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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한미·송무 광장, 합병으로 만든 종합로펌
[경제일보] 2001년 6월 7일 서울 신라호텔. 기업자문과 금융에 강했던 법무법인 한미와 송무로 이름을 알린 법무법인 광장이 합병을 선언했다. 새 로펌의 이름을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국문 이름은 옛 광장의 ‘법무법인 광장’을 쓰고 영문 이름은 한미가 사용하던 ‘Lee & Ko’를 남겼다. 당시 한미와 광장을 합친 국내외 변호사는 120명을 넘어섰다. 김앤장에 이어 국내 두 번째 규모의 대형 로펌이 등장했다. 기업자문과 금융은 한미가 쌓아온 경험을 가져왔고 송무에는 옛 광장의 강점이 더해졌다. 서로 부족했던 분야를 한 조직 안에 넣으면서 지금의 종합로펌 광장이 출발했다. 광장의 역사를 따라가려면 2001년보다 24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업자문과 송무가 처음부터 한 조직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시장에서 성장한 두 로펌이 자신에게 없던 역량을 상대에게서 찾으면서 2001년 합병으로 이어졌다. ◆ 판사 그만두고 기업들이 있는 도심으로 1977년 이태희 변호사가 서울 중구 소공동에 개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지금 광장의 출발점이다. 이 변호사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 판사를 지냈다.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판사직을 그만두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의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국내로 돌아온 이 변호사는 법원 주변이 아니라 기업들이 몰려 있던 서울 도심에 사무실을 냈다. 당시 변호사의 업무는 개인 송사와 재판이 중심이었지만 이 변호사는 기업의 계약과 투자, 해외 거래를 자문하는 서구식 로펌을 염두에 뒀다. 한진그룹과 한국전력, 포항제철, 한국은행, 외환은행 등이 초기 고객으로 이름을 올렸다.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과 국내 기업의 해외 거래도 맡았다. 1981년 고광하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한미합동법률사무소로 확대됐다. 이태희의 ‘Lee’와 고광하의 ‘Ko’를 따 영문 이름을 ‘Lee & Ko’로 정했다. 1985년에는 법무법인 한미로 조직을 바꿨다. 훗날 고 변호사가 독립한 뒤에도 Lee & Ko라는 이름은 남았다. ◆ 기업자문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송무 한미는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일찍부터 송무를 보강했다. 부장판사를 지낸 유경희 변호사가 합류해 송무를 맡았고 기업자문과 금융, 송무, 지식재산권, 보험 등으로 업무를 나눴다. 1990년대에는 변호사가 사건을 받아 혼자 처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업무 분야별 전문팀도 두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이 커지면서 로펌에 들어오는 일도 달라졌다. 외국인 투자와 해외 증권 발행, 금융거래, M&A가 늘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 구조조정 업무가 쏟아졌다. 한미가 강점을 보이던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에는 좋은 시장이었다. 그러나 고객의 분쟁까지 계속 맡으려면 송무 역량을 더 키워야 했다. 기업에 계약과 거래를 자문하다 분쟁이 생기면 대형 송무를 다른 로펌에 맡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자문에서 고객을 확보해도 법정 분쟁까지 이어서 맡는 데 한계가 있었다. 종합로펌으로 커지려면 기업자문과 금융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미가 찾던 것은 강한 송무였다. 그 무렵 옛 광장에는 정반대의 고민이 있었다. ◆ 자문 85% 한미, 송무 70% 광장 옛 광장은 박우동 전 대법관과 권광중 전 사법연수원장 등 법원 출신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송무에서 이름을 쌓았다. 