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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기다리는 시간도 규제다
[경제일보] 정부가 규제와 인허가에 발이 묶인 7조9000억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앞당기기로 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전기차 생산라인 전환을 비롯해 청정수소, 이차전지, 첨단센서 등 현장에서 대기 중인 투자 프로젝트의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이 골자다.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따로 발주하던 전기·통신공사의 통합발주도 허용하기로 했다. 방향은 옳다. 정부가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산업정책은 이미 투자할 의사가 있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일이다. 이번 대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현대차 울산공장이다. 현대차는 약 4조원을 들여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을 자율주행 전기차 중심 공장으로 재건축할 계획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사업계획 심의와 환경·교통·재해 영향평가, 건축·안전 관련 인허가 등을 거치면 행정절차에 3년 이상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와 울산시는 전담 프로젝트매니저(PM)를 두고 각종 영향평가와 인허가를 동시에 진행해 이를 1년 이내로 줄이겠다고 했다. 여기서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필요한 심사를 생략하지 않고도 1년 안에 처리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과 안전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장을 빨리 짓겠다고 환경영향평가를 없애거나 산업안전 기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 주민의 재산권과 생활환경도 보호해야 한다. 이번 대책 역시 관련 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고 사전 컨설팅을 통해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없애야 할 것은 안전장치가 아니라 행정의 군더더기다. 부처와 기관마다 비슷한 자료를 요구하고 앞 단계의 절차가 끝나야 다음 심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다면 이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다. 행정기관끼리 협의할 일을 기업이 서류를 들고 돌아다니며 해결하도록 하는 것도 정상적인 행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규제의 비용은 행정수수료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업에는 시간이 곧 비용이다. 특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바이오처럼 기술 변화가 빠른 산업에서는 그렇다. 경쟁국 기업이 공장을 짓고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동안 국내 기업이 인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1~2년의 차이가 시장점유율을 바꿀 수 있다.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경쟁력의 문제가 된다. 세계 각국이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은 반도체와 AI, 배터리 등 전략산업을 자국에 끌어들이기 위해 보조금과 세제지원, 산업 인프라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한국은 애국심 때문에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인건비와 세금, 인재, 시장 접근성, 규제 그리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따져 투자처를 정한다. 한국이 경쟁해야 할 것도 결국 이런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규제개혁의 성적표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역대 정부는 출범할 때마다 규제혁신을 내걸었다. 폐지하거나 개선한 규제의 숫자를 성과로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에는 규제 몇 건을 없앴느냐보다 투자 결정에서 공장 가동까지 몇 달이 걸리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규제개혁의 성적표를 ‘폐지 건수’보다 ‘줄어든 투자 대기시간’으로 매겨보자는 것이다. 오래된 규제를 정기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장치도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환경, 공정한 시장질서를 지키는 규제는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 반면 기술과 산업구조가 바뀌었는데 과거의 이해관계나 행정편의 때문에 남아 있는 규제라면 존치 이유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기업에 규제 철폐의 필요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부도 그 규제를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첨단산업의 기반시설은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기업이 지을 수 있지만 송전망과 용수망까지 기업 혼자 해결하기는 어렵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없다면 들어설 수 없다. 산업용지와 전력·용수·통신망, 연구개발 기반과 인재 공급은 개별 기업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곳에서 더 커져야 한다. 노동시장도 달라진 산업환경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제조업과 연구개발, 정보기술 기업의 일하는 방식이 모두 다른 만큼 노사 합의를 전제로 업종과 업무 특성에 맞는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히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생산성과 직무의 가치를 보다 잘 반영하는 임금체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다만 노동 유연화가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오래가기 어렵다. 