럼 전국 사무소를 둔 로펌이 개인과 중소기업 시장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중견 로펌은 전문분야만으로 버티기도, 단순히 변호사를 조금씩 늘리기도 어려워졌다. 이규철 대표도 최근 이런 시장 양극화를 합병 추진 배경으로 들었다. 합병은 가장 빠르게 규모와 전문분야를 함께 늘리는 방법이다. 대신 잘못 합치면 내부 갈등과 고객 이탈까지 감수해야 한다. 대륙아주는 2009년 이미 한 번 같은 시험을 치렀다. 이번에는 당시보다 네 배 가까이 큰 조직을 다시 하나로 묶어야 한다. 그래서 2026년의 합병은 2009년보다 어렵다. 첫 합병이 종합로펌의 틀을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이번에는 400명에 가까운 변호사를 움직여 상위권 로펌과 경쟁할 수 있는 생산성을 만드는 작업이다. ◆ 합병으로 태어난 로펌의 두 번째 합병 대륙아주의 출발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대륙은 국제분쟁과 송무를 했고 아주에는 해외 현장이 있었다. 2009년 두 조직을 합쳐 대륙아주가 만들어졌다. 그 뒤 기업자문과 구조조정, 공정거래, 중대재해, 원자력, 인공지능까지 업무를 넓혔다. 2025년에는 처음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다. 독자 성장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다시 합병을 택했다. 이번에는 린의 기업자문과 금융·테크 업무를 가져온다. 대륙아주가 갖고 있는 송무와 형사·행정, 해외법무를 한 조직 안에 넣겠다는 구상이다. 10월 출범할 통합 법인은 이름부터 새로 정한다. 2009년 대륙과 아주가 합쳐질 때도 질문은 같았다. 두 로펌을 더하면 정말 하나의 로펌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17년 뒤 대륙아주는 같은 질문 앞에 다시 섰다. 이번 합병이 끝나면 변호사 숫자는 6위권으로 올라간다. 그 다음부터는 숫자가 아니라 사건과 매출이 답해야 한다. 합병으로 태어난 대륙아주의 두 번째 합병은 한국 중견 로펌의 규모 경쟁이 어디까지 갈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2026-09-30 09: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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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트랜시스 美 조지아 공장, OSHA 안전조사 6개월째 '미종결'
[경제일보] 현대자동차그룹의 핵심 부품 계열사 현대트랜시스가 미국 조지아주 파워트레인 공장에서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의 안전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3월 시작된 조사는 6개월째 접어든 11일 현재까지 OSHA 전산망에서 종결되지 않은 상태다. 10일 본지가 미국 노동부 산하 OSHA의 공개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한 결과, OSHA 애틀랜타 웨스트 지역사무소는 지난 3월 11일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의 ‘Hyundai Transys Georgia Powertrain, Inc.’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번호 ‘1880725.015’의 안전조사를 개시했다. 해당 사업장은 6801 Kia Parkway에 위치한 현대트랜시스 조지아 파워트레인 법인이다. OSHA는 이 사업장을 북미산업분류체계(NAICS)상 ‘자동차 변속기 및 파워트레인 부품 제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조사 방식은 ‘Referral(관계기관 통보·의뢰 등에 따른 조사)’, 조사 범위는 ‘Partial(부분 조사)’, 조사 분야는 ‘Safety(안전)’로 기록됐다. 11일 현재 사건 상태는 ‘OPEN’이며 종결일은 기재돼 있지 않다. OSHA는 OPEN 사건에 대해 “해당 조사가 종결된 것으로 표시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현재 공개자료만으로 현대트랜시스의 법규 위반이 확정됐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조사 결과 위반사항이 적발됐는지, 향후 벌금이나 시정명령이 내려질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N’ 분류…별도 연계 조사도 포착 눈에 띄는 대목은 이번 조사에 OSHA의 ‘N’ 코드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조업 현장에서 기계·설비 등에 의한 절단 위험을 집중적으로 살피는 OSHA의 ‘National Emphasis Program on Amputations in Manufacturing Industries’와 관련된 분류다. OSHA는 지난해 6월 이 프로그램을 갱신하면서 기계 운전·정비 과정의 위험에너지 통제와 방호장치 등을 집중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움직이는 기계나 설비에 대한 적절한 방호·에너지 차단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절단이나 끼임 등 중대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N’라는 코드 자체를 현대트랜시스 공장에서 실제 절단사고가 발생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 OSHA는 이 프로그램을 절단사고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수 있는 기계·설비 위험을 찾아 제거하기 위한 집중 감독 프로그램으로 운용한다. 