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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오픈AI 협력, '칩 이후' 설계해야
[경제일보] 삼성전자와 오픈AI의 관계가 흥미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삼성은 오픈AI가 필요로 하는 첨단 반도체를 만들고, 동시에 오픈AI가 만든 인공지능을 회사 안에서 대규모로 사용한다. 한쪽에서는 공급자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객이다. 글로벌 AI 산업의 가치사슬이 얼마나 빠르게 뒤섞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오픈AI는 지난 9일 서울에서 삼성전자와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 협력이 진전되고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기술이나 생산 방식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전자 역시 고객 관련 사안이라며 세부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계기로 시작된 양사의 관계가 메모리 공급을 넘어 차세대 칩 연구·생산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오픈AI의 설명이다. 반대 방향의 거래도 이미 크게 열렸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국내 전 임직원과 전 세계 DX부문 직원에게 ChatGPT Enterprise와 Codex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픈AI는 이를 자사의 역대 최대 규모 기업 도입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연구개발과 제조, 소프트웨어 개발, 제품기획과 마케팅까지 사용 영역도 넓다. 한국 기업들의 AI 도입 속도는 더 가파르다. 오픈AI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국내 기업·기관의 ChatGPT Enterprise 이용자는 1년 전보다 약 28배 늘었다. 불과 1년 사이 생성형 AI가 일부 개발자의 실험도구에서 기업 업무의 기반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모두 반길 일이다. AI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삼성이라고 예외일 이유가 없다. 기업은 국적이 아니라 성능과 생산성을 보고 도구를 선택해야 한다. 오픈AI가 삼성의 반도체를 필요로 하듯 삼성도 오픈AI의 모델과 개발도구를 활용해 연구개발 속도를 높이고 업무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삼성은오픈AI에 무엇을 팔고, 오픈AI를 쓰면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남길 것인가." 이번 협력의 진짜 쟁점은 여기에 있다. 한국은 AI 시대의 핵심 생산국이다. 오픈AI와 삼성이 지난해 맺은 협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스타게이트에 필요한 첨단 메모리 공급을 확대하기로 했다. 오픈AI가 예상한 메모리 수요는 웨이퍼 투입량 기준 월 최대 90만장에 달한다. 삼성은 메모리뿐 아니라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종합 반도체 기업이기도 하다. AI 붐이 거세질수록 이런 생산능력의 가치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칩 공급자’라는 역할 자체를 낮춰 볼 이유는 없다. 세계가 원하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한국 산업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힘이다. AI 서버 한 대도 메모리와 반도체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서 가치사슬이 끝날 때다. 삼성이 첨단 칩을 공급하고 그 칩 위에서 돌아가는 AI 모델과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다시 해외 플랫폼에서 사오는 구조가 굳어질 경우 한국은 AI 시대에도 익숙한 위치에 머물 수 있다. 제조는 강하지만 플랫폼은 약하고, 부품은 팔지만 서비스를 사는 구조다. 반도체와 AI 소프트웨어의 사업 구조는 다르다. 반도체는 생산해 납품하면 매출이 발생한다. 기업용 AI는 고객의 업무 안으로 들어가 매일 사용된다. 개발자가 코드를 짜고 연구원이 자료를 분석하며 생산현장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플랫폼은 업무 방식 자체의 일부가 된다. 사용이 늘수록 생태계와 개발 경험, 서비스 매출이 함께 쌓인다. 때문에 AI 플랫폼 기업들은 오히려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오픈AI는 모델 개발에 머물지 않고 브로드컴과 자체 AI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9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오픈AI는 직접 개발한 AI 모델을 자체 칩 설계에도 활용했고 이미 테이프아웃 단계까지 진행했다. 소프트웨어 기업이 칩이라는 하드웨어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삼성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픈AI가 모델에서 칩으로 내려오고 있다면 삼성은 칩에서 AI로 올라가야 한다. 이 말은 삼성이 오픈AI와 경쟁할 범용 초거대 모델을 당장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이미 앞서 있는 글로벌 플랫폼을 그대로 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더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오픈AI의 AI를 삼성 내부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삼성만이 가질 수 있는 AI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다. 반도체 공정을 예로 들어보자. 수율이 왜 떨어지는지, 어느 장비에서 어떤 이상이 발생하는지, 공정조건을 어떻게 바꾸면 불량률이 낮아지는지에 대한 경험은 삼성의 생산현장에 있다. 