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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AI의 돈은 어디서 왔나
[경제일보]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지난 12일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1년 부총리에 오른 뒤 경제정책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국유기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세제를 개편했으며 금융권의 부실을 털어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밀어 올린 개혁가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규모 실업과 지방재정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룽지를 다시 들여다볼 이유는 중국 경제의 과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막대한 돈을 장기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의 자금 동원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개혁과 만나게 된다. 원문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연원을 추적하면서 분세제와 국유기업·금융 개혁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4년 분세제(分税制) 개혁 전까지 중국 중앙정부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1993년 중앙정부가 가져가는 재정수입은 전체의 22%에 그쳤다. 지방이 세금의 대부분을 거둬 쓰면서 중앙정부는 전국 단위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일 돈이 부족했다. 주룽지는 중앙세와 지방세를 다시 나누고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증치세의 75%를 중앙 몫으로 돌렸다. 이듬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은 55.7%로 뛰었다. 중앙정부의 곳간이 커지자 경제를 움직이는 힘도 달라졌다. 지역별 이해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전국을 상대로 산업정책을 펼칠 재정 능력이 생겼다. 중앙의 재정력이 커진 만큼 지방정부가 짊어진 부담도 늘었다. 세입은 중앙으로 넘어갔는데 교육·의료를 비롯해 지방이 맡아야 할 지출은 그대로 남은 분야가 많았다. 세계은행도 1994년 개혁이 중앙정부의 세입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반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재정 불균형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지방정부는 부족한 돈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토지와 부동산 개발에 기대고 각종 예산외 수입을 늘리는 방식이 뒤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짓누르는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를 1994년 개혁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지방정부의 재정 운용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칠 힘을 얻는 동안 지방에서는 다른 문제가 자라난 셈이다. 주룽지의 개혁은 재정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좡다팡샤오(抓大放小)’ 정책 아래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유기업을 정리하고 대형 국유기업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이 과정은 혹독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유기업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6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비효율을 걷어낸 대가를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은행도 바꿨다. 지방정부의 영향 아래 있던 금융기관의 자금 배분 권한을 중앙으로 가져오고 부실채권을 정리했다. 세금을 중앙으로 모으고 금융의 돈줄도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룽지가 특정 반도체 기업이나 AI 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런 개혁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가 만든 것은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분야에 장기간 돈을 투입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이었다. 그 힘이 20여 년 뒤 반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2014년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반도체 대기금’을 만들었다. 2019년 2기에 이어 2024년에는 등록자본 3440억 위안 규모의 3기 펀드가 출범했다. 중국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참여했고 공상은행·건설은행·농업은행·중국은행·교통은행 등 대형 국유은행도 자금을 댔다. 1기 1387억 위안, 2기 2040억 위안에 이어 국가 차원의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처럼 투자 규모가 크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산업에서는 이런 힘이 무섭다. 한두 해 적자가 났다고 투자를 끊지 않고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10년 이상 돈을 넣을 수 있다.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정부와 국유금융기관이 떠받친다. 지방정부들도 토지와 보조금, 투자기금을 들고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중앙정부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원문에서 CXMT와 YMTC, SMIC 등의 성장 과정에 지방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도 뒤따랐다.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키우겠다고 하면 지방정부들이 비슷한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지역까지 공장 건설에 나섰고 부실과 중복투자가 생겼다. 반도체 투자 과정에서는 기술 사기와 파산 사례까지 나왔다. AI에서도 각 지역이 데이터센터와 지능형 컴퓨팅 시설 유치 경쟁에 나서면서 비슷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장점이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손실까지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주룽지 시대와 지금의 중국은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값싼 노동력과 빠른 성장, 해외 자본 유입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지금은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를 안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 규제에도 맞서야 한다. 돈을 모아 한 산업에 집중하는 방식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늘었다. 과거에 효과를 냈던 국가 주도의 투자 방식이 앞으로도 같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다. 중국의 경험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반도체와 AI, 첨단 제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하고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기업과 공장,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규모와 체제는 다르지만 정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재정과 금융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겪었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원문이 중국 산업정책의 흐름을 한국의 반도체·AI·제조업 전략과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져올 것은 투자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처럼 오랫동안 돈이 들어가는 산업에 자금이 끊기지 않게 할 제도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비슷한 사업에 돈을 붓는 일은 없는지, 기술도 없는 사업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한다. 실패가 확인된 사업을 정리하지 못하면 지원금은 산업을 키우는 돈이 아니라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돈으로 바뀐다. 주룽지의 개혁은 중국 정부가 국가의 돈을 모으고 움직이는 방식을 바꿨다. 그 힘은 제조업 성장과 반도체 투자에 밑천이 됐지만 지방부채와 부동산 의존, 과잉투자라는 문제도 함께 남겼다. 국가가 산업을 키운 성공 사례만 보고 투자 규모부터 따라갈 일이 아니다. 반도체와 AI에 국가의 미래를 건 한국이라면 중국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도 봐야 한다. 산업정책의 실력은 예산을 크게 잡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투자할 곳과 그만둘 곳을 제대로 가려내는 데서 드러난다.
