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36건
-
-
선박부터 수주하고 조선소 만든 HD현대…54년 '선행투자 DNA'
[경제일보] HD현대의 출발은 일반적인 순서와 거리가 멀었다. 공장을 지은 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소가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배부터 수주했다. 1971년 10월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따냈고, 이듬해 3월 울산 미포만에서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공사와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됐다. 1974년 2월 첫 선박을 진수했고 같은 해 6월 조선소 1단계 준공과 VLCC 2척 명명식을 열었다. 시장과 공장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주부터 한 뒤 생산기반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이었다.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수주와 건조량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 경험은 이후 HD현대 경영에서 반복됐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생산능력과 기술을 시장이 충분히 커지기 전에 확보하고, 부족한 사업은 직접 만들거나 인수했다. 성공할 경우 시장 선점 효과가 컸지만 판단이 빗나가면 대규모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HD현대의 54년은 이른바 ‘선행투자 DNA’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역사다. 배 만들다 엔진·전력·건설기계까지…필요한 것은 직접 확보 HD현대의 사업 확장은 조선소 안에서 시작됐다. 배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박의 심장인 엔진이 필요했다. 현대중공업은 1976년 엔진사업부를 발족했고, 1978년 대형엔진공장을 완공했다. 1977년에는 중전기사업부를 세워 변압기와 전력기기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건설장비와 로봇도 같은 흐름이었다. 1982년 건설장비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봇 분야에서는 1984년 용접기술연구소에 로봇 전담팀을 만들고, 1985년 산업용 로봇사업에 진출했다. 1987년 국내 최대 규모 로봇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별도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조선에 필요한 기술을 밖에서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확보한 것이다. 축적된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소 밖 시장으로 뻗었다. 2000년에는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자체 중형 디젤엔진인 ‘힘센엔진’을 개발했다. 선박용에서 시작한 중전기 사업은 현재 HD현대일렉트릭으로 성장해 글로벌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에 변압기와 전력기기를 공급한다. 사업 확장은 인수합병으로도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가 갖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70%를 넘겨받아 지분율을 91.13%까지 높였다. 11년 만의 경영권 재확보였다. 2021년에는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조선과 에너지에 건설기계를 더하면서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넓혔다.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했다. 기존 주력사업이 성숙한 뒤 새로운 산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쌓은 대형 제조·설비 운영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미리 확보했다. 해양플랜트 3조 적자 쇼크…선행투자의 수업료 먼저 뛰어드는 경영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실패가 2010년대 해양플랜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시장이 침체하자 국내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봤다. 현대중공업 역시 대형 해양 프로젝트 수주를 확대했다. 하지만 선박과 해양플랜트는 사업구조가 달랐다. 해양플랜트는 발주처 요구에 따른 설계 변경이 잦았고 제작·설치 과정도 복잡했다.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저가 수주와 공정 지연이 겹쳤다. 여기에 국제유가 급락까지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 연결 기준 3조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창립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손실 전체가 해양플랜트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세계 조선경기 부진과 조선·플랜트 등 여러 사업의 원가 상승이 함께 영향을 미쳤지만 해양플랜트의 대규모 부실이 실적 악화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2015년에도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약 1조300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반영됐다. 현대중공업은 2014~2015년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뒤 2016년 전사 기준 흑자로 돌아섰다. 해양플랜트 실패는 HD현대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시장에 먼저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과 설계 역량, 계약조건, 원가와 공정 위험을 함께 통제하지 못하면 선행투자가 오히려 대규모 부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HD현대의 선행투자는 과거의 ‘속도 우선’에서 수익성과 현금흐름, 데이터에 기반한 ‘관리형 선행투자’로 성격이 달라졌다. 