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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 난장판, 제도부터 뜯어고쳐 정쟁의 고리를 끊어라
[경제일보] 국회의 가을이 사라졌다. 고물가와 내수 부진, 저성장으로 국민의 삶은 팍팍해지는데 여의도는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정부를 감시하고 국정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국정감사가 폭로와 고성, 막말과 증인 채택 공방으로 얼룩졌다. 국민이 맡긴 권한을 민생 해결에 쓰기는커녕 정파의 유불리를 따지는 데 탕진하는 국회라면 직무유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의원 개개인의 자질에만 있지 않다. 정쟁을 유도하고 보상하는 국정감사 운영 방식 자체가 개혁 대상이다. 증인 채택은 상대 진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질의는 정책의 실효성을 따지기보다 자극적인 장면을 만드는 데 치중한다. 감사가 끝나면 지적 사항은 보고서에 남지만 정부가 이를 실제로 개선했는지 확인하는 절차는 허술하다. 국감을 내실 있게 치르는 것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증인·참고인 채택 기준부터 객관화해야 한다. 출석 요구의 목적과 안건과의 관련성, 확인할 사실, 대체 가능한 자료의 유무를 사전에 명시하도록 해야 한다.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사유와 판단 근거를 기록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정책 검증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물을 망신 주기 위해 부르는 관행도 차단해야 한다. 정당의 정치적 필요가 아니라 사실 확인의 필요성이 증인 채택의 기준이 돼야 한다. 국감 질의도 정책 검증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상임위원회는 감사에 앞서 핵심 정책과제를 선정하고, 의원들은 질의 자료와 요구 사항을 구체화해야 한다. 정부도 사업별 예산 집행과 성과, 정책 목표 달성 여부를 표준화된 자료로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 반복적인 자료 요구와 일회성 폭로를 줄이고 정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중심으로 심사해야 한다. 국감 성과 역시 질의 시간이나 폭로 건수가 아니라 예산 낭비 방지, 제도 개선, 정책 오류 시정 등 실질적인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자료 제출 거부와 허위 답변에 대한 책임도 강화해야 한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자료 제출을 지연하거나 핵심 내용을 누락하면 그 사유를 서면으로 밝히도록 하고, 고의적인 허위 답변이나 자료 은폐가 확인되면 관련 법령에 따라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의원의 의혹 제기 역시 증거와 사실관계에 근거해야 한다.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재해서는 안 되지만, 고의적인 허위 주장이나 왜곡이 확인되면 정정과 해명 등 책임 있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국감은 무책임한 폭로와 무책임한 은폐 모두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감사 결과에 대한 사후 점검도 의무화해야 한다. 상임위원회별로 지적 사항과 시정 요구, 담당 기관, 이행 기한을 명시한 관리대장을 만들고 정부가 조치 결과와 미이행 사유를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 연도 국감에서는 전년도 지적 사항의 이행 여부부터 점검해야 한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 다시 지적하는 데 그치지 말고 예산 심사와 법률 개정, 제도 개선으로 연결해야 한다. 국감이 매년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는 연례행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국감 운영의 투명성과 의원의 책임성도 높여야 한다. 상임위원회별 감사계획과 주요 질의 주제, 감사 결과, 정부의 후속 조치를 국민이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 정쟁으로 회의가 파행되거나 핵심 현안에 대한 심사가 무산됐다면 그 경위와 책임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의원의 활동을 단순한 출석률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정책 분석의 충실성, 제도 개선 성과, 후속 조치 이행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물론 제도만 바꾼다고 정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야 지도부가 국감을 정파적 동원과 지지층 결집의 무대로 활용하는 한 어떤 규정도 편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당은 정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지 말아야 하고, 야당은 폭로 자체를 성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제도 개혁과 함께 정치권 스스로 정책 경쟁을 우선하는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국감 이후 예산안 심사와 민생 입법은 여야의 실력을 가늠할 시험대다. 경제 위기 대응과 취약계층 보호, 미래 산업 투자, 재정 건전성 등 핵심 과제를 놓고 근거와 대안으로 경쟁해야 한다. 예산과 법안을 정쟁의 인질로 삼는다면 국회는 민생을 말할 자격이 없다. 국정감사는 의원들의 정치적 쇼가 아니라 국민의 세금과 권한으로 정부를 검증하는 헌법적 장치다. 증인 채택은 객관적으로, 질의는 정책 중심으로, 지적 사항은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여야는 정쟁을 부르는 낡은 운영 방식을 뜯어고치고 국감의 성과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국회의 경쟁력은 상대를 얼마나 몰아붙였느냐가 아니라 잘못된 국정을 얼마나 바로잡았느냐로 증명돼야 한다.