2026-08-14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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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도 좋다, 대통령이 모든 길을 뚫을 순 없다
[경제일보] 대통령이 다시 기업들의 투자 일정표를 펼쳐 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청와대에서 ‘메가프로젝트’ 제2차 민관합동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반도체 클러스터를 비롯한 대형 투자사업의 진행 상황을 직접 챙겼다. 지난달 첫 회의를 연 지 한 달여 만이다. 광주 군공항 이전에서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 전력과 용수 공급, 각종 인허가와 규제 개선까지 대통령 앞에 올라왔다. 이 대통령은 “속도전을 넘어서 전격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세계 산업전쟁의 시계에 한국 행정의 느린 걸음을 맞출 수 없다는 주문일 것이다. 맞는 진단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피지컬AI에서 1~2년은 단순히 달력 몇 장이 넘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기술 세대가 바뀌고 고객사가 공급망을 다시 짜고, 경쟁국이 새로운 공장을 먼저 돌릴 수 있는 시간이다. 기업이 수십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나섰는데 부지와 전력, 용수, 환경영향평가를 놓고 정부 부처를 몇 년씩 오가게 한다면 국가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꼴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특구특별법’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각종 인허가 기간을 줄이고 전력·용수·교통 등 기반시설을 함께 구축하며, 여러 부처에 흩어진 사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신속하게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광주 군공항의 기능을 조기에 분산 배치해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을 앞당기고, 필요한 전력도 사업 일정에 맞춰 공급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충청권과 영남권에서도 수백조원 규모의 민간 투자가 예정돼 있다. 대통령이 나서자 오래 얽혀 있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기업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런 일이라면 대통령이 몇 번이고 회의를 열어도 좋다는 목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박수를 치고 끝내기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왜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일이 움직이는가.’ 군공항 이전 시점부터 산업단지 착공, 송전망과 용수 공급까지 대통령이 일일이 일정표를 확인해야 비로소 부처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장면인 동시에 우리 행정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처음 길을 뚫는 것은 필요하다. 군과 지방자치단체, 여러 정부 부처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수십 년간 뒤엉킨 사업이라면 최고 책임자의 결단 없이는 첫 삽을 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누구도 책임지고 먼저 움직이지 못하는 사안에서 대통령이 “이 방향으로 가라”고 정리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할이다. 대통령이 첫 문을 열었다면 두 번째 문부터는 장관들이 열어야 한다. 산업부 장관은 투자 일정을 책임지고, 국토·환경 행정은 부지와 교통망, 환경과 용수를 맡아야 한다. 전력 당국은 송전망의 완공 시점을 책임져야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을 설득하고 정주 여건을 갖추는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해내야 한다.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면 왜 늦었는지 설명하고, 필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행정이다. 한국 행정의 고질적인 문제는 책임자가 없어서라기보다 책임이 너무 잘게 쪼개져 있다는 데 있다. 대형 공장 하나를 짓는 데 산업·국토·환경·전력·지방행정이 모두 관여한다. 하지만 각 기관은 자기 업무만 처리하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산단 지정에는 문제가 없고, 환경 절차에도 문제가 없고, 전력 공급도 규정대로 검토했다고 한다. 모든 기관이 자기 몫을 했다는 데 정작 공장 착공은 늦어진다. 기업 눈에는 정부가 여러 개가 아니다. 하나다. 이 단순한 상식을 행정이 자주 잊는다. 기업인은 어느 부처의 어느 과가 무엇을 맡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공장을 지을 수 있는가”라는 한 가지 답을 원한다. 하지만 그 답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니 결국 대통령 앞까지 사안이 올라간다. 대통령 주재 회의가 열리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동안 “어렵다”고 하던 사안에 대안이 붙고, “검토 중”이던 사업에 날짜가 생긴다. 법이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다. 책임지고 결정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 직할 행정’의 효용과 위험이 함께 있다. 초기에는 빠르다. 강력한 정치적 권위가 부처의 칸막이와 오래된 이해관계를 단숨에 넘어설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일상화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사업은 빨리 가고, 대통령의 회의 안건에 올라가지 못한 사업은 다시 평소의 속도로 돌아간다. 기업 입장에서 법과 제도보다 대통령의 관심 여부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된다면 그것은 좋은 투자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대통령에게도 시간은 하루 24시간뿐이다. 반도체 공장의 물길과 송전선까지 대통령이 끝까지 챙기는 동안 외교와 안보, 복지와 교육, 저출생과 재정도 대통령을 기다린다. 메가프로젝트가 늘어날수록 대통령실이 거대한 민원조정실이 되는 구조는 오래갈 수 없다. 이번 ‘전격전’의 진짜 성과는 특정 공장의 착공 시점을 몇 년 앞당기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챙기지 않아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정부를 만드는 데까지 가야 한다. 먼저 대형 전략투자에는 한 사람이 전체 일정을 책임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원스톱 창구’를 설치했다고 해놓고 접수만 한 곳에서 받은 뒤 서류가 다시 여러 기관을 순회한다면 간판만 바꾼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국가전략 프로젝트에는 총괄 책임자를 두고 부지·전력·용수·환경·교통 문제를 한꺼번에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행정 방식도 바꿔야 한다. 