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45건
-
-
트럼프 "韓 500억달러 투자" 재차 주장…정부 합의는 '조건부 검토'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500억달러 투자를 거듭 기정사실화했다. 대만의 LNG 구매와 일본의 반도체 투자도 관세·무역 협상의 성과로 내세웠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발표한 합의는 상업성과 국내법 요건을 전제로 한 사업 검토다. 대만 역시 구체적인 투자 조건은 후속 협상으로 정한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한국의 알래스카 LNG 인프라 투자 500억달러가 양국 무역·투자 합의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전날 알래스카 공화당 후보 지원 유세에서 밝힌 내용을 하루 만에 다시 강조했다. 미국 중간선거는 11월 3일로, 이날 기준 20일 남았다. 한국의 공식 발표와는 차이가 있다. 관계부처는 지난 1일 알래스카 LNG 사업에 대해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른 상업적 합리성과 관련 국내법상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추진 여부를 판단한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 자료에는 한국의 투자액 500억달러가 명시되지 않았다. 알래스카 LNG는 북부 노스슬로프의 천연가스를 약 1300㎞의 가스관으로 남부에 보내 액화한 뒤 수출하는 사업이다. 아시아로 태평양을 건너 직접 운송할 수 있지만, 장거리 가스관과 수출시설에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 한국의 사업 참여 판단에는 건설비와 LNG 판매가격, 장기 구매계약 등 수익성 조건이 중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이 알래스카 LNG를 향후 20년간 700억∼800억달러어치 구매하고, 사업에 44억달러를 지분 투자하기로 했다고도 밝혔다. 구매 물량은 사업 생산량의 30%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LNG 구매대금과 개발사업 지분 투자금은 서로 다른 항목이다. 대만 경제부가 14일 발표한 계획은 생산 개시 후 연간 600만t 구매와 최대 44억달러 투자다. 국영 에너지기업 CPC가 지난해 3월 구매·투자 의향서를 체결한 뒤 협상을 진행해왔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투자 구조와 지분율, 조건은 후속 협상과 상업계약 절차로 정한다고 설명했다.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대만 공급은 이르면 2032년부터 가능하다고 제시했다. 일본의 반도체 투자에서는 기업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함께 나왔다. 글로벌파운드리는 같은 날 미·일 협력에 따른 최대 210억달러의 자금 지원으로 뉴욕주 몰타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이 투자 재원을 제공하고, 회사는 제조기술과 운영 역량을 맡는 구조다. 첫 공장에 약 100억달러를 투입해 올해 말 착공하고 2029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추가 약 100억달러는 두 번째 공장에 사용할 계획이다. 자동차·산업·통신 인프라용 반도체 공급을 확대하며, 회사는 건설·관련 산업 일자리 약 2만7000개와 제조업 일자리 1000개 이상을 예상했다. 미국 정부의 글로벌파운드리 지분 확보도 추진된다. 회사는 기존 반도체지원법 지원금 가운데 9억5500만달러를 실리콘 포토닉스와 실리콘 게르마늄, 첨단 패키징 투자로 재배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별도 합의에 따라 미 상무부는 회사 지분 약 4%를 받을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 나라의 약속을 미국의 대형 건설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사업 검토, 대만은 구매·투자 조건 협상, 글로벌파운드리는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한 단계로, 실제 계약과 자금 집행 일정은 각각 구분된다.
