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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핫이슈] '증도가자' 보물 지정 부결에 끊이지 않는 논란… 국감 쟁점으로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 부결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심의위원들에게 부결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다. 2011년 문화재청 고위 공무원의 권유로 지정 신청이 이뤄졌다는 증도가자는 6년 뒤 보물 지정이 부결됐다. 이후 감사원 조사에서 핵심 심의자료의 누락과 왜곡 문제가 드러났지만 국가유산청은 통계청의 분석 방법을 문제 삼으며 기존 판단을 사실상 유지하고 있다. 22일 국회와 국가유산청 등에 따르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23일 국가유산청 등을 대상으로 종합국정감사를 실시한다. 앞서 지난 8일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은 2017년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근거로 당시 심의 간사의 부결 종용 의혹을 제기했다. 국가유산을 찾아 보존해야 할 기관의 태도로 적절하냐는 질의에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잘못된 것 같다"는 취지로 답했다. ◆국가 권유로 신청했는데 6년 뒤 부결…처음부터 불거진 심의 공정성 논란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 신청은 2011년 10월 이뤄졌다.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에 따르면 당시 엄승용 문화재청 정책국장이 같은 달 3일경 직접 찾아와 조속한 문화재 지정 신청을 권유했다. 김 회장 측은 사흘 뒤인 10월 6일 금속활자 101점의 보물 지정을 신청했다. 김 회장은 엄 국장이 두세 차례 방문해 지정을 권유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 지정 업무를 총괄하던 고위 공무원이 먼저 신청을 권유했지만 문화재청은 약 6년간 결론을 미루다가 결국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는 것이다. 증도가자는 고려시대 불교서적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다. 실제 이 책을 찍은 활자로 확인되면 제작 시기는 1239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현존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인 1377년 '직지심체요절'보다 최소 138년 앞선 시기의 금속활자 실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은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에서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 서체와 주조 방식, 조판 실험 등을 근거로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출처와 소장 경위가 불분명하고 관련 유물과의 비교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부결 사유에 포함됐다. 그러나 당시 문화재청이 구성한 지정조사단은 분석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문화재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결 결정을 내린 과정에 담당 공무원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실 심의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은 2017년 부결 이전부터 있었다. 박문열 당시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장은 2013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소장자가 고미술상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장사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게 아무리 좋다 해도 (문화재 지정으로) 값이 뛰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말했다. 김 회장 측은 소장자의 직업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발언이라며 반발했다. 2014년 4월 30일에는 박 전 위원장을 지정 심의에서 배제해 달라는 기피 신청서까지 제출했다. 그럼에도 박 전 위원장은 2017년 증도가자 보물 지정 심의에 참여했다. 박 전 위원장을 둘러싼 의혹은 당시 청와대 인사와의 관계로도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던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과 박 전 위원장 사이에 유착설까지 제기된 것이다. 김 회장은 당시 청와대 핵심 인사와의 관계가 증도가자 보물 지정 심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두 사람의 관계와 외부 개입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의자료 핵심 수치 누락…'사료됨'이 '확인됨'으로 바뀐 경위도 의혹 2017년 부결 당시 문화재위원회 간사는 황권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이었다. 황 과장은 지정조사 결과를 위원회에 보고하는 업무에 관여했으며, 심의가 끝난 지 불과 한 시간가량 지난 오후 4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 설명회에서도 직접 부결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두 쪽 분량의 보도자료와 100여 장의 발표자료를 준비했다. 남권희 교수는 방대한 발표자료가 심의 직후 공개된 점을 들어 부결 결론을 사전에 정해놓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 회장 측도 당시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 부결 처리일이 실제 심의·발표일보다 하루 늦은 4월 14일로 기재됐다며 행정 처리 경위를 문제 삼고 있다. 부결 판단의 근거가 된 조사자료에서는 더욱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김 회장 측의 감사 제보를 검토한 감사원은 2025년 9월 관련 사안을 국가유산청에 이첩했다. 국가유산청은 올해 1월 자체감사를 벌여 2017년 심의자료의 작성과 보고 과정 등을 살폈다. 핵심은 금속활자를 실제 책의 글자 자리에 배열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조판 실험이었다. 당시 조사자료에는 활자본과 이를 본떠 목판에 다시 새긴 책 사이에 크기 차이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속명의록'은 0.3~0.5㎝, '석보상절'은 0.8㎝의 차이가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에 보고되는 과정에서 속명의록은 크기 차이가 없다는 취지로 설명됐고 석보상절의 0.8㎝ 수치도 빠졌다. 문화재위원회는 활자를 책의 글자 자리에 배열했을 때 약 0.45㎝가 부족하다는 점을 주요 부결 근거로 삼았다. 