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66건
-
정의선, 모디 총리 만나 인도 투자 확대…7년간 155억달러 투입
[경제일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만나 향후 7년간 155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연구개발(R&D)과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고, 인도를 신흥국 수출의 핵심 거점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14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정의선 회장은 전날 인도 뉴델리 총리 관저에서 모디 총리와 개별 면담을 갖고 현지 사업 현황과 중장기 성장 전략을 설명했다. 양측은 인도 자동차 산업의 발전 방향과 미래 기술 협력 방안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현대차그룹은 푸네 공장 가동을 통해 연 140만대 생산체제를 확보했다"며 "안정적인 생산으로 인도 자동차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신흥국 수출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특히 인도를 그룹의 장기 성장 전략에서 핵심적인 시장으로 제시했다. 정 회장은 "인도는 현대차그룹의 미래 성장과 신흥국 시장 확대를 견인할 전략 국가"라며 "올해부터 7년간 약 155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투자에는 생산시설 확충을 비롯해 R&D 인프라 강화, 현지 부품 공급망 고도화, 미래 신기술 개발 등이 포함된다. 현대차그룹은 투자 과제를 통합 관리하고 신규 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현지 투자 전문 법인 설립도 추진한다. 현대차그룹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배경에는 인도 자동차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수출 거점으로서의 경쟁력이 있다. 인도는 약 14억7000만명의 인구를 보유한 세계 최대 인구 국가로,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자동차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9월 인도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7.1%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10월 발표한 전망에서 올해와 내년 성장률을 각각 7%로 제시했다. 자동차 수요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인도 전체 자동차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승용차 판매량은 지난해 457만대에서 올해 525만대로 약 15%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수입 완성차에 부과되는 관세가 70~110%에 달해 현지 생산시설 확보가 필수적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제조 원가와 중동·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에 대한 접근성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인도 생산을 확대하는 배경이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첸나이 현대차 1·2공장과 푸네 3공장, 아난타푸르 기아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푸네 공장 가동으로 그룹 전체 생산능력을 연간 140만대까지 확대하면서 내수 공급과 해외 수출을 병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판매 실적에서도 인도 내 주요 완성차 업체로 입지를 확보했다. 지난해 현대차는 57만1878대, 기아는 28만286대를 판매했다. 양사 합산 판매량은 85만2164대로, 시장 점유율 18.7%를 기록하며 현지 2위를 유지했다. 현대차그룹은 앞으로 생산 규모 확대와 함께 현지 시장에 특화한 차량 개발에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연구개발 시설을 확충하고 전문 인력을 확보해 인도 소비자의 주행 환경과 구매 수요에 적합한 상품을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미래 모빌리티 사업에서는 현지 기업과의 기술 협력을 강화한다. 인도 이륜차 제조업체 TVS 모터 컴퍼니와 공동 개발한 전기 삼륜차(i3W)는 시제품 제작을 마쳤으며, 2027년 말 상용화를 목표로 후속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영역도 완성차 제조·판매에서 자동차 금융과 전기차 충전 인프라, 폐차 재활용, 신규 모빌리티 서비스 등으로 넓힌다. 이를 위해 현지 스타트업과 유망 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 기회도 모색할 예정이다. 신설을 추진하는 투자 전문 법인은 그룹 차원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조율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연구개발과 신기술 확보에 필요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동시에 현지 협력사를 발굴하고 산업 정책 변화에 대응하는 기능도 맡는다.
