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35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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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다던 약속, 우리는 지키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 12주기를 맞는 오늘, 다시 4월의 바다 앞에 선다. 진도 팽목항과 안산의 추모 공간에는 여전히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날을 기억하려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우리는 12년 전 그 비극 앞에서 무너졌고 다시는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당시 우리는 얼마나 깊이 아파했는가. 304명의 이름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이었다. 법적 구속력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였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약속을 무겁게 만든다. 크고 작은 안전사고와 인명 피해는 여전히 반복된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무뎌진다. 이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구조적 무감각의 징후다. 안전을 비용으로 여기고, 생명을 효율로 환산하는 인식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전은 이를 오래전에 경고했다. 『도덕경』은 “輕則失根, 躁則失君(경즉실근, 조즉실군)”이라 했다. 경솔하면 근본을 잃고 조급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뜻이다. 안전을 가볍게 여기고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린 사회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 세월호 참사는 그 ‘잃어버린 근본’이 무엇인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논어』 또한 말한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 공동의 안전과 책임보다 이익을 앞세울 때 그 대가는 결국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세월호는 단순한 해상 사고가 아니라 책임의 부재와 시스템의 붕괴, 그리고 생명을 대하는 왜곡된 인식이 빚어낸 사회적 참사였다. 우리는 그날 이후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질 때에만 살아 있다. 추모가 의례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또 다른 망각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태도다. 안전을 비용이 아닌 기본으로 인식하는 사회, 규정을 형식이 아닌 생명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작은 위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민 의식이 그것이다. 국가와 제도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가 ‘안전의 주체’가 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세월호의 아픔은 끝난 과거가 아니다. 유가족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고 진실을 향한 질문도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선택이다. 12년 전 우리는 약속했다. 잊지 않겠다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오히려 더 절실하다. 반복되는 사고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가. 기억은 책임이고 책임은 행동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더 이상 희생 위에서 배우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그날의 바다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다.
2026-04-16 11: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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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당국, 학생 폭력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교단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서서히가 아니라,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최근 또다시 학생이 교사를, 그것도 학교장실에서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충격을 넘어 참담함을 안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단 한 번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는 현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교육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교육 현장의 논쟁은 ‘교사의 체벌’에 집중돼 있었다. 과도한 체벌과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 속에 사회는 일정 부분 이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교사가 학생을 폭행했다는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학생이 교사를 때리고 모욕하며 위협하는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균형은 무너졌고, 교단의 권위는 사실상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 이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학생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시스템의 붕괴이며, 교육당국의 무능이 낳은 구조적 결과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재발 방지 대책’을 내세우지만, 현장은 달라진 것이 없다. 도대체 교육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사의 기본적인 교육권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행정이라면 그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서 공자는 “君君臣臣父父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라 했다. 각자의 자리가 바로 서야 질서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실에서는 이 기본 질서가 무너졌다. 교사는 지도자가 아니라 ‘민원 대상자’가 되었고, 학생은 배움의 주체를 넘어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역할이 전도된 공간에서 교육이 제대로 설 리 없다. 『도덕경』 역시 경고한다. “法令滋彰 盜賊多有”, 법과 규정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혼란이 커진다는 의미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규정은 넘쳐나지만, 정작 현장에서 작동하는 권한과 책임은 사라졌다. 교사는 학생을 제지할 실질적 수단이 없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만 떠안는다. 이런 구조에서 누가 교단에 서려 하겠는가. 이제는 분명히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교사의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교육은 무너진다. 권위는 억압이 아니라 질서의 기반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교권 보호를 선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질적 제도로 강화해야 한다. 교사에 대한 폭행과 협박에는 즉각적인 분리 조치와 강력한 법적 대응이 가능해야 한다. 교육청과 수사기관이 연계된 대응 체계를 구축해 교권 침해를 중대한 사안으로 다뤄야 한다. 