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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에 취한 정부, 민생은 무너진다
[경제일보] 반도체가 잘나간다고 한국 경제까지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수출은 늘고 기업 실적은 뛰는데 일자리가 부족하고 소비가 얼어붙었다면 무슨 소용인가. 반도체 실적에 환호하는 동안 청년은 취업 문턱에서 좌절하고, 자영업자는 생존을 걱정한다. 수출의 온기와 민생의 한파가 따로 논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기둥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집약도가 높은 산업의 호황이 대규모 고용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가 확산할수록 생산성과 일자리가 함께 늘 것이라는 기대도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에 더 많은 지원을 쏟는 것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해결할 수는 없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부가가치를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성장축이 필요하다. 답은 서비스산업에 있다. 콘텐츠와 관광, 뷰티, 금융, 물류는 기술과 창의성을 결합해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분야다. K-콘텐츠와 K-뷰티가 이미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국내 기업은 낡은 규제와 부처 간 칸막이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용을 떠받치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내수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제조업만으로 성장과 고용을 모두 해결하겠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 장기 표류가 이를 상징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개인정보 보호는 지켜야 하지만 이를 이유로 혁신의 문을 닫아걸 수는 없다. 공공성이 중요한 분야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관광·콘텐츠·물류 등은 불합리한 규제와 중복 인허가부터 정비해야 한다. 규제를 무조건 풀자는 것이 아니라 지킬 원칙과 고칠 규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여야가 이해집단의 눈치만 보며 입법을 미루는 동안 기업은 투자를 늦추고 청년은 기회를 잃는다. 정부 지원도 달라져야 한다. 중소 서비스기업의 AI 도입과 인력 재교육을 돕되, 장비 구매나 일회성 보조금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업무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 매출 증가 등 생산성 개선으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콘텐츠·뷰티·관광 기업에는 지식재산권 보호와 해외 유통망, 금융·마케팅 지원을 연결하고, 직업훈련은 수료 인원이 아니라 실제 취업과 임금 상승으로 평가해야 한다. 예산 집행 실적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가 정책의 성적표여야 한다. 서비스산업 혁신은 제조업을 희생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반도체 기술을 서비스와 연결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수출의 성과가 투자와 소비, 고용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이다. 제조업의 기술이 서비스 혁신을 이끌고 서비스기업의 창의성이 다시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특정 산업의 호황에 경제 전체가 매달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제의 성적표는 주가나 수출액만으로 매길 수 없다. 청년이 일자리를 얻었는지, 중소기업이 성장했는지, 가계의 소득과 소비가 나아졌는지를 봐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이 좋아졌다고 경제정책까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수출 통계 뒤에 숨어 민생의 부진을 외면하는 것은 경제운용이 아니라 책임 회피다. 반도체 호황은 정부의 공이 아니라 산업이 만든 기회다. 정부가 이 기회에 취해 서비스산업 개혁을 미룬다면 오늘의 수출을 자랑하는 대가로 내일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 반도체 성과를 자랑하기 전에 민생부터 살려라. 정부의 성적표는 수출액이 아니라 국민의 일자리와 소득으로 매겨야 한다.
2026-10-15 17: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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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기다리는 시간도 규제다
[경제일보] 정부가 규제와 인허가에 발이 묶인 7조9000억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앞당기기로 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전기차 생산라인 전환을 비롯해 청정수소, 이차전지, 첨단센서 등 현장에서 대기 중인 투자 프로젝트의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이 골자다.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따로 발주하던 전기·통신공사의 통합발주도 허용하기로 했다. 방향은 옳다. 정부가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산업정책은 이미 투자할 의사가 있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일이다. 이번 대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현대차 울산공장이다. 현대차는 약 4조원을 들여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을 자율주행 전기차 중심 공장으로 재건축할 계획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사업계획 심의와 환경·교통·재해 영향평가, 건축·안전 관련 인허가 등을 거치면 행정절차에 3년 이상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와 울산시는 전담 프로젝트매니저(PM)를 두고 각종 영향평가와 인허가를 동시에 진행해 이를 1년 이내로 줄이겠다고 했다. 여기서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필요한 심사를 생략하지 않고도 1년 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과 안전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장을 빨리 짓겠다고 환경영향평가를 없애거나 산업안전 기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 주민의 재산권과 생활환경도 보호해야 한다. 이번 대책 역시 관련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고 사전 컨설팅을 통해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없애야 할 것은 안전장치가 아니라 행정의 군더더기다. 부처와 기관마다 비슷한 자료를 요구하고 앞 단계의 절차가 끝나야 다음 심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다면 이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다. 행정기관끼리 협의할 일을 기업이 서류를 들고 돌아다니며 해결하도록 하는 것도 정상적인 행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규제의 비용은 행정수수료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업에는 시간이 곧 비용이다. 특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바이오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산업에서는 그렇다. 경쟁국 기업이 공장을 짓고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동안 국내 기업이 인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1~2년의 차이가 시장점유율을 바꿀 수 있다.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경쟁력의 문제가 된다. 세계 각국이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은 반도체와 AI, 배터리 등 전략산업을 자국에 끌어들이기 위해 보조금과 세제지원, 산업 인프라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한국은 애국심 때문에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인건비와 세금, 인재, 시장 접근성, 규제 그리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따져 투자처를 정한다. 한국이 경쟁해야 할 것도 결국 이런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규제개혁의 성적표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역대 정부는 출범할 때마다 규제혁신을 내걸었다. 폐지하거나 개선한 규제의 숫자를 성과로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에는 규제 몇 건을 없앴느냐보다 투자 결정에서 공장 가동까지 몇 달이 걸리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규제개혁의 성적표를 ‘폐지 건수’보다 ‘줄어든 투자 대기시간’으로 매겨보자는 것이다. 오래된 규제를 정기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장치도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환경, 공정한 시장질서를 지키는 규제는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 반면 기술과 산업구조가 바뀌었는데 과거의 이해관계나 행정편의 때문에 남아 있는 규제라면 존치 이유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기업에 규제 철폐의 필요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부도 그 규제를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첨단산업의 기반시설은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기업이 지을 수 있지만 송전망과 용수망까지 기업 혼자 해결하기는 어렵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없다면 들어설 수 없다. 산업용지와 전력·용수·통신망, 연구개발 기반과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곳에서 더 커져야 한다. 노동시장도 달라진 산업환경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제조업과 연구개발, 정보기술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 모두 다른 만큼 노사 합의를 전제로 업종과 업무 특성에 맞는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히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생산성과 직무의 가치를 보다 잘 반영하는 임금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다만 노동 유연화가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오래가기 어렵다. 기업의 인력 운용에 선택지를 넓혀준다면 실직과 전직 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할 고용안전망과 재교육 체계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유연성과 보호를 서로 반대편에 세워놓고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는 개혁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세제에서는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전략기술과 연구개발에 대한 세액공제는 기업의 장기 투자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지원 규모 못지않게 제도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도 중요하다.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이라면 몇 년 뒤 투자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어떤 기업과 기술이 성공할지를 대신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장과 기업가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운동장을 만들고 민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기반시설과 기초 연구개발을 책임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보다 ‘기업이 뛰기 좋은 정부’가 필요한 이유다. 규제완화의 목적도 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업 투자가 늘고 생산성이 높아져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업이 거둔 성과가 임금과 가계소득, 소비로 이어질 때 규제개혁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기업 활력과 민생은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규제개혁에도 적용할 만한 원칙이다. 힘 있는 대기업이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예외를 만들어주는 것이 규제개혁이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같은 기준 아래 필요한 행정서비스를 예측 가능한 시간 안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7조9000억원 투자지원 대책은 그런 의미에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 현장의 애로를 찾아 규제와 행정절차를 손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이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여러 행정절차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면 다른 공장에서는 왜 안 되는가. 반도체 팹에서 불필요한 공정 지연을 줄일 수 있다면 다른 첨단산업에도 비슷한 규제가 남아 있지는 않은가. 기업이 정부에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행정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규제는 필요한 곳에서는 단단해야 하고 필요 없는 곳에서는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 안전과 환경, 시장의 공정성을 지키는 기준은 낮춰서는 안 된다. 대신 투자와 혁신을 가로막으면서도 정책 목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절차는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남겨둘 필요가 없다. 기업에 투자하라고 주문하기 전에 기업이 투자하기 어렵게 만든 정부 자신의 절차부터 살펴야 한다. 한국 경제에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거창한 성장 구호가 아니다. 투자할 기업이 제때 공장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며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규제개혁의 성패는 없앤 규제의 숫자가 아니라 앞당겨진 투자와 높아진 생산성, 새로 생긴 일자리로 평가받아야 한다. 7조9000억원의 현장대기 투자를 움직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행정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의 속도를 정부의 절차가 늦추는 일부터 없애야 한다.