2026-10-15 08:02:31
-
-
리야드 공항 피격이 울린 경고음…에너지 안보가 곧 국익이다
[경제일보] 중동의 불길이 세계 경제의 급소를 겨누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관문인 킹칼리드 국제공항이 예멘 후티 반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운항이 중단됐다는 소식은 중동 정세의 불안정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공항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는 가운데 석유 시설과 주요 해상 수송로까지 위협받으면서 지역의 안보 불안이 세계 경제에 미칠 파장도 커지고 있다. 민간 항공 인프라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에너지 생산과 수송의 핵심 거점 역시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또 하나의 국지적 무력 충돌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중동의 안보 불안이 국제유가의 변동성과 해상 운임, 보험료 상승 압력을 키우고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력으로 민간 시설을 위협하고 국제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국제사회는 민간인의 안전과 국제법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긴밀히 공조해야 한다. 그러나 규탄 성명만으로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중동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국제유가는 출렁이고 해상 운임과 보험료는 상승 압력을 받는다. 원유 수송로가 위협받거나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 에너지 가격은 실제 수급 악화 이전부터 움직인다. 시장의 불안이 물가를 밀어 올리고 기업의 생산비용을 높이며 가계의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연쇄 충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에 이번 사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급 기반이 취약하고 원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자원 빈국이다. 올해 들어 수입선 다변화로 중동산 원유 비중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전체 원유 수입의 절반을 웃돈다. 주요 해상 수송로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 지역 분쟁이 장기화하면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정유·석유화학업계의 원가 부담이 커지고, 운송비와 생산비용을 통해 산업 전반으로 파장이 번진다. 수입물가 상승은 소비자물가를 자극하고 기업의 채산성 악화는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환율까지 겹친다면 같은 양의 원유를 들여오는 데 더 많은 원화를 지출해야 한다. 중동의 안보 위기가 우리 경제의 물가와 성장, 민생을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다. 그런데도 위기가 터진 뒤 유가 동향을 살피고 임시 대책을 내놓는 데 그친다면 정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 안보는 가격이 급등한 뒤 대응하는 사후 관리가 아니라 공급 차질을 가정하고 미리 대비하는 국가 생존 전략이어야 한다. 정부는 국제유가와 해상 운송로의 위험 수준을 상시 점검하고, 비상 상황별 원유 수급 계획과 부처 간 대응 체계를 구체화해야 한다. 전략 비축유의 규모뿐 아니라 방출 기준과 실행 절차, 실제 공급까지 걸리는 시간도 점검해야 한다. 위기 때 꺼내 쓸 수 없는 비축유는 장부상의 숫자에 불과하다.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도 더는 미룰 수 없다. 중동 의존도를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낮추기는 어렵지만 미국과 다른 산유국 등으로 도입선을 넓히고 공급 계약과 수송 경로를 분산해 특정 지역의 위기가 국가 전체의 공급 위기로 번지는 위험을 줄여야 한다. 액화천연가스(LNG)와 핵심 원자재 역시 공급망 취약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원전·재생에너지 등 국내 에너지 기반을 안정적으로 확충하는 일도 장기적인 대응책이다. 에너지 전환은 구호나 이념이 아니라 공급 안정성, 경제성, 환경성을 함께 따지는 현실적 원칙 위에서 추진해야 한다. 기업과 시장의 대응을 뒷받침할 정교한 정책도 필요하다. 정부는 정유·석유화학·항공·해운 등 에너지 가격과 수송 차질에 민감한 업종의 위험 노출을 점검하고, 중소기업의 원가 부담과 자금 경색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국제유가 상승을 빌미로 한 담합이나 부당한 가격 인상은 엄정하게 감시하되, 시장 가격을 무리하게 억누르는 방식으로 공급을 위축시켜서도 안 된다. 취약계층 지원은 대상을 명확히 하고 한시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재정 부담을 무작정 늘리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키우는 일이다. 외교·안보 역시 경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토대로 주요 우방국과 정보 공유, 해상교통로 보호, 공급망 안정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 채널을 유지해 우리 국민과 기업의 안전을 확보하고 에너지 공급 차질을 최소화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대한 정치적 구호에 매달리기보다 국제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실질적인 국익을 확보하는 실용 외교가 중요하다. 에너지 수송로의 안전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가 함께 지켜야 할 공공재다. 정치권도 정쟁을 멈추고 국가 에너지 안보를 초당적 과제로 다뤄야 한다. 비축 시설과 수입선 다변화, 에너지 효율 투자에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위기가 잠잠해지면 예산과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정부는 위기 때마다 국민에게 절약을 호소하기에 앞서 얼마나 치밀하게 대비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리야드 공항을 둘러싼 위기는 중동의 불안이 언제든 한국의 공장과 물류망, 국민의 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에너지 안보를 시장에만 맡길 수도, 정치적 구호로 해결할 수도 없다. 정부는 비축과 다변화, 외교와 산업정책을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야 한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능력이 곧 경제의 경쟁력이고, 위기 속에서도 국민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국가의 실력이다. 위기가 닥친 뒤 허둥대는 나라와 위기를 예상하고 대비한 나라의 차이는 평상시의 준비에서 결정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론이 아니라 실행이고, 임시방편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에너지 안보 체계다.