기업의 인력 운용에 선택지를 넓혀준다면 실직과 전직 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할 고용안전망과 재교육 체계도 함께 강화해야 한다. 유연성과 보호를 서로 반대편에 세워놓고 어느 하나만 선택해서는 개혁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세제에서는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전략기술과 연구개발에 대한 세액공제는 기업의 장기 투자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지원 규모 못지않게 제도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도 중요하다.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이라면 몇 년 뒤 투자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어떤 기업과 기술이 성공할지를 대신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장과 기업가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운동장을 만들고 민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기반시설과 기초 연구개발을 책임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보다 ‘기업이 뛰기 좋은 정부’가 필요한 이유다. 규제완화의 목적도 기업의 비용을 줄이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업 투자가 늘고 생산성이 높아져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기업이 거둔 성과가 임금과 가계소득, 소비로 이어질 때 규제개혁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 기업 활력과 민생은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한비자>에는 “법불아귀(法不阿貴)”,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규제개혁에도 적용할 만한 원칙이다. 힘 있는 대기업이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예외를 만들어주는 것이 규제개혁이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같은 기준 아래 필요한 행정서비스를 예측 가능한 시간 안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7조9000억원 투자지원 대책은 그런 의미에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 현장의 애로를 찾아 규제와 행정절차를 손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이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여러 행정절차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면 다른 공장에서는 왜 안 되는가. 반도체 팹에서 불필요한 공정 지연을 줄일 수 있다면 다른 첨단산업에도 비슷한 규제가 남아 있지는 않은가. 기업이 정부에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행정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규제는 필요한 곳에서는 단단해야 하고 필요 없는 곳에서는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 안전과 환경, 시장의 공정성을 지키는 기준은 낮춰서는 안 된다. 대신 투자와 혁신을 가로막으면서도 정책 목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절차는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남겨둘 필요가 없다. 기업에 투자하라고 주문하기 전에 기업이 투자하기 어렵게 만든 정부 자신의 절차부터 살펴야 한다. 한국 경제에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거창한 성장 구호가 아니다. 투자할 기업이 제때 공장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며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규제개혁의 성패는 없앤 규제의 숫자가 아니라 앞당겨진 투자와 높아진 생산성, 새로 생긴 일자리로 평가받아야 한다. 7조9000억원의 현장대기 투자를 움직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행정으로 바꿔야 한다. 경제의 속도를 정부의 절차가 늦추는 일부터 없애야 한다.
2026-10-02 11: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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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음악·영화·웹툰 뭉쳤다…K-콘텐츠 11개 단체, 2030년 '220조' 매출 도전
[경제일보] K-콘텐츠산업을 대표하는 11개 협·단체가 오는 2030년 콘텐츠산업 매출 220조원, 수출 270억 달러(약 37조원)라는 공동 목표를 내걸었다. 다만 업계는 현재와 같은 정책·예산 수준으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진단하며 단순한 재정 확대보다 세제·금융·법제를 함께 바꾸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5일 K-콘텐츠산업협의회는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이재정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 주최로 'K-컬처 400조·K-콘텐츠 220조 비전선포식'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K-콘텐츠 220조 2030 비전'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협의회가 제시한 오는 2030년 목표는 매출 220조원, 수출 270억 달러, 종사자 75만명, 기업 14만6000개다. 해당 목표는 지난해 콘텐츠산업 매출 161조5000억원에서 연평균 6.4% 성장해야 달성할 수 있는 규모로, 수출은 연평균 12.6% 성장률을 목표로 잡았다. 매출보다 수출을 두 배 빠르게 늘려 해외 시장에서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업계가 내놓은 전망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중장기 전망모형에 따르면 현재 수준의 정책과 예산이 유지될 경우 오는 2030년 콘텐츠산업 매출은 205조9000억원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목표와 13조3000억원의 차이가 발생한다. 