2026-10-02 11: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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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58년 만의 파업, '회사가 버틸 수 있는 합의' 찾아야
[경제일보] 포스코의 ‘58년 무분규’ 기록이 끝났다. 지난 9일 창사 이후 처음으로 생산현장에서 부분파업이 벌어진 데 이어 16일 오전 7시부터는 닷새간 120시간의 2차 부분파업에 들어갔다. 15일 노사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기본급과 성과보상을 둘러싼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회사는 대체인력을 투입해 현재 생산에는 차질이 없다고 밝혔다. 파업의 역사성이 눈길을 끌지만 더 무거운 질문은 따로 있다. “앞으로도 충분히 벌고, 투자하고, 고용할 수 있는 회사로 남을 것인가.” 지난 교섭에서 노조는 기본급 7.1% 인상과 격려금 600%, 우리사주 50주, 명절상여금 200%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기본급 2% 인상, 목표달성 격려금 350만원, 지역사랑상품권 50만원 등을 제시했다. 회사 측은 노조 요구안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큰 재무 부담이 생긴다고 주장하고 있고, 노조는 요구안은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는데 사측이 부담만 지나치게 부각한다고 맞서고 있다. 임금뿐 아니라 현장 인력과 안전, 근무환경에 대한 불만도 쟁점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과를 나누자고 요구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쇳물은 고로가 만들지만 좋은 철강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포항과 광양제철소를 세계적인 생산기지로 키운 데에는 설비와 기술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숙련 노동자의 몫이 있다. 실적이 좋아졌다면 노동자가 그 과실을 공유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올해 2분기 포스코홀딩스의 연결 영업이익은 8190억~82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가량 증가했다. 노동자들이 “회사가 벌었는데 왜 우리의 몫은 작냐”고 묻는 배경을 이해할 만하다. 다만 숫자를 한 꺼풀 벗겨보면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포스코 철강사업 자체의 2분기 영업이익은 2740억원이었다. 전분기보다는 28.6% 늘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46.6% 줄었다. 그룹 전체 이익 증가는 이차전지소재의 흑자전환과 에너지·인프라 사업의 호조가 상당 부분 떠받쳤다. ‘포스코그룹이 돈을 잘 번다’는 말과 ‘국내 철강사업의 체력이 충분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바깥 환경은 더 거칠다. OECD는 올해 세계 철강산업의 과잉 생산능력이 2025년 6억4000만톤에서 2028년 7억4500만톤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철강수요 증가율은 2030년까지 연평균 0.9%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중국 철강업체들은 내수 부진 속에서 2025년 사상 최대인 1억3100만톤을 해외시장에 내보냈다. 2020년보다 153% 늘어난 규모다. 싸고 많은 철강이 세계시장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철강은 여기에 탈탄소라는 두 번째 파도를 동시에 넘어야 한다. 포스코는 최근 광양제철소에 국내 최대 규모의 전기로를 완공했고, 포항에는 2028년 준공을 목표로 연산 30만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하이렉스(HyREX) 실증설비를 추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상용화 기술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국내 탄소감축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미룰 수 없는 투자다. 결국 지금의 임금협상은 몇 퍼센트를 올릴 것인가만의 싸움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와 미래의 경쟁력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동시에 협상해야 한다. 여기에는 구분이 필요하다. 좋은 실적으로 생긴 성과는 성과급과 일회성 보상을 통해 노동자와 충분히 나눌 수 있다. 회사가 잘 벌었는데 “산업이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며 노동자의 몫을 지나치게 줄이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 반면 기본급처럼 한번 올라가면 경기가 꺾여도 계속 지급해야 하는 고정비는 다르게 봐야 한다. 철강처럼 경기에 민감한 산업에서 호황기의 이익을 기준으로 고정비를 계속 높이면 불황이 왔을 때 결국 구조조정 압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성과는 나누되 고정비는 회사가 불황에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회사도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경쟁력이라는 말을 노동자에게 임금 양보를 요구하는 편리한 명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비용 절감이 필요하다면 경영진과 조직부터 효율성을 증명해야 하고, 노동자가 양보한 몫이 정말 탈탄소 설비와 고부가가치 강재, 안전과 자동화에 투자되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에게 산업전환의 비용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 AI와 로봇이 확대되면 제철소의 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줄어드는 직무가 생기고 새로운 직무도 나타날 것이다. 회사가 자동화를 추진하면서 노동자에게 고용불안만 남긴다면 기술혁신은 노사 갈등을 키울 뿐이다. 임금협상 테이블에 그래서 직무전환과 재교육, 숙련인력 재배치, 신규기술 교육, 안전투자까지 올라와야 한다. 노조도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기존 직무와 인력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고용안정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일자리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세계 철강업체가 저탄소 생산과 자동화로 원가를 낮추는데 한국 공장만 변화하지 못하면 기업은 국내 생산을 줄이거나 해외 투자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작업 방식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회사다. ‘주역’ 계사하전에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이 있다. 상황이 다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길이 열리며, 그래야 오래간다는 의미다. 지금 한국 철강산업에 이보다 잘 맞는 말도 드물다. 중국의 과잉생산과 보호무역, 탈탄소 전환은 과거의 경영 방식과 노사관계로 버티기 어려운 변화를 만들고 있다. 회사만 변할 수도 없고 노동자에게만 변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파업을 ‘노조의 무리한 요구’ 또는 ‘회사의 임금 억제’라는 단순한 구도로 볼 수 없다. 노사 모두 자신들의 계산서에는 근거가 있다. 노동자는 지난 성과와 숙련의 몫을 묻는다. 회사는 철강사업의 수익성과 앞으로 들어갈 막대한 투자비를 걱정한다. 둘 가운데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가져가느냐’의 협상에서 ‘회사를 어떻게 오래 가게 할 것이냐’의 협상으로 테이블을 넓히는 일이다. 기본급은 물가와 생산성, 철강사업의 지속 가능한 수익성을 기준으로 조정하고, 초과이익은 성과급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대신 노사는 탈탄소·자동화 투자와 연결된 고용·직무전환 계획을 함께 만들 필요가 있다. 경영성과가 좋아지면 노동자의 몫도 커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 성과가 다시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회사에도 이익이고 노동자에게도 더 오래가는 안전망이다. 포스코의 58년 무분규가 깨진 것 자체를 실패라고 할 필요는 없다. 노조의 파업권은 법이 보장한 권리이고, 갈등을 드러내는 것 또한 노사관계의 한 과정이다. 진짜 실패는 산업의 구조가 바뀌는데도 노사가 과거 방식의 협상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데 있다. 포스코가 지금 지켜야 할 것은 ‘무분규 58년’이라는 기록이 아니다. 노동자에게는 성과를 공정하게 돌려주고, 회사에는 다음 불황과 산업전환을 견딜 체력을 남기는 합의다. 좋은 임금협상은 어느 한쪽이 많이 얻는 합의가 아니다. 노동자도 버틸 수 있고 회사도 버틸 수 있어 다음 협상 때도 함께 앉을 수 있는 합의다. 창사 58년 만의 첫 파업 뒤 포스코 노사가 찾아야 할 답도 결국 거기에 있다.
