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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지출에 포박된 나라살림, 이제 정치가 아니라 국가를 선택해야 한다
[경제일보] 대한민국 재정이 거대한 ‘의무지출의 덫’에 걸렸다. 한번 법으로 못 박힌 지출은 경기가 나빠져도, 세수가 줄어도, 국가채무가 늘어도 줄이기 어렵다. 복지지출과 국채 이자 등 의무지출이 국가 예산의 절반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정부가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관리재정수지는 만성 적자에 빠져 있고 국가채무는 1500조원을 향해 늘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재정위기가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몰고 올 재정 충격을 수년 전부터 경고했지만 정치권은 애써 외면했다. 국민에게 인기 없는 개혁은 뒤로 미루고 당장 표를 얻을 수 있는 복지와 현금성 지원은 경쟁적으로 늘렸다. 그 결과 오늘의 정치가 내일의 청구서를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구조가 굳어졌다. 특히 1981년에 만들어진 만 65세 노인 기준을 지금까지 성역처럼 유지하는 것은 상징적인 사례다. 기대수명이 크게 늘고 고령층의 건강 상태와 경제활동 여건도 달라졌다. 그런데도 기초연금과 교통복지 등 주요 제도의 기준은 수십 년 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령만으로 복지 대상을 획일적으로 정하기보다 소득과 건강, 경제활동 여부 등을 함께 고려해 제도를 현실에 맞게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 문제에 손대면 ‘노인 복지 축소’라는 프레임에 갇힐까 두려워한다. 정부 역시 개편 필요성을 말하다가 선거와 민심을 의식해 슬그머니 물러서기 일쑤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개혁 회피’다. 개혁을 하지 않는 데 드는 비용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결국 국민 전체와 미래 세대가 세금과 국가채무로 부담하게 된다. 이제는 인기 없는 개혁이라도 해야 한다. 노인 연령 기준을 단순히 일률적으로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건강수명과 소득, 경제활동 여부 등을 종합해 복지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기초연금 역시 재정 여건과 복지의 형평성을 고려해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보다 두텁게 하는 방향으로 손질할 필요가 있다. 정년과 복지 수급 연령의 불일치도 해소해야 한다. 60세 전후에 직장을 떠나고 65세부터 각종 복지 혜택을 받는 현재의 구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와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정년 연장과 계속고용을 연계하고 임금체계도 연공서열 중심에서 직무·성과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고령층이 노동시장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치는 것이 단순히 복지지출을 줄이는 것보다 근본적인 해법이다. 의무지출에 제동을 거는 장치도 필요하다. 새로운 복지제도를 만들 때는 재원과 함께 종료 또는 재검토 조건을 제시하고, 일정 기간마다 정책 효과와 재정 부담을 검증하는 일몰제나 재평가제를 확대해야 한다. 기존 사업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계속되는 ‘복지의 관성’도 깨야 한다. 새로운 지출을 늘리기에 앞서 기존 지출의 효율성을 따지고 구조조정하는 원칙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재정준칙 역시 실효성 있게 작동해야 한다. 경제가 좋을 때 세수가 늘었다고 지출을 확대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적자재정으로 다시 돈을 푸는 식의 반복은 지속 가능한 재정 운용이라 할 수 없다. 국가채무와 관리재정수지를 일정 범위 안에서 관리하고 이를 벗어날 경우 정부가 구체적인 정상화 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복지의 방향도 바꿔야 한다. 단순한 현금성 지원을 확대하는 데 그치기보다 취약계층의 자립과 근로를 지원하는 생산적 복지에 재정을 집중해야 한다. 복지와 일자리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직업훈련과 재취업, 의료·돌봄, 주거 지원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 복지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경제활동을 회복시키는 투자로 기능할 수 있다. 재정개혁은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문제가 아니다. 성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무지출이 계속 늘어나면 정부는 미래 산업에 투자할 여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첨단 제조업, 에너지 인프라, 연구개발 등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분야에 재정을 투입하려 해도 기존 복지와 이자 비용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결국 재정의 경직성이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권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국민에게 ‘더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누가 그 돈을 부담할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다. 지금처럼 복지 확대에는 여야가 경쟁하면서 재원 마련과 제도 개혁은 서로 미루는 행태를 계속한다면 국가재정은 머지않아 경제위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재정은 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인이 마음대로 쓰고 미래의 청년들이 갚는 돈도 아니다. 국가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채무자이면서 동시에 재정을 맡아 관리하는 신탁관리자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표를 의식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냉정한 구조개혁이다. 65세라는 숫자에 묶여 있는 복지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치고, 일할 수 있는 고령층의 경제활동을 늘리며, 의무지출에 제동을 걸고 재정준칙을 실효성 있게 작동시켜야 한다. 복지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미래세대의 성장 기반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라살림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개혁의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더 늦으면 재정개혁의 선택지가 아니라 재정위기의 선택지만 남을 수 있다. 정치권이 다음 선거를 계산하는 동안 국가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표가 아니라 나라살림을 선택해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를 물려주는 정치는 책임 있는 정치가 아니다. 지금 정치권이 감당해야 할 가장 시급한 책무는 ‘더 주는 정치’가 아니라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국가재정’을 만드는 일이다.