2026-10-13 10:19:50
-
-
삼성중공업, 해양플랜트에 웃고 울었다…'기술 집중 DNA'의 명암
[경제일보] 삼성중공업은 해양플랜트에서 성장과 위기를 함께 경험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FLNG)를 건조한 기술력은 회사를 차별화했지만, 공사 지연과 원가 증가는 실적을 짓눌렀다. 고난도 제품에 집중한 전략은 경쟁력을 키우는 동시에 사업 관리의 한계도 드러냈다. 삼성중공업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 세계 신조 FLNG 11기 가운데 7기를 수주했다. 회사가 집계한 누적 계약금액은 155억 달러다. 과거 손실을 겪고도 해양사업을 이어온 회사는 건조 경험을 후속 프로젝트에 적용하고 있다. 기술력을 지속적인 이익으로 바꾸려면 설계·원가·공정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고난도 기술의 명암 삼성중공업은 1974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맞춰 출범했지만, 1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기 침체로 조선소 건설을 미루고 산업기계에 집중했다. 이후 1977년 우진조선을 인수해 삼성조선을 설립하며 조선업에 진입했다. 거제조선소의 첫 도크는 1979년 12월 완공됐다. 이듬해에는 호주 선주가 발주한 2100톤급 석유시추보급선 두 척을 처음 진수했다. 이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느냐가 회사의 경쟁력을 결정했다. 오늘날 LNG운반선과 FLNG 중심의 사업 구조도 제품 선택과 기술 축적의 결과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글로벌 조선 시황에 따라 부가가치가 높은 고수익 선박을 위주로 영업 전략을 확립했다”고 했다. LNG운반선은 이 전략의 대표 선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26년 한국 조선업 검토 보고서에서 삼성중공업의 강점을 해양플랫폼과 고사양 LNG운반선으로 설명했다. 높은 단가와 복잡한 엔지니어링에 집중한 사업 모델이라는 평가다. 상징적인 프로젝트가 프렐류드 FLNG다. 삼성중공업은 프랑스 테크닙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2011년 쉘로부터 수주했다. 길이 488m, 폭 74m의 설비는 2017년 6월 거제조선소를 떠났다. 천연가스를 해상에서 액화·저장해 출하하는 시설을 거대한 부유식 구조물에 담아냈다. 그러나 기술적 성취가 안정적인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삼성중공업은 2015년 잠정 실적 발표에서 연간 영업손실 1조5019억원을 기록했다. 회사는 수주잔고의 원가를 재점검하고 예상 공사비 증가분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해양설비 건설 지연에 따른 비용 증가도 손실의 배경이었다. 대형 프로젝트는 설계와 자재 조달, 제작 일정이 맞물린다. 설계 변경은 자재 투입과 제작 순서를 바꾸고, 공정 지연은 인력과 설비 사용 기간을 늘린다. 추가 비용을 계약에 따라 회수할 수 있는지도 이익을 좌우한다. 높은 계약금액만큼 수행 과정의 위험 관리가 중요하다. 삼성중공업은 2015~2022년 연간 영업적자를 기록한 뒤 2023년 흑자로 돌아섰다. 당시 발표한 영업이익은 2333억원이었다. 한겨레는 선박 가격이 회복된 시기에 수주한 물량이 실적에 기여했다고 보도했다. 회복에는 기술 축적과 함께 시장 여건과 수주 시점도 작용했다. 경험을 수익으로 과거 경험을 후속 사업에 활용하는 방식이 ‘레슨런드(Lessons Learned) 시스템’이다. 이전 공사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분석해 설계와 공정을 최적화하는 체계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FLNG 계약에서도 이를 적용해 표준화 수준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FLNG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차기 프로젝트에 발생이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레슨런드 시스템’을 운영해 효율적으로 공정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는 대형 FLNG의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통합 수행하는 EPC(설계·조달·시공) 역량도 갖췄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개별 프로젝트의 경험을 반복해서 활용하는 데 있다. 앞선 공사에서 확인한 문제를 다음 설계와 제작 일정에 반영하면 같은 위험에 다시 노출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다만 표준화 효과를 확인할 공개 수치는 부족하다. 회사는 공정 효율과 원가 개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건조기간과 비용 감소분은 계약·영업 기밀을 이유로 밝히지 않았다. 실제 성과는 설계 변경과 공정 지연, 예상 원가와 실제 원가의 차이가 얼마나 줄었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3조2307억원, 영업이익은 3250억원이었다. 