정부가 콘텐츠 관련 예산을 매년 10%씩 늘리는 공격적인 상황을 가정해도 오는 2030년 매출은 215조3000억원으로 220조원에 미치지 못한다. 수출의 경우 격차가 더 크다. 예산을 매년 10%씩 증액하더라도 오는 2030년 수출 목표인 270억 달러보다 78억 달러(약 11조원)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비전을 발표한 김승욱 대한출판문화협회 정책담당전무는 "매년 10%씩 늘려도 못 간다는 것은 재정 투입 확대만으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격차를 메우는 것은 재정·세제·금융·법제가 결합된 정책 조합의 설계"라고 말했다. 이어 "해법은 지금 하는 사업의 확대가 아니라 프레임의 전환"이라며 "목표는 산업계가 제시했지만, 목표 달성의 조건은 정부와 국회가 함께 만들어야 하고, 이 조건이 갖춰지면 220조(원)는 달성 가능한 목표가 된다"고 강조했다. 협의회가 정책 전환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최근 콘텐츠산업의 성장 정체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협의회는 선언문을 통해 콘텐츠산업의 성장이 최근 3년 연속 2%대에 머물렀다고 진단했다. 세계적으로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산업 규모가 그에 걸맞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협의회 출범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게임산업협회, 한국대중음악공연산업협회, 한국대중음악산업협회,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한국모바일게임협회, 한국애니메이션산업협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한국웹툰산업협회,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등 11개 단체가 참여한다. 협의회는 지난해 5월 발족한 임의 협의체에서 이날 창립총회를 거쳐 공식 협의체로 전환했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조영기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장, 우승현 한국대중음악산업협회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업계가 공동으로 내놓은 핵심 요구는 세제·금융·법제의 3대 전환이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분담할 수 있도록 세제 지원을 확대하고, 기획 단계부터 해외 진출까지 이어지는 금융 지원 체계를 만들며, 규제 중심의 법제를 산업 진흥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제시된 과제는 콘텐츠 제작비 세액공제의 전면 확대다. 현재 영상콘텐츠와 웹툰 등을 중심으로 적용되는 제작비 세액공제를 게임·음악·출판 등 문화콘텐츠 전반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협의회는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12개국 이상이 게임 등 디지털콘텐츠 제작에 25~40% 수준의 세액공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콘텐츠 수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과 음악 등이 현행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해외 주요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정책금융 확대도 공통 요구에 포함됐다. 협의회는 장르별 전문계정을 신설하고 기획부터 제작, 유통, 해외 진출까지 단계별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자금 사다리'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로젝트 단위로 자금이 필요한 콘텐츠산업의 특성을 금융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다. AI 확산에 따른 제도 변화도 주요 의제로 제시됐다. 콘텐츠산업은 AI가 새로운 제작 도구로 활용되는 동시에 기존 창작물이 AI 학습 데이터로 활용되는 산업이기도 하다. 협의회는 AI 전환 지원과 저작권 프레임워크 구축을 공통 과제로 제시하면서 창작자의 권리 보호와 AI 기술 활용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비전 선언문을 통해 "인공지능 시대에 콘텐츠산업은 학습 데이터의 권리자이자 새로운 제작 도구의 이용자"라며 "창작자의 권리를 지키는 일과 기술을 활용하는 일은 대립하는 요구가 아니라 한 산업의 두 얼굴"이라고 설명했다. AI뿐만 아니라 OTT와 글로벌 플랫폼 등으로 콘텐츠가 소비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만큼 기존 제도 역시 변화한 산업 환경에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재정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서로 다른 현장에서 성장해 온 콘텐츠산업 11개 협·단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콘텐츠산업 전체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의미 있는 자리"라며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보다 그 성장을 실제로 만들어낼 산업의 기반"이라고 말했다. 이어 "브라운관과 아케이드 게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제도가 AI와 OTT, 글로벌 플랫폼 시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기는 어렵다"며 "변화한 환경에서 실효성을 잃었거나 새로운 시도를 불필요하게 가로막는 제도는 없는지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협의회는 정부와 국회에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자체적으로 목표 달성 여부를 점검할 예정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국가 승인 통계를 기준으로 매년 상반기 전년도 실적을 확인하고 'K-콘텐츠 220조 이행 점검 보고서'를 협의회 명의로 공표한다는 계획이다. 비전 선포식에 앞서 열린 정책 간담회에서는 2027년도 콘텐츠 예산과 AI 전환 및 창작자 보호, 콘텐츠 세제 지원 확대, 2030 비전 달성을 위한 국회 협력 등이 논의됐다. 