2026-09-16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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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도입했다고 생산성 오르지 않는다"…정재헌 SKT CEO가 말한 'AX의 J커브'
[경제일보] SK텔레콤이 인공지능(AI) 전환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독자 AI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AX 시대의 일하는 방식'과 미래 인재상을 제시했다. 정재헌 SK텔레콤 CEO는 AI를 도입한다고 곧바로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초기의 불편함을 견디고 업무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생산성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2일 SK텔레콤에 따르면 정재헌 CEO는 전날 서울대학교 제1공학관에서 대학생·대학원생 약 300명을 대상으로 'AI 시대의 선택과 기회'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이번 강연은 SK텔레콤과 서울대가 10년째 운영하는 AI 공동과정의 첫 수업으로, 지난 1987년 서울대 공법학과에 입학한 정 CEO가 약 40년 만에 모교 강단에 선 자리로 알려졌다. 정 CEO가 이날 제시한 핵심 개념은 'AX의 J커브'다. AI 전환(AX) 초기에는 재교육과 업무 재설계, 데이터·조직 정비 등으로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이른바 '불편함의 골짜기'를 넘어선 조직은 어느 순간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AX 전환을 위해 낯설게 보기, 극한 마주하기, 불편해지기 등 세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다. 기존 업무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AI를 전제로 업무를 다시 설계하는 동시에 기존 방식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에 도전하고 AI 도입 초기의 시행착오를 견뎌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SK텔레콤 내부 사례도 소개했다. 한 개발자가 고객 요청에 따른 시스템 수정 업무를 기존 방식으로 약 50시간에 걸쳐 처리했지만, 이를 AI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500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AI 에이전트를 새로 만들고 수정하며 수백 차례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전환 작업이 완료된 이후 같은 업무에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으로 감소했다. 정 CEO가 강조한 '극한 마주하기'에는 독자 AI 모델 개발 경험도 포함됐다. SK텔레콤은 제한된 GPU 환경에서도 6880억 파라미터 규모의 초거대 AI 모델 'A.X K2'를 개발했다. A.X K2는 지난 7월 오픈웨이트 모델로 공개됐으며, 최근 공개된 기술보고서에서는 6880억 파라미터 규모의 전문가 혼합(MoE) 모델로 소개됐다. 특히 AI가 기업을 넘어 국가 간 경쟁으로 확산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AI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정 CEO는 AI 시대에도 인간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AI가 코딩 등 기술적인 업무를 점점 더 잘 수행할수록 사람에게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이해하고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능력이 중요해진다는 설명이다. 특히 그는 AI 시대 인재에게 필요한 역량으로 '생각 근육', '적응 근육', '공감 근육', '신체 지능'을 제시했다. 본질을 파악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정재헌 CEO는 "AI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 같은 시대지만 그렇지 않다"며 "주도성을 가지고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통찰력과 공감 능력이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치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끝까지 사람의 몫일 것"이라며 "10년 뒤 AI 시대의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갈 여러분과 혁신 현장에서 동료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2026-09-02 10:4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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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사, 임금표 너머 '미래 일자리'를 봐야
[경제일보] 현대자동차 노사가 길었던 줄다리기를 일단 멈췄다. 지난 5월 상견례 이후 111일 만이다. 지난 24일부터 이어진 밤샘 교섭 끝에 마련된 잠정합의안에는 월 기본급 10만원 인상, 성과금 400%와 1270만원, 주식 15주, 복지포인트 50만원 등이 담겼다. 내년 하반기 200명, 2028년 300명 등 기술직 500명을 새로 뽑는 방안에도 합의했다. 오는 31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과하면 올해 임금협상은 마무리된다. 숫자만 놓고 보면 적지 않은 보상이다. 노조는 올해 조합원 1인당 임금 인상 효과를 4084만원 정도로 추산한다. 좋은 성과를 낸 기업이 그 과실을 노동자와 나누는 것은 시장경제에서도 자연스럽다. 숙련된 노동력과 안정적인 노사관계 역시 기업 경쟁력을 만드는 자산이다. 기업의 성과가 주주와 경영진에게만 돌아가고 현장을 지킨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지속 가능한 협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번 합의를 ‘얼마를 더 받았느냐’의 문제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현대차 노사가 마주한 진짜 협상은 오히려 이제부터다. 자동차 산업의 판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교섭 과정에서 노조는 60시간 파업했고, 생산라인 기준 가동 중단 시간은 120시간에 달했다. 지난 21일에는 2016년 이후 10년 만에 하루 8시간 전면파업까지 벌어졌다. 업계는 약 5만5200대가 생산 차질을 빚었고, 이를 판매단가로 환산한 매출 차질 규모가 2조3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한다. 이 수치를 실제 영업손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갈등의 비용이 회사와 조합원만이 아니라 협력업체·고객·지역경제로 번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권리다. 회사가 비용과 경쟁력을 따지는 것도 경영의 책무다. 문제는 두 요구가 해마다 파업을 거친 뒤에야 절충되는 구조다. 임금협상의 승자가 누구인지 가리는 동안 생산이 멈추고 협력업체가 일감을 걱정한다면 노사 모두가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커질 수 있다. 이번 잠정합의에서 그래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성과금 400%보다 다른 곳에 있다. 현대차 노사는 피지컬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같은 미래 기술의 도입이 기업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데 공감하고, 신사업과 신기술 추진 경과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산업 전환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제조 경쟁력 강화와 제도 개선에도 함께 나서기로 했다. 임금표 밖으로 노사협상의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이 합의가 제대로 실행된다면 올해 임협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을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자동차 회사를 넘어 로봇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중심 제조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투입할 계획이다. 초기에는 부품 서열작업부터 시작해 검증을 거쳐 조립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힌다는 구상이다. 노조 역시 이번 교섭 과정에서 AI·자동화 확산에 따른 고용안정을 주요 문제로 제기했다. 이 변화 앞에서는 ‘자동화를 막을 것이냐, 받아들일 것이냐’는 식의 논쟁부터 낡았다. 자동화를 막으면 일자리가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경쟁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한국 공장의 원가 경쟁력이 떨어지면 생산물량 자체가 해외로 이동할 수 있다. 반대로 로봇을 많이 넣으면 기업이 자동으로 경쟁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공정을 이해하고 로봇을 운용하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품질을 관리할 숙련된 사람이 없다면 첨단설비도 비싼 쇳덩이에 불과하다. 결국 미래의 노사협상은 ‘사람이냐 로봇이냐’가 아니라 ‘사람이 로봇과 함께 어떤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를 다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산직 500명 신규채용 합의는 반갑다. 청년들에게 질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열고 세대교체의 숨통을 틔운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숫자를 채우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새로 들어올 인력의 직무가 앞으로 10년 뒤에도 필요한 일인지까지 설계해야 한다. 미래 공장에 필요한 생산직의 모습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생산공정을 이해하면서 로봇과 자동화설비를 다루고, 설비 데이터를 읽어 고장을 예측하며 품질 문제를 현장에서 해결하는 노동자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기존 직원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 감소부터 걱정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재교육과 직무전환을 통해 새로운 공정으로 이동할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고용안정의 가장 좋은 방법은 없어지는 일을 억지로 붙들어두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일을 기존 노동자가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임금 문제 역시 이제 생산성과 떼어놓고 논의하기 어렵다. ‘임금이 오르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단순 공식은 맞지 않는다.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인력이 높은 생산성과 품질을 만들어낸다면 기업에는 오히려 이익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고 그 성과를 공정하게 배분받는 구조는 장기적인 신뢰를 만든다. 반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고정비만 계속 높아지고, 파업에 따른 생산중단이 반복되며, 해외 공장보다 국내 생산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로벌 기업은 결국 어디에서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계산한다. 국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선의만으로 국내 생산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현대차 역시 녹록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기차에서는 중국 업체와 가격·기술 경쟁이 격화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현지 생산 확대가 요구된다. 원자재와 공급망, 관세, 환율까지 경영환경을 흔드는 변수도 적지 않다. 회사와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생산성을 함께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성과급을 생산성과 기계적으로 연동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자동차 품질과 기술개발, 브랜드 가치처럼 단순한 시간당 생산대수로 계산하기 어려운 성과도 많다. 하지만 노사가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협상한다면 동시에 ‘다음 성과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도 협상해야 한다. 생산성이 얼마나 개선됐는지, 품질 경쟁력을 어떻게 높일지, 신기술 도입으로 줄어드는 직무와 늘어나는 직무가 무엇인지, 직원 재교육에는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 국내 공장의 역할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까지 노사 테이블 위에 올라와야 한다. 협력업체도 빠져서는 안 된다. 현대차 공장이 파업하면 부품업체 생산라인도 영향을 받는다. 완성차 노동자는 성과금을 받지만 협력업체 노동자는 원청의 생산중단으로 일감을 잃는 구조라면 산업 전체의 노사 상생이라 부르기 어렵다. 노사협상의 비용이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곳으로 전가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대기업 노사에게 있다. ‘주역’ 계사전에는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노사가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좋은 일자리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겠다는 목표만큼은 함께할 수 있다. 올해 임협은 아직 잠정합의다. 조합원 투표라는 마지막 절차도 남아 있다. 가결된다면 노사는 길었던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산라인이 다시 돌아간다고 협상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기차와 로봇, AI가 공장을 바꾸는 속도는 임금협상 주기보다 빠르다. 앞으로의 노사관계는 매년 기본급 몇 만원과 성과금 몇 퍼센트를 놓고 싸우는 데 머물 수 없다. 청년을 어떤 일자리로 뽑고, 기존 숙련인력을 어떤 기술자로 바꾸며, 자동화로 높아진 생산성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더 큰 의제가 돼야 한다. 좋은 성과를 나누는 것은 필요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눌 성과가 계속 만들어지는 회사를 함께 만드는 일이다. 현대차 노사의 다음 협상 테이블에는 임금표와 함께 생산성, 직무전환, 청년고용, 로봇과 AI의 시간표가 나란히 놓여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의 몫도 지키고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지키는 길이다.