재판 경험과 법원 인력에서는 강했지만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단기간에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기업법무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상황에서 송무만으로 성장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2001년 당시 한미의 업무 가운데 자문 비중은 약 85%였다. 반면 광장은 송무 비중이 약 70%였다. 한미에는 대형 송무가 필요했고 광장에는 기업자문과 국제거래 경험이 필요했다. 두 로펌의 강점과 약점이 정확히 반대쪽에 놓여 있었다. 그해 초 양측 대표들의 만남에서 합병 이야기가 나왔다.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해외 대형 로펌과 경쟁하려면 자문과 송무를 모두 갖춘 규모도 필요했다. 필요한 분야를 처음부터 키우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이미 경험을 축적한 조직과 합치는 길을 택했다. 논의가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두 로펌은 합병을 결정했다. 한미는 광장의 송무를 얻었고 광장은 한미의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얻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출범한 통합 광장은 서로 부족했던 부분을 합쳐 만든 로펌이었다. ◆ 합치는 것보다 어려웠던 한 조직 만들기 합병은 변호사 숫자와 고객 명단을 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건을 가져온 변호사가 계속 사건을 쥐는 대신 업무 성격에 따라 전문부서가 맡도록 했다. 한미와 광장 출신 변호사 사이의 보수와 사건 배분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출신 로펌에 따라 이해가 갈리지 않도록 공통의 기준을 만드는 일이 필요했다. 로펌 합병은 일반 기업의 합병과도 차이가 있다. 공장이나 설비보다 사람이 자산인 조직이다. 이름난 변호사가 빠져나가면 사건과 고객도 함께 이동할 수 있다. 합병 뒤 인사와 보수, 사건 배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통합의 성패가 갈린다. 광장은 1999년 한미에서 도입했던 운영위원회 제도를 통합 법인의 경영체제로 이어갔다. 설립자나 대표변호사 한 사람에게 인사와 사건 배분이 몰리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기업자문 중심의 한미와 송무 중심의 광장이 갖고 있던 조직문화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맞춰갔다. 2001년 합병은 부족한 업무 분야를 보완했지만 두 조직을 실제로 하나로 만드는 일은 그 뒤에 시작됐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합병 자체보다 합병 이후의 조직 통합이 더 긴 시간을 차지했다. ◆ 창업자가 지분을 후배에게 넘겼다 세대교체에서도 광장만의 선택이 있었다. 이태희 변호사를 비롯한 1세대 변호사들은 퇴임하면서 로펌 지분을 남겨두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2009년 물러나면서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후배들에게 넘기고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설립자가 지분과 경영권을 계속 쥐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은 후배 변호사들의 경영 참여로 이어졌다. 어쏘시에이트로 입사한 변호사가 파트너를 거쳐 경영대표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현재 경영을 총괄하는 김상곤 대표변호사 역시 광장에서 경력을 쌓아온 내부 인사다. 개인 사무소에서 출발한 조직이 세대를 거치면서 구성원 중심의 로펌으로 바뀌었다. 2001년 합병이 20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세대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합병계약은 한 번으로 끝났지만 한미와 광장 출신이 따로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창업자의 지분 정리와 운영위원회 중심 경영은 통합을 굳히는 장치가 됐다. 