협의회는 올해 하반기 콘텐츠산업 규제개혁 건의를 비롯해 한중 콘텐츠산업 교류회 개최 등 공동 활동도 이어갈 예정이다. 김영수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은 "하나의 IP가 무한히 확장되는 현재에는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과감하게 결합할 때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며 "창작자가 마음껏 도전하고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산업환경을 조성해 해외 진출과 신기술 대응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2026-09-15 1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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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미래산업, 또 하나의 백화점식 정책 돼선 안 된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청와대에서 반도체와 인공지능(AI)에 이은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 방안을 직접 주재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날 '미래성장동력 7대 SEED 보고회'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R), 핵융합, 차세대 재생에너지,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 첨단 공급망을 10~20년 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전략 분야로 제시했다. 목표도 야심차다. 정부는 경수형 SMR을 2035년 상용화하고, 2029년까지 오류정정이 가능한 100큐비트 양자프로세서(QPU)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2030년 민간 주도 달 착륙선을 발사하고, 첨단바이오에서는 AI 바이오 인프라 구축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상용화를 추진한다. 미래 기술에 국가가 선제적으로 투자하는 방향은 옳다. 반도체 하나에 국가 수출과 성장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심해지고 에너지와 핵심광물, 바이오와 우주까지 경제안보 영역으로 편입되는 상황에서 제2, 제3의 성장동력을 준비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무엇을 선정했느냐보다 어떻게 키울 것이냐다. 우리 정부의 미래산업 정책은 정권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혁신성장, 한국판 뉴딜, 국가전략기술 등 간판은 달랐지만 비슷한 분야가 반복해서 포함됐다. 정부가 여러 산업을 동시에 전략 분야로 지정하고 예산을 나눠주다가 정권이 바뀌면 사업 이름과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번 7대 SEED가 과거 정책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첫 번째 원칙은 선택과 집중이다. SMR과 핵융합, 재생에너지, 양자, 우주항공, 바이오, 첨단 공급망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것과 한국이 모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국가 재정과 인재, 연구개발 역량은 한정돼 있다. 양자와 우주, 핵융합처럼 막대한 장기투자가 필요한 분야까지 모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다면 결국 각 부처와 연구기관에 예산을 나눠주는 백화점식 지원으로 흐를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이 이미 기술과 산업 생태계를 가진 분야와 장기적인 원천기술 확보가 필요한 분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SMR처럼 원전 산업과 제조 공급망이라는 기존 강점이 있는 분야는 상용화 전략을 공격적으로 짤 수 있다. 반면 핵융합이나 심우주 탐사처럼 장기간의 기초연구가 필요한 분야는 당장의 매출과 수출 실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술 수준과 시장성, 민간기업의 투자 의지, 공급망 파급효과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나눠주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정부와 민간의 역할도 분명해야 한다. 정부가 미래 산업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시장의 승자를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 특정 기술과 기업을 '국가대표'로 정해 지원을 집중하면 민간의 경쟁과 혁신이 오히려 약해질 수도 있다. 정부는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연구와 대규모 실증 인프라, 규제개혁과 초기 시장 형성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술개발과 사업화, 해외시장 진출은 기업의 경쟁과 선택에 맡겨야 한다. 정부 지원 1원이 민간투자 몇 원을 끌어냈는지, 지원이 끝난 뒤에도 기업이 투자를 이어가는지를 성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미래기술은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다. 10년 뒤 시장을 지금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개 분야 가운데 일부는 시장이 예상보다 늦게 열리거나 다른 기술에 밀릴 수 있다. 따라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만큼 중단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원칙을 미리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 기간마다 세계 기술 수준과 민간투자, 시장 규모를 평가하고 경쟁력을 잃은 사업은 과감하게 축소해야 한다. 반대로 한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앞서가는 분야에는 자원을 더 집중해야 한다. 정부 사업이 한번 시작되면 예산과 조직, 지역 이해관계 때문에 없애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성과가 부족해도 지원이 이어지는 이른바 '좀비 프로젝트'가 생겨서는 안 된다. 미래산업 정책의 목표는 실패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빨리 찾아내 자원을 다시 배치하는 데 있다. 