2026-08-26 08: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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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 살리고 사람 잃는 전환은 안 된다
[경제일보] 철강의 위기가 공장 담장을 넘어 일자리로 번지고 있다. 충남 당진이 지난 21일부터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이 됐다. 현대제철을 비롯한 철강기업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철강업과 금속제품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용 감소가 나타나자 정부가 고용 충격이 더 커지기 전에 안전망을 가동한 것이다. 23일 충남도는 정부 지원과 자체 일자리 정책을 연계해 고용 유지부터 직업훈련, 전직·재취업, 생계 지원까지 대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지정은 단순한 지역 고용대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가 기업 손익계산서를 넘어 지역사회에 청구서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진은 포항·광양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강도시다. 공장 하나가 철강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협력업체와 운송업체, 정비업체가 붙고 식당과 상점이 생긴다. 공장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방세가 걷히고, 그 돈이 다시 지역의 학교와 도로, 복지에 쓰인다. 주력기업의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 매출이 먼저 꺾이고 채용이 줄며, 그 여파는 골목상권과 지방재정까지 이어진다. 당진은 이미 그 징후를 겪고 있다. 지역 주요 철강기업 5개사의 영업이익은 2023년 2623억원 흑자에서 지난해 444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당진의 국세 납부액 역시 2022년 5063억원에서 2024년 1228억원으로 급감했고 법인 지방소득세는 같은 기간 317억원에서 28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철강기업의 실적 악화가 지역경제의 체력을 얼마나 빠르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철강시장이 건설수요 감소와 글로벌 공급과잉, 수출 부진이 겹치며 20년 만의 최저 수준의 수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설비의 폐쇄와 가동 중단, 인력 조정 압력에 더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과 탄소중립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철강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값싼 범용재를 대량 생산해 중국산 철강과 가격으로 경쟁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자동차·조선·방산·에너지용 고부가 강재로 올라가고,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확대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생산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제조공정에는 인공지능과 자동화를 더 깊이 넣어야 한다. 유럽의 탄소규제와 각국의 보호무역 장벽을 생각하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다. 정부가 경쟁력이 떨어진 모든 설비와 일자리를 세금으로 영원히 붙들어둘 수도 없다. 시장에서 수요를 잃은 생산시설까지 고용을 이유로 계속 유지하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더 큰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다. 기업은 오래된 설비를 닫으면 재무구조가 좋아질 수 있다. 국가는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면 탄소배출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장 주변의 협력업체, 지역 상인에게는 ‘산업 고도화’라는 말이 당장의 생계 문제로 돌아온다. 국가와 기업이 전환의 편익을 얻으면서 비용은 노동자와 지역에만 남기는 구조라면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 당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원 대상 노동자의 국민내일배움카드 한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늘어나고 생활안정자금 융자 한도도 2000만원에서 2500만원으로 확대된다. 기업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비율은 66.7%에서 80%로 높아진다. 충남도는 내년 최대 60억원 규모의 ‘당진 철강산업 버팀이음프로젝트’ 국비 확보도 추진한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생계자금과 훈련비를 늘리는 것만으로 산업 전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숙련을 버리지 않는 전환이다. 철강공장에서 20년을 일한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업을 찾으라며 몇 달짜리 일반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제철소의 설비와 공정, 품질관리, 안전관리 경험은 산업의 자산이다. 이를 수소환원제철과 전기로, 친환경 설비, 산업용 로봇과 스마트팩토리 운영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재교육의 출발점도 실업 이후가 아니라 재직 중이어야 한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확정된 뒤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너무 늦다. 기업의 설비 전환 계획과 함께 향후 줄어드는 직무와 새로 필요한 직무를 예측하고,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도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탄소중립 설비에 세액공제와 정책금융을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고용 전환 계획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어떤 일자리가 줄어들고 어떤 직무가 새로 생기는지, 기존 노동자를 얼마나 재배치하고 협력업체 고용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 친환경 설비 투자계획은 수십 년 뒤까지 세우면서 사람에 대한 계획은 구조조정 직전에 만드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지역 정책은 더 크게 봐야 한다. 당진의 철강 노동자를 모두 다른 철강회사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함께 지역의 산업구조 자체를 넓혀야 한다. 당진을 저탄소 철강의 거점으로 만들면서 수소·에너지, 철강 자원순환, 친환경 소재, 산업자동화와 같은 연관 산업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산업연구원도 철강 집적지역의 대응 방안으로 수소환원제철과 탈탄소 설비·부품 산업, 제조 AX, 자원순환 분야로의 다각화를 제시했다. 그래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같은 지역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배울 것도 있다. 주력기업이 떠난 뒤에야 도시재생과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하면 이미 숙련인력과 젊은 가족은 지역을 떠난 뒤다. 사람과 기업이 빠져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일자리를 지키고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정부가 고용 충격이 통계에 완전히 나타나기 전에 당진을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그래서 평가할 대목이다. 이 제도 자체도 기존 고용위기지역이 실업과 고용 감소가 상당 부분 진행된 뒤에야 작동한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됐다. 이제 ‘선제’라는 말을 정책의 시간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실직하기 전에 훈련하고, 협력업체가 폐업하기 전에 사업 전환을 돕고, 지역의 청년이 떠나기 전에 새로운 기업을 불러들여야 한다. 정부도 최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신속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가 현실이 된 뒤 지원하던 방식에서 위험이 보일 때 움직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중용’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서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의미다. 산업 전환도 그렇다. 철강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술도 바뀌고 시장도 바뀐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생산방식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이뤄질 것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일이다. 기업에는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제품 전환을 지원하고, 노동자에게는 숙련을 이어갈 직업과 교육을 제공하며, 지역에는 다음 산업을 심어야 한다. 세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산업정책의 성공을 공장의 생산성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도 지나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공장을 지었는데 숙련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살아났는데 지역 상권과 인구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온전한 산업 전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철강은 한국 산업화를 떠받친 산업이다. 당진과 포항, 광양의 노동자와 지역사회 역시 그 성장의 비용과 과실을 함께 감당했다. 새로운 철강으로 넘어가는 비용 역시 함께 나눠야 한다. 산업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리는 전환은 오래갈 수 없다. 공장을 바꾸는 것과 사람의 삶을 이어주는 것, 그 둘을 함께 해내야 진짜 산업 전환이다.
2026-08-2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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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주체를 다시 짜라 ③정부편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정부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정부 역할이 산업 지원과 규제 정비에 집중됐다면, AI 시대에는 데이터, 전력망, 인재, 안전망, 소비자 보호, 공공서비스, 국가 안보까지 포괄하는 종합 설계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AI가 기업의 생산 방식과 소비자의 생활 방식을 동시에 바꾸면서 정부도 단순한 규제자나 투자자를 넘어 국가 운영체제의 설계자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 진흥, 규제 설계, 인프라 구축, 인재 양성, 소비자 보호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11일 정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AI는 이미 산업정책의 핵심 축으로 올라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달 16일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AI 데이터센터(AIDC), 피지컬 AI, K-반도체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제시하고, 해외 투자 유치를 포함해 총 550조원 규모의 민간투자로 기가와트급 초거대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예약과 결제 등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로 서비스를 고도화해 ‘1인 1 AI 에이전트’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도 내놨다. AI 제도 정비도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은 올해 1월 22일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AI 연구개발과 학습용 데이터 구축, AI 활용 확산, 창업 지원, 인재 양성, 데이터센터 구축 지원 등의 근거를 담고 있다. 동시에 고영향 AI에 대한 투명성, 안전성, 인간 감독 등 신뢰 확보 장치도 포함했다. 한 AI업계 관계자는 “AI 산업은 속도가 생명인 만큼 과도한 규제는 부담이 될 수 있다”면서도 “설명 책임과 안전장치가 없으면 소비자와 시장의 신뢰를 잃을 수 있어 산업 진흥과 신뢰 구축을 동시에 설계하는 정부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AI 산업정책, 지원금 경쟁으로 끝나선 안 돼 정부의 AI 산업정책은 대규모 투자 계획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반도체는 AI 서버와 데이터센터의 핵심 인프라이고, 피지컬 AI는 로봇과 자율주행, 제조 자동화와 연결된다. AI 데이터센터는 모든 AI 서비스의 기반이 되는 컴퓨팅 인프라다. 