2026-10-14 08:36:19
-
-
전기차 시장 커지는데…K배터리, 북미 의존 벗어나야
[경제일보] 세계 전기차 시장이 성장하는 사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해외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높이는 반면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은 시장 성장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수요 둔화보다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는 사업 전략에 있다. 북미와 고부가 제품에 집중해 온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가격 경쟁력과 고객 다변화를 중심으로 수주 전략을 재편해야 한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360.5GWh로 전년 동기 대비 23.7% 증가했다. 반면 국내 배터리 3사의 합산 점유율은 37.9%에서 26.8%로 11.1%포인트 하락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사용량은 5.8%, SK온은 14.4%, 삼성SDI는 32.0% 감소했다. 중국 업체들의 성장세는 국내 기업들과 대조적이다. CATL과 BYD의 배터리 사용량은 각각 43.3%, 66.5% 증가했고, 고션과 SVOLT 등 후발 업체들도 세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중국 기업들이 자국 시장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급을 확대하면서 국내 업체들의 경쟁 부담도 커지고 있다. 북미 전기차 수요 둔화만으로 국내 배터리 산업의 부진을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북미 시장에 집중된 사업 구조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국내 배터리 3사의 북미 사용량은 전년 동기 대비 46.5% 감소한 반면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각각 5.2%, 33.0% 증가했다. 미국 현지 공장과 완성차 업체와의 합작법인을 중심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해 온 만큼 주요 고객사의 전동화 계획 변경에 따른 부담이 크다. 신규 증설은 확정된 공급 물량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기존 공장의 가동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투자 계획을 재정비해야 한다. 제품 포트폴리오에서도 변화가 요구된다. 국내 기업들은 삼원계 배터리를 중심으로 고성능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중국 업체들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로 보급형 전기차 시장을 넓히고 있다. 국내 업체들이 LFP 생산에 뛰어들더라도 중국의 원가 경쟁력을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어렵다. 고부가 제품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면서 중저가 제품은 소재 조달과 제조 비용을 낮추고, 차급별 수익성을 고려해 공급 범위를 정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완성차 업체와의 계약 방식 역시 재정비 대상이다. 기존 대형 고객사의 장기 공급계약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전기차 판매 계획이 변경될 때 배터리 생산 물량까지 영향을 받는다. 신규 수주에서는 공급 규모뿐 아니라 최소 구매 물량과 생산설비 투자 부담, 가격 조정 조건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완성차 업체로 공급처를 확대하되 수익성이 낮은 계약을 무리하게 확보하는 방식은 경계해야 한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일시적인 판매 부진보다 경쟁 구도가 바뀌는 동안 기존 시장 지위를 잃는 상황이다. 중국 업체들이 해외 공급망을 넓히는 사이 국내 기업들이 기존 고객사의 수요 회복에만 기대서는 점유율을 되찾기 어렵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국내 기업의 성장을 보장하던 시기는 지났다. 과거의 투자 성과에 안주하기보다 달라진 경쟁 환경에 맞춰 사업 전략을 재편해야 한다.
2026-10-08 16:46:43
-
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워야 한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성장률 반등을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3.3%, 내년을 2.9%로 전망했다. 정부도 내년 국세수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와 세수가 동시에 개선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국가재정의 앞날을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7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증가한다. 역대 최대 규모다. 반면 정부는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올해 51.6%에서 내년 48.3%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GDP 대비 3.9%에서 0.1%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재정건전성 지표가 개선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내년 국세수입이 정부 예상대로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거나 대외 여건이 악화하면 세수 전망부터 달라질 수 있다. 경기 호황에 기대어 개선되는 재정과 제도적으로 건전성을 확보한 재정은 구분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과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생산성 둔화는 잠재성장률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높아졌다고 장기 성장능력까지 회복됐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연금과 의료·돌봄 등 고령화 관련 지출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가채무의 부담도 단순히 채무 총액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경제 규모에 비해 얼마나 빠르게 증가하는지, 세수로 이자를 감당할 능력이 충분한지, 국채 만기가 돌아왔을 때 어떤 금리로 차환해야 하는지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 과거 낮은 금리로 발행한 국채를 더 높은 금리로 차환하면 이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국채가 당장 높은 금리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만기 구조와 시장금리, 경제성장률에 따라 부담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재정에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견딜 여력이 있느냐다. 