현재 공개된 현대트랜시스 조사자료에는 이번 조사 착수의 구체적인 원인이나 근로자의 부상 여부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추가 조사 기록도 확인된다. OSHA는 현대트랜시스 조사 페이지의 ‘Related Activity’에 조사번호 ‘1883443’과 인력업체 Elwood Staffing에 대한 조사번호 ‘1889798’을 연결해 놓고 있다. 현대트랜시스에 대한 1883443 조사는 3월 24일 시작됐으며 OSHA 검색자료상 ‘Unprog Rel(비정기 연계 조사)’로 분류됐다. Elwood Staffing 조사 역시 같은 Referral 번호 ‘2410496’과 연결돼 있고 4월 23일 시작돼 현재 OPEN 상태다. 다만 공개된 OSHA 자료만으로 Elwood Staffing과 현대트랜시스 사이의 구체적인 고용·파견관계나 이번 조사와 관련된 사고의 존재 여부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7년 전 동일 공장 사망사고…위험에너지 통제 위반 적발 이번 조사가 주목되는 이유는 동일한 웨스트포인트 파워트레인 공장에서 과거 중대 사망사고가 발생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 이 공장에서 근로자 한 명이 변속기 관련 장비를 정비하던 중 ‘transmission turnover machine’이 작동하면서 숨졌다. OSHA 사고기록에는 사망 근로자가 34세 남성이었으며 사고 유형이 ‘Struck By’로 기록돼 있다. 당시 OSHA는 현대트랜시스 조지아 파워트레인에 총 6만8194달러의 벌금을 제안했다. 위험에너지 방출을 통제하는 교육과 에너지 격리장치 사용, 추락방지 조치, 청력보존 프로그램 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OSHA 세부 기록에는 작업자들이 설비 정비 과정에서 정상적인 에너지 차단 대신 비상정지(E-Stop) 버튼을 사용한 사례 등이 적시됐다. 위험에너지 통제, 이른바 LOTO(Lockout/Tagout)는 설비 정비나 수리 과정에서 전기·공압·중력 등에 의해 기계가 예기치 않게 작동하지 않도록 에너지원을 차단하고 잠그는 절차다. 2019년 조사 당시 OSHA 기록에는 480볼트 전기와 90PSI 공압, 중력 에너지가 존재하는 설비에서 적절한 차단 절차가 문제 된 내용도 담겼다. 현대트랜시스의 다른 미국 사업장에서도 이후 위험에너지 통제 문제가 적발된 사례가 있다. 현대트랜시스 조지아 시팅 시스템 법인의 일리노이주 샴페인 사업장은 2023년 OSHA 조사에서 LOTO와 관련해 ‘Serious’ 위반 3건을 받았고 최종 벌금은 2만2099달러였다. 이어 같은 시팅 시스템 법인이 운영하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사업장에서는 2024년 민원에 따른 조사 결과 LOTO 절차 미비가 ‘Repeat(반복 위반)’로 판정됐다. 최초 6만3382달러였던 관련 벌금은 비공식 합의 후 3만8000달러로 확정됐다. OSHA는 앞서 일리노이 사업장에서 같은 안전기준 위반이 확정된 사실을 반복 위반 판단의 근거로 명시했다. 일리노이·앨라배마 시트 사업장과 이번 조지아 파워트레인 공장은 서로 다른 사업장이고 조사 사안도 별개다. 이를 이번 조사에서 동일한 위반이 되풀이됐다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미국 내 현대트랜시스 계열 사업장에서 기계 안전과 위험에너지 통제 문제가 반복적으로 규제당국의 조사 대상이 됐다는 점은 글로벌 안전관리 체계 차원에서 짚어볼 부분이다. 특히 현대트랜시스가 최근 ‘안전 최우선’을 경영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번 미국 조사의 결론은 더욱 주목된다. 회사는 안전보건경영의 지향점을 ‘글로벌 무재해 달성’으로 정하고 국내외 법규·규제에 대한 선제 대응과 잠재 위험 발굴, 위험작업 확인 절차 강화 등을 핵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미주·유럽 사업장의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률도 88%라고 공개하고 있다. 올해 5월에는 노사 공동 안전선언식을 열었고, 6월에는 ‘안전사고 제로, 안전실천 100%’를 뜻하는 안전 브랜드 ‘ZERO & BAEK’을 공개했다. 회사는 이를 전사 사업장에 적용해 안전문화를 확산하겠다고 밝혔다. 현대트랜시스의 조지아 파워트레인 법인은 회사가 2008년 설립한 첫 해외 파워트레인 생산법인이다. 회사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양산을 시작해 연간 110만대 규모의 변속기 생산능력을 갖췄다. 현대트랜시스가 북미시장에서 현대차·기아뿐 아니라 글로벌 완성차업체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는 상황에서 현지 생산시설의 안전관리 역시 공급망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로 올라선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관건은 3월 시작된 OSHA 조사가 무엇을 계기로 착수됐고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느냐다"라며 "현재로서는 ‘OPEN’이라는 사실 이상을 앞서 단정할 수 없지만, 반대로 과거 동일 공장에서 사망사고와 안전규정 위반이 확인된 전력이 있는 만큼 조사 장기화의 배경과 안전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현대트랜시스가 국내에서 강조하고 있는 ‘Safety Priority No.1’이 미국 생산현장에서도 같은 수준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는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2026-09-11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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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사이 두 명 숨진 조선소, '안전'은 왜 늘 사고 뒤에 오는가
