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19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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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조 '수퍼 재정', 미래를 위한 투자인가 미래를 담보 잡는 도박인가
[경제일보] 국가 예산은 한 해의 살림살이를 넘어 국가의 철학과 미래를 담는 설계도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10% 이상 늘어난 800조 원 안팎의 '수퍼 재정'으로 편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경기 회복에 따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고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기술 등 첨단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구상이다.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미래 산업에 대한 선제적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세계가 기술 패권 경쟁에 사활을 거는 시대에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방향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재정은 의지만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흐름과 재정 원칙 속에서 집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기를 놓치면 독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긴 고물가와 고금리의 터널을 겨우 벗어나 거시경제의 안정을 회복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물가는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고, 시중 유동성은 여전히 풍부하다. 수도권 부동산 시장 역시 언제든 다시 과열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가 10%를 넘는 초확장 재정을 집행할 경우 물가와 자산 가격을 다시 자극할 가능성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정부의 재정 확대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도 충돌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을 유지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대규모 재정을 풀면 정책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재정과 통화정책은 경제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결국 국민 경제가 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재정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명확하다. 경기가 좋을 때는 재정을 비축하고 국가채무를 줄이며, 어려울 때 과감히 사용하는 것이다. 최근 세수 여건이 개선된 것은 반도체 산업의 호조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이를 구조적인 세수 증가로 착각해 지출을 대폭 늘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다. 일시적인 호황을 영구적인 성장으로 오인하는 순간 재정 건전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늘어난 세수는 무엇보다 국가채무를 줄이는 데 우선 활용해야 한다. 국가 부채는 미래 세대가 반드시 갚아야 할 부담이다. 지금 곳간이 조금 채워졌다고 해서 소비부터 늘리는 것은 가계든 국가든 바람직한 재정 운용이 아니다. 미래의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사용할 재정 여력을 미리 소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더 큰 우려는 막대한 예산이 정치적 논리에 휘둘릴 가능성이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 민원성 사업이나 현금성 지원이 확대된다면 재정은 성장의 마중물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연료가 된다. 과거에도 선심성 재정은 단기적인 인기만 남겼을 뿐 국가 경쟁력을 높이지 못했다. 특히 경직성 복지와 현금성 지원은 한 번 시작되면 줄이기 어려워 국가 재정을 장기간 압박하는 구조적 부담으로 남는다. 정부가 신설하려는 미래대응기금은 반드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분야에 집중되어야 한다. AI와 반도체, 바이오, 양자컴퓨터, 차세대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은 물론, 기술 인재 양성과 연구개발 생태계 구축에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사업 선정부터 집행, 성과 평가까지 전 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철저한 사후 검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예산은 규모보다 효율이, 속도보다 성과가 더욱 중요하다. 아울러 저출생과 고령화, 노동시장 구조개혁, 지역 균형발전 등 대한민국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재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단순한 경기부양보다 국가 체질을 개선하는 데 쓰이는 예산만이 미래 세대의 부담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오늘의 인기와 정치적 성과를 위해 미래의 부담을 키우는 재정 운용은 결코 책임 있는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정부는 800조 원이라는 숫자의 화려함보다 그 예산이 가져올 거시경제적 파급 효과를 더욱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재정 건전성을 지키면서 미래 산업에는 과감히 투자하는 균형 감각, 그것이 지금 정부가 보여야 할 진정한 국가 운영의 지혜다. 풍년일수록 흉년을 준비하라는 경제의 기본 원칙을 잊지 않을 때만이 대한민국의 재정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라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2026-07-14 12: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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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기 뚫을 포트폴리오 재배치 사활…시험대 오른 '롯데 DNA'