2026-10-12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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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 동력 잃은 여당, 당청의 수직적 관성에서 벗어나야
정권의 위기는 대개 야당의 공세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는데도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차리고도 제때 고치지 못할 때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집권 중반기에 접어든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지금 경계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장관 후보자들의 잇따른 낙마에 이어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사의를 표명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낙마한 장관 후보자가 5명에 이르면서 인사 검증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 필요성이 제기됐고, 강 실장은 인사위원장으로서 종합적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의를 밝혔다. 문제는 책임자의 사퇴 그 자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같은 유형의 문제가 반복됐는지, 그리고 집권 여당이 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김민석 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출범 때부터 ‘당청 원팀’을 강조했다. 취임 직후 대통령실과의 관계 복원에 무게를 두면서 전임 지도부와는 다른 당정 관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당정 간 긴장을 낮추고 국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원팀’이 ‘무비판적 일체화’로 변질될 때다. 집권 여당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대통령실의 박수부대가 되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에게 힘을 보태되 잘못된 판단에는 제동을 걸고, 국민이 느끼는 불만을 가감 없이 전달하며, 야당과의 협상에서 국정의 출구를 만드는 것이 여당의 본령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대통령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건전한 긴장 관계를 제도화하는 일이다. 대통령실이 인사 후보자를 검토할 때 여당이 정무적 검증을 하고 청문회 이전에 민심의 반응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인사청문회가 시작된 뒤 새로운 의혹이 쏟아지고 후보자가 낙마한 뒤 책임자를 찾는 방식으로는 국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더구나 집권 중반기에는 여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대통령의 국정 동력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초기에는 대통령의 지지와 국정 추진력이 당을 이끌지만 중반기에 접어들면 여당이 독자적인 정치력을 갖고 민심과 국정을 연결해야 한다. 그런데 여당이 대통령실의 판단을 사후적으로 설명하거나 방어하는 데 머물면 당정 관계는 수직적으로 굳어진다. 대통령실이 정책을 만들고 여당이 국회에서 관철하는 구조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효율적인 당정 관계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다. 최근 부동산과 증시 정책을 둘러싼 민심 이반과 인사 논란, 여권 내부의 갈등은 여당이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김 대표 취임 이후 당정 관계가 진전됐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핵심 지지층의 약화와 여권 내부 갈등, 중도층과의 거리 등도 과제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신호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야당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국회 다수 의석을 가진 여당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특히 인사와 사법, 경제정책처럼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사안에서는 야당과의 협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넓히는 정치가 필요하다. 협치는 약한 여당이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여당이 하는 것이다. 물론 야당 역시 무조건적인 반대와 정쟁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집권 여당이 먼저 협상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여야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국회는 법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 진영 대결의 경기장이 되고 만다. 김민석 대표에게 요구되는 리더십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과 가까운 당 대표가 되는 것과 대통령에게 필요한 말을 하는 당 대표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통령의 성공이 곧 여당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여당이 오히려 강한 여당이다. 이번 인사 파동을 몇몇 후보자의 개인적 흠결이나 비서실장의 책임 문제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인사 추천·검증·정무 판단·당정 협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실과 여당 사이에 상시적인 인사·정책 협의 채널을 만들고, 여당 지도부가 민심과 국회의 판단을 대통령실에 정례적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당 내부에서도 계파와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토론 구조를 복원해야 한다. 여당이 국민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진영의 박수에만 의존하기 시작하면 국정 운영은 현실과 멀어진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반대 의견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정권 중반기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쇄신의 기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 몇 명을 바꾸는 인적 쇄신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관계를 다시 설계하고 여당이 국정의 공동 책임자이자 민심의 전달자, 야당과의 협상자로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원팀’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조직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조직이다. 김민석 대표가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주려면 대통령실의 방패가 아니라 국정의 균형추가 돼야 한다. 그것이 집권 중반기 여당이 쇄신의 동력을 되찾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다.
2026-09-23 16: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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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세 장관 청문회, 이게 제대로 된 인사검증인가