환경 검토가 끝난 뒤 전력을 논의하고, 전력 문제가 정리된 뒤 용수를 검토하는 식으로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서는 세계 산업경쟁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사업 초기부터 환경·전력·용수·교통 문제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은 환경 기준을 낮추자는 얘기가 아니다. 절차를 없애는 것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주민의 권리와 노동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전략산업이라는 이유로 주민 의견을 건너뛰거나 노동·환경 기준을 일괄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빨라 보일지 몰라도 갈등이 쌓이면 소송과 반발로 더 많은 시간을 잃는다. 빠른 정부는 절차를 무시하는 정부가 아니라, 필요한 절차를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는 정부다. 공무원이 결정을 피하지 않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새로운 사업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성공하면 정치권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실무자의 책임이 되는 구조에서는 누구라도 전례를 찾고 결재를 미룬다. 명백한 특혜나 위법이 아니라면 당시의 자료와 절차에 따라 내린 합리적인 정책 판단은 보호할 필요가 있다. 적극행정은 구호가 아니라 감사와 인사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맹자’에는 “도선부족이위정 도법불능이자행(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뜻만으로 정치를 할 수 없고, 법도 스스로 실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 움직여야 제도가 움직인다. 지금 메가프로젝트에 대통령의 힘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굳어버린 행정을 처음 움직이려면 최고 책임자의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 한 사람의 독촉에 오래 의존하지 않는다. 지도자의 의지를 제도로 바꾸고, 제도를 조직의 습관으로 만드는 나라가 강한 나라다. 대통령의 역할은 방향을 정하고 처음 막힌 길을 여는 데 있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총리가 부처를 조정하고 장관이 일정에 책임을 지며, 지자체장이 현장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사업이 늦어질 때마다 대통령이 다시 등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통령이 없어도 담당자가 움직이고 정해진 날짜에 답을 내놓는 구조가 필요하다. 메가프로젝트의 성적표도 그렇게 바꿔야 한다. 대통령이 몇 차례 회의를 열었는지가 아니라 그 뒤 대통령이 회의를 열지 않아도 사업이 일정대로 진행됐는지를 봐야 한다.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에 장관이 문제를 풀었는지, 지자체장이 기업과 주민을 설득했는지, 담당 기관이 약속한 날짜 안에 결정을 내렸는지를 따져야 한다. ‘전격전’은 시작할 때 필요하다. 다만, 국가가 언제까지나 전격전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지금은 대통령이 직접 뛰어 막힌 길을 열어야 할 때일 수 있다. 그 길이 열렸다면 이제 장관과 지자체장이 달려야 한다. 대통령은 방향을 정하고, 장관은 일정과 결과에 책임지며, 공무원은 법과 원칙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정부. 그것이 메가프로젝트 속도전의 다음 단계다. 대통령의 속도는 임기와 함께 끝난다. 시스템의 속도는 정권이 바뀌어도 남는다. 이번 ‘전격전’의 가장 값진 성과는 공장 몇 곳을 빨리 세우는 데 있지 않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아도 제시간에 움직이는 정부를 남기는 데 있다.
2026-08-11 09: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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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빅테크의 한국행, 공짜 투자는 없다
[경제일보] 미국 빅테크의 투자를 한국으로 끌어오겠다는 정부의 구상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 등을 만난다. 삼성전자, SK, 현대자동차그룹 등 국내 기업 총수들도 함께한다. 청와대는 단순한 양해각서를 넘어 전략적 제휴, 장기계약, 실질적인 투자 성과를 이끌어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출국을 앞두고 이번 방문은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늘리는 자리가 아니라 미국 기업이 한국 투자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자리라는 점을 강조했다. 브로드컴과 오픈AI, 앤트로픽, 엔비디아 등을 상대로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미국 빅테크에 돈을 들고 찾아가는 외교에서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외교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의미다. 방향은 옳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 기반, 빠른 통신망, 높은 교육 수준을 갖고 있다.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도 반도체와 기계·장비 수출에 힘입어 전 분기 대비 0.6% 성장했다. 건설투자가 부진한 가운데 수출이 경제를 떠받쳤다는 것은 한국 산업의 힘과 약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반도체는 강하지만, 국내 투자와 내수의 온기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센터와 연구소, 클라우드 거점을 유치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투자는 애국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엔비디아와 오픈AI가 한국을 좋아해서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정상과 기업인이 악수했다고 공장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기업은 전력 가격과 공급 안정성, 인허가 속도, 세금, 인재, 시장 접근성, 데이터 규제를 계산한다. 한국이 경쟁국보다 더 나은 수익과 더 적은 불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면 빅테크의 돈은 미국이나 일본, 싱가포르, 중동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내줘야 할까. 먼저 내줄 것은 속도다. 공장을 짓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하기까지 몇 년씩 허가를 기다려야 하는 나라에 초대형 투자가 들어오기 어렵다. 