당시 측정자료에 있던 0.8㎝의 차이는 보고 과정에서 빠졌지만, 그보다 작은 0.45㎝의 부족분은 보물 지정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된 셈이다. 국가유산청이 올해 국가유산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도 당시 발표자료의 치수 차이 등에 관한 왜곡 설명과 추가 조사자료의 검토 시간 부족 문제가 감사원 지적사항으로 기재돼 있다. 조사자료의 표현이 바뀐 정황도 문제로 제기됐다. 김 회장 측에 따르면 주조 관련 원 조사자료에는 상하를 분할한 목형으로는 주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후 문화재청의 대외 자료에서는 '확인됨'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사료됨'은 조사자의 판단을 나타내지만 '확인됨'은 사실관계가 확정됐다는 의미를 담는다. 김 회장 측은 전문가의 추정이 확정적인 조사 결과로 바뀐 경위와 이 표현이 실제 심의위원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를 문제 삼고 있다. 보물 지정 신청 대상도 아닌 유물의 제출을 요구한 점도 논란이 됐다. 문화재청은 증도가자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청동 수반과 초두의 비교조사를 요구했지만, 두 유물이 실제로 함께 출토됐다는 근거는 물론 소유자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이들 유물과 비교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물 지정 부결 사유에 포함했다. 감사원 조사자료에는 신청인 소유로 확인되지 않은 유물의 제출을 요구한 것이 과도하며 관련 법령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담겼다. 2017년 부결 결과를 신청인에게 공식 통보하기까지 약 6년이 걸린 행정 처리 역시 규정 위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감사원 지적에도 기존 판단 유지…당시 심의 관계자들 다시 관여 논란 감사원은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의 분석을 토대로 조판 실험 결과도 다시 검토했다. 통계청 분석에서는 홈형 활자 15자를 배열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존 심의에서 조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근거와 다른 결과였다. 그런데 국가유산청은 외부 용역을 통해 통계청의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놨다. 신청된 활자가 증도가 인쇄에 사용된 전체 활자를 대표하는 표본이라고 보기 어렵고, 자료의 분포 특성도 통계청이 적용한 검정 방법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통계분석의 적정성과 별개로 당시 심의자료에서 중요한 수치가 빠지고 원래의 표현이 달라진 경위는 여전히 남아 있다.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공식 자료에도 핵심 수치 누락과 발표자료의 왜곡 설명 문제가 감사원 지적사항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8월 13일 국가유산위원회 동산문화유산분과는 감사원 지적에 따라 상정된 증도가자 보물 지정 관련 자체감사 후속 조치 검토 안건을 부결했다. 안건에는 통계청의 조판 가능성 분석을 지정 심사에 반영할지, 청동 수반과 초두를 추가로 확보해 비교조사할지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반면 같은 회의에서 국가유산청이 제출한 증도가자 계열 금속활자 일괄공모 계획은 보고 안건으로 접수됐다. 과거 심의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후속 검토는 부결된 가운데 조사 대상을 전국으로 넓히는 새로운 계획이 제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심의 관계자들의 재참여 문제도 불거졌다. 2017년 증도가자 심사에 관여했던 정제규 전문위원은 현재도 국가유산위원회 동산문화유산분과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 회장에 따르면 정 전문위원은 올해 감사원 지적과 관련해 열린 국가유산청 회의에도 두 차례 참석했다. 문제는 과거 부결 심사에 참여했던 인사가 당시 판단의 적정성을 다시 살피는 논의에도 관여했다는 점이다. 현행 '국가유산위원회 규정' 제11조는 해당 안건에 직접 관여한 위원이나 전문위원을 조사·심의·의결에서 제척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 회장은 정 전문위원이 올해 회의에서 맡은 역할과 향후 재검증 참여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8일 국감에서 임오경 의원 역시 과거 심의 관계자들의 새로운 검증 참여 문제를 지적했다. 허민 청장은 전문위원에게 최종 결정권은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해당 전문위원의 제척 필요성을 인정하는 취지로 답했다. 김 회장은 황권순 국장과 박문열 전 위원장, 정제규 전문위원 등을 지목하며 이른바 '문화계 카르텔' 의혹을 제기했다. 황 국장은 2017년 심의 간사로 조사자료 보고에 관여했으며, 올해 1월 무형유산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6개월여 만인 8월 7일 자연유산국장으로 전보됐다. 감사 후속 조치 안건을 다룬 국가유산위원회 회의를 불과 엿새 앞둔 시점이었다. 박 전 위원장은 기피 신청에도 보물 지정 심의에 참여했고, 정 전문위원은 과거 부결 심사에 이어 최근 감사 관련 논의에도 관여했다. 김 회장은 이들의 역할과 인적 관계가 증도가자 지정 심사와 후속 검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이들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증도가자를 역사에서 지우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 지적에 맞서 기존 판단을 유지하는 국가유산청 공무원들과 전문위원들을 향해서도 어느 나라 공무원인지 의심스럽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찬경 양심선언에 60억원 회유 의혹…형사책임 검토까지 김 회장은 증도가자의 진위를 둘러싼 과거 논란에도 외부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개입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중국 단둥에서 가짜 금속활자를 제작했다는 주장이 확산된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사동 고미술상 정찬경은 증도가자를 중국에서 만든 가짜 활자로 몰아가는 데 자신이 관여했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정씨는 다른 고미술상 등의 회유를 받아 중국 단둥에서 모조 금속활자와 공장을 섭외하고, 방송 취재진을 현장으로 안내해 김종춘 회장의 증도가자가 중국산 가짜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이 과정에서 채무 10억원의 변제와 사업자금 50억원 등 총 60억원을 제공받기로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이러한 양심선언을 근거로 증도가자 진위 논란의 배후에 금전적 이해관계에 따른 조직적인 음해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법적 대응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 조사자료의 '주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사료됨'이 대외 자료에서 '확인됨'으로 바뀐 경위와 심의 간사의 부당한 개입 의혹이 핵심이다. 