[경제일보] 국회가 15일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승원 법무부 장관, 이소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동시에 연다. 경제정책과 사법행정, 중소기업·벤처정책을 책임질 세 장관 후보자가 같은 날 국회의 검증대에 오르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전날 김성수 대법관 후보자를 시작으로 16일 국방부·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18일 특별감찰관 후보자 청문회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인사청문 슈퍼위크’다. 문제는 청문회가 많다는 데 있지 않다. 하루에 장관 후보자 세 명을 동시에 검증하는 방식으로 국민이 원하는 제대로 된 인사검증이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세 후보자에게는 각각 검증해야 할 쟁점이 적지 않다. 이형일 후보자는 부동산 문제와 미래대응기금·세제개편 등 경제정책, 김승원 후보자는 신약 관련 청탁 의혹과 형사사법체계 개편, 이소영 후보자는 부동산·용역계약 논란과 중소기업 정책 전문성 등이 청문회 쟁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청문회가 이런 의혹을 확인하는 데만 그쳐서도 안 된다. 경제부총리 후보자에게는 고유가와 금융시장 불안, 재정 운용과 부동산·세제 정책을 물어야 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게는 형사사법체계 개편과 검찰·경찰 관계, 법치주의와 정치적 중립에 대한 철학을 확인해야 한다. 중기부 장관 후보자에게는 소상공인 부채와 벤처투자, 창업 생태계와 중소기업 경쟁력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따져야 한다. 장관 청문회의 본질은 과거의 흠결을 찾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맡길 능력과 판단력을 검증하는 데 있다. 세 청문회는 각각 다른 상임위원회에서 진행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청문회가 같은 날 몰리면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 국민의 관심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한 후보자의 중요한 정책 답변이나 새로운 의혹이 다른 청문회의 정치적 공방에 묻힐 가능성도 커진다. 결국 자극적인 한두 장면이나 여야 충돌만 부각되고 정작 정책과 자질에 대한 깊이 있는 검증은 뒷전으로 밀릴 우려가 있다. 인사청문회의 목적은 흠을 많이 찾는 것이 아니라 적임자인지를 제대로 가려내는 데 있다. 증인 채택을 둘러싼 여야의 줄다리기도 문제다. 이번 청문회를 앞두고도 야당은 다수의 증인 채택을 요구했고 여당은 정치공세라며 맞섰다. 증인을 무더기로 불러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필요한 증인마저 정쟁 때문에 부르지 못한다면 청문회는 후보자의 일방적인 해명만 듣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증인은 여당이 후보자를 보호하거나 야당이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과 정책적 판단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어야 한다. 자료 제출을 둘러싼 공방도 달라져야 한다. 청문회 때마다 야당은 후보자가 핵심 자료를 내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후보자 측은 개인정보나 자료 부존재 등을 이유로 맞서는 일이 반복된다. 청문회 당일 새로운 자료를 들이밀고 즉답을 요구하는 방식만으로도 제대로 된 검증은 어렵다. 후보자가 제출해야 할 자료의 범위와 기한을 보다 명확히 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핵심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책임을 묻는 장치가 필요하다. 국회 역시 검증과 직접 관계없는 가족의 사생활이나 정치적 공격을 위한 자료까지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 자료 제출을 놓고 며칠씩 싸우다 정작 정책 검증 시간을 잃는다면 청문제도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도덕성 검증과 정책 검증의 균형도 되찾아야 한다. 장관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 재산 형성 과정과 이해충돌, 법 위반 여부, 공직 윤리를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도덕성 검증이 정책 검증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흠결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과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사람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후보자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만이 아니라 장관이 된 뒤 무엇을 할 사람인지다. 우리 인사청문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장면을 되풀이해 왔다. 여당은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를 지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야당은 어떻게든 낙마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청문보고서 채택 여부까지 후보자의 능력보다 여야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반복됐다. 이래서는 청문회가 고위공직자를 검증하는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 승패를 겨루는 무대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청문회 일정 역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조속한 내각 구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핵심 장관 후보자들을 같은 날 한꺼번에 검증하는 것이 관행이 돼서는 곤란하다. 일정의 효율성보다 검증의 충실성이 우선이다. 최소한 경제·사법·산업처럼 국민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부처 장관들의 청문회는 국민이 충분히 지켜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일정을 분산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를 국회가 ‘통과시켜 주는’ 절차가 아니다. 야당이 후보자를 흠집 내는 정치무대도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 고위공직자의 도덕성과 전문성, 정책 역량을 확인하는 국회의 중요한 견제 장치다. 오늘 세 청문회에서 여야가 누구를 더 몰아붙였고 누가 더 잘 방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세 후보자가 경제부총리와 법무부 장관, 중기부 장관으로서 어떤 원칙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루에 장관 세 명을 불러놓고 몇 시간씩 공방을 벌인 뒤 ‘청문회를 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인사청문회의 성패는 몇 명을 통과시키고 몇 명을 낙마시켰느냐가 아니라, 국민이 그 사람에게 국가의 중요한 권한을 맡겨도 되는지를 얼마나 제대로 밝혀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2026-09-15 09: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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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일 때는 공소취소, 장관 후보 되니 '권한 없다'
[경제일보]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임명권자에게만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다. 검찰과 교정, 출입국, 인권과 형사사법 행정을 총괄하고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까지 떠맡는 자리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과의 적절한 거리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3일 이재명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 논란에 선을 그었다. 김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공소취소를 할 직접적인 권한도 없고 검찰총장을 통해 지휘할 생각도 지금 없다”고 밝혔다.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는 공판검사의 권한이며 이를 존중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과거 발언과의 간극이다. 