전년 동기보다 각각 약 20%, 59%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10.1%를 기록했다. 회사는 조업일수 증가와 글로벌 오퍼레이션 생산 본격화 등을 주요 요인으로 제시했다. 다만 상선과 FLNG의 기여도는 구분해 밝히지 않아 표준화와 실적 개선의 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생산 기반 강화에는 디지털·인공지능(AI)·로보틱스 전환을 묶은 ‘3X’를 활용하고 있다. 회사는 각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순차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수행 단계에 맞춰 설계·제작·시운전 역량을 배치하는 일도 수익성을 지키는 과제다. 외부 위험도 남아 있다. 로이터는 지난해 6월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와의 쇄빙선 관련 계약 두 건이 해지됐다고 보도했다. 계약 규모는 총 4조8500억원으로, 같은 금액의 손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회사는 싱가포르 국제중재가 진행 중이라며 구체적인 상황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의 기술 집중 전략은 차별화된 제품과 긴 적자의 역사를 함께 남겼다. 앞으로의 성장은 수주 규모와 수행 능력에 달려 있다. 축적한 경험을 설계와 공정에 반영해 계약 당시 예상한 원가와 납기를 지켜내는 것이 지속적인 이익 창출의 관건이다.
2026-10-07 17:22:45
-
-
-
보호무역은 예고하고 온다…통상도 먼저 움직여야 한다
[경제일보] 세계 철강시장의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철강에 50%의 고율 관세를 매기고 있고 유럽연합(EU)은 지난 7월부터 무관세 수입 물량을 대폭 줄였다. 여기에 미국 철강업계가 최근 한국산 철강 수입 증가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지난달 28일 미국철강협회(AISI)는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에 한국산 철강 수입 증가에 대응해 달라고 요구했다. AISI에 따르면 한국산 장척 철강제품의 미국 수입량은 2024년 7월 2만2100톤(t)에서 올해 7월 14만5300t으로 늘었다. 철근을 포함한 일부 품목의 급증세가 미국 철강산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아직 미국 정부가 한국산 철강에 추가 규제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업계가 정부에 조치를 요구한 단계다. 그럼에도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다. 미국은 지난해 철강 관세를 25%에서 50%로 올렸고, 한국이 2018년부터 적용받았던 무관세 쿼터도 지난해 3월 폐지됐다. 유럽의 장벽도 높아졌다. EU는 지난 7월 기존 철강 세이프가드를 새로운 관세할당제도(TRQ)로 대체했다. 전체 무관세 물량은 연간 3382만t에서 1835만t으로 약 46% 줄었고 쿼터를 넘어선 물량에는 50%의 관세가 붙는다. 한국은 협상을 통해 전용 쿼터 207만3000t을 확보했다. 이전보다 19.7% 줄었지만 EU 전체 쿼터가 크게 축소된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가 시장 접근 기반을 상당 부분 방어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정부는 지난 5월부터 EU 집행위원회를 상대로 우리 업계의 우려를 전달하고 협상을 벌였다. 이 대목은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질 때마다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철강을 둘러싼 세계의 움직임은 개별 국가와 벌이는 관세 협상의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달 30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글로벌 철강 공급과잉 포럼에 참여한 28개 시장경제국은 공급과잉에 공동 대응하는 이른바 ‘밀워키 프레임워크’를 내놓았다. 반덤핑과 상계관세, 세이프가드 등 무역구제 수단을 적극 활용하고 공급과잉을 키우는 보조금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OECD는 세계 철강 과잉생산능력이 지난해 6억100만t에서 올해 7억4500만t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과잉에 대응하겠다는 명분 아래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주요국의 시장 방어가 한층 거세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얘기다. 한국에는 간단하지 않은 문제다. 중국발 저가 철강의 유입을 막아야 하는 동시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국산 제품이 규제 대상이 되지 않도록 방어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보호가 필요하고 해외에서는 시장 개방을 요구해야 하는 난처한 위치에 놓여 있다. 통상당국의 능력이 시험받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협상단을 보내는 대응을 넘어 주요 시장의 정책 변화를 먼저 읽는 시스템이다. 