사람보다 AI가 먼저 판단하는 조선소…54년 DNA의 2막 HD현대는 현재 다시 미래 시장보다 앞서 설비와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상은 선박이 아니라 조선소 자체다.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 계열사들은 2021년부터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빅데이터와 디지털트윈, 로봇, AI를 이용해 노동집약적인 조선소를 지능형 생산시설로 바꾸는 작업이다. 2023년에는 디지털트윈을 기반으로 작업과 장비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1단계 ‘눈에 보이는 조선소’를 구축했다. 2026년까지 생산 데이터를 연결해 공정을 예측·최적화하는 2단계를 거쳐 2030년에는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한 ‘지능형 자율 운영 조선소’를 완성한다는 목표다. 회사가 제시한 목표는 생산성 30% 향상과 건조기간 30% 단축이다. 이는 실제 달성 실적이 아닌 2030년 목표치다. 로봇도 조선소에 투입한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로보틱스는 미국 페르소나AI 등과 조선 용접용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2026년까지 시제품 개발을 끝내고 2027년부터 현장 실증과 상용화를 진행하는 계획이다. 조선업의 고질적인 숙련인력 부족과 안전 문제를 AI와 로봇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다. 과거에는 새로운 도크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렸다면 앞으로는 같은 조선소에 AI와 로봇을 넣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선행투자가 바뀌고 있다. 조선 밖에서는 전력기기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올랐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과 국내에서 변압기 생산능력을 확대해 왔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증가,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가 맞물리면서 세계적으로 변압기 공급부족이 심해진 데 따른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의 올해 6월 말 수주잔고는 85억 달러로 6개월 전보다 23% 증가했다. 3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고 일부 고객과는 2030년 인도 물량까지 협의하고 있다. 과거 중전기사업부로 시작한 사업이 반세기 뒤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망으로 성장한 셈이다. HD현대는 지난해 세계 조선업계 최초로 누적 선박 5000척 인도 기록도 세웠다. 1974년 첫 VLCC를 시작으로 68개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공급한 결과다. 54년 전 미포만에서는 배를 지을 조선소조차 없는 상태에서 먼저 선박을 수주했다. 지금은 AI가 스스로 공정을 판단하는 조선소와 아직 수요가 더 커질 전력 인프라에 미리 투자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투자 방식이다. 1970년대 선행투자가 창업자의 결단과 실행력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수주잔고와 데이터, 자동화 기술, 글로벌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HD현대의 DNA는 무조건 남보다 빨리 뛰어드는 데 있지 않다. 앞으로 필요할 기술과 생산능력을 먼저 정하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이를 실제 산업으로 만드는 능력에 가깝다.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었던 승부수는 HD현대를 세계 최대 조선사로 키웠다. 해양플랜트는 같은 DNA가 얼마나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업계 관계자는 “2030년 AI 자율조선소와 전력기기가 또 하나의 ‘미포만 신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 “다만 분명한 것은 HD현대가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생산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선행투자는 여전히 HD현대의 가장 강력한 성장 DNA이자 가장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위험”이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08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08 09:09:31
-
-
-
-
-
서울시, 정비사업으로 31만호 착공 속도전…정부에 규제 완화 재건의
[경제일보] 서울시가 민간 정비사업을 앞세워 주택 공급 속도전에 나섰다. 과거 정비구역 해제와 신규 지정 억제로 누적된 공급 공백이 현재의 주거 불안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재개발·재건축 절차 단축과 규제 완화를 통해 2031년까지 정비사업 31만호 착공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서울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5일 김용범 대통령 정책실장에게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차 정비사업 보고서’를 전달했다고 7일 밝혔다. 