김 후보자는 의원 시절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관련 의원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이 대통령 사건은 국가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정치인의 입장이 공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국회의원과 법무부 장관은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의원은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자리지만 장관은 법과 절차를 집행하는 자리다. 오히려 장관 후보자로서 과거 정치적 주장과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로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권한의 유무보다 신뢰의 문제다. 법무부 장관에게 직접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없다는 설명은 맞다. 현행 체계에서 개별 사건의 공소유지와 취소는 검사가 판단한다. 다만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하며,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한다. 이 때문에 장관의 과거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태도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신뢰와 직결된다. 더욱이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형사사건이라면 기준은 한층 엄격해진다. 법무부 장관이 과거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를 주장했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장관이 된 뒤에도 같은 판단을 유지하는가. 검찰이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이를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대통령과 여권의 정치적 이해보다 형사사법 절차를 앞세울 수 있는가. 김 후보자가 답해야 할 대목도 여기에 있다. 공소취소가 법적으로 가능하냐는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장관으로 취임한 뒤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어떤 원칙을 적용할지, 이해충돌 우려가 생길 경우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절제할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치주의는 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정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검찰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든 취소하든 국민이 그 결정을 정치적 압력의 결과로 받아들이면 형사사법의 신뢰는 흔들린다. 장관이 실제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정치적 발언이 결정 과정 전체에 의심을 덧씌울 수 있다. 그래서 권력기관의 장에게는 법에 적힌 권한보다 더 넓은 자기 절제가 요구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 법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법은 사람보다 오래가야 한다’는 사고다. 통치자의 이해에 따라 법이 흔들리는 순간 공화정의 토대도 함께 흔들린다고 봤다.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원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사정이 바뀌어도 형사사법의 기준은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이면서 동시에 법치의 관리자다. 두 역할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법무행정의 목표로 읽히는 순간 장관의 독립성은 약해진다. 반대로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이라도 법과 절차 앞에서는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신뢰는 유지된다. 우리 정치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을 둘러싼 논란이 반복된 이유도 이 경계가 자주 흐려졌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 인사와 수사 방향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고, 여권은 검찰개혁을, 야권은 권력수사를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법무부는 정치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정치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장관의 말과 검찰의 판단이 정쟁의 소재로 소비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이제는 이 악순환을 줄여야 한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과거 정치적 발언을 문제 삼는 데서 멈출 일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취임 이후 대통령 사건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에서 어떤 원칙을 적용하느냐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고 검찰의 법적 판단을 존중하며, 지휘권 행사 기준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태도가 관건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도 같은 기준에서 접근하는 편이 낫다. “공소취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단답형 공방보다 대통령 사건에서 장관의 이해충돌을 어떻게 관리할지, 수사지휘권 행사의 기준은 무엇인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를 묻는 편이 생산적이다. 김 후보자가 “지휘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은 방향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국민이 궁금한 것은 현재의 말보다 취임 이후의 행동이다. 의원 시절의 정치적 주장을 장관이 된 뒤에도 법과 원칙보다 앞세운다면 우려는 현실이 된다. 반대로 정치적 이해와 거리를 두고 형사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면 과거 발언과의 간극도 설명력을 얻는다.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의 법률대리인이 아니다. 정권의 이해를 지키는 자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형사사법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본래의 책무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봐야 할 것도 결국 그 점이다. 과거의 발언 자체보다 앞으로 어떤 기준을 지킬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과의 정치적 거리를 스스로 확보하고, 법과 절차를 흔들지 않는 태도로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신뢰는 강한 권한 행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통령과 가까울수록 법 앞에서는 더 멀리 서는 절제에서 나온다.
2026-09-04 16: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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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국회, '국가의 시간' 아껴야