결국 광장은 업무만 합친 것이 아니었다. 기업자문과 송무를 합친 뒤 사람과 지분, 경영방식까지 하나의 조직 안에 다시 배치했다. ◆ M&A와 송무, 지금도 광장의 두 축 합병 당시 두 로펌이 들고 온 강점은 지금도 광장의 주요 업무로 남아 있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광장의 기업·M&A와 금융, 자본시장, 공정거래 분야 등을 국내 상위권으로 평가했다. 기업·M&A와 공정거래는 국내 ‘Band 1’에 올랐다. 송무 분야에도 약 150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직 대법관과 법관 출신 인력도 다수 포함돼 있다. 최근 실적에서도 M&A의 비중은 크다. 광장은 2025년 SK스페셜티 매각과 아워홈 인수, SK그룹 리밸런싱 거래 등에 참여했다. 프랑스 에어리퀴드의 4조6000억원 규모 DIG에어가스 인수도 자문했다. 2025년 광장의 M&A 분야 매출은 전년보다 30% 이상 늘었다. 2026년 상반기 블룸버그 집계에서도 광장은 국내 M&A 법률자문에서 47건, 42억1600만달러를 기록했다. 거래금액과 건수 모두 김앤장에 이어 2위였다. 1970년대 한미가 시작한 기업자문과 금융 업무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광장의 주요 수익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무와 형사 분야에서도 인력을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법원장과 형사재판장, 영장전담판사 출신 변호사를 잇달아 영입했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 사건 1심에서도 변호인단으로 참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옛 광장이 들고 온 송무 역시 통합 법인의 한 축을 맡고 있다. ◆ 익숙했던 2위 자리에도 경쟁 붙었다 광장의 앞길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25년 매출은 4309억원으로 전년 4111억원보다 4.82% 늘었다. 외형은 커졌지만 경쟁 로펌의 성장 속도가 더 빨랐다. 태평양이 4402억원, 세종이 4363억원을 기록하면서 광장은 두 로펌에 뒤졌다. 오랫동안 김앤장 다음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광장에도 새로운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매출 규모뿐 아니라 M&A와 금융, 송무 등 주력 분야에서 대형 로펌 간 인재 영입 경쟁도 거세지고 있다. 기업 고객이 로펌을 고르는 기준도 전문성과 서비스, 비용까지 세분화되고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광장은 종합과 전문성, 서비스 평가에서 각각 5위를 기록했다. M&A·IPO는 4위, 민사·송무와 형사·수사기관 대응도 5위였다. 오랜 업력과 규모만으로 경쟁 로펌을 앞서기 어려워진 시장이다. 반면 2026년 상반기 M&A 실적은 다시 2위로 올라섰다. 공정거래와 자본시장, 국제통상에서도 국제 평가기관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에서 이어진 기업자문과 옛 광장의 송무를 지금의 시장에 맞게 얼마나 다시 키우느냐가 광장이 풀어야 할 문제다. ◆ 부족한 곳을 합쳐 만든 광장 광장에는 지금도 두 로펌의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광장’이고 해외에서는 ‘Lee & Ko’다. 하나는 송무로 성장한 로펌에서 가져왔고 다른 하나는 1977년 기업자문으로 출발한 한미에서 이어졌다. 2001년 합병 때 어느 한쪽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이름만 나눠 가진 것도 아니다. 한미는 기업자문과 금융, 국제업무를 가져왔고 광장은 송무 경험을 보탰다. 합병 뒤에는 사건 배분과 보수 체계를 맞췄고 창업자들이 물러나면서 지분과 경영권도 후배들에게 넘겼다. 광장은 처음부터 모든 분야를 잘했던 로펌이 아니었다. 기업자문에 강했던 조직은 송무가 부족했고 송무에 강했던 조직은 기업자문이 부족했다. 두 로펌은 상대의 강점을 자기 조직 안으로 가져오는 방법을 택했다. 2001년 신라호텔에서 시작한 합병은 25년이 지나 광장의 기업자문과 송무라는 두 축으로 남았다. 부족한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대신 이미 잘하는 조직과 합쳤다. 광장이 종합로펌으로 커진 출발점이었다.