정부가 이 세 분야를 묶어 국가 프로젝트로 제시한 것은 AI를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제조업, 에너지, 지역경제, 안보가 결합된 복합 산업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다만 대형 프로젝트가 성과로 이어지려면 재정 투입과 세제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데이터센터 입지, 전력망 확충, 용수 확보, 지역 주민 수용성, 전문 인력 공급이 함께 해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21일 정부가 수도권 밖 호남에 조성하려는 반도체 산업단지를 두고 대규모 전력·용수 수요와 지역 주민 반발이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산업단지 조성에는 800조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되며, 계획대로면 4개 반도체 공장의 전력 수요만으로도 광주·전북·전남 지역의 현재 연간 전력 소비량의 70∼80%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업 투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전력망, 용수, 도로, 대학 인력, 지역 민원 조정까지 정부가 함께 풀어야 실제 착공과 운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데이터·전력·인재가 새 국가 인프라로 부상 AI 시대의 국가 인프라는 도로와 항만, 공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데이터, 클라우드, GPU, 전력망, 고급 인재가 새로운 국가 인프라로 떠오르고 있다는 평가다. AI 모델을 개발하고 운영하려면 대규모 학습 데이터와 안정적인 컴퓨팅 자원,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AI 정책은 과학기술 정책인 동시에 에너지 정책, 교육 정책, 지역균형 정책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전력 수요와 직결된다. AI 연산은 기존 인터넷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 정부가 권역별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더라도 전력망 보강과 재생에너지, 원전, 송전선로 문제를 동시에 조정하지 못하면 투자 계획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재 문제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AI 전문인력은 글로벌 빅테크와 국내 대기업, 스타트업이 동시에 확보 경쟁을 벌이는 분야다. 대학 교육만으로는 산업 현장의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과기정통부는 올해 12개 부처와 함께 514만명을 대상으로 AI 교육을 실시하고, AI디지털배움터를 전국 69개 거점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한 서울 소재 대학 교수는 “AI 인재 정책은 박사급 연구자 양성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중소기업 직원, 공무원, 교사, 금융·제조 현장 인력까지 AI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재교육 체계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와 신뢰 구축 병행 요구 AI 기본법 시행으로 한국은 AI 산업 진흥과 신뢰 기반 조성을 함께 추진할 법적 틀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법은 고영향 AI에 대해 투명성과 안전성 확보를 요구하고, 생성형 AI 결과물에 대한 표시 의무 등도 규정하고 있다. 의료, 금융, 교통, 채용, 교육처럼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 재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에서는 AI 활용에 더 높은 수준의 설명 책임과 인간의 감독이 요구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AI 기본법과 시행령이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인증, 문서화, 영향평가 부담이 과도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소비자와 시민사회에서는 AI가 신용평가, 채용, 보험, 의료 판단에 활용될 경우 설명 가능성과 이의제기 절차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한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AI 기본법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초기 기업에 대기업 수준의 문서화와 검증 부담이 부과되면 서비스 출시 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며 “위험도가 낮은 서비스와 고영향 AI를 구분해 규제를 차등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AI가 금융 심사나 채용, 보험료 산정에 쓰일 경우 소비자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기 어렵다”며 “기술 발전을 이유로 설명 책임과 이의제기 절차가 약화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과제는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에 있다. AI 산업을 키우기 위해 규제를 무조건 늦추면 신뢰가 약해질 수 있고, 신뢰 확보를 이유로 규제를 과도하게 설계하면 혁신 속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된다. 분야별 위험 수준에 따라 규제를 달리 적용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공부문 AI, 행정 혁신의 시험대 정부 자체도 AI 전환의 대상이다. 행정 민원, 복지 심사, 세금 신고, 재난 대응, 교통 관리, 보건의료, 교육 행정 등 공공서비스 전반에서 AI 활용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를 활용하면 반복 민원을 줄이고 행정 처리 속도를 높이며,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다만 공공부문 AI에는 민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정부의 AI 판단은 국민의 권리와 직접 연결될 수 있어서다. 복지 수급 대상 선정, 세무 조사, 채용·평가, 치안·감시 분야에서 AI가 활용될 경우 오류나 편향이 발생하면 피해가 클 수 있다. 공공 AI는 효율성뿐 아니라 투명성, 책임성, 감사 가능성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처별 정책 넘어 국가 조정 능력이 관건 AI 시대 정부의 역할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산업을 키우면서도 소비자를 보호해야 하고, 투자를 촉진하면서도 전력과 지역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기업의 혁신을 막지 않으면서도 고영향 AI의 위험을 관리해야 하고, 청년에게는 새 일자리를 만들고 기존 노동자에게는 전환 교육과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전환의 성패가 개별 부처의 정책 경쟁이 아니라 정부 전체의 조정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본다. 과학기술, 산업, 금융, 교육, 노동, 복지, 에너지 정책이 따로 움직이면 AI 전환이 성장보다 갈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대로 인프라, 인재, 규제, 안전망, 신뢰 체계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을 경우 AI가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AI 시대 정부는 돈을 나눠주는 투자자나 기업을 단속하는 규제자에 머물 수 없다”며 “국가 데이터 인프라와 전력망, 인재 양성, 소비자 보호, 일자리 전환을 함께 설계하는 운영체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6-08-11 1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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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억달러 'MASGA 프로젝트' 본궤도…한미 조선협력 거점 가동
[경제일보] 15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가 미국 워싱턴DC에서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선언과 양해각서 단계에 머물던 양국의 조선협력이 미국 조선소 현대화와 전문인력 양성, 공동 기술개발, 기업 투자 등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나아갈 기반이 마련됐다. 24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산업부와 미국 상무부는 23일 오전 10시 현지시간 워싱턴DC 메이플라워호텔에서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 개소식을 공동 개최했다. 행사에는 김정관 산업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을 비롯해 양국 정부·의회·기업 관계자 130여명이 참석했다. 한·미 조선협력센터 출범은 지난 5월 양국이 체결한 ‘한·미 조선협력 파트너십 이니셔티브’ 양해각서의 후속 조치다. 당시 양국은 공동 연구개발과 기술 교류, 직접투자 등 기업 간 협력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현지 플랫폼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협약 체결 후 약 두 달 만에 센터가 정식 출범한 것이다. 김정관 장관은 환영사를 통해 “KUSPC는 전 세계 유례가 없는 조선 분야 협력 플랫폼으로서, 미국 조선업 재건을 돕겠다는 한국의 굳은 의지와 약속의 상징”이라며 “KUSPC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국의 우수한 조선 기술이 미국 해안벨트 곳곳에 뿌리내리게 돕는 거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1500억 달러에 이르는 조선 협력 투자도 빠르게 진행할 것”이라며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지속적인 발주, 인센티브, 규제 완화 등 미국 측의 적극적 지원을 당부한다”고 덧붙였다. 센터는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주관하고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참여하는 미국 현지 비영리법인으로 운영된다. 2026년부터 2028년까지 총 199억3200만원이 투입되며 올해 정부 예산은 66억원이다. 워싱턴DC를 기반으로 미국 조선소 생산성 컨설팅과 인력 양성, 현지 정책 동향 파악, 기술 교류와 투자사업 발굴 등을 추진한다. 국내 조선업의 생산 경험을 활용해 미국 조선소의 공정 효율화와 야드 운영 최적화, 품질관리 등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내 퇴직인력과 생산 전문가를 현지에 파견해 용접·도장·안전·품질 분야의 교육 담당자를 재교육하고, 미국 조선소 관리자와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국내 조선 현장 견습 과정도 운영할 계획이다. 개소식에서는 ‘팀 코리아’ 구축과 공급망 협력, 인력 양성, 공동 기술개발 등 4개 분야에서 총 15건의 MOU가 체결됐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와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KUSPC는 미국 조선소 현대화와 기자재 생태계 구축, 공동 연구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HD한국조선해양은 미국 지멘스 인더스트리 소프트웨어와 차세대 선박 설계·생산용 디지털 솔루션을 개발하고, 프레이저 인더스트리의 야드 생산성 진단과 자동화 기술 적용을 지원한다. 한화오션은 필라델피아 광역상공회의소와 지역 제조기업의 조선 공급망 참여를 확대하고, 한화필리조선소는 현지 전문대학과 교육·현장실습·채용을 잇는 인력 양성 체계를 구축한다. 삼성중공업은 비거 마린그룹과 가상현실·증강현실 기반 용접교육 시설을 갖춘 인력양성센터를 공동 설립한다. 미국 새로닉 테크놀로지스와는 현지 조선소 자동화와 무인수상정 공동개발을 추진한다. 한화오션은 미국 함정 설계업체 깁스앤콕스와 고속수송함을 공동 설계하고, HD현대중공업은 안두릴과 자율항해·기관 자동화 기술을 갖춘 무인 함정 플랫폼을 개발한다. 한·미 공동 연구개발에는 향후 5년 동안 총 1200억원이 투입된다. 한국의 선박 생산 역량과 미국의 인공지능·로봇 원천기술을 결합해 AI 선박설계, 금속 3D프린팅 기자재, 알루미늄 함정 자율용접, 대형 블록 도장 자동화, 자율주행 운반장비 등 8개 과제를 수행한다. 한·미 조선협력의 배경에는 미국 조선산업의 생산능력 약화와 중국의 시장 지배력 확대가 자리 잡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2024년 세계 조선 생산능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53%에 달했지만 미국은 0.1%에 그쳤다. 미국은 한국의 설계·생산관리와 자동화 기술을 활용해 상선과 함정 건조 기반을 되살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MASGA는 한국이 미국과의 통상 협상 과정에서 제시한 1500억달러 규모의 조선협력 구상이다. 조선소 투자와 시설 현대화, 인력 양성, 공급망 구축, 선박금융 등을 통해 미국의 조선 생산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1500억달러가 개별 사업에 이미 투입된 것은 아닌 만큼 앞으로 양국 기업이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를 얼마나 발굴하느냐가 관건이다. 미국의 안정적인 선박 발주와 투자 인센티브, 조선·방산 분야의 규제 개선도 필요하다. MOU가 실제 수주와 투자로 이어지지 않으면 센터가 협의 창구에 머물 가능성도 있다. 미국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국내 조선소와 기자재 업체의 일감 및 기술 경쟁력을 함께 키우는 전략도 요구된다. 산업부는 “새로이 출범하는 KUSPC를 중심으로 미국 측과 지속해서 소통하면서 한-미 양국에 이익이 되는 조선 분야 협력 프로젝트들을 발굴하고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며 “한미전략투자공사 및 정책금융기관들과 협력해 우리 조선기업들의 투자활동과 민간 선박 건조 협력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해 나갈 방침”이라고 했다.