[경제일보] 국회의 시간과 산업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국회에서 법안 한 건이 한 회기 미뤄지는 것은 단지 다음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면 될 일처럼 치부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변전소 하나, 산업용수 관로 하나, 공장 인허가 하나가 늦어지는 사이 경쟁국에서는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고객사의 공급망이 굳어진다. 정치에는 다음 회기가 있지만 산업에는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있다. 22대 국회 후반기 첫 정기국회가 지난 1일 막을 올렸다. 12월 9일까지 꼭 100일이다. 8·30 개각에 따른 장관 인사청문회, 부동산 정책과 사법개혁 법안, 세제 개편에 역대 최대 규모인 821조원짜리 2027년도 예산안까지 한꺼번에 국회 문턱을 넘는다. 여당은 국정과제 입법과 확장재정을 뒷받침하겠다고 하고, 야당은 ‘입법 독주’와 ‘포퓰리즘 예산’을 막겠다며 벼르고 있다. 충돌할 사안이 적지 않다. 다툴 것은 다퉈야 한다. 세금과 부동산, 형사사법 체계를 바꾸는 법에는 서로 다른 철학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821조원의 나랏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도 야당이 매섭게 따져야 한다. 다수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모두 경계할 일이다. 하지만 모든 법안을 같은 정치의 시계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개회사에서 ‘1년을 미룬 법이 10년의 격차를 만든다’며 반도체·AI·첨단바이오 같은 국가전략기술 관련 입법을 서둘러 달라고 했다. 통상과 대외경제 입법에서는 여야가 ‘원팀’으로 움직이자는 주문도 내놨다. 표현이 다소 과장돼 보일 수 있지만 문제의식은 정확하다. 세계의 기술경쟁은 국회의 의사일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내년 예산부터 산업의 속도를 크게 높이겠다고 돈을 걸었다. 2027년도 정부 예산안은 올해보다 12.8% 늘어난 821조원이다. 이 가운데 반도체·피지컬AI·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관련 인프라·기술개발에 21조3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안도 39조5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1.2% 늘렸다. 돈만 놓고 보면 한국이 AI와 첨단산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문제는 예산의 속도와 법의 속도가 다르면 돈도 기다린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만 해도 전력과 용수, 산업단지와 건축 문제를 풀기 위해 전기사업법·수도법·물관리기본법·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건축법 등의 손질이 주요 과제로 거론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에 수십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기업이 있어도 전력과 물을 공급할 제도와 시설이 제때 따라오지 못하면 장부 위 투자는 공장이 되지 못한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GPU를 사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산업이 아니다. 전력망과 부지, 냉각설비와 인허가가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오래된 습관이 끼어든다. 여야가 크게 충돌하는 법안 하나가 상임위를 붙잡으면 그와 직접 관계없는 법안까지 함께 기다린다. 원내 협상이 틀어지면 본회의 일정 전체가 흔들리고, 서로 상대 당 법안에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 민생·산업법안도 협상카드가 된다. 정치에는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흥정하려는 유혹이 있다. 그 비용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과 기업이 낸다. 공장 착공이 늦어지고, 신규 채용이 밀리고, 기업의 투자금은 해외로 옮겨갈 수 있다. 스타트업은 규제가 정리될 때까지 사업모델을 바꾸고, 지역에서는 산업단지 지정만 기다리다 토지가 묶인다. 법안이 국회 서랍에서 보낸 시간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국가의 대기시간’도 비용이다. 이번 정기국회가 해야 할 일은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법은 충분히 싸우고, 어떤 법은 싸움과 분리해 빨리 처리할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야가 국가전략산업과 민생 인프라에 대해서는 별도의 ‘초당적 신속처리 트랙’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회법상 신속처리안건, 이른바 패스트트랙을 남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여야 원내지도부가 정기국회 초기에 합의 가능한 법안을 추려 상임위 심사와 공청회, 법사위 검토, 본회의 처리 시한을 미리 정하자는 것이다. 기준도 까다롭게 세우면 된다. 첫째, 특정 기업이나 계층에 특혜를 주기보다 국가 전체의 산업 기반과 직결되는 법이어야 한다. 둘째, 여야가 정책목표 자체에는 큰 이견이 없고 방법론만 조정하면 되는 법이어야 한다. 셋째, 처리 지연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해외 경쟁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안전·환경·노동권을 속도라는 이름으로 우회하지 않아야 한다. 신속한 입법은 졸속 입법과 같은 말이 아니다. 전력망 건설을 서두른다고 주민의 재산권과 환경 검토를 생략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경쟁력을 이유로 노동기준을 백지수표처럼 풀어주는 것도 곤란하다. 필요한 것은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심사의 끝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업과 국민에게 가장 큰 부담은 엄격한 규제 자체보다 결론이 언제 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일 때가 많다. 여당의 책임이 먼저 무겁다.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만큼 ‘속도’를 ‘독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내놓은 법이라고 원안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1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안이 언제나 옳거나 완벽할 수 없다’며 국회의 지적과 대안을 검토해 필요하면 입법과 예산에 반영하라고 주문했다. 여당이 새겨들을 말이다. 야당도 달라야 한다. 정부 정책을 검증하는 것과 정책을 멈춰 세우는 것은 다르다.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송전망이나 AI 데이터센터의 기반시설까지 정권의 성패와 연결해 지연시키면 정권이 아니라 한국 기업이 경쟁국에 뒤처진다. 잘못된 조항을 고치되 필요한 법은 통과시키고, 그 결과를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것이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이다. 국회는 벌써 대비되는 두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기국회 첫날 행정안전위원회에서는 지방자치법·소방기본법 등 여러 법안이 여야 논의를 거쳐 처리된 반면, 중대범죄수사청 관련 법안에서는 여야가 충돌했다. 정치적 이해가 첨예한 법과 합의 가능한 법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비자’ 심도편에는 ‘법여시전즉치 치여세의즉유공(法與時轉則治 治與世宜則有功)’이라는 구절이 있다. ‘법이 시대와 함께 변하면 다스려지고, 제도가 세상 형편에 맞으면 성과가 난다’는 뜻이다. 2000년도 더 된 문장이지만 기술이 몇 달 단위로 바뀌는 지금의 국회에 오히려 더 절실하다. 법은 산업보다 앞서기 어렵다. 적어도 산업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뒤처져서는 안 된다. 이번 정기국회에는 821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예산보다 더 귀한 자원이 하나 있다. 100일이라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정쟁의 밀도를 높이는 데 쓸 것인지,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데 쓸 것인지가 국회의 성적표가 될 것이다. 여야가 모두 합의하는 법만 처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민주주의에는 갈등이 필요하고, 때로는 오래 토론해야 할 문제도 있다. 다만 반도체와 AI가 세계시장에서 하루를 다투고 있는데 국회가 정치적으로 결론 내지 못한 다른 문제 때문에 전력망과 산업용수 법안까지 세워두는 것은 민주적 숙의가 아니라 행정적 낭비에 가깝다. 법안 처리 건수 몇 백 건을 자랑하는 국회보다 대한민국이 기다리는 시간을 몇 달 줄인 국회가 더 유능하다. 12월 9일 정기국회가 문을 닫을 때 국민이 보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여야가 몇 번 이겼는지가 아니라 공장과 기업, 청년과 지역이 얼마나 덜 기다리게 됐는가. 정기국회 100일의 진짜 경쟁은 법안 숫자가 아니다. 국가의 시간을 누가 더 아껴줬느냐의 경쟁이어야 한다.