미국 철강업계와 의회에서 어떤 요구가 나오고 있는지, EU가 탄소와 공급과잉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무역규제에 연결하는지 상시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특정 품목의 수출이 급증하면 현지에서 어떤 반작용이 생길지도 미리 살펴야 한다. 이번 미국 철강업계의 문제 제기가 좋은 사례다. 7월 한국산 철강의 미국 수입량은 55만6000t으로 전월보다 32% 늘었다. 미국 철강업계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수준의 변화라면 정부와 업계가 수출 증가의 배경과 품목별 영향을 미리 분석해 둘 필요가 있었다. 통상은 상품을 많이 파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출이 빠르게 늘 때 상대국 산업과 정치권이 어떻게 움직일지까지 읽어야 한다. 철강 문제를 철강만의 문제로 다뤄서도 안 된다. 한국은 미국에서 자동차와 배터리, 반도체, 조선, 방산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알래스카 LNG와 에너지 프로젝트를 둘러싼 협력도 논의되고 있다. 미국 역시 한국의 조선과 제조업 역량을 필요로 한다. 철강 협상도 이 큰 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산 철강이 미국 자동차·조선·에너지 산업의 공급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구체적인 숫자로 보여주고,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와 고용 효과까지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철강 수입량 하나만 놓고 방어하는 협상보다 산업협력 전체의 이해관계 속에서 문제를 푸는 편이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EU는 단순한 수입규제를 넘어 탄소배출까지 무역의 조건으로 만들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대표적이다. 앞으로 유럽 시장에서 철강의 경쟁력은 가격과 품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해 생산했는지도 상품 경쟁력의 일부가 된다. 결국 통상정책과 산업정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정부가 기업에 시장 다변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주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시장의 인증과 규제 정보를 제공하고 무역보험과 금융, 현지 투자, 통상법률 지원을 묶어야 한다. 기업도 범용재 중심의 경쟁에서 벗어나 자동차강판과 조선·에너지용 특수강 등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제품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저탄소 철강 기술 역시 수출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가 됐다. 정부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도 거창한 새 조직보다 이런 변화를 조기에 포착하고 움직이는 체계다. 미국의 관세와 의회 동향, EU의 쿼터와 환경규제, 주요국의 보조금과 무역구제 조치를 상시 분석하고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을 수치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위험 수준에 따라 기업과 관계부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다. 통상에도 금융시장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비슷한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가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EU 철강 쿼터 협상에서는 정상급과 고위급, 실무 채널을 가동해 한국 전용 물량을 확보했다. 미국 관세에도 정부와 기업이 대응해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응의 속도와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이다. 보호무역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미국의 관세, EU의 쿼터와 탄소규제, 각국의 보조금 정책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통상질서 자체가 되고 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하는 방식만으로는 따라가기 어렵다. 철강은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산업일 뿐이다. 다음은 자동차가 될 수도 있고 배터리와 반도체가 될 수도 있다. <손자병법>은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이라 했다.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길 조건을 만들어 놓은 뒤 싸움에 나선다는 뜻이다. 통상도 다르지 않다. 협상장에 앉은 뒤 대응책을 찾기 시작해서는 늦다. 상대국 산업과 정치권이 어떤 요구를 꺼낼지 예상하고 우리가 내놓을 카드와 지켜야 할 선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 한국은 수출로 성장한 나라다. 보호무역의 파고를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파도가 어디에서 얼마나 높게 올지는 먼저 읽어야 한다. 정부의 통상 역량도 이제 ‘얼마나 잘 수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먼저 알고 움직였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