허위공문서작성죄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성립 여부가 법률적 쟁점으로 거론된다. 김 회장 측은 당시 회의록과 조사보고서 등을 근거로 형사 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감에서는 국가유산청의 일괄공모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임오경 의원은 이미 2017년 조사자료와 감사원 조사 결과가 있는데도 기존 신청 활자 101점부터 다시 검증하지 않고 새로운 공모를 추진하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임 의원이 일괄공모를 '꼼수'라고 지적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과거 부결의 근거가 잘못됐다는 감사원 지적부터 검토하지 않은 채 조사 대상을 전국으로 넓히면 기존 신청 유물에 대한 판단이 다시 늦어질 수 있다는 취지다. 같은 당 조계원 의원도 기존 활자 101점의 과학적 재검증을 먼저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허 청장은 출토 경위가 불분명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활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어 폭넓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내에서 증도가자의 보물 지정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사이 중국 일부 학계에서는 이미 해당 금속활자를 송·원대 유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가 증도가자의 역사적 가치를 가리는 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중국 학계가 자국 유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증도가자가 처음 공개된 지 16년이 흘렀지만 2017년 부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된 자료가 왜 다르게 보고됐는지, 과거 심의 관계자들이 새로운 검증에 어디까지 관여하는지에 관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23일 종합국정감사에서는 기존 금속활자 101점의 검증 일정과 감사원 지적 이후 국가유산청의 후속 조치, 당시 심의 관계자들의 역할 등이 다시 쟁점이 될 전망이다.
2026-10-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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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착공 숫자에만 매달리는 3기 신도시, 집만 짓고 길과 일자리는 언제 만들려나
정부가 오는 2030년까지 3기 신도시 물량의 90퍼센트를 착공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치솟는 집값과 전세난에 지친 무주택 서민과 청년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부의 부동산 대책과 행정 현장을 지켜본 입장에서 이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착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는 뜻일 뿐, 당장 국민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1기와 2기 신도시가 들어설 때도 정부는 늘 화려한 공급 숫자를 앞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파트 단지는 금세 솟아올랐지만, 서울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는 입주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제자리를 걸었다. 분양 대금에 이미 수조 원의 광역교통개선분담금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부처 간 칸막이와 지자체의 인허가 갈등 속에 길 뚫는 일은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김포 골드라인의 숨 막히는 출근길이나 동탄과 검단 주민들이 입주 초기에 겪어야 했던 극심한 교통난은 행정의 무책임이 낳은 뼈아픈 실패 사례다. 지금의 3기 신도시 역시 이 오래된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양주 왕숙이나 하남 교산, 고양 창릉, 부천 대장 등 주요 지구에서 사전청약을 받았던 수많은 당첨자가 본청약 지연으로 속을 태우고 있다. 문화재가 발굴되거나 법정보호종이 발견되어 공사가 멈춰 서고, 자잿값과 인건비가 치솟으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민간 건설사들이 사업성을 이유로 첫 삽조차 제때 뜨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공사비가 오르니 당초 약속했던 분양가는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로 뛰었고,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에 당첨을 포기하는 서민들까지 속출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90퍼센트 착공이라는 목표만 다그치면 현장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해 보상이나 기반 시설 문제가 덜 복잡한 곳부터 밀어붙이게 되고, 정작 막대한 예산과 정교한 조율이 필요한 광역급행철도(GTX)나 지하철 연장 사업은 또다시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땅만 파놓고 정작 공사는 지지부진하거나, 허허벌판에 아파트만 덩그러니 지어놓고 입주민들에게 몇 년씩 불편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약속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주거 안정은 공급 물량을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도시 안에서 온전히 삶을 꾸릴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데서 출발한다. 아침마다 두 시간씩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며 서울로 출근하고 밤늦게 잠만 자러 돌아오는 도시는 서울의 집값 수요를 결코 분산시키지 못한다. 판교가 성공한 신도시로 꼽히는 이유는 아파트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일할 수 있는 탄탄한 기업 터전을 함께 일구었기 때문이다. 3기 신도시가 거대한 잠자리 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일자리와 교통망이 주택 입주 시점에 맞춰 함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지자체장이 바뀌거나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남발되는 보여주기식 기업 유치 양해각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양해각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기업이 실제로 땅을 매입하고 공장과 연구소를 세울 수 있도록 세제 혜택과 과감한 규제 완화를 법과 제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철도와 도로 역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라는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해마다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예산은 제때 투입되고 있는지 소상히 공개하고 지연될 경우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분명히 가려야 한다. 