수십 년간 축적한 제조 노하우는 범용 AI 기업이 돈을 주고도 단숨에 얻기 어려운 자산이다. ChatGPT와 Codex를 활용해 엔지니어의 일을 빠르게 만드는 것은 첫 단계다. 그 다음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삼성의 공정지식과 엔지니어링 경험을 AI 기술로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생산 최적화와 반도체 설계, 품질관리와 장비 유지보수에 특화된 AI 역량이 삼성 내부에 남아야 한다. 그래야 AI 사용료가 비용으로 끝나지 않고 경쟁력으로 전환된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삼성SDS와 오픈AI가 맺은 협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삼성SDS는 스타게이트 AI 데이터센터의 설계·구축·운영뿐 아니라 오픈AI 모델을 기업 업무에 도입하려는 고객을 대상으로 컨설팅과 구축·운영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삼성이 단순히 오픈AI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용 AI 사업에 참여할 통로도 이미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 방향을 더 키워야 한다. 삼성·오픈AI 협력의 성적표가 ‘삼성이 HBM을 얼마나 팔았는가’와 ‘삼성 직원이 ChatGPT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라는 두 숫자로만 남아서는 부족하다. 차세대 칩을 함께 연구하면서 어떤 설계 역량을 쌓았는지, AI를 제조현장에 적용하면서 어떤 독자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삼성SDS가 기업용 AI 시장에서 얼마나 새로운 사업을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외부 기술의 활용과 내부 역량의 축적이 함께 가야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노붐 오르가눔’에서 ‘지식과 인간의 힘은 서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원인을 알지 못하면 원하는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네 세기가 지난 AI 시대에도 산업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그 기술을 이해하고 자기 능력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픈AI의 뛰어난 AI를 쓰는 것은 경쟁력이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 외부 AI 없이는 핵심 업무를 개선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기술과 사람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의존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글로벌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데이터와 업무지식,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쌓는다면 협력은 산업 역량을 키우는 지렛대가 된다. 때문에 삼성·오픈AI 관계를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느냐’는 식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이 기회다. 오픈AI에는 삼성의 메모리와 반도체 제조능력이 필요하다. 삼성에는 최전선 AI 모델과 개발도구가 필요하다. 서로 필요한 것이 분명할 때 협상력도 생긴다. 중요한 것은 이 교환의 끝이다. 칩을 팔아 매출을 얻고 AI를 사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까지는 좋은 거래다. 하지만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은 그 거래가 끝난 뒤 무엇이 남았는지에 달려 있다. "삼성 내부에 AI를 이해하고 설계할 사람이 남았는가.", "제조 노하우가 독자적인 AI 역량으로 바뀌었는가.", "오픈AI와 함께 만든 경험이 삼성의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로 이어졌는가." 이 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국내 ChatGPT Enterprise 이용자가 1년 만에 28배 늘었다는 숫자도 같은 의미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이 AI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빨리 늘어나는 것과 AI 산업이 빨리 성장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AI를 많이 쓰는 나라와 AI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파는 나라는 다르다. 한국이 후자로 가려면 삼성 같은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계적인 제조기업이 글로벌 AI를 가장 빨리 도입하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다시 제조 AI와 기업용 서비스로 만들어낸다면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강점을 AI 산업의 경쟁력으로 연결할 수 있다. 삼성과 오픈AI의 협력 확대를 반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픈AI가 삼성의 칩을 더 많이 사는 것도 중요하다. 삼성 직원이 오픈AI의 AI를 더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협력의 궁극적인 성적표는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삼성이 칩을 팔고 AI를 사는 동안, 삼성과 한국에 어떤 AI 기술과 사업이 새로 남았는가. 공급자와 고객 사이에는 아직 넓은 공간이 있다. 삼성·오픈AI 협력이 그 공간을 한국의 기술과 사람, 서비스로 채우는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좋은 기술협력은 많이 사고 많이 파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거래가 끝난 뒤 서로에게 없던 능력이 남을 때 비로소 전략적 협력이 된다.