환경과 안전 기준을 낮추라는 뜻이 아니다.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돌며 같은 서류를 반복해서 내는 행정,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규제, 허가 일정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걷어내야 한다. 빅테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엄격한 규제보다 예측할 수 없는 규제다. 두 번째로 내줄 것은 전력과 기반시설이다. AI 데이터센터는 반도체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막대한 전기와 냉각용수, 통신망, 변전소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외치면서도 송전망 건설과 전력 공급 결정을 미룬다면 투자 유치 구호는 공허해진다. 전력을 기업에 싸게 퍼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업이 부담할 비용과 정부가 구축할 기반시설,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전력조달 방식, 지역사회에 돌아갈 이익을 사전에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세 번째는 시장이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에 데이터센터와 연구개발 거점을 두면 정부와 공공기관, 금융·의료·제조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공공부문의 AI 도입을 국내 기업 보호라는 명분 아래 무조건 막아도 안 되고, 반대로 해외 플랫폼에 통째로 넘겨서도 안 된다.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이 공동으로 제품을 만들고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개방형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 세제 혜택도 필요하다. 경쟁국들이 법인세 감면과 부지, 전력, 정책금융을 한 묶음으로 제공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시장원리를 외치며 빈손으로 기다릴 수는 없다. 다만 보조금은 투자 발표가 아니라 투자 이행에 지급해야 한다. 공장 착공과 고용, 국내 조달, 공동 연구개발 등 약속이 실제 집행되는 단계마다 혜택을 나누는 방식이 옳다. 일자리도 기술도 남기지 않는 서버 건물 하나를 유치하기 위해 세금과 전력을 무제한 제공하는 것은 투자 유치가 아니라 임대업에 가깝다. 내주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하다. 첫째는 데이터 주권이다. 의료와 금융, 공공행정, 산업기술 데이터가 해외 기업의 폐쇄된 플랫폼 안에 갇히면 한국은 AI를 사용하는 나라는 될 수 있어도 AI를 통제하는 나라는 되기 어렵다. 민감정보의 저장 위치와 처리 방식, 제3국 이전, 정부의 감독권은 협상 가능한 부수 조건이 아니다. 둘째는 규제 면책특권이다. 빅테크의 투자가 크다고 해서 개인정보 보호나 공정경쟁, 저작권, 소비자 보호 기준까지 면제해서는 안 된다. 국내 기업에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면서 해외 기업에는 투자 유치를 이유로 예외를 준다면 시장은 기울어진다. 규제는 단순해야 하지만 공평해야 한다. 셋째는 국내 산업의 성장 기회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 시장과 전력, 데이터를 이용하면서 국내 클라우드·소프트웨어·AI 스타트업을 하청업체로만 남겨서는 안 된다. 투자 협약에는 국내 기업의 공급망 참여, 대학·연구기관과의 공동 연구, 국내 인재 채용과 교육, 한국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 지원이 포함돼야 한다. 한국이 제공한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부가가치가 모두 본사로 빠져나가는 구조라면 투자액이 아무리 커도 국익은 작다. 노자는 ‘도덕경’ 36장에서 “장차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固與之)”고 했다. 투자를 얻으려면 한국도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많이 주느냐 적게 주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주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다. 한국이 줘야 할 것은 신속한 행정과 안정적인 전력, 예측 가능한 세제, 매력적인 시장이다. 내줘서는 안 될 것은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과 공정한 경쟁질서, 국내 산업이 성장할 몫이다. 전자는 투자의 기반이고, 후자는 국가의 주권이다.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빅테크 투자 유치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 기업의 건물과 서버를 대신 지어주는 사업으로 전락한다. 정부는 이번 정상외교의 성과를 투자금액 한 줄로 발표해서는 안 된다. 어느 지역에 무엇을 짓는지, 전력과 물은 누가 얼마를 부담하는지, 국내 기업은 어떤 공급망에 참여하는지, 몇 명을 고용하고 어떤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지까지 공개해야 한다. 투자 유치의 성적표는 협약서에 적힌 달러가 아니라 한국에 남은 기술과 일자리, 세수와 수출로 작성돼야 한다. 미국 빅테크의 한국 투자는 구걸할 대상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다.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맞추는 거래다. 한국은 반도체와 제조업, 시장과 인재라는 귀한 카드를 갖고 있다. 그 카드를 헐값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들어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빅테크를 불러오는 데 공짜 점심은 없다. 그렇다고 식당과 주방까지 넘길 필요도 없다. 문은 열되 집문서는 지키는 협상, 그것이 AI 정상외교가 갖춰야 할 국익의 원칙이다.
2026-07-24 07: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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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조원 AI 데이터센터, 속도가 성패…SK·GS·네이버 "세금·전력·GPU 풀어달라"