보고서에는 서울의 재개발·재건축 추진 현황과 공급 부족 원인, 민간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 과제가 담겼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국무회의에서 주택 공급 부족 원인에 대한 현황 보고를 지시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서울시는 보고서에서 서울의 주택 부족이 일시적인 수요 증가보다 중장기 공급 기반 약화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도시재생 중심 정책이 이어지면서 기존 정비구역 389곳이 해제됐고 주거정비지수제 도입과 구역 지정 요건 강화로 신규 정비구역 지정도 위축됐다는 설명이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서울에서 신규 지정된 주택재개발 구역이 없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당시 35층 이하 높이 규제와 ‘역사·문화 흔적 남기기’ 등 개발 억제 기조도 정비사업 추진을 어렵게 한 요인으로 거론됐다. 시는 정비사업이 구역 지정부터 입주까지 장기간 걸리는 만큼 과거 해제되거나 지정되지 못한 사업지의 공백이 현재 착공·준공 물량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앙정부 규제도 공급 지연 요인으로 지목했다. 투기과열지구 지정과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 강화,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부활 등이 사업성을 낮추고 추진 기간을 늘렸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강화와 공사비 상승 갈등까지 겹치면서 민간 정비사업의 추진 동력이 약해졌다고 평가했다. 이에 시는 가용 부지가 부족한 서울에서 재개발·재건축이 사실상 가장 현실적인 대규모 공급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3년간 서울 주택 공급의 90% 이상을 민간사업이 담당한 만큼 정비사업이 막히면 충분한 공급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정비사업의 공급 효과도 수치로 제시했다. 3년간 준공된 정비사업 59곳을 분석한 결과 사업 전보다 주택 수가 36.4% 늘었다는 것이다. 재개발은 27.4%, 재건축은 44.2%의 순증 효과가 있었다. 서울시가 2031년까지 착공 목표로 관리 중인 253개 정비사업 구역에서도 기존 주택 수보다 39.2% 많은 주택이 공급될 것으로 예상됐다. 재개발 대상지는 29.7%, 재건축 대상지는 48.5%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시는 사업 단계별 행정 처리 기한을 명확히 하는 표준처리기한제를 도입하고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절차를 동시에 처리하는 병행처리를 확대해 공급 시기를 앞당길 계획이다. 이와 함께 정부에는 법령 개정을 다시 건의했다. 주요 내용은 재개발 임대주택 비율 완화와 민간 정비사업 용적률 1.2배 상향, 조합원 지위양도 제한 3년 한시 유예, 이주비 대출 규제 완화, 재개발 조합설립 동의율 완화 등이다. 전날 열린 시민 대토론회 내용도 정부에 공유할 예정이다. 시는 이달 6일 오 시장 주재로 무주택 청년과 정비사업·민간임대 관계자 등 시민 100여명이 참여한 ‘부동산 정상화를 위한 시민 대토론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전세 매물 감소와 월세 부담 증가, 정비사업 지연, 민간임대 공급 위축 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명노준 서울시 주택실장은 “2031년까지 정비사업 31만 호 착공을 목표로 행정절차를 최대한 단축하고 현장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정해 민간 공급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할 수 있는 규제 개선은 선제적으로 추진하고 정부와도 긴밀히 협력해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주택공급을 앞당기겠다”고 말했다.
2026-08-07 16:56:46
-
-
-
부동산 정책, 강한 대책보다 흔들리지 않는 규칙이 필요하다
[경제일보] 집값이 오르면 정부는 더 강한 대책을 꺼낸다. 대출 한도를 줄이고 규제지역을 넓힌다. 세금을 올릴 가능성을 내비치고 공급 물량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한다. 시장이 잠시 주춤하면 규제를 풀고 대출 문턱을 낮춘다. 그러다 가격이 다시 뛰면 이전보다 센 대책을 내놓는다. 한국 부동산 정책은 오랫동안 이런 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달라졌고 같은 정부 안에서도 집값과 여론에 따라 규제가 수차례 바뀌었다. 시장 참여자는 현재의 제도보다 다음 대책을 먼저 계산하게 됐다. 집을 사려는 사람도 팔려는 사람도 건설하려는 기업도 정부가 정한 규칙을 믿고 장기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 지금 시장이 보내는 신호도 가볍게 넘길 상황은 아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6년 7월 둘째 주 전국 아파트값은 전주보다 0.11% 올랐다. 수도권은 0.21%, 서울은 0.30% 상승했다. 지방 상승률은 0.01%에 그쳤다. 서울 아파트값은 74주째 올랐고 전셋값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전국이 함께 달아오른 시장이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 선호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양극화 시장에 가깝다. 가계대출도 다시 불어났다. 지난 6월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한 달 동안 8조3000억원 증가했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4조5000억원이었다. 5월과 6월 두 달 동안 늘어난 가계대출만 17조6000억원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올리면서 금융안정 위험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 집값과 빚이 통화정책까지 움직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2025년 6월 수도권과 규제지역의 주택 구입 목적 주택담보대출에 6억원 한도가 도입됐다. 같은 해 9월 규제지역 주택담보인정비율인 LTV가 50%에서 40%로 낮아졌다. 10월에는 주택 가격에 따라 대출 한도를 6억원, 4억원, 2억원으로 차등화했다. 2026년 정부는 가계대출 증가율을 1.5% 이내로 관리하고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80%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대책은 충분히 강했다. 