정치권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재정 확대를 요구한다.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재정을 활용해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경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필요한 역할이다.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지출도 무조건 낭비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경기 대응을 명분으로 시작한 사업이 효과 검증 없이 유지되거나, 선거를 앞두고 재원 마련 방안이 불분명한 공약이 경쟁적으로 쏟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재정지출의 필요성과 효과, 지속 가능성을 따지는 절차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밀려서는 안 된다. 국가재정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금은 국민이 부담하고 국채는 미래의 재정 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지출하는 돈이 생산성을 높이고 미래의 세수 기반을 넓힌다면 다음 세대에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 반대로 효과가 불분명한 지출을 빚으로 충당한다면 미래세대의 선택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따라서 국가채무를 무조건 줄이는 것만이 책임 있는 재정은 아니다. 빚을 내더라도 무엇에 쓰는지, 그 지출이 어떤 경제적·사회적 편익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재정준칙의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채무와 재정적자에 중장기 관리 기준을 두되 경기침체와 재난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외를 허용한다면 적용 조건과 기간, 정상적인 재정 운용으로 복귀할 계획까지 분명히 해야 한다. 재정준칙은 정부가 필요한 돈을 쓰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는 장치가 아니다. 평상시에 재정 여력을 확보해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약속이다. 지출 구조조정도 숫자를 맞추는 작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성과가 낮은 보조금과 중복 사업, 정책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관행적으로 유지되는 예산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반면 취약계층의 생계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까지 일률적으로 삭감해서는 안 된다. 지출의 성격과 효과를 구분하는 것이 재정개혁의 출발점이다. 절감한 재원은 미래 성장 기반을 넓히는 데 우선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바이오, 로봇, 우주항공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연구개발과 인재양성, 전력망과 산업 인프라에 장기간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연구와 공공 기반시설에 정부가 역할을 집중하고 사업화와 시장 경쟁은 기업의 창의성과 자본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미래산업 지원에도 성과 검증은 예외일 수 없다. 첨단산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모든 사업에 예산을 배정할 이유는 없다. 지원의 필요성과 민간투자 유발 효과, 중복 여부를 따져야 한다.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과 미래산업에 투자하는 일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지금은 오히려 재정개혁을 추진하기 좋은 시기다. 정부 전망대로 세수가 크게 늘고 재정수지가 개선된다면 그 성과의 일부를 중장기 재정위험을 줄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경기가 나쁠 때는 지출을 줄이기 어렵고, 경기가 좋을 때는 지출을 늘리자는 요구가 커진다. 이런 정치적 유혹을 제어하지 못하면 재정건전성은 경기의 부침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도 달라져야 한다. 국민에게 무엇을 더 지원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만큼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고 기존의 어떤 사업을 정비할 것인지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여야가 재정준칙과 중장기 지출 개혁을 놓고 책임 있게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재정은 오늘의 경제를 지탱하면서 내일의 성장 기반도 마련해야 한다.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관자>에는 “양입이출(量入而出)”,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지출한다는 뜻의 말이 전해진다. 국가재정을 가계부처럼 단순하게 운영할 수는 없지만, 재원의 한계를 고려하고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경제는 지금 반도체 호황이라는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특정 산업의 호황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세수가 늘 때 재정규율을 세우고, 성장의 과실을 미래 경쟁력과 재정 여력으로 연결해야 한다. 정치가 재정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다만 그 성과를 다음 선거의 득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경제적 기반으로 평가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재정의 책임은 돈을 얼마나 썼느냐가 아니라 그 지출이 무엇을 남겼느냐에서 드러난다.