집을 짓고 도시를 만드는 일은 한 정권의 실적을 채우기 위한 단기 사업이 아니다. 청년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에 내 집을 마련하고, 출퇴근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닦는 백년대계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착공 비율을 앞세워 성과를 홍보하려는 유혹을 내려놓아야 한다. 공사가 왜 늦어지는지, 치솟는 분양가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입주 날 아침 주민들이 타고 갈 전철은 제때 개통될 수 있는지부터 정직하게 점검하고 해답을 내놓는 것이 행정이 지켜야 할 기본이다.
2026-10-21 16: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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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청년의 분노가 던진 경고, 미래세대는 정치권의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지난해 네팔에서는 청년들의 분노가 정권을 흔들었다. 부패와 특권, 청년 실업에 쌓인 불만이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모로코에서도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제축구대회 개최를 위한 시설에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면서 병원과 학교는 제대로 돌보지 않는 정부를 향한 항의였다. 두 나라의 사정은 달랐지만 청년들이 겨냥한 것은 자신들의 삶보다 권력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정치였다. 한국 정치도 이 경고를 가볍게 여길 처지가 아니다. 집값은 청년들의 소득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다.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청년이 늘어나는 동안 정치권은 현금 지원과 각종 보조금 확대를 경쟁적으로 약속한다. 당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은 필요하지만 돈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지, 그 비용을 누가 갚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치권이 선거를 의식해 지출을 늘리면 그 혜택은 현재의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재정 적자가 쌓여 국가채무가 증가하면 원리금을 갚아야 할 부담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선거에서 표를 얻은 정치인은 몇 년 뒤 자리를 떠날 수 있지만 국가가 발행한 국채는 정권이 바뀐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은 오늘의 표를 얻기 위해 돈을 쓰고, 그 빚은 내일의 납세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에서 이러한 재정 운용은 더욱 위험하다. 경제활동에 참여해 세금을 낼 인구는 줄어드는데 연금과 의료, 노인복지에 들어가는 돈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경제성장률까지 낮아지면 재정 수입은 줄고 지출 압박은 커진다. 지금의 지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거나 빚을 늘리는 선택을 반복할수록 미래세대의 부담은 무거워진다. 정부가 편성한 2027년도 예산안은 총지출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증가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확대에 힘입어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0.1%로 줄고 국가채무비율도 48.3%로 낮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국가채무 총액은 올해 본예산 기준 1413조8000억원에서 1519조8000억원으로 증가한다. 채무비율은 낮아지더라도 빚의 절대 규모는 106조원 늘어나는 셈이다. 세수 증가에 힘입은 재정지표 개선을 장기적인 건전성 회복으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고 경기 침체로 세수가 줄어들면 재정 여건은 빠르게 악화할 수 있다. 한 번 도입한 복지제도와 지원사업은 수혜자가 늘어날수록 축소하기 어려워진다. 지출을 확대하는 정치적 결정은 쉽지만 이를 줄이는 과정에서는 거센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발표한 장기재정전망도 심각하다. 당시 법령과 제도가 유지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5년 47.8%에서 2072년 173%까지 상승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후 정책 변화에 따라 실제 수치는 달라질 수 있지만 저출생과 고령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국가재정이 얼마나 큰 압박을 받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새로운 지원책을 쏟아낸다. 여야 모두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다가도 자신들이 추진하는 사업에는 예외를 두려 한다. 집권하면 재정 확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야당이 되면 국가채무 증가를 비판한다. 국가재정을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용하면서 그 부담은 다음 세대에 넘기는 행태다. 재정준칙을 법률로 강제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9월 29일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국가채무비율을 GDP 대비 60% 이내로 관리하고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원칙적으로 3% 이내로 제한하도록 했다.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으면 적자 한도를 2%로 낮추고 준칙을 지키지 못한 정부에는 재정건전화 대책과 이행계획을 제출하도록 했다. 법률에 기준을 정해 놓는 것으로 재정 운용의 책임까지 확보할 수는 없다. 경기 침체나 대규모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지출을 늘려야 할 때도 있다. 다만 예외를 적용한다면 그 사유와 재정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정상화 시한과 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 독립적인 재정평가를 통해 정부의 세입 전망과 지출계획을 검증하고 시정조치의 이행 여부도 공개해야 한다. 