문제 학생에 대한 분리 교육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반복적인 폭력이나 위협 행위를 보이는 학생은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해 상담과 교정을 병행해야 한다. 이는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학부모 책임 역시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처럼 학교가 모든 부담을 떠안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교권 침해 사안에 대해 학부모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하고, 필요한 경우 합당한 책임을 묻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아울러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 권한을 복원해야 한다. 모든 지도가 ‘아동학대’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에서는 어떤 교사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 명확한 기준과 보호 장치를 통해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당국의 태도다. 형식적인 대책을 넘어 책임 있는 결단과 실행이 필요하다.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대응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미봉책으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교실의 질서다. 교사가 두려움 속에서 수업을 하고, 학생이 이를 조롱하는 교실에서 미래를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지금의 현실은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사회 기초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신호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교단을 지키는 일은 곧 사회를 지키는 일이다. 교육당국이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 피해는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2026-04-15 14: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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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 '주가 폭락' 책임지는 시대 오나…상법 조항 9개월째 해석 논란
[경제일보] 개정 상법 한 줄이 기업 경영의 경계선을 흔들고 있다. “이사는 주주를 위하여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지난해 7월 바뀐 상법 382조의3이다. 문장은 짧지만, 이 조항이 실제 법정에서 효력을 가지는지에 따라 기업 지배구조와 소송 지형이 달라진다. 9개월이 지났지만 대법원 판단은 아직 없다. 13일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LKB평산에서 열린 금융법센터 심포지엄. 논쟁은 한 문장으로 압축됐다. 이 조항 하나로 소액주주가 이사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느냐였다. ‘회사’에서 ‘주주’로…70년 만의 축 이동 개정 전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한정했다. 이사가 회사에 손해를 끼쳤는지가 판단의 기준이었다. 개정 이후에는 ‘주주’가 명시되면서 방향이 달라졌다. 이사는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이 함께 들어왔다. 형식상 문구 추가에 그친 것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이사가 회사라는 법인만을 상대로 지던 의무가 투자자인 주주에게까지 닿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 회사법 체계에서 이사의 책임 범위를 한 단계 넓힌 변화로 읽힌다. 논쟁은 여기서 갈린다. 이 조항이 기존 원칙을 다시 적은 수준인지, 아니면 주주가 이사를 상대로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까지 포함하는지에 따라 법적 효과는 전혀 달라진다. 소송의 무기 되나…갈라진 주주충실의무 해석 법조계 해석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한쪽은 ‘확인적 개정설’이다. 이번 개정이 기존 법리를 다시 적은 수준에 그친다는 시각이다. 이 경우 책임 판단 기준은 여전히 상법 401조에 묶인다. 이사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입증돼야 손해배상이 가능하다. 책임을 묻기 위한 문턱이 높은 상태가 유지된다. 반대편은 ‘변경적 개정설’이다. 이사가 주주에게도 직접 의무를 부담한다고 본다. 이 해석을 따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주주는 경과실만으로도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이사회 결의 이전 단계에서 가처분으로 거래를 막는 시도도 가능해진다. 손해 산정 시점 역시 변론 종결까지 넓어질 수 있다. 결국 쟁점은 하나로 압축된다. 이사의 책임 문턱을 기존처럼 높게 둘 것인지, 아니면 주주 보호를 위해 낮출 것인지다. 현재 하급심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개정 조항만으로 독립적인 청구권이 바로 인정된다고 보지는 않는 흐름이다. 다만 이는 판례가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제한적 판단에 가깝다. 최종 방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숫자가 말한다…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주주충실의무 이 논쟁은 법리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 가치와 곧바로 연결된다. 경북대 로스쿨 이상훈 교수는 기업 가치를 따질 때의 기본 원리를 짚었다. 기업이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이 실제로 얼마나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지를 따져 현재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는 방식이다. 위험이 크다고 판단되면 미래의 돈은 더 크게 깎여 평가된다.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거나 주주 권리가 충분히 보호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투자자는 그만큼 위험을 높게 본다. 같은 이익을 내는 기업이라도 시장에서 받는 평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 흐름은 시장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2024년 말 기준 코스피 상장사 평균 PBR은 0.90배에 머물렀다. 기업이 장부에 쌓아둔 자산 가치보다도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같은 시기 미국 시장은 4.99배 수준이다. 한국 기업의 미래 가치에 대해 투자자들이 보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교수는 주주충실의무가 실제 경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투자자 신뢰가 개선되고, 기업 가치도 함께 올라갈 여지가 있다고 봤다. 유상증자·쪼개기 상장…실무에 들어온 질문 기업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판단 기준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유상증자만 봐도 그렇다. 과거에는 발행 가격이 적정한지만 따지면 됐다. 이제는 질문이 달라진다. 왜 주식을 새로 발행해야 했는지, 회사채 발행이나 자산 매각 등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지, 그 과정에서 특정 주주에게 불리한 결과가 발생하지는 않는지까지 함께 검토 대상이 된다. 자회사 분리 상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존에는 공모가 산정의 적정성이 핵심 쟁점이었다. 이제는 분리 과정에서 기존 주주의 가치가 훼손됐는지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떠오른다.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 거래에서도 변화는 이어진다. 