2026-10-06 14:44:00
-
트럼프 "美 공장 안 지으면 관세 300%"…격전지서 투자 압박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 격전지인 오하이오주에서 미국에 공장을 짓지 않는 기업에 최대 3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말했다. 고율 관세를 외국 기업의 현지 투자와 제조업 일자리 유치 수단으로 내세워 공화당 지지층 결집에 나선 것이다.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참여를 압박한 데 이어 투자 이행을 요구하는 발언 수위를 높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3일(현지시간) 오하이오주 밴댈리아의 버틀러 고등학교에서 열린 지원유세에서 “그들이 여기에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약 1년 반 정도의 작은 기회를 준다”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150, 200, 250, 300%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그들은 모두 이곳에 공장을 짓고 있다”며 관세 정책으로 수조달러 규모의 투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캐나다 등이 오랫동안 미국을 상대로 관세를 활용해왔다며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번 유세는 공화당의 상원 다수당 유지와 직결되는 오하이오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공화당 존 허스테드 현 상원의원은 민주당 셰러드 브라운 전 상원의원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 허스테드는 J D 밴스 부통령의 상원 의석을 이어받아 지난해 임명됐으며,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앨라배마 등 공화당 강세 지역을 방문한 뒤 오하이오로 이동했다. 오하이오의 휘발유 가격은 지난 1년간 35% 올라 갤런당 평균 4.16달러를 기록했다. 생활비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투자 유치와 제조업 회복을 앞세워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을 돌파하려는 유세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이 승리하면 유권자들이 각자 5000달러를 갖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관세와 투자 유치 성과를 개인의 경제적 혜택으로 연결해 표심을 공략한 것이다. 현지에서는 대규모 투자와 주민이 체감하는 경제적 효과를 둘러싼 갈등도 커지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옹호하며 투자를 막으면 중국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하이오에서는 데이터센터가 전기요금과 용수, 농지 이용에 미치는 영향이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유세 사흘 전인 9월 30일에는 인근 스프링필드의 옛 내비스타 트럭 공장에서 약 1400명이 해고됐다.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유치했다는 발표가 지역의 안정적인 고용과 생활비 개선으로 얼마나 이어지는지가 공화당의 경제 성과를 평가하는 문제로 부상했다. 한국에는 투자 협상의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한국이 알래스카 LNG 사업 투자를 확정하지 않았다는 질문에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나는 그들에게 더 많이 청구하면 된다”고 말했다. 조속히 서명하지 않으면 두 배로 올리겠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지만, 추가로 부과할 대상과 방식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알래스카 사업 참여를 확정했다는 미국 측 설명과 거리를 두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투자 여부와 규모가 정해지지 않았으며, 상업적 합리성과 국내법상 요건을 충족하는지를 검토해 추진 여부를 판단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투자 유치 성과로 연결해 선거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 정부의 후속 협상에서는 미국의 신속한 투자 요구에 대응하면서도 사업별 수익성과 원리금 회수 조건을 확보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알래스카 사업은 미국 측이 약속한 사업성 보완 자료를 받아 검토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2026-10-04 10:50:36