인재 전략도 함께 가야 한다. SMR과 핵융합,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는 모두 세계적으로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한 분야다. 정부가 연구개발비를 늘려도 이를 수행할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없다면 목표는 계획표에 머문다. 대학 정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해외 우수 연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국내 연구자가 장기간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실패한 연구에도 재도전할 기회를 주고 박사급 연구자가 산업계와 연구소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이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7대 SEED는 대부분 2030년대 이후를 바라보는 사업이다. 한 정부 임기 안에 끝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여야와 산업계, 과학계가 최소한의 장기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미래산업 전략은 대통령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가의 프로젝트가 돼야 한다. 첨단 공급망 전략도 단순한 국산화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든 소재와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반드시 국내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하는 품목과 우방국과 공급망을 나눌 품목을 구분해야 한다. 경제안보도 결국 비용과 효율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반도체가 오늘의 한국경제를 만들었다면 10년, 20년 뒤에는 새로운 산업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도체도 정부가 어느 날 '국가대표 산업'으로 지정했다고 세계 1위가 된 것은 아니다. 수십 년간 기업의 투자와 연구개발, 인재 축적,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쌓인 결과다. 정부가 씨앗을 뿌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씨앗이 큰 나무로 자랄지는 시장과 기술의 경쟁이 결정한다. 국가의 역할은 모든 씨앗에 같은 양의 물을 주는 데 있지 않다.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는 자원을 집중하고, 성장이 멈춘 사업에는 지원을 과감히 줄이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손자병법 허실편에는 모든 곳을 지키려 하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있다. 국가 산업전략도 다르지 않다. 한정된 자원을 모든 분야에 흩뿌리면 세계 최고가 필요한 첨단기술 경쟁에서 어느 하나도 앞서기 어렵다. 7대 SEED는 출발점일 뿐이다. 정부가 평가받을 것은 7개의 화려한 청사진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실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으로 키웠는지다. '제2의 반도체'는 예산을 많이 배정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술 수준과 시장성, 민간 역량을 냉정하게 따지고 가능성 있는 분야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실패한 사업을 중단할 용기까지 갖출 때 비로소 미래성장동력 전략은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래산업 육성에서 가장 필요한 것도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2026-08-13 17: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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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년 이재명 정부, 이제 청사진은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경제일보]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국정 2년 차 화두는 ‘대체불가 대한민국’이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가 꼭 필요로 하는 나라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반도체 패권 경쟁, 미국발 통상 압박, 중동발 에너지 불안, 저출생과 지역소멸, 부동산 불안, 재정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 대통령의 구호가 수사가 아니라 국정의 좌표가 되려면 이제부터는 청사진을 숫자와 실행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년을 민주주의 위기, 통상·안보 위기, 민생 위기를 헤쳐온 시간으로 규정했다. 국정 2년 차 목표로는 초격차 산업강국, 글로벌 외교·안보 강국, 규범과 규칙이 지켜지는 정상사회, 국민의 목숨을 살리는 정부를 제시했다.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다. 특히 경제정책의 중심을 첨단산업, 국가투자, 에너지 전환, 지역균형, 민생 안정에 두겠다는 구상은 지금 한국 경제가 피할 수 없는 과제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모든 것을 동시에 하겠다는 정부는 대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정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성장의 엔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반도체, AI, 조선, 방산, 배터리, 원전, 전력망, 바이오 등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자본과 인재와 규제를 집중해야 한다. 초격차 산업강국은 보조금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세제, 전력과 용수, 인허가 속도, 노동 유연성, 연구개발 인력 공급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정부는 중도 실용의 길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려면 먼저 성장해야 한다. 