예외와 유예를 반복하면서 준칙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편법부터 막아야 한다. 국회 역시 재정 운용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거를 앞두고 각종 지원책과 감세 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하면서 정작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현행 비용추계 제도를 보완해 재정 부담이 발생하는 법률에는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까지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지출에 상응하는 재원을 마련하거나 기존 지출을 조정하는 페이고(Pay-as-you-go) 원칙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게 혜택을 약속할 권한을 가진 국회가 그 비용에 대한 책임까지 회피해서는 안 된다. 국민연금은 정치권의 개혁 지연이 미래세대에 어떤 부담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개정된 국민연금법에 따라 보험료율은 기존 9%에서 올해 9.5%로 올랐고 2033년에는 13%에 도달한다. 명목소득대체율도 올해부터 43%로 높아졌다. 18년 만에 이뤄진 개혁으로 기금 소진 시점은 늦춰졌지만 장기적인 재정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 추계에 따르면 이번 개혁을 반영한 국민연금 기금 소진 시점은 2064년이다. 기금운용 수익률이 목표대로 높아지면 2071년까지 늦출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계는 인구구조와 경제성장률, 투자수익률에 따라 달라진다. 기금 소진 시점을 늦추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 이후 연금급여를 어떻게 지급할 것인지, 필요한 재원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현행 제도에서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보험료를 납부할 청년들이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부담을 더 많이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개혁으로 보험료율을 올리면서 소득대체율도 높였지만 세대별로 부담과 혜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 연금을 받는 세대와 앞으로 가입할 청년의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보험료율과 급여 수준을 정할 때 세대별 영향을 함께 따져야 한다. 정치권이 연금개혁을 미룬 책임도 가볍지 않다. 2007년 개혁 이후 보험료율을 다시 조정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그동안 출생아 수는 줄고 고령인구는 증가했다. 연금 재정의 장기적인 불안이 예고됐지만 국민에게 보험료 인상이나 급여 조정을 요구하는 결정은 번번이 뒤로 밀렸다. 개혁을 늦춘 정치권이 부담해야 할 정치적 비용은 작았지만 그 사이 후속 세대가 감당해야 할 재정적 부담은 커졌다. 국민연금법에도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후속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법은 5년마다 재정계산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정 전망이 법률에 정한 관리 기준을 벗어나면 정부가 일정 기간 안에 조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국회에도 심의 일정과 처리 경과를 공개하도록 해 연금개혁을 지연시킨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국민이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세대별 보험료 부담과 예상 연금급여를 비교해 공개하는 제도도 도입할 만하다. 청년과 중장년, 고령층이 각각 얼마나 부담하고 어떤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지 같은 기준으로 산출해야 한다. 보험료 인상의 부담이 저소득층과 고용이 불안정한 청년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지원책을 마련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국가의 연금 지급 보장은 이미 법률에 명시됐다. 이제는 그 약속을 이행할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을 차례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청년 지원이나 필요한 복지까지 무조건 줄여서는 곤란하다. 청년의 주거 안정과 일자리,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경제의 성장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복지 지출 역시 국가의 책무다. 반면 효과가 불분명한 사업이나 선거를 의식한 일회성 지원에는 엄격한 검증이 따라야 한다. 정부가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면 그 사업이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재원이 필요할 것인지부터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재정준칙과 연금개혁을 법으로 강제하자는 주장은 국회와 정부의 정당한 정책 결정권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법률에 규정하자는 것이다. 재정준칙을 지키지 못한 정부는 시정계획을 제출하고, 연금 재정이 악화되면 개혁안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도 선거와 정파적 이해를 이유로 심의를 무작정 미룰 수 없도록 제도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권은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합의를 이유로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국가채무의 이자는 쌓이고 연금 재정의 부담은 증가한다. 다음 선거를 의식해 개혁을 연기하는 정치가 반복된다면 그 피해는 정치권이 아닌 미래의 납세자와 연금 가입자에게 돌아간다.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온 청년들의 분노는 오늘의 정치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한국 정치도 당장의 지지율과 선거 승리를 위해 재정을 운용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채무와 연금 지급 의무는 정권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이 회피한 책임을 미래세대가 세금과 보험료로 감당하는 일도 더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국민은 선거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현재의 정치권이 그들의 몫까지 마음대로 쓸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래세대에 남길 부담을 결정하는 정치라면 그 책임부터 법으로 지게 해야 한다.