2026-07-24 1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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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만 뜨거운 한국경제, 수출 신기록에 취할 때 아니다
[경제일보] 한국 수출이 다시 기록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7월 1일~20일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3% 늘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은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메모리 수요 증가에 힘입어 180.6% 급증했다. 중국 수출은 94.1%, 미국 수출도 39.6% 증가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로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같은 기간 자동차 수출은 10.6% 감소했다. 전체 수출의 화려한 숫자 뒤에 반도체 편중과 업종별 양극화가 동시에 드러난 것이다. 수출 호조가 곧바로 경제 전반의 회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는 23일 발표될 2분기 국내총생산(GDP)을 앞두고 로이터가 경제전문가 24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경제는 2분기 전 분기보다 0.4% 성장했을 것으로 전망됐다. 1분기 성장률 1.8%에서 크게 낮아진 수치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과 투자가 경제를 끌었지만 소비와 내수는 여전히 부진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0.4%는 아직 전망치다. 7월 1일~20일 수출 역시 월 전체 실적이 아닌 잠정치다. 그러나 두 지표가 동시에 보여주는 방향은 분명하다. 반도체 공장과 수출항은 뜨거운데 골목상권과 자영업자의 매출, 청년의 취업시장, 가계의 소비심리는 그만큼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액은 빠르게 늘지만 국민의 살림살이가 비례해 좋아지지 않는 ‘K자형 회복’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위험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호황은 분명 한국경제의 소중한 기회다. 세계적인 AI 투자 경쟁 속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수출 증가와 기업 실적 개선은 세수 회복과 설비투자 확대에도 도움이 된다. 정부와 기업은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도체가 잘된다는 사실과 경제 전체가 건강하다는 판단은 구분해야 한다. 반도체는 경기 변동이 크고 글로벌 수요와 공급, 미국과 중국의 산업정책, 기술 변화에 민감한 업종이다. 지금은 AI용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공급 확대나 투자 조정이 시작되면 업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꺾일 수 있다. 한국경제가 반도체 한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할수록 업황 반전의 충격도 경제 전체로 커지게 된다. 자동차 수출이 감소했다는 점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철강과 석유화학, 기계, 배터리 등 다른 주력 산업도 관세와 중국의 추격, 공급과잉, 고유가라는 복합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분이 다른 업종의 부진을 가린다고 해서 산업 경쟁력의 약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 수출 실적이 좋을 때 구조적 취약성을 점검하고 다음 성장동력을 준비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반도체 수출 실적을 홍보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수출 호황의 온기가 기업 투자와 고용, 임금과 소비로 퍼지도록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대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국내 설비투자와 협력업체 발주, 양질의 일자리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수출 증가가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우선 반도체 기업들이 국내에 연구개발과 첨단 생산시설을 지속적으로 확충할 수 있도록 전력과 용수, 산업용지와 인재 공급 문제를 풀어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발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송전망과 용수시설, 교통망을 제때 구축해 실제 투자가 이뤄지게 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가 공동으로 기술과 인력을 키우는 생태계도 강화해야 한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분의 사용처도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일회성 현금 지원이나 단기적인 소비 부양에 투입하면 잠시 경기지표를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경제의 체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재정은 청년 고용과 직업훈련, 중소기업의 자동화·디지털 전환, 연구개발, 산업 전환 과정에서 밀려나는 노동자의 재교육에 우선 투입해야 한다. 소비 부진에 대한 접근도 달라져야 한다. 가계가 지갑을 닫는 것은 단순히 소비할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높은 주거비와 교육비, 금리 부담, 불안한 고용과 노후 걱정이 소비를 제약하고 있다. 상품권이나 소비쿠폰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내수가 지속적으로 회복되기 어렵다. 주거·돌봄·교육비 부담을 낮추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리는 구조적 대책이 필요하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도체 대기업의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내수 서비스업과 영세 사업장의 경쟁력이 개선되지 않으면 경제의 양극화는 심해진다. 디지털 전환 지원과 공동 물류, 경영 컨설팅, 사업 전환을 돕되 경쟁력을 잃은 기업까지 무조건 연명시키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정부 지원은 생존 자체보다 생산성 향상과 구조 전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반도체 수출 호황을 다른 산업으로 확산하는 전략도 서둘러야 한다. AI 반도체가 데이터센터와 로봇, 자율주행차, 조선, 바이오, 방위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수요 산업과 연계해야 한다. 반도체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를 넘어 반도체를 활용해 전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나라가 돼야 한다. <서경>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잘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거안사위(居安思危)’가 나온다. 수출 실적이 좋을 때야말로 호황 뒤의 위험을 살펴야 한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에 취해 내수 부진과 산업 편중을 외면한다면 지금의 호황은 다음 불황에 대한 대비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수출액이 늘었다고 국민의 살림까지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호황이 기업의 장부에만 머물지 않고 투자와 고용, 임금과 소비로 이어져야 비로소 경제 전체의 회복이라 부를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반도체의 열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온기가 골목상권과 일자리, 다른 산업으로 번지도록 길을 놓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지금 반도체라는 강력한 엔진을 달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제대로 달리려면 다른 바퀴와 차체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반도체만 뜨겁고 내수와 고용이 차갑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수출 신기록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 숫자에 취할 때는 아니다.
2026-07-22 11: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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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주체를 다시 짜라 ①기업·재벌편
[경제일보] 인공지능(AI) 시대는 한국경제에 기술 도입을 넘어선 전방위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은 AI를 비용 절감 수단이 아니라 조직과 사업모델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소비자는 편리함에 머무르지 않고 데이터 주권과 알고리즘 감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정부는 규제 완화와 산업 지원을 넘어 인프라, 인재, 안전망, 신뢰 체계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이에 본지는 이번 기획을 통해 AI시대 한국경제 3주체의 역할 변화와 개혁 과제를 짚고, 한국경제가 관성의 경제에서 학습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한국 대기업들이 인공지능(AI) 전환의 한복판에 섰다. 반도체 기업은 AI 서버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패키징 경쟁에 뛰어들고 있고, 플랫폼 기업은 초거대 AI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강화하고 있다. 자동차·조선·철강·금융권도 생산공정 자동화, 로봇, AI 상담, 리스크 관리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투자 시계도 빨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을 축으로 대규모 AI·반도체 투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약 800조원 규모의 신규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에 참여하고, 충청권에는 81조원 규모의 반도체 패키징 클러스터가 조성된다. 또 SK·GS·네이버 등이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참여하고 장기적으로 관련 투자가 1000조원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구상도 내놨다. 실제 정부는 지난달 29일 SK·GS·네이버와 협력해 1단계로 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SK가 5GW, GS가 2.4GW, 네이버가 1GW 규모로 참여하며 관련 투자 규모는 550조원으로 제시됐다. 투자 규모만 놓고 보면 한국 기업들은 다시 한 번 ‘큰 판’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AI 투자가 곧 AI 경쟁력은 아니다”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기업 AI 전략 담당자는 “지금은 어느 그룹이나 AI 조직과 태스크포스는 갖추고 있지만 실제 업무에 적용하려면 데이터 접근권, 보안, 법무, 감사, 성과평가가 모두 걸린다”며 “AI 도입보다 어려운 것은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무는 일”이라고 말했다. HBM이 바꾼 증시 서열…AI가 기업가치 기준 흔든다 AI 전환은 이미 국내 증시의 기업가치 평가 기준도 바꾸고 있다. 대표 사례가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수요 확대와 HBM 시장 선점 효과에 힘입어 지난달 22일 코스피 장중 시가총액에서 삼성전자를 앞질렀다. 이는 단순한 주가 순위 변화가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범용 메모리 중심에서 AI용 고부가 메모리와 패키징, 고객 맞춤형 공급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과거에는 생산능력과 원가 경쟁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AI 반도체 기업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 차세대 HBM을 얼마나 빨리 개발·공급할 수 있는지가 기업가치를 좌우한다. 다만 AI 반도체 호황이 항상 주가 상승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8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미국 반도체주 약세와 AI 붐 지속성에 대한 우려 속에 장중 동반 약세를 보였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AI 반도체가 한국 증시의 핵심 테마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시장은 이제 단순한 실적 증가보다 지속 가능한 가격 결정력과 고객 기반을 본다”며 “AI 사이클이 길어질수록 기업 간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열사 울타리에 갇힌 데이터, AI 경쟁력의 병목 AI 경쟁력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같은 하드웨어 투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업 내부의 데이터 활용 구조가 핵심 변수다. 한국 대기업은 제조, 금융, 유통, 통신, 물류 등 방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계열사별·부서별로 데이터가 분산돼 있고, 보안과 개인정보, 감사 리스크 때문에 실제 활용은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한 제조업계 관계자는 “공장에는 설비 데이터가 쌓이고, 영업부서에는 고객 데이터가 쌓이며, 구매부서에는 공급망 데이터가 쌓이지만 이를 하나의 모델로 연결하는 일은 쉽지 않다”며 “AI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기술 문제가 아니라 내부 승인 절차에서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재벌 구조의 강점이던 수직계열화도 AI시대에는 양면성을 갖는다. 