2026-09-0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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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경제일보] 수백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첨단 팹은 거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자본의 싸움인 동시에 전력망 경쟁인 이유다. 하지만 그 전력망을 깔 돈이 부족해지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을 먼저 내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한전이 제안한 규모는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 약 4조1000억원과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했다. 선납금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등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참여 여부와 금리, 금액과 기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전도 ‘제안’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도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지난해 선납액은 약 3900억원이었고, 대부분 공공기관이 이용했다. 기업이 미래에 낼 전기료를 먼저 내고 한전은 그 돈을 필요한 설비에 투자하며 기업은 이자를 받는 구조라면 금융거래로서 성립할 여지는 있다. 적기에 전력망이 완공되지 못해 수십조원짜리 공장이 서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규모와 목적이다. 3900억원 수준이던 선납제도를 단숨에 25조원짜리 전력망 조달수단으로 바꾸면 제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25조원은 한전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이다. 전기요금 납부 편의를 위한 제도가 사실상 국가 핵심 인프라를 조달하는 금융수단으로 변하는 셈이다. 한전이 이 방안을 고민하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가동과 호남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른 추가 전력수요는 20.6GW로 추산되고,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필요한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투자 수요는 더 커졌다. 반면 한전의 연결 기준 부채는 지난 6월 말 210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자비용으로 2조1000억원을 썼다. 공기업의 재무제표와 국가 산업정책의 시간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삼성과 하이닉스가 쓰는 전기니 두 회사가 망을 깔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전력망은 공장 안의 생산설비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실어 나르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지난 7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요 송·변전설비를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규정하고 있다. 법의 목적부터 전기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국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을 조기에 확충하는 데 있다. 국가가 스스로 ‘기간망’이라고 이름 붙인 인프라의 책임을 특정 기업의 현금 여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반대편 원칙도 분명하다.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대기업이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인프라 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다. 10GW, 20GW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 계통보강 비용이 따라온다. 그 비용을 일반 가정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똑같이 떠넘기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5편에서 개인이나 소수에게 맡길 수 없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국가의 책무로 봤다. 동시에 도로와 교량 같은 시설의 비용은 이용자에게 받는 통행료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250년 전에도 공공 인프라의 책임과 이용자의 비용부담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도 ‘국가가 전부 낼 것이냐, 기업이 전부 낼 것이냐’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누가 어느 비용을 왜 부담하는지에 대한 원칙이다. 국가 전체가 이용하는 기간 송전망과 장거리 간선망은 국가와 한전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 반면 특정 산업단지나 초대형 수요처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전용선로와 변전소, 접속설비에는 원인자·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기업과 지역이 함께 혜택을 보는 계통보강 비용이라면 수익 범위에 따라 분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선이 먼저 그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전이 재무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현금이 많은 기업을 찾아가 몇 년 뒤 받을 전기료를 미리 달라고 하는 방식이 관행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지만 내일은 데이터센터, 배터리, 철강·석유화학 기업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가 인프라 투자비가 전력 수요자의 현금 보유액이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산업정책도, 요금정책도 아니다. 더구나 한전은 독점적인 송·배전망 사업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싫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으로 거래의 자발성이 완전히 확보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 공장에 제때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기업과 그 전력을 공급할 사실상의 유일한 사업자가 20조원 규모의 선납을 협상한다면 일반적인 금융거래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납제를 확대하려면 세 가지 안전장치가 먼저다. 선납금은 해당 전력망 건설에만 쓰도록 별도 관리해야 한다. 기업별 부담액은 전력 사용량과 추가 계통투자 비용 등에 따른 객관적 산식으로 정하고 동일한 조건의 대규모 수요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공사가 늦어지거나 전력 공급 일정이 어긋났을 때 선납기업이 부담할 위험과 보상 원칙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문제와 전력망 투자 문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납금으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 전기요금 정책과 연료비 급등으로 쌓인 210조원대 부채를 반도체 기업의 미래 전기료로 메우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전력망에 들어갈 돈과 한전의 누적 재무부담을 한 통장에 넣는 순간 비용 부담의 원칙은 흐려진다.