[경제일보] 사람이 죽었다. 엿새 뒤 또 한 사람이 같은 유형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장소는 달랐지만 회사는 같았고, 둘 다 협력업체 노동자였으며, 사망 원인도 ‘끼임’이었다. 지난달 18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LNG 운반선 내부에서 작업하던 우즈베키스탄 국적 협력업체 노동자가 산업용 승강기와 상부 구조물 사이에 끼여 숨졌다. 또 지난달 24일에는 군산조선소 패널공장 조립라인에서 협력업체 노동자가 작업장비와 철제 구조물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불과 엿새 간격이었다. 올해 HD현대중공업 울산·군산 사업장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사망자는 3명이고 모두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고용노동부가 결국 칼을 빼 들었다. 18일부터 울산·군산조선소와 본사, 초고위험 사업장으로 지정된 공장 등에 감독관과 산업안전보건공단 전문가 62명을 투입했다. 명칭은 ‘고강도 감독’이지만 사실상 특별감독에 준하는 규모다. 끼임뿐 아니라 추락·충돌·화재·폭발·질식 위험까지 들여다보고, 사고 뒤 회사가 약속한 개선조치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했는지도 확인한다. 노동부 장관은 동일 유형의 중대재해가 반복되는 것은 안전관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방증이라며 ‘무관용 원칙’을 밝혔다. 감독은 필요하다. 법을 어겼다면 책임도 물어야 한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있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 넘어가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다만 여기서 질문 하나는 남는다. “왜 우리의 산업안전은 사람이 숨진 뒤에야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가.” HD현대중공업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이은 사고 직후인 지난달 29일부터 사흘간 전 사업장의 생산을 멈추는 ‘안전 셧다운’을 실시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하고 위험성 평가와 고위험 공정을 다시 점검했으며, 위험요인이 해소될 때까지 해당 공정을 재가동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를 안전문화를 뿌리부터 바꾸는 전환점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노동부 감독이 확인해야 할 것은 그 약속의 문구가 아니다. 셧다운 때 찾아낸 위험이 실제로 없어졌는지, 다시 생산이 시작된 뒤 안전의 우선순위가 그대로 유지됐는지다. 공장을 며칠 멈추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뒤에도 생산보다 안전을 앞세우는 것이다. 납기가 급해지고 작업량이 늘어나도 위험하면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공정이 늦어져도 방호장치를 먼저 설치해야 한다. 안전을 이유로 작업을 멈춘 노동자나 협력업체가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 안전문화라는 말의 진짜 시험은 셧다운 기간이 아니라 정상조업 기간에 치러진다. 특히 이번 사고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올해 사망자 3명이 모두 협력업체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이것만으로 개별 사고의 책임 소재를 단정할 수는 없다. 사고 원인과 법적 책임은 조사로 가려야 한다. 그럼에도 구조적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조선소는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이지만 그 안에서는 원청과 수많은 협력업체 노동자가 함께 일한다. 작업 지시와 공정, 설비, 공간은 서로 얽혀 있는데 고용주는 다르다. 위험정보가 원청에서 협력업체로, 협력업체 관리자에서 현장 노동자까지 한 치의 누락 없이 전달되지 않으면 안전의 틈이 생긴다. 법도 이미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협력업체 노동자가 일할 경우 도급인이 이들의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 필요한 안전·보건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작업시기와 내용, 안전조치 확인과 안전교육 지원 역시 도급인의 책무에 포함된다. 따라서 원청의 책임은 ‘협력업체가 교육했는가’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같은 야드에서 같은 설비와 구조물을 이용해 같은 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소속 회사가 달라도 하나의 안전체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주노동자가 늘어난 현장이라면 교육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안전수칙을 한국어 문서 한 장으로 전달하고 서명을 받는 방식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작업자의 언어로 위험을 이해시키고, 실제 장비를 놓고 위험구간과 비상정지 방법을 확인해야 한다. 