이른바 M&A다. 공정성 의견서는 더 이상 ‘가격이 적정하다’는 확인에 머물기 어렵다. 해당 거래가 주주 전체의 가치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는지까지 설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경영판단 원칙과 충돌…재량 위축 우려 기업 측의 우려도 뚜렷하다.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절차를 거쳐 판단했다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이른바 ‘경영판단 원칙’이다. 법원이 사후적으로 기업의 선택을 다시 평가해 뒤집지 않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주주충실의무가 강화될 경우 이 기준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느냐다. 주주 가치라는 잣대가 별도로 작동하면, 같은 의사결정이라도 책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경영 재량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다. 법조계에서는 미국 델라웨어 법원이 적용하는 ‘전면적 공정성’ 기준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절차가 적법했는지뿐 아니라 거래 결과가 실제로 공정했는지까지 함께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현실의 장벽은 입증…자료는 회사 안에 있다 이론과 달리 소송의 문턱은 높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입증이다. 이사의 판단이 주주 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려면 이사회 논의 과정과 대안 검토, 외부 자문 내용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료는 대부분 회사 내부에 있다. 주주가 접근하기 쉽지 않다. 전 법무부 법무실장 구상엽 변호사는 형사 절차와의 연계를 하나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자료나 확정된 형사 판결을 민사 소송에 활용하면 입증 부담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는 취지다. 다만 제도적 기반은 아직 부족하다. 미국처럼 집단소송이나 징벌적 손해배상이 폭넓게 인정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추가 입법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주주충실의무가 실제 소송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답은 결국 판례가 쓴다 법 시행 9개월. 해석은 갈려 있고 기준은 정리되지 않았다. 결국 답은 판례가 쓴다. 이 조항이 선언에 머물지, 주주가 이사를 상대로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로 작동할지는 첫 대법원 판단에서 갈린다. 그 한 번의 판단으로 소액주주 소송의 문이 열릴 수도 있고, 기업 경영의 재량 범위가 다시 설정될 수도 있다. 상법 382조의3은 아직 진행형이다. 법전이 아니라 판례 속에서 완성될 조항이다.
2026-04-14 14: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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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正名)' 잃은 노란봉투법, 갈등의 불씨인가 상생의 토대인가
[경제일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입법 취지는 분명하다. 하청·비정규 노동자의 교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취지 못지않게 ‘작동 방식’이 중요하다. 최근 사기업 현장에서 하청노조와의 첫 분리교섭이 결정되면서, 법이 의도하지 않았던 혼란이 현실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 모두 “도대체 누구와 교섭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용자 개념의 확장과 교섭 구조의 불명확성에 있다. 원청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교섭 당사자로 지목될 경우, 법적 책임과 협상 의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는 곧 복수의 교섭 창구, 중첩된 책임, 끝나지 않는 협상의 가능성을 낳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예측 가능성이 크게 훼손되고, 노동조합 역시 협상의 상대가 분산되면서 실질적 성과를 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고 했다. 지금의 혼란은 바로 이 ‘정명(正名)’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누가 사용자이며, 누가 교섭 당사자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가 먼저 달려나가니, 현장은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법 적용의 경계가 지나치게 넓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개념은 해석의 여지가 크다. 이는 결국 개별 사업장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 자체로 법적 불확실성을 키운다. 『도덕경』은 “법이 많을수록 도적이 많아진다(法令滋彰 盜賊多有)”고 경고한다. 규제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혼란과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의 양이 아니라 법의 명확성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사용자 범위와 교섭 책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원청의 책임을 인정하되, 그 범위를 계약 구조와 지배력의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구분하는 정교한 기준이 필요하다. 둘째,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거나 최소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복수 교섭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조정하는 중립적 기구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셋째, 분쟁 해결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교섭이 곧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노동위원회 등 공적 조정기구의 전문성과 권한을 확대해, 초기 단계에서 갈등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기업과 노동계 모두 책임 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법의 빈틈을 이용해 극단으로 치닫는 전략은 결국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맹자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고 했다. 노동권 보호라는 명분이 지나치면 시장 질서를 해치고, 반대로 기업의 효율성만 강조하면 노동의 존엄이 훼손된다. 지금의 노란봉투법 논란은 이 균형의 문제를 다시 묻고 있다. 앞으로의 방향은 분명하다. 노동권 보호와 산업 경쟁력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설계해야 할 ‘이중의 목표’다. 법은 이상을 선언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입법 이후의 ‘정교한 보완’이 필수적이다. 시행령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해석의 폭을 줄이고, 이해당사자 간의 사회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축적해 나가야 한다. 결국 제도의 성패는 균형과 신뢰에 달려 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노란봉투법이 갈등의 불씨가 아니라 상생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은 분쟁을 키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단순한 상식 말이다.
2026-04-11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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