2026-10-20 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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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이앤씨, 성수2지구에 '아크로 성수' 제안…11월 시공사 선정
DL이앤씨가 서울 성동구 성수전략정비구역 제2지구 재개발사업에 하이엔드 브랜드 ‘아크로’를 내세웠다. 한강 조망을 극대화한 설계와 글로벌 건축·디자인 업체와의 협업을 앞세워 성수동을 대표하는 고급 주거단지를 짓겠다는 구상이다. 2일 DL이앤씨에 따르면 회사는 전날 성수2지구 재개발사업의 수의계약을 위한 입찰제안서를 조합에 제출했다. 앞서 진행된 시공사 선정 입찰에 단독 참여해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얻었으며, 조합은 제안 내용을 검토한 뒤 오는 11월 21일 시공사 선정 총회를 열 예정이다. 성수2지구는 재개발을 통해 지하 6층~지상 최고 65층, 11개 동, 2381가구 규모의 대단지로 탈바꿈한다. 사업비만 2조137억원에 달한다. DL이앤씨는 새 단지 이름으로 ‘아크로 성수(ACRO SEONGSU)’를 제안했다. 설계에는 해외 전문업체들이 대거 참여한다. 기본 설계는 글로벌 설계기업 아르카디스(Arcadis)가 맡고, 초고층 구조 설계에는 에이럽(Arup), 골조 시공 제어에는 도카(Doka)가 참여한다. 인테리어는 야부 푸셸버그(Yabu Pushelberg), 조경은 마샤 슈왈츠(Martha Schwartz), 조명은 리히트 쿤스트 리히트(Licht Kunst Licht)가 담당한다. 주거상품의 초점은 한강 조망에 맞췄다. DL이앤씨는 조합원 전 가구에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하고, 파노라마 리버뷰를 갖춘 스카이라운지도 제안했다. 천장고를 높여 실내 개방감과 조망을 함께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커뮤니티 시설도 차별화를 꾀했다. 성수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가구별 프라이빗 스튜디오를 제안했다. 입주민이 필요에 따라 와이너리와 시네마, PT룸, 레슨룸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이다. DL이앤씨 관계자는 “아크로의 역량을 총동원해 성수를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사업 조건과 상품 특화 내용은 조합 일정에 맞춰 공개할 예정이다.
2026-10-02 09: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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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론티어 격돌①] 국제분쟁 '한 우물' 피터앤김 vs 글로벌 연합 KL파트너스
수조원이 걸린 국제중재에서는 로펌의 변호사 숫자만으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수백명 이상의 변호사를 둔 대형 로펌과 수십명 규모의 전문 로펌이 같은 사건을 놓고 경쟁한다. 국제중재 경험과 해외 변론 능력이 필요한 만큼 특정 분야만 깊게 파고든 로펌이 대형 로펌과 맞설 수 있는 시장이다. 법률시장에서는 이런 전문 로펌을 ‘부티크 펌(Boutique Firm)’이라고 부른다. 기업 인수·합병과 금융, 조세, 형사, 노동 등 거의 모든 법률업무를 다루는 종합로펌과 달리 특정 분야에 인력과 경험을 집중한다. 규모보다 전문성을 앞세우고 사건을 맡은 파트너가 직접 실무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국제중재 시장의 대표적인 부티크 펌으로 피터앤김과 KL파트너스가 꼽힌다. 두 곳 모두 대형 로펌에서 국제분쟁을 다룬 변호사들이 주축이지만 성장법은 다르다. 피터앤김은 국제분쟁에 집중한 채 자기 이름으로 해외 사무소를 늘렸고 KL파트너스는 국제중재와 기업자문을 함께 가져가면서 글로벌 로펌 베이커맥켄지와 손잡았다. 한쪽은 직접 세계로 나갔다. 다른 한쪽은 세계적인 로펌의 네트워크를 서울로 끌어왔다. 