2026-09-10 09: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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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자 넘어 글로벌 AI 고객으로…SKT, AIDC로 성장판 넓힌다
[경제일보] SK텔레콤이 AI 데이터센터(AIDC)를 통해 성장의 무대를 넓히고 있다. 국내 가입자에게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던 사업에서 글로벌 빅테크와 AI 기업에 연산 인프라를 공급하는 사업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내에 구축한 데이터센터로 세계 AI 수요를 끌어들이는 것이 출발점이다. SKT는 2029년부터 5GW(기가와트) 규모를 단계적으로 가동하고, 시장 수요와 전력·부지 확보 여건에 맞춰 2035년 최대 15GW까지 확대하는 장기 계획을 제시했다. 한꺼번에 대규모 시설을 짓는 것이 아니라 울산을 시작으로 수요가 확인되는 지역에 전력과 부지를 확보하고 거점을 순차적으로 확대하도록 짜인 로드맵이다.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은 이 계획을 사업으로 옮기는 기반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SK그룹과 15년 전략협력을 바탕으로 울산에 AI 존(AI 연산용 클라우드 인프라)을 구축한다. 2027년 첫 가동이 목표다. SK가 건설을 주도하고 AWS가 AI 존을 독립 운영한다. 엔비디아와는 국내에 최대 2GW 규모 AI 팩토리 구축을 위한 차세대 GPU(그래픽처리장치) 도입과 투자 협력을 추진한다. 앤트로픽과는 국내 GW급 AIDC 구축 협력, 오픈AI와는 서남권 전용 데이터센터 공동 구축을 논의하고 있다. 대규모 시설을 장기간 이용할 고객을 확보하면 향후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자금을 조달하기가 수월해진다. SKT도 자체 투자와 전략적 파트너 투자, 고객 장기계약, 프로젝트금융을 함께 활용할 계획이다. 프로젝트금융은 사업의 미래 수입을 토대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실행 조직은 기존 시설 운영과 신규 개발로 나눴다. SK브로드밴드에서 분할할 SK호라이즌은 내년 1분기 설립이 목표다.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 8개와 울산·구로 등 건설 중 시설을 포함한 318MW(메가와트) 규모 인프라 확장을 맡는다. SKT는 SK호라이즌에 대해 KKR·IMM인베스트먼트-스톤브릿지 컨소시엄과 3조800억원 규모 투자 본계약을 체결했다. 단계적 투자 완료 후에도 51% 지분으로 경영권을 갖는다. 별도 사업개발회사 SK하이퍼에는 2030년까지 7500억원을 출자해 부지·변전소 확보와 고객 유치, 사업화를 맡긴다. 이렇게 확보한 시설을 글로벌 고객의 장기 수요로 채울 수 있다면 SKT의 성장 기반도 달라진다. 통신 매출은 국내 가입자 수와 요금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AIDC는 세계 AI 기업의 연산 수요를 국내 사업으로 가져올 수 있다. 고객이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서비스를 확대할 때 필요한 컴퓨팅 용량을 공급하면서 반복 매출을 쌓는 방식이다. 그룹 안에서는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메모리)이 비교 대상이다. 하이닉스가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성장했듯 SKT는 전력과 데이터센터, GPU·통신망을 묶은 인프라로 글로벌 사업 기반을 넓히려 한다. 반도체에 연산 인프라가 더해지면 SK그룹이 세계 AI 시장에서 얻는 수익원도 다양해질 수 있다. 앞으로 확인할 성과는 해외 고객과 계약한 용량, 실제 가동률, 투자금을 회수하며 남기는 이익이다. 울산에서 시작한 협력이 다른 거점의 장기계약으로 이어질수록 AIDC의 사업성도 선명해진다. 국내 통신 1위의 운영 경험을 글로벌 AI 기업의 반복 수요로 연결하는 것, SKT가 데이터센터를 통해 만들려는 다음세대의 성장의 모습이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10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2026-09-10 07: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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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은행 자문에서 국내 최대 로펌까지…김앤장 53년
[경제일보] 김앤장은 법정이 아니라 기업의 계약서에서 출발했다. 1973년 김영무·장수길 변호사가 문을 연 김·장 법률사무소의 초기 고객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이었다. 국내 은행과 기업이 해외에서 자금을 빌릴 때 계약서를 검토하고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를 자문했다. 변호사의 주된 무대가 법정이던 시절, 김앤장은 기업의 거래 현장으로 먼저 들어갔다. 53년이 지난 지금 김앤장은 국내 최대 로펌이다. 변호사만 1400명이 넘고 변호사를 포함한 법률전문가는 2000명을 웃돈다. 2025년 매출은 업계에서 1조6000억~1조7000억원 수준으로 추산한다. 2위권 대형 로펌과도 상당한 격차를 두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김앤장보다 먼저 기업법무 시장에 자리 잡은 법률사무소도 있었다. 