2026-10-08 11:54:40
-
-
-
사퇴 한 달 김용범, 왜 다시 '국채'를 꺼냈나
[경제일보]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다시 경제정책의 화두를 던졌다. 이번에는 부동산도, 증시도 아니다. 국채다. 김 전 실장이 최근 쓴 ‘국채가 흔들리는 시대’의 출발점은 글로벌 금리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장기금리 상승을 단순한 인플레이션 후유증이 아니라 지난 15년간 이어졌던 저금리 체제의 변화로 봤다. 글만 놓고 보면 채권시장 분석이다. 그러나 작성 시점과 김 전 실장의 현재 위치를 함께 놓으면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김 전 실장은 지난 9월 1일 이재명 정부 초대 정책실장에서 물러났다. 정부 출범 후 15개월 만이었다. 한미 통상협상과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묶은 3대 메가프로젝트를 지휘했지만,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와 부동산·세제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책임론도 동시에 받았다. 퇴임 이후에도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이 있었는지 등을 규명해야 한다며 김 전 실장 등을 공수처에 고발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다만 현재까지 제기된 내용은 정치권의 의혹과 고발 단계다. 10월 1일 정무위가 채택한 증인 명단에는 김 전 실장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실장이 선택한 주제가 국채와 반도체, 그리고 미래대응기금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미래대응기금은 그의 정책실장 재임기를 상징하는 정책 가운데 하나다. 김 전 실장은 지난 7월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를 두고 “아주 의미 있는 규모의 돈이 모일 것”이라며 청년·미래·지역·교육에 활용하는 구상을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리에서 물러난 9월 1일 정부가 2027년도 예산안을 발표하며 162조3000억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정책실장 임기는 끝났지만 그가 밀었던 정책은 오히려 제도화 단계에 들어간 셈이다. 이번 글에서 김 전 실장이 “정부에서 일하며 호황기 세수가 가진 중력을 여러 번 봤다”고 회고한 대목도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세수가 늘면 중앙부처와 지방정부, 교육청마다 쓸 이유가 생기고, 한 번 늘어난 지출은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가 미래대응기금을 설명하면서 ‘의지만으로는 이 중력을 이기기 어렵다. 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숫자는 그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올해 국세수입을 478조6000억원으로 다시 추산했다. 추경예산보다 63조2000억원 많다. 반도체 호황과 특별배당, 증시 활성화 등이 주요 원인이다. 9월 수출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월보다 263% 증가했다. 한국 경제가 말 그대로 반도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 전 실장이 이번 글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도 현재의 고금리 자체보다는 반도체 호황이 끝났을 때의 한국 경제다. 지금은 반도체 수출과 기업이익이 성장과 세수, 외환수급을 동시에 받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이 꺾이면 상황은 반대로 움직일 수 있다. 성장과 세수가 둔화되고 무역흑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글로벌 장기금리마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한국 경제가 쓸 수 있는 완충재는 줄어든다. ◇ 왜 지금 ‘국채’인가 글의 또 다른 축은 세계 금융시장의 변화다. 최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5%를 넘어 2000년대 초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미국 고용이 둔화하면서 연방준비제도의 추가 금리 인상 기대가 낮아졌지만 장기금리는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과거라면 경기 둔화 조짐이 나타났을 때 국채 금리는 먼저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적자로 국채 공급이 늘고 있는 데다 AI 투자 붐까지 자본시장 수요를 키우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는 데이터센터와 GPU, 전력 인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규모의 돈을 쓰고 있다. 올해 들어 AI 관련 기업들이 채권시장에서 조달하는 금액도 빠르게 증가했다. 정부와 기업이 동시에 돈을 필요로 하는 구조다. 일본도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는 최근 3%를 기록해 약 30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장기간 해외에 투자됐던 일본계 자금의 움직임도 달라질 수 있다. 프랑스의 변화는 더 직접적이다. 재정 우려가 커지면서 독일 국채와의 금리차가 확대됐고, 국가 신용위험을 나타내는 CDS도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여기에 중동 정세 불안으로 국제유가까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김 전 실장이 재정, AI 투자, 인플레이션, 지정학이라는 네 가지 요인을 국채 금리 상승 원인으로 나눈 배경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2010년대의 초저금리가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시장 분석인가, 정책 유산에 대한 설명인가 이번 글에는 개인적인 회고가 이례적으로 많이 들어 있다. 