기업을 압박해 단기 성과를 끌어내는 방식으로는 미래산업 투자가 지속될 수 없다. 반대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태도도 무책임하다. 정부는 길을 내고, 민간은 달리게 해야 한다. 국가는 전력망과 항만, 데이터센터, 첨단산단,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과감히 투자하되, 민간의 의사결정을 정치 논리로 흔들어서는 안 된다. 민생경제도 마찬가지다. 고물가와 고금리의 상흔은 아직 가계에 남아 있다. 자영업자는 매출보다 비용을 먼저 걱정하고 청년은 일자리보다 주거비에 먼저 눌린다. 이럴 때 정부가 재정을 써야 할 곳은 분명하다. 전 국민을 향한 일회성 지원보다 취약계층, 영세 자영업자, 주거 약자, 저출생 대응, 직업 전환 교육에 정밀하게 써야 한다. 재정은 따뜻해야 하지만 동시에 엄격해야 한다. 빚으로 인기를 사는 정책은 결국 다음 세대의 세금으로 돌아온다. 부동산 정책은 더 냉정해야 한다. 시장을 향해 ‘투기와 전쟁’만 외치면 공급은 얼어붙고, 공급만 외치면 불평등은 커진다. 서울과 수도권의 주거 불안, 지방의 빈집과 소멸 위기는 다른 처방을 요구한다. 핵심은 예측 가능성이다. 세제와 대출, 공급 정책이 정권의 정치 일정에 따라 흔들리면 시장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려 하기보다 시장이 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규칙을 세워야 한다. 금융·자본시장 개혁도 국정 2년 차의 중요한 시험대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려면 말뿐인 밸류업이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 주주권 보호, 불공정거래 엄단, 장기투자 세제 지원이 필요하다. 주가조작과 부동산 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옳다. 다만 처벌 강화만으로 시장 신뢰가 생기지는 않는다. 예측 가능한 감독, 일관된 법 집행, 기업의 자율과 책임을 함께 세워야 한다. 정치의 정상화도 경제정책의 일부다. 기업은 금리와 환율만 보지 않는다. 정권의 말, 국회의 분위기, 규제기관의 태도, 노사관계의 방향을 함께 본다. 국정이 매일 전쟁처럼 흘러가면 투자는 늦춰진다. 야당과 언론을 설득하지 못하는 경제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한 ‘정상사회’는 법과 원칙이 상대 진영에만 적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내 편에게도 같은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여야 한다. 동양 고전 <논어>에는 “민무신불립”, 곧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취임 1년을 넘긴 정부에 필요한 것도 결국 신뢰다. 국민은 더 이상 거창한 청사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물가가 안정되는지, 집값이 예측 가능한지, 일자리가 생기는지, 기업이 투자하는지,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지를 본다. 국정의 성패는 연설문이 아니라 생활의 체감으로 결정된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출범기의 명분을 넘어 집권 2년 차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좋은 구호다. 그러나 구호는 출발점일 뿐이다. 초격차 산업은 규제개혁과 인재정책으로, 민생 안정은 정밀한 재정과 물가 관리로, 자본시장 개혁은 공정한 룰과 주주 보호로, 정상사회는 법치와 통합의 실천으로 증명돼야 한다. 대통령에게 남은 4년은 길어 보이지만 국정 시간표로는 짧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말이 아니라 더 정확한 실행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공하려면 성장과 분배, 시장과 국가, 개혁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체불가의 잠재력을 이미 갖고 있다. 정부의 책무는 그 잠재력을 정치의 구호로 소비하지 않고 국민의 삶과 기업의 투자, 국가의 경쟁력으로 바꾸는 일이다.
2026-06-10 17: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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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끝났고 경제의 계산서가 남았다
[경제일보]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은 승패를 말한다. 어느 지역을 지켰고 어느 지역을 잃었는지 따진다. 표의 흐름을 분석하고 다음 선거의 유불리를 계산한다. 그러나 선거 뒤 정치권 앞에 놓이는 것은 결국 숫자다. 성장률 전망치와 물가 상승률, 가계부채와 재정 여력이 다시 고개를 든다. 선거 때는 약속으로 넘길 수 있었던 문제들이 이제 예산과 금리, 세금과 시장의 반응으로 돌아온다. 6·3 지방선거 이후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장면도 다르지 않다. 감세와 지원금, 대출 완화와 규제 완화, 부동산 안정과 공급 확대, 민생 회복과 재정 확대가 동시에 거론됐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모두 그럴듯하다. 그러나 정책은 말의 선의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된다. 재원이 없는 약속은 결국 다른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부작용을 말하지 않는 처방은 정책이 아니라 표어에 가깝다. 지표만 보면 낙관의 근거도 있다. 지난 5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3.2% 늘어난 877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월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이다. 반도체 수출은 169.4% 증가하며 전체 수출 증가세를 이끌었다. AI 투자 확대와 메모리 업황 개선이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수출이 살아나면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증시도 반응한다. 선거 이후 정치권이 경제 회복을 말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러나 그 숫자만으로 경제 전체가 좋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도체 호황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반도체가 잘된다고 해서 골목상권의 계산대와 건설현장의 자금 사정, 자영업자의 이자 부담, 서민의 장바구니 사정까지 함께 풀린 것은 아니다. 