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용인과 호남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십조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주문하면서 정작 공장을 돌릴 전력망은 한전과 기업이 돈을 마련해 알아서 깔라는 식이어서는 산업정책이라 하기 어렵다. 공장 유치는 국가전략이고 송전망은 기업 사정이라는 식의 역할 분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의 속도는 전력망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주민 수용성 문제와 송전선로 인허가를 풀고 장기 전력수요를 예측해 기간망을 미리 확보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몫이다. 올해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법이 5년마다 30년 단위의 장기 전망을 담은 전력망 기본계획을 만들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자가 되는 전력설비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조건이 합리적이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전기료 선납도 하나의 재원조달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해야 한다. 먼저 국가가 어떤 전력망을 언제까지 책임질 것인지 정하고, 그 다음 특정 수요자가 추가로 발생시킨 비용의 몫을 투명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순서를 거꾸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전기는 기업이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지만, 그 전기가 흐르는 국가기간망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이다. 상품의 값을 기업에 받을 수는 있다. 더 많이 쓰는 기업에 더 많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제때 준비하지 못한 기간망의 책임까지 ‘5년치 전기료 선납’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에 청구해서는 안 된다. 25조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다. “한국의 전력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2026-09-04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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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먹는 초격차'…반도체·AI 데이터센터, 전력망이 성패 가른다
정부가 지난 29일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앞세운 초격차 산업 전략이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 발표의 성패는 기술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전력망과 용수, 입지와 인허가, 지역 인재와 정주 여건, 소부장 생태계가 맞물려야 비로소 ‘계획’은 ‘산업’이 된다. 이에 본지는 ‘800조 전쟁’ 기획 시리즈를 통해 주요 기업들의 투자 전략과 한전·수자원공사, 지자체, 소부장·로봇 부품기업까지 초격차 프로젝트의 실제 승부처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경제일보] AI 시대 국가 경쟁력은 더 이상 반도체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기를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정부가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에서 전력 인프라를 핵심 축으로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은 기존 제조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는 수천 개의 GPU를 24시간 가동해야 하고, 반도체 공장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공조설비, 초순수 생산시설 등을 상시 운영해야 한다. 순간적인 전압 강하나 정전도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어 '대용량'은 물론 '고품질' 전력 공급이 필수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전력과 용수를 생산설비 못지않은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전력과 용수는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체 산업 전체에서 모두 중요한 요소"라며 "반도체 업계 전반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반"이라고 했다. 이어 "전력 인프라는 개별 기업이 고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정부가 인프라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만큼 실제 정책이 어떻게 추진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정부가 발표한 345kV 계통 여유 정보 공개와 지역별 전기요금제 등에 대해서도 "기업의 투자 판단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이는 AI 시대 기업 경쟁력이 기술 개발뿐 아니라 안정적인 전력 확보 능력에도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력 병목…정부 '전력 고속도로' 추진 정부도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전날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 확충 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첨단산업이 필요한 곳에 전기를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100GW 규모로 확대하고,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함께 활용해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기업들이 전력 공급 여건을 미리 확인할 수 있도록 345kV 계통 여유 변전소 정보를 공개하고, 지역별 전기요금제와 AI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제도 단계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호남권을 AI 데이터센터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풍부한 재생에너지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전력 계통을 활용해 수도권에 집중된 데이터센터를 지방으로 분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정책이 발표됐다고 해서 곧바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실제 가동되려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로와 변전소 등 전력망이 함께 구축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전 "계획은 나왔지만 현실은 아직"…승부는 송전망 속도 실제 전력망 구축을 담당하는 한국전력도 정책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정부가 전력망특별법 등을 활용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 송전망 확충 속도로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지는 현 단계에서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동시에 확대되면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용량 전력과 고품질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라며 "단순히 발전량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막대한 전력을 끊김 없이 전달할 수 있는 계통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정부도 신규 발전설비뿐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ESS를 함께 활용하는 전원 믹스를 추진하고 있다. 