김앤장이 선두로 치고 올라온 과정에는 한국 기업이 다음에 필요로 할 법률서비스를 먼저 준비하는 방식이 있었다. ◆ 판·검사 대신 기업법무 택한 김영무 창업자 김영무 변호사의 이력부터 당시 법조계의 통상적인 경로와 달랐다. 1964년 제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았다. 서울대 사법대학원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비교법을 공부했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J.D.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는 미국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은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며 빠르게 성장했다. 차관을 들여오고 외국 회사와 합작법인을 세우면서 계약도 복잡해졌다. 국내법뿐 아니라 외국법과 국제거래에 익숙한 변호사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김영무 변호사는 이 시장을 파고들었다. 법정에서 이미 벌어진 분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기업이 거래를 하기 전 계약을 짜고 위험을 줄이는 업무에 무게를 뒀다. 지금은 흔한 기업법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장수길 변호사의 합류는 김앤장의 빈 곳을 채웠다. 장 변호사는 고등고시를 거쳐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원 판사를 지냈다. 김영무 변호사가 국제거래와 기업자문을 맡았다면 장 변호사는 송무와 중재, 지식재산권을 담당했다. 김앤장이라는 이름은 두 사람의 성에서 따왔다. ◆ 기업이 해외로 나가자 로펌도 따라갔다 김앤장의 성장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궤를 같이했다. 1970~1980년대 해외 차관과 외국인 투자가 늘면서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가 커졌다. 기업들이 합작회사를 만들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김앤장이 일찍 쌓은 국제거래 경험을 찾는 기업도 늘었다. 1976년 합류한 정계성 변호사는 금융 분야를 맡았다. 공기업과 기업의 해외 차입, 국제자본시장 업무를 담당했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 기업의 외자유치와 금융거래를 자문했다. 1980년 입사한 정경택 변호사는 외국인 투자와 M&A, 공정거래 분야를 키웠다. 1983년 GM과 대우자동차의 합작투자, 1991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쌍용정유 지분 인수, 1997년 미국 P&G의 쌍용제지 인수 등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굵직한 거래에 참여했다. 기업의 거래 방식이 바뀔 때마다 김앤장의 조직도 달라졌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자 금융 전문가가 늘었고 외국 기업의 국내 진출이 많아지자 외국인투자 분야를 키웠다. M&A가 활발해지자 기업거래 변호사를 늘렸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화되자 경쟁법 전문가를 붙였다. 김앤장이 몸집을 키운 과정은 변호사를 무작정 늘린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시장이 먼저 움직였고 그 시장에 맞춰 사람을 채웠다. ◆ 유명 변호사 한 명보다 팀으로 승부 김앤장의 또 다른 특징은 사건을 맡는 방식이다. 대형 사건을 이름난 변호사 한 명에게 맡기기보다 사건 성격에 따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한 팀으로 묶는다. M&A 사건이라면 기업법무 변호사뿐 아니라 공정거래와 금융, 조세, 노무 전문가가 함께 들어간다. 규제가 걸린 산업에서는 해당 부처나 감독기관을 경험한 전문가도 참여한다. 현재 김앤장 공정거래 분야에는 국내외 변호사와 경제학자, 산업 전문가, 전직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 등 150명 넘는 전문인력이 참여하고 있다. 자본시장 분야에도 80명 이상의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기업 입장에서 대형 로펌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천억원, 수조원이 오가는 거래나 회사의 존립이 걸린 사건에서는 법률 하나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정거래와 세금, 노동, 인허가 문제가 동시에 터진다. 김앤장은 이를 한 조직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만들어왔다. 젊은 변호사를 키우는 방식에도 일찍부터 해외 경험을 넣었다. 파트너와 후배 변호사가 함께 사건을 맡게 하고 해외 로펌 연수도 활용했다. 정계성 대표도 1982~1983년 미국 뉴욕 셔먼앤드스털링에서 실무를 익혔다. 사건을 맡아 경험을 쌓고 해외에서 새로운 거래 방식을 익힌 변호사들이 돌아와 다시 큰 사건을 맡았다. 이 과정이 수십 년 반복되면서 분야별 전문인력이 쌓였다. ◆ 외환위기, 김앤장이 한 단계 커진 시기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의 지형을 뒤흔들었다. 기업들이 자산을 팔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외자유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해외 자본과 국내 기업 사이에서 거래 조건을 만들고 정부 규제를 검토할 법률전문가의 역할도 커졌다. 김앤장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국제금융과 외국인투자 업무를 다뤄왔다. 