그런데 집값도 대출도 다시 움직이고 있다. 더 센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정책 효과가 약한 원인을 규제의 강도에서만 찾으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출을 더 막고 세금을 더 올리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정책의 강도와 정책의 신뢰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센 규제라도 시장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면 수요자는 규제가 풀릴 때를 기다린다. 규제가 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하면 시행 전에 거래를 서두른다. 특정 지역만 묶으면 인접 지역으로 수요가 이동하고 특정 대출만 막으면 다른 금융상품을 찾는다. 정책이 시장을 이끄는 대신 시장이 다음 규제의 틈을 찾아 움직이게 된다. 한국은행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거시건전성 정책의 잦은 기조 변화는 대출 증가 억제 효과를 제한한다고 분석했다. 단기 경기 상황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규제를 활용하기보다 중장기 관점에서 운용해 정책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규제를 반복해서 강화했는데도 가계대출이 다시 늘어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진단이다. 주택은 주식처럼 오늘 사고 내일 파는 상품이 아니다. 무주택자가 집을 사기 위해서는 계약금을 마련하고 대출 가능액을 확인한 뒤 잔금 일정을 정해야 한다. 기존 주택을 처분하고 새집으로 옮기는 과정에는 수개월이 걸린다. 재건축과 재개발, 민간 주택사업은 토지 확보부터 입주까지 10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계약을 맺은 뒤 대출 기준이 바뀌고 중도금을 낸 뒤 잔금대출 한도가 줄어들면 정책은 미래 행동을 안내하는 규칙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정을 뒤흔드는 위험이 된다. 법률상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국민이 체감하는 효과는 과거 선택에 대한 불이익과 다르지 않다. 법과 제도가 신뢰를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 규제가 적용되는지 미리 알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조건에는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제도가 바뀔 때는 기존 계약과 진행 중인 거래를 보호하는 경과조치를 둬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정한 규칙을 지킨 사람이 뒤늦은 정책 변경으로 손해를 보고 규제의 빈틈을 예상한 사람이 이익을 얻는 구조가 반복되면 성실한 실수요자부터 제도를 믿지 않게 된다. 정책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예측 가능성을 잃은 행정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공급정책도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 왔다. 정부는 집값이 오를 때마다 수십만호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인허가 물량과 착공 물량, 준공 물량은 서로 다른 숫자다. 인허가를 받았다고 집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착공했다고 곧바로 입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전국 주택 인허가는 98694호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6% 줄었다. 착공은 94367호로 27.0% 늘었지만 준공은 88143호로 46.7% 감소했다. 같은 기간 안에서도 공급의 앞단과 뒷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5월 말 전국 미분양은 65239호에 달했다. 전국에 미분양이 쌓여 있으면서 서울과 수도권 선호 지역에서는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는 불균형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공급 물량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에서 언제 착공하고 언제 입주할 수 있는가다. 공급 계획은 토지 확보와 인허가, 착공, 준공으로 나눠 공개해야 한다. 일정이 늦어지면 지연 원인과 변경된 입주 시점을 밝혀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은 원칙대로 이어져야 한다. 대출 규제의 기본축도 다시 세워야 한다. 담보가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비율을 정하는 LTV는 집값과 지역에 따라 수시로 바꾸기 쉽다. 반면 소득에서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을 따지는 DSR은 빚을 갚을 능력을 기준으로 한다. 장기적인 가계부채 관리는 주택 가격이나 행정구역보다 차주의 상환 능력을 중심에 두는 편이 타당하다. 청년과 신혼부부, 생애 최초 구입자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면 DSR 원칙을 무너뜨리는 예외 대출을 반복하기보다 장기 고정금리와 이자 지원, 공공주택 공급으로 돕는 편이 낫다. 정책대출을 늘렸다가 가계대출이 증가하면 다시 줄이는 방식은 지원 대상자에게도 안정적인 제도가 아니다. 규제지역 지정도 담당 부처의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집값 상승률과 거래량, 소득 대비 주택가격, 가계대출 증가율 같은 객관적 기준을 사전에 공개해야 한다. 일정 기준을 넘으면 규제가 강화되고 일정 기간 안정되면 완화된다는 경로를 시장이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세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보유세는 거래와 보유에 관한 국민의 장기 선택을 바꾼다. 집값이 오를 때 세금을 올리고 거래가 얼어붙으면 다시 낮추는 방식은 매물 잠김과 거래 쏠림을 반복시킨다. 