수출 대기업의 회복과 내수 현장의 체감경기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경제가 좋아졌다는 말이 국민의 생활에서 확인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도 확인되지 않을 수 있다. 물가는 그 간극을 가장 먼저 드러낸다. 5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1% 올랐다. 생활물가지수는 3.3% 상승했다. 숫자는 건조하지만 가계에는 다르게 닿는다. 전기요금과 교통비, 외식비와 식료품 가격은 통계표가 아니라 매일의 지출이다. 선거 때 물가는 구호가 되지만 선거 뒤에는 가계부가 된다. 성장률 전망이 올라갔다는 말만으로 식탁의 부담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가계부채도 한국 경제의 약한 고리로 남아 있다. 금융당국은 올해 관리대상 가계대출 증가율 목표를 1.5%로 설정하고 2030년까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80%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그만큼 가계부채 문제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대출 완화와 주거 지원은 손쉬운 공약으로 등장한다. 집값이 불안하면 대출을 풀자는 요구가 나오고 경기가 나쁘면 돈을 더 돌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빚으로 떠받친 민생은 오래가지 못한다. 대출 완화는 당장의 숨통을 틔울 수 있지만 다음 위기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포퓰리즘의 위험은 돈을 쓰자는 주장 자체에 있지 않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재정은 필요하다. 취약계층과 한계 상황에 몰린 소상공인을 외면하는 국가는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문제는 누구에게 왜 얼마나 지원할 것인지 묻지 않는 정치다. 모든 국민에게 같은 방식으로 돈을 나눠주는 일은 가장 쉬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쉬운 선택이 곧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다. 재정은 정치권의 현금 인출기가 아니다. 오늘의 지출은 내일의 세금이거나 미래 세대의 부담이다. 선거판의 언어는 짧고 강하다. 깎아주겠다. 풀어주겠다. 지원하겠다. 막아주겠다. 경제의 언어는 훨씬 까다롭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누가 혜택을 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부작용은 어느 시장에서 나타날 것인가. 정책은 몇 년을 버틸 수 있는가. 선거 이후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계산을 생략해서도 안 된다. 선거에서 졌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해서도 안 된다. 부동산 정책은 그 충돌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영역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말은 늘 반복된다. 공급을 늘리겠다는 약속도 빠지지 않는다. 세 부담을 낮추겠다는 주장과 투기 수요를 억제하겠다는 주장도 동시에 나온다. 그러나 현실의 부동산 시장은 한 문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급은 인허가와 금융, 공사비와 지역 민원, 시행 리스크와 시공사 수익성에 묶여 있다. 대출은 가계부채와 직결된다. 세제는 시장 심리와 맞물린다. 선거 구호는 시장의 불안을 잠시 덮을 수는 있어도 주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건설과 부동산 현장의 체감은 더 복잡하다. 공사비는 올랐고 금융 비용은 부담으로 남아 있다. PF 부실 우려는 시장 곳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정책 방향은 맞다. 그러나 현장은 자금 조달과 수익성, 분양성, 인허가 지연이라는 벽을 만난다. 정치권은 공급 확대를 말하지만 공급은 선언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땅을 확보하고 자금을 조달하고 공사를 진행하고 입주까지 이어지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의 위험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 정하지 않은 공급 대책은 구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규제 완화도 마찬가지다. 기업 활동을 막는 불필요한 규제는 걷어내야 한다. 노동시장과 산업 현장의 변화에 맞지 않는 제도는 손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안전과 책임까지 함께 낮추려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 안전은 비용 항목이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기준이다. 기업 부담을 줄이자는 요구는 경제 현실에서 나온다. 동시에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을 지키자는 요구도 현실에서 나온다. 정책의 성패는 어느 한쪽의 구호를 택하는 데 있지 않다. 비용과 책임을 어떻게 나눌지 설계하는 데 있다. 정책도 공적 약속이다. 공적 약속에는 권한과 책임이 따른다. 선거 공약이라고 해서 책임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정책은 선의로 면책되지 않는다. 결과와 부작용까지 함께 심판받는다. 지원금이 필요하다면 대상과 재원을 밝혀야 한다. 감세가 필요하다면 세수 감소분을 설명해야 한다. 대출 완화가 필요하다면 가계부채와 집값에 미칠 영향을 함께 말해야 한다. 규제를 풀겠다면 안전과 공정의 빈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답해야 한다. 민생을 앞세운 포퓰리즘은 늘 선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국민이 어렵다. 소상공인이 힘들다. 청년이 지쳐 있다. 노후가 불안하다. 이 말들은 대체로 사실이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고통이 사실이라고 해서 모든 처방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이용해 재원 없는 약속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순간 민생은 다시 정치의 도구가 된다.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정확한 처방이다. 정책에는 순서가 있다. 