교육을 받았다는 서류보다 위험을 알아봤다는 현장의 증거가 중요하다. ‘끼임’ 같은 사고는 더욱 그렇다. 위험한 기계와 구조물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야 하는 공정이라면 작업자에게 조심하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사람이 위험구역에 접근하면 장비가 자동으로 멈추는 인터록, 접근감지 센서, 방호장치, 원격조작과 자동화 설비를 확대해야 한다. 안전보건공단 역시 위험설비의 물리적 방호와 보호장치를 사고 예방의 기본 원칙으로 제시한다. 사람의 주의력은 완벽할 수 없다. 피로할 수도 있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다. 좋은 안전시스템은 노동자가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시스템이 아니라, 실수해도 죽지 않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작업중지권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의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노동자가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도록 하고, 합리적 이유가 있는 작업중지에 대해 불리한 처우를 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법에 권리가 있다고 현장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은 위험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납기가 늦어진다는 압박이나 동료에게 부담을 준다는 눈치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면 작업중지권은 종이 위의 권리에 머문다. 특히 원청보다 협상력이 약한 협력업체와 그 소속 노동자가 실제로 작업을 세울 수 있는지를 감독 당국이 살펴야 한다. 생산일정 자체에도 안전의 비용을 넣어야 한다. 기업 경영에서 납기와 생산성은 중요하다. 글로벌 조선업 경쟁에서 일정이 밀리면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안전조치를 생산 일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순서가 뒤집힌다. 안전에 필요한 시간까지 포함해 생산계획을 짜야 한다. 점검시간, 작업중지 가능성, 설비 보수와 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처음부터 일정에 넣지 않고 최대 생산량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면 안전은 결국 생산과 경쟁하게 된다. 그 경쟁에서 현장의 노동자가 패해서는 안 된다. 정부도 사고 때마다 감독인력을 대거 보내고 처벌 수위를 높이는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복 사고 사업장은 감독이 끝난 뒤가 더 중요하다. 이번에 노동부가 일회성 감독에 그치지 않고 재감독을 통해 개선사항 이행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감독의 목표가 위반사항 몇 건을 찾아내는 데 머물지 않고 위험한 공정을 실제로 바꾸는 데까지 가야 한다. ‘좌전’ 양공 11년에는 ‘거안사위 사즉유비 유비무환(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이라는 말이 나온다. ‘편안할 때 위험을 생각하고, 위험을 생각하면 대비하며,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의미다. 산업안전만큼 이 오래된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영역도 드물다. 사람이 죽은 다음 공장을 멈추는 것은 대비가 아니다. 장례가 끝난 뒤 특별교육을 하는 것도 예방이라 부르기 어렵다. 위험을 발견하기 전에 사고가 먼저 발견한다면 안전관리체계가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없다. HD현대중공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을 만드는 기업이다. 기술과 생산능력, 수주 경쟁력에서 한국 조선업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안전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요구받는 것이 당연하다. 배 한 척을 약속한 날짜에 인도하는 능력만 경쟁력이 아니다. 그 배를 만드는 사람이 퇴근시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능력도 기업의 경쟁력이다. 이번 감독은 엄정해야 한다. 법 위반이 확인되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또 하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원청과 협력업체의 안전체계를 하나로 묶고, 작업중지권을 실제 권리로 만들며, 위험설비에는 사람의 주의보다 기술적 방호를 먼저 세워야 한다. 생산계획에도 안전을 위한 시간을 비용이 아니라 필수 공정으로 넣어야 한다. 사고 뒤의 ‘무관용’보다 더 필요한 것은 사고 전의 ‘무타협’이다. 안전 앞에서는 납기와 생산량도 한발 물러서야 한다. 그 원칙이 현장의 일상이 될 때 특별감독도, 안전 셧다운도 필요 없는 조선소에 가까워질 수 있다. 중대재해를 끝내는 출발점은 더 무거운 처벌만이 아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공장을 멈출 수 있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2026-08-1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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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전대 막판 표심전…김민석·정청래·송영길 '안정·단결·변화' 호소