적어도 3년에서 5년 동안 어떤 세목을 어떤 방향으로 조정할지 로드맵을 제시하고 충분한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 정책을 바꾸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경제 여건과 인구 구조, 금리와 공급 상황이 달라지면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다만 변경 조건과 절차가 사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규칙 안에 변화의 기준을 넣는 것과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르다. 강한 대책은 발표 당일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거래를 줄이고 대출 신청을 늦추는 효과도 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정책의 지속성을 믿지 않으면 수요는 사라지지 않고 뒤로 밀릴 뿐이다. 공급 사업도 중단되거나 지연되고 임대차시장으로 부담이 옮겨갈 수 있다. 정부가 집값을 원하는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특정 가격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무리한 차입을 막고 충분한 주택이 꾸준히 공급되도록 제도를 관리하는 일이다. 주거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거래 과정의 불공정을 차단하는 일도 정부의 몫이다. 부동산 시장의 신뢰는 대책의 횟수나 발표문의 수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늘 정한 기준이 내일도 적용되고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의 기본 틀이 유지될 때 생긴다. 국민이 자신의 소득과 자산, 가족계획에 따라 주거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지금 내놓아야 할 것은 시장을 놀라게 할 또 하나의 대책이 아니다. 대출과 세제, 공급에 관해 언제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바뀌는지 알 수 있는 규칙이다. 부동산 정책에 필요한 힘은 예고 없이 휘두르는 규제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래 지킬 원칙을 세우고 정부부터 그 원칙에 구속될 때 정책은 비로소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2026-07-23 10:47:07
-
140명 모이는 부동산 대토론회…유튜버·공인중개사도 의견 낸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는 부동산 정책 국민 대토론회가 오는 23일 열린다. 이번 토론회는 공급·금융·세제 등 부동산 정책의 핵심 쟁점을 놓고 정부와 전문가뿐 아니라 현장 중개업계, 시민단체, 부동산 콘텐츠 운영자까지 참여하는 공개 논의의 장으로 마련됐다. 21일 청와대에 따르면 부동산 정책 국민 대토론회는 23일 오전 10시부터 100분간 진행된다. 행사는 이 대통령의 모두발언으로 시작해 사전 의견 수렴 결과 발표, 전문가 발제, 자유토론 순으로 이어진다. 참석자는 모두 140여명 규모다. 발제는 주택공급, 금융, 세제 등 3개 축으로 나뉜다. 주택공급 분야는 진미윤 명지대 교수, 금융 분야는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세제 분야는 강성훈 한양대 교수가 맡는다. 최근 부동산 시장의 쟁점이 공급 부족, 대출 규제, 보유세·거래세 개편으로 동시에 번지고 있는 만큼 세 분야를 한자리에서 다루겠다는 구상이다. 참석자 구성도 기존 정부 토론회와 다르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와 학계 전문가 외에 현장 공인중개사, 시민단체 관계자, 부동산 유튜버가 함께 토론에 참여한다. 정책을 설계하는 쪽과 시장을 직접 마주하는 쪽의 의견을 함께 듣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온라인 부동산 콘텐츠 운영자들도 참석한다. 유튜브 채널 ‘재테크 읽어주는 파일럿’을 운영하는 최영민 씨와 ‘채부심’ 운영자 채상욱 씨가 토론회에 자리한다. 부동산 정보 소비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확산된 만큼 이들의 참여 자체가 정책 소통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평가도 나온다. 공인중개사들도 현장 의견을 전달한다. 장미영 부동산114 OK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이혜원 미스터홈즈 성동금호센터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김희준 세기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등이 참석자 명단에 포함됐다. 매매와 전세 거래 현장에서 체감하는 대출 규제, 전세 수급, 실수요자 부담 등이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시민단체에서는 김현동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실행위원, 최하은 민달팽이유니온 활동가, 조정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토지주택위원장이 참석한다. 주거 안정, 조세 형평성, 토지·주택 공공성 등을 놓고 정부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토론회는 부동산 세제 개편 논의와도 맞물려 있다. 정부는 공급 확대와 금융 규제, 세제 개편을 두고 부처별 검토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번 토론회 의견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최근 집값 상승과 전세난, 실수요자 대출 부담, 보유세 개편 가능성 등이 동시에 부각되면서 정책 방향을 둘러싼 사회적 관심도 커졌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망국적 부동산 공화국에서 벗어나 국민 주거 안정과 생산적인 경제 발전으로 나아가기 위해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히 경청하고 그 속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2026-07-21 17:01:47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