-
트럼프 "알래스카 서명 안 하면 두 배"…韓 '상업성 검토' 원칙과 충돌
[경제일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참여를 압박하며 “곧 서명하지 않으면 두 배로 올리겠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투자 여부와 규모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힌 데 대해 추가 부담을 거론한 것이다. 사업성을 검토한 뒤 투자한다는 한국의 원칙과 조속한 참여를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이 공개적으로 부딪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알래스카 LNG 투자를 성급하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나는 성급하게 발표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한국 대표단이 논의에 참여했다며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나는 그들에게 더 많이 청구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국이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는 지적에는 조속히 서명하지 않으면 두 배로 올리겠다고 거듭 압박했다.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비춰 통상 압박으로 해석되지만, 무엇을 두 배로 올릴지와 적용 시점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번 발언은 지난달 30일 한국의 최대 2000억달러 대미 전략투자 계획을 발표한 지 이틀 만에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알래스카 LNG 사업과 미국 내 대형 원전 8기, 텍사스 가스복합화력발전소를 투자 대상으로 제시했다. 한국 정부는 알래스카 사업에 대해서는 검토에 착수한 단계라는 입장이다. 산업통상부는 “투자 여부와 투자 규모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김정관 장관도 미국 측 발표가 양국이 합의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양국 공동 발표문에도 투자에 앞서 충족해야 할 조건이 담겼다. 알래스카 LNG 사업을 검토하되,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에 따른 상업적 합리성과 관련 국내법 요건이 충족되는 경우 추진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김 장관은 공식 발표에서도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사업에만 투자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같이 발표된 사업들도 추진 단계가 서로 다르다. 총사업비 223억달러, 설비용량 6472MW인 텍사스 발전사업은 상업성 검토와 국내 심의·국회 보고를 마친 제1호 투자 프로젝트다. 원전 8기는 협력의 큰 틀에 합의했으며, 개별 사업의 부지와 건설 일정 등을 정하고 사업성과 국내 절차를 거쳐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 투자 한도와 보호장치도 마련됐다. 정부는 연간 200억달러, 총 2000억달러의 투자 한도를 운영계약에 명시했다고 밝혔다. 사업성이 훼손됐다고 판단하면 정부 간 회의를 통해 사업계획과 예산, 수익 배분 등을 조정하도록 했다. 알래스카 LNG는 북부 노스슬로프의 천연가스를 약 1300㎞ 떨어진 남부 니키스키로 보내 액화·수출하는 사업이다. 연간 LNG 2000만t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개발사 글렌판이 지분 75%, 알래스카주 측이 25%를 보유한다. 경제성 검토의 핵심은 건설비와 가스 공급가격이다. 로이터는 개발사가 추산한 총사업비가 445억∼545억달러라고 보도했다. 동아시아와 가까워 운송 거리를 줄일 수 있지만, 긴 파이프라인과 가스 처리·액화시설을 함께 건설해야 한다. 공사비 상승 위험과 미국 멕시코만 연안·캐나다 LNG 사업과의 가격 경쟁도 따져야 한다. 한국이 참여할 경우 확보할 조건도 협의 대상이다. 정부 발표에는 사업 추진 시 한국산 철강 등 기자재의 관세 인하, 경제성 있는 장기 LNG 구매계약, 한국의 우선적 LNG 접근권이 담겼다. 투자금뿐 아니라 기자재 공급과 가스 구매 조건을 함께 조율해야 하는 구조다. 개발사도 투자구조를 확정하는 절차가 남았다고 밝혔다. 글렌판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한미 정부와 투자구조를 마무리하고 최종투자결정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설명했다. 회사가 최종투자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목표로 삼은 연간 LNG 판매량은 1600만t이며, 현재 발표한 상업적 합의 물량은 1300만t이다.
