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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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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삼성에 20조 선납 제안…전력망 책임은 누구 몫인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창원 기자
2026-09-04 13:00:00

삼성 20조·하이닉스 5조, 5년치 전기료 미리 받겠다는 한전

210조원 부채·반도체 전력망 투자 사이 '미래 매출 당겨쓰기'

대규모 수요자 분담 필요해도 국가 기간망 책임선부터 세워야

사진ChatGPT
[사진=ChatGPT]

[경제일보] 수백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지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첨단 팹은 거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과 자본의 싸움인 동시에 전력망 경쟁인 이유다.
 
하지만 그 전력망을 깔 돈이 부족해지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을 먼저 내달라는 카드를 꺼냈다.
 
한전이 제안한 규모는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 약 4조1000억원과 9000억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를 계산했다.
 
선납금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등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만 참여 여부와 금리, 금액과 기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전도 ‘제안’ 단계임을 분명히 했다.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도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지난해 선납액은 약 3900억원이었고, 대부분 공공기관이 이용했다. 기업이 미래에 낼 전기료를 먼저 내고 한전은 그 돈을 필요한 설비에 투자하며 기업은 이자를 받는 구조라면 금융거래로서 성립할 여지는 있다.
 
적기에 전력망이 완공되지 못해 수십조원짜리 공장이 서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이해관계가 있다.
 
문제는 규모와 목적이다.
 
3900억원 수준이던 선납제도를 단숨에 25조원짜리 전력망 조달수단으로 바꾸면 제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25조원은 한전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가까운 돈이다. 전기요금 납부 편의를 위한 제도가 사실상 국가 핵심 인프라를 조달하는 금융수단으로 변하는 셈이다.
 
한전이 이 방안을 고민하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가동과 호남 클러스터 건설 등에 따른 추가 전력수요는 20.6GW로 추산되고,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필요한 전력이 더 늘어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투자 수요는 더 커졌다. 반면 한전의 연결 기준 부채는 지난 6월 말 210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자비용으로 2조1000억원을 썼다. 공기업의 재무제표와 국가 산업정책의 시간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삼성과 하이닉스가 쓰는 전기니 두 회사가 망을 깔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전력망은 공장 안의 생산설비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실어 나르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지난 7월 시행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도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요 송·변전설비를 ‘국가기간 전력망 설비’로 규정하고 있다.
 
법의 목적부터 전기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국가 주요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을 조기에 확충하는 데 있다. 국가가 스스로 ‘기간망’이라고 이름 붙인 인프라의 책임을 특정 기업의 현금 여력에 의존해 해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반대편 원칙도 분명하다.
 
막대한 전기를 사용하는 대기업이 자신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인프라 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겠다는 논리 역시 설득력이 없다. 10GW, 20GW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 계통보강 비용이 따라온다. 그 비용을 일반 가정과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똑같이 떠넘기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5편에서 개인이나 소수에게 맡길 수 없는 공공사업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국가의 책무로 봤다. 동시에 도로와 교량 같은 시설의 비용은 이용자에게 받는 통행료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250년 전에도 공공 인프라의 책임과 이용자의 비용부담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도 ‘국가가 전부 낼 것이냐, 기업이 전부 낼 것이냐’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누가 어느 비용을 왜 부담하는지에 대한 원칙이다.
 
국가 전체가 이용하는 기간 송전망과 장거리 간선망은 국가와 한전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 반면 특정 산업단지나 초대형 수요처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전용선로와 변전소, 접속설비에는 원인자·수익자 부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기업과 지역이 함께 혜택을 보는 계통보강 비용이라면 수익 범위에 따라 분담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선이 먼저 그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전이 재무적으로 어려워졌을 때 현금이 많은 기업을 찾아가 몇 년 뒤 받을 전기료를 미리 달라고 하는 방식이 관행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오늘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지만 내일은 데이터센터, 배터리, 철강·석유화학 기업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가 인프라 투자비가 전력 수요자의 현금 보유액이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는 산업정책도, 요금정책도 아니다.
 
더구나 한전은 독점적인 송·배전망 사업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싫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으로 거래의 자발성이 완전히 확보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새 공장에 제때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기업과 그 전력을 공급할 사실상의 유일한 사업자가 20조원 규모의 선납을 협상한다면 일반적인 금융거래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와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납제를 확대하려면 세 가지 안전장치가 먼저다.
 
선납금은 해당 전력망 건설에만 쓰도록 별도 관리해야 한다. 기업별 부담액은 전력 사용량과 추가 계통투자 비용 등에 따른 객관적 산식으로 정하고 동일한 조건의 대규모 수요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공사가 늦어지거나 전력 공급 일정이 어긋났을 때 선납기업이 부담할 위험과 보상 원칙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문제와 전력망 투자 문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선납금으로 한전채 발행을 줄이는 효과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과거 전기요금 정책과 연료비 급등으로 쌓인 210조원대 부채를 반도체 기업의 미래 전기료로 메우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곤란하다. 반도체 전력망에 들어갈 돈과 한전의 누적 재무부담을 한 통장에 넣는 순간 비용 부담의 원칙은 흐려진다.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용인과 호남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기업에는 수십조원,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를 주문하면서 정작 공장을 돌릴 전력망은 한전과 기업이 돈을 마련해 알아서 깔라는 식이어서는 산업정책이라 하기 어렵다. 공장 유치는 국가전략이고 송전망은 기업 사정이라는 식의 역할 분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의 속도는 전력망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주민 수용성 문제와 송전선로 인허가를 풀고 장기 전력수요를 예측해 기간망을 미리 확보하는 일은 개별 기업이 대신할 수 없는 국가의 몫이다. 올해 시행된 국가기간전력망법이 5년마다 30년 단위의 장기 전망을 담은 전력망 기본계획을 만들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혜자가 되는 전력설비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하는 방안은 검토할 수 있다. 조건이 합리적이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전기료 선납도 하나의 재원조달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해야 한다. 먼저 국가가 어떤 전력망을 언제까지 책임질 것인지 정하고, 그 다음 특정 수요자가 추가로 발생시킨 비용의 몫을 투명하게 계산해야 한다. 한전의 재무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 순서를 거꾸로 세워서는 안 된다.
 
전기는 기업이 돈을 내고 사는 상품이지만, 그 전기가 흐르는 국가기간망은 대한민국 산업의 기반이다.
 
상품의 값을 기업에 받을 수는 있다. 더 많이 쓰는 기업에 더 많은 인프라 비용을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제때 준비하지 못한 기간망의 책임까지 ‘5년치 전기료 선납’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에 청구해서는 안 된다.
 
25조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다.
 
“한국의 전력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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