[경제일보] 더불어민주당 차기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17일 대전에서 진행된 가운데 김민석·정청래·송영길 당대표 후보가 마지막 표심 잡기에 나섰다. 세 후보는 각각 당의 안정과 내부 단결, 변화 필요성을 내세우며 대의원과 당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민주당은 이날 대전컨벤션센터에서 대의원 투표를 진행한다. 투표가 끝난 뒤 이날 대의원 투표와 앞서 진행된 권리당원 투표, 국민여론조사 결과를 합산해 새 당대표를 확정할 예정이다. 행사장에는 대의원과 당원 등 1만여명(당 추산)이 모였다. 김민석 후보는 '안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민주당과 정부, 당정 관계가 흔들려선 안 된다며 과반 지지를 요청했다. 김 후보는 "민주당이 흔들리고, 정부가 흔들리고, 당정 관계가 흔들리고, 이재명 대통령이 흔들릴까 봐 우리는 절박하다"며 "안정적인 과반으로 당을 확고하게 안정시키는 한 표를 행사해달라"고 말했다. 당원 자격 문제도 꺼냈다. 그는 "진정한 당원 주권 시대를 위해 가짜 당원의 경선 농단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며 "필요하면 신천지·통일교 특검도 도입될 것이고 당은 순수한 민주적 정치 결사로 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청래 후보는 자신의 대표 임기 동안 이뤄낸 입법·개혁 성과를 강조하면서 당내 분열을 경계했다. 정 후보는 "대표 임기 동안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이 1000건 넘고, 검찰·사법 개혁 등 많은 것을 했다"며 "당·정·청이 엇박자였으면 이룩하지 못할 성과였다"고 말했다. 이어 "반명이라 안 되고, 분열주의자니까 안 되고, 신천지니까 안 된다면서 차 떼고 포 떼고 총선 승리는 어떻게 하려 하나"라며 "우리부터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영길 후보는 정 후보와 차별화하며 변화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검찰개혁을 거듭 강조하는 정 후보를 직접 겨냥했다. 송 후보는 "검찰개혁이 끝났다니까 왜 해장국을 계속 끓이려 하냐"며 "정 후보와 최민희·이성윤·한민수 최고위원 후보를 지지하는 당원들의 충정은 이해하지만 새롭게 변화해야 하는데 왜 또 시키려고 그러냐"고 말했다. 당대표 경선 못지않게 최고위원 선거도 막판 경쟁이 거세졌다. 임미애·김영호 의원이 전날 후보직에서 물러나면서 김용 후보 지지를 호소한 것을 두고 친명계와 친정청래계 후보들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특히 당원투표에서 13%대 득표율로 5위권을 다투는 이성윤·한민수·김용 후보 간 공방이 두드러졌다. 이성윤 후보는 후보 2명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한 것을 두고 "야합 정치 아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 후보와 함께 검찰·법원 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했다. 한민수 후보도 사퇴 직후 특정 후보 지지를 요청하는 문자가 발송된 점을 문제 삼으며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날을 세웠다. 이에 김용 후보는 "계파 정치에서 김용을 구하고자 어제 사퇴한 두 동지의 짐을 모두 안겠다"며 "김용이 임미애가 되고, 김용이 김영호가 되겠다"고 맞받았다. 행사장에서는 한때 돌발 상황도 발생했다. 행사 도중 한 남성이 방송 장비 등이 설치된 철제 구조물 위로 올라가면서 전당대회가 잠시 중단됐다. 현장에는 추락 사고에 대비한 공기안전매트가 설치됐다. 해당 남성은 경찰과 소방대원의 설득 끝에 구조물에서 내려왔고 이후 행사는 재개됐다.
2026-08-17 17: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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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성장'을 말할 때다
[경제일보]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 중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3일 귀국했다. 집권 1년은 성과를 자축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데 머물 시점이 아니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힐 때다. 지금 정부가 제시해야 할 가장 절박한 국가 의제는 성장이다. 