2026-09-02 12: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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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을 아파트로 채울 것인가
[경제일보] 주택 문제만큼 우리 사회의 감정을 쉽게 자극하는 정책도 드물다. 집값이 오르면 공급 확대를 외치고, 공급 대책이 나오면 개발 논란이 뒤따른다. 청년 주거 안정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늘리자는 주장에도 반대가 있고, 도심의 빈 땅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목소리에도 환경과 역사 보존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만큼 주택 문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터전과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용산공원 부지 내 청년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정부·여당이 청년층의 주거 안정을 위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와 규제 완화, 도심 공급 방식 등을 놓고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여야의 정치적 공방까지 겹치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리는 모양새다. 그 질문은 간단하다. 청년들의 주거 불안을 해소하면서도 용산공원이 가진 역사적·환경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을 찾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용산공원은 평범한 국유지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군이 주둔했던 공간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상징성이 큰 곳이다. 서울 한복판에 남은 대규모 녹지 공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도시의 허파이자 근현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으로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주택이 절실한 청년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오늘날 청년들에게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다. 결혼과 출산, 취업과 독립, 삶의 계획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만으로 서울에서 안정적인 주거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신뢰도 흔들린다. 청년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을 ‘집이냐 공원이냐’라는 이분법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공원을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단순하고, 공원은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주장 역시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 도시에는 주거와 환경, 역사와 개발, 현재와 미래가 함께 존재한다. 정책은 이 가치들의 충돌을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더욱이 서울의 주택 문제는 특정 부지 하나를 개발한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서울의 집값과 전월세 불안에는 공급 부족뿐 아니라 교통망, 직주근접, 교육, 금융, 세제, 재건축·재개발 규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정부가 도심의 귀한 땅을 활용한다면 무엇보다 ‘얼마나 많이 지을 것인가’보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지을 것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특히 공공주택 정책에서 숫자 경쟁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몇 호를 공급하느냐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 한복판의 비싼 땅에 지은 상징적인 주택 몇 천 호가 아니라 합리적인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양질의 주택이다. 공급 지역과 교통, 생활 인프라, 임대료, 관리비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용산공원 주변을 포함한 도심 공급 전략도 보다 넓은 시야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 이전 부지, 유휴 국공유지, 철도·차량기지, 저이용 공공시설 부지, 역세권 복합개발 등 도심 곳곳에는 주택 공급과 도시 재생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기존 주거지의 재건축·재개발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드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개발 가능한 곳을 찾았다고 무조건 아파트를 올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시의 녹지와 역사문화 자산은 한번 훼손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특히 용산공원처럼 상징성이 큰 공간이라면 개발 여부뿐 아니라 장기적인 도시계획과 세대 간 형평성까지 따져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정치의 절제다. 주택 공급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반대 의견을 ‘공급을 막는 발목잡기’로 몰아서는 안 된다. 공원 보존을 주장하는 쪽 역시 주거난을 호소하는 청년들을 개발 논리에 희생되는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 자기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합리적인 해법은 사라진다. 특히 국가의 중요한 공간을 놓고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앙정부는 국가 차원의 주택 공급 필요성을 설명하고,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환경에 관한 전문적 판단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두 기관이 공개적인 검증과 협의를 통해 최선의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립적인 전문가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용산공원의 역사·환경적 가치와 주택 공급의 필요성을 동시에 평가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와 장기적인 도시계획을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한번 결정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은 신중하게 결정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공원은 한번 훼손하면 복원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반면 청년 주거 문제는 용산공원 하나에 모든 해법을 걸지 않고도 여러 지역과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치밀한 비교와 검토가 필요하다. 동시에 정부는 용산공원 논란을 핑계로 청년 주택 공급을 미뤄서도 안 된다. 청년 주거 안정은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도심 곳곳의 유휴부지를 찾아 공급을 확대하고, 역세권 고밀 개발과 재건축·재개발을 합리적으로 활성화하며, 공공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공급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에는 늘 비용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고, 그 편익을 누가 누리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용산공원을 지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다. 청년에게 안정적인 집을 제공하는 것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갈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이다. 용산공원이 정쟁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청년 주거 문제가 정치적 구호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숫자를 앞세운 밀어붙이기도, 보존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무조건적인 반대도 아니다. 청년에게는 집을, 시민에게는 공원을, 도시에는 미래를 남기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 한쪽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이고 협치의 출발점이다. 용산공원을 둘러싼 논쟁이 또 하나의 소모적인 정치 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서울의 주택 공급과 도시계획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집값을 잡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도시의 소중한 자산을 잃어서도 안 되고, 공원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청년들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과거를 지키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도시정책이고, 지금 우리 정치가 보여줘야 할 상식이다.