김 전 실장은 재임 당시에도 SNS에 장문의 경제정책 글을 꾸준히 올렸다. 정책실장이 직접 증시와 부동산, 산업정책을 설명하면서 시장이 그의 표현 하나하나에 반응하기도 했다. 이번 글도 그 연장선에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의 글이었다면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난 정책 설계자의 글이다. 그래서 “좋을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장 전망인 동시에 자신의 정책 선택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힌다. 특히 미래대응기금이 그렇다. 정부는 내년 기금에 162조3000억원을 적립해 청년과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 등 4개 분야에 45조4000억원을 쓰고 나머지는 국채 발행 축소와 여유자금으로 운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제도가 출범하기도 전에 논쟁은 시작됐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추가·초과 세수를 기금에 적립한 뒤 필요할 경우 일반회계로 전출하는 구조에 대해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국회의 예산 심의권이 약화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지방교부세가 줄어들 수 있다며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있다. 김 전 실장이 글에서 “기금의 입법도 중요하지만 꺼내 쓰는 원칙을 엄격하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은 오히려 이런 논란을 의식한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기금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용범의 진단, 어디까지 맞을까 큰 방향에서는 최근 금융시장이 그의 진단과 상당 부분 겹친다. 글로벌 국채금리가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전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이미 뚜렷하다. 정부 부채 증가와 AI 투자에 따른 자금 수요가 장기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한국에 반도체라는 강력한 완충재가 있다는 분석 역시 현재 숫자만 보면 설득력이 있다. 올해 세수 증가와 기록적인 수출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한국 경제의 위험이기도 하다. 반도체가 잘될수록 성장률도 높아지고 세수도 늘어난다. 정부의 정책 여력도 커진다. 반대로 반도체가 흔들리면 그 효과가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금 미래대응기금을 둘러싼 논쟁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호황으로 생긴 돈을 지금 쓸 것인가. 다음 불황을 위해 남길 것인가. 아니면 AI와 인재, 새로운 산업에 투자해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인가. 김 전 실장은 세 번째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다만 그 답이 미래대응기금 하나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 통제, 지방재정과의 관계, 투자 사업의 선정 기준, 기금에서 돈을 꺼낼 수 있는 조건을 얼마나 엄격하게 정하느냐가 남았다. 기금이 미래 투자를 위한 완충장치가 될 수도 있고, 또 하나의 거대한 지출 통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용범은 정책실장에서 물러났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둘러싼 논란도 아직 정치권에서 끝나지 않았다. 현재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새로운 공직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시장과 정책에 대해 긴 글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글 안에서는 분명해 보인다. 자신이 정부 안에서 보았던 호황기의 재정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자신이 추진했던 미래대응기금이 왜 필요했는지를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적 복귀 신호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현재로서는 정책실장에서 경제정책 논객으로 위치가 바뀌는 과정에 가깝다. 한 달 전까지 정책을 만들던 사람이 이제 그 정책이 필요한 이유를 밖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시장은 그의 글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채금리는 오르고 있고, AI 투자는 더 많은 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에 전례 없는 호황을 가져왔다. 미래대응기금의 규모도 당초 예상보다 커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래서 앞으로 볼 대목은 김용범 개인보다 정책이다. 반도체 호황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더 많은 의무지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신산업과 인재, 재정의 완충력이 남을 것인가. 한편 김 전 실장이 던진 ‘국채가 흔들리는 시대’라는 문제의식의 끝에는 결국 이 질문이 있다. 좋을 때 번 돈을 어떻게 쓰는가. 호황이 끝난 뒤 국가의 실력은 거기서 드러난다.