향후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발전설비와 송변전망 확충 방안도 구체화할 계획이다. 다만 송전망 구축의 핵심 수단으로 제시된 전력망특별법 역시 아직은 효과를 검증하는 단계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전력망특별법 제정 당시 평균 4년 정도 사업 기간이 단축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법 시행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완료된 사업이 아직 없어 실제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AI 시대 국가 경쟁력은 발전소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보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지역으로 전기를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정부는 이번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전력 인프라 확충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기업들도 전력의 중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전력망을 구축하는 한전은 아직 공급 속도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결국 이번 메가프로젝트의 성패는 발전설비 확대 자체보다 송전망을 얼마나 신속하게 구축하고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이 요구하는 대용량·고품질 전력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2026-06-30 1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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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내걸린 공약 'AI 수도'…전력·물·기업은 어디서 오나
[경제일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공약집에 ‘AI(인공지능)’가 전면에 등장했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클러스터, 로봇 수도, 양자산업 도시 등 이름은 다르지만 방향은 비슷하다. 지역을 미래산업 거점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실행계획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전력망, 용수, 부지, 기업 투자, 인력 공급이 맞물려야 가능한 사업이다. 그러나 일부 공약은 산업 이름만 앞세울 뿐 전력 공급 계획이나 용수 확보 방안, 기업 투자 의향, 중앙정부 협의 절차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국이 AI 수도 경쟁…핵심은 ‘어떻게’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은 앞다퉈 ‘AI 수도’를 내세우고 있다. 대구는 AI·로봇 수도, 경북은 아시아태평양 AI 수도, 충남은 AI 수도, 울산은 AI 산업도시, 전북 새만금은 피지컬 AI 산업수도 등으로 포장됐다. 지역경제 침체와 청년 유출, 제조업 재편에 대응하기 위한 미래산업 전략이라는 점에서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공약 검증의 기준은 구호가 아니라 실행력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겠다”는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AI 수도 공약과 관련해 “어느 부지에 짓는지, 전기는 어디서 공급받는지, 냉각수는 어떻게 확보하는지, 어떤 기업이 투자 의향을 보였는지, 지역 인력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가 함께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 공약은 유권자에게 비교 가능한 정보여야 한다”며 “후보가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공약서에 사업명과 기대효과만 있고 재원 조달, 인허가 일정, 정부·기업 협의 단계가 없다면 선거용 청사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데이터센터 첫 조건은 전력망과 물 AI 데이터센터의 첫 번째 조건은 전력이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기를 필요로 한다. 특히 AI 학습과 추론에 쓰이는 고성능 서버는 전력 소비가 크다. 변전소, 송전선로, 전력계통 접속 가능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데이터센터 공약은 착공 단계에서부터 막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도 데이터센터 수요가 별도 전력 수요로 반영됐다. 그만큼 데이터센터가 국가 전력망에 부담을 주는 산업이라는 뜻이다. 후보가 데이터센터를 말하려면 한국전력, 산업통상자원부, 지자체 전력계통 계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AI 데이터센터는 서버 냉각을 위해 에너지와 냉각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한 지역개발 전문가는 “지역에 따라 상수도, 공업용수, 재이용수, 해수 활용 가능성이 달라진다. 농업용수나 생활용수와 충돌할 경우 주민 수용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며 “ 때문에 공약에는 냉각 방식, 용수 조달, 폐열 처리, 환경 영향 관리 방안이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로봇 공약도 기업과 인재 없으면 공허 반도체 공장 공약은 더 높은 수준의 검증이 필요하다. 반도체 팹은 △대규모 전력 △초순수 △폐수 처리 △화학물질 관리 △고급 인력 △협력업체 생태계 등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방자치단체체장 의지만으로 유치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기업의 중장기 투자 계획, 국가첨단전략산업 정책, 세제 지원, 인허가 일정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검증 기준은 분명하다. 유치 대상 기업이 특정돼 있는지, 투자 의향서나 양해각서가 있는지, 부지와 인허가 일정이 있는지, 전력·용수·폐수 처리 계획이 있는지, 지역 대학과 특성화고를 통한 인력 공급 방안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로봇 수도, 양자산업 도시 공약도 마찬가지다. 로봇산업은 기업 몇 곳을 유치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제조·물류·의료·돌봄 현장의 수요처, 실증공간, 규제 완화, 유지보수 인력이 필요하다. 양자산업은 대학과 연구기관, 대기업 연구개발 투자, 장기 국책사업과 연결돼야 한다. 산업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산업 구조와의 적합성이다. 유권자는 ‘AI 계산서’를 봐야 한다 전국 지자체가 AI와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지역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미래산업 공약일수록 더 구체적인 계산서가 필요하다 게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한 정치컨설팅 관계자는 “유권자는 후보에게 다섯 가지 정도를 물어야 한다”며 “전력망 접속 가능성은 확인했는가. 용수와 냉각 방식은 무엇인가. 기업 투자 의향은 문서로 확보했는가. 부지는 인허가가 가능한가. 지역 인재 양성 계획은 있는가 등이다”라고 말했다.
2026-05-3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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