분배와 복지, 공정과 통합도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 없이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 관계를 복원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유럽과 신흥국으로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점은 평가할 만하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소비 회복도 경제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 버팀목이 됐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0%로 전망하면서 반도체 경기와 수출 증가를 긍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최근에는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해졌다는 판단 아래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올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지표만으로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건설투자의 회복은 더디다. 미국의 관세정책과 국제 금융시장 불안, 중국의 산업 추격도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지방경제와 청년 고용으로 온기가 충분히 퍼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남아 있다. 성장률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지속 가능성과 확산성이다. 이번 순방은 이런 한계를 돌파할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글로벌 인공지능 기업과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인공지능(AI) 협력과 투자 확대를 논의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핵심광물과 에너지, 식량, 방산 등 경제안보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특히 한국과 브라질은 남미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와의 무역협정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실무그룹 구성과 핵심광물 협력 확대에 뜻을 모았다. 중남미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먼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리튬과 구리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의 주요 공급처이자 방산·조선·원전·바이오·식품 산업의 잠재시장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공급망의 블록화를 재촉하는 상황에서 자원과 시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이 특정 국가와 특정 시장에 편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면 중남미와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하지만 정상외교에서 체결한 양해각서와 공동성명은 출발점일 뿐이다. 외교적 약속이 기업의 수주와 투자,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순방은 사진과 구호만 남긴다. 정부는 국가별 후속 사업을 정리한 경제외교 이행표를 만들어 국민과 기업에 공개해야 한다. 핵심광물 확보 물량과 장기 구매계약, 현지 광산 공동개발, 방산 수출 금융, 바이오 인허가 협력, 메르코수르 무역협정 협상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금융기관이 따로 움직이는 낡은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미래산업을 선택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AI·반도체·조선·방산·바이오는 한국이 이미 일정한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췄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다. 이들 산업을 단순히 개별 기업의 사업으로 보지 말고 인재와 전력, 용수, 데이터, 금융, 세제, 통상외교가 결합된 국가 프로젝트로 다뤄야 한다. AI 경쟁력은 선언이나 연구개발 예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망과 첨단 그래픽처리장치 확보, 산업 데이터 활용, 전문인력 양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 산업도 공장 건설 지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반도체, 첨단 패키징까지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조선과 방산은 수출금융과 유지·보수 체계를 강화하고, 바이오는 임상과 인허가에 걸리는 시간을 경쟁국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규제혁신도 더 이상 부처별로 몇 건의 규제를 없앴다는 실적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의 존재만이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같은 사안을 놓고 부처마다 해석이 다르고 정권이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기준이 흔들린다면 기업은 공장을 짓거나 신사업에 뛰어들기 어렵다. 