2026-10-03 22:11:15
-
-
3.5% 성장에 가려진 숙제, '반도체 다음'을 준비할 때다
[경제일보] 한국 경제가 모처럼 좋은 숫자를 받아들었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5%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3월 전망보다 1.5%포인트 높였다. 수년간 1~2%대 성장에 익숙해진 우리 경제로서는 반가운 변화다. 오늘 아침 나온 수출 성적표는 더 화려하다. 9월 수출은 1209억4000만 달러로 사상 처음 월 1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월 누적 수출도 8145억 달러로 지난해 연간 실적을 이미 웃돌았다. 무역수지는 498억5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처음 6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62.8% 늘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고 수출 물량과 가격이 함께 뛰면서 한국 경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좋은 성적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몇 안 되는 확실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이 커지면 소재·부품·장비 기업으로 주문이 이어지고 설비투자가 늘어난다. 수출과 경상수지가 좋아지고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 반도체 호황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다음이다. 예정처가 내다본 내년 성장률은 2.7%다. 올해보다 0.8%포인트 낮다. 2026~2030년 연평균 성장률 역시 2.7%로 전망했다. 올해 잠재성장률은 2.2%, 앞으로 5년 평균은 2.3% 수준이다. 내년 2.7% 성장을 경기침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정처는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설비투자와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도 회복할 것으로 봤다. 성장률도 잠재성장률을 웃돈다. 올해의 높은 성장세가 내년에는 다소 정상화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데도 3.5%와 2.7% 사이에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올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가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9월만 놓고 보면 전체 수출 1209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가 603억 달러다. 거의 절반이다. 특정 월의 이례적으로 높은 비중을 우리 수출의 평상시 구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도체 경기가 전체 수출과 성장률을 크게 좌우하는 현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예정처도 반도체 쏠림을 별도의 위험 요인으로 짚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늘어난 기업이익과 국민소득이 다른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가계소득으로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혜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수출에도 자영업자나 일부 중소기업이 경기 회복을 선뜻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자동화 수준이 높다. 과거 제조업 호황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대규모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와는 거리가 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늘어나는 속도와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속도에도 차이가 생긴다. 더 근본적인 숫자는 잠재성장률이다. 한 해 성장률은 경기와 수출 여건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물가 불안을 키우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에 가깝다. 예정처가 내다본 향후 5년 평균은 2.3%다. AI 투자와 생산성 향상으로 자본과 생산성의 기여는 커지지만 인구 감소 탓에 노동의 성장 기여는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저출생·고령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비스업의 낮은 생산성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아니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저절로 없애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반도체의 힘과 한계를 함께 경험했다. 메모리 가격이 오르면 수출과 설비투자, 세수가 한꺼번에 좋아졌다. 사이클이 돌아서면 세 지표가 동시에 흔들렸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을 가진 것은 한국 경제의 큰 자산이다. 그렇다고 나라 경제 전체를 한 산업의 경기 사이클에 오래 맡겨둘 수는 없다. 지금의 호황은 AI 투자 붐과도 맞물려 있다. 예정처는 미국 장기금리 상승에 따른 AI 투자 둔화 가능성과 미국의 관세정책, 중국과의 경쟁 심화를 향후 성장경로의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지금의 호황을 흔들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반도체 호황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가 벌어준 시간과 돈을 다음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불황보다 호황기에 하기 쉽다. 경기가 꺾이면 기업은 투자 여력을 잃고 정부의 세수도 줄어든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 수출과 기업이익, 세수가 함께 좋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손대기 어려웠던 숙제를 풀 기회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부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중국, 대만, 일본, 유럽까지 국가 차원의 반도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력망과 용수, 연구개발,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인프라의 영역이다. 동시에 산업정책의 시선을 그 너머로 넓혀야 한다. AI 서비스와 바이오, 로봇, 방산, 에너지, 콘텐츠 등에서 반도체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과 직업교육을 산업 수요에 맞게 바꾸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반도체에서 생긴 자본과 기술, 인재가 다른 산업으로 흘러갈 통로가 넓어져야 반도체 기업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의 호황으로 이어진다. <관자(管子)>에는 “일년지계 막여수곡, 십년지계 막여수목, 종신지계 막여수인(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면 곡식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을 내다보면 사람을 키우라는 뜻이다. 