[경제일보] 정부와 SK텔레콤, GS, 네이버가 2029년까지 8.4기가와트(GW) 규모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를 구축하는 메가프로젝트를 본격화한다. 투자 유치를 포함해 약 550조원을 민간이 조달하고 정부는 전력과 부지, 용수, 인허가를 지원하는 구조다. 1단계 사업은 △SK텔레콤 5GW △GS 2.4GW △네이버 1GW로 구성된다. 이후 SK텔레콤이 2035년까지 자체 구축 규모를 15GW로 늘리면 전체 프로젝트는 18.4GW로 확대된다. 2029년 8.4GW와 2035년 18.4GW는 사업 단계와 목표 시점이 다른 수치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AI 인프라 투자 촉진과 지능 수출을 위한 전략 토론회’를 열고 사업 추진 방안을 논의했다. 송기헌 과방위원장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SK텔레콤과 GS, 네이버클라우드, 삼성SDS,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 AI 경쟁, 모델에서 ‘전력·GPU 확보전’으로 초거대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 수요가 급증하면서 AI 경쟁의 무게중심은 모델 개발에서 이를 안정적으로 가동할 컴퓨팅 인프라 확보로 확대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전력·냉각 설비를 결합해 AI 서비스에 필요한 토큰을 생산하는 시설이다. 정부가 대규모 AIDC를 국가 메가프로젝트로 추진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AI 모델을 보유하더라도 국내에 충분한 컴퓨팅 자원이 없으면 해외 클라우드와 GPU 공급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글로벌 빅테크의 연산 자산을 국내에 유치하면 데이터센터 운영뿐 아니라 반도체와 전력기기, 냉각, 네트워크, 클라우드 소프트웨어까지 후방 산업을 함께 키울 수 있다. 한국은 HBM을 생산하는 반도체 기업과 초고속 통신망, 해저케이블, 대형 산업시설 운영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수백조원에 달하는 투자계획을 실제 착공과 가동으로 연결하려면 전력망과 부지, 장비 조달 시간을 글로벌 고객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단축해야 한다. ◆ SKT “AI 자산 유치는 국가 안보 자산 확보” SK텔레콤은 2029년까지 5GW를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2035년까지 아시아 최대 수준인 15GW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울산 AIDC를 시작으로 전국 거점에 인프라를 조성하고 아마존웹서비스(AWS)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와 협력을 확대한다. 윤성은 SK텔레콤 Comm센터장 겸 AI정책연구원장은 “과거 아시아의 금융 허브는 홍콩과 싱가포르였지만 AI 허브의 주인은 우리가 매우 유력하다”며 한국의 반도체·건설 역량과 안정적인 전력망, 통신 인프라를 강점으로 제시했다. 윤 센터장은 글로벌 빅테크의 AI 연산 자산을 국내에 유치하는 것은 “그 어떤 안보동맹보다 강력한 국가 전략 안보 자산이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와 산업의 AI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국내 컴퓨팅 자원 확보가 경제안보와 직결된다는 의미다. SK텔레콤은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상 코로케이션 방식의 데이터센터가 임대업으로 해석돼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AIDC를 지능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보고 국가전략기술 사업화 시설에 포함하는 한편 부지와 전력, 건축 관련 인허가를 한 번에 처리하는 패스트트랙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GS “변압기 납기만 2년…글로벌 수주 놓칠 수 있어” GS는 강원도 동해 일원에 총 2.4GW 규모의 AIDC 캠퍼스를 추진한다. 2028년까지 1단계 1.2GW, 2029년까지 2단계 1.2GW를 구축할 계획이다. GPU와 메모리 등 컴퓨팅 장비를 포함한 총투자비는 약 120조원으로 추산했다. 도현수 GS AI인프라 대표는 글로벌 고객 유치의 핵심으로 ‘속도’를 꼽았다. 해외 빅테크는 데이터센터 공급 가능 시점을 먼저 확인하지만 국내에서는 대형 변압기 조달에만 약 2년이 걸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도 대표는 “글로벌 고객 대부분이 ‘2년 안에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며 “부품과 변압기 조달에 유연성을 발휘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장 증설과 데이터센터 투자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력기기 생산 물량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도 병목 요인으로 지목했다. 대규모 냉각 용수 확보도 과제다. GS는 해수와 중수도 등 대체 수자원을 냉각에 활용할 수 있도록 취수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환경·건축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 네이버 “국가가 GPU 구매력 모아야” 네이버클라우드는 자체 데이터센터 ‘각 춘천’과 ‘각 세종’, 초거대 AI 모델 ‘하이퍼클로바X’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1GW 규모의 글로벌 AI 팩토리를 구축한다. 내년 상반기까지 55메가와트(MW) 규모의 GPU 서비스(GPUaaS)를 제공하고 같은 해 100MW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배성준 네이버클라우드 전무는 AI 팩토리 구축 비용의 약 70%가 GPU와 서버 등 컴퓨팅 장비에 집중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빅테크보다 구매 물량이 적은 국내 기업은 GPU 가격과 공급 시기 협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배 전무는 “국가 차원에서 GPU 구매력을 모아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비수도권 데이터센터의 전력계통영향평가 절차를 단축하고 장기간 안정적인 전력 비용을 보장하는 AIDC 전용 요금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네이버는 공공기관이 국산 AI 모델을 우선 도입해 초기 시장을 만들고 일본·대만 등과 보안 인증을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AI 모델, 서비스를 묶어 수출하려면 해외에서도 통용되는 실적과 인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 삼성SDS·업계 “세제 혜택과 규제 컨트롤타워 필요” 삼성SDS도 AIDC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데 힘을 보탰다. 이항재 삼성SDS 상무는 “데이터센터 하나를 짓는 데도 파이낸싱이 필요하고 이자 비용까지 감당하며 영업해야 하는 구조여서 세제 혜택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기업이 개별적으로 부지와 전력 공급처를 찾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국에 2∼3GW 규모의 AIDC 클러스터를 미리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과기정통부 내 AIDC 사업을 전담할 정규 조직을 신설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채효근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 전무는 “현재 데이터센터는 1년에 8차례 안팎의 비슷한 점검을 여러 부처로부터 받고 있다”며 부처별 규제를 일원화할 컨트롤타워 지정을 요청했다. ◆ 정부, 테스트랩 10곳·범부처 TF로 지원 정부는 국산 AIDC 솔루션을 검증하고 수출 실적을 확보할 수 있도록 테스트랩 10곳을 구축한다. 국산 AI 반도체와 대형 비상발전기, 무정전전원장치(UPS), 냉각 설비 등 국산화가 부족한 장비의 기술개발도 지원할 계획이다. 