국제중재 부티크 시장을 두고 피터앤김과 KL파트너스가 벌이는 첫 번째 싸움이다. ◆ 자체 해외망 피터앤김 vs 글로벌망 붙인 KL 피터앤김의 선택은 직접 진출이다. 2020년 출범한 뒤 서울을 비롯해 스위스 제네바·취리히와 싱가포르, 호주 시드니·퍼스까지 6곳에 사무소를 냈다. 해외 로펌과 제휴해 사건을 넘기는 대신 주요 국제중재 거점에 자기 간판을 달았다. KL파트너스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2015년 설립된 뒤 국제중재와 기업 인수·합병을 주력으로 삼았고 2023년 베이커맥켄지와 합작법무법인을 만들었다. 국내 로펌과 미국계 글로벌 로펌이 만든 첫 합작법무법인이다. 베이커맥켄지는 세계 70개가 넘는 사무소를 두고 있다. KL파트너스는 각국에 자기 사무소를 하나씩 만드는 대신 베이커맥켄지의 해외 변호사와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현재 합작법인은 국제중재와 소송뿐 아니라 기업 인수·합병과 조세, 에너지·인프라 등도 함께 다룬다. 피터앤김은 해외 거점의 통제권과 브랜드를 직접 가져간다. KL파트너스는 사무소를 직접 늘리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곧바로 사용한다. 어느 방식이 해외 사건을 더 많이 가져올지는 앞으로 수임 실적에서 갈린다. ◆ 국제분쟁 집중 피터앤김 vs M&A까지 넓힌 KL 업무를 넓히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피터앤김은 출범 이후 국제중재와 국제분쟁이라는 영역에 힘을 모았다. 기업 간 상사중재뿐 아니라 투자자와 국가 사이의 분쟁과 중재판정 관련 소송까지 다룬다. 체임버스앤파트너스는 2026년 한국 국제중재 분야에서 피터앤김을 최고등급인 Band 1에 올렸다. 국제중재 전문매체 GAR도 피터앤김을 2025년 세계 주요 국제중재 로펌 30곳 가운데 26위로 평가했다. 2020년 출범 이후 5년 가운데 4차례 GAR 30에 이름을 올렸다. 변호사 숫자가 많은 종합로펌이 아니라 국제중재 사건의 규모와 수행시간 등을 토대로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부티크 전략을 보여준다. KL파트너스도 출발점에는 국제중재가 있었다. 김범수 대표변호사는 세종에서 16년간 일하며 국제분쟁팀장을 지냈고 국제상업회의소(ICC)와 싱가포르국제중재원(SIAC),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 등의 사건을 수행했다. 투자자·국가 분쟁도 주요 업무다. 다만 KL파트너스는 국제중재만 남겨두지 않았다. 설립 때부터 기업 인수·합병을 함께 키웠고 베이커맥켄지와 합작한 뒤 기업자문과 조세, 에너지·인프라까지 해외 네트워크와 연결했다. 피터앤김이 국제분쟁의 깊이를 더하는 동안 KL파트너스는 국제분쟁에서 확보한 고객의 다른 법률 수요까지 가져가는 전략이다. ◆ 파트너 직접 투입…결국 사람 싸움 두 곳이 대형 로펌과 맞설 수 있는 무기는 결국 사람이다. 국제중재는 한 사건이 몇 년씩 이어지기도 한다. 계약서와 증거를 분석하고 외국법을 검토한 뒤 해외 중재판정부에서 영어로 직접 변론해야 한다. 사건 경험이 많은 파트너가 실제 사건 수행에서 얼마나 오래 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피터앤김은 사건마다 파트너가 참여하는 전담팀을 구성하는 방식을 내세운다. 서로 다른 국가와 법체계에서 경험을 쌓은 변호사를 사건 성격에 따라 묶는다. 서울 사무소뿐 아니라 유럽과 싱가포르, 호주의 변호사들이 한 사건에 함께 참여한다. 올해도 사람을 늘렸다. 지난 7월 광장과 화우에서 약 15년간 근무한 김진욱 변호사가 파트너로 합류했고 9월에는 김앤장 국제중재팀에서 10년간 일한 최준학 변호사를 영입했다. 싱가포르에서도 국제중재 경력 20년 안팎의 엘로디 둘락 변호사를 파트너로 데려왔다. KL파트너스의 무기는 김범수 대표를 비롯한 자체 중재팀과 베이커맥켄지의 해외 인력이다. 한국법 문제는 서울에서 맡고 외국법과 현지 규제가 걸리면 해외 사무소를 붙일 수 있다. 2026년 7월부터는 조세·통상 전문가 곽장운 변호사가 합작법인의 한국 대표를 맡아 조직 확대를 이끌고 있다. 피터앤김은 국제중재 스타 변호사를 자기 조직으로 끌어들인다. KL파트너스는 자체 전문가에 글로벌 로펌 인력을 붙인다. 