경제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더 짓는 일은 몇 년 뒤 수출을 늘릴 수 있다. 사람을 키우고 대학과 노동시장을 바꾸며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10년 뒤 나라의 성장률을 바꾼다. 9월 수출 1209억 달러와 반도체 603억 달러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다. 기록은 기록대로 평가해야 한다. 다만 그 숫자가 한국 경제의 오래된 숙제까지 해결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올해 3.5%와 내년 2.7% 사이에서 읽어야 할 것도 성장률의 단순한 오르내림이 아니다. 반도체가 밀어준 성장의 힘을 다른 산업과 가계, 다음 세대의 성장으로 얼마나 옮겨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호황은 언젠가 끝난다. 사이클도 다시 돈다. 좋은 시절에 할 일은 축배를 오래 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겨울을 견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반도체가 벌어준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다음 호황에도 또 반도체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번 호황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26-10-01 13:47:00
-
'뉴노멀 5% 금리'의 경고, 아직도 저금리의 망령에 취해 있나
[경제일보] 돈의 시대가 바뀌었다. 공짜에 가깝던 돈이 사라지고 돈의 가격이 정상화되고 있다. 미국 장기 국채금리가 5% 안팎을 오르내리는 고금리 환경이 새로운 질서로 굳어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경제와 정치권은 여전히 저금리 시대의 낡은 사고에 갇혀 있다. 빚을 내 버티고, 재정을 풀어 경기를 떠받치며, 금리가 다시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는 안이한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이제 ‘저금리의 망령’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 경제가 누린 초저금리는 값비싼 착시를 만들었다. 가계는 빚을 늘려 집을 샀고, 기업은 싼 자금에 의존했으며,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를 성장의 만능 처방처럼 활용했다. 그 결과 가계부채는 경제의 뇌관이 됐고, 한계기업과 자영업자의 부실 위험은 커졌다. 금리가 오르자 감춰졌던 경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저금리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뒤로 미뤄놓았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국가재정이다. 고금리 시대에 빚을 늘리는 것은 저금리 때보다 훨씬 위험하다. 국채 이자가 불어나면 미래의 재정 여력이 그만큼 줄어든다. 복지와 연구개발, 산업투자에 쓸 돈이 이자 상환으로 빠져나가고, 정부가 시장의 자금을 과도하게 흡수하면 민간의 투자와 자금 조달을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도 커진다. 국가채무가 늘어날수록 미래세대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런 냉혹한 산수를 외면하고 있다. 선거와 민심을 앞세워 현금성 지원과 각종 사업을 쏟아내고, 재정 확대를 경제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국민에게 지금 돈을 나눠주는 것은 쉽지만 그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미래에 갚아야 한다. 재정에는 공짜가 없다. 세금을 더 걷거나, 국채를 더 발행하거나, 미래의 지출을 포기해야 한다. 이를 외면한 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책임정치가 아니라 미래세대에 대한 청구서 떠넘기기다. 정부와 국회는 이제 재정의 브레이크부터 점검해야 한다. 법적 구속력을 갖춘 재정준칙을 서둘러 마련하고, 의무지출을 포함한 재정사업 전반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효과가 불분명한 보조금과 중복사업,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사업부터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재정은 인기 경쟁을 위한 지갑이 아니라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비축해야 할 최후의 안전판이다. 경제의 체질도 바꿔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돈을 풀어 연명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규제를 걷어내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며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경쟁력을 잃은 기업을 무조건 연명시키는 정책 역시 재검토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미루면 부실의 규모만 커질 뿐이다. 가계부채 역시 ‘연착륙’이라는 말만 반복해서는 안 된다.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차주에 대한 선별적 지원과 함께 대출 규율을 강화하고 금융회사의 건전성 관리도 한층 엄격하게 해야 한다. 부실이 터진 뒤 국민 세금으로 수습하는 방식은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 된다. 5% 금리의 시대에는 1% 금리 시대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빚으로 성장률을 떠받치고 재정으로 민생을 포장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해야 할 말은 ‘더 드리겠다’가 아니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빚은 만들지 않겠다’여야 한다. 고금리는 우리 경제의 약점을 드러내는 냉혹한 청구서다. 이를 외면하면 국가채무와 가계부채, 기업부실이 한꺼번에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달콤한 재정 살포도, 금리 인하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재정의 군살을 도려내고 국가채무의 증가 속도를 낮추며, 생산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뼈 를 깎는 구조개혁이다. 정치권은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과 결별하고 정부는 인기 없는 개혁이라도 밀어붙여야 한다. 그것이 지금 세대가 미래세대에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2026-09-30 11:41:31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