2026-08-23 1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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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李 대통령, 與 전대 후 갈등 치유 메시지
이재명 대통령은 18일 "국민의 삶을 외면하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백해무익한 정쟁보다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다 함께 손을 맞잡을 때"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국민 삶의 개선, 불공정과 비정상의 중단 없는 개혁, 글로벌 초격차 강국의 실현을 위해 국민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정치권 모두가 긴밀하게 협력하자"며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철통같은 국가 안보도, 빈틈없는 재난 대비도,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쉽지 않다"며 "이를 위해서는 주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작은 차이보다 큰 공통점을 찾아 국민의 뜻을 받들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이어 "사람들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갈등도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우리는 모두 국민의 더 나은 삶과 국가의 나은 미래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운명 공동체"라며 "당이 달라도, 진영이 달라도, 그리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상대라 하더라도 국민과 나라를 위한 공동의 책임을 짊어진 동반자로서 책임은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사람들 사이에는 동질성과 이질성이 병존한다"며 "다른 점들을 찾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벌어지고, 같은 점을 찾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가까워진다"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전날 종료된 것을 계기로 그간 고조됐던 당내 갈등의 치유를 당부하는 한편, 야권을 향해서도 민생과 관련한 협조를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주말 남부지방에 쏟아진 폭우와 관련해서는 "거제를 포함해 피해가 큰 지역의 피해 복구 대책을 잘 챙겨달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기록적인 폭염, 가뭄, 폭우가 동시에 나타나는 기상 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다"며 "이제는 기후 문제도 국가 안보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때"라고 언급했다. 이어 "과거의 기후에 맞춰졌던 시스템의 현대화가 시급하다"며 "댐, 저수지, 하천 제방, 하수관로 등 인프라를 극한적인 기후 재난까지 대비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충분히 보강하고, 인공지능 기술 활용과 기상 위성 추가 확보를 통해 기후 예측 모델을 정교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재난 발생을 예측하고 선제 대비하는 국가 체계를 갖추는 데에도 주력해야 한다"며 관련 예산·인력 확충과 제도 개선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2026-08-18 13:5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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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성장'을 말할 때다
[경제일보]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 중남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3일 귀국했다. 집권 1년은 성과를 자축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는 데 머물 시점이 아니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국민 앞에 분명히 밝힐 때다. 지금 정부가 제시해야 할 가장 절박한 국가 의제는 성장이다. 분배와 복지, 공정과 통합도 지속적인 성장의 토대 없이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지난 1년간 정부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 관계를 복원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미국·중국·일본은 물론 유럽과 신흥국으로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점은 평가할 만하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소비 회복도 경제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 버팀목이 됐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0%로 전망하면서 반도체 경기와 수출 증가를 긍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최근에는 수출과 투자를 중심으로 성장세가 강해졌다는 판단 아래 기준금리를 2.50%에서 2.75%로 올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지표만으로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에 대한 수출 의존도는 여전히 높고 건설투자의 회복은 더디다. 미국의 관세정책과 국제 금융시장 불안, 중국의 산업 추격도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실적이 좋아져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지방경제와 청년 고용으로 온기가 충분히 퍼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남아 있다. 성장률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지속 가능성과 확산성이다. 이번 순방은 이런 한계를 돌파할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글로벌 인공지능 기업과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인공지능(AI) 협력과 투자 확대를 논의했다.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핵심광물과 에너지, 식량, 방산 등 경제안보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특히 한국과 브라질은 남미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와의 무역협정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실무그룹 구성과 핵심광물 협력 확대에 뜻을 모았다. 중남미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먼 시장에 머물지 않는다. 리튬과 구리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의 주요 공급처이자 방산·조선·원전·바이오·식품 산업의 잠재시장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공급망의 블록화를 재촉하는 상황에서 자원과 시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이 특정 국가와 특정 시장에 편중된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면 중남미와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하지만 정상외교에서 체결한 양해각서와 공동성명은 출발점일 뿐이다. 외교적 약속이 기업의 수주와 투자,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순방은 사진과 구호만 남긴다. 정부는 국가별 후속 사업을 정리한 경제외교 이행표를 만들어 국민과 기업에 공개해야 한다. 핵심광물 확보 물량과 장기 구매계약, 현지 광산 공동개발, 방산 수출 금융, 바이오 인허가 협력, 메르코수르 무역협정 협상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금융기관이 따로 움직이는 낡은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미래산업을 선택하고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AI·반도체·조선·방산·바이오는 한국이 이미 일정한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췄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 분야다. 