두 전략 모두 결국 좋은 변호사를 얼마나 빨리 사건에 투입하느냐의 싸움으로 모인다. ◆ 굵직한 국제분쟁 놓고 실적 경쟁 피터앤김은 고액 국제분쟁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교보생명과 어피니티·GIC 등이 벌인 주주 간 분쟁에서는 사모펀드 측을 대리해 유리한 중재판정과 합의를 이끌었다. 체임버스는 이 사건을 피터앤김의 대표 업무로 소개하고 있다. 투자자·국가 분쟁도 다룬다. 기업 간 계약분쟁만 아니라 국가를 상대로 한 투자중재와 국제공법까지 업무 범위를 가져가고 있다. 건설과 에너지, 자원개발, 기업 인수·합병 등 국제중재가 많이 발생하는 산업도 주요 시장이다. KL파트너스 역시 투자자·국가 분쟁 경험을 쌓아왔다. 김범수 대표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미국·유럽 투자자의 분쟁을 비롯해 ICC와 SIAC, HKIAC 등 여러 국제중재 사건을 수행했다. 대형 로펌 세종의 국제분쟁팀장을 떠나 부티크를 만든 뒤 같은 시장에서 독자적인 고객을 확보했다. 여기에 기업 인수·합병이 붙는다. 베이커맥켄지와의 합작 이후에는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와 외국 기업의 한국 진출을 중재·송무와 연결할 수 있다. 국제분쟁이 터진 뒤 사건을 가져오는 것뿐 아니라 거래 단계부터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KL파트너스의 계산이다. ◆ ‘한 우물’이냐 ‘두 시장’이냐 부티크 펌에는 성장할수록 피하기 어려운 선택이 있다. 잘하는 분야에 계속 집중할지 아니면 고객이 요구하는 다른 업무까지 받을지 정해야 한다. 피터앤김은 아직 첫 번째 길을 택하고 있다. 사무소는 6곳까지 늘었지만 중심 업무는 국제중재와 국제분쟁이다. 해외로 나가면서도 종합로펌으로 바꾸지 않고 분쟁 전문 로펌이라는 간판을 유지한다. KL파트너스는 두 번째 길로 움직이고 있다. 국제중재라는 출발점은 유지하면서 기업 인수·합병과 송무 등으로 업무를 넓혔다. 베이커맥켄지와의 합작법인은 조세와 에너지·인프라까지 다루면서 종합적인 국제 기업자문 조직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위험도 다르다. 피터앤김은 국제중재 시장이 흔들리면 다른 업무로 매출을 보완하기 어렵다. KL파트너스는 영역을 넓힐수록 ‘국제중재 전문 부티크’라는 기존 색깔이 약해질 수 있다. 한 곳은 전문성을 더 좁고 깊게 가져간다. 다른 곳은 전문성을 발판으로 고객의 다른 사건까지 가져간다. 부티크 펌이 커지는 두 가지 방법이 국내 국제중재 시장에서 동시에 시험대에 올라 있다. ◆ 다음 승부는 ‘한국 밖의 사건’ 두 펌 모두 한국 국제중재 시장에서 이름을 알렸다. 다음 싸움은 한국 기업이나 한국 정부가 당사자인 사건을 넘어 제3국 기업과 정부의 분쟁을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있다. 피터앤김에는 자체 해외 사무소가 무기다. 스위스와 싱가포르, 호주에 직접 변호사를 두고 있어 한국과 관계없는 국제분쟁도 자기 브랜드로 받을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을 연결하는 국제분쟁 로펌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KL파트너스에는 베이커맥켄지의 70여개 해외 사무소가 있다. 세계 각지의 고객을 서울로 연결하고 한국 기업의 해외 사건을 현지 사무소와 함께 가져올 수 있다. 2026년 새 한국 대표 선임 이후 합작법인도 해외 기업의 한국 투자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을 성장 방향으로 제시했다. 피터앤김은 자기 간판을 들고 세계로 나갔다. KL파트너스는 세계적인 간판과 손을 잡고 서울에서 세계를 연결한다. 국제중재 부티크 시장에서 두 펌의 승부는 이제 국내 순위로 가리기 어렵다. 어느 쪽이 더 많은 국경 밖 사건을 반복해서 수임하느냐가 다음 성적표가 된다.
2026-10-02 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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