김경만 과기정통부 AI정책실장은 “AI 인프라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AI 생태계 전체에서 데이터센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력·냉각 등 물리적 설비와 GPU·네트워크·클라우드 운영 기술을 함께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전력과 부지, 용수 등 부처 간 쟁점을 조율하는 실무 태스크포스(TF)를 월 1회 정기 운영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소집할 방침이다. 관건은 550조원이라는 투자계획을 실제 고객 계약과 가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8.4GW는 확정된 매출이나 수주가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제시한 구축 목표다. 글로벌 고객 확보와 투자금 조달, 전력망 연결, GPU·변압기 공급이 일정에 맞춰 진행돼야 계획이 현실화할 수 있다. 송기헌 국회 과방위원장은 “기업의 투자 의지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만큼 정부와 국회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예측 가능한 투자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며 “데이터센터와 반도체·클라우드·소프트웨어·운영기술을 결합한 인프라 모델을 경쟁력 있는 수출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능을 생산·수출할 AI 팩토리 투자를 가속화할 골든타임”이라며 “산업 현장에서 나온 제언을 입법과 정책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2026-07-16 17: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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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금융 ESG, 본업 경쟁으로…생산·포용금융 고도화
[경제일보] 4대 금융그룹(신한·KB·우리·하나)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전략이 기부·환경 등 캠페인 활동을 넘어 금융 본업과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각 금융그룹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생산·포용금융 확대, 인공지능 전환(AX)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지원 규모 등 정량 지표와 미래 전략을 내세웠다. ◆ 신한금융, 생산·포용금융 110조원 목표…밸류업 관리체계로 연결 신한금융은 생산적·포용금융 확대 성과를 밸류업 기회로 삼았다. 생산·포용금융을 단순 지원 목표가 아닌 그룹 경영관리 체계 아래 성과 지표로 연계했다. 신한금융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기반 밸류업 전략을 제시했다. 생산적 금융은 미래 성장산업과 혁신기업 지원을 통해 실물경제 성장 기반을 넓히고 포용금융은 중·저신용자와 금융취약계층의 금융 부담 완화로 고객 기반을 안정화하는 구조다. 신한금융은 지난해 11월 '신한 K-성장! K-금융!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오는 2030년까지 5년간 생산적·포용적 금융 분야에 총 110조원을 지원하는 중장기 목표를 제시했다. 지원 규모는 생산적 금융 95조원·포용적 금융 15조원으로 올해는 생산적 금융 17조원, 포용적 금융 3조원 등 총 20조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생산적금융 추진단을 신설하고 관련 목표와 성과를 주요 자회사 전략과제와 핵심 성과지표(KPI)에 반영했다. 지주와 자회사 경영진 평가에도 연계해 실행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 KB금융 고객 접점 넓힌 포용·생산금융…디지털 전환으로 고객 가치 제고 KB금융은 포용·생산금융 목표와 함께 고객 접점 확대와 인공지능(AI) 기반 금융사기 차단 등 디지털 신뢰 체계를 강조했다. 지속가능경영 성과를 공시와 데이터 중심으로만 제시하기보다 고객 체감도를 높인 금융 접점으로 풀어냈다. KB금융이 강조한 ESG 전략은 포용금융이다. 오는 2030년까지 약 5년간 17조원 공급을 포용금융 목표로 제시했다. 서민·취약계층 지원 10조5000억원,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6조5000억원을 통해 재기와 자산형성, 성장과 자립을 지원한다. KB희망금융센터를 통해 신용상담과 채무조정, 심리상담을 연계하고 민간중금리대출 공급도 확대한다. 생산적금융 목표도 함께 제시했다. KB금융은 2026~2030년 생산적금융 공급 목표를 93조원으로 잡았다. 이를 기반으로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업대출과 혁신·성장 투자를 위한 투자금융을 통해 미래 성장기업 지원 확대에 나선다. 디지털 접점도 고객가치 제고 수단 중 하나다. KB금융은 KB스타뱅킹 월간활성이용자수(MAU) 1416만명, KB Pay MAU 913만명 등을 주요 성과로 제시했다. KB국민카드는 AI 기반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을 통해 금융사기 차단율 83.9%를 기록하기도 했다. ◆ 우리금융, 미래동반성장 프로젝트 아래 생산적 금융·포용금융·AX 결합 우리금융은 산업금융과 민생금융, AX를 하나의 ESG 성장 전략으로 묶었다. '미래동반성장을 주도하는 우리금융'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생산적 금융 △AX 선도 △시너지창출을 경영 목표로 설정했다. 우리금융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특별보고서 영역을 △ESG 금융 △금융소비자보호 △금융 AX 혁신으로 구성했다. 생산적 금융과 소비자 보호, AX를 별도 과제로 다루면서도 이를 ESG 실행 전략 안에 배치한 구조다. 세부적으로는 미래차·수소·이차전지 등 저탄소 산업 지원을 생산적 금융 영역으로 제시했다. 서민금융상품과 금융취약계층, 청년 주거 지원은 포용금융 영역으로 묶었다. 벤처·지역 선도기업·소상공인 금융 지원은 생산적 금융 전환의 한 축으로 다뤘다. 우리금융은 지난해를 전사적 AX 추진 원년으로 삼고 올해 핵심과제 실행과 그룹 확산, 내년 AX 내재화 및 성과 극대화, 오는 2028년 AX 체계 정착을 목표로 제시했다. 우리금융은 AX를 AI 활용에 그치지 않고 서비스 품질과 안정성, 관리·통제·책임을 포함한 전사 전환 과제로 설명했다. AI 기반 금융서비스 확대에 따라 고객에게 일관되고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 하나금융, 100조 프로젝트로 자금 대전환…국가전략산업·기업 성장 확대 하나금융은 부동산 중심 자금 공급을 국가전략산업과 녹색금융으로 돌리는 자금 대전환형 ESG를 제시했다. 생산적 금융과 지속가능금융 강화와 함께 자금 흐름을 실물 경제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복안이다. 하나금융은 생산적 금융으로의 대전환과 포용금융 확대를 위해 오는 2030년까지 5년간 100조원을 투입하는 '하나 모두 성장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이 중 84조원은 생산적 금융 대전환에 배정했다. 부동산 등에 집중됐던 자금 흐름을 국가전략산업 육성, 벤처·중소·중견기업 성장, 지역 균형발전 등 실물 경제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관계사가 참여하는 경제성장전략 태스크포스(TF)와 그룹 생산적 금융 협의회를 가동했다. 하나금융은 올해 생산적 금융 공급 규모를 기존 계획보다 1조6000억원 늘린 17조8000억원으로 확정하고 관계사별 추진계획과 이행 상황 점검에 나선다.