2026-09-03 1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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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AI의 돈은 어디서 왔나
[경제일보]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지난 12일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부총리에 오른 뒤 경제정책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국유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세제를 개편했으며 금융권의 부실을 털어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밀어 올린 개혁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규모 실업과 지방재정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룽지를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중국 경제의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막대한 돈을 장기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의 자금 동원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개혁과 만나게 된다. 원문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연원을 추적하면서 분세제와 국유기업·금융 개혁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분세제(分税制) 개혁 전까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1993년 중앙정부가 가져가는 재정수입은 전체의 22%에 그쳤다. 지방이 세금의 대부분을 거둬 쓰면서 중앙정부는 전국 단위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일 돈이 부족했다. 주룽지는 중앙세와 지방세를 다시 나누고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75%를 중앙 몫으로 돌렸다. 이듬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은 55.7%로 뛰었다. 중앙정부의 곳간이 커지자 경제를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지역별 이해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산업정책을 펼칠 재정 능력이 생겼다. 중앙의 재정력이 커진 만큼 지방정부가 짊어진 부담도 늘었다. 세입은 중앙으로 넘어갔는데 교육·의료를 비롯해 지방이 맡아야 할 지출은 그대로 남은 분야가 많았다. 세계은행도 1994년 개혁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반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정 불균형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지방정부는 부족한 돈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토지와 부동산 개발에 기대고 각종 예산외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뒤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짓누르는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를 1994년 개혁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방정부의 재정 운용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힘을 얻는 동안 지방에서는 다른 문제가 자라난 셈이다. 주룽지의 개혁은 재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좡다팡샤오(抓大放小)’ 정책 아래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정리하고 대형 국유기업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은 혹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유기업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비효율을 걷어낸 대가를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은행도 바꿨다. 지방정부의 영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자금 배분 권한을 중앙으로 가져오고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세금을 중앙으로 모으고 금융의 돈줄도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특정 반도체 기업이나 AI 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런 개혁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가 만든 것은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분야에 장기간 돈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었다. 그 힘이 20여 년 뒤 반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2014년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반도체 대기금’을 만들었다. 2019년 2기에 이어 2024년에는 등록자본 3440억 위안 규모의 3기 펀드가 출범했다. 중국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했고 공상은행·건설은행·농업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 등 대형 국유은행도 자금을 댔다. 1기 1387억 위안, 2기 2040억 위안에 이어 국가 차원의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서는 이런 힘이 무섭다.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투자를 끊지 않고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10년 이상 돈을 넣을 수 있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부와 국유금융기관이 떠받친다. 지방정부들도 토지와 보조금, 투자기금을 들고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중앙정부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원문에서 CXMT와 YMTC, SMIC 등의 성장 과정에 지방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도 뒤따랐다.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면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지역까지 공장 건설에 나섰고 부실과 중복투자가 생겼다.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는 기술 사기와 파산 사례까지 나왔다. AI에서도 각 지역이 데이터센터와 지능형 컴퓨팅 시설 유치 경쟁에 나서면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손실까지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룽지 시대와 지금의 중국은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값싼 노동력과 빠른 성장, 해외 자본 유입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 규제에도 맞서야 한다. 돈을 모아 한 산업에 집중하는 방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었다. 과거에 효과를 냈던 국가 주도의 투자 방식이 앞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경험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업과 공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규모와 체제는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재정과 금융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원문이 중국 산업정책의 흐름을 한국의 반도체·AI·제조업 전략과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져올 것은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처럼 오랫동안 돈이 들어가는 산업에 자금이 끊기지 않게 할 제도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비슷한 사업에 돈을 붓는 일은 없는지, 기술도 없는 사업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실패가 확인된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지원금은 산업을 키우는 돈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돈으로 바뀐다.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 정부가 국가의 돈을 모으고 움직이는 방식을 바꿨다. 그 힘은 제조업 성장과 반도체 투자에 밑천이 됐지만 지방부채와 부동산 의존, 과잉투자라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국가가 산업을 키운 성공 사례만 보고 투자 규모부터 따라갈 일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에 국가의 미래를 건 한국이라면 중국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도 봐야 한다. 산업정책의 실력은 예산을 크게 잡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투자할 곳과 그만둘 곳을 제대로 가려내는 데서 드러난다.
2026-08-14 17: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