위기 때 빠르게 자원을 동원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데이터와 인재가 계열사 내부에 갇히면 개방형 혁신에는 불리할 수 있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대기업들이 AI 스타트업과 협업을 말하지만 실제 계약 단계에서는 지식재산권, 데이터 소유권, 보안 조항이 지나치게 무겁다”며 “함께 실험하고 성과를 나누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AI 도입보다 어려운 건 일하는 방식의 개혁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사내 업무에 도입하면서 보고서 초안 작성, 회의록 정리, 시장조사, 고객 응대, 코드 작성, 번역, 계약서 검토 등에서 AI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AI를 업무 도구로 배포하는 것만으로 생산성 향상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지난 5월 arXiv에 공개된 조원익·김성훈·김근혜의 포지션 페이퍼 ‘Adopting AI in Practice Does Not Guarantee the Productivity Boost’는 AI 도입이 곧바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논문은 인력 구성, 구성원의 기초 역량, 학습곡선, 인센티브 구조, 목표 설정의 유연성 등이 AI 생산성 효과를 좌우한다고 분석했다. 한 경영학 교수는 “AI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라며 “기업이 AI를 제대로 쓰려면 어떤 업무를 AI에 맡기고 어떤 판단은 사람이 책임질지 조직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중간관리자의 역할 변화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중간관리자는 자료를 취합하고 보고서를 다듬고 리스크를 걸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정보 수집과 문서 작성의 상당 부분을 보조하면서 중간관리자의 경쟁력은 보고서 작성 능력이 아니라 문제 정의, 결과 검증, 부서 간 조정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AI 전환은 청년 채용과 인재 육성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반복적 사무 업무와 초급 분석 업무가 AI로 대체되면 신입사원이 조직에서 배우는 첫 단계가 줄어들 수 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AI 도입 이후 신입사원에게 맡길 수 있는 단순 업무는 줄어드는 반면, 처음부터 문제 해결형 역량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며 “채용 규모를 줄이는 유혹이 생기지만 장기적으로는 인재 풀이 약해질 수 있어 재교육 체계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AI 거버넌스도 기업 경쟁력 됐다 AI 활용이 확대될수록 기업의 책임도 커진다. 한국은 AI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있으며, 고영향 AI에 대한 인간 감독과 투명성 확보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금융, 보험, 의료, 채용, 교육처럼 개인의 권리와 직접 연결되는 분야에서는 AI가 어떤 데이터를 사용했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으며, 오류가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질지가 중요해진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AI 상담이나 대출심사는 소비자 편의성을 높일 수 있지만 설명 책임이 약하면 민원과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AI를 많이 쓰는 회사보다 AI 판단을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하는지가 앞으로 더 중요한 평판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AI 활용이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지려면 조직 운영 방식의 변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대기업의 성장 방식은 계열사 내부에서 원료 조달, 부품 생산, 완제품 제조, 금융 지원을 묶는 수직계열화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AI 분야에서는 데이터, 클라우드,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인재가 기업 안팎에 분산돼 있어 외부 스타트업과 대학, 협력사와의 공동 개발과 실험이 중요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AI 경쟁력이 투자 규모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반도체 설비 확충과 데이터센터 구축은 AI 전환의 기반에 해당하지만 이후에는 내부 인재 재교육, 중간관리자 역할 재정립, AI 활용 책임 체계, 외부 생태계와의 협업 구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 대기업의 AI 경쟁력은 대규모 투자 이후의 실행 구조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며 “총수의 투자 결정을 현장의 실험과 조직 학습으로 연결하고, 계열사 중심의 폐쇄형 운영을 개방형 협력 모델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향후 AI 전환의 핵심 변수로 꼽힌다”고 말했다.
2026-07-09 16: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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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권 쥔 현대차 노조, 성과급 잔치가 먼저인가
[경제일보] 현대차 노조가 파업권을 쥐었다. 올해 임금협상에서 노조는 기본급 인상과 함께 전년도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요구하고 있다. 조합원 투표는 파업 쪽으로 기울었고, 중앙노동위원회 조정도 멈췄다. 현대차 파업은 낯선 뉴스가 아니지만, 올해의 '공기'는 다르다. 기존 임단협이 '기본급 몇 원, 상여금 몇 퍼센트'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쟁점은 이익 배분 공식이다. '순이익의 30%'라는 숫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불붙은 성과급 논쟁이 자동차 산업으로 넘어왔다는 신호다. 대기업 노조의 교섭 언어가 임금 인상률에서 이익 배분율로 바뀌고 있다. 노동의 몫을 말하는 일은 정당하다. 현대차의 실적은 현장의 땀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울산·아산·전주 공장의 생산라인, 품질을 붙든 숙련공, 납기를 맞춘 협력사, 해외 시장에서 브랜드를 지켜낸 임직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현대차도 없다. 불황기에는 고통 분담을 말하고, 호황기에는 미래 투자를 이유로 성과 공유를 미루는 기업은 신뢰를 얻기 어렵다. 노조가 성과급의 기준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배경에는 그런 불신도 있다. 다만,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요구하는 방식이 과연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가 서 있는 자리는 '편안한 잔칫상'이 아니다. 전기차 수요는 예상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하이브리드 호황은 언제든 경쟁 심화에 흔들릴 수 있다. 미국 관세와 통상 불확실성은 손익계산서에 이미 부담을 남겼다. 중국 업체들은 가격으로 밀고 들어오고, 테슬라와 글로벌 완성차들은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자율주행, 로봇, 배터리 내재화 경쟁에 돈을 쏟고 있다. 현대차의 이익은 올해 성과급의 재원인 동시에 다음 10년 생존을 위한 실탄이다. 성과급 논쟁이 불편한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순이익은 금고 속 현금 더미가 아니고, 이 순이익 안에는 미국 공장 투자, 전기차 플랫폼, 배터리 공급망, 소프트웨어 인력, 로봇과 AI, 협력사 지원, 주주환원, 미래차 연구개발이 포함돼 있다. 오늘 나눌 돈은 내일 싸울 돈이기도 하다. 교섭장에서 이 사실이 지워지면, 성과급은 보상이 아니라 미래 투자와의 경쟁이 된다. 올해 현대차 노조 요구에는 AI와 자동화에 대한 불안도 담겨 있다. 로봇은 더 똑똑해지고, 생산 데이터는 더 촘촘해지며, 소프트웨어가 자동차의 가치를 좌우하는 등 완성차 공장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에 회사가 AI와 로봇을 도입해 변화를 꾀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고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안감이 모든 요구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AI 전환이 불안하다면 필요한 것은 순이익 30%라는 숫자만이 아니라 직무 전환 계획, 재교육 시간의 유급 보장, 자동화 도입 전 고용영향 평가, 생산성 향상분의 합리적 공유, 협력사 노동자 보호, 고령 숙련공의 역할 재설계 등의 요구들이 나왔어야 한다. 미래차 시대의 노사 교섭은 돈의 크기보다 변화의 설계가 더 중요하다. 대기업 성과급 파업이 더 민감한 이유는 그 울림이 공장 담장을 넘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멈추면 1차 협력사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2차·3차 협력사, 물류, 항만, 지역 상권까지 파장이 간다. 대기업 정규직의 성과급 요구가 커질수록 그 성과를 함께 만든 협력업체 노동자의 몫은 어디에 있는지도 묻게 된다. 성과급 잔치가 원청 정규직의 식탁에서 끝나면 산업 생태계의 신뢰는 약해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대차 노조도 더 큰 시야를 가져야 한다. 현대차 노조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중 하나다. 그만큼 힘이 있고, 그만큼 책임도 크다. 순이익 30%를 요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요구가 청년 구직자와 협력사 노동자, 주주와 소비자, 지역경제와 국가 산업전략 앞에서 어떻게 들릴지도 생각해야 한다. 권리는 고립돼 존재하지 않는다. 권리는 늘 다른 사람의 몫과 마주 선다. 회사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조의 요구가 거칠다고만 말하기 전에, 성과 배분의 기준을 얼마나 투명하게 설명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경영진 보상과 주주환원은 어떻게 정해지고, 임직원 성과급은 어떤 원칙으로 결정되며, 미래 투자를 위해 얼마를 남겨야 하는지 숫자로 말해야 한다. “어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현대차는 이미 세계적 기업이다. 세계적 기업이라면 보상 체계도 세계적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기는 협상이 아니다. 파업권은 압박 수단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성과는 아니다. 실제 파업이 벌어지면 노조는 힘을 보여줄 수 있고, 회사는 원칙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산 차질과 브랜드 훼손, 협력사 부담과 고객 신뢰의 균열은 모두의 장부에 남는다. 파업 뒤에 남는 것은 승자의 깃발이 아니라 손실의 명세서일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 노사 합의 이후 대기업 노조들은 성과급의 새 기준을 찾고 있다.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본 노동자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자동차와 조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산업 호황을 근거로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산업마다 체질이 다르고, 이익의 변동성도 다르며, 투자 사이클도 다르다. 삼성의 산식이 현대차의 산식이 될 수 없고, 반도체의 성과급 공식이 자동차와 조선의 표준이 될 수도 없다. 성과는 나눠야 한다. 그것이 시장경제의 신뢰다. 하지만 미래까지 나눠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산업의 상식이다. 이 두 문장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올해 현대차 교섭의 본질이다. 현대차는 지금 단순한 임금협상장에 서 있지 않다. 전기차 캐즘, 중국차 공세, 미국 통상 압박, AI와 로봇 전환, 고령화와 정년 연장 요구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길목에 서 있다. 이런 때 성과급 논쟁이 모든 의제를 삼켜버리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사라진다. 현대차는 다음 10년에도 세계 시장에서 이길 수 있는가. 그 승리 안에 노동자의 자리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노조는 파업권을 얻었다. 이제 더 어려운 선택이 남았다. 그 권리를 실제 파업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합의를 끌어내는 마지막 압박으로 남길 것인가. 회사도 선택해야 한다. 버티기로 시간을 살 것인가, 아니면 투명한 성과 배분과 미래 전환 계획을 내놓을 것인가. 현대차의 성과급 논쟁은 돈의 문제가 맞지만, 돈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제조업이 호황을 다루는 방식, 노동이 기술 전환을 받아들이는 방식, 기업이 성과와 미래를 동시에 설명하는 방식의 문제다. 성과급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과급만으로 미래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파업권을 쥔 현대차 노조 앞에 놓인 것은 잔칫상이 아니라 갈림길이다. 성과를 나누되 투자의 숨통은 남기는 길, 자동화의 불안을 인정하되 변화 자체를 막지 않는 길, 대기업 정규직의 몫을 키우되 협력사와 미래세대의 몫을 지우지 않는 길이 필요하다. 그 길을 찾지 못하면 이번 파업권 확보는 노조의 힘을 보여준 장면으로는 남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자동차 산업의 품격을 높인 장면으로 기억되기는 어렵다. 현대차 노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늦지 않았다. 파업권을 얻은 지금이야말로 파업을 피할 마지막 기회다.