2026-07-07 15: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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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훈 "AI 데이터센터에 1000조"…정부, 피지컬AI 3년 승부수 던졌다
[경제일보] 정부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와 피지컬AI를 국가 성장전략의 핵심 축으로 세운다. AI 연산 인프라를 대규모로 확충하고 제조·로봇·안전·돌봄 현장에 적용되는 피지컬AI를 전략 산업으로 키워 글로벌 경쟁 구도에 올라서겠다는 구상이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2035년까지 총 18.4기가와트(GW) 규모의 AIDC 투자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부총리는 “2029년까지 8.4GW에 해당하는 550조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예정됐다”며 “이후 2035년까지 10GW를 추가해 총 18.4GW, 1000조원이 넘는 투자를 대한민국에서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계획은 AI 경쟁이 모델 개발을 넘어 전력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네트워크를 묶는 인프라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30년까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AI 데이터센터는 더 이상 서버 시설이 아니라 국가 전력망과 산업 입지를 함께 바꾸는 전략 자산이 됐다. 정부는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별 AIDC 구축을 통해 지역 산업 기반도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전력과 용수, 송전망, 냉각 설비다. 18.4GW는 단순 건물 투자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전력 공급 계획과 재생에너지 조달, 계통 보강,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지역 주민 수용성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피지컬AI도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승부처다. 배 부총리는 “피지컬AI 1강이 되기 위해 앞으로의 3년이 골든타임”이라며 “정부는 피지컬AI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이끌어가겠다”고 밝혔다. 피지컬AI는 로봇이 정해진 명령만 수행하는 기존 자동화와 다르다. 센서와 데이터로 상황을 인식하고 다음 행동을 예측하며 실제 물리 환경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AI 기술이다. 정부가 한국의 가능성을 보는 이유는 제조 기반이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로봇 부품 생태계가 있는 국가는 많지 않다. AI 모델과 제조 현장 데이터를 결합하면 생산성 향상과 산업 안전, 고령화 대응까지 연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배 부총리는 피지컬AI로 주력 산업 생산성을 20% 높이고 가정 내 로봇과 안전돌봄, 지역경제 활성화, 산재사망 제로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큰 병목은 데이터다. 생성형 AI는 인터넷과 문서, 코드 등 방대한 디지털 데이터를 학습했지만 피지컬AI는 로봇이 현실에서 움직이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배 부총리는 생성형 AI가 10만년 규모의 데이터를 확보한 데 비해 피지컬AI 데이터는 1만시간 수준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실제 현장 데이터와 가상 시뮬레이션 기반 합성 데이터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다. 글로벌 빅테크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엔비디아는 피지컬AI가 실제 세계에서 작동하려면 로봇 자체의 디지털트윈과 세계를 이해하는 월드모델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며 ‘코스모스(Cosmos)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WFM)’을 공개했다. 메타와 구글, 로봇 AI 스타트업들도 월드모델과 범용 로봇 지능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이 3년을 골든타임으로 보는 이유도 이 경쟁이 아직 완전히 고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월드모델 기반 범용 피지컬AI 파운데이션 모델을 3년 안에 구축하고 이후 농업, 제조, 안전돌봄 등 분야별 특화 모델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로봇, 범용 모델, 월드모델, 네트워크 보안 등 풀스택 국산화도 추진한다. 성공하면 피지컬AI 플랫폼 자체가 수출 산업이 될 수 있다. 한편 남은 과제는 선언보다 무겁다. AIDC는 전력망 없이 서지 못하고 피지컬AI는 현장 데이터 없이 움직일 수 없다. 정부가 숫자로 제시한 1000조원 투자와 3년 로드맵은 산업계의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부처별 계획을 넘어 전력, 반도체, 로봇, 제조 데이터를 한 체계로 묶는 실행력이다. AI의 다음 전장은 화면 안이 아니라 공장과 병원, 농장과 가정이다. 그 물리적 세계에서 성과를 증명할 때 한국의 AI 전략도 비로소 산업 전략이 된다.