[경제일보] 롯데는 한국 재계에서 가장 독특한 출발점을 가진 그룹이다. 창업자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8년 일본 도쿄에서 껌 사업으로 롯데를 시작했다. 이후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우며 국내 사업을 본격화했다. 롯데의 첫 DNA는 소비자의 입맛과 생활 반경을 파고드는 데 있었다. 껌과 과자, 음료, 햄과 우유, 패스트푸드, 백화점과 호텔, 놀이공원까지 롯데는 제조업의 공장보다 소비자의 일상에 가까운 곳에서 몸집을 키웠다. 롯데식 성장은 ‘생활의 점유율’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삼성과 현대차가 반도체와 자동차, 중후장대 제조업을 앞세웠다면 롯데는 먹고, 마시고, 사고, 쉬고, 노는 공간을 장악했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 롯데리아, 롯데백화점, 롯데호텔, 롯데월드가 쌓아 올린 것은 단순한 계열사 목록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소비 동선 속에 롯데라는 이름을 심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 이후 롯데는 식품을 넘어 유통과 관광, 석유화학으로 사업을 넓혔다. 롯데 공식 연혁에 따르면 롯데는 1976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했고, 1979년 롯데쇼핑을 세웠다. 식품과 유통에서 번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호텔, 백화점, 마트, 화학, 건설까지 넓히는 방식이었다. 롯데 DNA의 핵심은 ‘크게 한 번 베팅하는 승부수’보다 ‘될 만한 영역을 넓게 깔고, 오래 버티며, 전국망으로 키우는 확장력’이었다. 확장의 DNA, 소비 동선을 장악하다 롯데의 확장 방식은 시대와 잘 맞았다. 한국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 소비자는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샀다. 도심에는 백화점이 들어섰고, 외곽에는 마트가 생겼다. 해외여행과 관광 수요가 커지면서 호텔과 면세점도 성장했다. 롯데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식품에서 시작해 유통과 관광으로, 다시 석유화학과 건설로 이어지는 확장은 내수 성장기의 성공 공식이었다. 롯데의 강점은 안정성이었다. 백화점과 마트, 편의점, 호텔, 식품은 경기 변동을 타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수요를 품고 있다. 롯데는 이와 같은 안정성을 바탕으로 재계 상위권에 올라섰다. 신 명예회장 시대의 롯데는 과감한 기술 승부보다 치밀한 입지, 브랜드, 유통망, 현금흐름으로 성장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성장의 기반이던 내수 확장 공식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쿠팡과 네이버, 전문몰과 해외 직구가 소비 동선을 바꿨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은 여전히 강하지만, 성장률은 과거 같지 않다. 롯데온은 그룹의 유통 자산을 온라인으로 묶겠다는 시도였지만, 시장의 판을 뒤집을 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석유화학도 더 이상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아니다. 중국과 중동의 증설, 글로벌 수요 둔화, 범용 제품 공급과잉이 겹치면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구조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롯데케미칼은 한때 롯데의 제조업 확장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그룹 체질 전환의 가장 무거운 숙제가 됐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롯데 DNA는 변화하고 있다. 과거 롯데는 좋은 입지에 점포를 깔고, 좋은 시장에 설비를 늘리며 성장했다. 지금은 반대로 줄이고, 합치고, 멈추는 능력이 필요해졌다. 성장기의 롯데가 ‘확장형 그룹’이었다면, 저성장기의 롯데는 ‘정리형 그룹’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시대, ‘많이 깔던 롯데’의 반전 과제 신동빈 회장 체제의 과제는 분명하다. 매출 규모보다 수익성, 점포 수보다 효율, 계열사 수보다 포트폴리오 질을 따져야 한다. 올해 초 롯데그룹의 경영 회의에서 신 회장이 수익성 중심 경영과 고강도 구조조정을 주문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롯데는 더 이상 많이 벌려놓는 방식만으로 버티기 어렵다. 투자자와 시장은 “얼마나 크냐”보다 “얼마나 남기느냐”를 묻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올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에서도 변화는 드러났다. 공정위는 올해 자산총액 5조원 이상 102개 기업집단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이 과정에서 한화가 처음으로 재계 5위권에 진입했고, 롯데는 포스코와 함께 순위가 밀린 것으로 보도됐다. 순위 자체가 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성은 작지 않다. 한화가 방산·조선·우주로 체급을 키우는 동안 롯데는 화학 부진과 유통 전환의 숙제를 동시에 안게 됐다. 롯데의 강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식품과 음료, 백화점, 호텔, 면세, 관광, 물류, 화학을 모두 가진 그룹은 드물다. 소비자의 하루를 따라가면 롯데가 여러 번 등장한다. 커피와 과자, 편의점, 마트, 백화점, 호텔, 놀이공원, 면세점, 택배, 카드와 멤버십이 하나의 생활권 안에 있다. 이 자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흩어진 자산을 하나의 경쟁력으로 묶는 능력이다. 롯데는 오프라인 유통의 강자였지만, 온라인에서는 쿠팡과 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마트와 슈퍼, 백화점과 이커머스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신선식품과 프리미엄 식품, 지역 맞춤형 점포, 오프라인 픽업과 반품, 멤버십 데이터 활용은 롯데가 다시 강점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계열사별 이해관계를 넘어 고객 경험을 중심으로 조직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화학 부문에서는 범용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고부가·스페셜티 소재로 이동해야 한다. 