2026-06-26 08: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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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쏠림' 흔드는 삼전닉스 계약학과…최상위권 선택 기준이 바뀐다
[경제일보] 자연계 최상위권 입시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의대가 절대 우위를 지켜온 이공계 입시 판도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취업이 연계된 이른바 ‘삼전닉스’ 반도체 계약학과가 서울대 자연대 합격선을 넘어섰다. 일부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는 지방권 의대보다 높은 합격선을 기록하며 의대 턱밑까지 추격했다. 입시 현장의 변화는 단순한 ‘인기 학과’ 현상이 아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대기업 채용 안정성, 억대 성과급 기대, 첨단산업 인재 확보전, 의대 정원 확대와 지역의사제 도입 논의가 한꺼번에 맞물리며 최상위권 수험생의 진로 선택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계약학과 평균 96.2점…서울대 자연대 앞질렀다 21일 종로학원이 2026학년도 정시 결과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 서울 소재 주요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의 수능 국어·수학·탐구 평균 점수는 96.2점으로 집계됐다. 이는 서울대 자연대 합격자 평균 점수 95.8점보다 0.4점 높은 수준이다. 대학별로는 한양대 반도체공학과가 98.0점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97.0점, 성균관대 반도체 관련 학과 96.0점, 서강대·연세대 반도체 관련 학과가 각각 95.0점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양대 반도체공학과 합격선은 2026학년도 지방권 의대 평균 합격선 97.2점보다 높았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역시 지방권 의대 평균과 거의 같은 수준까지 올라섰다. 서울권 의대 평균 합격선은 98.8점, 경인권 의대는 99.0점으로 여전히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격차는 크게 좁혀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계 최상위권 진로 선택은 ‘의대냐, 서울대 공대냐’ 구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올해 정시 결과는 여기에 ‘대기업 반도체 계약학과’라는 세 번째 축이 본격적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삼성전자 vs SK하이닉스’도 입시 변수로 계약 기업별 차이도 나타났다. SK하이닉스와 채용 협약을 맺은 고려대·서강대·한양대 반도체 계약학과 평균 점수는 96.7점으로, 삼성전자와 계약한 연세대·성균관대 평균 95.5점보다 1.2점 높았다. 이는 최근 메모리 반도체 업황 회복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두각을 나타낸 흐름이 수험생 선호에도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입시업계에서는 “과거에는 기업 브랜드 자체가 절대적 기준이었다면, 최근에는 실적 전망, 성과급 기대, 직무 성장성, 산업 내 위상까지 고려하는 경향이 커졌다”고 본다. 실제 2026학년도 대기업 계약학과 정시 지원자는 전년보다 크게 늘었다. 종로학원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7개 대기업 16개 계약학과 정시 지원자는 2478명으로 전년 1787명보다 38.7% 증가했다. 전체 경쟁률도 9.77대 1에서 12.77대 1로 상승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계약학과 지원자가 전체의 65%를 차지했다. ◆취업 보장·장학금·성과급…‘진로 불확실성’ 줄인 학과의 힘 반도체 계약학과의 가장 큰 강점은 ‘입학과 동시에 진로의 상당 부분이 정해진다’는 점이다. 계약학과는 대학과 기업이 협약을 맺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다. 학생들은 장학금, 현장실습, 인턴십, 졸업 후 채용 연계 등의 혜택을 받는다. 특히 반도체 계약학과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국내 대표 제조기업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안정성이 크다. 과거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를 선호한 핵심 이유는 직업 안정성과 고소득 기대였다. 그런데 반도체 계약학과가 이 두 요소에 상당 부분 근접하면서 선택지가 달라지고 있다. 의대는 긴 수련 과정과 지역의사제, 필수의료 배치 논의 등 정책 변수가 커졌다. 반면 반도체 계약학과는 4년 학부 교육 이후 대기업 취업이라는 경로가 비교적 명확하다. 여기에 HBM, 인공지능 반도체, 첨단 패키징, 파운드리, 차량용 반도체 등 산업 확장성이 더해지면서 ‘공대 진학의 기대수익’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평가다. ◆산업계에는 반가운 신호…하지만 수도권·대기업 쏠림도 과제 이번 결과는 산업계 입장에서는 긍정적 신호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강국을 넘어 시스템반도체, 첨단 패키징, AI 반도체 등으로 전선을 넓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설계·공정·소자·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고급 인재 확보가 필수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학과 협력해 육성한 반도체 계약학과 졸업생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산업 현장에 투입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주요 대학 1기생 졸업이 시작되면 반도체 계약학과 졸업 인원이 연간 400~480명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부작용도 있다. 계약학과 인기가 높아질수록 수도권 주요 대학과 대기업 중심의 인재 쏠림이 심화될 수 있다. 대기업 계약학과는 전국 13개 대학, 18개 학과에서 운영되고 있지만 상당수가 수도권과 과학기술특성화대학에 집중돼 있다. 지방 일반대학의 참여 폭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반도체 인재 양성을 국가전략 차원에서 추진해왔지만, 실제 우수 인재가 일부 대기업 협약 학과에 몰릴 경우 중견·중소 반도체 기업과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인력난은 계속될 수 있다.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키우려면 계약학과 확대뿐 아니라 지역 대학, 전문대학, 대학원, 현장 재교육을 잇는 다층적 인재 공급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027학년도 입시 최대 변수는 의대 증원과 지역의사제 입시업계는 2027학년도 정시에서 반도체 계약학과와 의대의 합격선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역의사제 도입으로 의대 모집 인원이 늘어날 경우 지방권 의대 합격선이 조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종로학원 임성호 대표는 “반도체 계약학과와 의대에 동시 합격할 경우 수험생이 어느 곳을 선택할지 주목된다”며 “선택에 따라 계약학과와 의대 합격선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2027학년도 반도체 학과 모집도 확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진학사 분석에 따르면 서울권 반도체 학과 수시 모집 대학은 2026학년도 14개교에서 2027학년도 15개교로 늘고, 수시 모집 인원은 502명에서 564명으로 62명 증가한다. 다만 삼성전자·SK하이닉스 협약 계약학과 수시 모집 인원은 205명으로 변동이 없고, 증가는 일반 반도체 학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향후 입시 경쟁이 두 갈래로 나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취업이 연계된 계약학과의 초고득점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반도체 학과를 통한 첨단산업 진입 경쟁이다. 계약학과는 취업 안정성이 강점이고, 일반 반도체 학과는 특정 기업에 묶이지 않고 진로를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의대 독주 시대의 균열…핵심은 ‘지속 가능한 선택지’다 반도체 계약학과의 약진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겪어온 의대 쏠림 현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상위권 인재가 산업 현장으로 향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 환영할 일이다. 특히 반도체는 한국 수출과 제조업의 핵심 축이다. 인재가 모이지 않으면 기술 초격차도, 공급망 주도권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입시 합격선 상승만으로 반도체 인재 양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계약학과를 선택한 뒤 실제 산업 현장에서 성장할 수 있는 교육 과정, 연구 환경, 직무 배치, 장기 경력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 대기업 취업 보장이 단기 유인이라면, 산업 생태계 전반의 혁신 역량은 장기 유인이다. 이번 정시 결과는 수험생들이 더 이상 대학 간판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상위권 학생들은 이제 ‘어느 대학이냐’와 함께 ‘어떤 산업으로 가느냐’, ‘졸업 후 어떤 경로가 열리느냐’를 따진다. 의대 일변도였던 자연계 입시가 산업과 노동시장 변화에 반응하기 시작한 셈이다. 한 입시컨설팅 관계자는 “입시 판도 변화의 본질은 한양대 반도체공학과가 지방의대보다 높았다는 한 줄의 숫자에만 있지 않다”며 “한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와 청년 세대의 안정 욕구가 한 지점에서 만났다는 데 있다. 반도체 계약학과의 부상은 최상위권 인재 시장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지만 그 파장은 대학, 기업, 지역, 의료정책, 산업전략 전반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026-06-21 12:5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