국내 기업들이 급하게 해외 자본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이미 관련 업무를 해본 변호사들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M&A 시장이 커지면서 김앤장의 업무도 금융과 외국인투자에서 M&A, 공정거래, 조세, 구조조정으로 빠르게 넓어졌다. 김앤장 연혁에는 이 무렵 국내 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변호사 수가 100명을 넘어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형 거래를 맡으면서 경험이 쌓였고 그 경험을 보고 또 다른 기업이 찾아왔다. 새로운 사건이 들어오면 다시 전문인력을 늘렸다. 김앤장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기업법무 시장의 선두로 올라선 배경이다. ◆ 계약서에서 시작해 기업 형사사건까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김앤장이 맡는 사건의 규모는 달라졌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과정에서는 14개국 경쟁당국의 기업결합 심사가 필요했다. 김앤장은 4년여에 걸친 기업결합 심사와 항공 관련 인허가 자문에 참여했다.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와 삼성바이오로직스 인적분할, 한앤컴퍼니의 SK스페셜티 인수 등 조 단위 거래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6년 상반기 국내 M&A 법률자문 시장에서는 자문금액 26조3406억원, 68건으로 1위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 시장점유율은 33.27%였다. 기업자문에서 출발했지만 송무와 기업형사 분야에서도 대형 사건을 맡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형사재판에 참여해 1·2·3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SK실트론 사건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 처분을 취소하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승소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글과 메타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상대로 낸 과징금 취소소송에서는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를 검토하던 법률사무소의 업무는 이제 M&A와 공정거래, 국제중재, 개인정보, 기업형사로 넓어졌다. 기업이 겪는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로펌이 다루는 영역도 함께 넓어진 것이다. ◆ 커진 영향력, 커진 감시 국내 최대 로펌이라는 자리는 사건만 많이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나 기업인이 정부 조사와 형사사건에 직면하면 김앤장을 찾는 경우가 많다. 법원과 검찰, 정부 부처와 규제기관 출신 전문가도 적지 않다. 김앤장의 사건 대응력이 높아지는 만큼 전관과 이해충돌을 둘러싼 논란도 따라붙는다. 2025년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의 외부인 접촉 보고 가운데 김앤장 관련 보고는 로펌 중 가장 많은 363건이었다. 접촉 보고는 사건 관계인과의 만남 자체를 기록하는 제도여서 이 숫자가 곧 부적절한 접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규제기관 출신 인력을 대거 보유한 로펌이 해당 기관의 규제를 받는 기업을 대리하는 문제는 늘 감시 대상이 된다. 김앤장이 커질수록 사건 수임 못지않게 이해충돌 관리와 전관 논란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중요해졌다. 고객 평가 역시 전문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경제와 한국사내변호사회가 실시한 2025년 조사에서 김앤장은 종합평가와 전문성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서비스 평가는 3위였고 소송비용의 합리성은 6위였다. 복잡한 사건에 여러 분야의 전문인력을 투입하는 방식은 강점이지만 비용이 높다는 평가도 피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규모가 항상 고객 만족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 시장이 열리기 전에 사람을 준비했다 김앤장의 53년을 보면 몇 번의 중요한 갈림길이 있었다. 기업이 해외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할 때 국제금융을 키웠고 외국 자본이 국내로 들어올 때 외국인투자 업무를 늘렸다. 기업 인수·합병이 본격화되기 전에 M&A 전문가를 확보했고 공정거래 규제가 강해지자 경쟁법 인력을 늘렸다. 지금은 AI와 데이터, 공급망, 경제안보, 글로벌 통상, 기업지배구조가 기업법무의 새로운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앤장도 이 분야에 전문조직과 인력을 늘리고 있다. 김앤장이 53년 동안 한 선택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복잡하지 않다. 기업이 법률 문제에 부딪힌 뒤 변호사를 찾았다면 김앤장은 그보다 먼저 그 문제를 다룰 사람을 준비했다. 1973년 외국계 은행의 계약서에서 시작한 김앤장이 국내 최대 로펌으로 성장한 데에는 그 시간차가 있었다.
2026-09-08 0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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