이들 산업을 단순히 개별 기업의 사업으로 보지 말고 인재와 전력, 용수, 데이터, 금융, 세제, 통상외교가 결합된 국가 프로젝트로 다뤄야 한다. AI 경쟁력은 선언이나 연구개발 예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망과 첨단 그래픽처리장치 확보, 산업 데이터 활용, 전문인력 양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반도체 산업도 공장 건설 지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와 시스템반도체, 첨단 패키징까지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조선과 방산은 수출금융과 유지·보수 체계를 강화하고, 바이오는 임상과 인허가에 걸리는 시간을 경쟁국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규제혁신도 더 이상 부처별로 몇 건의 규제를 없앴다는 실적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의 존재만이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같은 사안을 놓고 부처마다 해석이 다르고 정권이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기준이 흔들린다면 기업은 공장을 짓거나 신사업에 뛰어들기 어렵다. 신산업 규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처리시한제를 도입하고, 정부가 기한 내 답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제도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도 정부 지원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세제와 금융, 인프라를 제공한다면 기업은 국내 투자와 고용, 협력업체와의 성과 공유로 응답해야 한다. 해외 투자 확대가 불가피하더라도 연구개발과 핵심 제조기반, 양질의 일자리는 국내에 남기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기술 축적과 청년의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성장정책을 소수 기업을 위한 특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의 책임도 무겁다. 여야가 모든 경제정책을 정쟁의 소재로 삼는 동안 세계 각국은 AI와 반도체, 에너지와 방산을 놓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성장전략은 어느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회는 첨단산업 전력망과 인재 양성, 기업 투자와 규제혁신에 필요한 법안을 정파적 이해에서 떼어내 처리해야 한다. 정부 역시 야당과 기업, 노동계의 의견을 듣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주역>에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나온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 더 나아가기 어려운 변곡점에 서 있다. 수출 대기업과 수도권, 추격형 제조업에 기댄 성장 모델을 혁신기업과 지역,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선도형 성장 모델로 바꾸지 못하면 저성장은 일상이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1년이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 기반을 세운 시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중남미 순방에서 확보한 외교적 공간을 공급망과 시장, 투자와 일자리로 바꾸는 일이 그 첫 시험대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시간을 끝내고 경제가 국민의 삶을 일으키는 시간을 열어야 한다. 성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지 않다. 정부는 이제 성장의 필요성을 주저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다만 그 성장은 소수의 숫자를 키우는 성장이 아니라 기업의 혁신과 노동의 정당한 보상, 지역의 기회와 국민통합을 함께 이끄는 성장이어야 한다. 취임 1년 이후의 국정은 바로 그 목표에 집중돼야 한다. 대한민국 경제대전환의 골든타임은 이미 시작됐다.
2026-08-03 0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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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피의 오명, 자본시장 신뢰부터 다시 세워야
[경제일보] 우리나라 증시가 이른바 '롤러코스피', '홀짝 증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은 지 오래다. 하루는 급등했다가 다음 날에는 급락하는 극심한 변동성이 반복되면서 투자자들은 시장의 방향성을 예측하기보다 운에 기대야 하는 현실에 내몰리고 있다. 글로벌 거시경제 변수와 미국 기술주 흐름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구조 속에서 한국 증시는 독자적인 상승 동력을 잃었고, 개인투자자들의 피로감은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국내 증시를 떠나 미국 등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이른바 '국장 탈출' 현상마저 일상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투자 성향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본시장은 기업의 성장 자금을 공급하고 국민에게는 안정적인 자산 형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의 혈맥이다. 증시가 활력을 잃으면 기업의 투자와 고용도 위축되고, 국가 경제의 성장 기반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와 금융당국의 대응은 단기적인 시장 안정책에 머물러 있을 뿐,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수 방어가 아니라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구조 개혁이다. 한국 증시의 가장 큰 고질병은 세계가 지적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우리 기업들의 실적과 경쟁력은 세계적 수준에 근접했지만, 시장에서는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낙후된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 친화성이 부족한 경영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대주주 중심의 의사결정, 소액주주의 권익을 외면하는 경영 관행, 물적분할 이후의 중복 상장, 그리고 지배력 유지를 위한 불투명한 기업 운영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시장에서는 "한국 주식은 장기 투자할수록 손해"라는 자조가 나오는 현실이다. 이러한 인식이 굳어진다면 국내 자본은 물론 해외 투자자들까지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역시 방향성은 옳지만 실효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자율적 참여와 공시 확대, 세제 지원만으로는 수십 년간 고착된 지배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시장은 선언이 아니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뿐 아니라 전체 주주에 대해 부담하도록 명확히 하는 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사회가 특정 지배주주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본시장 선진화의 출발점이다. 주주 권익 보호 장치도 한층 강화해야 한다. 물적 분할과 합병, 대규모 구조조정 등 소액주주의 재산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공정한 보상과 선택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의무공개매수 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보완하고,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배당소득 분리과세와 자사주 소각 활성화, 합리적인 상속세 제도 개선 등을 통해 기업이 이익을 주주와 적극적으로 공유하도록 유도하는 세제 개편도 병행되어야 한다. 기업이 현금을 쌓아두기보다 투자와 배당을 통해 시장과 성과를 공유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다. 자본시장은 숫자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결국 신뢰 위에서 작동하는 시장이다. 신뢰를 잃은 시장에는 자금도, 투자도, 미래도 머물지 않는다. 지금 한국 증시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일시적인 수급 불균형이나 경기 순환이 아니라 시장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붕괴에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자본시장 선진화를 정쟁의 대상이 아닌 국가 경쟁력 강화의 핵심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기업 또한 소액주주를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기업의 공동 주인으로 존중하는 경영 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투명한 지배구조와 책임 있는 경영, 공정한 시장 질서가 확립될 때 비로소 '롤러코스피'라는 오명을 벗고 한국 증시는 국민의 자산을 키우고 세계 자본을 끌어들이는 진정한 선진 자본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2026-07-16 10:4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