롯데케미칼은 올해를 미래 성장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겠다고 밝히며, 사업구조 전환과 재무 건전성 강화, 경쟁력이 낮거나 차별화가 어려운 사업의 합리화를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생존 조건에 가깝다. 석유화학은 더 이상 설비를 많이 가진 기업이 이기는 산업이 아니다.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기며, 어디에 다시 투자할지를 정하는 산업이 됐다. 롯데 DNA의 본질은 ‘생활산업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DNA는 ‘선택과 집중’이다. 신격호 시대의 롯데가 소비자의 생활 반경을 넓게 장악한 그룹이었다면, 신동빈 시대의 롯데는 그 넓은 반경을 다시 효율적으로 재배치해야 하는 그룹이다. 과거에는 점포와 설비를 늘리는 것이 성장의 언어였다. 지금은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줄이는 것도 성장의 언어가 됐다. 롯데의 시험대는 그래서 냉정하다. 유통에서는 온라인 전환의 속도를 높여야 하고, 화학에서는 구조조정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호텔과 관광은 회복 국면을 살려야 하며, 식품은 글로벌 K푸드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성장 축을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롯데의 과제는 복잡하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롯데에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장이 아니라 더 정교한 재편”이라며 “롯데 DNA의 다음 장은 ‘확장’이 아니라 ‘정리’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아주경제 2026년 07월 14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7-14 10: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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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안정에 안주할 때 아니다…외환 방어력 키울 골든 타임이다
[경제일보] 반도체 수출 호조가 한국 경제에 모처럼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급증하면서 외화 유입이 늘었고, 한동안 금융시장을 짓눌렀던 원·달러 환율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고환율과 고물가, 고금리의 삼중고에 시달려 온 우리 경제에는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지금의 환율 안정이 구조적 체질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 충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더욱 냉정한 대응이 요구된다.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개방경제다. 수출이 성장의 버팀목인 만큼 국제 금융시장과 지정학적 변수에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금리 정책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미·중 전략 경쟁은 장기화하고 있다. 중동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험도 해소되지 않았다. 글로벌 공급망 역시 정치와 안보 논리에 따라 언제든 재편될 수 있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진다고 해서 대외 리스크까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환율 안정기에 외환 방어력을 한층 높여야 한다. 외환보유액은 국가 경제의 최후 안전판이다. 시장이 불안할 때는 국가 신용을 지키는 버팀목이고, 외환시장의 과도한 변동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다. 외화가 충분히 유입되는 지금이야말로 외환보유액을 확충할 적기다. 시장 왜곡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외화를 흡수하고, 유동성이 높은 안전자산 비중을 확대하는 등 보유 자산의 질도 함께 높여야 한다. 거시경제 체질 개선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환율이 안정됐다고 가계부채 위험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기업의 생산성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은 여전히 더디고, 부동산 중심의 자금 쏠림도 지속되고 있다. 재정 건전성 역시 안심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기 부양에 치우친 단기 처방이 아니라 경제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구조개혁이다. 노동과 연금, 규제 개혁을 비롯한 생산성 제고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외환시장의 안정은 정부 정책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장의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재정 규율을 확립하며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기적인 환율 수준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을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외국인 자금을 붙잡는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다. 우리 경제는 이미 여러 차례 방심의 대가를 치렀다. 1997년 외환위기는 외환 유동성 관리 실패가 얼마나 큰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역시 충분한 대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위기는 늘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고, 준비된 나라만이 충격을 최소화했다. 반도체 호황과 환율 안정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것이 경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면허증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고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며 구조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다. 경제는 호황기에 미래를 준비한 나라가 위기에서도 살아남는다. 오늘의 환율 안정을 내일의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것, 그것이 정부와 경제 당국이 놓쳐서는 안 될 시대적 책무다.