2026-10-03 11:04:24
-
-
트럼프의 투자 압박에 끌려갈 것인가, 국민 돈 지킬 협상력은 있는가
[경제일보] 한미 통상협상이 결국 ‘대미 투자 청구서’로 돌아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한국의 대미 전략투자 계획을 직접 공개하며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텍사스 가스발전소, 미국 내 원전 건설 등을 거론했다. 이 가운데 알래스카 LNG에는 500억 달러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미국 측이 설명했다. 지난해 한미 통상 합의에서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고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낮추기로 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관세를 낮추기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과 특정 사업에 국민 돈을 쏟아붓기로 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적 통상정책은 이미 동맹과 경제를 하나의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 미국이 자국 산업과 일자리, 에너지 안보를 위해 한국의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국익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첫 번째 책무는 미국의 국익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과 미래를 지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정부의 협상력이다. 지난 수개월간 협상을 벌였지만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대규모 투자계획을 먼저 발표하고, 정작 한국 정부는 일부 사업을 ‘추후 검토’ 대상으로 설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은 이미 성과를 발표하는데 한국은 뒤늦게 사업의 조건과 상업성을 따지는 모양새다. 이것이 과연 치밀한 협상 전략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알래스카 LNG는 단순한 투자사업이 아니다. 약 1300㎞에 달하는 파이프라인과 액화시설 등을 건설해야 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총사업비가 445억~545억 달러 수준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비용 초과와 사업 지연, 장기적인 LNG 가격 경쟁력 등에 대한 의문도 제기돼 왔다. 현재까지 확보된 장기 구매 의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구속력이 없는 데다 추가 물량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사업이라면 답은 간단하다. 경제성이 있으면 투자하고, 경제성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다. 동맹이라는 이유로 경제성 검토의 잣대를 낮춰서는 안 된다. 더욱이 정부가 직접 돈을 넣거나 공기업이 투자하고 정책금융이 뒤를 받친다면 위험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 사업이 성공하면 수익을 누릴 수 있지만 실패하면 손실은 정부 재정과 공공기관의 부실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납세자의 부담이 된다. 수십조 원 규모의 해외 프로젝트에서 손실이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지부터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미국이 원하는 사업과 한국에 필요한 사업은 다를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이 에너지 생산과 수출 확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투자를 미국의 에너지 인프라와 에너지 지배력 확대의 성과로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이 그 사업에 참여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권리와 수익, 공급권, 가격 경쟁력, 위험 분담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안 한국은 투자원금과 위험만 떠안는 구조라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정부가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약속 이행’이라는 명분에 매몰되는 것이다. 이미 3500억 달러라는 거대한 투자 틀이 합의됐다고 해서 세부 사업까지 자동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도 알래스카 LNG와 원전 사업에 대해서는 상업적 타당성을 검토한 뒤 추진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가 진짜 협상이다. 정부는 미국에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첫째, 사업별 투자수익률과 현금흐름을 공개하라. 둘째, 건설비 상승과 공기 지연, LNG 가격 하락 등 최악의 상황에 대한 위험분담 장치를 마련하라. 셋째, 한국 기업의 지분과 경영권, 장기 LNG 구매권 등 실질적인 반대급부를 확보하라. 넷째, 손실 발생 시 미국 측도 일정 부분 위험을 부담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돈은 한국이 내고 결정권과 이익은 미국이 갖는 거래라면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국부 이전이다. 대미 투자를 무조건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시장은 한국 기업에 중요한 전략적 시장이고, 원전·조선·반도체·AI·배터리 등 양국 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얼마를 투자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고 누가 위험을 부담하느냐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제 협상 성과를 포장하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투자 규모가 아니라 손실을 막을 안전장치다. 수십조 원의 국민 자산을 걸고 벌이는 협상이라면 국회와 국민에 대한 투명한 설명과 검증도 필수다. 한미동맹은 반드시 굳건해야 한다. 그러나 동맹은 굴종이 아니다. 관세 인하도 국익이고, 투자도 국익을 위해 하는 것이다. 미국의 압박이 거셀수록 한국 정부는 더 냉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지금 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스’가 아니다. 국익에 맞으면 투자하고, 수익성이 없으면 멈추며, 위험이 과도하면 조건을 다시 협상하는 당당한 ‘노’의 능력이다. 협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상대의 압박이 아니다. 압박을 이겨낼 전략도 없이 서둘러 합의부터 하고 보는 무능한 협상이다. 국민의 세금과 미래 세대의 부담이 걸린 만큼 정부는 이제 숫자가 아니라 원칙으로 협상해야 한다. 알래스카 LNG가 그 시험대다.
2026-10-01 10:27: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