신산업 규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처리시한제를 도입하고, 정부가 기한 내 답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제도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정부 지원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세제와 금융, 인프라를 제공한다면 기업은 국내 투자와 고용, 협력업체와의 성과 공유로 응답해야 한다. 해외 투자 확대가 불가피하더라도 연구개발과 핵심 제조기반, 양질의 일자리는 국내에 남기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기술 축적과 청년의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성장정책을 소수 기업을 위한 특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책임도 무겁다. 여야가 모든 경제정책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 동안 세계 각국은 AI와 반도체, 에너지와 방산을 놓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성장전략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회는 첨단산업 전력망과 인재 양성, 기업 투자와 규제혁신에 필요한 법안을 정파적 이해에서 떼어내 처리해야 한다. 정부 역시 야당과 기업, 노동계의 의견을 듣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주역>에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나온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 더 나아가기 어려운 변곡점에 서 있다. 수출 대기업과 수도권, 추격형 제조업에 기댄 성장 모델을 혁신기업과 지역,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선도형 성장 모델로 바꾸지 못하면 저성장은 일상이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1년이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 기반을 세운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남미 순방에서 확보한 외교적 공간을 공급망과 시장, 투자와 일자리로 바꾸는 일이 그 첫 시험대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시간을 끝내고 경제가 국민의 삶을 일으키는 시간을 열어야 한다. 성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지 않다. 정부는 이제 성장의 필요성을 주저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다만 그 성장은 소수의 숫자를 키우는 성장이 아니라 기업의 혁신과 노동의 정당한 보상, 지역의 기회와 국민통합을 함께 이끄는 성장이어야 한다. 취임 1년 이후의 국정은 바로 그 목표에 집중돼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대전환의 골든타임은 이미 시작됐다.
2026-08-03 0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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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로 오른 증시, 반도체 때문에 무너졌다
[경제일보] 코스피가 하루 만에 10% 넘게 폭락했다. 지난 28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10.84% 내린 6023.66으로 거래를 마쳤다. 장중 낙폭은 11.3%까지 커졌고 시장 전체의 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서킷브레이커도 발동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14% 넘게 떨어졌다. 외국인은 약 5조원어치를 순매도했고 개인은 4조원가량을 받아냈다. 거래 종목 917개 가운데 오른 종목은 36개에 불과했다. 직접적인 충격은 글로벌 반도체주 매도세였다. 중국 메모리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성공적인 증시 상장과 중국의 노광장비 기술 진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점유율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인공지능 투자 과열과 반도체 수요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의문도 매도세를 부추겼다. 그러나 이번 폭락을 중국 반도체 기업이나 외국인 매도, 공매도 세력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외부 충격이 거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충격을 코스피 전체의 붕괴로 키운 것은 한국 증시의 편중된 구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가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는다. 두 종목이 흔들리면 업종과 실적이 다른 수백 개 기업까지 함께 추락하는 구조다. 한국 증시는 반도체 호황을 타고 빠르게 올랐다. 코스피는 지난 6월 9114.55까지 상승했지만 이후 반도체주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불과 한 달여 만에 고점 대비 34% 밀렸다. 7월 하락률만 29%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10월의 월간 하락 폭까지 넘어섰다. 상승할 때는 반도체가 시장 전체를 끌어올렸지만 하락할 때도 같은 종목들이 지수 전체를 끌어내린 것이다. 