2026-07-13 09: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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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조 원의 국민연금 대체투자, 이젠 수익보다 책임을 묻는다
[경제일보] 국민연금의 대체투자 규모가 248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국민연금기금 전체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로, 세계적 수준의 연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의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저금리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부동산과 인프라, 사모펀드, 사모대출 등 대체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안정적인 장기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외형의 성장에 걸맞은 책임과 투명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기금은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일반 금융회사의 투자자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민이 평생 성실히 납부한 보험료를 바탕으로 조성된 공적 자산이며, 노후를 지탱하는 사회안전망이다. 따라서 기금 운용의 목표는 단순한 수익률 경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기적 안정성과 공공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 함께 구현될 때 비로소 국민연금의 존재 이유가 완성된다. 단기 성과를 위해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외면하는 투자는 공적 연기금이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니다. 문제는 대체투자의 특성상 투자 구조가 복잡하고 정보 공개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장내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사모펀드와 해외 인프라, 부동산 투자 등은 계약 내용과 투자 대상이 외부에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특성은 투자 판단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동시에 책임 있는 감시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검증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후 관리가 미흡할 경우 공적 기금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업이나 기업에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수익만을 기준으로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세계 주요 연기금들은 이미 ESG를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장기 투자 위험을 관리하는 핵심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노동권 보호, 건전한 지배구조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요소이며, 장기적으로는 투자 수익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결국 책임 투자는 수익성과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안정적인 장기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전략인 셈이다. 국민연금 역시 이제 대체투자 분야에 특화된 ESG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단계부터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면밀히 평가하고, 투자 이후에도 정기적인 점검과 사후 평가를 의무화해야 한다. 민간 위탁운용사를 선정할 때에도 ESG 이행 실적과 내부 통제 수준을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반영해야 한다. 운용사의 수익률뿐 아니라 책임투자 역량까지 평가하는 체계가 정착될 때 시장 전체의 건전성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투명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투자 기밀을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까지 차단해서는 안 된다. 외부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감시체계를 확대하고, 대체투자의 ESG 위험과 관리 현황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공적 기금일수록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으며, 설명할 수 없는 투자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248조 원이라는 막대한 자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노후와 미래 세대의 삶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다. 국민연금이 세계적인 연기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규모보다 신뢰가 먼저다. 공공성을 잃은 수익은 오래가지 못하며, 책임 없는 투자는 결국 더 큰 손실로 되돌아온다. 국민연금과 정부는 지금이야말로 대체투자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책임투자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노후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이며, 공적 연기금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6-07-09 09: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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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0억 달러의 착시(錯視)와 민생 재정 투입의 엄중한 원칙
[경제일보] 우리 경제가 다시 한번 대기록을 세웠다. 반도체 경기 호황과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 6월 한 달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단일 월간 수출이 세 자릿수 빌리언(Billion) 달러를 기록한 것은 대한민국 무역사상 전례가 없는 쾌거다. 거시 경제 지표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 역시 일제히 상향 조정되며 숫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리 썩 좋아할 수만 없다. 수출 전선의 승전고가 들려오는데도, 서민들이 체감하는 골목상권의 체감온도는 여전히 한겨울 한복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수출 대기업이 벌어들인 온기가 내수 시장 전체로 흘러가지 못하는 소위 ‘성장의 동조화 단절’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낙수효과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고물가와 고금리의 장기화로 신음하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그리고 실질소득 감소에 지친 평범한 가정의 한숨뿐이다. 이런 괴리를 메우겠다며 최근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민생회복’을 내걸고 대규모 재정 지원 사업을 쏟아내고 있다. 선심성 현금성 지원부터 지역 화폐 확대, 무분별한 복지성 예산 편성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서민의 어려움을 살피겠다는 취지 자체를 탓할 수는 없으나, 지금 정치권이 보여주는 재정 투입의 속도와 방식은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그 동안 국가 재정과 경제 정책을 지켜보면서 얻은 불변의 상식은 하나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며, 위기일수록 ‘기본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 지표가 좋다는 이유로, 혹은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잡겠다는 계산으로 국가 곳간을 쉽게 열어서는 안 된다. 현재 대한민국 국가 채무는 이미 경계선을 넘어섰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 자립도 역시 바닥을 기고 있다. 중앙정부의 세수 결손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지자체마저 빚을 내어 민생회복이라는 단기 처방에 올인한다면, 이는 미래 세대의 자산을 가로채 현재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는 마약성 처방과 다름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재정 살포가 아니라, 현재의 국가 및 지방 재정 상태에 대한 냉정하고 면밀한 현황 점검이다. 가용한 재원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에 얼마만큼의 예산을 투입해야 가장 효율적인 정책 효과가 나타날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돈을 쓰는 일은 언제 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한 번 잘못 흘러간 재정은 다시 회수할 수 없으며, 불필요하게 풀린 유동성은 어렵게 잡아두고 있는 물가를 자극해 서민 경제를 더 깊은 도탄에 빠뜨리는 부메랑이 될 뿐이다. 수출 호조라는 착시 효과에 가려진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구조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단순히 1회성 현금을 쥐여주는 미봉책으로는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근본적으로 되살릴 수 없다. 자영업자의 한계 상황을 유예해 주는 금융 지원의 정밀화, 취약계층을 겨냥한 핀셋형 선별 복지, 그리고 기업들이 국내 소비 유통망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돕는 규제 완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구조 개혁 없이 재정 만능주의에 기대는 것은 정책적 태만이자 직무유기다. 정치권과 행정부는 숫자가 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수출 1000억 달러는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그것이 민생의 구원투수가 될 수는 없다.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지키는 것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마지노선이다. 선심성 정책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상식과 원칙에 기반한 정밀한 경제 정책을 펼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생회복의 길이 열릴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엄중한 각성과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한다.
2026-07-02 07:4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