물가가 다시 오르는 국면에서 무차별적 현금 살포는 소비 여력을 키우는 동시에 물가 압력을 높일 수 있다. 가계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대출 완화는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부동산 가격을 다시 자극할 수 있다. 재정 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감세와 지출 확대를 동시에 말하면 결국 국채 발행이나 다른 세목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정치가 이 연결고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책이 아니라 포장이다. 선거가 없는 시간은 정치권의 휴식기가 아니다. 책임을 미뤄둔 정책을 처리해야 할 시간이다. 선거를 앞두고는 표를 의식해 하기 어려운 말이 많다. 지원이 필요하지만 전 국민 지원은 맞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동산을 안정시켜야 하지만 대출 완화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기업을 살려야 하지만 안전 책임을 낮출 수는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선거가 끝난 지금이 그런 말을 해야 할 때다. 정치권은 경제를 지나치게 쉽게 설명하려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이유를 전 정부 탓이나 현 정부 탓으로만 돌리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물가는 국제 원자재와 환율, 유통 비용과 임금, 공공요금과 수요가 함께 움직인 결과다. 부동산은 금리와 공급, 세제와 심리, 지역 개발과 금융규제가 함께 만든 결과다. 가계부채는 주거비와 소득 정체, 금융 관행과 자산 가격 기대가 쌓인 결과다. 복잡한 문제를 한 줄 공약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은 편하지만 위험하다. 언론도 이 대목에서 책임이 있다. 선거 이후 정치권의 약속을 단순히 누가 더 많이 지원하느냐의 경쟁으로 중계해서는 안 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선심성 경쟁의 중계가 아니다. 약속의 가격표를 독자 앞에 펼쳐 보이는 일이다. 현금 지원을 말하면 대상과 재원을 물어야 한다. 감세를 말하면 세수 감소분을 물어야 한다. 대출 완화를 말하면 가계부채와 집값 영향을 물어야 한다. 규제 완화를 말하면 안전과 소비자 보호의 공백을 물어야 한다. 선거가 끝난 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승패 해설보다 약속의 검증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이중적인 얼굴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와 수출은 강하다. 그러나 내수와 체감경기는 여전히 무겁다. 성장률 전망에는 기대가 있지만 가계부채와 물가에는 부담이 있다. 증시는 웃지만 자영업자의 장부는 웃지 못할 수 있다. 이 간극을 외면한 채 경제 회복만 말하면 국민은 설득되지 않는다. 반대로 수출 호조와 산업 경쟁력의 기회를 외면한 채 위기만 말해도 균형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숫자를 있는 그대로 보고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포퓰리즘은 이 균형을 무너뜨린다.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명분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약속을 한다. 미래 부담을 말하지 않고 현재의 혜택만 강조한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흐리고 재정의 한계를 감춘다. 선거 때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집권 이후에는 숫자로 되돌아온다. 물가로 돌아오고 부채로 돌아오고 세금으로 돌아온다. 결국 국민이 계산서를 받는다. 정치권은 이제 더 솔직해져야 한다. 모든 부담을 줄이고 모든 지원을 늘리며 모든 규제를 풀고 모든 안전을 강화하겠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다.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 감세를 하면 세수가 줄고 지출을 늘리면 재정 부담이 커진다. 대출을 풀면 부채가 늘 수 있고 대출을 묶으면 실수요자의 고통이 커질 수 있다. 공급을 늘리려면 지역 반발과 인허가 문제를 넘어야 하고 안전을 강화하려면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정치는 이 불편한 사실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선거 이후 경제 현실이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지원은 더 정밀해야 한다. 감세는 더 신중해야 한다. 대출은 더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한다. 부동산 공급은 말이 아니라 실행 일정과 재원, 인허가 개선으로 보여줘야 한다. 규제개혁은 기업의 숨통을 틔우되 안전과 공정의 기준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거 이후 정책의 최소한이다. 경제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정부가 숫자를 속이지 않는다는 신뢰, 정치권이 재원 없는 약속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신뢰, 시장이 정책을 예측할 수 있다는 신뢰, 국민이 고통을 분담하더라도 그 부담이 공정하게 나뉜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포퓰리즘은 이 신뢰를 갉아먹는다. 달콤한 약속은 빠르게 퍼지지만 신뢰는 천천히 쌓인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더 많은 돈으로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선거는 끝났다. 이제 정치권은 약속의 가격을 말해야 한다. 민생을 돕겠다면 재원을 밝혀야 하고 부동산을 안정시키겠다면 대출과 공급의 부작용까지 설명해야 한다. 기업을 살리겠다면 안전과 책임의 기준도 함께 세워야 한다. 포퓰리즘은 선거에서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경제는 박수로 움직이지 않는다. 경제는 결국 숫자와 책임으로 돌아온다. 선거의 시간이 끝난 뒤 경제의 시간이 시작됐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다음 선거보다 더 중요하다.
2026-06-08 08: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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