2026-06-29 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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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장은 선거 현수막 위에 지어지지 않는다
[경제일보] 선거철만 되면 기이한 신기루가 피어오른다. 삽을 뜰 부지도, 흘려보낼 물도, 끌어올 전기도 없는데 현수막 위엔 어느 날 갑자기 ‘삼성 반도체 유치’라는 거창한 활자가 박힌다. 기업의 의사조차 묻지 않은 일방적인 구애이자 선언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볍고 공장은 태산처럼 무겁다. 표는 오늘 당장 필요하겠지만, 반도체 팹(Fab)은 1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짓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유기체다. 최근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다투어 내놓는 반도체 공약은 위험천만하다. 대구와 광주, 전남 등지에서 들려오는 ‘10조원 규모 시설 유치’ 소식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현장은 비명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과 평택을 축으로 수백조원대 투자를 확정하고 초격차를 위한 속도전에 돌입한 상태다. 기업의 경영 논리와 정치의 선거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가 산업을 말하는 것은 마땅한 책무다. 수도권 쏠림과 지역 소멸의 절벽 앞에서 반도체라는 전략 자산을 지역의 미래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권장돼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의 천박함에 있다. 정치가 기업을 부르는 것과, 기업의 이름을 빌려 표를 구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반도체 공장은 축구장 몇 개 넓이의 땅에 콘크리트 건물을 세운다고 돌아가는 단순 시설이 아니다. 전력과 용수, 도로와 폐수 처리, 송전망과 협력사 생태계,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인재와 교육·의료·주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인공 도시’다. 팹 하나를 짓는다는 것은 도시의 거대한 혈관계를 새로 이식하는 일과 같다. 하지만 선거판에서는 이 복잡한 산업 생태계가 한 줄의 시원한 구호로 증발해 버린다. “우리 지역에 삼성을 가져오겠다”는 호언장담 뒤에 실질적인 책임은 어디에도 없다. 정부 자료가 증명하는 숫자의 무게를 보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공되는 2053년까지 필요한 전력은 10GW(기가와트) 이상이다. 하루에 쓰이는 물만 133만 톤에 달한다. 인구 300만 인천시민이 쓰는 물의 양을 반도체 공장 하나가 삼키는 꼴이다. 송전선로 하나를 까는 데만 수조 원의 예산과 주민 설득이라는 고차방정식이 필요하다. 이 엄중한 숫자 앞에서 정치인의 ‘공장 유치’라는 말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10GW의 전력은 말로 끌어올 수 없고, 100만 톤의 물은 현수막 사이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산업정책에는 정교한 지도가 있고, 냉정한 숫자가 있으며, 명확한 비용 분담과 책임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반면, 선거용 공약에는 오직 ‘이름’만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단어인 ‘삼성’,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합해 환상을 팔 뿐이다. 하지만 자본은 애향심이나 표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고객과 납기, 수율과 원가, 전력의 안정성이라는 차가운 계산기 위에서만 투자의 발길을 옮긴다. 그 계산기에서 숫자 하나만 어긋나도 수십조의 투자는 멈춰 선다. 지방의 절박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수도권의 비대화가 지역의 골목을 비워내고 있는 현실은 뼈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기업의 투자 결정을 선거용 땔감으로 쓰는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지역 발전을 원한다면 기업의 이름보다 ‘조건’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 송전망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용수는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대학은 어떤 인재를 키워낼 것인가. 이 치열한 고민이 빠진 유치는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염불에 불과하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정명(正名)’을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일이 성취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정명이다. 기업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마치 지자체가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름부터 틀렸다. ‘유치’라고 부르기 전에 ‘조성’이라 해야 하고, ‘공장’을 약속하기 전에 ‘인프라’를 약속해야 한다. ‘삼성’을 외치기 전에 ‘전기’를 말하는 것이 순리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한마디는 기업에겐 치명적인 ‘리스크’가 된다.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처가 바뀌느냐고 묻고, 협력사는 짐을 싸야 하느냐며 동요한다. 기업이 사실무근이라 밝히면 정치권과 각을 세우는 꼴이 되고, 침묵하면 거짓 공약을 묵인하는 셈이 된다. 기업 관계자들이 쏟아지는 문의 전화에 본업을 망칠 지경이라는 토로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이제 원칙을 세울 때가 됐다. 첫째, 특정 기업명을 적시한 공약은 반드시 사전 협의 여부를 공개해야 한다. 둘째, 대규모 산업 공약에는 전력·용수·재원 계획 등 구체적인 데이터가 첨부돼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 기구가 이러한 경제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의 위상을 빌린 공약이라면, 그에 걸맞은 무게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와 정치는 인프라를 닦고 규제를 걷어내는 조력자여야 하며, 기업은 그 토대 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주체여야 한다. 이 경계가 허물어질 때 산업정책은 계획경제의 아류가 되고, 선거 공약은 경영에 대한 오만한 월권이 된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이 세계와 ‘맞짱’ 뜰 수 있는 마지막 성벽이다. 이 성벽은 정치 구호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엔지니어의 밤샘과 장비의 정밀도,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고독한 결단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정체다. 그 숭고한 성벽을 선거판의 배경 그림으로 소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례한 일이다. 정치가 할 일은 삼성을 현수막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땅에 더 깊고 안전하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전력과 물, 그리고 사람의 길을 여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표밭이 아니라 국가의 심장이다. 선거가 끝나고 후보가 떠나도 송전탑은 서 있어야 하며, 구호가 사라져도 엔지니어는 출근해야 한다. 정치권에 묻는다. 진정 반도체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기업의 이름부터 내려놓고 전력망 도면부터 펼쳐라. 그것이 산업을 대하는 정당한 ‘상식’이다.
2026-05-08 13:2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