특정 산업의 경쟁력이 증시를 이끄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미국 증시도 대형 기술기업의 영향력이 크다. 문제는 반도체를 제외하고 시장을 떠받칠 만한 두 번째, 세 번째 성장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동차와 바이오, 조선, 방산, 콘텐츠, 금융 등 경쟁력 있는 산업이 존재하지만 기업가치와 주주 신뢰를 높여 장기자금을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외국인 수급 의존도도 낮춰야 한다. 외국인이 대규모로 매도하면 이를 받아줄 국내 장기투자 기반이 취약하다. 개인투자자는 시장이 급락할 때 저가 매수에 나서지만 단기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제한적이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공모펀드 등 장기자금은 경직된 운용규정과 낮은 주식 비중, 투자자 불신에 묶여 있다. 외국인 자금이 빠질 때마다 환율과 주가가 동시에 흔들리는 천수답 구조가 반복되는 이유다. 장기투자자가 부족한 것은 단순히 자금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지배구조와 주주환원, 회계 투명성에 대한 불신도 장기투자를 가로막는다. 실적이 좋아도 지배주주의 결정에 따라 합병과 분할, 자사주 처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남아 있다면 투자자는 장기 보유보다 단기 차익을 택하게 된다. 증시 안정은 매매 규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기업이 주주의 신뢰를 얻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최근 도입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변동성을 키웠는지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필요할 경우 개인투자자의 투자 한도를 제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특정 대형주 주가를 두 배로 추종하는 상품은 상승장에서 수익을 키우지만 하락장에서는 매도 압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시장이 급락할 때마다 공매도를 금지하거나 가격 제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공매도 불법행위와 시세조종은 엄벌해야 하지만 정상적인 가격 발견 기능까지 막으면 외국인 투자자의 불신과 시장 왜곡을 키울 수 있다. 서킷브레이커도 공포를 진정시키는 안전장치이지 주가 하락 자체를 막는 수단은 아니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시장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주가 수준을 떠받치려 하기보다 구조적 취약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반도체 이외의 성장기업이 증시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산업정책과 자본시장 정책을 연결해야 한다. 성장기업의 상장을 활성화하되 부실기업의 우회 상장과 과도한 공모가 책정은 엄격히 걸러내야 한다. 퇴직연금과 연기금 등 장기자금이 국내 우량기업에 안정적으로 투자할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주주환원 확대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자사주 제도 개선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기업의 장기 성장을 유도해야 한다. 시장이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세제 혜택만 확대한다고 장기투자가 늘지는 않는다. 기업들도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연구개발과 인재, 공급망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주주와 시장에 기술 격차와 투자 성과를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중국 기업의 부상을 단순한 저가 공세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생산능력과 기술 자립 속도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대비해야 한다. <서경>의 ‘거안사위(居安思危)’는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한국 증시는 반도체가 사상 최고치를 끌어올릴 때 편중의 위험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 이제 시장이 무너진 뒤 투기세력과 공매도만 탓한다면 같은 충격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반도체는 한국경제와 증시의 강력한 엔진이다. 그러나 하나의 엔진에만 의존하는 시장은 그 엔진이 멈추는 순간 전체가 흔들린다. 코스피 10% 폭락이 보여준 것은 반도체 산업의 실패가 아니라 반도체밖에 믿을 것이 부족한 증시의 취약성이다. 시장을 살리는 길은 주가를 임시로 떠받치는 데 있지 않다. 산업을 다변화하고 장기자금을 키우며 기업과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다.
2026-07-29 10: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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